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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던 지난 10월 21일, 동우회 서홍배 회장님을 비롯한 71명의 여행단은 4박 5일의 일정으로 베트남 하롱베이 여행에 나섰다. 이번 여행은 사상 초유의 해외여행을 통한 단합대회 성격이었다. 비용의 절반을 지원해 주는 파격적인 행사인 만큼 호응 또한 뜨거웠다. 그것은 세대와 지위을 초월하여 함께 어울린 우애의 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는 동우회가 나아가야 방방향에 시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퇴직 동우회 활동의 신기원을 여는 롤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여정은 하롱베이 해상관광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노이를 출발 중국 계림을 닮은 닌빈 호아루에서 대나무 뱃놀이를 즐기고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하롱베이 선상유람에서 그 절정을 맞았다. 몽유도원도가 꿈속의 이야기라면 선상유람은 이를 현실에 시현하였다고나 할까. 비록 복사꽃으로 상징되는 몽환적인 공간개념은 아닐지라도 경이로운 자연이 주는 감동의 시간개념으로서 말이다. 물론 귀국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하노이에서의 관광코스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이 글은 동우회지의 특성상 여행후기 형식으로 썼음을 밝힌다. 따라서 가급적 개인적 감상을 배제하고 시간 순에 의한 사실성에 충실함으로써 여행에 참여하지 않으신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아울러 참가한 분들에게는 그 때의 감동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반가운 얼굴들
인천공항에 모인 시간은 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수십년 지기의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 중에는 직접 모셨던 분들도 계시고 더러는 은행생활 36년 동안 단한번의 인연도 없는 분도 계셨다. 더구나 얼굴과 이름 어느 한쪽이 기억나지 않는 분과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를 나눌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정말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의 무게 앞에 무너져 내린 인생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늙어간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짱짱하고 호방한 기개가 사라져 버린 선배님들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다. 순간 대중가요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에서 “모두가 가야하는 쓸쓸한 그 길로” 란 가사가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왜 일까. 우리는 생을 가리켜 우주보다 더 소중하다고 하지만 기실 우주의 입장에서는 단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비로소 아는 때가 지천명이라 하였던가.
동우회 사상 초유의 해외여행단
많은 인원이 참여하다 보니 신속한 이동과 효율적인 인원통제를 위해 6개조로 편성하고 조장으로 하여금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 편성은 원로 선배님부터 순차적으로 연령대별로 묶은 것 같았다. 현지에서의 이동은 45인승 버스 두 대로 하였으며 각 차량에는 현지가이드와 함께 이번 여행을 총괄하는 롯데관광 본사 차장이 동행하였다. 참가자 중 최 연장자는 우행실업 사장을 지내신 올해 여든살의 홍순용 선배님으로써 나에게는 아버지 뻘인 분이시다. 언제나 자상한 모습은 옛날 그대로였고 건강과 기억력도 매우 좋아 보였다. 고희를 넘기신 분들도 많았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나와 동기 신태동이 이번 여행단의 막내였지만 우리도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퇴직한지 벌써 4년이 흘렀지만 후배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 동우회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여정의 시작
인천공항을 떠난 것은 오후 7시 40분이었다. 조 편성에 의해 5조 말번인 내 옆자리에는 6조 조장인 김득휘 선배님이 앉았다. 우리는 상당 시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비행시간의 지루함을 달랬다. 김 선배님의 해박한 지식과 세상 보는 눈은 상당히 예리하여 배울 점이 많았다. 최근에는 서울시 외국인 관광 통역사로 새로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 주었다. 하노이까지는 약 4시간 반이 소요되나 내가 생각했던 항로가 아니었다. 비행기는 대체로 직선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노선은 제주도를 지나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정남향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대만과의 불편한 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추측과 함께 불필요한 비행시간의 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평등이 낳은 무사안일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2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현지시각 9시 반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향의 청사규모나 배치가 우리나라 제주공항과 비슷하지만 내부시설은 국제공항으로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입국 심사시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수편의 다른 항공편도 도착한 듯 입국 심사대 앞 좁은 공간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입국데스크를 추가로 개방하는 등의 조치는 없었다. 덕분에 입국심사에만 무려 한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짐을 찾는데도 추가로 30분 이상이 걸렸으니 입국하는 데만 한시간 반이 걸린 셈이다.
일 더한다고 월급 더 주냐? 라는 현직시절의 비아냥이 생각났다. 물론 그 때는 더 안주었지만 이제는 더 주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기는 아직까지 그 말을 신봉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의 양 날개에서 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이념이지만 불행하게도 양립할 수 없는 배타성을 지닌다. 한쪽이 늘어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줄어들게 되는 이른바 정답이 없는 선택의 문제다. 과연 인류문명은 언제 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선계의 경관 닌빈 호아루
하노이 시내의 제법 큰 호숫가에 위치한 탕로이 호텔에서 베트남의 첫 밤을 맞았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물 위에 세워진 말 그대로 물 위의 하룻밤이었다. 이튿날 아침 가방등 부피가 큰 짐은 미리 하롱베이로 보내고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버스에 올랐다. 오늘 일정은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닌빈 호아루의 대나무 뱃놀이와 하롱베이로의 이동이었다.
닌빈 호아루는 하노이 동남쪽 약 180킬로미터 떨어진 중국의 계림과 흡사한 강촌 마을이었다. 석회암 층이 억만년 세월을 거치며 만들어 놓은 기암괴석은 수석과 같았고 산 그림자가 드리운 강물은 맑기 그지없어 말 그대로 산자수명한 풍광이었다. 갈대숲 너머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는 두루미들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거나 비상하는 모습이 이곳의 경관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만일 자연경관을 기준으로 인간계와 선계를 구분한다면 학이 살아가는 이곳은 선계가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만이라도 신선이 되어 볼까나.
동심으로 돌아간 대나무 보트
우리는 2인 1개조로 보트에 올랐다. 전체 36대나 되는 보트가 열을 지어 강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해병대의 상륙작전 대형 같았다. 배는 대나무로 엮은 후 시멘트나 콜타르를 발랐으며 노와 삿대를 동시에 쓰고 있었다. 뱃사공은 여자들이 대부분이나 가끔 남자도 섞여 있었고 그 중에는 스무살이 채 될까 말까한 앳된 얼굴의 처녀 뱃사공도 있었다. 배는 갈대가 우거진 늪지 사이를 빠져나와 바위 산 모퉁이를 돌고 돌아 뒤편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였다. 약 2.5키로미터의 거리를 돌아오는 두 시간 동안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환호성은 물위에 메아리 쳤다. 나이가 들수록 돌아가고 싶은 동심의 세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아름다운 산을 허물어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하롱베이와 가까운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돈이라는 수단을 위해 생명이라는 목적 가치를 외면하는 현대사회는 먼 후일 가장 어리석은 문명의 암흑기였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리라.
하롱베이 가는 길
닌빈 호아루에서 뱃놀이를 즐긴 오후 내내 하롱베이로 달렸다. 들녘에는 추수가 한창이었다. 온 가족이 낫으로 벼를 베는 모습은 1960년대의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흡사하였다. 이곳에서는 기계에 의한 농사를 금지하고 있는데 농촌의 고용악화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닌빈 호아루에서 보았던 풍광이 다시금 나타났다. 불꽃이 솟아 오르는 듯한 산의 형상으로 미루어 하롱베이가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중국 계림에서 시작되는 지형이 이리도 멀리 뻗칠 수 있다니 지구의 오묘함이 외경스러울 뿐이다. 하노이에서 보던 홍강이 통킹만으로 흘러드는 이곳에는 하이퐁 항이 위치해 있다. 월남전 당시 미군의 맹폭으로 항구의 형체마져 바뀌었다는데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하이퐁의 시가지는 너무나 조악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다만 시 외곽에 새로 지은 관공서나 학교등은 미관에 중점을 둔 현대식 건물이었다.
하이퐁을 지나 버스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는 노상휴게소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베트남에서 처음 본 소나무라 신기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이 소나무가 살 수 있는 남방 한계선인 듯 하다. 우리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본 고장의 파인애플과 바나나로 과일파티를 벌였다. 물론 관광코스의 하나다. 한 접시에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달라는 대로 내어 주는 인심이 후하였고 과일 맛 역시 당도가 높았다.
만찬장의 해프닝
해가 늬여늬엿 할 무렵 우리는 하롱베이에 도착하였다. 외형상 콘도처럼 생긴 노보텔 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정원에 풀장이 있고 내부시설이 호화로운 4성급이다. 여기서 이틀을 묵는 것은 이번 여행의 품격이 높다는 것을 대변한다. 저녁에는 여행단을 위해 호텔 그랜드 볼륨에 멋진 만찬장이 차려졌다. 분위기가 일류 호텔다웠고 서빙하는 종업원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에서 갑자기 상류층이 된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간단한 행사가 있었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해프닝이 일어났다. 서홍배 회장님의 인사말이 너무 길게 진행되는 바람에 다음 순서가 어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친교의 마당에서 자기소개 대신 사회자가 호명을 하면 한사람씩 일어나 인사를 하는 순서였다. 1조와 2조가 끝나고 3조에 돌아왔는데 한 선배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서도 웅성거림이 있었고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사회를 보던 김득휘 선배님이 무척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다음 조 부터는 전체가 동시에 일어나 인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 이외의 결과였다. 사실 서 회장님의 동우회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대단하시다. 가끔 바둑모임에 참석할 때 뵙지만 회원들과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다. 이날의 해프닝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비록 음식을 앞에 둔 상황이지만 동우회의 현황과 운영방향에 대해 좀 더 소상히 알려주는 것 또한 회장의 책무가 아닐까. 한편 정규 코스 음식외의 추가 비용에 대해서는 조금용 선배님이 부담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이런 것이 아닐까.
몽유도원을 시현한 선상유람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하롱베이 선상유람이었다. 세척의 유람선에 분승한 일행은 푸른 바다위에 보석처럼 떠 있는 수천여개의 섬을 돌고 도는 여섯시간의 항해를 즐겼다. 눈으로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맛있는 안주로 술잔을 기울였으니 몽유도원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하롱베이는 중국의 계림을 바다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그 장관은 일생동안 잊지 못할 명장면 백선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다. 특히 007영화에 나오는 대형 수석같은 바위기둥과 주변 풍광은 왜 이곳이 동양의 진주라 불리 우는지를 알기에 충분하다. 멀리서 닻을 내린 수만톤 급의 크루즈 여객선도 이곳을 보기 위함일 것이다.
하롱베이 유람선은 단순히 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유람선과는 다르다. 각 좌석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4-6명이 앉을 수 있는 응접셑 형식의 레스토랑선이다. 이러한 배가 무려 육백여척이나 운행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이곳 하롱베이를 찾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배가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은 영화의 대규모 해전 씬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목선이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임진왜란 당시의 왜선의 모습과 흡사하다. 선상유람 역시 단순히 배를 타고 풍광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동굴탐사와 스피트 보트 체험, 전망대 등정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선상에서 먹는 다금바리와 해산물도 항해 중 가두리에서 구입하여 직접 요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단이 선상유람에서 마신 술은 베트남 소주 50병 이었다. 가이드는 이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팀은 가이드 생활 중 처음 보았다며 고개를 내 저었다. 더구나 휴대한 양주와 맥주도 상당량이었다. 취선만이 몽유도원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풍류객이 너무 많았음인가. 하기야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도 술과 여자가 없는 천국 보다는 고통스런 이 땅의 삶을 택하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귀로의 노래방
전망대 섬은 약 백여미터 높이에 있는 정자에 올라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는 곳이다. 이 섬이 티토 따오(도)라 불리우게 된 데는 일화가 있다. 티토는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스승이라는데 호치민과 함께 하롱베이 유람에 나섰을 때의 이야기다. 그가 하롱베이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섬 하나를 가져가고 싶다하자 호치민은 통일이 된 이후 당신에게 헌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호치민은 통일을 못 보고 죽었지만 사후 베트남 정부에서 그 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티토 섬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표지판은 전망대 입구에 서 있다.
전망대 등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위에서는 흥겨운 노래방이 펼쳐졌다. 우리와 동승한 2조의 41년생으로 구성된 신사회 멤버들은 모두 어께 동무를 하고 노래실력을 뽐냈다. 신사회는 입행년도와 관계없이 나이를 기준으로 결성된 특이한 친목모임으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행사에도 박정은 회장님을 비롯하여 십 수명이 단체로 참가하였단다. 모두 한 조에 편성되어 같이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황혼의 동행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다.
강도같은 행태의 공중 화장실
하롱베이 선상유람을 마친 후 옵션에 따라 단체 맛사지를 받았다. 전신마사지는 40불, 발 마사지는 30불인데 옵션 총액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내심 취소하고 싶어 가이드에 부탁하였더니 나중에 환불에 주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호텔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두 세시간 동안 하릴없이 기다려야 하는 데 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맛사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가씨들이 정성스레 해 주는 전신 맛사지는 서비스측면에서 한번쯤 받아 보는 것도 괜찮지만 효과로는 동네 사우나의 때밀이에게서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조원들과 함께 하롱베이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위에 있는 정자는 조수간만에 따라 물위에 떠 있기도 하고 백사장에 서 있기도 한다. 특히 다리 난간은 파도에 부서진 채로 방치되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공예품과 상품을 파는 난전 형태의 시장에서 김흥수 선배님과 함께 화장실을 들렀다. 입구에 사람이 서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그냥 들어가도 되는 줄 알았으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자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인상도 험악하여 하는 수 없이 1불씩 낼 수 밖에 없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앞의 공중화장실에서 1불을 낸 이후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사전에 알고 들어갔으므로 억울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깨끗하지도 않은 시골 버스터미널 화장실 수준을 일불이나 받는 것은 정말 강도행각이나 다름이 없다. 시 당국에서 정식으로 허가한 영업인지는 모르지만 국제적 휴양지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행위이다.
다시 하노이로
하롱베이를 떠나는 날 아침 베란다에서 바라 본 일출은 너무나 장엄하였다. 섬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근정전 용상 뒤에 있는 그림 그대로였다. 이럴 때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것은 지금 보는 일출은 실제로는 10분 전의 것으로서 이미 지나가 버린 태양의 허상을 보고 있다고 말이다.
하롱베이에서 하노이로 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달리 하이퐁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라 하지만 우리나라 국도보다 못하다. 하노이를 불과 삼십여 킬로미터를 앞두고 비로소 고속도로다운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통행하는 차량은 트럭이나 특수차량 뿐 승용차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고 아직까지 국민소득이 차를 굴릴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다. 오후 1시 경 하노이에 도착하였다. 점심메뉴는 백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쌀 국수 집이었다. 허름한 이층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신 본 고장 유명식당답게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자전거 인력거로 누빈 하노이 중심부
점심을 먹은 후 씨 클로라 불리는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하노이 중심부를 돌아 보았다. 인력거 71대가 동시에 운행하는 모습 또한 일대 장관이었다. 주행 거리는 약 2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타고 있는 동안에는 벤츠 뒷 좌석에 앉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였으리라. 닌빈 호아루에서도 직접 노를 저었지만 이곳에서도 주인과 자리를 바꿔 직접 운전을 해 보았다. 주인은 연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당신이 최고라 하였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브레이크 작동법을 몰라 신호등에서 발로 멈추어야 했으니 자칫 사고로 연결될 뻔 하였다.
씨 클로를 타고 돌아 본 하노이 중심부는 첫날 보았던 지역과는 딴판이다. 르네상스식의 화려한 외양의 건물들이 잘 정돈된 가로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정부청사로 휘날리는 깃발을 보는 순간 과거 대한뉴스 월남전 소식이 떠올랐다.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인데 월남전 참전용사들에게는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이 밖에도 베트남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칼의 호수나 유교문화를 보여주는 문묘등이 있으나 모두 버스에서 하는 주마간산식 관광이었다. 특히 칼의 호수에 전해오는 전설은 민족 정체성 확립과 애국심 고양에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은 이 호수가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으며, 외적을 물리친 칼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거북이를 찍기 위해 사방에 CCTV를 설치해 두고 있다. 실제로 이 호수에는 수백년 된 거북이들이 살고 있어 전설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부러워 해야 할 호국전설이다.
바딘 광장과 호치민 영묘
바딘 광장은 하노이 중심부에 위치한 주석궁 앞에 있고 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호치민 영묘는 평소에는 관람이 가능하나 일년에 한번씩 소련으로 보내져 약품처리를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기간 동안에는 폐관되어 있었다. 영묘 뒤편의 주석궁은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르네상스식 건물로써 현재는 외국의 국가원수에게만 제공하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대우 김우중씨에게 숙박을 허용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베트남의 정치지도자 서열은 국가주석,당 서기,총리 순으로 중국방식을 따른다.
호치민은 평소 주석궁을 사용하지 않고 구내 전기공의 집에 살았다고 한다. 국민들이 살기 힘드는데 자기만 호사스런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호치민이 태평성대로 일컬어지는 중국 요순시대의 두 임금처럼 국민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치민의 거소는 그곳 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는데 일국의 국가원수가 생활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고 검소한 건물이었다. 집안에는 호치민이 쓰던 책상과 응접셋, 침대 심지어 먹던 음식까지 전시해 놓았다. 특히 이 음식들은 호치민 식단으로 불리는 인기메뉴가 되어 식당에서 판매하고 있다. 호치민의 사후 그의 재산은 우리 돈 5만원 정도가 전부였다고 하니 얼마나 청렴한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생을 혼자 산 독신으로 돈이 필요 없었을 터이나 그가 왜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베트남에 관한 단견
이번 여행에서 절실히 느낀 것은 크게 두가지였다. 그 첫째는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고 우리는 복 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적인 언어학자 촘스키 교수도 인정한 바 있다. 베트남어는 말과 글이 달라서 말은 중국어에서 따왔고 글은 불어의 영향을 받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데 기호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사실상 고유의 글은 없는 셈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말과 음식이라고 볼 때 적어도 말에서의 정체성은 취약하다 하겠다.
두번째는 베트남이 지닌 성장 잠재력에 놀랐다. 베트남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나라이다. 지금도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지만 농업현대화가 이루어 진다면 생산량은 몇 배나 증가할 것이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석유,가스,철,고무,커피등 기초자원의 부국이다. 인구구성도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반면에 사회간접자본은 낙후하여 앞으로 무진장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데 이는 경제성장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리나라를 따라 잡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을 경원하므로 우리와는 여러모로 궁합이 잘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하노이 코리안 타운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수상인형극을 보았다. 수상 인형극은 베트남의 전설을 극화한 것으로 사람과 소, 용 그리고 물고기등이 등장한다. 외국의 국빈이나 중요인사 방문시 공연한다고 하는데 현대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용이 불이나 물을 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악사와 창을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고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들은 장막뒤에 숨어 있다. 극에 사용하는 음악은 중국과 유사하지만 노래 소리는 상당히 애절하다.
인형극 관람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의 모든 일정도 끝났다.
끝으로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참여하신 회장님을 비롯한 집행부에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보다 진전된 형태의 각종 행사나 이벤트가 기획되어 대한민국 제일가는 퇴직 동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끝)
제일은행 동우회 회지 제31호(2009.12.31)게재
첫댓글 같은 것을 봐도, 남다른 감성과 상상력이 탁월하셔서, 무지하게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