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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48
759독, 증(證) - 다섯 번째
봄이 왔습니다. 활기찬 나날 되시기를 빕니다. 본격적으로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까지 하루 한 번 「정신게」를 읽거나 외우신 분들은 모두 759독을 하셨습니다. ‘증명할 증(證)’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미 배운 내용들은 쉽게 그 의미가 떠오를 것입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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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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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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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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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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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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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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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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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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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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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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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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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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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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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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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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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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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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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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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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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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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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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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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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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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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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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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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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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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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교행신증』 제2권)
8번의 ‘증명할 증’ 중에서 오늘은 그 다섯 번째 도작(道綽, 562-645)스님 찬탄에 나오는 ‘도작결성증도난증’이라는 구절에 대해서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 구절이 들어가는 게송을 다시 제시합니다.
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도작스님 찬탄은 2송입니다만, 그 첫 번째 송입니다. 다시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구는 도작스님이 정토불교의 교판(敎判, 다른 경전이나 불교사상을 평가하는 작업) 하나를 제시하였다는 점에 초점을 두었고, 3-4구는 도작스님이 타력의 칭명염불을 권진(勸進)하셨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찬탄하였습니다.
이 중에 오늘은 제1-2구에 대해서만 집중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편지 제4권 15, 聖 - 두 번째」와 「편지 제4권 25, 土 - 세 번째」에서였습니다. 특히 「편지 제4권 25」는 매우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오타니(大谷)대학의 콘웨이 선생님 이야기까지 소개했지요. 콘웨이 선생님은 도작스님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분입니다만, 도작스님의 교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언급을 해주셨습니다. 2018년 봄, 교토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의 교행신증 강의에 처음으로 참석한 날, 그런 말씀을 들어서 신선했고 충격적이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꼭 그 편지를 찾아서 복습해 주시길 빕니다.
다시 도작스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새롭게 스님의 저서 안락집(安樂集) 상, 하 2권을 정독했습니다.
한 마디로 안락집을 정의한다면, 정토불교의 총론(總論)입니다. 정토불교에서, 혹은 정토불교를 둘러싸고 왈가왈부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 당시에 이미 논의되고 있는 모든 어젠다(화두)나 주제에 대해서 다 모아서 다 논의하고 대답하려는 책입니다. 정토신앙 주제의 종합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량도 상하, 2권 분량입니다. 그런 만큼 이 책을 읽으면 상당 부분, 정토불교에 대한 의혹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이 책을 읽고나면, 아마도 이 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집필된 것으로 생각되는 원신(겐신, 源信)의 왕생요집은 쉽게 읽힐 것으로 봅니다.
다만, 읽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구성이 복잡하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할 정도로 졸가리를 잡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큰 불만은, 왜 장(章)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체 12장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각 장은 몇 가지 절(節)로 이루어져 있겠지요. 절의 제목은 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절을 포괄할 때 장이 성립되는 데, 장 제목이 있어야 각 절에서 논의하는 바가 결국은 장 제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졸가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안락집에서는 ‘장’을 ‘대문(大門)’이라 하고, ‘절’을 ‘료간(料簡)’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갑갑할 때가 많고, 각 장에 대한 설명도 차례대로 안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고 합니다. 조직적인 면에서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 가재(迦才)스님이 정토론이라는 책을 3권 분량으로 씁니다만, 그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근래에 도작선사가 안락집이라는 책을 한 권 찬술하였는데, 비록 널리 많은 경전을 인용하면서 그 도리를 간략히 서술하고는 있으나, 그 문장과 뜻이 뒤섞이 고(參雜) 장(章)과 품(品)이 혼돈(混淆)스러워서, 뒷날 그 책을 읽는 자로 하여금 또한 (그 의미 파악을) 주저하면서 결정내리지 못하게 한다. 이에 이제 많은 책들 을 검토(搜檢)하고 도리를 갖추어 인용하여 9장을 이루어서, 문장과 뜻이 구분되 고 품(品)과 목(目)이 그 자리를 다르게 하여, 열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연히 손바닥 속에 있는 것과 같이 하였다.(대정장 47, 83쪽)
옛사람도 그러할진대 요즘 우리가 어찌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콘웨이 선생님처럼, 안락집을 연구해서 논문을 쓰신 분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였습니다.
그러한 안락집에서 「정신게」의 구절 ‘도작결성도난증, 유명정토가통입’의 뿌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제3대문의 제3번째 료간에 나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편지 제4권 25」에서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부분은 바로 호넨스님께서 선택본원염불집의 제1장에 인용한 바 있습니다. 「도작선사가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문을 세워놓고, 성도문은 버리고 정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 글」이라는 것이 그 제1장의 제목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편지 제4권 25」에 자세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가재스님이 지적한 대로, 도작스님의 안락집의 구성이나 내용 조직이 어지럽다 보니 생긴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1대문의 첫 번째 료간, 즉 제1장 제1절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도작스님의 교판이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절의 소제목은 「(정토)교가 일어나는 까닭을 밝혀서 때에 입각하고 근기에 따라서 정토(불교)로 귀의하도록 권유하다」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약 가르침이 시대와 근기에 맞는다면 닦기 쉽고 깨닫기도 쉽다. (그러나) 만 약 근기와 시대와 가르침이 어긋나게 되면 닦기도 어렵고 (깨달아)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정법염경(正法念經)에서는 “행자가 일심으로 도를 구할 때는 언제나 마땅히 시대와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 만약 때를 얻지 못하고 방편도 없 다면 손해(失)라 말하지 이익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비유하면 젖은 나무를 모아놓고서 불을 구하더라도 불은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때가 아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마른 나무를 잘라 놓고서 물을 찾는다면 물을 구할 수 없으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집월장경(大集月藏 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첫 번째 오백년은 나의 제자들이 지혜 를 배워서 견고함을 얻는다. 두 번째 오백년은 선정을 배워서 견고함을 얻는다. 세 번째 오백년은 많이 듣고 (경전을) 독송하는 것을 배워서 견고함을 얻는다. 네 번째 오백년은 탑과 절을 세우고 복을 짓고 참회를 하는데 견고함을 얻는다. (마 지막으로) 다섯 번째 오백 년은 백법(白法, 正法)이 숨거나 정체(停滯)되어서 (제자들 사이에) 싸움이 많고 좋은 일은 별로 없는 데 견고함을 얻는다.”라고 하였 다.
도작스님의 시대에는 검색이나 복사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일단 읽은 책은 다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원문 그대로 복사된 형태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도작스님의 이해방식에 맞추어서 새롭게 문장이 구성되어서 기억됩니다. 그러한 것을 ‘취의(取意)’라고 합니다. 도작스님의 해석학은 ‘취의의 해석학’입니다. 지금 위에서 도작스님의 글에는 두 번의 경전인용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찾아가 보면, 그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경전이 다르기도 합니다. 정법염경은 좌선삼매경이라 합니다. 그렇게 원래의 경전 말씀과 도작스님 기억 속 경전의 말씀 사이에 뜻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점까지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도작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에게 주어지는 가르침(敎)은 중생의 근기에 맞아야 하고 시대에도 맞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사실, 제가 불교해석학의 다섯 번째 실린 논문 「일음교(一音敎)와 자기철학의 글쓰기」에서 언급하였습니다만, ‘근기’라는 개념 안에는 당연히 ‘시대’가 들어갑니다. 정토불교를 말할 때, 흔히 ‘시기상응(時機相應)’이라는 말을 합니다. 또 기법상응(機法相應)이라는 말도 저는 씁니다만, 그러한 생각의 기본을 도작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도작스님은 또 어떤 경(대집경)을 인용하여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방식이 넷이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첫째는 말씀이고, 둘째는 광명과 상호(相好, 얼굴)이며, 셋째는 덕용(德用), 신통, 변화이고, 마지막 넷째는 명호(名號, 이름)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중생제도의 방법을 소개한 뒤, 도작스님은 마침내 본인의 생각을 밝힙니다. 옮겨보겠습니다.
지금 시대의 중생을 헤아려 볼 때,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뒤 네 번째 오백년에 해당하니, 곧 참회와 수복(修福)을 하며 응당 부처님의 명호를 일컬어야 할 때이다. 만약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일컫는다면 곧 능히 80억겁 동안 생사(윤 회를 거듭할) 죄를 소멸하게 되리라. 일념이 이미 그럴진대, 하물며 항상 염(常 念)하는 것이겠는가. 곧 참회하는 사람일지니라.
도작스님의 시대는 오오백년 중에서 넷째 오백년입니다. 넷째 오백년에는 참회하고 복을 짓는 일이 성행하는 때입니다. 그러한 대집경의 입장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칭명염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떻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회하고 복을 짓는 일과 아미타불의 염불을 연결해야 하는데, 도작스님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한 번만 하더라도 80억겁의 생사중죄를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관무량수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칭명염불이 곧 참회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작스님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을 중시하였습니다. 그 시대판단의 기준은 바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얼마나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 따라서 수행방법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그 점을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약 부처님이 가신 지 얼마 되지 않는다면, 곧 전자의 정과 혜를 닦는 것(수복과 참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은 그 정학(正學)이며, 후자 (명호를 외는 것 – 옮긴이)는 겸학(兼學)이다. 만약 부처님이 가신 지 오래되었다 면, 곧 후자의 칭명이 정학이고, 전자(수복과 참회 = 정과 혜를 닦는 것)는 겸학 이 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실로 중생은 부처님이 가신 지 오래되면 알아듣는 근기(機解)가 옅고 어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제희(韋提希)보살(관무량수경의 주인공 - 옮긴이)은 스스로(를 위하고) 또 말세에 오탁(五濁)의 중생이 오래도록 윤회하면서 고통(痛燒)를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능히 짐짓 괴로움의 인연(아 들의 패륜을 경험하는 것 – 옮긴이)을 만나서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부 처님께) 여쭈어서 열게 하셨다.
도작스님은 이러한 논리로, 이미 그 당시는 성도문의 불교를 증득하는 것이 어렵게 된 시절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정신게」에서 ‘도작결성도난증’이라고 해서, ‘결’이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결단내리다, 결판하다’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오래라는 시절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수행법, 즉 성도문이 내세우는 수행법은 정학, 즉 주로 수행해야 할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호를 외는 것이 정학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겸학, 즉 보조적인 차원에서 수복과 참회를 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조적인 차원에서나마 인정한다는 점에서 과연 신란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선자력폄근수, 원만덕호권전칭’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좀 더 살펴야 하겠습니다. 수복과 참회는 자력의 수행으로 볼 수 있기에 오롯이 칭명하라는 ‘전칭(專稱)’을 권유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입니다.
그 문제는 다시 다음 기회에 살펴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문장을 더 읽어보고서 편지를 마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성인(석가모니 부처님 – 옮긴이)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극락 으로 돌아가도록 권하셨다. 만약 여기(성도문 – 옮긴이)에 이르러서 나아가고자 하여도 수승한 과보는 올라가는 것이 어렵다. 오직 정토불교의 문 하나가 있어서
가히 (부처님께서는) 자비(情)로써 (중생들을) 슬퍼하시면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 이다.
여기에도 ‘유유정토일문(唯有淨土一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까지 안락집을 통해서 도작스님이 왜 ‘성도문은 증득하기 어렵고, 오직 정토의 문 하나만이 오직 들어갈 수 있다’라고 판단하셨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 「정신게」의 구절들에서는 신란스님이 도작스님을 재편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신란스님은 도작스님의 교판은 물론, 그 위로 담란스님의 교판이나 용수보살의 교판에 대해서도 다 이해하시면서도 새롭게 자신의 교판사상을 제시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정신게」에서 하지는 않았습니다.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지는 역시 도작스님 찬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만, ‘지안양계증묘과’에 대해서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합장 (2023년 3월 4일)
기우리다(X)
기울이다(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