언어적 갈등과 지역주민의 의식은 문제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페인의 3대 민족언어이자 공통공용어(lenguas cooficiales)인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의 과거와 현재, 공용어인 카스티야어와의 사회언어학적인 역학관계, 자치주 정부의 언어정책과 교육정책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성 표출을 위한 1차 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가 국가로서의 스페인의 존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민주화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어정책의 변화가 공용어인 카스티야어와 국가로서의 스페인에 어떤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자치주 정부의 언어정책이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등 자치주의 지역적 특성을 어떻게 형성, 반영하였는지 살펴보고, 현재적인 시각에서 민주화와 더불어 발생한 자치주와 그 지역 고유어들의 위상변화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또한 각 언어들의 규범화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정치적 부침(浮沈)이 언어적 대립양상에 미치는 영향에 새롭게 다가가고자 하며, 이를 통해 지역어와 정치의 상관관계, 언어가 주민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망해보도록 하겠다.
I. 이베리아반도 제 지역어의 언어지도
1.1. 역사적인 이유
역사상 제 지역의 자치권이 컸던 시기는 권력이 카스티야 왕국에 집중되기 전인 16-7세기였고, 18세기초에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들어오면서 과거의 권리들을 점점 더 상실하였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의 도입과 더불어 국가 단위로서의 스페인뿐만 아니라 각 지역들에서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아울러 지역고유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이후, 공화국 정부(1931-1939)는 제 지역어의 사용을 인정하였으나, 프랑코의 독재기간 동안(1939-1975)은 제 지역어의 공적인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시기보다 혹독한 억압이 이루어져 제 지역어의 화자수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급감했을 정도이다.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 민주화시기를 거치면서 카스티야어 이외의 지역어와 지역 자치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대두되었다. 1978년 스페인 헌법은 스페인 사회와 언어의 복수성을 존중한다고 명시하면서, 갈리시아, 바스크,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역 고유어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못박았다. 제 지역어는 교육기관과 방송매체에서 활발히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용 언어를 선택할 수 있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부모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지역어들의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좋은 지표라고 판단된다.
1.2. 스페인 헌법과 제 지역어의 규범화
1.2.1. 헌법이 보장한 권리
프랑코 독재가 40년 동안 하나의 스페인, 하나의 언어를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정책과 노력은 결론적으로 당초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고, 그래서 민주화 시기를 거치는 동안 헌법이라는 장치가 등장하였다. 1978년 공포된 헌법은 스페인 헌법사 최초로 스페인의 언어적 복수성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공통공용어의 보호와 장려는 자치주 및 스페인의 몫이라고 밝혔다. 스페인 헌법은 제3항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1. 카스티야어는 스페인의 국가적 공용어이다. 전 스페인 국민은 그것을 알아야하는 의무와 사용할 권리를 지닌다.
2. 스페인의 기타 언어들 또한 법령에 근거하여 각 자치주의 공용어가 된다.
3. 스페인의 다양한 언어 양상의 풍요로움은 특별한 존중과 보호의 대상이 되는 문화 유산이다.
1.2.2. 제 지역어의 규범화와 사회언어학적 상황
2. 언어 다양성 장려정책: 중앙정부와 각 자치주의 언어정책
2.1. 언어상용화법(Ley de Normalización Lingüística)
스페인이 ‘언어정책’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은 불과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언어를 선택, 사용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용어인 카스티야어와의 공존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역고유어는 가정이나 일부 제한된 상황에서 사용하고, 사회적인 권위가 인정되던 카스티야어는 대외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언어는 자치주의 행정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민족성이 부각되고 민족주의의 개념이 싹트던 20세기초에 ‘하나됨’을 요구하던 프랑코의 독재시기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정치적인 필요성에서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각 자치주는 적극적인 언어정책의 실행으로 지역어의 보호와 활성화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를 위하여 각 주 의회는 1982-1986년에 ‘언어상용화법’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각 법령에 지역어를 ‘고유어(lengua propia)’라고 명시하고 공통공용어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는 공용어나 공통공용어로 쓰여진 문서들이 법률상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은 소수의 인구가 사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약자의 위치에 놓인 자치주 지역고유어를 문화유산의 일부로서 보호한다는 명백한 취지가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스페인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내나 국외에서 언어상의 문제로 공용어인 카스티야어가 보장하는 의사소통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2.2. 언어정책의 실행과 각 자치주 상황
2.2.1. 카탈루냐
카탈루냐는 전통적으로 제조업과 금융업이 강세를 보인 지역으로 일찍이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독립의 열망을 표출했다. 이런 까닭으로 사회 중상위 계층이 지역자치어를 항상 사용함으로써 갈리시아나 바스크와는 차별적인 양상을 보인다. 현재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지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주정부가 다방면으로 펼치는 구체적인 언어정책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카탈루냐어 장려정책은 자치주 정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때로는 카스티야어 차별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카탈루냐어 사용을 사회 전반으로 좀 더 확산시키기 위해 더욱 강력한 수단이 강구되기도 한다. 여러 자치주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실행될 뿐만 아니라 주민 정서에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2.2.2. 바스크
바스크어는 카탈루냐어와 달리 문학어로서의 전통이 없고, 프랑코 압제에 대한 투쟁이나 정치적인 도구로서 존재했었으므로 그 발전이나 정착과정이 다른 언어와 매우 다르다. 비록 교육기관에서 바스크어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퇴보한 언어형태로 혹은 산간지방의 방언정도로 간주하는 다수의 이민자들과 ETA로 인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바스크어의 학습과 신조어의 탄생을 방해하는 요소 또한 적지 않다. 자치주에서조차도 바스크어 사용이 정체되어 있던 시간이 길었고 언어자체도 학문적인 비교의 대상이나 친족어를 찾지 못하는 특수한 형태라는 사실이 그 중 하나이다. 기존의 카스티야어 화자가 갈리시아어나 카탈루냐어를 새로 습득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지만 바스크어를 새로 배우기 위해서는 훨씬 긴 시간과 열의가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바스크어 사용 인구의 증가를 방해하는 다른 이유는 초창기에 바스크어 사용인구가 비교적 소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언어정책의 기본적인 목적은 바스크어를 교육제도에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화자의 수를 증가하는데 있었다. 이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재 바스크 자치주의 적극적인 언어정책의 결과로 바스크어 이해 정도와 사용범위는 눈에 띌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2.2.3. 갈리시아
약 2백50만 이상의 갈리시아어 화자들이 존재하고 절대 다수가 이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갈리시아는 전통적으로 농업이나 어업, 광업 등의 1차 산업에 종사했던 농촌․산간지역이며 타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탓에 지역고유어에 대한 의식이 아직도 카스티야어에 미치지 못하여 공공기관에서는 여전히 카스티야어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 상위계층, 특히 도시에서는 가정 내에서도 카스티야어가 사용될 정도이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그 인식변화가 시급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는 제조업과 기타 산업 위주로 사회가 형성된 카탈루냐와 큰 대조를 이룬다.
갈리시아어의 규범화와 관련하여 사실상 갈리시아 정부는 초기에 언어정책에 대해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지역어를 수호하고자 앞장섰던 민간인들도 포르투갈어와의 상관성 논쟁에만 집중했다. 그렇지만 곧 갈리시아 정부는 확고한 갈리시아어 장려책을 제시하고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카탈루냐와 똑같이 의회와 주 정부의 행정기관에서 갈리시아어만을 사용하거나 최소한 이중언어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리시아가 규범형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특히 정자법의 경우 결정적으로 언어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이는 또한 갈리시아어 교육과 상용화 작업에 부정적인 영향 요소로 작용해 전반적인 갈리시아어의 회복 과정을 더디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2.3. 교육제도
언어 정책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히 교육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육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개인의 미래와 사회 공헌을 보장하는 직업선택과 사회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교육 정책이 중앙정부와 자치주 정부의 정치적 비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화이후 사회주의 성향→보수 정당→사회주의 성향으로 집권 정당이 바뀐 중앙정부의 정책 방향은 당연히 자치주의 교육제도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정당과 정책적인 동반자관계인 사회주의 성향의 현 중앙정부는 카탈루냐를 비롯한 이중언어사용 자치주의 언어정책에 우호적인 반면, 이전 집권당이었던 보수 정당은 완벽한 이중언어 사용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유럽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시각에서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스페인 각 자치주의 교육제도를 살펴보면서 언어정책에 따른 각 자치주간의 차이와 특징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2.4. 지역어의 이해와 사용 실태
언어사용능력과 사용실태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1981년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이후 매 5년마다 인구조사와 함께 철저하게 실행되고 있다. 갈리시아에서는 1991년에 4만 여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설문조사가 이루어졌고, 바스크에서도 마찬가지로 1991년 이후 매 5년마다 실시된다. 이들 자치주들은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사회언어학적인 조사를 진행하지만, 설문의 결과를 비교 분석하는데 큰 차이를 보인다.
능력별 구분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평균
모름
6.4
43.4
1.3
17.03
듣기 가능
17.0
3.8
7.6
9.47
듣기, 읽기 가능
7.5
0.9
1.3
3.23
듣기, 말하기 가능
3.6
4.6
23.9
10.7
듣기, 말하기, 읽기 가능
16.7
1.4
9.9
9.33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가능
48.9
45.8
56.0
50.23
자치주별 공통공용어 언어능력별 비율 (2001년)
위 표는 헌법이 각 지역어의 존재를 인정한 후 이 언어들에 대한 이해가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공통공용어 사용 지역 중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주민 50%가 지역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반면, 17%는 완벽한 카스티야어 화자들임이 잘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카탈루냐어는 교육제도, 행정기관, 대중매체, 사회 생활에서의 활용과 정치적 인 뒷받침으로 공용어인 카스티야어와 완벽한 이중언어의 관계를 성립했다.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이민자의 대량 유입을 고려할 때, 카탈루냐어는 적지 않은 인구의 모국어가 아닌 셈이지만 이제 이들 중 다수가 카탈루냐어를 이해하고 구사하게 되었다. 한편, 갈리시아는 이민자의 유입이 없어서 지역고유어를 모국어로 하는 자치주 주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지만 사회적 권위는 가장 낮아서 그 사용은 농촌지역이나 가난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계에 나타나듯이 갈리시아어의 사회적 재평가는 역력해 보인다. 반면, 여러 가지 통계로 미루어볼 때 지역고유어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비교적 낮은 곳이 바스크 자치주이다. 바스크어 사용 지역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스크 자치주 내에서도 수백 년 전부터 바스크어를 사용하지 않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스크어는 다른 지역어와 달리 카스티야어와 언어학적으로 전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여러 원인이 바스크어의 확산과 화자의 증가를 방해하고 있지만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다.
2.5. 스페인 제 언어들의 현재와 미래
공통공용어를 선택하고 있는 자치주가 스페인어(카스티야어)에 보이는 반응은 한마디로 적대적이다. 비록 크게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지역어에 호의적이면 호의적일수록 카스티야어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이다. 지역고유어에 대한 사랑이 스페인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공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카스티야어에 대해 가장 큰 반감을 보이고 있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에서는 타 지역 이민자들을 각각 charnego와 maketo로 지칭하는 것으로 전반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게끔 한다. 경시(輕視)적인 뉘앙스의 이 어휘들의 어원은 카탈루냐의 경우, 이민자들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낮은 데서 기인했고, 바스크에서는 정치․이데올로기적인 원인에서 출발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반면, 공통공용어나 기타 방언들에 대한 카스티야어 화자들의 시각은 특이하게도 세대별 차이를 보여, 연장자들이 이중언어사용 자치주들을 카스티야어와 동일한 공간에 속한 개념으로 인식한 반면, 젊은이들은 카스티야어 사용지역과 이중언어사용 지역간의 간격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마드리드로 대변되는 카스티야어 화자들과 지역고유어 사용지역 주민간의 심리적 거리감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2004년에 다시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스페인 중앙정부는 자치주의 권한 확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러 자료와 통계로 볼 때, 최소한 스페인의 공통공용어로 채택된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는 주 정부의 적극적이고 세심한 언어정책과 언어를 문화유산으로 간주하는 변화된 의식덕분에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추세이며, 세계 3대 언어 중 하나인 스페인어는 이들에게 있어 강제성을 띄지 않아도 습득할 수밖에 없는 공용어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공용어와 지역고유어간의 알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러 상황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역사, 정치 같은 집단적인 원인보다는 출산률의 정체나 하강, 빠르게 확산되는 도시화, 쉽고 빨라진 지역간 이동, 다양하고 광범위해진 대중매체 등,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이며 개인적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밖에, 고른 언어습득을 가능하게 만든 일반화된 무상교육, 이중언어사용자가 아닌 영어를 포함한 삼중언어사용을 요구하는 글로벌 시대의 도래,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진 영어의 영향,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범람, 더욱 많고 다양해진 외국인 관광객과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중남미출신 이민자들 등, 앞으로 스페인 제 지역어들의 연구에 있어 고려해야하는 조건들은 수적으로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상관성도 매우 복잡해졌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II. 결론
스페인의 다양한 언어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법적 토대와 ‘언어상용화법’이 제시하는 장치들, 그 적용 형태 등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목적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맥락과 변화의 추이 또한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까지도 카탈루냐의 주민 대부분은 카탈루냐어가 모국어였지만 특정 기관과 특정 상황, 특정 사람들과 사용하기 위해 공용어인 카스티야어도 학교에서 습득하였다. 카탈루냐어는 사적인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였던 셈이다.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당시의 사회는 고정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반세기만에 이 상황은 급변하여 오늘날의 카탈루냐 주민들은 빈번하게 자신들의 지역 밖으로 벗어나는 동시에 카탈루냐는 카탈루냐어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의 물리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각종 방송매체도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이런 매체들의 대부분은 카탈루냐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카스티야어의 비중이 큰 것은 국가를 대표하는 언어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전파력을 보장하는 국제적인 언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상황은 바스크와 갈리시아에서도 반복된다. 다만 바스크에서 바스크어 화자의 수는 아직까지 소수이다. 다양한 캠페인과 정책의 효과로 카스티야어 사용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많은 사람들이 이후에 바스크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제1언어로 선택하고 바스크어로 그들과 대화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바스크어를 구사하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제1언어를 바꾸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크어를 자치주 주민 다수의 언어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턱없이 부족한 수치일 뿐이다.
자치주 지역어를 각 지역의 대표언어이자 권위를 갖춘 언어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자주권과 적절한 언어정책이면 충분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어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지리라는 전망 또한 터무니없다. 공용어인 카스티야어와의 적절한 공존 방안을 강구하고 공동체에게 언어를 지키려는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또한 영어가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제 지역어 내부의 문제로도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는 이들 여러 언어들간의 상관관계와 중남미,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언어적 영향까지 고려한 좀 더 다각적이고 광범위한 방향으로 발전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