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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중국 동북지역 편) - 제1부
중국의 성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중국을 통하여 각종 정보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상해나 마카오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나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소개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아 2회에 걸쳐 관련 성지순례기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이 순례 코스의 설명은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오기까지 한국의 밀사와 사신들, 그리고 초기 외국 선교사 입국 경로이며 많은 신앙 선조들이 중국을 드나들던 길을 따라간다. 우리나라 북쪽 끝 의주를 지나 중국의 북경까지 산재한 성지들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중국 양관쇄강(兩關鎖江)
소설 『차쿠의 아침』에 최양업 신부님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 장면을 그린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동행한 『차쿠의 아침』 작가 청주교구 이태종(사도 요한) 신부께서 설명한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 사선을 넘나드시며 강을 넘었던 최양업 사제의 애절한 심정과 죽음을 무릅쓰고 조력자로 위기 순간을 도와주었던 인물의 실존 여부를 떠나, 그 자리에 성모님과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강 건너 북한 땅은 강폭이 그리 넓지 않으면서 한강의 난지도처럼 중간에 섬이 있어,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하얀 광목을 뒤집어쓰면 옆에서도 사람 식별이 어렵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수많은 밀사들과 선교사들이 넘나들던 의주 땅과 만주(중국) 땅이 구분되는 압록강 국경 지대이다. 당시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에도 이곳을 거쳐 구련성, 봉황성 변문을 지나 심양, 마가자, 서만자, 북경, 태원을 거쳐 5000리 길을 지나서 마카오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36년 초,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后洞)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해 12월 3일(음력 10월 25일)에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신학생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이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함께 조선 밀사(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이광렬 요한 등)들의 안내를 받아 중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의 책문(柵門)으로 떠났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샤스탕(Chastan, 鄭牙各佰) 신부는 약속대로 12월 25일에 이미 책문에 도착하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신학생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샤스탕 신부가 정해준 2명의 중국 안내원들을 따라 심양을 거쳐 적봉, 마가자, 서만자, 장가구를 지나 만리장성에 도달하게 된다. 이후 북경을 지나 중국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하여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거쳐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7개월 4일 만으로 5000km가 훨씬 넘는 대장정이었다.
구련성(九連城)
단동 시내를 기준으로 약 15km 북상하면 구련성(九連城) 터가 있다. 양관쇄강 표지석에서 옛길을 따라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은 곳이나 포장된 길을 따라 단동을 거쳐 구련성으로 간다. 명·청 때에는 국경을 건널 때 양국 사절이 꼭 거쳐야 하는 조선과의 통상 요지였다. 그곳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마을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가게 앞 모퉁이에 세워진 ‘구련성 고성지’라는 표지석 하나뿐이다. 표지석 옆 골목길을 따라 약 700~800m 쯤 가면 커브길 왼쪽 편, 낮은 둑 넘어 군부대 건물이 들어서 있는 넓은 공터가 전부 성터였다고 한다. 구련성이 우리 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이 바로 조선을 빠져나온 밀사들과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간 주요 루트이기 때문이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 변문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성으로, 주로 하룻밤 쉬어가는 유숙지로,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경우 야영지로 알려진 성터이다.
봉황성(鳳凰城), 변문(邊門), 책문(柵門), 고려문(高麗門)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된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3일 귀국길에 오른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조선 밀사 교우 안내원들을 따라 의주 변문으로 향했다.
변문(邊門)은 조선의 국경도시인 평안북도 의주로부터 48km 떨어진 지점 구련성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서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1836년 성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1837년 1월 성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조선을 향했던 곳이다.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곳을 향하는 꿈을 늘 가슴에 간직했던 곳이며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이곳을 통해 마카오로 간 장소이다.
1844년 12월 김대건이 부제품을 받은 직후 페레올(Ferréol, 高)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소팔가자를 떠나 봉황성 변문으로 향했다. 12월 말 변문에 도착한 그들은 1845년 1월 1일 이곳에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포교지 조선에 들어간다는 기대를 가졌지만 조선 국경인 의주 변문 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해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했다. 신자들을 따라 의주 변문 근처에 온 김대건 부제는 어렵게 국경을 통과한 후 다시 신자들을 만나 평양을 거쳐 1월 15일 한양 돌우물골(石井洞)에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120리를 더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다. 단동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도로, 두 번째 철길 건널목 옆에서 ‘변문진’의 표석을 볼 수 있다. 변문 마을은 지금도 국경 요충지인 데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 시설인 무기고가 있다고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일부 신자들은 이 표지석 하나가 성지냐고 반문한다. 잘 조성된 우리나라의 성지를 구경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면 그저 보이는 것이 다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지를 바라볼 때 마음의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때, 비로소 성지순례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1월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앵베르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이곳을 넘었다. 체격이 큰 외국인이 거추장스런 상복에 방갓 차림이라면 얼마나 불편했을지? 그리고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검문소 옆 개천(개구멍)을 통해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외국인 성직자가, 발각될까 염려되어 개구멍 통과라니? 마음의 눈으로 그 광경을 그려보고, 가슴으로 그분들의 당시 심정을 느껴보자. 그러면 “도대체 하느님이 누구이시길래?” 하는 물음이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심양을 지나 적봉(赤峰)을 거치게 되는데 적봉 또한 내몽골 자치구의 직할시로, 적봉 주교좌성당은 1932년에 설립되었는데,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본당이 52개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은 규모였다.
마가자(馬架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곳
중국 교우촌인 마가자는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1835년 10월 20일에 병사한 곳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교거점이었다. 마가자는 적봉시에서 고속도로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이나 도로공사가 빈번하여 우회할 경우 세 시간을 돌아서 가야 하는 곳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마가자 천주당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성당을 감싸고 돌아가면 5분 거리에 바로 성직자 묘지에 있다. 프랑스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중국 내륙을 거쳐 조선 땅으로 부임하던 중 1835년 병사했다.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哵唎溝, Pie-li-Ko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교우 촌에서 눈을 감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모방 신부가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를 마가자 현지에 안장했고, 묘소 앞에 묘비를 세웠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으나, 묘비는 마가자 현지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서양과 관련된 것들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내몽골 자치구에서 선종(善終) 170년 만에 발견되었다. 묘비에는 ‘首鐸 蘇公之墓 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수탁 소공지묘 도광 십오년 팔월이십구일립)’이라고 쓰여 있는데, 수탁(首鐸)은 초대 조선교구장을, 소공지묘(蘇公之墓)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뜻한다.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서한에서 “주교님의 무덤 위에는 주교님의 한자 성(姓)인 소(蘇)자가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적었다. 또한 도광(道光)은 청(淸) 나라 선종의 연호로, 도광 15년은 1835년이다. 따라서 묘비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일인 1835년 음력 8월 29일(양력 10월 20일)에 묘비가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때와 일치한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이 조선을 빠져나와 마카오로 어떻게 갔을지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가셨던 길의 역방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만자(西灣子, 원어명 [Sivang])
장가구에서 적봉까지 보통 9~10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도로공사가 진행 중일 때는 기약이 없다. 다음 동계 올림픽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린다. 북경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활강경기장이 만들어지고 있어 배경으로 보이는 높은 산에 공사가 한창이다.
- 서만자 성당 및 주변 모습.
서만자는 중국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마을.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고을에는 일찍이 프랑스 계통의 라자리스트(Lazaristae)회가 진출하여 전교함으로써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는 선교사와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이곳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에 앞서, 1834년 10월 이곳에서 모방 신부를 만난 후 조선으로 향하던 중 펠리쿠에서 선종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도 조선 입국에 앞서 1837년에 이곳에 들러 조선 교우와의 연락을 취한 뒤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페레올 신부도 1840년에 여러 차례 이곳에 들러, 앞서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의 서신을 받은 바 있으며, 1842년에야 조선 교우들과의 연락이 이루어져 기해(己亥) 대박해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만자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에서 3대 교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직자가 이곳에서 조선교회와 연락을 취한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장가구를 거쳐 북경의 관문인 만리장성으로 가게 된다. 장가구 또한 교회사에 가끔 등장하는 도시 중 하나이나 지금은 심양이나 적봉처럼 숙소나 식당을 이용하는 도시로 특별히 순례할 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신도, 2019년 가을(계간 65호), 김창환 바르톨로메오(서울대교구 청구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