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 루가, 장 요셉/1866년 3월 30일 군문효수
1866년 3월 30일, 수영에서는 선교사 한국 교구의 교구자이며 아콘(Acones)
명의 주교인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 그리고 교우
황석두와 장주기가 신앙을 위해 군문 효수되었다.
그들은 3월 23일 서울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의정부의 요청으로 국왕은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그들을 모두 포도청에서 충청도 수영(갈매못이라고도 했는데
충남 보령군에 위치함.)으로 이송해 그곳에서 처형하고
효수해서 교훈이 되게 하라.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안토니오) 주교는 1818년
3월 16일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딸 둘을 낳은 후에 얻은
첫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났을 때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 집안에는
자녀들이 모두 열넷이나 되었다.
다블뤼 집안은 그 고자에서 매우 존경받은 유력한 집안이었다. 미래 선교사의
할아버지는 1823년에 아미앵 시의원 겸 시장이었고, 아버지는 시의원 겸
현의원이었는데 큰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다블뤼 집안은 또한 훌륭한 천주교인 집안으로 자녀 셋을 하느님께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서 온순하면서도
꿋꿋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괄괄하고 부산한 성격이어서 장난을 하거나 성을 내거나 위험한
놀이를 하다가 야단을 맞고 벌을 받은 적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곧은
성품으로 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일곱 살 때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827년에는 예수회 신부들이 경영
하는 유명한 학교인 생아쉴의 학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그 이듬해 7월 31일에 견진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 며칠 후, 이 학교는 샤를 10세의 칙령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블뤼는 생리기에르(St. Riguier) 소신학교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그는 총명하기는 했지만 처음 몇 해 동안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홉 살 때 중등부 1학년에 편입되었으나 급우들보다 훨씬 어려서 공부보다는
놀이와 장난에 더 마음이 끌렸다. 한 마디로 말해 호감은 갔지만 아직 철이 덜
들었던 것이다. 중등부 5학년이 되면서 그는 인생을 진지한 눈으로 보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사제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신앙심과 공부에 더욱
열심하게 되었다.
중등부 최종 학년 때 그는 대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고 아버지에게 그 생각을
말했다. 아버지는 현명한 판단으로 아들의 결심이 시기 상조라고 생각해서
(그 때 안토니오는 열다섯 살이었다.) 최종 학년을 한 번 더 하라고 충고했다.
안토니오는 아버지의 충고를 따랐으나 집안 식구에게 계획 전부를 알리지는
않았고 착실하게 준비만 해 나갔다. 그는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는데 이 마지막 생각은 비밀로 해 둔 것이었다.
신학교에 가기로 한 그의 결정은 급우들을 놀라게 했다.
그 중 한 급우가 말했다.
“네가 신부가 돼?
그건 내가 교황이 되겠다는 것과 같다.”
또 한 선생도 매우 놀라 비꼬는 말을 했다.
“자네가 주교가 되면 나를 부주교로 임명해 주게!”
주위의 사람들은 쾌활하고 명랑한 그의 겉모습만 보았지 은총이 그의 순수
하고 바르고 솔직한 영혼 안에 이룩하고 있는 일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1834년 10월에 안토니오는 이시(Issy)의 생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생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리고 키도 제일 작았다. 그러나 그는 가벼운
천성을 이기고 성격도 바꿔 모든 의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억제했는데 아마 너무 과격하게 한 탓이었는지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말았다.
첫번째 방학 때 가족들이 안토니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전히 쾌활하기는 했지만 자제해서 어느 정도 절도를 지킬 줄 알았던 것
이다. 두 번째 해가 지나자 그 변화는 한층 더 눈에 띄었다.
삭발례를 받고 돌아온 그는 사제직의 위대함과 의무를 깨달았고 예수회에
들어가서 수도 생활을 할 계획까지도 세웠으나 그 때의 건강 상태로는
이 계획을 즉시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1836년 10월에 생술피스 신학교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갔다. 성체와 성모께 대한 그의 신심과
규칙을 엄하게 지키는 그의 태도는 선생과 학생들의 눈에 띄었다.
이듬해에 그는 어떤 본당에서 교리 문답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어 이 직책을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공부하는 것과 혈기 왕성한 성격을 억누르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에다 그와 같은 일까지 겹쳐서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안토니오는 1년 동안 집에 돌아와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동안 차부제품
(사제가 되는 과정의 대품 중 첫번째 품으로 매일 성무 일도의 기도를 할 의무
가 있다. 그 다음 품이 부제품이며 다음에 신품을 받아 사제가 된다.)을 받았
는데 그 것은 그의 일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예수를 얻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가 되었고, 이제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 피조물과 자신에게는 죽으리라는 규율의 멍에를 메고 철저한 가난
속에서 사는 사도직을 생각했다.
신학교에서 떨어져 잇으면서도 안토니오 다블뤼 부제는 자신의 고행에 충실
했고 건강이 허락하자 아미앵 근처의 신자가 많은 한 본당에서 교리 문답을
가르쳤다. 그가 얼마나 잘 가르쳤던지 어른들까지도 그에게 강론을
부탁하기도 했다.
1840년 10월 그는 대신학교로 돌아가서 그 해 12월 19일에 부제품을 받았고,
1년 후(1841년 12월 13일)에는 신품을 받았다. 그의 주교는 곧 그를 당시
인구 4,000명 정도인 르아(Roye)라는 본당 보좌 신부로 임명했다.
다블뤼 신부는 선교사직을 포기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고 여러 가지
선교상의 문제에 ㄷ해서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이것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선교사로서의 목적이 항상 그의 기도 내용이 되었
다. 그러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야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루아에 있었던 스무 달 동안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본당
교우들은 처음에 그가 너무 신중하고 엄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본당 교우들은 그가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과 성체와 성모께 대한 강한
신앙심으로 가득 차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 아이들, 노동자들,
군인들으 열성으로 대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이 회개
했다.
피카르디 지방에서 그의 성무 수행이 성공적임에도 불구하고 다블뤼 신부는
다시 한 번 예수회에 입회를 신청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선교 활동 분야가
아시아에 국한되어 있던 외방 전교회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1843년 10월, 다블뤼 신부는 뒤박 가(街)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
에서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 때는 중국으로 떠나는
기회가 드물었는데 마침 1844년 2월에 중국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을
데려갈 배 한 척이 브레스트에서 출범하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이 배에 자리
셋을 제공했다.
그래서 다블뤼 신부를 포함한 선교사 세 명이 지명되어 마카오로 가는 아르
키메데스 호에 탔다. 마카오에 가면 외방 전교회의 경리 책임 신부가 상황을
보아 최종적으로 배치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항해는 여섯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다블뤼 신부는 이 시간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기도를 드리는 한편 중국어를 익혔다.
그는 이렇게 수련을 했는데 이 수련 기간은 마카오에서 열 달 동안을 기다림
으로 해서 더 연장되었다. 마카오에서 기다리게 된 것은 외방 전교회가 관할
하던 모든 전교 지방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한창 술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블뤼 신부가 마카오에서 변함없이 쾌활한 가운데 부지런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무렵인 1845년 7월 한국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했다.
페레올 주교는 두 번씩이나 자기 전교 지방에 잠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지금은 배를 타고 상해로 그를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는 한국인 부제
김대건과 함께 다시 한 번 입국을 시도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1839년 박해 이후로 신부가 한 명도 없는 전교 교구의 교구장
이었다. 그는 경리 책임 신부에게 선교 활동의 동료 한 사람을 더 청해서
다블뤼 신부를 배정 받게 되었다. 주교는 이 신부의 인품과 덕행을 평가할
수 있었던 터였다. 다블뤼 신부는 한국이라는 ‘순교자의 나라’에 배정된
것을 열광적으로 수락하고 주교와 함께 상해로 가서 마지막 준비를 했다.
이 준비 중에 목숨을 걸고 조국을 빠져 나왔다가 또다시 목숨을 걸고 선교사
들을 그의 조국에 맞아들이려는 용감한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1845년 8월 17일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은 한국 교회의
첫번째 사제였다.
세 사도는 31일에 임시 변통으로 장만한 작은 배에 올라탔다. 하지만 돛이
가마니로 된 형편없는 것이어서 항구에 있는 중국인 선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선원 중에는 아무도 험한 바다에서 항해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이 배의 선장이었다.
폭풍우와 역풍과 싸우며 양자강을 빠져 나오는 데만도 18일이 걸렸지만 이
보잘것없는 작은 배는 9월 18일에 바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게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파손된 부분을 그럭
저럭 손질해서 뱃머리를 북으로 돌려 10월 12일 저녁 여덟시쯤 마침내
한국 해안에 닿았다.
그 이튿날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헤어져야
했고, 다블뤼 신부는 한 교우의 인도로 강경 근처 교우촌으로 피신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다블뤼 신부는 1846년 초에 눈 덮인 산골에서 그의 성직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달 동안에 교우 700여 명을 만났고 회장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어른
몇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5월에 주교와 며칠을 같이 지내게 되어 기뻐
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박해가 또다시 심해져서 선교사
들을 한국에 맞아들였던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
되어 9월 16일에 군문 효수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블뤼 신부는 어느 습하고 건강에도 좋지 못한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오른쪽 무릎에 병을 얻어 그 때부터 오래 걷는 것이 고통
스럽게 되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서양 신부들은 발각되지 않았고 그 이듬
해에는 선교 활동을 다시 시작해서 성과를 올렸다. 다블뤼 신부는 2년 동안
1,700여 명을 입교시켰고 천주교가 아직 들어가지 못했던 지방에도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피로와 궁핍에 짓눌리며 선교를 위해 돌아다닌 그는 위장병을 얻어
줄곧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굳센 마음과 의지를 지닌 그는 그리스도
의 심부름꾼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850년 1월에는 중병이 들어 병자 성사를 받았다가 다시 회복되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쇠약해졌기 때문에 주교는 그에게 교우촌들을 돌아보는 일을
못하게 했다. 이에 다블뤼 신부는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이것이 한국 신학교
의 시초였다.)과 한·한·불 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는 일을 했다.
페레올 주교가 1853년에 별세한 후, 그는 남쪽 산골 지방에서 전보다 더 활발
하게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856년에는 한국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신임 교구장인 베르뇌 주교를 기쁘게 맞이했다.
베르뇌 주교는 교구의 장래를 염려해서 이내 장차 자기의 직책을 계승할 보좌
주교에 선교사 중에서 제일 오래되고 경험이 많은 다블뤼 신부를 지명했다.
다블뤼 신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수락하고 1857년 3월 25일 밤에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 이튿날로 즉시 한국 최초의 성직자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는 선교 활동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다.
억척스런 일꾼인 그는 항상 관리하기가 가장 힘든 구역만을 자기가 골라 맡으
면서 교우들의 마음을 관리했으며 한여름 삼복 더위 중에는 여러 편의 저서를
냈는데 선교사들과 교우들에게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위에 말한 자전 외에도 그는 ‘영적 생활의 첫걸음’이라는 훌륭한 묵상책과 세례,
통회, 성찰에 관한 소책자들을 썼고 최양업 신부가 시작했던 ‘주일 기도책(공과)’
의 번역을 끝마쳤으며 여러 가지 다른 책을 수정하고 새로 펴냈으나 교우들을
위한 ‘성경에 의한 간추린 역사’라는 책은 그가 순교함으로 인해 집필이 중단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의 가장 중요한 저서(그가 10년 동안을 노력하고 연구해서
이룩한 저서)는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이라는 언문으로 된 일곱 권의 총서다.
그는 과연 이 방대한 저술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한마디뿐이다. 그는 하느님을 온갖 힘을 다해서 사랑했고 섬겼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위장병과 오른쪽 무릎의 류머티즘과 시력 감퇴등으로 몸이 온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에게 항상 친절한 동료가 되어 그들과
기꺼이 담소하고 필요한 겨우에는 그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교우들에게는 헌신적으로 대했지만 교리를 배우는 일과 교우 본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엄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그 때 상화으로 보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래야만 교우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 이 교회에
충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이러한 엄격에 대해서 모범을 보였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
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 양으로 바쳐 십자가를 택했으나, 무기력과
무감각과 심지어 소심증까지 겹친 정신적인 고통을 겪기로 했다.
그러던 중, 오래지 않아 다블뤼 주교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을 떠맡겨야 하겠
다는 전망 아래(베르뇌 주교의 건강 상태는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베르뇌
주교는 1865년 11월에 교구장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베르뇌 주교는
교황청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명과 함께 자신의 사표가
수리되도록 로마 교황청에 선처해 달라고 파리의 신학교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상황이 바뀌었다. 베르뇌 주교가 1866년 2월 23일 체포
되어 3월 7일 군문 효수되었고, 다블뤼 주교가 한국 교구의 제 5대 교구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는 20여 일 동안밖에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그 무렵 수원 근처 샘골에서 전교하고 있던 오매트르 신부가 박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다블뤼 주교를 찾아왔다. 그러자 다블뤼 주교는 삼거리에서 전교 중이던
위앵 신부도 불렀다. 그들은 3월 9일 하루를 셋이 함께 보내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별 뚜렷한 성과 없이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교우촌으로 돌아갔고
다블뤼 주교는 그곳 홍주 거더리에 남아 있었다.
그 날 밤, 다블뤼 주교는 오매트르 신부와 같이 배를 타고 한국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했으나 심한 풍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3월 11일에 포졸들이 거더리
를 덮쳤을 때 체포되었다. 주교는 그 때 송 니콜라오의 집에 머물고 잇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다블뤼 주교는 장작더미 속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
었다는데 “누구를 찾소?”하고 그가 포졸들에게 묻자, 그들이 “서양인들을 찾소.”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포졸들에게 “그러면 내가 그들 중의 하나니 잡아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체포 상황에 대한 이 이야기는 숨어 있을 사람이 아닌 주교의 성격으로 보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이며, 특히 현장을 목격한 증인 이택(시몬)의 아주
상세한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서울에서 보낸 열두어 명의 포졸이 신학생이었던 박 필립보의
안내를 받아 거더리로 왔다. 그 후 그들은 곧 교우 오선일을 찾아가서 말했다.
“이곳에 서양인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우리가 왕명에 따라 잡으로 왔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곳에 서양인들이
살고 있다니? 그게 있을 법한 일입니까?”
오선일이 대답했다.
“마을의 집을 모조리 뒤지겠소.”
포졸이 대꾸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다블뤼 주교는 복사 황석두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가서 알아보시오.”
이에 황석두는 행인 모양으로 보따리를 메고 가서 알아보고 주교가 묵는 곳
으로 돌아와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황석두는 또다시 가서 상황을 살핀
후 주교에게 전했다. 그러자 주교는 황석두에게 포졸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포졸들이 오르자 다블뤼 주교는 담배를 피우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들어들 오시어.”
이에 포졸들은 들어가서 앉았다. 그들은 주교에게 심하게 굴지 않고 감시만
했다. 다른 선교사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는 재촉을 받고 다블뤼 주교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는 대신 포졸들이 심부름 가는 교우들을 미행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조건을 달았다.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그들에게 얻어낸 후에 다블뤼 주교는 피신할 가망이
전혀 없는 위앵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교우들이 시달림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에게 자수를 권고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1839년에 앵베르 주교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착한 목자는 그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써 보내고 그들에게 자수하기를 권고했었다.
페롱 신부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주교님은 자수할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내게도 그 뜻을 써 보내셨는데, 당신 하는 대로 따르라고
권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금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천주께서 주시는 영감에 따라 행동하시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페롱 신부는 교우들이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자수하지 않았다.
전갈을 받은 위앵 신부는 곧 길을 떠났다. 그런데 무심코 한국에 와 있다는
것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오매트르 신부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래서 주교는 오매트르 신부에게도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체포된 동료들과 합류하려고 이미 길을 떠난 후였다.
세 선교사는 3월 14일에 호이를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주교는 가마를 탔고
두 신부는 손이 묶이지 않은 채 걸어서 따라갔다. 호송되는 동안에 그들은
아무런 학대도 받지 않았으나 서울 가까이에 온 3월 19일에는 죄인이라는
표를 몸에 걸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깨에 붉은 바를 드리우고 목에는
칼을 쓰고 차양이 내려진 노란 패랭이를 썼다.
서울에 도착해서 그들은 포도청 옥에 투옥되어 살인범들과 좀도둑과 한데
섞이게 되었고, 그 이튿날인 3월 20일부터는 고통스러운 고문과 문초를
받게 되었다. 심문의 대부분을 주교가 받았다. 그것은 그가 천주교의 우두
머리라는 자격으로 그런 것이었고, 또 어쩌면 그가 한국어에 능통해서
천주교에 대해 변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의정부는 3월 23일에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에 대해서 다음과같이 사형을 주청했다.
그들은 해괴한 풍습을 가진 자들로 사방에 돌아다니며
도처에서 양민들을 속이옵고, 그들을 받아들여 환대한
자들과 공범들을 고발하기를 죽기로 거역하는 자들
이오며, 마음을 돌리게 하기가 어려운 그런 부류의 자들
이옵니다. 그들은 실로 지난번에 떨어졌던 씨앗(1839년
에 있었던 가혹한 박해)에서 다시 돋아난 풀이옵니다
이에 국왕은 이렇게 결정했다.
이 자들은 모두 함께 포도청에서 충청도의 수영으로
호송해 처형하고 효수해서 교훈이 되게 하라.
이튿날 이들은 충청도로 길을 떠났다. 왜 처형이 즉시 서울 근처에서 행해
지지 않았는가? 그 무렵 국왕은 병이 들어 그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효력이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왕은 얼마 후에 혼인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국왕의 혼사에 부정이 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대원군은 형의
집행을 서울에서 남쪽으로 250리 되는 곳에서 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상처 입은 다리에 그저 유지만을 처맨 채 말을 타고 죽음을 향해 가는 행진은
그들에게 고통스러웠다. 죄인이라는 표를 달아 망칙한 꼴이 된 그들은 지나는
길에 외교인들의 적의를 보았고, 교우들이 외와는 달리 측은해 함도 느낄 수
있었다.
3월 29일 성 목요일에 이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그런데 저녁 휴식 시간에 다블뤼 주교는 보령으로 돌아가서 처형을
또 늦추기로 결정했다는 포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될 일이오. 바로 내일 우리를 곧바로 처형장
으로 데려가야 하오.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오.”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기념일에 순교하기를
열렬히 희망했던 것이다. 포졸들은 결국 이에 동의하고 성금요일에
행렬을 처형 장소로 지정된 해변 모래 사장으로 직접 향하게 했다.
포졸들은 창과 깃발을 흔들며 앞장 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풍악꾼들이
따라갔으며 주교와 두 신부, 주교와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주교의
복사 황석두, 그리고 회장 장주기가 그들 뒤를 따랐다.
주교는 기쁨에 넘쳐 있었고, 오매트르 신부는 무표정했으며, 위앵 신부는
흥분해 있었다. 풍습에 따르면 사형수들이 형 집행관인 관리 앞에 무릎을
꿇고 엎디어 절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다블뤼 주교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식으로 인사를 했다.
비참한 사형수의 분장과 팔방 돌이의 절차가 끝난 후 다블뤼 주교의 머리를
앞으로 숙여 나무토막 위에 올려 놓고 고정시켰다. 희광이는 칼을 한 번
내리쳐 목덜미에 깊은 상처를 내고는 일을 끝내지 않고 사형수가 땅을
뒹굴며 온몸이 죽음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두둑한 품삯을 요구하며
관리와 오랜 흥정을 했다.
죽음의 흥정이 끝나자 희광이는 칼을 두 번 더 내리쳐 주교의 처형을 끝내니,
때는 1866년 성금요일 정오쯤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나이는 마흔아홉 살,
사제 생활 26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지는 22년, 주교가 된지
20년이 된 때였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Pierre 吳 베드로) 신부는 1837년 4월 8일
앙굴렘(Angouleme) 교구에 있는 에젝(Aizecq)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
났다. 그는 맏아들이었는데 이 집안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자녀는
다섯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천주교인이었고 어머니 역시 훌륭한 교인이었다. 어머니는 어떤
신비스러운 예감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그녀의 맏아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훌륭한 미래를 직감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들이 전교 지방으로 떠난
다고 어머니에게 알렸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속을
터놓았다.
“하긴 이 일은 내가 각오하고 있어야 했다.
너를 낳기도 전에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단다.”
오매트르는 영리한 소년이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공부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끈기 있게 노력했다. 이 노력이 쌓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신부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본당 신부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대답했다. 물론 본당 신부는 교리 문답 공부와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이 소년을 훌륭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공부하는 데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로 해서 본당 신부는 그의 결정을 재고하게 되었다.
어느 주일이었는데 이웃 도시의 장으로 양떼를 몰고 가는 일을 거들어
달라고 아버지가 오매트르에게 말했다.
그러나 오매트르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과 미사에 참례하기를 명하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 이 갈림길에서 아버지의 꾸중과 매질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교회법에 충실할려고 했다. 이러한 용기에 눈을 뜬 본당 신부는
소년에게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본당 신부가 전근되었고 새로 부임한 본당 신부는 제자의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에 이내 라틴어를 가르치는 어려운 일에 전저리를
내고 말았다. 게다가 어린 성직 지망생의 학비를 누가 내주느냐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오매트르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학비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단호하게 오매트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는 공부가 맞이 않다. 너는 신부가 될 수가 없어.”
오매트르는 이 때문에 비애를 느꼈지만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동네의 본당 신부가 그에게 라틴어 가르치기를 거절하자 4킬로미터
떨어진 이웃의 어느 평신도에게 가서 라틴어의 기초를 배우겠다고 했다.
몇 달 동안 그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작은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고 숙제를
끝내고는 나막신을 신고 걸어서 베르퇴이 마을로 갔다. 이러한 굳센 의지에
감동한 에젝의 본당 시누븐 이 일을 교구 주교에게 맡겼다. 주교는 1852년
10월에베드로를 리슈몽(,Richemont), 성모 소신학교 중등과 2학년에 입학
시키는 데 동의했다.
오매트르고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그곳에서 5년을 지내
면서 훌륭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 자신도 급우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나막신을 신은 어린 시골뜨기는 긴 수단을 입고 은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은 무서운 교장 신부 앞에서 몹시 서먹서먹해 했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서 온 동급생들을 대할 때에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부유한
집안 자제들이 있음으로 해서 신학교에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오매트르는 반에서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성적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오매트르는 당황하지 않았고 남의 조소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꾸준한
열심으로 공부를 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모든 것을 눌러 이겨 냈고
좋은 성적을 올려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 명단에 올라 상도 타게 되었다.
그는 신앙심과 쾌활함과 친절로 모든 급우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들은 오매트르를 세 번이나 성모회 회장으로 뽑았고 여러 번 애정의
표시를 했으며 최종 학년이 끝나 착복식이 있던 날은 즐거운 잔치를
마련하고 그 전설적인 ‘오매트르의 나막신’을 한 나무 밑에 엄숙히
묻었다.
오매트르가 열다섯 살로 중등부 3학년 때이던 1853년 12월 31일에
“나는 성직을 지망합니다.
천주께서 나를 그리로 부르시는 것을 느낍니다.”
라고 썼다. 성소에 대한 이러한 자각이 리슈몽의 성모 소신학교에서
그의 생활 전체를 움직였고 성체와 성모께 대한 신심의 방향을 결정
지었다.
그가 1857년 10월 앙굴렘 대신학교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모두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소신학교 선생들이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신서를
미리 보냈기 때문에 그는 대신학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 곳에서 보통이 아닌 공동 생활을 했다.
그의 순종하는 마음은 완전했다.
철학과 1학년 때부터 그는 영적 지도 신부에게 외국 전교 지방에 몸을 바치려
한다는 자기 뜻을 밝혔다. 지도 신부는 “그 얘기는 1년 후에 와서 하게.”
라고만 말했다. 오매트르는 이에 복종했다.
그러나 전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골똘히 했던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에도 드러나 아버지가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걱정을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1858년 5월 4일에 쓴 편지에서 오매트르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걱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저는 전교 지방에 가겠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의 뜻보다는 다만 천주의 뜻이 제 뜻이라고….
그래서 만일 천주의 뜻이 제가 미개한 나라로 가는 것
이라면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6월에 그는 간접적으로 다시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그의 아버지가 오매트르
에게 집을 옮겼다는 소식을 전한 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곳에서 살든 그곳에서 살든 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제가 성직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땅에 집착하는 아버지로서는 사는 곳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을 이해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걱정은 아들의 마음가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비를 뽑게 되었을 때(당시 프랑스에서는
제비를 뽑아 입대를 결정했다.) 오매트르는 추첨함에서 ‘좋은 번호’를 뽑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폴레옹을 위해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면 잘 됐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니까.”
그후, 그의 아버지는 잠을 잃게 되었다.
방학이 끝나 앙굴렘 대신학교에 돌아왔을 때 오매트르가 1년 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었던 그의 영적 지도 신부를 다시 찾아가 대답을 구했더니 쾌히
승낙했다. 오매트르가 주교에게 외방 전교에 대한 요청을 해써니 주교는
그가 교구를 떠나는 것을 승낙했다.
1859학년이 끝날 때 오매트르는 그의 결정을 가족에게 솔직히 털어놓아야
했는데 그 날짜를 8월 15일로 잡았다. 오매트르는 전교 지방으로 아주
떠난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공부를 더 하려고 파리로 간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속지 않았다.
아버지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천주께서 그런 생각을 들게 하시다니, 말도 안 된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일제의 신앙심을 잃게 되겠다.”
어머니는 이 ‘불행’을 앞에 놓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네가 내 위안이 되기를 원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축복을 해주었다.
신학생 베드로 오매트르는 1859년 8월 18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3년을 있게 되었는데 그 기간을 그는 공부와 기도와 신품 성사를
준비하는 생활로 보냈다. 그는 1860년 9월 18일에 다음과같이 썼다.
나는 나를 이렇게 파리로 인도해 주신 천주의 섭리를
찬미합니다. 내가 결코 섭리에 항거하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는 1862년 8월 3일 아래와같이 아버지에게 알렸다.
“천주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그 후,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23일에야 그의 전교 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오매트르 신부는 수원 근방의 샘골에서 평소와
같이 끈기 있게 한국어를 익힌 후 미리내에서 성무 집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다블뤼 주교가 활동하는 거더리에서 꽤 가까운 곳인
내포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성직 수행을 교우들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오매트르 신부를 너그럽고 착한 사람으로 보았다.
베르뇌 주교도 그의 성직 수행을 높이 평가했는데 오매트르 신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이 작은 초심자는 어지간히 놀라운 일을 곧잘 합니다.
그는 힘과 어짐을 겸하고 있어 그가 맡은 교우들을
잘 다스리고 그들에게 성체와 성모께 대한 신심을
가르쳐 줍니다.
그 무렵, 서울을 중심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했고 베르뇌 주교 등은 벌써
잡혔다. 이런 소식에 교우들이 불안해하자 그는 교우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외교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소리를 높여 말해 줄 때가 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거더리에 있는 다블뤼 주교를 만나러 떠났다.
오매트르 신부를 만난 다블뤼 주교는 인근 마을 삼거리에서 활동 중이던
신부도 불러 여러 가지 의논을 했다.
이 때가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기 이틀 전인 3월 9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나
두 신부 모두 이번 박해를 모면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박해는
심각했고 그런 불안 속에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그 후 곧 오매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밤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한국을 탈출하려고 했으나
역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가 머물던 교우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숨어 있을 수 없었고 오매트르 신부 자신도 숨어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곧 다블뤼 주교를 찾아 거더리로 떠났는데 그가 머물고
있던 마을을 떠나기 전에 그는 만일의 겨우 대비해서 성물들을 어느
우물 속에 감추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떠날 수 없었고 발각되면 교우들
에게 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복사 이 빈첸시오를
데리고 거더리로 떠났다.
어느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거더리로 갈 텐데 당신은 나하고 같이 거더리로 가든지
공주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오매트르 신부가 말했다.
“저는 거더리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빈첸시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가서 잘 숨어 있으시오.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
오매트르 신부는 혼자 길을 계속해 새벽녘에 거더리에 도착해
다블뤼 주교가 사는 곳에 이르렀다.
“누구냐?”
정자나무 옆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 포졸이 물었으나 신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포졸은 집안으로 들어가
일렀다.
“방금 이상한 사람 한 명이 왔소.
그러자 다블뤼 주교가 문을 열어 보고 말했다.
“저 사람이 오매트르 신부요. 여러 말 하지 말고 저 사람을
들어오게 하시오.”
오매트르 신부는 그의 어른이요, 아버지인 주교와 함께 체포되어 이 때부터
함께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교와 같이 처형지로 갔다. 그는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날에 주교
다음으로 순교했다. 그는 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처형된 두 번째 선교사는 루가 위앵(Huin, Martin Luc
閔 루가) 신부였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랑그르 교구의 기용벨
(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포도밭을 경작하고 있었고, 매우 화목한 집안으로 위앵(기록을
보면 ‘마르티노’와 혼용되고 있다.)은 9남매중 막내였다. 또한 일에 대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훌륭한 천주교 집안의 유산도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기억하는 한 집안에 신부나 수녀가 끊이지 않았다고 즐겨 상기
하곤 했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식들 중에 누가 하느님의 일꾼이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면 그것을 말리려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은 굳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식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자주 일렀으며 몸소 모범을 보였다. 이 부부는 이렇게 자녀
들에게 철저한 천주교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위앵의 성소를 일깨워 주는 데 잇어 특히 성소 개발에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던 본당 신부 랑베르 신부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이다.
랑베르 신부가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친 소년 열세 명 중에서 열 명이 신부가
되었고,또 수도 생활을 선택한 많은 처녀들도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다. 위앵
은 랑베르 신부에게서 영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위앵은 마르세유
에서 만주까지의 여행기를 감사의 표시로 랑베르 신부에게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기 위한 제 교육에 신부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힘써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 섭리회 수녀가 된 위앵의 손윗누이 스테파니도
1884년 랑베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 동생이 기쁘게 순교하는 데에도 그렇고
제 수도 성소에도 그렇고 신부님이야말로
크나큰 열성으로 하느님 다음으로는 가장
많이 공헌하신 분이십니다.”
과연 위앵이 건전하고 효성스럽고 원기 왕성한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1849년 견진 성사를 받은 다음 날 그에게 라틴어 공부를 하라고 제의했던
것도, 또 그가 열다섯 살 때에 랑그르 소신학교 중등과 2학년에 들어가게
한 것도 랑베르 신부였다.
소신학교의 첫 해가 끝났을 때 교장 신부는
이 소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천주를 두려워할 줄 알고 신앙심이 있는
훌륭한 학생이나 약간 주의가 산만하다.
중등 교육 과정 동안 위앵은 지적인 면에서는 중간 정도였지만 체계적인
공부의 덕으로 탈 없이 성공할 수 있을 만한 지력은 갖추게 되었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그의 신앙심과 좋은 성격과 우애심, 그리고 기용벨
에서 이미 급우들을 놀라게 했던 그의 고행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금요일이면 십자가의 길을 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완전한 것만은 아니어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선생들은 그가 과민할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지적을 했다.
중등 과정의 최종 학년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교장 신부는 위앵에게
성직자가 되기를 권유했다. 이에 동의한 그는 1855년 7월 8일에 수단을
입었다.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수단을
받아 입었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는데
그 학년 중에 포교 성성 잡지를 읽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어떤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오랫동안 숙고해야 했고,
또 그것이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라는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기다리면서 위앵은 우선 좋은 신부가 될
자질을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들어가서 크게 발전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신학교의 생활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모님이
우리 집에서 마치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
처럼 쓸쓸해 하시는 것뿐입니다.
철학 과정이 끝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학과 공부는 잘해 내고 신앙심도 확고하지만
약가는 과민하다.
신학 과정 첫해에 전교 지방 주교들의 강연을 두 번 듣고 나서
한 손윗누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누님에게는 감추지 않고 솔직히 말하지만 저는 마음이
움직였어요. 복음의 일꾼들과같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부름을 받았으면 좋겟어요 사랑하는 누님, 그 소명을
제게 주시도록 천주께 청해 달라고 누님에게 부탁드려요.
그러나 몇 달 후, 그의 집안에 큰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의 집이 화재로 전부
타 버린 것이다. 부모에게 그것은 파산을 의미했다. 가족 중에는 위앵이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용기로 아들의 사제직 준비가 늦추어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부모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전교 지방으로 가기 위해
부모를 떠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자식된 도리로는 곁에 남아서
그들을 이 곤궁에서 구해 주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던 교구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보아서도
교구에 남아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였고,
또 그가 공부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가정부로 들어가 일하면서 언젠가는
고향의 본당 사제관에서 동생과 같이 지내겠다는 희망을 숨기지 않았던
손윗누이 프랑스아주에 대해서도 의리의 빚을 지고 있지 않았던가?
신학생 위앵은 이런 양심의 문제와 대결을 하고 있었는데 차부제가 될 때
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사제직 성소는 의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교 지방을 위한 결정은 뒤로 미루고 랑그르 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가 사제품을 받을 때(1861년 6월 29일) 그의 장상들은
루가 위앵에 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외양으로는 무엇인가 좀 딱딱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정신과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
이러한 경직된 외양은 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선교사 성소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언가? 어째든 이 외양의 경직성도 그의 내적 심경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새 신부는 신학교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랑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1861년 8월 보와제의 보좌 신부로 임명된 루가 위앵 신부는 곧 교우들의 존경
을 받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는 어린이들을 열심으로
돌보아 주어 부모들의 마음을 샀다. 그는 아기 예수의 산교 사업 단체를
조직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위앵 신부의 이 성공으로 인해서 본당 신부가 시기했던가? 그것은 가능한 일
이었다. 섭리회 수녀들이 경영하는 여학교와 평신도들이 경영하는 여학교,
이렇게 두 여학교 사이의 경쟁의식이 계기가 되어 두 신부 사이에 작은 마찰
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이 위앵 신부가 전교 지방으로 떠나는 데에 평향을
주지는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먼 곳에 가서 선교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심사 숙고했으나 혼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어느 선교사의 의견을 따라 자기 가족의 형편을 알고 있는 신부들과
두 명의 평신도에게 자문을 구했다.
모두들 하느님이 부르시는 것이 명백해 보였고 부모의 형편을 보면 위앵
신부가 부모 곁에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잇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위앵
신부는 확신이 생겨 1862년 11월 4일 랑그르 교구장 게랭 주교에게
교구를 떠나 전교 지방으로 가서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위앵 신부는 그의 편지에 그의 성소의 유래와 효성의 의무로 그가 빠져 있던
불확실성 등을 “제 가족은 지금 거의 빈궁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
했고, 신부들에게 자문을 구한 일을 설명하고는 “모두가 제 계획에 찬성
했습니다.”라고 썼으며 다음과 같이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그 때부터 제 결심은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졌습니다.
다만 제가 사제품을 받던 날 주교님께 약속드린 복종
과 순종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교는 보와제 보좌 신부의 계획에 동의했다. 다만 비게 되는 보좌 신부
자리를 메울 수 있게 해줄 1863년 6월의 서품식이 있기 전에는 떠나지
말라는 조건만을 붙였다.
위앵 신부는 1863년 6월 8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고 신학교
에서는 그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교회 관계의 절차는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런데 제일 힘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가족의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수녀가 된 위앵 신부의 두 손윗누이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동생의 뜻을 이미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중 한 손윗누이는 한동안 오라비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교구의 한 본당 사제관으로 오라비를
따라가겠다는 희망으로 그가 공부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손윗누이 프랑수아즈는 크게 슬퍼했다.
위앵 신부의 아버지는 1863년 7월 초에 아들이 전교 지방으로 떠나겠다는
뜻을 알렸을 때, 비록 헤어질 것을 생각하고 슬펐지만 이 소식을
큰 신앙심과 인종(忍從)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있는 사제관으로 달려가서 선교사 성소의 요구가 어떤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순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면서 말했다.
“네가 그럴 만한 용기가 있겠느냐?”
그리고는 갑자기 쏘아붙였다.
“그럼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천주 십계의 네 번째 계명을 잊었느냐?”
위앵 신부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하느님이 부모에 우선한다고, 그리고
어머니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그렇게도 자주 가르쳐 주지 않으
셨느냐고 대답했다.
위앵 신부는 8월 8일 보와제 본당을 떠났는데 교우들은 따뜻한 애정과 경의를
표했다. 12일에는 기용벨과 사랑하는 부모를 떠났는데 자녀들의 성소가 그
자녀들에게 생명을 마련해주라고 하느님께 맡기셨던 부모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또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들의 선교 계획에 그처럼 맹렬하게 반대했던 그의 어머니도 위앵의
방에 단둘이 있었을 때와 문 앞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며 말했다.
“내게 강복을 주고 내가 반항했던 것에 대해서
천주께 용서를 빌어 주지 않고는 떠나지 못한다.”
3년 후, 사랑하는 그녀의 아들 위앵이 순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아들의 유품이 들어 있는 장농 문을 열고 두 팔을 ‘†’자로 포개고
무릎을 꿇어 “테 데움”을 욌다.
위앵 신부는 1863년 8월 20일에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 도착할
때 그는 매우 감격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그는 더할 나위없이 친절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한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 있게 되자마자
엄청난 슬픔이 그를 엄습했다. 그렇게도 활기 차고도 위안되었던 생활이
그리워졌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마음은 수없이 어린이들과 교우들과 친구들,누님들과
부모님 곁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시련이었다.
이 위기를 이겨 내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 방법인 기도의 힘을 빌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천주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당신 사랑의 힘과 은총의 빛을 내려 주소서.”하고.
내 걱정은 오히려 내가 더 열렬하고 더 경건하게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9월 5일 손윗누이 프랑수아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곳의 생활은 고되지만 아무도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 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 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앵 신부는 도망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곳에 남아 선교사 지망자
생활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십자가를 사랑하는
길을 걸어갔다.
그는 1864년 6월 13일에 한국으로 떠나게 된 것을 알고 정말 환희에 넘쳤다.
그 날로 당장 이 소식을 그의 본당 신부인 마음 좋은 랑베르 신부에게 전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의 장래는 정해졌습니다.
한국, 한국 만세! 내가 곧 일생을 바쳐 일하러
갈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리고 만일 천주께서 원하시면 제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릴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 이튿날로 그는 이 기쁨을 부모님과 나누고자 했다.
제가 선교사 대열에 끼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
천주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상하신 어머니.
오늘 저는 두 분을 생각하고 두 분께서 오래 전부터
희생하셨음을 알고 있기에 제 기쁨을 같이하시라고
이렇게 서둘러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어쩌면 순교자가 될지도 모르는 선교사를 예수 그리
스도께 바치셨기에 하늘 나라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과 저를 두 분 곁에 둠으로써 얻으셨을
일시적 만족과 바꾸기를 원하시겠습니까?
1864년 7월 15일 다른 선교사 아홉 명과 함께 파리를 떠난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더불어 길고도 험한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은 1865년 5월 27일 내포 지방에서 다블뤼 주교를 만남으로써
끝이 났다.
위앵 신부는 6월 18일 성체 축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십 리 떨어진 황무실(원문에 Hoang-mon-sil로 표기되어 있는
이곳은 충청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다.)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나의 성체 거동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유럽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어느 회장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는 성체 찬양가를 흥얼거렸다. 이후로 그는
쾌활하게 한국식 생활을 시작했다. 소금도 기름도 치지 않고 물로만 익힌
쌀밥을 하루 세 끼 먹고 땅바닥에 깐 돗자리 위에서 잠을 잤으며, 쪼그리고
앉아 먹고 일했으며 찾아오는 사람을 맞았다.
“이러한 풍습에 익숙해지기는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때문에 희생이란느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내 죄를 속죄하고 천주께 조금이나마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스스로 택한 목이 아닙니까?”
위앵 신부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 집에 혼자 잇으면서 위생 신부는
한문 공부를 하고 한국어도 열심으로 공부했다.
“이 한국어 공부도 천주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쉽게 사람을 낙담시킬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천주를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낙담이라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기는 이러한 노력의 댓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눈에 띄게 진전해서
1866년 2월 말부터는 교우들의 고백을 듣고 교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겉인상은 그래도, 그분은 우리들에게 자식을
교육할 줄 아는 친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은 그의 태도를 매우 좋아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교사는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실 참이었고 위앵 신부는
피를 흘림으로써 한국 교회를 기름지게 할 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이 일을 이 선교사는 제 2의 고향인 한국을
순교자의 고장으로 생각하고 들어옴으로써 미리 내다보고 수락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또 선교 활동을 하는 것도 희망했다. 처형당하기에 앞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제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과 또 이처럼
비천한 곳에 와서 죽는다는 것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다만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 괴로울 뿐입니다.”
그는 500여 명의 고백을 들었고 열다섯 내지 스무 명에게 병자 성사를 주었
으며 몇 차례 혼배 성사를 주었는데 그럴 즈음 종교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2월 25일에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통해 베르뇌 주교가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이러한 헛된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3월12일
만주 교구장 베롤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포졸들의 수색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선교사는 한 명도 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주교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함께
3월 9일에 만났는데, 아마 그들에게 어떤 뜻밖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주교는 거더리에 남아 있고 위앵 신부는
삼거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미 마을마다 침입해서 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3월 11일에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위앵 신부에게 전갈을 보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바로 그 날, 위앵 신부는 오랫동안 고해 성사
를 준 다음 미사를 드리려고 할 때 교우들이 그에게 밤에 떠나라고 했다.
그래서 높은뫼(현재의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로 가서 양반 교우인
신 바오로의 집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자 그곳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쇠재로 가서 다블뤼 주교의 전갈을 받았다.
포졸들은 약속을 어기고 전갈을 가져온 교우를 미행했다.
그중 포졸 한 명이 위앵신부에게 물었다.
“당신이 정말 민(위앵 신부의 한국식 성) 신부요?”
“그렇소. 내가 민 신부라는 사람이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소?”
“작년에 왔소.”
“같이 온 사람이 몇이나 되오?”
“여럿이 왔소.”
“rm 중에 어떤 사람은 본 지가 오래 됐소?”
“요전에 오(오매트르 신부의 한국식 성) 신부를 보았소.”
“오 신부는 어디 있소.”
“모르오.”
위앵 신부는 사슬에 묶여 다블뤼 주교 있는 곳으로 끌려왔다.
그 때가 3월 12일이었다. 오매트르 신부도 같은 날 동료들과 합류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체포된 이 세 사람 모두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고약한 그곳 옥에 갇혔다가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그들은 처형
장소인 수영으로 이송되었다.
처형 장소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위앵 신부가 처형되기 조금 전에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의
주교가 목이 반쯤 잘린 채로 비참한 단말마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기진 맥진해 있었으며, 또 한국 교회를 위해 그렇게
일하기를 열망했던 그가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인간적으로는
끔찍한 죽음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감수성이 특히 예민했던 그는 흥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용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 날이 바로 예수 수난
기념일이었는데 스승 예수께서도 그분의 임종의 고통 중에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염오를 맛보지 않으셨던가?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다.”고는
했으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고난의 언덕을 용감하게 올라가 머리를
희광이 앞에 내밀었다. 그의 머리는 단칼에 떨어졌다.
위앵 신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한국! 만일 천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릴지도 모르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황석두(黃錫斗 루가)는 지체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부유한 양반가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황석두가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를 기대해서
어엿한 벼슬길에 들어서게 하려고 착실한 교육을 시켰다.
실제로 황석두(‘재건’이라는 이름도 있다.)는 재주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어서 황석두는 끝내 벼슬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그에게 글을 가르치던 선생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알아 개종한 후로 자신의 믿음을 관직과 바꾸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되면서 과거 공부를 하는 대신 몇 권의
교리책을 얻어 그것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와 같은 변화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그 역시
천주교를 가문을 파괴하는 몹쓸 종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 석두를 천주교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벌써 여러 차례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석두를 불러 말했다.
“어느 양만 가문에서 이런 짓 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이제부터 다시는 천주교 교리 공부는 못한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지언정 교리 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황석두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자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볏짚을 썰 때 쓰는
작두를 가져오게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인다고 엄포해도 교리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목을 이 작두에다 넣어라.”
“왜 제게 그런 명을 하십니까?”
“몹쓸 녀석, 묵숨을 걸고 천주를 섬기겠다고 하니 너를 죽이려고 그런다.”
“제가 천주를 숭배하기 때문에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그러면 목을 작두날 밑에 들이밀겠습니다.”
하인들은 감히 작두의 발판을 밟아 누르지 못했고 아버지는 통곡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황석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다.
2년 동안 그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병이 든 줄
알고 온갖 약을 다 셨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석두는 부모가 실의에 빠져 잇는 것을 보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한마디했다.
“아버님.”
“네가 말을 하느냐?”
이에 그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저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도대체 그 교리가 어떤 것이냐? 내가 좀 읽어보게 그 책들을 가져 오너라.”
책을 읽어 보고 나서 그의 아버지는 슬픔과 경탄이 가득 차서 그 고장에
교리 선생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이렇게 말했다.
“교리 선생을 한 분 모셔오너라.
이왕 우리가 이 교리를 믿을 바에야 몰래 믿지 말고 내놓고 믿자꾸나.”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입교했고 가족도 모두 입교했다.
그것은 1839년 박해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
페레올 주교가 1845년에 한국에 도착한 후로 황석두는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도왔다. 그래서 주교는 황석두의 아내가 그와 헤어져 순결을 지키며 승낙
했기 때문에 그에게 사제품을 주려고 생각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교황청
에서는 한국에 아직 황석두의 아내가 들어갈 정식 수녀원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관면을 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형이 운영을 서투르게 해서 가산을 탕진해
버렸다. 그래서 황석두는 우선 자기의 개인 재산을 모두 가족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 가족을 좀더 잘 도우려고 교우들이 그에게 맡겼던 밑천을
가지고 투기를 시작했는데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황석두와 맺고 있던 관계로 인해서 다른 교우
들이 어느 정도 황석두를 신용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를 멀리했고
이 괴로운 상태는 1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858년에 페롱 신부가 황석두에게 하던 일을 모두 버리게 하고 그를 한문
선생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후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황석두는 내가 (공소에 가서) 성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따라다녔다.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황석두는 조안노(Joanno, Pierre Marie) 신부 밑에서 회장이 되었
다가 다시 베르뇌 주교 밑에서 회장이 되어 주교와 함께 ‘회죄 직지’라는
책을 편찬했다. 후에는 다블뤼 주교 밑에서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의
신심서들과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 편찬과 교정을 도왔다.
그는 그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전날의 채권자들의 빚을 갚으며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신용과 존경을 다시 얻게
되었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을 때, 황석두는 자기의 영적 스승이자 아버지인
주교를 따라가기를 원해서 포졸들에게 자기가 주교의 제자라고 말했다.
다블뤼 주교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하자, 황석두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서는 같이 살았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포졸들은 “오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주교를 따라오지 못하게
말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포졸들은 그 역시 죄인으로 잡아서
서울로 데리고 왔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수영의 관리들에게 한결
같이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상부의 명령을
완화해서 이 사람을 살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석두가 너무 열성을 부리자 짜증을 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천주교를 끊임없이 설교하는 그에게 형벌을 더했다. ‘승정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866년 3월 23일 사교를 믿는 황석두는 그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했다.
그와 함께 갇힌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와 위앵 신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
이 자들은 그들을 맞아 거두어 둔 자들과 공범들을 고발하기를
고발하기를 죽기로써 거절하고 항거하나이다.
황가라는 자는 교활하고 그 악랄한 진술은 그 자를 만 번 죽여도
부족할 것이옵니다. 이 자들을 모두 군 당국에 넘겨 처형하고
효수해서 무리들에게 훈계가 되게 함이 마땅하지 않겠나이까.
같은 날, 국왕이 선고를 승인하고 충청도에서 처형할 것을 명했다.
처형은 성금요일인 3월 30일에 시행되었다. 처형 전에 사형수들에게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황석두는 이런 말을 햇다.
“천주께서 만드신 음식을 먹는 것이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그리고는 즐겁게 먹고 나서 기도에 몰두했다.
다블뤼 주교가 처형될 때, 희광이가 첫번째 칼을 내리치고 나서 돈을 더
내라고 하며 오래 흥정을 하는 동안 황석두는 위앵 신부가 겁에 질려
울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신부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앵 신부는 다시 힘을 얻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황석두 자신은 기쁜 표정으로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주교와 두 신부에 뒤이어 참수되었다 그 시체는 사흘 후 선교사들과
함께 그곳 모래땅에 묻혔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쉰네 살이었다.
장주기(張周基 요셉)는 1803년 수원의 느지지(현재의 화성군 양장면
육당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한문을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 전부를 입교시켰던 열심한 교우인 형수
김 바르바라의 덕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가 스물여섯 살 때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양지로 보내져서 그곳
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잠입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원문에는 최 신부,
즉 Pere Tsoi로 되어 있다.)에게 보례(補禮; 대세를 받은 사람에게 후에
신부가 예식을 갖추어 주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나서 그는 아내와 네 자녀를 가르쳐 모두 세례를 받게 했다.
그가 천주교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고 신앙심이 진실하며 매사에 신중한
것을 보고 1839년 순교한 모방 신부가 그를 회장으로 뽑았다. 장주기는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다했다. 그가 얼마나 열심한 교우였던지
교우들은 그에 대해서 “저런 분은 또다시 없다.”고 말했다.
박해 때문에 그는 네 번이나 산골로 피신해 살다가 깎아지른 듯한 산에
둘러싸인 배론(현재의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이라는 조그만 골짜
기에 자리를 잡고 12년째 살고 있었는데 메스트르(Maistre, Joseph
Ambroise)신부가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그곳에 와서 신학교를 세웠다.
(1855년, ‘성 요셉 신학당’).
이 선교사는 이곳에서 장주기의 집 부속 건물 모양으로 학교를 짓고 푸르
티에(Pourthie, Jean Antoine) 신부가 올 때까지 학생 세 명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푸르티에 신부는 1856년에 와서 프티니콜라(Petituicolas,
Michel Alexander)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신학교를 관리해 나갔다.
장주기는 명의상으로는 신학교의 주인이었고 실제로는 헌신적인 경리
책임자였다. 그의 신중하고도 솜씨 있는 운영 덕분에 이 작은 신학교는
천주교를 금하고 사형으로 벌하기까지 하는 나라에세 11년 동안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교구에 공헌을 했다. 그는 또 이웃에 있는 교우촌
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신부가 어디를 갈 때나 병자를 찾아갈 때
꼭 따라다녀서 선교사의 오른팔 노릇을 했고 마치 수사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
여러 번 어쩔 수없이 이사를 다니는 중에 입은 손해로 파산을 한 그였지만
봉사에 대한 대가는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무사무욕(無私無慾)은 그만큼 더 우러러볼 만한
것이었다.
포졸들이 1866년 3월 2일에 배론 골짜기를 덮쳤을 때 그들은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동네를 떠나가던 노 회장 장주기를 제일 먼저 붙잡았다.
“너는 누구냐?”
“나는 학교 집주인 장낙조(張樂詔’는 장주기의 다른 이름이다.)요.”
그러자 한 포졸이 말했다.
“그러면 네 서양인 선생들과 같이 가자.”
장주기는 그의 스승들과 같이 있게 된 것이 매우 기뻐서 누가 그의 석방을
위해 부탁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그가 이렇게 말했지만 푸르티에 신부는 이 노인의 공로가 크다는 것을
알고, 또 앞으로도 많은 구원의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포졸들에게 돈을 집어 주며 부탁을 했다.
“이 불쌍한 노인을 잡아다 무얼 하겠소?
제 발로 걸어서 무덤으로 가게 내버려 두시오.”
그러자 포졸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군사들이 체포된 사람들을 데리고 그 이튿날에 떠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장주기는 선교사들과 같이 집에 그대로 있었다.포졸들은 천주교인들의 집을
약탈해서 배를 채웠다.
3월 2일에 서울로 출발했는데 장주기는 소를 타고 멀찌감치 두 신부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 것을 본 신부가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이 노인을 그냥 놓아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니 저 노인을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알겠소.”
포졸들은 장주기에게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수 없이 신학교로 돌아와 닷새동안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먹을 것이 떨어졌으므로 배론에서 30리쯤 떨어진 노럴골에 살고
있는 어느 교우 집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들의 대부분은 배론
에서 신부를 체포할 때 있었던 자들이라 회장을 알아보고 말했다.
“네가 여기는 뭣하러 왔느냐? 네 뜻이 수상하다.”
그리고는 곧 그를 체포해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제천 관장에게로 끌고갔다.
관장은 장주기에 대한 고소 내용을 들은 다음 이에 관해 서울에 의견을
물었다. 서울에서는 장주기가 정말 서양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그를
서울로 보낼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배교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내
라는 회답이 왔다.
관장은 신문을 시작했다. 신원과 천주교 입교 여부 등 통상적인 질문을
끝낸 다음 물었다.
“네가 정말 서양 신부들 집의 주인이냐?”
“예, 틀림없습니다. 제가 그 집의 주인입니다.”
“거짓말 마라. 네가 아니고 이 아무개라고 하던데?”
관장은 신학교에 살면서 한문을 가르치던 이경주(이 베난시오)라는 양반
선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집주인입니다. 이씨는 그저 학교의 선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너를 서울로 보내겠다.”
그래서 장주기는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장 회장의 위엄과 성실한
태도에 감동해서 그를 살리고 싶었고 그의 부하들도 장 회장에게 유리하
도록 말을 했다. 그러나 그를 살려주게 될 “나는 천주교인이 아닙니다.”
라는 한마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그를 도무지 동정할 필요가 없는
바보로 취급했다. 관장이 다시 중앙 정부에 의견을 물으니 중앙에서는
그를 서울로 데려오라고 포졸 네 명을 내려보냈다.
포졸들이 여러 천주교인이 누워 있는 옥 앞에 와서 소리쳤다.
“서울로 가게 된 자는 일어서라.”
그러자 곧 장주기는 기쁘게 그들 앞에 나섰다.
“겁내지 마시오. 서울까지 잘 모시겠소.”
그의 당당한 풍채에 놀란 포졸들이 말하자 장주기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무섭겠소? 오히려 나는 원을 풀게 됐소.”
그들은 회장에게 차양이 내려진 노란 패랭이를 씌우고 붉은 바를 걸쳤
으나 포박하지는 않았다. 구류간에 갇한 후, 장주기는 문초를 받았고
포도청에서 찾고 있는 교우 이경주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그는 배교하기를 계속 거부했고 서양 신부들의
집주인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866년 3월 22일자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왕명이 기록되어 있다.
다블뤼, 오매트로, 위앵 등 서양인들과 사교를 따른 황가를
모두 포도청에서 충청도 수영으로 보내 참수하고 효수해서
훈계가 되게 하라.
1866년3월 24일자 ‘승정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포도청에 갇혀 있던 죄인들, 즉 다블뤼, 오매트르, 위앵, 황석두, 장주기 등
도합 다섯 명이 포졸들에게 넘겨져 충청도의 수영으로 압송되었음을
국왕께 아뢰옵니다.
충실한 회장 장주기도 주교와 그 일행과 함께 처형장으로 보내졌다.
장주기의 머리는 단칼에 떨어졌는데, 때는 1866년 3월 30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예순네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