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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요. 전 말로만 듣다가 오늘 처음으로 김일한씨의 마상묘기를 보고 얼이 다 빠질 뻔했습니다.”
“과찬입니다. 환형은 저보다 훨씬 뛰어나실 텐데요.”
“다름이 아니라, 오늘 밤에 제가 부마간택대회 주인공으로 출연하는데요, 혹시 시간 있으면 거기서 만나 뵈었으면 해서요.”
“아, 그렇군요. 기찬 형이 출연한다면 제가 별일을 다 제쳐두고서라도 가서 응원해야죠.”
“아이고, 감사, 감사합니다.”
“그런데 좀 곤란한 게 하나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제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료들이 있어서 저 혼자 향방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동료 분들에게 여쭈어보고, 가능하다면 참석하겠습니다. 갈 수 있으면 제가 별도로 연락하지 않고요, 가지 못할 경우에는 사전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그럼.”
일한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환기찬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김일한씨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부득이 김일한씨의 여자 친구 분에게 연락을 드렸으니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곁에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백의녀 매아리가 말한다.
“가고 싶으세요?”
“다른 분들 의견을 여쭈어봐야죠.”
“저는 그 분이 싫어요.”
공연은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세 시간이었다.
애독자님이 먼저 알아둘 것은, 이 공연은 서기 24세기의 기기묘묘한 신기술을 총동원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따분하게 관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신기술들을 전혀 묘사하지 못했으니 애석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그 신기술들 덕분에 관중들은 전쟁을 마치 곁에서 구경하는 듯하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현실감, 박진감, 생동감,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야말로 그것은 심장이 벌렁거려 임산부 등은 보지 말아야 할, 초극강 효과의 엄청나게 감동적인 체험이다.
막이 열린다는 호루라기 신호와 함께 어디서부터인가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성 밖으로부터 성문을 통과해 당나라 기병들과 보병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군세를 펼친 채 보무도 당당하게 전진해 들어왔다.
수천 명의 군사가 각자 창검을 들고 전진하다가 장수의 외침과 깃발의 신호, 북소리에 맞추어 전투대형으로 돌입한다. 그 때 돌연 관중석 뒤편 서쪽으로부터 한 기마장수가 창을 꼬나들고 휘파람을 부르며 그들을 향해 짓쳐든다. 자세히 보니, 그 장수는 허리에 오랏줄을 차고 있었다.
화면에 이런 문자가 뜬다.
“거란 장수 신창神槍 이해고李楷固”
이해고를 따라 거란의 기마군사들이 내달렸다. 이해고는 적군이 전혀 두렵지 않은 듯 긴 창을 휘두르며 화살처럼 빠르게 당나라의 선두 기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에 선 당 기병의 장수는 그를 용맹하게 맞았으나, 이해고의 창 한번 휘두름에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마치 쾌속선이 물살을 가르듯, 한 마리 매가 까마귀 떼에 짓쳐들어 그들을 갈라놓듯, 이해고는 당 기병의 전투대열을 흩으러 버리고 말았다. 그를 뒤따르는 거란 기병들이 종횡무진 휩쓸자 당나라 군사들은 지리멸렬 무너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해고는 도망가는 당나라 장수를 뒤쫓아 간다.
“넘어지라!”
고함소리와 함께 그가 당장唐將의 등 뒤에서 올가미를 힘차게 던진다. 올가미가 보기 좋게 그의 목을 휘감았다. 이해고가 올가미를 힘껏 잡아당기자 당나라 장수는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 때 거란의 보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간단히 포박해버렸다.
신창 이해고는 종횡무진 달리며 장창을 휘둘렀는데, 그와 조우하는 당나라 병사들은 마치 추풍낙엽같이 쓰러졌다. 그는 창술의 달인이었다. 이해고의 올가미에 또 한 사람의 당나라 장수가 사로잡히고, 전투는 거란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것이 서기 696년 8월에 일어난 그 유명한 황장곡전투로서 소수의 거란군이 당나라 대군을 거의 전멸시킨 대첩이다. 그 때 신창 이해고의 또 다른 신기인 비삭술飛索術(올가미 던지기)에 생포당한 당나라 장수들은 장현우와 마인절이었다.
그러나 뛰고 날던 거란군도 시일이 흘러, 수령급 맹장들이 허망하게 죽은 후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자 이해고는 당나라 군대에 투항하고 만다.
이해고가 투항하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당나라의 명신 적인걸이 그를 살려낸다. 측천무후는 마침내 그에게 당나라 장수의 직위를 주고 거란군 잔당을 토벌하게 한다.
특히, 이해고가 노린 이는 거란이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에 대항할 때, 바로 그 기회를 틈 타 고구려 의군을 일으킨 대조영이었다. 대조영은 거란군과 호흡을 맞추어, 고구려가 당나라에 빼앗긴 북위 40도선 근처 난하 하류 유역을 회복하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은 바뀌어 후고구려 즉 대진발해국 태자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 의군은 작전회의에 들어간다.
“이해고는 여느 때처럼 자신만만하게 대군을 모조리 거느리고 선두에서 달려올 것이오. 그럼 사비우四比羽 장군이 말갈군과 함께 우리 후미를 맡아 먼저 그와 상대해 주시오. 자신 있소?”
“자신 있소. 이해고의 무예는 내 상대가 못되오.”
“신중하시오. 그러나 못이기는 척 하고 그들을 천문령까지 유인한 다음, 길을 우회해서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시오. 우리의 일군은 산에 매복하고 일군은 그 후면의 세 갈래 길을 막고 있다가, 매복한 군사로 당나라 오합지졸들을 들이칠 것이오.”
사비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독 안에 든 쥐로 만든 다음, 강이 있는 동쪽만을 터주면 나머지 살아남은 놈들은 그리로 도망갈 것이오. 그들이 물에 뛰어들 때 화살을 날리면 되오.”
대조영의 막사에는 한 절세미모의 여장수가 있었다. 고구려 마지막 태왕 보장황제의 애첩이 낳은 딸로서 대조영을 지극히 연모하는 여인이다.
“미시아美示雅!”
“네, 태자전하!”
“당신은 적은 수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산위에 끝까지 매복해 있다가 거란군이 흩어지고 이해고가 극소수의 군사만을 거느린 채 포위망을 뚫으려 할 때, 내려와서 이해고를 사로잡으시오. 그의 올가미를 특별히 조심하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해고는 수만의 당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마침내 유주(북경)에서부터 출발해 단주성(북경시 밀운구)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대조영의 군사를 향해 나아간다.
이해고는 대조영의 소수 고구려 말갈 오합지졸쯤이야 단숨에 짓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차, 대군을 분산하지 않고, 한꺼번에 투입해, 마치 강물이 범람하며 강둑을 무너뜨리듯, 무시무시한 홍수가 집들을 휩쓸어가듯, 이슬이 땅 사면에 내리듯 대조영의 군사를 단번에 덮치기로 작정했다.
좁은 단주성 밖의 길에서 이해고가 창을 꼬나들고 돌진하자 그들을 막아선 말갈군의 장수 사비우는 그를 맞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후퇴했다. 후퇴하다 또 싸우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갈군 장수 사비우는 이해고를 맞아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결국 이해고의 창날에 중상을 입고 목숨을 잃는다.
말갈장수 사비우가 쓰러지자 용기백배한 당나라 군사들은 패주하는 말갈군을 좇아 좁은 산길로 진격했다. 그들이 산중 깊은 곳에 들어왔을 때다.
갑자기 산위에서 까마귀 소리, 올빼미 울음소리 등등 기분 나쁜 소리가 나며 화살과 돌들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위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의군이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산위로 화살을 날려보지만, 고구려 군은 은폐물에 숨어있고 그들은 드러나 있는지라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 관중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서울아줌마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 같다.
이해고는 고함을 지르며 군사들을 독려하면서 용감하게도 직접 말을 몰아 산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일단 겁에 질린 당나라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그 때 뒤에서부터 일진의 군마가 나타나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 소리 등 요란한 소음을 발하며 당나라 군사들을 위협하고 쳐들어오니, 당나라 군사들은 뒤로 빠질 수도 없고 산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전진이다! 전진! 전진하라!”
이해고가 고함을 지르는 가운데 앞으로 혈로를 뚫고 전진한 군사들은 세 갈래 길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세 갈래 길에는 고구려 의군들이 삼면으로 모두 길을 막은 채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고구려군과 당나라 군사들 간에 다시 일대 혈전이 벌어진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당나라의 대군은 고구려와 말갈 군에게 타작마당의 곡식처럼 타작되어 모조리 죽거나 흩어지고, 이해고만이 겨우 소수의 군대를 거느린 채 뒤돌아서서 혈로를 뚫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시 진중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자 산위에 매복해 있던 천하절색 여장수 미시아의 고구려 군이 함성을 지르며 물밀 듯이 내려와 이해고의 소수 군대를 덮쳤다.
당나라 군대는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대부분 맞아 죽거나 산 자들은 맞은 편 강물이 있는 방향으로 도망가기 바쁘다.
고구려군의 화살이 그들을 향해 비오듯 날았다. 당장 이해고는 몇몇 군사를 거느린 가운데 미시아의 고구려 군을 피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종횡무진 창을 휘두르며 그들을 맞았다.
그 때 고구려 여장수 미시아가 전면에 나타나 이해고와 조우한다. 이해고가 미시아를 맞아 둘 사이에 일대일 대결이 펼쳐진다. 무예가 대단히 높고 강한 미시아는 검술의 달인이었다. 그녀는 장검을 들고 이해고의 긴 창에 용감하게 맞섰다.
두 사람의 혈투는 백중지세를 유지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신창 이해고를 맞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자 관중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시아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녀를 응원했다. 서울아줌마들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화나 연극과 다른, 야외 전투의 묘미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마치 축구경기를 현장에서 관람할 때처럼 관중이 배우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기편을 응원한다는 것이다.
야외 전투공연은 물론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지만 관객은 이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단순한 과거 영상물을 시청할 때보다 더 깊은 감정이입感情移入을 경험한다.
마상에서 두 사람은 맞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다. 어디선가 예리한 파공음이 들린다.
“피융!”
그와 동시 미시아의 갑옷 솔기를 뚫고 화살이 꽂혔다. 미시아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이해고는 이때를 놓칠세라 긴 창을 휘둘러 당장 미시아를 요절내려 했다.
손에 땀을 쥐던 관객들 특히 여성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서울아줌마들, 심지어 매아리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찰나. 이해고의 뒤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한 장수가 창을 휘두르며 이해고에게 달려들었다.
“이해고! 내 창을 받으라!”
소스라치게 놀란 이해고가 뒤를 돌아보니 그는 바로 고려의군 대장 대조영이었다. 이해고는 몸을 돌리며 창으로 용케 대조영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다시 대조영과 이해고 간에 용호상박의 혈투가 벌어졌다.
숨어서 고구려군으로 변장하고 화살을 날린 이해고의 부하는 즉석에서 체포되었다. 이 때 당나라군은 모조리 사상을 당하거나 흩어지고, 양군의 대장 두 사람이 용호상박의 혈투를 벌이는 그 현장에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두 사람의 쟁투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그 순간 이해고가 갑자기 허리에 찬 오랏줄을 꺼내 대조영에게 힘껏 던졌다. 오랏줄이 대조영의 몸을 감고 말았다.
이해고가 있는 힘을 다해 오랏줄을 잡아채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역시 한손으로 오랏줄을 잡은 채 끌어당겼다. 오랏줄이 오도 가도 못하고 팽팽하게 긴장된다.
그 순간 대조영은 한 손의 창을 버리고 두 손으로 오랏줄을 잡아당겼다. 이해고가 끌려오고 두 사람의 간격이 좁아진다. 이 때 대조영은 급히 장검을 뽑아 들고 이해고의 창에 맞섰다.
몇 수 지나지 않아 대조영은 이해고의 몸에 바짝 붙어 오랏줄을 놓은 다음 이해고의 창을 붙잡고 검 날을 이해고의 목에 들이대었다.
“창을 버리고, 밧줄의 손을 놓으라!”
대조영이 외치자 이해고는 순순히 밧줄을 버리고 창을 버린다. 대조영 역시 밧줄을 풀어버리고 이해고에게 말한다.
“이해고!”
이해고는 눈을 감고 있다.
“내가 졌다! 나를 모욕하지 말고 옛정을 생각한다면 단칼에 목을 베어다오.”
이해고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조영이 이해고의 목에서 검을 거두며 대꾸했다.
“내가 옛정을 생각해 이번만은 너를 보내주겠다. 가라!”
이해고는 눈을 떠 대조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없이 돌아서서 터벅터벅 말을 몰고 간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하늘에 노을이 짙게 깔린다.
비장하면서도 평화로운 음악소리가 장내를 진동하는 가운데, 이해고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대조영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는 미시아를 향해 나아간다. 대조영이 그녀를 안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미시아! 미시아!”
“네, 태자 전하!”
“조금만 참으시오. 당신은 곧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오.”
“제 상처는 제가 알아요. 이미 도를 넘었어요.”
“그런 말 마오.”
대조영이 그녀를 안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태자 전하, 예전에는 이 소녀가 그토록 전하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했지만, 전하는 언제나 제게 냉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어가는 마당에 전하의 품에 안깁니다.”
“무슨 헛소리! 당신은 곧 완치될 것이오.”
“전하!”
“···?”
“수많은 영웅호걸 대장부들은 소녀에게 다가오고 싶어 안달복달하며 소녀의 눈길 한 번 받기를 그토록 원했는데, 전하는 어찌 그리 저를 얼음장처럼 냉대하셨는지요?”
“내 가슴은 풀무처럼 끓고 있었소.”
“나라를 위한 충정심이 그토록 끓어올랐군요.”
“맞소. 하지만, 또한 그 누군가를 향해서 그렇게 끓었소.”
“제 동생 여미아麗美雅를 향해서겠죠? 전 알아요. 여미아가 은근히 태자마마를 사모하고 태자마마도 그녀에게 홀딱 반해 계신다는 사실을.”
여미아는 미시아의 일란성 쌍둥이 여동생으로서, 미시아보다는 일찍 대조영을 만났다.
“아니오. 그녀는 당신만큼 찬연히 아름답지만, 한없이 고고高高하고 지극히 초연하며, 가없이 탈세적脫世的이고 너무나 천상적天上的이며 무한히 신적神的이오. 그리고 그녀가 몹시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분은 따로 있소.”
“하늘 임금님이요?”
“그래요. 난, 천상적이고 고고하고 신적인 것을 흠모하고 숭배하며 거기에 찬탄하오. 하지만 난, 난·····.”
미시아가 조용히 눈을 떠 대조영의 얼굴을 주시한다.
“난, 신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 천상적인 것보다 지상적인 것을, 그래요, 신神보다 인간을 더 사랑했소!”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대조영의 말이 조용히 이어진다.
“여미아는 절세가인이지만, 오로지 하늘 임금님만을 우러러보고 연모해 마지않는 천상적이고 고고한 여인이오. 그러나 당신은, 또 다른 절세가인 당신 미시아는, 인간적이고 지상적이고 세속적이고···.”
미시아의 낯에 조용한 평화와 미소가 흐른다. 대조영은 그녀를 안은 채 말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영주 계성을 향해 떠나간다.
하늘의 문이 열린 듯, 하늘에서는 여전히 찬란한 노을이 사방에 퍼지고 환하고 밝은 빛이 온 누리를 비추며, 대조영의 뒤와 앞길을 조명한다.
평화와 사랑의 기운이 누리에 가득하다. 그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가운데, 미시아는 대조영의 품에서 미소를 머금고 숨을 할딱거린다.
“태자전하!”
“기력이 빠질 수 있으니 더 이상 말을 하지 마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시아가 말을 계속했다.
“전 이제 곧··· 제 동생 여미아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진 님··· 하늘 임금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무슨 소릴!”
대조영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녀가 힘을 내어 말했다.
“제가 떠나거든 전하께서는 제 여동생 여미아를 거두어주세요. 아비도 어미도 없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전하 밖에 돌보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마오.”
미시아는 얼굴에 평온한 기운이 충만한 가운데, 마지막 숨을 몰아쉰 후 이내 숨이 끊어진다.
대조영은 그녀를 붙잡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목 놓아 운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수旗手들이 깃발을 내려 조의와 경의를 동시에 표하자, 그를 따르던 전군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 역시 그들의 곡성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적막, 적막, 아니 평화, 평화, 그 자체다. 슬픔 가운데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듯, 묘연한 평화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건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파라독스paradox였다.
장중한 음악과 함께 서서히 대조영의 군사가 성문 밖으로 사라지면서 1부의 막이 내린다.
서울 아줌마들이 울고 있다. 냉혈녀 같은 녹의여경 매아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그 순간 갑자기 김일한의 뇌리에 이상한 상념이 떠올랐다.
‘미시아, 미시아.’
“그렇지. 어제 밤 그녀가 자신은 미시아라는 황실 종친의 절세미녀를 알고 있다고 했지.”
그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백의녀 매아리가 일한의 얼굴을 쳐다본다. 김일한이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독백했다.
“그녀가 누구지?”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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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6. 9. 11. 초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