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역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기고할 글입니다. 먼저 소개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경주 이씨 가문
1.올해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우당 이회영
필자는 지난 7월 중국 남만주지역을 답사하였다. 남만주는 1910년대 만주독립운동기지건설의 중심이었다. 을사조약(1905) 뒤에는 실력양성과 민중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에만 역점을 두었던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비밀회의를 통하여 실력양성과 무력투쟁을 함께 할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8도로 흩어져 독립군자금을 모금하고 만주지역에 조선총독부에 대응할 도독부를 건설하며, 둔전을 일구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쟁의 전사를 양성하기로 하였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기지건설은 남만주와 북간도, 연해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만주 독립운동기지건설은 우당 이회영 형제들과, 석주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김대략, 전덕기가 주도하였다. 수많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경주 이씨는 6형제 모두가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들을 대동하고 만주로 떠나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경주이씨 가문의 이거(移居)를 주도한 인물은 넷째 이회영이었다. 사전에 일제의 눈을 피해 만주 일대를 돌아본 이회영은 형제들과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회영은 말하기를 ‘우리형제는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 차라리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구차한 생명을 도모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하여 일제와 싸웁시다. 이것이 대한민족의 신분이요, 왜적과 싸우던 백사 이항복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하오’라며 형제들을 설득하였다. 이회영의 설득에 첫째 이건영, 둘째 이석영, 셋째 이철영, 다섯째 이시영, 여섯째 이호영 등 형제 모두가 동의하였다. 이들은 긴급히 가산을 정리하여 지금 돈으로 600억 원에 달하는 독립군자금을 마련하였고 전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고산자 신흥강습소 터(현재는 기와공장으로 변했다)
이회영 형제가 정착한 곳은 유하현 황도촌과 삼원포 추가가 일대였다. 세 갈래 물줄기가 합류하는 삼원포에서 이회영 등은 교민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하였고, 1911년에는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이듬해 합니하로 옮겨 신흥무관학교로 개교하였으며, 3.1운동 뒤에는 한 개의 본교와 두 개의 분교를 두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 청산리, 봉오동 전쟁의 중심인물, 1930년대 무장투쟁의 주역들과 광복군 핵심인물을 양성해냈다.
2.무봉산 일대의 토지도 군자금으로 쓰여
진위면 가곡리 신가곡 입구의 '경주 이씨 천' 표석
평택시 진위면일대에는 경주 이씨의 유적이 많다. 경주 이씨는 비록 소론(小論)이긴 하였지만 조선후기 무수히 많은 정승, 판서를 배출하여 삼한 갑족으로 불렸다. 명문가의 기반은 선조 때의 명신 백사 이항복 때 구축되었다. 이항복은 안동판관을 지낸 이성무의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예신의 손자다. 이항복은 권율의 딸과 혼인하여 성남, 정남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성남에게서 공주목사를 지낸 시현이, 이시현에게서 홍주 목사 세구가, 이세구에게서 영조 때 소론을 이끌며 영의정을 지낸 광좌가 태어났다.
이항복의 둘째 정남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정남은 세장, 세필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외조부이기도 한 이세필이 봉남리 아곡마을로 낙향하면서 무봉산 일대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세필에게는 태좌, 정좌, 형좌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이태좌는 영의정 이광좌와 함께 영조 때 좌의정으로 소론정권을 이끌었다. 이태좌의 큰아들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이종성이다. 그리고 종성의 현손이 고종 때 우찬성을 지낸 이유승이고, 이유승에게서 석영, 회영, 시영 등 6형제가 태어났다.
이유원은 이세필의 둘째 정좌의 후손이다. 이정좌의 아들은 종주이고, 손자는 경관이며, 증손은 이조판서를 지낸 석규, 현손은 이조판서 계조이다. 이계조의 아들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다. 이유원은 정승에 있으면서도 이재에 밝아 청나라와의 사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손이 없어 이유승의 둘째 석영을 양자로 들였고, 이 과정에서 거대한 재산이 이회영 형제들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필자가 경주 이씨 집안의 계보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은 가문의 내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평택과 경주 이씨 집안의 관련성을 밝히고, 민족의 위기 앞에 그들이 어떤 삶과 태도를 보였는지 말하려는 것이다. 이석영에게로 넘어 온 억만금의 재산 중 일부는 진위면 가곡리 일대에 분포하였다. 그리고 국권강탈 직후 모두 팔려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투입되었다.
3.그들의 삶을 잊지 말자
7년 전 농림부 차관을 지낸 이창우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창우씨는 필자가 연재하고 있던 글에 관심을 보이면서 진위면 일대 경주 이씨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그 때 나왔던 이야기가 경주 이씨 집안이 소유하였던 진위면 가곡리 일대의 토지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들어갔다는 것과, 마름을 보았던 제주 고씨네에게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더 이상의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취재도 하고, 궁금하던 신흥무관학교와 경주이씨의 관계도 알아볼 겸 해서 신가곡 노인회장 고수웅(70세)씨를 만났다. 고수웅씨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고조부 때 신가곡으로 입향하였다고 한다. 입향할 때는 매우 가난했는데 고조부의 성실한 노력으로 가세가 폈고, 증조부 때 몰락한 경주 이씨의 재산을 넘겨받으면서 가곡리 일대의 대지주로 성장하였다고 말했다. 증조부는 확대된 경제력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사회적 인망을 얻어 일제강점기에는 북면장(진위면장)까지 지냈고, 자녀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고수웅씨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제주 고씨가 경제기반을 확충한 시기와 경주 이씨가 급격히 몰락했다는 시기가 거의 비슷하였다. 하지만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긴급히 재산을 처분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오히려 경주 이씨가 몰락하면서 마을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마산2리 숲안말에 사는 경주 이씨 후손 이종혁씨를 만났다. 이종혁씨는 평택 일대경주 이씨는 대부분 서울로 이거했다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경주이씨 진사공파 대종중 총무에게 확인하라고 말했다. 전화로 통화한 종중 총무는 본래 신가곡 일대에도 경주이씨가 거주하였지만 일제강점 직후 토지가 팔리면서 대부분 만주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렇다면 가곡리 일대의 재산을 처분한 사람은 누구일까? 필자는 이유승의 둘째 아들 로 이유원에게 입양된 이석영이라고 생각한다. 이석영은 만주로 떠날 때 도지(賭地) 1만석 규모의 토지를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한 인물로, 이유원이 소유하였던 신가곡 일대의 토지도 함께 상속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위면 동천1리 경주 이씨 묘역
현재 진위면 일대에는 경주이씨 집안을 추억할만한 유적이 매우 많다. 신가곡 마을만 해도 마을 입구에 ‘경주 이씨 천(阡)’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고, 마을 안에는 재실과 이정좌, 이계조의 묘가 있으며, 봉남리 아곡마을에도 유허가 남아 있다. 동천1리에는 경주 이씨 19세손 이승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역과 동천재라는 재실이 조성되었으며, 동북쪽 산기슭에는 20세손 이연손과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의 묘가 있다. 또 마산2리 숲안말 경주 이씨 묘역에는 22세손 이성무의 거먹비 묘표와, 이항복이 속하였던 진사공파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최고의 가문으로 시류에 따라 살았으면 누구누구 가문처럼 일제강점기에도 귀족가문으로 대접받았을 것이고 해방 후에도 엄청난 기득권을 누렸을 집안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문의 모든 것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례는 유례없는 사건이다. 이와 같은 결단으로 경주 이씨 가문은 감옥에서 죽고, 굶어죽고, 후손들은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그들로 인해 해방을 맞았고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고, 빛나는 삶을 기억하고, 자랑과 긍지로 여기자. (2011.8)
첫댓글 어느 분 말씀대로, '조선은 망해도 더럽게 망했는데' 경주 이씨 이회영 6형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분에 겨우 체면이 서는 것 같습니다. 이 집안에 대한민국 건국 최고의 훈장을 다시 수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계승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가의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뉴 라이트의 역사인식을 본 받는 다면 또 다시 국권강탈, 민족강점의 위기가 닥쳤을 때 민족해방을 위해 총을 틀 사람은 없겠지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은 단하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이번 답사에서 이회영선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 했습니다. 정소진
경주이씨를 말씀해 주시니 경주에 살고 있는 이사람도 괜히 좀 우쭐해 집니다마는 지금의 경주는 '박사모'인지 '博士모임'인지 이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 부끄럽기가 만주벌판 만큼이나 큽니다요.
노블리스.오블리제. 가진자의 베품
노블리스.오블리제.
가진자(누리는자)의 (사회적)의무 (영어로는 nobles' obligation)
'베품'은 하는 사람이 선택적으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의무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베품'이 아니라, 누리는 만큼 갚아야 하는 당연한 책무입니다.
우당 일가는 그 책무를 지켰던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인 책무마저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가 베풀고 더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도 안하는 것입니다.
친일파들은 한술 더 떠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입니다
취재와 연구를 통해 남긴 글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김해규선생님께서는 정말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부지런하신 김해규 선생님~~~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잘 읽고 있습니다.
의열단원으로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하셨던 분이
625중에 빨갱이로 몰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가족이 겪었던 고통의 세월은 말과 글로 다 할 수 없지요.
오죽하면 후손 중에 한 분이,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였었으면 좋겠다'고 절규하셨습니다.
이회영 선생님 집안의 후손들을 비롯하여 독립운동 후손들이 겪었을 고통에 머리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