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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1:13)장벽 없는 사랑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이요 향낭이요"(13절)
서는 유일하게 정경에 포함된 남여간의 사랑 이야기로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 8일째에 아가서를 노래하여 아가서를 성전의 지성소에 비유하였습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구약 속의 신약으로 이방인(교회)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가서는 다른 책들과 아주 다른 문체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히브리인들의 시적 음율을 이해하면서 그 노래의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지 연결된 병행구를 잘 살펴면 노래 속에 은유된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이 진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남여간의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묘사한 곳은 아가서 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중심이지만 남여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에 관한 내용은 한 귀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로 하여금 가장 가깝게 이햐하기 위한 대유적 표현이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남여간의 애정적 사랑을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가서를 대할 때 이 땅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들의 간절한 사모의 마음과 모든 장벽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이 인간이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측면에서 느낄수 있도록 대유된 사랑의 노래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할 사람들의 이성적 사랑의 출발선이며 교훈적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I. 사랑의 출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2절)
저자는 1장1절에서 '솔로몬의 아가라' 기록하여 저자와 제목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가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비교급 용어로서 가장 탁월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솔로몬의 인생 속에서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사랑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은 사랑에 빠진 남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첫마디에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왕을 지칭한 것이며 '네 사랑'은 복수로서 왕을 사모하는 여인 중의 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글을 읽는 형제자매님들은 이 순간부터 자신이 왕자와 공주임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a. 포도주 속성 우리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라는 말씀에서 이성적 감정의 출발이 여인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라'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남여의 사랑은 포도주와 같이 달콤하고 열정적이고 마취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왕과 여인의 사랑은 포도주와 같은 것으로 출발된 인위적인 마취에서 충동 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기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자에게 줄지어다'(잠31:4,6) 기록하였으며 그 이유에 대하여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 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잠31:5)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11)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디 포도주만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취하게 하는 물리적인 요소들을 언급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치의 여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며 바울은 속병을 앓고 있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사용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만약에 포도주가 인간에게 해악을 미치는 것이라면 주께서 기념하라 언약하신 마지막 막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것은 포도주의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을 취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흥분하게 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릇치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포도주는 노아의 홍수 이 후 이 땅의 물질이 산화되면서 노아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체 누어 자식들에게 하체를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여 결국은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따라서 여기서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란 왕과 여인의 사랑이 물리적이나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한 것으로 남여 간의 사랑의 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남여가 만나면 술에 취한듯이 서로의 마음이 이끌려 입맞추기를 연민하는 마음이 일어나 서로 이끌리게 되는데 그 사랑의 이끌림이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물리적이고 충동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남여들이 포도주와 같은 사랑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후회를 쌓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닫고 그 질서안에서 사랑을 완성 시켜야 할 것입니다.
b. 사랑의 이름 솔로몬은 3절에서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처녀들이 왕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처녀로 명시된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기름'은 열매를 짜서 얻은 것으로 기름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실생활에 유익을 주는 귀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와 같이 기름은 인간의 실생활에서도 유익하고 귀한 것이지만 기름은 최종적 결실인 열매를 짜서 얻은 것이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지혜와 지식을 갖춘 인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성은 오랜 가르침과 경건한 삶과 경륜을 통해서 연마된 지혜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또한 아름답다는 말은 원래 여성적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울 美가 큰 수양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남성적인 말로서 부족함이 없이 충분한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은 모세와 요셉과 다윗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다'는 말은 그의 인격적 결정체인 고귀한 인품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감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처럼 아름다운 한 남성의 모습은 백말을 타고 나타난 왕자와 같지 않겠습니까?
또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는 말은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완성된 인품과 인격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특별한 일을 위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의미없는 이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는 말은 지혜와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한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라는 말은 세상에서 덕망 받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를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남자라면 온 세상의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되고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연일 대국민 이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차라리 대통령이 말을 줄여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쏱아 낼 것이 아니라 묵묵히 기도하며 그윽한 향기름을 통해 덕망있는 이름을 쏱아 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 나라의 모든 처녀들이 그에게 반해 대통령을 사랑할 것입니다.
c. 합리적인 사랑 솔로몬은 4절에서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도다"노래 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누가 하는 것인지 명확히 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어느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이 이어지기를 원할 때 그 누구인가에게 마음의 호소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내 사랑의 천사에게 부탁하는 말일 수도 있겠구요.
흥미로운 것은 침궁으로 이끌어 들인 여인이 '나'에서 '우리가'로 바뀌어 간 것입니다. 여하튼 이 복받은 남자의 침궁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고 있습니다. 예수의 침실에 들어선 거룩한 신부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 말에 열기집 마다할 사내 없다는 말이 잇습니다만 남자들이란 묘해서 이 땅의 모든 여인들이 자신을 처다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허풍도 떨고 여러 달콤한 말로 연인들을 휴혹하려 합니다만, 사려가 깊은 여인들이야 이러한 유혹에 넘어갈리가 없지요.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여자들이 달콤한 포도주에 취해 야수의 침실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리니 바른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뭇 여성들을 사로잡는 무기는 달콤한 포도주가 아니라 쏟은 향기름 같은 아름다운 이름인 것입니다.
II. 사랑의 얼굴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것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7절)
솔로몬은 5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 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구나 "노래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인격의 왕자를 사로잡은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왕이 침궁으로 끌어들여 수많은 궁녀들의 찬사와 질투를 한몸에 받은 여인은 얼굴이 검은 게달의 장막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게달의 장막이란 이스마엘이나 에서족들이 광야에 거하는 장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흠모할 것이 조금도 없는 가치없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이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귀절입니다. 여기서 휘장이란 여러가지 색깔의 실을 정교하게 통으로 짜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드리운 천입니다. 요새로 치면 커텐입니다.
이 휘장은 성막을 이동할 때 증거궤를 덮어으며 이 외에 성막 입구에도 또 다른 휘장이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휘장은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표시인 것입니다(출16:31-35, 37). 그러므로 솔로몬의 휘장이란 왕의 임재와 위엄을 구분하는 은밀한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다이루셨다 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제사장의 대리 역활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몸으로 산제사를 드림으로 그를 믿는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지성소에 친히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a. 여인과 포도원 지기 여인은 6절에서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럼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의 외모를 비웃지 말라고 하며 자신의 출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거므스럼한 것은 근본적으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어미의 아들들이 미워했기 때문이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그들은 성경 밖에서 자기편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다'는 것은 본인이 이처럼 외적인 모습을 가추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합당히 받아야 영혼을 위한 합리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다'는 말은 그들의 세상에서는 여인은 다만 남자들의 향락의 도구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아들들이 마시고 즐길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메시야를 구하는 여인들을 모두 세상의 아들들의 포도원 지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미의 아들들이니 태어남으로부터 주어진 운명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여자는 '너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로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은 메시아를 낳을 것을 서원하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 내려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좋은대로 아내를 삼아 그 땅에 아낙자손들을 낳았습니다(이 말씀은 읽는 분들의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인은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서술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생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하여 인간의 영혼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이라'(롬8"19-20) 하였습니다.
b. 목자를 찾는 영혼의 연민
솔로몬은 7절에서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것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노래하였습니다. 이 귀절은 영혼의 목자를 찾는 여인의 소망과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의 영혼은 왕이 침궁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직은 왕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는 왕의 소리를 찾아 목장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한 때 갈급한 심령으로 여기저기 말씀의 목장을 찾아 헤데던 시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나의 영은 내 영혼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있었지만 내가 그를 발견하기까지는 청춘을 모두 쏟아야 했습니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을 모두 팔아 버린 후에야 숨겨진 보물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온전한 예배 가운데 들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의 흐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 유대인과 또 그리심산 산에서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는 사이 이 여인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령한 예배를 만나기까지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I. 왕의 여인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15절)
솔로몬은 8절에서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짜라 목자들의 장막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어다"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참 목자를 고대하는 여인에 기도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예정섭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 우리에 들지 못한 또 다른 양들을 생각하는 목동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참목자와 삯군을 말씀하시며 '내게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은 양떼 들 속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염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를 씻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수넴 여인이 자기 딸에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주께 매달렸을 때 주님은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거절 하셨습니다. 이 때 여인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녀들의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네 딸이 구원을 얻었다 하셨습니다.
오랜세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사마리아를 죄인 취급해 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온전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여 유대인에게서 경멸을 받아 왔으며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는 복음을 향한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예배가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갈급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라도 치고 있다면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주께서 부르신 그들을 침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a. 도전적 사랑 9절에는 "내 사랑아 네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바로의 준마란 애굽의 바로왕에게 총애받는 말을 말합니다. 바로 왕은 그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며 또 전쟁터를 달리게 됩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말은 그 기개가 당당하여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가운데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삼천명을 더하는 제자들이 더해졌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게달의 장막같고 거을린 얼굴로 세상의 아들들을 위하여 포도원을 가꾸던 사람들이었지만 후일 그들은 솔로몬의 장막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수많은 젊은 사역자들은 세상 가운데 사단의 영역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도구로 종횡무진 하며 세상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 은혜로 지금은 사단의 세계를 정복하는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또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인의 기질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적당히 이국적이고 또 도전적인 여인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체험해 보지 못한 이방여인만이 베풀 수 있는 향짙은 냄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지쳐있을 때 그 지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요조숙녀가 아니라 부끄럼없이 달리는 말같이 사랑의 묘미를 아는 여인입니다.
이런 여인을 만난 왕은 말할 것도 없이 "네 두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외칠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꿈은 여인의 품에서 이루어 진다고 하는가 봅니다. 남자의 열정을 불태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여인이 있다면 그 남자처럼 행복한 남자는 없을 것입니다.
b. 사랑의 타이밍 아가서 기자는 12절에서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을 토하였구나"노래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타이밍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왕의 필요를 절묘하게 만족 시키는 사랑의 센스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여우같은 마누라하고는 살아도 곰같은 마누라하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필요한 때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열 수 있는 여인의 지혜 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드 향이란 여인이 첫말 밤에 자기 몸에 부어 잠자리를 준비할 때 사용하는 귀한 향료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머리에 부었던 향료입니다.
왕의 마음을 항시 즐겁게 하는 지혜로운 여인은 항상 나드향을 발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향은 하나님 앞에 쏱아 내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 보좌에서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계5:8)기록히였습니다. 주님은 지금 보좌 위에서 우리가 발한 나드향에 흡족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하여 기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이요 향낭이요" 노래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 여인의 마음에서 쏟아내는 열정은 왕의 품을 그윽한 향으로 채울 것입니다. 이어 왕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멜화송이로구나"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엔게디 포도원은 왕실의 포도원으로 왕의 포도원 엔게디에 피어난 고벨화는 신부를 치장하는 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여인은 왕의 눈길을 포도주에서 이끌어 내기 충분한 아름다음과 향을 지녔던 것입니다. 또 왕은 그녀를 향하여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 노래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이 선한 것을 바라 보는 심성을 칭송한 것입니다.
c.영원한 궁전 이제 솔로몬은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이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레로구나" 노래하였습니다. 화창하고 푸른 참상은 왕과 그녀의 시들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또한 백향목은 궁전을 짓는 귀한 목재이며 잣나무 또한 좀과 벌레가 먹지 않는 향이 그윽하고 곧은 나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 밖에서 여자들의 조롱을 받던 이방 여인이 왕의 침실을 장악하고 이제는 그와 함께 영원한 집을 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침상 우리의 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안에 펼쳐진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얼굴이 검게 그을린 포도원지기 같지마는 우리가 양떼를 따라 목자들의 뒤를 따를 때 우리의 발걸음은 왕의 왕이신 침삼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
(아가2:16)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사랑
(아가2:16)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우리는 앞에서 사랑의 속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먼저 사랑은 포도주와 같이 취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취하지 말아야 하고 이성적이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주체인 남자의 인격이 선하고 이름다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장벽이 없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뻔뻔하고 도전적인 여인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인의 감정은 용감하여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으로부터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는 이유가 원수의 머리를 부술 사내아이를 낳기 위해 새롭게 셋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를 얻기 위한 여인의 투쟁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왕의 마음을 몰약에 취하게 합니다.
오늘은 남녀 간의 사랑의 속성을 살펴 보는 두 번째 시간으로 새랑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만약 남녀의 사랑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녀간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1장에서 여인의 사랑은 뻔뻔하고 도전적이라서 한번 남자를 마음에 품으면 사랑의 향낭 몰약을 품어내어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남녀 간의 문제는 여자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은 사랑의 묘약을 합당하게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1절에서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사론은 지중해 연안에서 갈멜산에 이르는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비옥한 땅 사론에 핀 수선화는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신랑의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신랑이 신부를 데려 오기 위해서 그 신부에 합당한 사례를 신부 부모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만약 신부가 이혼당하면 혼자서 살아 갈 위자료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남자의 아름다움이란 사론의 수선화처럼 기름지고 풍요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1장에서 언급된 남자의 아름다운 향기름입니다.
이사야는 몰락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레바논은 부끄러워 마르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목엽을 떨어치는도다"(사33:9)슬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레바논이 이스라엘의 기백과 이상이라면 사론은 풍족한 이스라엘의 젖이며 갈멜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론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이상을 성취할 힘과 능력인 것입니다. 남자에겐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신부감을 얻기 위한 남자들의 비참한 투쟁을 노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으로 받은 형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저주 받은 땅을 갈며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사론의 수선화가 되고자 땀을 흘리도록 셋팅된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입니다. 그는 지상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열국의 왕입니다. 사론의 수선화처럼 부족함이 없는 궁전의 주인입니다. 말 한마디면 천하가 일시에 손아귀에 들어 올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자신을 가리켜 '골짜기의 백합화'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왕이라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생연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신세는 골짜기의 백합화일 수 밖에 없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백합은 최고의 그윽한 향기를 자랑하는 순결의 꽃입니다. 수선화와 백합은 신랑과 신부를 꾸미는 꽃 중의 꽃입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있는 백합이라면 그 향기가 아무리 그윽하고 순결하드라도 외로운 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사론의 비옥한 땅의 수선화와 같다고 해도 님 없는 궁전은 꿀 없는 꿀단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들은 아름다운 배우자를 취하기 위해 두 가지 이상적인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샤론의 수선화처럼 풍족함이요 다른 하나는 골짜기 속에서도 겸손하여 고고한 향기를 잃지 말고 성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부족함 없는 에덴동산의 주인이어도 짝없는 비둘기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왕이라도 만사가 귀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II. 여자의 입맛 (3-5) 그러면 여자는 어떨까요? 솔로몬은 2절에서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연분을 만나지 못하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그윽한 향기와 순결한 자태를 갖고 있어도 사랑하는 서방님을 만나지 못한 여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일 수 밖에 없습니다. 향이 좋고 순결한 여자는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백합화 같은 여인을 만나면 세상 남자들은 그 꽃을 꺾기 위해 군침을 질질 흘리기 마련입니다. 그때부터 남자들은 눈이 반짝거리며 헛방귀를 풍풍 뀌며 벼슬을 세우고 날개를 펴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며 여자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간 여인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 한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가리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자란 요염한 여우와도 같습니다. 자기 입맛을 채우기 위해 젓가락만 들고 다니는 실속파입니다. 남정네야 외로움에 지쳐 속이 까맣게 타버리던 말던 여자들은 수풀 가운데 가장 좋은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실실 여유를 부리며 콧구멍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강남의 성형외과들이 돈을 잘 버나 봅니다)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 앞에서 잘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모두 먹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남녀가 만나면 맛있는 것 먹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더우기 남자가 베푼 식탁에서 맛있게 먹어대는 여자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아마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요즘 남자들 중에는 여자들이 사주는 밥을 즐겨먹은 쫌팽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런 늑대들은 결국 헛물을 키는 겝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늘에 앉아 잘 먹어 주는 여자를 보면 남자들은 넋을 잃고 콧방귀를 뀌며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 여명의 후궁을 둔 연애박사 솔로몬도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 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4절) 읊었습니다. 여기서 '내 위에 기'란 남자의 영역을 표징하는 깃발을 말합니다. 여기서 잔칫집이란 연회 홀을 말합니다.
남자들은 창조로부터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싶도록 셋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혹하여 죄에 빠뜨린 뱀의 머리를 부수기 위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 여자를 보는 순간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도장을 찍고 하와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로 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사람은 사랑의 병에 걸리고 맙니다.
III. 사랑의 열병(6-7) 그렇지만 이제부터 문제는 여자에게 일어납니다. 자기 감정에 빠져 절제를 하지 못하고 남자의 그늘에 앉아 입맛에 끌리는 대로 사정없이 먹던 여인은 이 남자가 요구하는 사랑을 쏟아 내기에 역부족입니다. 여왕벌엘 빨린 숫벌은 죽고 만다고 합니다만 멋진 남자의 덫에 걸린 여자는 그 남자의 허기진 사랑을 채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야만 합니다.
이에 여인은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4절) 하고 주변을 향해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다른 남자에 빠진 여자를 누가 도와 주겠습니까?
이쯤이면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삽질을 멈추고 도끼자루를 거두게 됩니다. 덫에 걸린 암사슴을 침실로 메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연애박사 솔로몬은 남자 향취에 취해 넋나간 여자의 모습을 가볍게 품에 넣고 맙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 얼마나 신나는 달밤입니까?
그러나 이쯤되면 여자나 남자는 수렁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말에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랑에 빠진 솔로몬은 나라 일이든 예배든 눈에 들어 올리가 없습니다. 젯밥이 눈에서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7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못말리는 사랑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긴 여행이며 감당하기 힘든 전쟁의 시작입니다. 이 여행 속에는 얼굴도 모른채 수백 리 길을 달려가야 했던 리브가의 열정과 아들을 얻기 위한 애절한 라헬의 눈물과 갈급한 사마리아 여인의 사랑의 목마름이 깃들어 있습니다.
IV.사랑의 투쟁(8-9) 8절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기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산에서 달리고 산을 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때 핸드폰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요즘에야 아이나 어른이나 핸드폰이 있고 또 인터넷이 널려 있어서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실시간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금방 헤어졌음에도 연방 문자를 날리고 있습니다. 자면서도 문자를 받으려고 핸드폰을 끼고 잡니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먼저 결혼한 문의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내가 개설한 인터넷 클럽을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끌어낸 장본입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벤처를 운영하는 형제는 남부럽지 않은 믿음의 가정의 외아들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만 서른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 광복절 날 우리는 두 번째 오프라인 행사로 815 러브 정팅을 개최하였는데 60쌍의 형제자매들이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형제 한 사람이 불참하여 팀장인 문의배 형제가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영이라는 예쁜 자매와 1지망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형제는 부천에 살고 있었고 자매는 분당에 살고 있었는데 6개월 동안 사귀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떨어져서 지낼 수 없다고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이들은 저녁마다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승용차 데이트를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가 자매를 집에 데려다 주면 또 자매가 형제를 집에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또 형제 집 앞까지 동행하고 이렇게 밤을 세운 것입니다.
어느 날 게시판에 그 형제의 공개 구혼 프로포즈가 올라 왔습니다. '사랑하는 영이야 우리 결혼하자 더 이상 떨어질 수 없구나 낮에는 일을 해야되는 데 너를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밤새도록 너의 집 우리 집 앞을 왔다 갔다 하느라 진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러니 우리가 헤어지지 않기 위해 결혼하자' 나는 이 글을 보며 정말 못 말리는 사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계속하여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연애 중에는 혹시나 어떤 놈에게 빼앗길까봐 안달이 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테스트하며 감시를 합니다. 이처럼 남자는 여자를 자기 품에 넣어야만 잠을 자게 마련입니다.
V. 사랑의 역사(10-1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리브가가 이삭을 찾아 달려 온 수 백리 길과도 같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다섯 번의 남자를 갈아 처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음성은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언약의 잠에 빠진 신부 된 교회를 향한 주의 음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A. 사랑의 고난 그는 "겨울도 지나갔고 비도 그쳤고"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사랑이 이루기 까지는 추운 겨울도 마다하지 않았고 쏘나기도 맞아야 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이 년을 참아 왔습니다. 겨울이 열두 번 지났고 장마비에 모든 것이 떠내려 갔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은 그의 사랑이 나를 내 마음과 소망을 붙잡고 있기에 나는 지금도 견디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솔로몬은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리는구나" 이처럼 사랑의 열매는 오래 참음으로 시작됩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죽어버린 듯한 나무 가지에서 돋아난 사랑의 싹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켰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한탄하였습니다. 반구는 하나님의 제물로 사용하는 집비둘기를 말합니다. 이 땅의 멸망 속에서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 왔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자기의 때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는 비둘기와 같습니다.
B.잠에서 깨라 계속하여 성경은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무화과나무 열매는 우리의 지혜를 더하고 포도나무 향은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4)라고 애절한 노래를 읊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과 은혜의 축복을 누렸다 해도 그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면 당신의 인생은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잠든 비둘기일 뿐입니다.
당신이 오랜 세월을 예수를 믿어 그의 사랑을 알고 또 사랑의 언약을 받았다 하드라도 아직도 잠에 취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이 보낸 추운 겨울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당신을 위해 준비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무슨 소용이며 포도나무 꽃의 향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지금도 당신을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C. 여우를 잡으라 그러면 이처럼 애틋한 사랑의 열정과 기나긴 사랑의 역사를 가진 연인들 사이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 날까요? 이혼한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말한 설레임과 사랑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의 불타는 사랑 없이 결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여우는 광야에 스스로 굴을 파고 사는 짐승으로 동물이나 사람을 홀려 헤치는 야행성 동물입니다.
에스겔은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겔13:4)하였으며, 주님은 예수를 잡으려는 헤롯을 가리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여우란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종교를 권좌의 방편으로 삼는 지도자들을 빙자한 말씀입니다. 지금 당신은 솔로몬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VI.양 떼에 속한 사랑(15-17)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부의 하나가 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가리켜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속하여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주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여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온다'(요10:3,4) 하였으며 다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하셨습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의 필연적 속성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원리를 설정하셨습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14:20)하셨습니다. 이로서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증거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 열매를 통하여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요15:4)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하셨습니다.
끝으로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백합화 같이 겸손한 자세로 순결하여 지극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하였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5:16-18)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순결함 속에서 자기의 양떼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중보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2,23)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여 주를 상실하였는지 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서 3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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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3:5)사랑의 투쟁
(아가3:5)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서 3장입니다. 우리는 아가서 3장에서 연애박사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부감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아가서는 교회를 사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노래입니다만 유일하게 성경에서 남녀의 사랑을 서술한 책이기도 합니다.
*밤마다 궁상을 떨어 봐도,,
솔로몬은 1절에서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찾았구나 찾아도 찾지 못하였구나"하였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선남선녀 여러분들도 배우자를 생각하며 긴밤을 지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요즘같으면야 테레비야 인터넷도 있고 문만 나서면 반겨줄 곳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상당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젊은시절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태원의 밤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를 향한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에 사모쳐 있으면서도 그 당시 나는 밤의 열기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나의 이러한 생활에 대하여 그 아무도 책망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금요일만 되면 그 일대의 구역성도들이 몰려와 손뼉을 치며 찬송하며 나의 사업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해서 망하게 하셨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잘 되어 나갔다면 나는 문선명이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쨋던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홀로 세워야 하는 침상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야 이제 그러한 시기는 다 넘겼습니다만 깊은 밤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젊은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릎이 시렵도록 애절하게 님을 그리면서도 님을 찾으려는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5년동안 인터넷 카페 크리스챤 클럽을 운영해 오면서 젊은이들의 만남과 교제를 위한 모임을 주도해 왔습니다. 두달에 한번 꼴로 계속 행사를 이끌어 오면서도 행사 때만되면 이것 저것 재면서 요리조리 비켜 나가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대게 그런 형제자매들은 지금도 자기 침상에서 사랑을 찾고 있을 겝니다.
밤이면 밤마다 침상에서 뼈를 말리던 솔로몬이 이제 못참겠다 꾀꼬리 하고 튀쳐 나와 하는 말이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 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발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연은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간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노총각 초쳐녀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농촌에 신부감이 없어 외국에서 신부수입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한국인의 믿음을 동남아시아에 넓히시려는 모양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기우기웃하면서 배우자를 찾아 나섭니다. 우리 교회 어떤 청년은 큰 교회에 가면 자매들이 많을 것이라 뛰쳐 나갔지만 대형교회는 밀물과 썰물이 들어 오듯 밀려오고 밀려 나가기 때문에 이상형을 찾기는 커녕 마주서서 얼굴을 처다볼 기회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성에 있는 것도 큰 길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큰 길로 나가서 듀오나 씨웨딩 같은데 가입을 하여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였나 봅니다. 요즘 듀오와 같은 결혼 중매싸이트의 가입비는 정말 작난이 아닙니다. 얼마전 저는 기독교 결혼 씨이트 중 가장 크다는 씨웨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초창기 때만해도 30만원선이던 것이 이제는 최고 가입비가 2백만원이 넘었습니다. 정말 돈없으면 결혼도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곳에 가입을 한다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연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듀오와 같은데서 선을 보고 결혼한 형제자매들이 몇년도 살지 못하고 이혼을 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나는 크리스챤의 결혼에 대해서는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배우자도 함께 지으셨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연의 만남을 각 사람의 인생경륜을 통해서 합당한 사람을 발견하도록 예비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에 대한 의지가 있느냐에 달렸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면 무조건 결혼을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우리 주변의믿음생활에 지나치게 충실한 사람들 중에 노총각 노처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결혼에 대해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결혼을 인생의 제일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들어 내 주변에 사오십이 넘은 사역자들이 뒤늦게 결혼을 하고자 야단인 것을 봅니다. 그 좋은 시절 어디에 두고 황혼길에 안달이 났는지 참으로 이해 않됩니다. 그들은 모두 주께서 배우자를 준비하실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독보적인 생각에서 자기 주장을 펴왔던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에는 차라리 독신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밤마다 목을 조여 오는 열정을 감당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중매장이를 찾아라
연애박사 솔로몬은 스스로 찾으려고 나섰던 자신의 생각을 고쳐 먹고 중매장이에게 부탁하기에 이릅니다. "성중의 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이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나서도 성사하지 못하는 것은 내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성중에 순행하는 자란 성내의 야경군과 파숫군을 말합니다. 아마 이들보다 성내의 사람사는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중매쟁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마 서울 시내 크리스챤 중매장이들 치고 결혼 적령기의 형제와 자매들을 나만큼 많이 만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 경우 여간해서 남녀 사이에 들어 가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내 주변에 서성이며 나를 가까히 한 형제자매들에게는 은연 중 많은 자리를 주선하고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형제들은 내 주변을 서성거리며 자매들의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만 이것은 매우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내 주변에 나와 가까히 지내며 내 사랑을 받아 온 형제들은 모두 결혼을 하였으니까요.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이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자신을 부끄러워하면 그는 평생 결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부끄러운 부분은 누구든지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부족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결혼할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밤마다 침상에서 궁상 떠는 것보다 또 이 거리 저 거리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나를 잘 알고 또 나의 배우자를 인도해 줄 정직한 중매쟁이를 만나 부탁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왕 중의 왕 솔로몬도 이렇게 해서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4절에서 솔로몬은 "그들이 떠나자 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떠나자 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떠나자 마자라는 것은 솔로몬이 자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 그들의 갈길을 막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야곱이 커다란 문제에 빠져 있을 때 천사를 지나가지 못하게 했던 일을 알고 있겠지요. 솛로몬은 이들에게서 마음의 사랑하는 여인의 프로필을 찾아 내기까지 술과 떡을 대접하며 주머니를 두둑히 채워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이 내용을 진작 보았어야 할 것인데 싶었습니다. 아마 내가 이 글을 몇년 전에만 보았다면 지금쯤 상당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배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고약하게 나는 양복 한벌도 얻어 입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쟁이 6년에 양복은 커녕 와이셔츠도 변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내가 부주한 금액의 배만큼만 헌금을 드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양복값을 두둑히 받으려면 내가 부조금을 많이 내야 하는데 배주고 배속 빌어 먹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내 앞에 돈을 싸들고 올 날이 있겠지만 아마 그때는 나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승락은 필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터득해야 할 것은 '나의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않았다'는 가르침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결혼 혼담이 오가던 중 깨어진 일이 여러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의 조건적으로 부합된 결혼을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나를 잉태한 자의 방' 즉 어머니에게 이끌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대게 자녀의 결혼은 어머니가 승락하면 성사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망설이는 결혼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나를 낳은 어머니 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나를 낳은 어머니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나를 낳고 길러 내 인격을 아는 어머니가 최종적인 심사를 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내 마음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다 하드라도 어머니의 눈은 내가 볼 수 없는 또 다른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몇년전 어느 자매가 시어머니 될 분의 눈 밖에 나서 깨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싹싹하고 부지런하여 요즘 며느리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로 키운 자기 아들의 성품을 잘 아는 어머니는 자기 아들보다 드센 며느리감이 합당치 못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의 시기와 충동질로 파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모 마리아도 천사의 헌몽이 아니었으면 파혼당할 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결혼전선에도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교회생활
솔로몬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여자들이란 하늘의 천사라고 보아도 좋겠고 또 함께 동역자된 성도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향방이 같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얼마전 최근에 결혼한 신랑신부가 인사 차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한지 서너달이 되었는데도 아직 주일에 서로 각자 나가던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부부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문제는 속히 통일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믿음을 갖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파를 초월하여 이제 부부가 진정한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 종교적 상황으로 보아 믿음의 주최는 역시 율법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현몽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일가 친지가 있었고 또 그들의 마을에도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결혼에 대하여 이렇궁 저렇궁 말들이 많았겠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말씀을 따라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은 전쟁이다
6절에는 위세당당한 신랑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쁜 신부를 맞는 신랑처럼 위세가 당당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신부을 맞는 것은 신랑이나 나는 신랑의 소리를 듣는 기쁨에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결혼식장에 신랑 옆에 서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아가서 기자는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칼을 찼느니라" 노래 하였습니다. 마치 결혼 첫날밤이 무슨 전쟁터를 방불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살펴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그 기쁨에 빠져 누룩에 집안에퍼지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두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의 결혼의 의미를 잊어 버리고 자기만족과 부와 향락을 위한 생활로 빠져들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는 아담에게 배우자를 허락하시기 전에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오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동산을 잘 가꾸고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군사용어로서 에덴동산을 해할 어떤 존재가 이미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로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전4:9-10)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부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동역자됨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삶의 상급이 주의 날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부의 사랑의 원리를 가리켜 이 비밀이 크도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였습니다.
또 전도서 기자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부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결혼은 전쟁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그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만 결혼 후에 더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입니다. 결혼은 일생에 한번 있는 의식이지만 결혼 생활은 주 앞에 펼쳐진 일생이며 삶의 종착역인 것입니다.
아가서 기자는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보더 더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입니다.
집이 아무리 크고 아름답더라도 집안을 어떻게 꾸몄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며 또 그 집안에 누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가정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넘치는 교회생활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자의 지혜
아가서 기자는 끝으로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 날 마음이 기쁠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노래하였습니다. 물론 왕관은 그 아버지 다윗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권의 후계를 잇기 위한 투쟁은 치열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어미 밧사바의 지혜가 아니었으면 왕관은 다른 아들에게 내려 갈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의 승패가 여자들에게 있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우리말에 집안에 여자가 잘들어 오면 흥하고 잘못들어오면 사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일과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이 혼인에 관한 글이 남자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디 좋은 배필을 만나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가4:9)마음의 유혹
(아가4:9)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가서 4장은 솔로몬의 마음을 송두리채 사로잡은 슐람미 여인의 자태에 대한 내용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어머니의 방까지 끓어다 놓은 솔로몬이 이방여인에게 마음과 몸을 다 빼앗기고 넋을 잃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자기 침실에 들여 놓은 모든 남자들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1절에서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숡에 누운 무리 염소같구나"하였습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 제일 먼저 보는 곳이 눈이라 하며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털을 보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은 그 심성이 선하고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또 머리털이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같다고 한 것은 길르앗은 목축하기에 좋은 울창한 숲으로 다윗의 은신처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길르앗은 역사적으로 이방인과 접전이 많았던 곳으로 스가랴 선지자는 길르앗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슥10:10) 따라서 길르앗에 누운 염소의 무리를 보는 것은 화평한 시대를 맞은 주인의 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제 솔로몬은 이방인 슐람미 여인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그는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깍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잘 낳을 여인의 건강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는 오복 중의 하나로 자기 몸을 잘 보양하여 후일 귀한 아들을 낳게 합니다,
3절에는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기록되었습니다. 입술이 홍색실 같다고 한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홍색의 입술은 건강한 입술 즉 옳은 말을 담은 입술을 의미하며 또 실 같다 한 것은 입술을 쉽게 나불거리지 않는 과묵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입은 어엽쁘다 한 것입니다.
뺨이 너울 속의 석류한 쪽 같다는 표현은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처럼 아름다운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솔로몬은 정말 멋을 아는 남자 중의 남자입니다. 뺨이 너울 속에 있다는 것은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들에서 배외하는 신랑 이삭을 발견하고 얼굴을 너울에 가렸습니다. 또한 잘 익은 석류는 그 속의 붉은 석류알을 쏟아내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것은 매혹적인 슐람미의 인품을 말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4절에서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다'하였습니다. 우리 말에 목이 긴 여인을 미인이라 합니다. 목은 머리와 몸을 잇는 중요한 부분으로 바르고 곧은 목은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목이 곧은 자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솔로몬은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하였습니다. 성경이 여인의 유방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나오니 얼굴이 무색해집니다만 이것은 순결한 양을 낳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젖가슴을 모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순결하고 건강한 교회를 찬양한 것입니다. 구약에 전능하신 여호와에서 전능이란 말은 젖가슴을 의미합니다.
여기까지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아가서 기자는 사모의 정을 견딜 수 없는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밤을 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몰약 산과 유향의 산이란 여인의 더 깊고 은밀한 곳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7절에서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어여뻐서 아무 흠도 없구나 하였습니다. 여인이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도 흠이 있다면 그 여인의 가치는 없어지고 맙니다. 계속해서 그는 '신부야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낼다 보아라'노래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이란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지중해와 평생을 이루는 산맥으로 그 정상에 헤르몬이란 신비의 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레바논 정상은 항상 눈이 덮혀 있어 이스라엘의 영적바탕을 의미하는 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바논에서 시작하고 레바논에서 함께 하자는 것은 이스라엘의 통치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9절부터는 노래의 주제가 바뀌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지만 9절부터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은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하였습니다.
사실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은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는 칭송은 1장 2,3절에서 솔로몬을 향한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신부에게 특별한 칭호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여기서 나의 누이라 노래하고 있어 부모로부터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향하여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누이된 사라와 한 몸이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누이와 같이 같은 이념 같은 생각 같은 향기를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내의 아름다움도 포도주와 같지 말아야 하고 그 지혜가 모든 향품보다 월등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의 기름부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솔로몬은 그의 신부를 노래하여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같구나"(11) 하였습니다. 지금 솔로몬은 이 여인으로 만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향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품은 이상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더 나아가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칭송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풍성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넘치도록 풍성한 지혜와 지식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교회만이 누린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자기 아내는 자기의 모든 것을 모아 둔 보물단지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13절과 14절에서 각양 각색의 아름다운 열매와 아름다운 꽃과 향기나는 향품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처럼 넉넉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믿음의 보고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품고 있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제 15절에서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기뻐 하였습니다. 샘이 레바논에서부터 흐른다면 어떤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우물은 사람의 영혼을 깨우는 생수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갈급한 사람들을 향하여 목마른 자들아 내게 와서 마시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생구를 값없이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선물로 가득 찬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무엇이 필요할까요.
소로몬은 끝으로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를 먹기를 원하노라'노래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초청하여 갈급한 자에게 생수를 배고푼 사람에게 떡을 주어야 합니다.
이제 그 이름을 날리기 위해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람은 한 쪽으로면 불어서 안될 것입니다. 동서남북으로 그 이름이 번저 이 땅에 있는 주의 사람들이 모두 초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계시록 22장의 에덴동산으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5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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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5:8)사랑의 열병
(아가5:8)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자 이제 5장을 공부하십시다. 날씨가 무더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 예수께서 계시는 기쁜 마음을 주의 말씀을 살펴 보십시다. 아가서 5장의 타이틀은 사랑의 열병입니다. 남여간의 사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이루어서 완전히 합일체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자신의 고집과 생각이 있기 때문에 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랑의 열병이 발생되는 원인과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의 마음 솔로몬은 1절에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노래하였습니다.
여거서 우리는 남자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의 사랑은 한 여자를 취하면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종합선물 셋트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 가슴에 품고 넓은 세상을 향하여 나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계속 자기의 신부를 가리켜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신부가 나의 누이처럼 어떤 경우라도 나의 입장이 되어서 나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갖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얻어 부족함이 없이 기쁨에 빠진 솔로몬은 그의 친구들을 청하여 함께 즐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 동산에 초청하여 함께 마시고 기쁨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이것이 남자들의 외형적인 모습입니다만 여자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여자는 자기의 사랑을 자기 혼자만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얼마나 호탕하고 남자다운지 결혼을 한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매일저녁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결국 부인과 별거를 하기에 이르었습니다. 남편의 외도와 객기를 참지 못한 부인은 그만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그런 분이 없겠지만 남자들의 외형적 객기는 적당히 절제하지 않으면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여자의 마음 2절에는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르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 구나"기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친구들과 어울려 연회에 빠져 있을 때 여인은 견디다 못해 지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연회라면 여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지이요. 그렇다고 여인의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몸은 잘지라도 그 마음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주를 발견하고 주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때는 그 사랑과 은혜가 개인적이 되어 그 사랑에 취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곧 교회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공동체 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나를 향한 주의 사랑은 객관적이 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 내가 받은 주의 은혜와 사랑이 변치 않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더욱 감사하고 더 열심을 갖게 되는데 내 사랑이 직감적이어서 소외받은 마음과 같이 잠이 들어 버리면 결국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 몸이 잠에 취해서 그 부르심의 타이밍을 상실하게 됩니다.
남자들은 잔치의 여흥과 그 볼 일이 끝나면 어째든 집으로 들어 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자기 아내가 자기와 누이와 같이 자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 줄 것으로 알고 아내의 품을 찾아 집으로 들어 옵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르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친구들과 주흥에 지쳐 버렸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아담에게 땀흘려 일하여야 식물을 얻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내도 몸은 잠은 들었어도 그 마음은 그의 사랑이 자기를 찾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몸과 마음이 신랑이 부르는 사랑의 타이밍을 마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하였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자신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저 자신이 할 일을 하드라도 그 마음은 온통 아내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마음은 남자의 사랑을 자신이 독단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일에 빠져 다른 사람들과 희희낙낙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습니다.
여인은 혼자 집에 들어와 완전히 옷을 벗고 발을 씻고 혼자 누워 버렸습니다. 그 마음에서는 사랑하는 남련을 생각하고 있어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 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자는 개인적이고 감성적입니다. 사실 이 때 남자가 좀 깊은 배려를 갖고 전화라도 자주하고 문자라도 보내었다면 여자는 덜 삐졌을 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남자가 돌아와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르리리매 상당히 기분 얹짢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다른 사람들하고 술퍼먹고 만신창이가 되서 내게 돌아 왔군하고 귀찮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의 몰약과 같은 사랑의 열정이 문틈으로 들어 오는 순간 여인은 자신이 받았던 사랑의 열기가 다시 솟아나 옷을 입고 문을 열고자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사랑의 타이밍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 내 마음이 동하여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매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을 듣는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역시 여자는 정적입니다. 남자의 세계가 이상적이라면 여자는 오직 남자의 품에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을 받을 때는 개인적인 사랑이지만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주의 사랑은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의 사랑은 타이밍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싫어한다든가 바람기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때를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남자는 태어남으로부터 땀을 흘리며 일하는 속성을 갖고 있어서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다만 그 마음에 아내를 향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자의 사랑은 남자의 품을 독점하려는 데 있습니다.
남자가 주흥에 빠져 있는 동안 여인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주흥에서 지쳐 돌아 온 남편의 음성을 듣자 성적인 충동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남자의 마음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고자 돌아 온 것이 아니라 고향과 같고 누나와 같고 어머니와 같은 아내의 품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랑의 타이밍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여인은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았어도 못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하였습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주께서 나를 찾을 때에 나의 생각과 고집에 빠져 그를 속히 불러 들이지 못하고 커다란 낭패를 보았던 날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주를 사랑하고 주 안에 있다 하드라도 주께서 오실 때를 기다려 늘 깨어 있지 못하고 잠에 빠져 주께서 우리를 찾을 때에 그 타이밍을 상실하고 맙니다. 누가복음에는 주를 기다리는 열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고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졸다가 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없는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을 지킵니다.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에 비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면이 강하여 개인적이고 달콤한 사랑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열병 이제 여인은 혼비백산하여 사랑하는 그를 찾아 거리로 나섭니다. "성중에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처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에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여인의 인격과 품위는 남편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인격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버림받아 홀로된 여인처럼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고 또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도움이 어디로부터 올꼬 만군의 여호와께로다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여인은 이제부터 방황과 혼돈의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여인은 교회를 향하여 달여 나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의 사랑을 상실하고 새벽마다 울부짖으며 또 금식으로 매달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상실한 기회를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중보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이것은 성령의 중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며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주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신부를 지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입니다. 자신의 부주의로 사랑의 타이밍을 상실한 여인은 이제 교회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기를 힘쓰게 됩니다.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먼저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하였습니다. 희고도 붉다는 것은 순결과 고결한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여인은 "머리는 정금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하였습니다.
*완전한 사랑 이것은 그의 지위와 지혜를 노래한 것입니다. 정금은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값을 말합니다. 또 까마귀 같이 검다는 것은 예지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까마귀는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새로 불리고 있습니다. 여인은 계속하여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혔구나"노래하였습니다.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다는 것은 맑고 투명하며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너희의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 하였습니다. 순수함을 상실하지 않은 선한 눈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인은 "뺨은 향기로운 꽃밭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갖었다면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는 매력덩어리입니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이것은 부족함이 없는 능력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하는 일마다 고귀하고 의롭고 반듯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라 하였습니다.
정금 받침대에 세운 화반석 기둥을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든든하고 우아합니까? 그 형상이 레바논 같고 백향목 처럼 보기 좋다는 칭송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여인은 끝으로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노래 하였습니다.
아무리 그 외모가 출중하고 형상이 고귀하여도 그 모든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것은 입입니다. 입이 달다는 것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의미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출중해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의롭지 못하면 그는 더욱 상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친구의 사랑 술람미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가리켜 나의 사랑 나의 친구라 하였습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노라 이제 너희를 친구하 부르겠다 하시며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부는 그 모든 지혜와 아름다움에서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성경이요 또 가르치시는 성령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그를 가르칠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은 곧 비밀없는 친구의 사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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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7:6)사랑의 찬가
(아가7:6)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오늘은 아가서 7장을 궁부할 차례이다.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는 갈수록 그 농도가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의 사랑은 그 기준이 자기 중심에 있기 때문에 공편치 못하고 늘 변질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는 7장에서 날이 갈수록 그 사랑의 농도가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솔로몬은 1절에서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와 같구나" 노래 하였습니다. 여기서 귀한 자란 그의 모태적 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그 근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말하여 주께서 만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계획되고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지금 아가서 기자는 하나님의 자녀 된 교회 즉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귀한 자의 딸들이며 또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부의 아름다움이 4장에 이어 7장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 보면 신부의 아름다움의 표현이 4장과 정 반대의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눈과 머리와 입술과 목과 유방의 순으로 내려 가고 있는데 7장에서는 발과 넙적다리와 배꼽과 허리와 유방과 목과 머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부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처음과 끝이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은 시작과 끝이 동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까지라도 동일하다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녀의 발이 아름답다고 칭송한 것은 그의 행함을 칭찬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자의 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습니다(사52:7). 그러나 그 발이 아름답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발을 구성한 넓적다리가 든든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공교한 장색이 만든 구술꿰미와 같다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솔로몬은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하였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풍족함과 왕성한 생산력을 노래한 것입니다. 추숫단을 쌓아 올린 추수더미 둘레에 꽃아 놓은 백합꽃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 추수가 은혜와 순종으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 기록되었습니다. 4장에서는 노루새끼에 비유하였는데 여기서는 암사슴을 칭하고 있습니다. 노루와 사슴은 악을 모르는 선한 짐승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의 유방은 선한 자녀를 양욱하기 위한 것입니다.
4절에는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의 망대 같구나"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목과 눈과 코는 영적전쟁의 도구입니다.
5절에는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기록되었습니다. 갈멜산 이스라엘의 영적토대가 되는 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 머리를 무릎에 묻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또한 머리털이 자주빛이라 한 것은 그에게 임한 지혜의 출중함을 의미합니다. 그의 지혜가 왕에게 전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를 노래하여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속에서 사람들을 매려 시키는 것입니다.
7절에는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하였습니다. 종려나무란 이스라엘의 믿음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출애굽기에는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70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열두 제자와 칠십인의 제자를 두셨습니다. 이로한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는 결국 그에게 무엇을 먹였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지 어떻게 들을 것인지 삼가 주의하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또한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다 하였습니다. 포도송이는 인생의 삶을 기쁨으로 변하는 포도주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으 주께서 소망하시는 신부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제 솔로몬은 자기의 신부와 함께 할 비전을 제시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어쨋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살아가는 방법 그 모든 것이 주 안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아내된 여자에게 처음부터 주신 주의 명령입니다.
솔로몬은 신부에게 '우리가 일찍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자상한 마음이며 애뜻한 사랑입니까? 이것은 주께서 포도원의 일에 대하여 독단으로 하지 않고 그의 신부된 우리와 함께 가꾸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노래하였습니다. 합환채는 성적 욕구를 돋구는 체음제입니다. 이것은 번성과 양육을 위한 그리스도의 프로그램입니다.
'각양 실과가 새 것과 묵은 것을 구비하였구나'라는 말씀 속에서 신부의 성숙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다'(마13:52)하셨습니다. 달마다 열매 맺는 나무야 말로 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신부로서 그에게 속한 모든 지혜와 은혜로 말미암아 성숙한 신부가 되어 그와 함께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8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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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8:7)위대한 사랑의 완성
(아가8:7)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꿀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 8장은 그 문맥이 난해하게 얽혀 있어 솔로몬이 무엇을 노래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이 술람미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으며 또 어떤 수모를 감수하였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8장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은혜를 베푸셨으며 그 사랑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그러한 위대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 8장은 신부의 노래로부터 시작됩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떻게 들으면 이것은 신부의 불평같이 들리겠지만 사실은 신부는 자신의 미천함을 노래하며 왕이신 주께서 이방인인 우리를 어떻게 취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입니다.
야곱은 도망 중에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천사를 만났으며 열두 자녀를 데리고 돌아 오는 길에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는 하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주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친히육체로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체휼하신 자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이방여자인 술람미가 천하의 주인 솔로몬의 신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기와 질투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술람미가 귀족의 출신이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술람미를 하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음행 속의 사마리아 여인을 친히 만나 그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여 주었으며 입곱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첫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취할 수 있는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왕의 교훈 여인은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노래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자기의 집안 사람들이 왕의 위대한 교훈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은 후에 주를 자신의 모든 생활에 이끌어 들여 그의 가르침으로 교훈을 삼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주의 취하심으로 은혜 받은 신부됨을 망각한 것으로 주의 사랑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를 우리의 삶 전체로 이끌어 들여 그의 가르침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로하여 더욱 향기로운 술이 되어 주의 기쁨이 될 것이며 주께서는 나를 더욱 지극한 사랑으로 끌어 안으실 것입니다. 여인은 '너는 왼 손으론 내 머리를 베게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았었으리라'라는 과거형 표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이끌어 내지 못했던 부성실한 우리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중보 이에 여인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중보를 부탁합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완성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하여 그 사랑의 지혜에 충족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신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랑된 주의 은혜와 사랑에 충실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에게 무엇인가 보답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에서 떨어져 나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일에 빠짐으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연단과 시험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로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에 돌아가게 하십니다.
*시험의 통과 솔로몬은 5절에서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깨웠노라" 여기서 우리는 오랜 세월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한 용기있는 성숙한 한 여인으로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참으로 어리석은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그리 깨달음이 없이 자기 생각에 취하여 주께서 원하시지 않은 일들에 열심을 내고 있었는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많은 목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로 말미암은 일들은 결국 해산의 고통이되어 그 고통을 맛 본 후에서 주를 아는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고통의 들에서 돌아 온 신부를 향하여 신랑은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고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권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과 도장은 같은 것으로 자신의 주권을 확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너는 나의 도장으로 인쳤으니 더이상 딴 짓을 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투의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의 생명으로 우리를 자녀삼고 그의 성령으로 인을쳐 우리를 자기 것으로 보증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떼 놓을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며 사랑입니다. 아가서 기자는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꿀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침으로 그의 사랑을 인치셨습니다. 이 사랑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며 훼방할 수 없습니다. 바울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에서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 하였습니다.
*사랑의 성장원리 8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기록되었습니다. 문맥이 바뀌면서 이 내용이 어디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또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들이 새롭게 하여야 할 역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결국 솔로몬의 아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 즉 우리와의 사랑의 노래이며 이 부분은 신부된 우리가 맡은 사랑의 빚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주께서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집을 준비하시는 동안 그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주의 은혜와 사랑을 한없이 받은 그리스도의 신부라 할지라도 아직 세상 가운데서는 아자 작은 보잘 것 없는 여자입니다. 아가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며 연약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우리 서울 갈보리채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애가 서울 갈보리채플 사역자가 된 후 12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는 아직 유방을 가추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아직 젖을 먹일 유방이 없다하드라도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유방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자식을 가질 때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필요한 것은 나의 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참 아가서 기자는 9절에서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를 두르리라' 하였습니다. 성벽과 망대는 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은망대란 일곱번 단련한 은으로 만든 망대라는 의미로 많은 연단과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날이 오기까지 자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가 오기까지 자기와 또 자기에 속한 자들을 모두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하였습니다.
우리가 인내로서 나의 온전한 믿음을 지키는 것은 결국 성안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평안을 이끌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신부와 그 가족들을 축복하여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하였습니다. 바알하몬은 '풍요로운 주'라는 뜻으로 이방신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신부의 온전한 믿음과 인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는 온 세상에서 열매를 거두게 되신 것입니다.
*사랑의 분배 아가서 기자는 이 기쁨을 노래하여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신부된 여인의 온전한 믿음과 인내로 우리의 주는 그 이름의 영광을 받으시고 그녀와 함께 한자들도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하셨습니다.
이제 끝으로 주님은 그의 신부를 찬양하여 "너 동산에 거하는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를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므나 나의 사랑하는 자여 너는 빨리 달려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동산에 거하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동산에 거함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산은 두루도는 화염검과 그룹들에 의해 봉쇄당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된 이 여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산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의 할 일은 그녀의 동무들에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여 모두 동산에 초청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서 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인내가 끝나기 전에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우리의 동무들을 일깨워 노루와 사슴이 뛰노는 그리스도의 동산으로 초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