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협 고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양주중앙병원에 국적 불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실려와 있으니 가서 도와주라는...
양주센터, 양주중앙병원... 같은 양주이지만 실은 우리 센터에서 중앙병원은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의정부에서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양주 시청에서 내려 동두천 방향의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애써 친절하게 알았다고 대답은 하지만 속에선 열불이 났다. 그 일 아니고라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줄서 있는데...
이미 인도네시아인 유숩과 대원물산에 가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고 근로복지공단에 들러야 했으므로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병원에 갔던 목사님이 돌아왔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국적 불명의 외국인노동자는 수술받는 중이었고 몇 시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다음날 다시 가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치는 않지만 밀린 임금 77만원을 받지 못해 '자해'한 듯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세상에... 77만원 때문에 자해를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었어도 벌써 죽었을 외국인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가? 1년의 임금을 떼였으면서도 잘 살고 있는 전우(중국 한족, 부인은 미얀마인)가 떠올랐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음날 노동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목사님은 답답했던지 스스로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보호자를 만나고 왔다. 환자는 동강이라는 이름의 몽골인이고 임금체불 77만원에 속상해서 자해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회사에서 7월 12일에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일을 며칠을 기다리지 못해 자해를 하다니...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소'라는 몽골 유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야기인즉 동강이 일하던 회사에 전화를 걸어 밀린 임금을 남편이 받지 못하게 하고 내가 직접 받아 동강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탁이었다. 지소와의 약속 때문에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갔다.
동강을 만나기 전에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 선생님을 먼저 찾았다. 그분은 동강의 상태를 설명해 주시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셨다. 사무라이의 할복이 아닌 이상 그렇게 깊이까지 찌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상처는 복부에 두 군데인데 한 곳은 그리 깊지 않지만 다른 한 곳은 스스로 찔렀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씀이셨다.
동강을 만났다. 동강은 나를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 지소라는 몽골 유학생과 동강에게 언니라 부르는 '아기'라는 몽골 여자가 와있었다.
동강은 남편과 사별한 후 세 자녀를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집을 팔아 한국에 왔다고 한다. 한국에 온 지 3년,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3시간씩 노동을 했고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그 와중에 여자 혼자 거친 노동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절감하고 동료 몽골 노동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동강은 과중한 노동으로 인해 다리에 병이 들었다. 정맥이 심하게 드러나면서 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더구나 일하던 공장이 경영 악화로 30명의 외국인 노동자 중 22명을 해고하는 상황이었다. 동강과 그의 동료도 직장을 잃었고 동강은 밀린 임금만 받으면 곧바로 몽골행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그리운 고국, 두고온 가족 품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공장에 10번도 더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다음날 오라고 계속 미룰 뿐 임금을 주지 않았다. 요즈음 섬유나 가구 공장의 경우 문을 닫는 경우가 많음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었다.
쌀이 떨어졌다. 그들은 그 상태로 며칠을 굶어야 했다. 극도로 날카로워진 그들은 자주 다투었고 급기야 마지막 남은 천원짜리로 술 한병을 사서 나눠 마시고 죽기로 했던 것이다.
기막혔다. 아프리카 르완다도 아니고 ...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도움을 구할 마땅한 존재도 없는 그들이 지녔던 그 깊은 절망감이 전해져 왔다. 동강은 턱을 떨면서 말을 잊지 못했고 눈에서는 강처럼 눈물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통사정을 했다. 빨리 퇴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병원비가 77만원을 넘어서면 자신은 갚을 능력도 없으므로 몽골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동거했던 그 남자는 동강이 숙소를 얻으면서 보증금으로 주었던 100만원 중 두 달치 월세 30만원을 주인에게 주고 70만원을 찾아 달아난 상태였다. 병원비는 의료보험을 적용하더라도 벌써 100만원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는데...
아기는 자기가 병원비를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이 불법체류자인 관계로 80만원 정도를 버는데 그중 일부는 몽골 가족에게 보내고 그 나머지로 생활한다고 했다. 자신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기를 돌보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기는 도와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었다. 하지만 동강이 퇴원한 후 갈 곳이 없으므로 자신이 머무는 집에 함께 있겠다고 했다.
누가 찔렀냐고, 정말 자해인가를 묻는 나에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물을 수도 없었다. 동강은 떨고 있었다.
박대규 원무과장님께 전화를 걸어 동강의 사정을 설명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양일종 원장선생님을 만나뵈었다. 그분들이 어려운 가운데 정말 너그러운 결정을 해주셨다. 무료로 해주신 것이다.
동강은 또 울고 있었다.
자원봉사자 미투넷의 최성재 사장님께서 그녀의 퇴원을 도와주셨다. 바쁜 가운데 와주셔서 차량봉사를 해주셨다. 정말 꼬불꼬불 길을 지나 처참한 마을로 들어서서 도착한 곳은 반지하의 집이었다.
그 전날 아기와 그의 남편은 아들을 몽골로 들어가는 동료에게 부탁하여 본가에 보냈다고 했다.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침침한 반지하의 공간이었지만 그들은 동강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아직도 동강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얼마동안은 하루에 몇 번 안 다니는 버스를 타고 통원 치료를 받아야 하고 받지 못한 임금을 위해 공장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 아픈 다리를 이끌고... 마음이 무거웠다.
동강은 일어서려는 우리들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사람 좋아요. 당신들 통해 하나님 만나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