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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_< 8. 뻐꾸기 둥지 - (2)>_44회
(2)
아내의 빈자리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 뭐라고 표현할까, 우주 공간에 내던져져 어디론가 기약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 사족을 전혀 쓰지 못하는 상태로 사막에 내던져져 기아와 갈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대책없이 누워있는 느낌? 후자의 표현이 좀더 적절할 것 같다. 몇 방울 남은 핏물마저 말려버릴 듯 태양은 지글지글 끓고, 불안이라는 회오리바람은 나를 덮어버릴 모래를 끌어안고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차츰차츰 다가오고, 고독이라는 독침을 세운 전갈은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고, 이미 기진맥진한 육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
절망감은 갑자기 허탈감으로 이어져 식욕을 자극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를 채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치는 곯아터져 곰팡이가 슬 정도였고, 다른 밑반찬은 바닥이 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쌀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가장 절박했다. 밥만 있으면 반찬은 왜간장으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전동타자기에 눈길이 멈췄다. 그것을 집어들었다. 돈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방안에 있는 세간 가운데 그것이 가장 적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내가 그것을 택하기로 작정했던 것은 귀띔 한 마디 없이 홀연히 날라가버린 아내에 대한 일종의 분풀이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라질, 갈데까지 가는 거야!”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사무기기 판매점이든 타자기 수리점이든, 어느 곳이든 눈에 먼저 띄는 첫집에서 주는대로 받으리라 작정했다.
2층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멈칫 걸음을 세웠다. 웬 사내가 밑에서부터 마주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정수리만 보였지만, 입은 옷색깔이 아무래도 눈에 익었다.
기척을 느꼈음인지 그가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았다 .주화의 지시로 호프집까지 따라왔던 예의 그 젊은이였다. 그가 열적은 미소를 띄어 보이며 먼저 말을 건넸다.
“긴가민가해서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가까스로 근방에 사는 사람을 만나서…… 후유, 꽤 높은 데서 사시네요.”
“또 그 여자 심부름이요?”
“물론 사장님 지시죠.”
“왜?”
“모시고 오랍니다. 아까는 정말 미안하게 됐다고, 그 말씀 꼭 전하라고 그러시던군요.”
<망할 년! 병주고 약주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는 곳을 알고 있을까? 한 번쯤 와 봤거나 아내에게서……?> 속으로 뇌이고 있는데, 젊은이가 말했다.
“타시죠. 차 요 밑에 대놨습니다.”
나는 잠시 머뭇댔다. 몇 시간 전에 내가 취했던 행동이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일단은 그를 따라가지 않겠노라 버티다가 마지못해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는 게 내 자존심을 다소라도 회복하는 길일 것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돌려먹었다. 그렇게 하였다가 혹시라도 주화로부터 그럴 때는 그대로 두고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면 나는 여지없이 지금의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젊은이를 의식해서라도 최소한의 체면은 건져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사장이라는 그 여자, 사람을 귀찮게 하는 데 이골이 난 모양이군. 바쁜 사람 왜 오라가라 하는 거야?”
갑자기 정색을 갖춘 젊은이는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내 말을 받았다.
“그러잖아도 정 바쁘시다거나 오시지 않겠다면 억지로 모시고 올 것까지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미리 연습이라도 해놓은 듯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말을 뱉고 난 젊은이는 날렵하게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안 돼!>하고 외치며 뒤쫓아가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한가닥 남은 자존심이 미처 속내를 행동화시키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건물 옆골목에서 엔진 시동소리에 이어 검은 중형 승용차가 큰 도로 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이제는 별수없이 들고 내려온 타자기를 팔아 며칠만이라도 연명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망할년, 찾아간 내가 바보 천치였지!”
두런거리며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상포가게 쪽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예의 젊은이가 내려가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구두발로 비비면서 말했다.
“뭐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고 하다니?”
“글쎄요, 저 보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걸로 들었는데…….”
입가에 희미하게 묻은 미소로 봐 속내를 훤히 읽으면서 한수 높은 수법으로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녀석의 하는 꼴이 마냥 괘씸했지만 이제는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그때껏 기다려준 그를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
들고 있던 타자기를 눈으로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역시 잘됐군. 미안하지만 날 가까운 타자기 수리점까지 데려다 주시겠소? 이게 고장이 나서 말이오.”
“그러죠. 따라오세요.”
젊은이가 몰고온 차는 은회색 세단으로 앞골목 약국 옆에 주차해 놓고 있었다. 갑자기 무렴한 생각이 들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좋은 차군.”
“사장님 찹니다.”
갑자기 주화와 젊은이와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생김새로 봐 핏줄이 섞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어 융통성을 발휘해 물었다.
“혹시 친인척간이슈?”
“사장님하고요?”
“그렇소.”
“아뇨. 누님으로 모시고 가끔씩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누님으로 모시고?”
“우리는 비지니스 성격상 어떤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지요. 호적등본 떼는 것부터 바람난 남편 뒤밟는 것, 수금도 해다 주고, 가격만 맞으면 목줄기도 따서 감쪽같이 묻어줄 수도 있답니다. 핫핫!”
녀석은 사무기기 판매점과 타자기 취급점을 몇 군데나 지나치면서도 나에게 어떡할 것인가 일언반구도 의향을 묻지 않았다. 나 또한 구태여 그 말을 꺼내 일을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 시트 등받이 위에 머리통을 얹고 눈을 감아버렸다.
“내리시죠.”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차창을 통해 <산딸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깜박 잠이 들었었군.”
“빨리 내리십시오. 딱지감입니다.”
“고맙소.”
“타자기는 놓고 가시죠. 제가 고쳐다 놓겠습니다.”
그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동시에 의미있는 미소를 나누었다.
“내가 고칠 테니까 그대로 두시오.”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이제는 망설임없이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홀을 한 차례 휘 둘러보며 주화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예의 바람벽으로 위장된 출입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문짝에 붙어서서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듯, 장식을 잡기도 전에 문부터 버썩 열렸다. 이어 주화의 너부데데한 얼굴이 비쳐지고, 걸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들어와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생각 밖으로 넓고 화려했다. 너비는 예닐곱 평쯤 되지 싶었다. 고급 화장대가 한쪽 벽을 차지했고, 오디오며 비디오 세트 따위가 나머지 벽면을 치장하고 있었다.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밝은 방인데 그녀가 바람벽에 붙은 스위치 하나를 더 올리자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린 조명등이 현란한 빛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리고 있었다.
주화는 카펫 위에 방석을 꺼내놓았다. 오전에 못다한 한풀이를 계속하리라는 예상을 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로서는 새삼스레 손님 대접을 받는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다.
“난 그저 집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인데…… 몇 가지만 묻고 바로 갈 겁니다.”
“그게 그리 급한 건 아니잖아요? 우선 숨부터 돌리고요.”
공손한 말투며 다소곳이 몸가짐을 갖는 게 사뭇 신경쓰였다. 그렇게 하여 나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게 하고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내 급소를 물어뜯어 옛날에 쌓였던 감정을 앙갚음할 것만 같았다.
서로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탐색의 시간을 가졌다.
마침내 우리는 필요에 따라 보완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녀의 누그러진 눈길에서 엿볼 수 있었다. 마치 꽁무니에 코를 박고 빙글빙글 도는 과정을 거치면서 암컷과 수컷이 서로의 음액(陰液) 내음으로 교미 욕구를 확인하듯이.
“그 동안 큰일하시느라 바쁘셨죠?”하고 주화가 입을 열었다. 나하고는 해당이 전혀 없는 말이었다. 조롱투로 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저 놀기에 바빴을 뿐이지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순영이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뭘 얘기했다는 겁니까?”
“작품은 잘돼 가세요? 순영이 말로는 꽤 좋은 평을 받고 있다던데.”
그제서야 주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화롯불이라도 덮어쓴 듯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아내는 내가 그럴 듯한 글쟁이가 돼 있는 것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한술 더 떴다.
“영광이에요. 이렇게 작가 선생님께서 너저분한 우리 술집까지 왕림해 주셔서 말이에요.”
<이런 망할 것! 지금 날 조롱하고 있잖아!> 생각 같아서는 귀뺨이라도 올리고 그 자리를 내처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아내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달리 마땅한 대책도 없지 않는가. <참아야 한다!>
“난 작가도 뭣도 아니오. 그저 먹고살려고 한때 출판사에서 교정이나 보고 편집일에 관여해 봤을 뿐이니까.”
“어머, 이젠 겸손해지기까지 하고, 옛날하고 너무 많이 변하셨네!”
<그래, 네멋대로 가지고 놀아라! 난 거세당한 수퇘지나 진배없으니까!> 더 이상 조롱당하지 않으려면 그 자리를 뛰쳐나가든지 화제를 바꾸는 길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애초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아내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으니까.
“농담 그만하고, 우리 집 그 사람 혹시 어디로 갔는지 짚이는 데 없습니까? 여기에 출근한 뒤로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주화도 지나쳤나 싶었는지, 아니면 내 아내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실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당혹하게 만드는 말은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며 입안에서 말을 고르고는 대꾸했다.
“뭔가 착오가 있군요. 순영이는 우리 가게에서 한 달밖에 일하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모르셨어요?”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신감으로 관자놀이가 벌떡벌떡 뛰도록 핏물이 정수리로 솟구치고 있었다.
주화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진정하세요. 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거든요. 내 말 듣고 나면 이해가 갈 거예요…… 잠깐만요.”하고 바람벽에 부착된 인터폰을 들고 내게 물었다.
“차 뭘로 할래요?”
나는 대꾸할 심정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고 자시고 할 정신도 없었다. 지금 그 자리에 아내가 있다면 살인이라도 내고 말 것 같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예의 낯익은 아가씨가 인삼차와 주스 하나씩 얹힌 쟁반을 들이밀어놓고 돌아갔다.
의향을 묻지도 않고 주화는 내 쪽으로 주스가 향하도록 쟁반을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화장대 서랍 속에서 담배와 재떨이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태우세요. 정신의 비타민도 되고, 진정제로는 최고니까.”
그제서야 흡연 욕구를 느끼며 한 개피를 뽑아 물었다. 내게 불을 붙여 준 그녀는 자신도 한 개피 물고 불을 댕겼다. 적당량만 폐부로 삼키고 나머지는 콧구멍과 입으로 번갈아 담배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사이, 아내 때문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다소 가라앉았다. 자연스럽고 노련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숱한 곤경과 고통을 이겨낸 전력,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키를 키워왔을 나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확연히 엿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끄며 말했다.
“순영일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 앤 최선을 다했어요.”
“그거야 알지만, 어쨌든 말 한 마디 없이 내 곁을 떠나갔잖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요?”
“갚아야 할 빚이 많았거든요.”
나는 흠칫 놀랐다. 어이가 없었다.
“같아야 할 빚? 그럴 리가…….”
주화는 다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은 붙이지 않은 채 한동안 눈길을 천장에 두고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
“바가지하고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지 마라는 옛말이 있잖아요? 일이 그렇게 된 건 순영이 때문이 아니라 순영이를 돈벌이시키느라 밖으로 내보낸 그 누구 때문이죠. 누굴 원망하기 전에 자신을 책망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나는 잠자코 주화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맘 같아서는 <바보도 원칙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이 건방진 여자야!> 그렇게 외쳐주고 싶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처해 보지 않고 함부로 주둥일 놀리다가는 혓바닥이 잘리는 수가 있어, 하고 그녀의 귓구멍에 충고를 불어넣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각에서 그쳐야 할 입장이었다.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숙이 빨라마신 후 담배연기와 함께 주화가 말을 뱉았다.
“실은 나도 피해자예요. 이런 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보증을 서준 돈도 꽤 되거든요.”
“믿기지 않습니다. 집사람은 그런 말을 하기는커녕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고, 그리고 생활비 말고는 풍족하게 돈을 가져온 적도 없었거든요.”
“그럴 거예요. 오랫동안 시달렸으니까.”
“무슨 뜻인지……?”
주화는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는 듯 한동안 담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그리고는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순영이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잘못도 좀은 있다고 봐야지요. 이왕 돈 벌려고 이 바닥에 뛰어들었으면 인물도 있고 하니까 좀더 큰데로 나가라고 내가 충고를 했거든요. 어쨌든, 그래서…… 돈 좀 모은 냄새가 나니까 꾼들이 접근했고…… 아무튼 그랬던 겁니다.”
“꾼들이 접근했다니요?”
주화는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가슴이 터져나갈 듯이 답답했다.
“꾼들은 뭐고 접근했다는 건 뭡니까?”하고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주화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지요. 전문사기단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지요? 아무튼 그 패거리에게 찍혔다 하면 하느님도 안 넘어가곤 못 배기지요. 일수계 아줌마로부터 어깨붙이, 법원 사건브로커까지 한팀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거기에다 유명 변호사도 한몫 하고.”
나는 다른 나라 말을 듣는 것마냥 황당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왜 나한테 그런 말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까요?”
“처음에는 욕심이 눈을 가려 설마설마 했겠지요. 각오가 대단했거든요. 집 사고 남편 완쾌될 때까지는 순영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기로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요.”
“그래서요?”
“일이 꼬여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고…… 적절한 시기에 피한 것만도 다행이죠. 그 바닥에서는 사람 하나 처분하는 건 빠나나 껍질 벗기는 것보다 더 쉽게 여기니까.”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런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던 아내가 가엾고, 원망스러웠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왜 나를 찾지 않았을까?”
“미망인으로 알고 있으니까죠.”
“내가 이렇게 버젓이 눈을 뜨고 살아있는데?”
“지금쯤은 피해자들도 알고 있을걸요. 어제,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지만, 순영이에게 빌붙어 살던 인간 버러지 같은 놈이, 순영의 입장에서는 어쩔수없이 그렇게 돼 버렸지만…… 아무튼,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게 상책일 거예요.”
갑자기 허기를 느낀 것은 될대로 되라는 자포감(自暴感)을 받아들이고 나서였다. 일단 발동이 걸리자 식욕은 대단한 기세로 몰아치며 이성이나 체면 따위를 금세 짓밟아버렸다. 뱃가죽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알았어요. 우선 급한 건 뱃속을 채우는 건데, 뭣 좀 없습니까?”
지금 와 당시를 회상하다 보면 비웃음을 띠고 나를 이윽이 건너다보던 주화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움츠린다. 당시 나는 거세당한 한 마리의 배곯은 수퇘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먹이를 얻어먹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려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온갖 비굴한 몸짓을 총동원시켰던 것같이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발치에 최초로 무릎을 꿇는 의식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주화에게 그 당시의 심정을 얘기하고 싶었다.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을 꺼낼 시기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쉽다. 아니, 그럴 것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 아내나 주화나 둘 다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나 혼자만 간직하고 지금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니고 떠나도록 배려하는 게 가장 합당한 소치이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아내는 저 모양 저 꼴이고, 주화는 그녀대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정리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할 터이니 말이다.
<내가 왜 할 얘기는 않고 헛길로 들어서지?>
그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녀가 시켜준 먹이를(배를 채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어떤 음식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금세 바닥냈다. 밥통을 채우자 변의(便意)가 뒤따랐다. 배설욕구를 해결하자 이번엔 몸뚱아리가 솜처럼 부풀며 감당할 수 없도록 수면욕이 쏟아졌다. 자존심이며 체면, 명예욕 따위는 식욕과 배설욕, 그리고 수면욕을 충족시킨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깨달은 적은 없으리라. 그에 비추어보면 이성(理性)이란 녀석은 먹고 싸고 자는 본능을 제어하는 게 본분이 아니라 그에 대한 충족감과 질감을 높이기 위해 최대공약수를 얻어내는 계산기에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꿈인가를 꾸다가 눈을 떴다.
“왜 웃는 거예요?”
내겐 이불이 덮여져 있었는데 주화가 이불 속에 다리를 밀어넣고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뭔가 무척 우스운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어렸을 때 겪었던 한 장면 같은데……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어쨌든 우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글쎄 말이오. 어찌나 우스웠던지 그 기분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일어나요. 한 시가 넘었다니까.”
“한 시? 새벽?”
“새벽이지 낮이에요? 장사 끝낸 지가 언젠데.”
“뭐요? 그럼 내가……!”
벌떡 상체를 세웠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마냥 낯설지 않고 편안했을까? 이 여잔 또 누구야? 내가 얼굴조차 맞대하기 거북스러워하던, 주화라는 계집이 아닌가!>
“자, 결정을 내려요. 여기서 잘 건지 아니면 나갈 것인지.”
“…….”
“피곤해 죽을 지경이에요. 내일 또 장살 해야 되구.”
“글쎄, 지금 이 시간에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야, 스스로 알아서 결정할 문제 아닌가요?”
“일찍 깨웠어야 하잖았소?”
주화는 비웃듯이 피식 웃고 말했다.
“깨웠대도 특별히 갈 곳은 없잖아요?”
망할년! 이라는 욕지거리가 입술 끝에서 뱅그르 돌았다. 그러나 급소를 물어뜯긴 후라서 이미 나는 주눅들어 있었다. 말없이 담배를 태워 무는 것으로 대답에 갈음했다.
주화가 핸드백을 집어들며 말했다.
“일어나요. 난 나가야 하니까.”
계단을 올라와 인도로에 서 있는데 주화가 긴 갈쿠리 쇠막대를 내밀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게 내 생활 신조죠.”
“무슨 말……?”
“그걸로 셔터 좀 내려줘요. 밥값 대신.”
말대꾸 없이 그녀가 내미는 쇠막대를 건네받아 셔터 얼터구니에 걸고 내 나름대로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낡은 데다 녹이 슬어 안간힘을 다해도 옆으로 뒤틀리기만 할 뿐 쉽사리 내려오지 않았다.
“두손으로!”하고 마치 조교가 훈병에게 그러하듯 그녀가 명령조로 다그쳤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두손으로 걸쇠자루를 잡고 힘껏 잡아다녔다. 그러나 셔터는 더욱 삐딱하게 찌그러질 뿐 조금도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 낑낑대고 있자 갑자기 주화는 핸드백을 길바닥에 던지듯 놓고 내게서 걸쇠를 채뜨리며 씹어뱉듯 뇌이었다.
“비영신같이!”
주화는 단 한 차례 시도로 순식간에 셔터문을 닫았다. 그러는 그녀의 넓적한 등판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내던졌던 말 <비영신같이>라는 그 다섯 음절을 순순히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그녀 말마따나 나는 셔터문 하나도 제대로 닫지 못하는 <비영신>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요.”하고 그녀가 퉁명스레 말했다.
“왜?”
“갈데 있으면 알아서 가고요?”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럼 이거나 들고 있어요.”
그녀는 어깨에 메었던 핸드백을 내려 내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어떤 언질도 주지 않은 채 횡하니 인도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점점 멀어져갔다. 한번쯤 돌아볼 만도 한데, 발걸음을 더욱 재게 놀릴 뿐이었다.
<이 속에는 돈이 들어있겠다? 들고 가 버려?>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핸드백을 열고 손을 밀어넣었다. 대뜸 돈뭉치가 손에 잡혔다. 돈띠로 탄탄하게 묶여진 두 묶음하고도 풀어져 접힌 돈이 움큼 손에 쥐어졌다. 3백만원 쯤, 그보다 훨씬 넘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대로 사라져버려? 설마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는 않겠지?> 주위를 살폈다. 주화가 미리 누굴 시켜 나를 지켜보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 작정을 하고 몸을 돌렸다. 택시를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문득 아내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안 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마음이 변할까봐 두려웠다. 주화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구 뛰었다.
가도를 돌아들자 옆골목으로 들어가는 주화의 뒷모습이 얼핏 눈에 띄었다. 그제서야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유료주차장.
경비실 앞에서 그곳 직원과 말을 나누고 있는 주화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혹을 뿌리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담배를 타려무는 여유를 가지고 멀찍이서 기다렸다. 이윽고 주화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경비실로 다가갔다.
“혹시 후문이 따로 있습니까?”
근무복 차림의 사십대 중반 사내가 표정을 바짝 굳히며 내 행색을 요모조모 살피고 나서 반문했다.
“무슨 일로요?”
“좀 전에 들어간 여자, 혹시 그쪽으로 나갔는지 알아보려고 그럽니다.”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서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바른손은 어느 새 허리에 차고 있는 가스총 케이스에 얹혀져 있었다.
“그분하고 어떤 관계십니까?”하고 경비가 의심의 눈을 번뜩이며 차갑게 물었다.
“특별한 관계는 아니고 다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설마, 허튼 수작 부리려는 거 아니오?”
“허튼 수작이라뇨?”
사내는 여차하면 내 면상을 향해 가스총을 빼어들 기세였다. 좀은 황당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주화와 경비는 평소 잘 아는 사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서로 상대방을 주시하며 마주서 있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을 내쏘며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나왔다. 라이트 불빛 때문에 자세히는 구별할 수 없지만 희읍스름한 색깔로 봐서 오전에 나를 뒤따랐던 젊은이가 몰고왔던 그 은회색 승용차 같았다. 정문 경비실 앞에서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빠져나가 우측으로 꺾어들었다.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경비원이 가스총을 꺼내 들고 위협조로 말했다.
“나 같으면 도망치는 쪽을 택할 거야.”
어이가 없어 멍청히 서 있자 그가 왼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내려놓고 닭이 모이를 쪼듯 손가락 끝으로 콕콕콕콕 다이얼 버튼을 찍으며 혼잣말이듯 덧붙였다.
“요새는 개스 충전값이 만만찮아서 말야, 가까운 파출소 신세를 지는 게 낫겠지?”
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속으로 뇌였다. <그래 좋다. 돈보따리 들고 주인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얼간이 범죄자는 없을 테니까.>
수화기를 들고 금방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수상한 자가 있으니 빨리 와 달라는 말을 하던 그가 움찔하더니 갑자기 말이 바뀌어지고 있었다.
“아아, 됐습니다. 이제 보니 우리 단골손님이군요. 제 실수였습니다. ……그러죠. 김입니다. 김무성, 그래요. 모레쯤 쐬주 한잔 나눕시다. 네, 죄송합니다.”
그의 시선이 가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부데데한 얼굴에 툭 불거진 주화의 커다란 눈망울이 디룩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발짝을 떼었다.
“죄송합니다.”하는 예의 경비원 목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주화의 뒤를 따랐다.
차는 골목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가 범퍼를 돌아 운전석에 들어가 앉는 사이, 나는 뒷문 핸들을 당겼다. 잠겨 있었다. 주화가 퉁명스레 말했다.
“앞으로 타요.”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백을 주화에게 건네주며 내가 말했다.
“몇 달은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돈이 들어있더군요.”
주화가 전진기어를 넣으며 혼잣말이듯 중얼거렸다.
“등신, 쪼다……!”
차 안은 아늑하고 훈훈했다. 향긋한 소나무숲 향기에 차차 몽혼되어갔다. 눈을 떴다. 깜박 졸았던 모양, 차는 아파트 단지 내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간쯤에 있는 아파트 옆 도로가에 차가 세워졌다. 이미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늙수그레한 경비원이 재게 다가와 시선은 나에게 두고 주화에게 굽신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늦으셨군요.”
경비원이 도로가에 주차된 차 틈바구니에 그녀의 차가 용이하게 세워지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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