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1.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6)
(기타 유교문화유산)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 종택, 향교, 서원, 재실, 세거지에 이어 끝으로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에 산재한 기타 유교문화유산에 대해 알아보자.
국내 최다칸(最多間) 정려각, ‘현풍곽씨12정려각’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열녀에 대한 정표(旌表)로 정표자의 집 대문 앞[정문(旌門)], 또는 마을 앞[여문(閭門)]에 세운 홍살문을 말한다. 정문과 여문을 함께 이르는 표현이 정려이며, 다른 말로 ‘도설(棹楔)·작설(綽楔)·오두적각(烏頭赤脚)·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은 나중에 정려 사실을 기록한 ‘정려 편액’으로 대체됐고, 정려 편액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집이 정려각(旌閭閣)이다. 정려각은 마을 입구나 마을 중심 등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세웠다. 정려각의 특성상 많은 이에게 노출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려각은 크게 ‘목조형(木造形)’, ‘석조형(石造形)’, ‘대문형(大門形)’[대문과 정려각이 합쳐진 형태]으로 나눠진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정려각이 ‘현풍곽씨12정려각’이다. ‘12정려각’이라 부르는 것은 정려를 받은 인물 수가 아니라, 정려각 내부가 모두 12칸으로 나눠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실제 이 정려각에 모셔진 인물은 모두 15명이다. 한 문중에 1명 나오기도 힘들다는 정려를 이 문중에서는 무려 15명이나 배출했다. 그것도 충신·효자·열녀 삼강(三綱)을 모두 배출했다.
| 충신 | 곽준 (1명) |
| 효자 | 곽이상·곽이후·곽결·곽청·곽형·곽호·곽의창·곽유창 (8명) |
| 열녀 | 포산곽씨·거창신씨·광주이씨·밀양박씨·안동권씨·전의이씨 (6명) |
달성군 유일 조선시대 관아 건물, ‘원호루(遠湖樓)’
원호루는 대니산 동쪽 현풍읍 동산(東山) 정상에 있다. 현재 달성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는 옛 현풍현 관아 부속건물이었던 원호루가 유일하다. 원호루는 지금으로부터 146년 전인 1879년(고종 34), 지금의 자리가 아닌 조선시대 현풍 관아 후원에 처음 세워졌다.[현 현풍읍행정복지센터] 창건주는 당시 현풍 군수 홍필주(洪弼周·1857-1917)다. 처음에는 아담한 규모의 2층 누각이었는데, 1957년 중건할 때 기단부를 높이고 건물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이후 1989년 현풍면사무소 증축 때 해체됐다가, 1997년 현 위치로 옮겨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한 것이 지금의 원호루다.
현풍현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던 ‘현풍 사직단(社稷壇)’
현풍 사직단[달성 사직단]은 대니산 동쪽 현풍 읍동산(邑東山) 정상 원호루 옆에 있다. 사직(社稷)은 토지신[社神]과 곡식신[稷神]을 말한다. 이 두 신을 위한 제사를 ‘사직제’라 하고, 사직제 지내는 제단을 ‘사직단’이라 한다. 현풍 사직단은 1469년(예종 1) 현풍 현감 채석견(蔡石堅)이 처음 조성했다. 당시 현풍 사직단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현풍 관아 서쪽으로, 지금의 충혼탑이 있는 읍서산(邑西山) 정상이었다. 이처럼 현풍 사직단이 읍 서산에서 읍 동산으로 옮겨진 데는 사연이 있다.
1908년(순종 2) 일제는 읍 서산에 있었던 현풍 사직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일제 신사(神社)를 세웠다. 일제 신사는 1945년 1월, 한 애국지사에 의해 불에 타 사라졌고, 1955년 그 자리에 6·25 전몰장병을 기리는 지금의 충혼탑이 조성됐다. 이후 1997년 현풍 사직단이 복원됐는데, 이때 본래 자리인 읍 서산이 아닌 읍 동산에 사직단을 복원했다. 복원 당시 읍 서산에는 이미 충혼탑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원된 달성 사직단에서는 매년 달성 유림과 군민들이 중심이 되어 달성 사직제를 봉행하고 있다.
한훤당과 일두 두 노인의 정자, ‘이로정(二老亭)’
이로정은 대니산 남쪽 낙동강변에 자리한 정자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이라 불렸다. 개양문(開陽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에 팔작지붕과 계자난간을 두른 고색창연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가 바로 세칭 ‘두 노인의 정자’, 이로정이다. 두 노인은 조선조 14현의 수현이자,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두 선생을 말한다. 현풍과 함양에 각각 연고가 있었던 두 선생은 종종 배를 타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이곳에서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정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여창이 안음 현감으로 부임한 1495년(연산군 1)에서 무오사화로 두 선생이 유배형을 받은 1498년(연산군 4)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이로정은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885년(고종 22) 영남 유림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1904년 중수해 현재에 이르렀다. 이로정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두 노인의 정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자 앞쪽 바깥 기둥과 안 기둥에 두 노인의 시가 각각 주련으로 걸려 있다. 바깥 기둥에 걸려 있는 시는 김굉필의 ‘독소학(讀小學)’, 안 기둥에 걸린 시는 정여창의 ‘유악양(遊岳陽)’시다.
김곽양수재(金郭兩秀才)의 정자, ‘대양정(戴陽亭)’
대양정은 대니산 남쪽에 있는 용두산(龍頭山) 북쪽 정상에 있다. 대양정은 한훤당 김굉필과 규헌(葵軒) 곽승화(郭承華) 두 선생을 기리는 정자다. 지금의 대양정은 2005년 복원한 건물로 형태와 규모로 보면 정자보다는 누(樓)에 가깝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 2층 누각 형태다. 대양정이란 이름은 대니산 남쪽에 있는 정자란 뜻이다. 현풍현읍지[1786]와 현풍군읍지[1899]에는 대양정에 대해 “솔례 안산인 용두산에 있다. 한훤당 선생께서 세운 것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대양정의 존재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이 되지만 언제 무슨 연유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2005년 지금의 모습으로 대양정을 복원할 때 세운 ‘대양정복원기념비’에 창건 연도와 사라진 연유에 대한 기록이 일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대양정은 1483년(성종 14) 경 김굉필이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서흥 김씨, 현풍 곽씨 두 문중이 중심이 되어 ‘대양정계(戴陽亭契)’를 이어오고 있으며 격년제로 대양정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 전기 장묘(葬墓) 문화, 곽재우 장군 묘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47-1615) 장군 묘소는 대니산 남쪽 구지면 대암리(臺巖里)에 있다. 세상에는 곽재우 장군 묘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은 곽재우의 증조부인 곽위(郭瑋)로부터 아래로 5대에 걸친 문중 선영이다. 곽재우는 향년 66세로 졸했는데 임종 당시 “예장(禮葬) 하지 말고, 구덩이를 파고 그냥 묻기만 하라”고 유언했다. 왜란 때 선왕의 두 능이 무너지고 불탔는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묘에 봉분을 쌓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처음 장군의 묘는 유언대로 봉분 없이 평평하게 조성했다. 그로부터 114년이 지난 1731년(영조 7) 현풍 현감 이우인이 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당시 이우인은 봉분과 묘비가 없는 장군 묘를 보고 실묘(失墓)가 걱정됐다. 이우인은 장군의 후손과 상의해 봉분을 쌓도록 했다. 이때 장군의 뜻을 받들어 봉분은 낮게 쌓았으며, 석물은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다만 작은 묘비 하나만 세웠다. 지금 묘가 당시 조성한 묘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대니산 반경 10리’에는 궁궐을 제외한 다양한 유·무형의 유교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아무쪼록 많은 유교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니산 반경 10리’ 지역이 개발과 보전이라는 두 명제 사이에서 현명한 길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