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춘희 씨가 처음 발을 디딘 건 국악이 아니라 대중가요 학원이었다. 당시 가요학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면서 최숙자 씨의 음반에 '백령도 처녀'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부르고 싶은 것이 대중가요가 아니라 국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학원을 물색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이창배 명창이다.
"가요학원엔 피아노도 있고, 사무실이 멋있잖아요. 그런데 이창배 선생님이 지도하는 학원은 아주 형편없더라고요. 작은 방 하나에 장구 하나 있는 게 고작이었어요. 나중에야 국악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 았고, 또 살고 있는지 이해했어요. 저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안타까움보다는 실망감이 더 컸어요."
하지만 실망도 잠깐. 이창배 선생의 지도로 국악을 시작하자 기분은 다시 둥둥 떠올랐다. 이창배 선생 문하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다.
"처음 이창배 선생님을 뵐 때는 한 3개월이면 다 배우겠다 싶었어요. 경기민요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창배 선생님에게 10년을 배우고도 모자라더라고요. 그리고는 안비취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10년을 가르치던 이창배 선생님이 어느 날 안비취 선생님을 만나 '이제 당신이 가르치는 게 더 낫다'며 저를 넘기신 거죠."
197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안비취 선생은 그녀의 스승이면서 어머니였다. 소리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여자의 품행에 대해 가르쳤고, 여자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하지만 소리하는 사람에게 외모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안비취 선생도 미모가 뛰어난 제자들과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춘희 씨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소리를 잘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연습했다.
그녀가 창안한 방법은 앉았다 일어서는 운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니 그건 연습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하루 6시간씩 5개월간 훈련이 계속됐다. 처음에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이 차고 힘이 들었다. 1985년 첫 발표회 때는 무대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나섰다. 못하면 영영 노래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노래를 불렀다.
"
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어요. 이전까지는 그저 노래 참 잘한다는 말을 하던 사람들이 그 무대 이후부터는 저를 명창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경기민요는 남이 부르는 소리에 누구나 덩실덩실 흥을 얹을 수 있는 노래다. 하지만 "목이 넘나들고 여며드는 게 힘이 들어" 남들에게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10년도 모자란 게 이 노래란다.
드디어 이춘희씨는 국립국악원 민속단 예술감독이 되었다. 노래에 대한 탁월한 실력과 함께 그녀가 창안해 무대에 올린 '소리극'이 경기민요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5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이춘희 씨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토요일에 열리는 상설무대 1년치 프로그램을 짜는 것. 하지만 경기민요로 1년치 프로그램을 짜자니 너무나 단순한 무대가 연상됐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사람이 받아서 부르고, 함께 부르는 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레퍼토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작은 무대지만 거기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노래로 극을 만들었다. 이를 '소리극'이라 이름 붙였는데, 역시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것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1998년에는 드디어 '남촌별곡'이라는 소리극을 큰 무대에 올렸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경기민요를 극으로 만들려면 등장인물만 적게는 50명이고, 100명 정도는 예사니까 경비가 엄청나게 소요되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경기민요의 새로운 시도는 대중과 함께 숨쉴 수 있는 전환점이었다. 한국종합예술대 김영재 교수가 많은 작곡을 했지만 가사를 쓰는 작업은 이춘희 씨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현재 이춘희 씨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경기민요를 전해주는 사업과 어린이들이 꾸미는 소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 어렸을 때부터 경기민요의 맛을 알아야 커서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