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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朴智星, 1981년 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소속으로 뛰고 있다.
선수생활
교토 퍼플 상가
2000년에 명지대학교를 휴학하고 자신에게 스카웃 제의를 보낸 일본 J리그의 시미즈 에스펄스 대신 연봉 5000만 엔 (당시 약 5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과 주전급 대우를 보장한 교토 퍼플 상가에 진출했다.[2] 당시에는 황선홍 등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고참급 선수들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일본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지성이 어린 나이에 당시 하위권이던 교토 퍼플 상가로 이적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이후 3년간 그는 경도 퍼플 상가에서 당시 팀 동료이던 마쓰이 다이스케, 미우라 가즈요시 등과 함께 맹활약을 펼쳤다. 팀이 2부로 강등된 후에도 팀에 잔류하여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이끌었다. 2003년 1월 1일에는 일본의 FA컵 대회격인 일왕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가시마 앤틀러스를 맞아 0-1로 뒤지던 후반 7분 프리킥을 받아 헤딩으로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팀의 2-1 역전승을 도우면서, 교토 퍼플 상가가 처음으로 우승컵을 안는데 크게 기여했다.[3] 교토 퍼플 상가는 박지성을 잔류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그는 유럽 무대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환상적인 활약-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크게 기여한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계약기간 3년 6개월에 연봉 100만 달러라는 조건으로 에레디비시의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했다.[4] 2003년, 이적 초기에는 월드컵 이후 소속팀에서 무리한 출전으로 인한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들쭉날쭉한 플레이를 펼쳤다.[5]
이 때문에 팀 동료인 마르크 판 보멀이 박지성의 서툰 의사소통 능력과 부진한 활약에 비판을 표할 정도였고, 심지어는 홈팬들로부터도 야유를 받을 정도에 이르렀으며 (당시 PSV의 사령탑이던 거스 히딩크 감독도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그를 주로 원정 경기에만 투입하도록 배려하였다.) 이에 따라 플레이가 위축되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이후 차차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점점 발군의 기량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 팀내 주요 선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윙어 아르연 로번과 골게터 마테야 케주만이 프리미어리그로 떠난[6] 04-05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할 것이라는 네덜란드 언론의 예상을 뒤집고 PSV 에인트호번이 에레디비시를 제패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입성함에 있어서 공격진의 핵심선수로서 활약하였다.[7][8]
이렇게 되자 마르크 판 보멀은 지난 시즌 불만을 표시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인터뷰를 하였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 16강 AS 모나코전과 8강 올랭피크 리옹전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프랑스 해설가들은 박지성의 활동반경과 위협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내내 찬사를 보냈다.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AC 밀란과의 원정 1차전 0-2 패배 이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박지성은 AC 밀란과의 2차전 경기 초반 지다의 640분 무실점 기록을 종결짓는 선제골을 기록하며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골을 터뜨린 대한민국 선수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 PSV 에인트호번은 박지성의 선제골과 필립 코퀴의 2골을 포함 3-1로 승리하여, AC 밀란과 승점과 골득실 부분에서 모두 동률을 이루었으나, 원정 다득점원칙에 따라 결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기 내내 종횡무진 활약을 보였던 박지성은 외신들의 찬사를 받았고, 당시 박지성을 상대했던 선수인 젠나로 가투소는 박지성을 마크했던 일이 괴로운 기억이었음을 추억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일본의 축구잡지에 송고했으며, 시즌 종료 이후 박지성의 거취가 화두에 오르자 주장이었던 필립 코퀴는 박지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의 칼럼을 제기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박지성을 괴롭혔던 PSV 에인트호번 팬들의 야유가 열광적인 '위숭 빠르크' 송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적인 시즌을 보낸 박지성에게 들려온 소식은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부터의 관심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 16강전에서 AC 밀란에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9][10] 두 경기 모두 0-1 패배로, AC 밀란의 두터운 수비벽을 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PSV 에인트호번 소속이었던 박지성은 AC 밀란과의 4강 2차전 홈경기에서 불과 전반 9분만에 순간적인 돌파를 통해 선제골을 기록하였고, 이것을 주목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 영입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박지성은 2005년 6월 22일 계약을 하고서,[11] 2005년 7월 14일 입단식을 갖고 등번호 13번을 배정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공식 입단하였다.[12] 2005년 7월 23일 홍콩에서 열린 홍콩 프로 선발팀과의 친선경기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이후 첫 공식 경기를 가졌고,[13] 7월 26일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 현대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다.[14] 잉글랜드 무대에서는 2005년 8월 13일 에버턴 FC와의 프리미어리그 원정 경기에서 데뷔하였고,[15] 12월 21일 버밍엄 시티 FC와의 풋볼 리그 컵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에서의 첫 골을 넣었다.[16]리그에서도 첫 골은 풀럼 FC전에서 골을 터뜨렸으나 6개월 후 풀럼이 자책골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2006년 아스널 FC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뒤늦게 신고하였다.그 후 박지성은 아스널을 상대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으며 웨인 루니와 함께 맨유에서 아스널에 강한 선수로 지명되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할 때, 큰 기대를 받았지만 상당수의 대한민국 축구 팬들은 박지성이 후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박지성은 첫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스쿼드 로테이션의 한축을 담당했다.
박지성은 주로 오른쪽 윙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왼쪽 윙인 라이언 긱스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였으며, 2006년 9월 10일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경기에서 얻은 부상으로 수술후[17] 회복에 성공해 12월 18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와의 원정경기에서 복귀했다.[18] 수술 후, 박지성은 우려와 달리 예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 찰튼전에서 1골, 볼튼전에서 2골(첫 멀티골) 2007년 3월 31일 블랙번 로버스 FC전에서 1골 1도움을 넣는 활약을 펼친 후,[19] 무릎 부상을 입어 선수생명의 연장을 위해 2007년 4월 28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리차드 스테드먼 박사의 지도 하에 수술을 받았고,[20][21] 재활을 모두 끝마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식 한글 홈페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복귀전에서 골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말했다. 팀이 2006-07시즌에 우승함에 따라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받았다.[22]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험자는 2001-02시즌 일본의 이나모토 준이치이다. 당시 이나모토 준이치는 아스널 FC 소속이었지만, 리그 경기의 4분의 1 이상 출전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족시키지 못해 메달을 받지 못했다. 둥팡줘도 같은 이유로 메달을 받지 못했다.)
2008년 3월 1일, 박지성은 풀럼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긴 재활 기간에서 돌아와 폴 스콜스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받아넣으며 2007-08시즌 첫 득점을 기록했다.[23] 하지만 부상 복귀 이후 3월 한달 간 꾸준한 선발 기회를 잡지 못했던 박지성은 국내에서의 출장 기회에 관한 논란[24]에도 불구하고 2008년 4월 2일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AS 로마와의 원정경기에 선발출장하여 후반 웨스 브라운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하며 웨인 루니의 골을 어시스트 했다.[25] 또한 며칠 후인 4월 6일, 그는 미들즈브러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카를로스 테베스와 교체되어 들어가 웨인 루니에게 결정적인 동점골 어시스트를 함으로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패배의 위기에서 구출하였다.[26] 2008년 4월 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다시 선발 출장한 박지성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27] 이로써 1-0(총합 3-0)으로 승리한 유나이티드는 4강에 진출하였고, 박지성은 아시아 선수로서는 최초로 세 시즌 동안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기록을 이루어냈다(2004-05 PSV 에인트호번, 2006-07·2007-0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4월 23일과 4월 29일,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전에서 두 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였고,[28][2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합계 1-0으로 승리하여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정작 박지성은 5월 21일 첼시 FC와의 맞대결로 결정된 결승전에서 갑작스런 명단 제외로 출전하지 못하였다. 그 경기에서는 박지성을 대신하여 측면 미드필더로 출장한 오언 하그리브스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맨유와 첼시는 전반과 후반, 연장까지 1-1로 팽팽한 맞대결을 펼쳤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유가 첼시를 6-5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30]
2008-09 시즌 초반에는 나오지 못하다가 2008년 9월 21일 첼시 FC와의 원정 경기에 시즌 첫 출장했고, 이 경기에서 시즌 첫 골이자 팀의 선제골을 기록하였다.[31] 그리고 2009년 3월 7일 풀럼 FC와의 FA컵 원정경기에서 후반 36분 팀의 네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긴 침묵을 깼다. 5월 2일에는 미들즈브러 FC와의 프리미어리그 34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후반 6분 팀의 두 번째 골을, 5월 5일에는 아스널 FC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 준결승 2차전 원정경기에서 전반 8분만에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두 경기 연속 골을 터뜨렸다. 이 경기에서 그는 후반 16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성공시킨 팀의 세 번째 골에도 관여하고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을 하며 90분 풀타임을 소화하였다. 2009년 5월 16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아스널과의 리그 37라운드에서 후반에 교체출장하여 골네트에 공을 꽂았으나 아쉽게도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이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부 리그 통산 18회,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11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2009년 5월 27일 벌어진 FC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시즌 결승전에 선발 출전하여 66분간 활약함으로써, 이 대회 결승전에 출전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맨유는 이 경기에서 0-2로 완패하여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32]
2009-10 시즌에는 무릎부상으로 초반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하였고 복귀전은 베식타스와의 챔피언스리그 5차전에서 치렀다. 시즌 첫골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스날과의 라이벌전에서 터졌다. 또한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컵 결승에 선발로 출전하여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의 합동 플레이로 여러번 팀의 공격을 주도하고 골대를 때리는 슛을 날리는 등 맹활약 하여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었고 축구 전문가들도 박지성에게 높은 평점을 주기도 하였다.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경기에서는 시즌 2번째 골이자 자신의 챔피언스리그 통산 3호골을 터트렸고 팀은 4대0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박지성은 이날 경기에서 상대 핵심선수인 피를로를 완벽봉쇄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3일 후에 열린 풀럼 FC와의 리그 경기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되어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그 다음주에 열린 리버풀 FC와의 라이벌전에서는 후반전에 대런 플레처의 크로스를 받아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리버풀을 무너뜨렸고 시즌 3호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리그 최종전인 스토크 시티 FC 와의 경기에서 시즌 4번째 골이자 팀의 마지막 득점을 올렸다.
2010-11 시즌에서는 9월 22일 스컨도프 유나이티드와의 칼링컵 3라운드에서는 시즌 1호골을 터트렸고, 10월 26일에는 울버햄튼 원더러스과의 다음 라운드에서 칼링컵 2경기 연속골을 기록해 시즌 2호골을 기록하였으며, 11월 6일 11라운드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홈 경기 에서는 선제골과 종료직전 결승골을 박지성 자신이 모두 기록하였다. 11월 28일에 열린 블랙번 로버스전에서는 두번째 골을 넣어 자신의 시즌 5호골을 기록하였다. 또한 12월 14일 아스널 FC과의 홈경기에서 헤딩 결승골을 기록, 자신의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였다. 챔피언스리그 8강전 첼시 FC와의 2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끔으로써 팀의 4강 안착에 기여했다.
그리고 2010-11 리그 시즌 우승을 36라운드 첼시 FC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 35초 경 다비드 루이스를 제치는 패스를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 연결해 줌으로써 선제골을 어시스트 하였다. 박지성의 어시스트와 패스 차단 등의 활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번째 우승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2010-2011시즌 마지막 라운드인 38라운드 블랙풀과의 경기에서는 베르바토프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넣었고, 안데르송에게 패스를 연결하여 시즌 6호 어시스트를 성공하며 팀의 4:2승리를 이끌었다.
2000년 4월 5일,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라오스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2년 FIFA 월드컵과 2006년 FIFA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하였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에는 주전 미드필더로 맹활약하여 대표팀 4강에 큰 공헌을 하였다.
2004년 하계 올림픽 당시에 박지성 차출을 놓고 대한축구협회와 PSV 에인트호번 사이에 갈등을 빚었고, 결국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2004년 AFC 아시안컵에 차출하기로 결정하였다.[33]
2002년 FIFA 월드컵 직전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와의 친선경기,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3차전 포르투갈전,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 2차전 프랑스전에서 골을 넣으며, 강팀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2년 6월 14일, 인천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3차전에서 예술적인 골을 성공시켜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골은 축구팬들이 뽑은 '2002년 최고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34]
2008년 10월, 김남일이 경고 누적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자 국가대표팀 주장 자리를 이어받았고, 이후 국가대표 은퇴 직전까지 주장을 맡았다.[35]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5골로 대한민국 팀의 최다 득점자가 되었으며, 대표팀이 무패로 본선 직행하는 데 기여하였다.[36]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박지성은 1차전 상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이정수의 골에 이어 후반 7분 개인 드리블에 의한 두번째 골을 넣었다. 2002년 월드컵, 2006년 월드컵에 이은 월드컵 3개 대회 연속골로 이로써 안정환과 아시아 선수 중 월드컵 최다 골(3골)과 타이를 이루었다.
2011년 AFC 아시안컵 대회 4강 일본전에서 자신의 A매치 100번째 출장 기록을 달성, 대한민국 선수 중 역대 8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2011년 1월 31일 오전 11시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식 은퇴 선언을 하며 11년간 뛰었던 국가대표를 은퇴하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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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미언니 수고했어염*_* 키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