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㉕>
구한말 도사면 삼학자 박참봉 이도사 김참봉
구한말 남지가 도사면이라 불리던 시절 넙개(홍포)에는 박참봉, 남마(남포)에는 이도사, 욱개(상포)에는 김참봉 세 학자가 살고 있었다.
영산현 도사면은 옛 비화가야의 영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음강(낙동강과 남강 합류지점)에 “기음강용단” 곧 “가야진명소”로 기록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 구한말 삼학자가 있어 풍속을 다듬고 악행 하는 자가 없도록 면내에서 막강한 영향력과 힘을 가진 지도자로 알려졌었다.
넙개 박참봉의 이름은 박봉학朴鳳鶴(고종 1884~1949)으로 후능참봉으로 대지주였다. 영산현의 현감이 새로 도임하면 으레 넙개 박참봉의 집을 방문하여 인사를 하면 그는 환영 잔치를 크게 벌려 환대하고 은자를 넉넉하게 주기로 소문이 났다. 왜정 때에도 군수, 경찰서장 등이 부임 인사를 왔다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남마 이도사라 불리던 이상호李相鎬(고종 1865~1949)는 금부도사를 지냈는데 한학자이면서 풍수지리에 밝아 길·흉사 택일에 도움을 주고 가난한 이웃 구제에 앞장서 많은 선행을 행하여 남마 동리에서 소를 잡으면 먼저 쇠고기를 가져다 바쳤다고 한다. 풍헌으로 일찍이 노비를 해방에 앞장 서고 인근 학자들과 교유하며 시를 짓는 등 유유자적하였다.
욱개 김참봉은 창릉참봉 낙원 김창진洛原 金昌璡(철종 1858~1944)이란 학자로 낙동강가에 낙원재를 짓고 인근의 자제들과 향인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인근의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김참봉은 젊은 시절 일찍이 궁궐에서 임금을 호종하는 충의위(5위의 하나)에 입속해 군역을 마쳤는데 후에 옛 상관의 천거로 창릉참봉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충의위 군속이라며 ‘충의위 참봉’이라 불렀는데 변해 충의참봉이라 통칭했다. 광무 3년(1899) 고종 황제가 내린 교지를 낙원재 마루에 자랑스레 높이 걸어 놓고 있었다.
그는 충의위 군역을 마친 후에 귀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때 있었던 일이 “욱개둑의 처녀무덤”으로 전해 온다. 남지철교 동쪽 낙동강변에 네모진 무덤이 있는데(지금은 개발사업으로 없어졌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곤 했지만, 신기하게도 격류에 떠내려가지 않고 있어 사람들이 처녀무덤이라고 불렀다.
바로 무덤이 있는 그 밭은 젊은 김참봉(군지 전설란에는 한자 ‘참參’을 ‘삼’으로 잘못 읽어 김삼봉으로) 소유였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났을 때 밭에 가보니 황소 덩치만 한 처녀의 시체가 떠내려와 있었다. 김참봉은 머슴들을 불러 송장을 강물에 띄워 버리려 하다가 인연이라 여겨 그곳에 매장했다. 그날 밤 꿈에 죽은 여인이 나타나 선몽하기를,
“고맙습니다. 내년부터 고추 농사가 잘될 것입니다.”
하고 큰절을 올리며 사례하였다.
김참봉은 고추 농사란 선몽에 의아했다. 3대 독자로 아들 갖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드디어 아들을 낳아 크게 반가웠다. 여인의 선몽은 밭에 심는 고추 농사가 아니라 아들 농사였던 것이다. 정말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로 몇 대 외동을 면했고 그가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서 손자 열댓 명을 보았다. (『창녕군지』 <전설> 참조)
그가 낙원재에서 글을 가르쳐 젊은 제자들이 많았다. 그러자 영산현의 좌수가 현감과 상의해 도사면의 풍헌風憲으로 임명하였다.
풍헌은 조선 시대 향소직鄕所職으로 면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곧 도사면내의 소소한 소송이나 분쟁을 전결하며, 큰일은 현감에게 이양하기도 했다. 죄를 짓거나 불효자가 있으면 잡아 와서 이도사와 박참봉 등과 논의하여 풍헌당 마당에서 곤장을 치고 훈계하여 방면하기도 했다. 몇 해 후에는 풍헌을 이도사가 맡게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의령 지정 사람 정호권鄭湖權이 밤중에 김참봉을 찾아왔다. 그는 3월 14일 의령 의거에 참여하고 3월 16일 두곡리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후 일제 경찰을 피해 온 것이었다.
"의령 지정에 사는 정호권이란 사람이 지난 밤에 칮아 왔네. 내 진외갓집 인척이 되는데 만세를 부르자고 하네. 내일 모래 욱개 장날이 아닌가? 그날에......!"
김참봉은 박참봉 이도사를 낙원재에 불러모아 정호권이 찾아왔음을 이야기하며,
“인근 영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욱개에서도 만세를 부르되 우리는 뒷전에서 남모르게 호응만 하세.”
하고 은밀하게 만세를 부를 일을 논의했다. 만세를 부를 욱개 장날에 삼학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거사를 알리는 연통만 하기로 하였다.
만세를 부른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욱개 장날인 그날은 황사가 심하고 또 서북풍이 불어 모래와 먼지 때문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11시경 장터에서 정호권이 나서서 모여 든 군중들에게 조선 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
시위군중들의 고함소리를 들은 밭에서 일하던 농군들이 곰배나 괭이를 들고 시위하러 달려왔다. 그들은 만세를 부르며 몇 안 되는 순사들이 있는 남지주재소로 달려가 기물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창녕경찰서에서 긴급 출동했을 때는 시위 군중이 이미 해산한 후였는데 정호권을 비롯해 장터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주동자로 몰며 문초했다.
삼학자는 각자 집에 있다가 주재소로 끌려갔는데 고문 구타 등 심한 고초를 당하고서 풀려났다. 정호권은 주동자라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대구 감옥에서 살았다.
주재소에서 모진 심문을 당하고 풀려난 삼학자는 그 후부터 일정에 비협조로 일관했는데 왜경은 감시나 회유 공작을 늦추지 않았다.
그 몇 년 후 욱개 정량걸(본동 중심지 서낭당)에 큰불이 났다. 그런데 소방대가 출동하지 않아 30여 호가 불에 탔다. 그때 김참봉 집도 낙원재도 불타고 말았다. 몇 년전 소방대 창립 때 김참봉이 설비 헌금을 내지 않고 비협조했다고 욱개 마을이 잿더미가 되는데도 불을 끄는 소방대 출동을 미적미적 늑장을 부렸다고 한다.
삼학자는 1920년 남지보통학교가 지금의 동포동에서 개교할 때 사재를 털어 돕기도 하였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살게 된 학자들의 생은 일정의 압박을 받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창녕신문> 2026년 5월 12일 연재분
첫댓글 오늘 하루도 아름다운 인생의 향기를
피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보람있는 날 되시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에 보람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흥분한 목소리 보다 낮은 목소리가
위력 있고 눈으로 말하면 사랑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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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하루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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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가도 첫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있고
늘 마주해도 멀 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름답다면 보내주는 사람은 소중합니다
♡¸.,"사랑합니다"о♧ Have a Good Time..♧♡
상대방의 싫은 소리도 잘 들어주고,
상대방의 감정도 잘 소화하고,
상대방의 결점도 잘 덮어줄 수 있을 때
상대방으로 부터 마음을 얻는다.
마음을 얻는 것이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
♡~..☆ 즐겁고 행복한 あド루づŧ 되었º면 좋겄l습Łıと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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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НðРРУ Ðау。 ♡ ~ 행복○i 가득한 한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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