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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41년, 해모수 21세, 늦은 봄부터
해모수 일행은 서둘러 번조선 왕도 왕험성(서평양)을 향해 말과 마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백성들 사이에서 여러 소식들을 탐지해보았으나, 남평양 근처에서 들었던, 장당경 정변의 소문에 관해서는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기비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일행이 번조선 왕성에 당도해 번조선 왕 앞에 나아가니, 그곳에는 여러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기비가 부왕 앞에 문안을 여쭌 후 아뢴다.
“아바마마, 진조선 장당경에서 정변이 일어나 고열가 임금폐하께서 폐위 당하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삼정승과 오가五加(단군조선의 중추적 관직명) 대신들의 회의에서 종실의 해로운 대인이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는데, 그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왕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
“금시초문이구나.”
기윤箕潤 왕은 묵묵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기비와 함께 손님들을 물린 후 신하들을 향해 물었다.
“경들은 방금 전에 왕세자가 전한 소식을 듣지 못했소? 장당경에 가 있는 우리 세작들로부터 무슨 괴이한 보고가 없었소?”
“그런 보고는 전혀 없었사옵니다. 다만, 여기 온 해모수 공이 나랏일로 외유에 나섰다는, 우리 사람들의 기별은 있었사옵니다.”
“다시 한 번 장당경과 환화궁의 정세를 철저히 탐문해서 보고하게 하시오.”
번조선 왕의 신하들 가운데는 해모수의 주목을 유달리 크게 끈 젊은이가 있었다. 해모수는 그에게서 모종의 위압적인 영웅의 상을 보았는데, 묘하게도 친근하게 끌리기보다 경계심과 경각심을 갖게 했다.
해모수는 왕을 알현하고 나와서 기비에게 물었다.
“기비 왕세자님, 오늘 아침 우리가 어전에서 보았던 인물들 가운데 젊고 용맹하고 똑똑하게 생긴 젊은이가 하나 있었죠? 이국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굽니까?”
“아, 그 사람이요? 그런데 왜 묻습니까?”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그가 좀 특이한 인상의 소유자인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이라면 연나라 세자 단이 잘 압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단이 말했다.
“그를 이리로 불러서 소개하는 게 좋겠군요.”
그가 기비에게 부탁했다.
“기비 형, 그를 불러 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 후 해모수 일행이 묵고 있는 영빈관으로, 시종의 안내를 받아 색다른 모양의 한 준수한 젊은이가 들어왔다.
“형님, 어서 오시오.”
연나라 왕세자 단이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세자 저하, 부르셨습니까?”
젊은이가 단에게 말했다.
“이 분들에게 인사하시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무秦武라고 합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며 그가 예를 표했다.
연나라 세자 단은 그 젊은이를 해모수 일행에게 소개했다.
“우리 연나라의 왕족으로 저의 이복형입니다. 번조선과 연나라 양국 간의 친선을 위해 작년부터 여기 와서 머물고 있습니다.”
좋게 말해, 양국의 친선을 위해 머물고 있는 것이지, 실상은 번조선에 인질로 잡혀와 있었다.
번조선은 한 때 국왕 해인解人이 즉위 원년(서기전 341년)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할 정도로 연나라와의 관계가 대대로 좋지 않았었다. 몇 년 후 서기전 323년 은나라 기자의 먼 후손 기후가 번조선의 왕으로 등극한다.
기자 일족은 그로부터 약 팔백년 전에 조선에 망명했으므로, 당시 기후는 조선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수백 년 내지 천 수백 년 전 신라나 고려, 조선에 망명한 중국인들의 후손은 중국인인가?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사람을 자기 성씨의 조상으로 두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난 중국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번조선왕 기후도 이미 조선에 완전히 동화된 순수 조선인이었다. 더구나 그의 조상 은나라 왕족 기자도 역시 우리 동이족이 아니었던가.
기후 이후 연나라는 번조선에 제압당했다.
그러나 연나라 소왕(재위 서기전 311-279) 때, 번조선에 볼모로 와 있던 진개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군사를 이끌고 번조선 땅 1천리를 약탈하고 만다(<사기/흉노열전><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한> 등등).
기후의 손자이고 기비의 조부인 기석의 대에 이르러 번조선은 널리 인재를 구하게 되는데, 그 때 얻은 현인명사賢人名士들이 무려 이백칠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번조선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해 국력을 든든히 하고, 선조 대대로 번조선을 괴롭힌 연나라를 드디어 어거한다.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음은 당연하다(서기전 276년).
번조선의 기석 왕은 교외에 나가 몸소 밭을 가꿀 정도로 근면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사랑했다<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해모수 일행이 번조선 왕도에 왔을 당시의 번조선 왕 기윤은 기석의 아들이었다. 이 때 연나라에서는 진무를 왕족이라 속이고 조선에 인질로 보냈다.
“아, 그렇군요. 진 공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그런데 조선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십니까?”
해모수가 그에게 인사했다. 진무는 유창한 조선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연나라 왕자 단이, 진무에게 해모수 일행을 일일이 소개했다.
진무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매우 친절한 인사를 나누었는데, 기비의 누이동생 기진에게 보내는 그의 눈길이 대단히 강렬했다. 하지만 기진은 진무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남여 상사지사相思之事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삼칠성주 묘고미향은 대번에 기진을 향한 진무의 마음이 보통을 넘어섰으나 기진이 그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다음 날, 번조선 왕 기윤은 황녀 설이매와 해모수 일행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 진무도 참석한다. 진무는 기진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잔치가 파한 후 기윤 왕은 딸 기진을 은밀히 불렀다.
“진아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기진이 뭔가를 직감한 듯 긴장한 얼굴로 부친을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나이 열아홉이니, 좋은 안식처를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기진이 묵묵부답이었다.
“너, 연나라의 왕족 진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내가 보기에, 그는 매우 똑똑하고 영특할 뿐만 아니라, 내게도 아주 지극정성이다. 그처럼 영웅의 자질을 갖춘 청년은 찾아보기 힘들 터다. 네가 만일 그와 혼인한다면, 양국 관계도 앞으로 수십 년은 든든하게 될 것이니, 이 애비의 충정을 헤아려 다오.”
기윤 왕은 딸에게 부탁하며 간청하고 있었다. 그 만큼 그는 기진을 신뢰하고 존중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의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어요? 하오나, 제 마음에는 이미 낭군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니, 그게 사실이냐? 그가 누구냐?”
“지금은 누구라고 섣불리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진무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뭔가 속셈이 있어서 아바마마와 우리 가족에게 잘해주고 있는 겁니다.”
“속셈이라니? 속셈이 있다면, 그건 너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겠느냐?”
“아버님, 죄송하지만 아무튼 전 그 사람이 싫어요.”
“그래? 내가 너의 의사를 늘 존중했는데, 네가 싫다면 내가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잘 생각해 보거라. 이건 양국관계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네, 아바마마.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단은 세자인데 왜 그를 거론하지는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네가 맘에 둔 인물이 설마 그는 아니겠지?”
“네, 아닙니다.”
“그는 단호하고 굳센 기상을 가진 청년이지만, 내가 보기에 진무보다 못해. 후덕함이 부족한 것 같다.”
기진은 부왕 곁을 물러나왔다. 시각은 술시戌時(저녁 8시 전후)가 넘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빈관을 들러보니, 아직 불이 켜져 있고, 남녀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자 시녀가 잠자리 시중을 들어준다. 그녀가 나가려 하자 기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앵화櫻花야, 잠깐 거기 앉으렴.”
“네, 공주마마.”
앵화는 매우 영특하고 순박해, 기진이 몹시 신임하고 가장 가까이에 두는 시녀 가운데 하나다.
“나하고 얘기 좀 나누자꾸나.”
“마마, 저 같은 천것하고 무슨 얘기를 나누시려고요?”
“그런 말 하지 마라. 내게 큰 고민이 하나 있단다. 너도 눈치가 몹시 빠르니 이미 잘 알고 있을 터다.”
“제가 어찌?”
“내가 어떡했으면 좋겠느냐? 방금 전 부왕께서 진무에게 시집을 가라고 나를 설득하셨다.”
“마마, 진무는 연나라 왕족으로서 매우 영리할 뿐만 아니라 풍채가 뛰어나고 영웅의 상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 그러냐? 나도 동감이다. 어떤 면에서 그렇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담백하지 못해요.”
“해모수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마마,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그 분은 설이매 공주가, 겉으로 전혀 표를 내지 않은 채 은근히 속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는 듯하옵니다. 설이매는 제실의 딸인데, 공주마마께서 어찌 그녀와······.”
시녀 앵화가 말을 맺지 못했다.
기진 공주가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게 나의 고민이란다. 내가 작년에 삼칠성주의 초청을 받고 삼칠성에 간 것이 큰 잘못인 것 같구나.”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소서.”
“삼칠성주가 그 때 내게 부탁하길, 임금 종실의 준수한 젊은이 하나가 삼칠성에 와서 비무초배 대회를 여니, 기왕 여기 삼칠성에 온 김에, 그냥 오라버니와 함께 동참하고 오라버니를 출전시켜 대회를 빛내 주십사 해서, 난 그 젊은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문제를 오라버니에게 일임했었지.”
그녀는 가물거리는 촛불을 응시하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임금 가문의 젊은이가 웬일로 여기까지 와서 비무초배 대회를 여느냐고 물으니, 삼칠성주가 자기도 모르겠다고 말하더구나.”
기진은 피식 웃고 난 후 시녀 앵화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떡하니? 호기심에 응한 것이 날 이렇게 질긴 밧줄로 얽어맬 줄이야.”
“마마, 하늘이 주실 짝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분이 상제님께서 내신 배필이라면 누가 방해를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분과 맺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라면 마마께서 애쓰고 걱정하셔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꼭 그럴까? 고맙구나. 하지만 내 마음이 왜 이리 외롭고 쓸쓸하지?”
“그건 마마께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떡하면 그 사랑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진은 스스로도 남녀의 이런 애련지사愛戀之事를 잘 알고 있었으나 앵화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먹장구름 같은 마음 한쪽 귀퉁이에 한조각의 푸른 하늘이라도 보일 것 같아서.
“외로움을 없앨 수 있는 길은 없겠니?”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그 애정의 기운이 마마의 가슴 속에 어떤 강렬한 힘으로 천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운이 사라지는 데는, 기운이 몸 안에 들어와 자리 잡기까지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그 기운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기운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차단한 후에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 내 안에 있던 그 기운은 자연히 소멸됩니다.”
“어떻게 차단한단 말이냐?”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지 말아야 합니다.”
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 시집이나 가버릴까? 진무한데.”
“그것도 그분을 잊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건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어찌 한 사람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인륜지대사를 이용한단 말입니까?”
기진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힘을 잃어 흐려져 있었다.
“그렇구나. 근데 혹시, 그분 해모수 공자가 만에 하나 나의 배필이 될지도 모른다면 어떡하지? 그래도 그분을 보지 말아야 할까?”
“아, 저도 모르겠어요. 그 분은 참으로 행운아인 것 같아요. 마마 같은 천하절색, 경국지색 미인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있으니.”
“그럴까? 그래서 그 분의 표정을 보면 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분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죠.”
“그 분도 내가 그분을 생각하고 있듯이 나를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진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녀 앵화도 함께 안타까워했다.
“마마, 만일 장당경의 정변 소문이 거짓이라면, 얼마 후 그 분들은 떠나갈 것 아녜요? 그 때 다시 그분들을 따라가지 말고 여기 계시면, 훗날 자연히 마마의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난, 꼭 다시 따라가고 싶어. 그 분 곁을 떠나면, 내가 아마 미칠지도 몰라.”
앵화가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진 공주의 상사병이 이렇게까지 깊어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마마, 현실을 보세요. 설이매 공주가 버티고 있잖아요?”
“하지만 설이매공주가 해모수 공에게, 자신을 넘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는 소릴, 내가 설이매 공주의 시녀에게서 들었어.”
“그래요? 이해하기 힘들군요. 제가 판단하기에는, 분명 설이매 공주가 해모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기진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앵화가 손수건을 꺼내 공주의 눈물을 닦아드린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말이다. 그 분이 설이매 공주와 결혼한다면, 내가 그분의 첩이 될 수 없을까?”
“어머나! 공주마마, 그런 말씀 마세요. 어찌 귀하신 마마께서, 비록 제실의 친족이라고 하나 일개 서출에 불과한 사람에게······?”
“그래, 내가 너무 정신 나간 말을 한 거지?”
“그 분이 무슨 임금이라도 된다면 모르지만······.”
“임금, 임금, 임금?”
기진은 넋을 놓은 듯 임금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맞다. 그 분이 임금이 되신다면, 내게도 희망이 있겠구나.”
“하지만, 옆의 연나라나 화하의 제국諸國과 달리 우리 조선은 임금님도 표면상 일부일처를 유지하고 있잖아요?”
“그렇군. 하지만 우리 조선에서 후궁을 취하신 제왕들도 없지 않았지.”
앵화는 처연한 얼굴로 기진의 낯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기진이 애정 병에 걸린 나머지, 그녀의 총명은 탁한 강물처럼 흐려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마, 너무 깊이 생각하면 심신에 해로우니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아니다. 자고 싶지 않아. 앵화야, 광에 있는 석류주石榴酒 한 병만 갖다 줄 수 있겠지?”
“마마, 근심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은, 심신을 아주 해롭게 합니다. 극히 삼가야 할 것이 바로 그 일이옵니다.”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쳐들고 중얼거린다.
“가슴의 동산 위로 떠오른 나의 보름달은 핏빛으로 멍울져 있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해변의 애처로운 새하얀 조약돌은 바닷물로 흠뻑 젖어 있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심산유곡의 난초는 홀로 서있어 외로운 향기 맡아줄 자 없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마마, 입에서 시詩가 줄줄 나오니, 그래도 마마의 마음은 여유가 있는 것 같아 안심이옵니다.”
앵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마, 하늘의 만월은 핏빛으로 멍울져도 밝게 누리를 비출 때가 찾아오고, 해변의 조약돌은 물에 젖어 울어도, 바닷물이 밀려가면 다시 말라 반짝거립니다. 심산유곡의 난초야 그윽한 향기를 진동시키는데, 어느 고운 나그네 그곳을 지나다 모양 좋고 향기 좋아 조심스레 옮겨갈 날이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때를 기다려야 된다는 말이구나.”
“그렇사옵니다. 이제 주무시고 내일 아침 기상하시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너의 위로가 고맙구나. 너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보니 가슴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다.”
“마마,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평안히 주무세요.”
기진은 시녀를 보내고 누웠다.
‘그 분이, 궁의 보물을 맡고 있다가 분실했는데, 내가 어찌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분의 몸에 재난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내가 따라다니며 도와주지 않는 건 의리가 아니다.’
기진은 이렇게 해모수와 동행할 구실을 만들며 뒤척거리고 있었다.
해모수 일행이 번조선의 왕험성에서 며칠 묵었을 때, 장당경에 나가 있는 번조선의 세작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변 소문은 사실 무근인 것 같다고. 이를 번조선 정부로부터 전해들은 해모수 일행은, 자기들이 듣는데서 그런 헛소문을 낸 자들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 연나라 왕자 단이 그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여기서 패수(하북성 당산시 동편의 난하灤河 혹은 진황도시 서편의 양하洋河)를 건너면 얼마 가지 아니해 우리의 왕도가 나오는데, 한 번 들렀다 가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후하게 대접하리다.”
번조선 왕험성에서 연나라의 수도 계성薊城(북경시 방산구)까지는 직선거리로 수백 리에 불과하다.
“어머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해모수가 묘고미향의 의견을 물었다.
“너는 <삼백육십육사>에서 하늘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지 않았느냐?”
묘고미향이 웃으며 반문했다.
“글쎄요. 가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하지만 설이매 공주마마의 견해도 여쭈어봐라.”
해모수가 설이매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늦은 봄 해모수 일행은, 내친 김에 드디어 채비를 갖추고 연나라 계성으로 출발한다.
이번 여행에는 번조선에서 호위군사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해모수와 삼칠성주 일행은 번조선 왕의 호의를 뿌리치고 왔던 그대로 오남육녀가 계성으로 들어갔다.
연왕 희喜(재위 서기전 254-222)는 해모수 일행을 희색으로 반가이 맞았다. 연왕도 역시 해모수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그들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연왕은 세자 단에게 진무의 소식을 물었다. 진무가 번조선에서 매우 현명하게 처신해 번조선 왕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말에 연왕은 매우 기뻐했다.
연왕은 황녀 설이매와 번조선의 기비, 기진 남매를 유달리 극진하게 대우했는데, 특히 번조선 왕녀 기진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한 날, 연왕은 아들 단을 불러 은밀히 물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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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9.2. 가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