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멀고 긴 터널
[페이지] F01
'85 전국무대예술인 기술연수
워크샅용작품
[멀고긴터널]
이재현 作(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페이지] 001
때 : 1952년 2월 ~ 6월
곳 : 거제도 포로수용소
나오는 사람들
윤석진 포로의사,중위
김중위 전범자 조사과 조사관
박대위 전범자 조사과 조사관
천영환 사민 포로
정경희 간호원
한소령 군의관
데니스 군목
트레버 군의관 대위
오창근 사민 포로
배태인 포로, 특무장
현창우 사민 포로
증 인 1, 2, 3
第一場 戰犯者 調査課(제일장 전범자 조사과)
중앙에 천영환, 정면을 향한 채 핀 폴로우
[천영환] 83에 있는 천영환이외다. 사민 포로디요, 1926년 3월 17일 해주에서
태어났쇄다. 해방이 되자 교대를 중퇴하구 이남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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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공작원으루 뽑혀 이북에 침투되어 해주방화사건 등을 추진하다 1948년 9월에
내가 속해 있던 정의추격대 대원 열세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주 형무소 미결감방에
수감됐쇄다. 빨갱이들의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13년형을 언도받구 해주형무소에서
복역을 하다 6.25를 맞았디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에 사상범과 납북인사들
이 많이 들어왔시요. 10월 17일 새벽 1시에 간수덜이 우리를 다 끌어내더구만요.
비록 감방 안에는 있었디만 우리는 유엔군의 진격이 바루 코앞에까지 와 있는 걸
다알구 있었쇄다. 원래 하성 쪽으루 갈래다 기짝은 유엔군이 진격을 했다구 기래
서 신원으루 향했디요. 뚜껑이 있는 화물열차였읍네다. 신원에서 다시 미력으로
향하는 도중에 공습을 받았디요. 신원에서 4킬로 쯤 되는데 큰 굴이 있읍네다. 기
차는 죽을 힘을 다해 기 굴루 몰아댔지요. 굴속으루 디리가자마자 L-19하구 쌕쌕
이가 굴 바깥엘 조개댔디요.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화차문을 열구 퉤
나갔읍네다. 간수새끼덜이 일제히 사격을 해 댔지요. 굴속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디요. 몽땅 몰살을 했읍네다.
(조명 밝아지면 아연한 모습의 박대위와 옆에 김중위)
[박대위] 그러면 생존자란 말인가?
[천영환] 살았으니끼니 거제도까장 왔디요.
[박대위] 그런데 어떻게 포로가 됐지?
[천영환] 굴에서 빠데 나오자 논이건 밭이건 마구 퉤디요. 동이 훤히 트자 멀리
미군덜이 가는 거이 뵈더구만요. 너무나 반가워 만세를 부르문서 뛔갔디요. 나는
미군이 처음엔 나를 반게 주는 줄만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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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시요. 내가 포로가 됐다는 거는 냉중에야 알았읍네다. 갸네덜이야 기룰 수 밖에
없었갔디요. 말이 통해야디요. 나는 머리를 빡빡 깎구 있었댔으니깐요.
[박대위] 틀림없군. 해주형무소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야.
[천영환] 해주형무소사건에 대해서 알구 있었읍네까?
[박대위] 물론 알고 있었지. 우리 전범자 조사관에선 학살현장을 찾아다니며 사
진촬영까지 모두 해뒀으니까.
[천영환] 난 전범자 조사과라는데가 있는디두 몰랐지요. 전범자가 뭐야요?
[김중위] 전투원끼리의 살상행위가 아닌 민간인을 살해한 자를 얘기하는 거야.
[박대위] 나중에 그 굴속에서 찾아낸 시체가 217구나 돼. 개가 아닌 사람의 시
체 말이야.
[김중위] 잘 만났어. 늦기는 했지만 증인을 찾아냈다는 것은 커다란 수확이지.
[박대위] 우리가 찾는건 학살의 주범이야. 물론 이 많은 포로 중에서 주범을 가
려내기는 힘든 일이지만 자네를 만남으로 어떻든 조사는 착수하게 됐네.
[천영환] 주범을 가려내기가 힘들다니요. 무슨 일이 있어두 그놈덜은 다 잡아내
야 해요.
[김중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모두 북쪽에 있을 테니까.
[천영환] 아니야요.
[박대위] 아니야?
[천영환] 10월 17일 유엔군의 전방부대가 어데까지 진격을 했는디 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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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레. 때는 이미 늦었댔시요, 내가 왜 포로가 됐읍네까. 고작해야 장수산에나
디리가 있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됐거나 했을거야요. 내가 여게 와서 본놈
이 있시요.
[박대위] 뭐라구?
(놀라 일시에 긴장하는 박대위, 김중위 굳어진 채)
[장] 第二場(제이장) 收容所(수용소)
군의관실
찬송가 소리 들려온다.
혜숙 혼자 붕대를 감고 있다.
김중위 왼쪽에서 등장한다.
[김중위] 안녕하십니까?
[혜 숙] 어서 오세요. 사령부에 계시죠? 언젠가 한번 뵌 것 같아요.
[김중위] 장승포까지 차를 한번 태워드렸죠.
[혜 숙] 어머! 그랬었나요.
[김중위] 포로환자들이 간호원과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면 전쟁이 아득하군요.
64는 언제 와 봐도 이렇게 아늑해서 좋습니다.
[혜 숙] 병원 수용소니까요.
[김중위] 아니에요. 미스 장과 같은 아리따운 간호원이 있기 때문이에요.
[혜 숙] 저를 만나러 오신건 아니겠죠?
[김중위] 포로를 만나러 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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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숙] 환자요?
[김중위] 의사예요.
[혜 숙] 포로의사 누구요?
[김중위] 전에 해주형무소 의무과장을 하던 의삽니다.
[혜 숙] 해주형무소요?
[김중위] 젊은 의사예요.
[혜 숙] 포로의사는 대부분 젊은데--------
[김중위] 지금 장교병동에서부터 쭉 들러오는 길입니다. 이질병동에서 물으니까
내과 군의관실로 가보라고 그러더군요.
[혜 숙] 전 모르겠는데요.
(트레버, 한소령, 진옥 오른쪽에서 등장한다.)
[트레버] 오, 방문객이 있었군요.
(김중위 경례한다.)
[김중위] 용무가 있어서 왔읍니다.
[트레버] 아리따운 간호원을 만나러 온 용문가요?
[김중위] 아닙니다. 포로의사를 만나러 왔읍니다.
[한소령] 포로의사 누구?
[김중위] 전에 해주형무소에 복무하던 의사래요.
[한소령] 이름이 뭔데?
[김중위] 이름은 모르겠읍니다.
[한소령] 포로의사는 백명이나 돼.
[김중위] 중키에 곱상하고 약간 고수머리인 젊은 의삽니다.
[한소령] 윤석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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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숙] 윤선생님이 해주형무소에 계셨어요?
[한소령] 내무성 소속이었으니까 그랬을는지도 모르지.
[혜 숙] 윤선생님 지금 교회에 계세요.
[한소령] 데리고 와!
(혜숙 왼쪽으로 퇴장한다.)
[김중위] 그 의사가 교회에 나가나요?
[한소령] 수용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됐지. 김중위는 정보처에 있던가?
[김중위] 전범자 조사괍니다.
[한소령] 전범자 조사과에서 왔다면 반가운 일은 아니겠군.
[김중위]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곳은 아니죠.
[한소령] 우리 64가 의심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각 수용소의 환자들을
다 이리로 수용해야 하거든. 그러니 별놈이 다 올게 아닌가. 도대체 17만이나 되
는 포로를 한 섬에 수용하는 법이 어디 있나. 2차대전 때도 그런 적은 없었대잖
아. 가히 세계전사상 최대의 포로수용소지.
[김중위] 우리는 다 서로의 고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트레버] 조사는 가능하면 간단히 하도록 해줘요. 62에서 있었던 폭동으로 우리
병원이 얼마나 바빠졌는지는 알고 있겠죠. 우리는 꼬빡 사흘을 뜬눈으로 밤을 새
웠어요. 송환심사고 뭐고 다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한소령] 폭동이 두려워서 심사를 중단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트레버]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그 정책을 수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까지
는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한소령은 과연 이러한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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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심사가 가능하리라고 보나요?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진입한 유엔군에게 흉기
를 휘두르며 일제히 달려들었어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거의 일개 연대에 가까
운 병력이 동원됐잖아요. 어떤 난폭한 포로는 기관총을 발사하는 1미터 앞까지 와
맞아 죽었다고 그러더군요. 치가 떨리는 일이에요. 이런 상태에서 무슨 심사를 한
단 말입니까? 심사를 계속하면 할수록 희생자만 더 많아질 뿐이에요.
[김중위] 몇 악질 공산수용소를 제외하고는 심사에 응할 만반의 태세가 갖추어
져 있읍니다.
[한소령] 트레버 대위! 송환심사는 포로들의 일생이 걸려 있는 일이에요.
[트레버] 압니다. 잘 알고 있어요.
[한소령]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죠.
[트레버] 희생은 포로들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체랄드대령이 해임됐어
요.
[한소령] 신임사령관은 이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나갈 겁니다.
[트레버] 너무 낙관하지 말아요. 전임 사령관들이 모두 2차대전때부터 훌륭한
경력을 쌓은 유능한 군인들이지만 이러한 포로수용소는 누구나 처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왼쪽에서 경희, 윤석진 등장한다.)
[한소령] 전범자 조사과에 있는 김중위가 자네를 찾아왔어.
[윤석진] 저를요?
[김중위] 해주형무소의 의무과장으로 복무를 했었나?
(윤석진 굳어지며 착잡해진다.)
[한소령] 의무과장? 과장까지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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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희]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김중위]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나와 잠깐 나갈까?
[트레버]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또 앰블런스들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어요. 또
환잡니다. 준비들을 하십시다.
[한소령] 맞았어. 또 터졌어. 응급실을 빨리 치워놓도록 해! 다들 나와.
[혜 숙] 김중위님 또 뵙겠어요.
[김중위] 네.
(한소령, 트레버, 혜숙, 급히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윤석진과 김중위를 살피며
망설이는 경희)
[윤석진] 나가 보라우요.
(경희 마지못해 돌아서 나간다.)
[김중위] 앉아서 이야기할까?
[윤석진] 빨리 물으시디요. 저두 나가봐야 되니깐요.
[김중위] 그럴 수는 없겠네. 자네를 전범자 조사과롤 인치해야겠지만 병원이 이
모양이라 내가 온거야.
[윤석진] 무슨 일루 기루시디요.
[김중위] 내가 무슨 일로 자네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나?
(윤석진 소침해지며 고개를 숙인다. 김중위 조서를 꺼내놓는다.)
[김중위] 자네는 해주형무소사건의 증인으로 채택이 됐어. 조서는 나중에 전범
자조사과로 와서 작성을 하기로 하고 오늘은 증인으로서 등록만 하기로 하세, 이
름은?
[윤석진] 윤석진입네다.
[김중위] 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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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1930년 6월 20일이야요.
[김중위] 그러면 스물 셋이군. 너무 젊잖아.
[윤석진] 나이 딜 새가 없었디요.
[김중위] 계급은?
[윤석진] 중위야요.
[김중위] 출생지?
[윤석진] 신의주요.
[김중위] 출신학교?
[윤석진] 신의주의전을 나왔지요.
[김중위] 의과대학인가?
[윤석진] 예.
[김중위] 30년생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면 너무 일찍 졸업을 했잖아.
[윤석진] 신의주의전은 2년제야요.
[김중위] 졸업년도?
[윤석진] 1950년 3월 졸업이디요.
[김중위] 바로 전쟁이 나던 해?
[윤석진] 예.
[김중위] 첫 근무지?
[윤석진] 내무성에 배정이 돼서 해주형무소루 갔시요.
[김중위] 그럼 해주형무소가 첫 복무진가?
[윤석진] 예.
[김중위] 해주형무소로 배속된 것은 언제지?
[윤석진] 5월 18일이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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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 그러면 약 4개월 동안 있었겠군. 10월 17일 새벽 1시에 재소자들을 데
리고 형무소를 떠났을 테니까.
(윤석진 괴로운 듯 가만히 눈을 감는다.)
[김중위]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후부터네. 정확히 말하면 새벽 1시
부터 새벽 4시까지 3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야.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윤석진 그대로 말이 없다.)
[김중위] 자네가 증인으로 채택이 된 이상 증언을 안할 수는 없어.
[윤석진] 이제 걸 조사해서 어카갔다는거디요? 아시갔디만 재소자덜은 다 죽었
읍네다. 총을 쐈던 간수들은 다 북으루 갔시요.
[김중위] 자네는?
[윤석진] 난 투항을 할라구 맘을 먹었댔디요. 기래서 북으로 올라가딜 않구 유
엔군한테로 갔시요.
[김중위] 그렇지가 않아. 10월 17일 아군의 전방부대는 미력을 지나 재령을 향
하고 있었어.
[윤석진] 진격이 암만 빨라두 도망티는 놈을 잡을 수야 없디요.
[김중위] 이미 늦었는데두?
[윤석진] 북으루 올라가는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야요.
[김중위] 어떻든 그것은 자네두 확인을 못하는 일이지? 투항을 했다면 말이야.
[윤석진] 예.
[김중위] 그러면 말해 봐. 새벽 1시부터의 일을 말이야.
[윤석진] 난 모릅네다. 난 의무과장이데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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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 의무과장이라면 형무소의 간부잖아.
[윤석진] 형무소 안엔 도당, 도정치 보위부, 도검찰청, 도재판소, 도인민위원회
가 다 들우와 있었시요.
[김중위] 어째서?
[윤석진] 공습으루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은 형무소 건물밖에 없었디요. 기룬데
기룬 큰 사건을 일개 중위한테 물어봅네까?
[김중위] 자네는 현장에 있었잖아. 그러니 사실 그대로 말하란 말이야.
[윤석진] 김중위님! 난 포로가 된 걸루 디난 과거는 다 잊을라구 기룹네다. 내
가 어드런 세상에서 살아온디를 이제는 다 알았시요. 다시는 생각하구 싶디두 않
쇄다. 난 거제도에서 다시 태어 난 것처럼 남은 세상을 살아갈라구 기래요. 우리
앞에는 심사가 있디 않습네까. 심사 받는 날 난 다시 태어난 걸루 생각을 하갔시
요. 자꾸 과거를 생각하문 내가 어디케 자유를 택하갔읍네까. 신의주에는 부모님
이 계시구 형제가 다 있시요. 생각을 하디 않게 해 달라우요.
[김중위] 우리가 다함께 당한 비극이야. 그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조사를 하고 처벌을 할려는거네. 그러니 사실대로만 진술을
해.
(윤석진 몹시 착잡한 듯)
[김중위] 자네가 증인으로 채택이 된 이상 모른다는 말로만은 답변이 되지 않
아.
(윤석진 괴로운 듯 망설인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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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사이 나직히) 새벽 한시에 형무소를 떠날 때부터 난 무서웠디요. 우
리는 소위 반동이라고 하는 중범덜만을 끌고 나왔댔시요. 다 사상범덜이외다. 폭
동의 기미는 기때부터 봤시요. 유엔군이 다밀구 올라왔는데 누가 북으로 끌레 가
갔다구 기루갔읍네까. 간수 수두 적었지요. 고랑쇠도 없어서 기대루 전깃줄로 결
박을 했디요. 해주역까지 끌구 나오는데두 갖은 애를 다 먹었읍네다. 객차는 1호
차 하나뿐이 댔시요. 거게는 도의 높은 놈덜이 다 타구 죄수덜은 2호 3호 4호 화
차에 나놔 태웠읍네다.
[김중위] 자네는?
[윤석진] 난 의사라구 아무데나 타라구 그룹데다.
[김중위] 1호야, 2호야, 3호야, 4호야?
[윤석진] 1호차에 타라구 기룹데다.
[김중위] 간수가 적었다면서?
[윤석진] 높은 놈들 가족중엔 환자가 며 있었시요.
[김중위] 그래서?
(기차의 시동하는 소리, 기적 소리, 이어 달리는 기차소리 깔리며)
[윤석진] 게우 화차에 죄수덜을 다 몰아실쿠 해주역을 떠났디요. 신원을 디나니
공습이 시작되더구만요.
(제트기 소리, 기총소사 소리, 이어 폭격기 소리 폭음 깔리며)
기차는 장수산 굴속을 향해 전속력으루 달랬시요. 기차가 굴속으루 디러가서 한
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화차 쪽에서 함성과 총소리가 귀를 째는 듯이 딜레오딜 않
갔시요.
[페이지] 015
[증인2] 도착지는 우리도 알 수 없었다.
[증인3] 우리들은 형무소의 간수로서 죄수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감시만 했을
뿐이다.
[증인1] 무기는 중기, 경기와 탄약 등 죄수들을 경비하기에는 충분했다.
[증인2] 간수들만 15명이었다. 기차가 공습을 받으며 굴속으로 들어간 것은 3시
와 4시 사이였다. 폭동은 예상하고 있었다.
[증인3]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명령도 받은 바 없다.
[증인1] 물론 사격은 명령에 의해서였다.
[증인2] 소장이 아니다. 소장과 부소장은 1호 열차에 타고 있었다.
[증인3] 우리 셋은 3호 화차에 타고 있었다.
[증인1] 2호 화차에서 최초의 사격명령의 신호탄 소리가 들려왔다.
[증인2]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일개 중위에 불과한 의무과장이 어떻게 1호 열차
에 탈수 있겠는가.
[박대위] 위증이야, 윤석진이는 1호차에 타고 있었다구 그랬어.
[김중위] 그럴 리가--------
[박대위] 왜 그런 위증을 했느냐는 거야, 무엇 때문에?
[김중위] 그놈들은 3호 화차에 타고 있었다고 그랬잖습니까?
[박대위] 그렇다고 2호 화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를 모르겠어?
[김중위] 단정을 할 수는 없죠.
[박대위] 생각을 해봐. 정치보위부나 당이라는 것은 그놈들에겐 최고의 권력기
관이야. 거기에다 검찰청과 인민위원회의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타고 있는데 일개
중위가 동승을 할 수 있었겠어?
[김중위] 윤석진은 의사였으니까요.
[페이지] 016
[박대위] 그런 햇병아리 의사는 죄수들한테나 필요해. 윤석진이는 분명히 죄수
들과 같이 있었어. 2호 화차에.
[김중위] 감수들의 증언만 믿는 것도 일방적이잖습니까.
(밖에서 짚차 와 멎는 소리)
[박대위] 그래서 오라고 그랬지. 지금 도착했군, 반가운 사람이니까 마중이라도
나가보지 그래.
(그러나 김중위 그대로 있다.)
[박대위] 건방진 놈이야, 의사라고 해서 바쁘다니.
[천영환] 바쁘갔디요, 윤의사를 너무 볶아대디 말라우요.
[박대위] 왜?
[천영환] 기래두 해주형무소에 있을 적에 제일 고마왔던 사람이 윤의사외다.
[박대위] 의무실에서 약을 몇번 타 먹은 모양이군.
[천영환] 형무소 의무실에 약이 있는 줄 압네까? 고작해야 다이아진이나 소화제
디요. 그것두 금값을 줘야 게우 타먹어요.
[박대위] 그럼 신세질 일이 뭐가 있어?
(노크소리)
[박대위] 들여보내.
(왼쪽에서 윤석진 등장한다.)
[윤석진] 안녕하셌시요?
[김중위] 오래간만이군.
[박대위] 귀한 손님이 오시는구만, 바쁜데 자꾸 오라가라 해서 미안한데?
[윤석진] 아니야요, 부르시문 언제나 와야디요.
[페이지] 017
[박대위] 둘이는 인사가 없겠군. 자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이 사람은 해주형무
소 일사 5감방에서 있던 죄수번호 235번 천영환이야.
[윤석진] 머이라구요?
(소스라치게 놀란다.)
[박대위] 왜 그렇게 놀라나?
[천영환] 윤선생, 윤선생은 나를 몰라볼 거외다. 하디만 나는 윤선생을 잘 알디
요. 증기루 빈대를 죽이누라구 며번 우리 감방엘 들어오디 않았댔소, 하에간 기때
빈대에 시달린 생각을 하문 소름이 끼팁네다. 냉중에는 쓰레백기루 퍼내갔디요.
[윤석진] 어디케 여겨 와 있소?
[천영환] 나도 포로신세가 됐시요.
[윤석진] ------- 내래 64에 있시요.
[천영환] 이질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멀리서 윤선생을 봤디요. 간호원하구 니얘
길 하구 있읍데다.
[박대위] 오늘 부른 건 자네 증언에 상위점이 있기 때문이야. 자네는 간수들이
모두 북으로 갔다고 그랬지만 천영환이는 그것을 부인했구 또 실제로 증명해 보였
어. 여기서 간수놈들을 몇놈 잡아냈지. (윤석진 굳어진다.)
그놈들은 자네가 2호 화차에 타구 있었다구 그랬어, 그러니까 죄수들과 같이 있
었다는 거야.
(윤석진 가만히 있는다.)
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지?
[김중위] 자네는 1호 객차에 타고 있었다고 그랬잖아.
[페이지] 018
[박대위] 천영환이는 4호 화차에 타구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자네가 1호 객차에
탈 수는 없었다는 거야.
[천영환] 다른 뜻으로 말한 건 아니외다. 4호 화차에두 서무과장이 타고 있었시
요.
[박대위] 2호 화차에 있던 간수가 없어서 단정은 할 수 없지만 자네가 바로 2호
화차에 있었으니까 자네가 증언을 하게.
[김중위] 그것은 질문이 될 수 없읍니다. 2호 화차에 있었다고 하고, 2호 화차
에 있었느냐는 질문이 어디 있읍니까?
[박대위] 어떻든 말을 해, 순서가 좀 뒤바뀌었지만.
(윤석진에게 보내는 세사람의 시선)
자네는 2호 화차에 타고 있었어, 그렇지?
[윤석진] (사이 작게) 예.
[김중위] 왜 그걸 숨겼지?
[윤석진] 2호 화차에서 어드런 일이 있었는디는 알구 계시디 않아요. 건 생각할
수록 악몽이뎄시요. 기래서 난 거게 없었다구, 몇번씩 나혼자 다짐을 했디요. 기
룬 악몽으로 더 시달리고 싶디가 않았시요.
[박대위] 자네 꿈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
야. 그 사건으로 2백명 이상의 양민이 학살됐어, 그놈들에겐 반동이없겠지만 우리
에겐 고귀한 생명이지. 납북인사와 목사, 교장, 학자, 반공투사 등 거의가 저명인
사와 우국지사들이었어. 그 고귀한 목숨을 한꺼번에 뺏어버린 거야, 누가? 간수놈
들이 그놈들은 자기들 직속상관의 명령을 받았어, 그렇다면 그놈들은 누구
[페이지] 019
의 명령을 받았을까? 자 자네는 다시한번 증언을 해야겠어. 자네는 2호 화차에 타
고 있었고 또 책임자였어, 자네는 죄수들을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
은 적이 있나?
[천영환] 있었다고 하는 거이 더 유리합네다.
[박대위] 유리가 불리가 아니야, 사실을 말하라는 거야.
[김중위] 그런 비밀지령이 있었다면 극비사항이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털어놔도
돼. 송환을 희망해서 다시 북으로 간다면 몰라도.
[윤석진] 난 의무담당이댔쇄다. 기룬 명령을 내렝다문 나한테 내렝갔소?
[박대위] 그렇다면 2호 화차에서는 어떻게 발포가 시작됐지?
[윤석진] 우발적이었디요, 기룬 상황 아래서야 총을 가진 사람은 쏘게 마렌 아
닙니까.
[박대위] 공포라면 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몽땅 다 쏴 죽여버렸어. 천영환이
어때? 그때의 상황이 그렇게 위급했었나?
[천영환] 2호 화차는 몰라두 4호 화차는 위급할 거이 하나두 없었디요. 70명이
타구는 있었디만 화차가 넓어서 한켄짝에 몰케 있었댔시요. 간수가 닐굽인데 총을
개지구 있으니 꼼짝할 수가 없었댔디요.
[김중위] 그러면 폭동은 어떻게 일어났지?
[천영환] 폭동이 아니댔쇄다. 굴속으로 디리가자마자 굴바깥에 폭탄이 떨어댔지
요. 우린 굴이 담방에 무너내리는 줄 알았댔시요. 와수수 흙이 떨어디구 폭탄에서
나는 포연하구 기차 연기루 숨이 콱콱 맥헹시요. 기루니끼니 누구래 앉아서 죽갔
시요? 다 살라구 퉤나갔디요.
[페이지] 020
[김중위] 발포는 당연했는지도 모르죠.
[박대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217명을 몽땅 죽여버린 것이 당연했어?
[김중위] 발포가 당연했을 거라고만 말씀을 드렸읍니다.
[박대위] 그래 발포는 당연했어, 하지만 몇명만 사살되는 것으로써 죄수들을 진
압하는 것은 충분했을 거야. 그런데 몰살을 시켰단 말이야, 그렇다면 분명히 상관
의 명령이 있었어.
[김중위] 그 명령을 의무과장한테 물으려고 하는 겁니까?
[박대위] 책임자였으니까.
[천영환] 윤선생이야 기루셌갔시요. 다른 간수덜두 많았는데요.
[박대위] 군관을 두구 전사가 명령을 내릴 수는 없어. 윤석진이 2호 화차의 발
포경위를 말해봐.
[윤석진] 우발적이었다구 말씀을 디렝디 않아요.
[박대위] 명령 그 자체가 우발적이었단 말인가?
[김중위] 박대위님, 심문이 그래서는 안되겠읍니다. 기대하는 답변을 위해서 유
도하는 것 같습니다.
[박대위] 그러면 자네가 물어봐. 기대하지 않는 답변을 위해서 말이야.
[김중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명령하에서 발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부
터 밝혀야겠죠, 발포는 명령에 의해서였나?
[윤석진] 간수는 죄수가 탈출을 하문 발포를 하는 것이 원칙 아닙네까? 그것두
죄가 되나요? 기룬걸 전범이라구 기레요? 어지께두 62에서 탈출할래던 포로가 경
비병한테 사살됐시요. 건 다 마찬가지 아닙네까?
[페이지] 021
[김중위] 그러면 그런 명령은 없었다고 말하면 돼.
[윤석진] 없었시요. 나는 거짓말은 못합네다.
[박대위] 이미 했어. 자네는 1호실 열차에 타고 있었다고 그랬잖아. 자네 증언
은 신빙성이 없어. 전사는 군관에게 책임을 미루고, 군관은 전사에게 책임을 미루
고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지? 우린 최초의 장수산 터널에 진격한 유엔군의 정보처
에서 여섯장의 현장사진을 구했어. 핏빛으로 얼룩진 현장의 모습은 차마 두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굴속에 넘어진 시체들, 그리고 노약
자들의 모습을 우린 발견했어. 어떤 목사의 시체에선 32방의 총탄자국을 발견했
다. 생각해봐, 저토록 악랄하게 살육을 저지를 수 있냐말야. 어느 교장의 시체는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사격을 받았어. 짐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무차별 사격이 있을 수 있겠어,
윤석진!
배태인을 들여보내.
[김중위] 또 증인이 있읍니까?
[박대위] 특무장 배태인을 알고 있겠지, 아주 사나운 놈이지. 야생마 같아. 김
일성대학 교수였던 한 곰보가 여단장으로 있는 그 악명높은 76에서 데리고 나왔
네. 천영환이는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넘겼어.
[김중위] 조사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계시는 거죠.
[박대위] 그 굴속에서의 학살은 적어도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은 아니야, 우발
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전원이 몰살됐다는 것은 그 우발성도 인정하기가 어려워. 아
무리 간수놈들이 악질이라고 해도 거의 노
[페이지] 022
약자와 환자들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2백명이나 죽여버릴 수는 없는 일이야. 분명
히 명령이 있었어, 상부로부터의 명령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각 화차 책임자로
부터의 명령 말이야. 그걸 밝혀야 해.
(노크소리)
[박대위] 들여보내.
(왼쪽에서 배태인 등장한다.)
[박대위] 아까처럼 못되게 굴었단 혼날 줄 알어?
[배태인] 어째서리 나를 이렇게 대우하오? 나는 포로요, 포로는 포로로서의 대
우를 받아야 하지 아니하오.
[박대위] 자식, 단단히 교육을 받고 왔군.
[김중위] 자넨 지금 포로로서의 대우는 받고 있는 거야.
[배태인] 포로는 인종이나 국적 종교적 정치적 의견으로 인한 불리한 차별을 받
지 아이하오.
[박대위] 귓구멍은 뚫렸다고 잔뜩 들어삼켰군, 떠들지 말구 이리 앉아.
[배태인] 못앉겠음. 이 국방군 간나새끼들이 나를 죄인취급 한다이.
[박대위] 뭐가 어째? 이새끼야, 포로라도 계급은 있는 거야.
[배태인] 당신들은 어째서리 이 인민군 특무장한테 반말을 하오, 인민군 특무장
이 장날 쇠똥인 줄 아오.
[김중위] 넌 죄인으로 여기 불려온 거야.
[페이지] 023
[배태인] 내가 무시기 죄인임매. 나한테 볼일 있으면 우리 수용소 대변인을 통
해서 부를 것이지, 개끌듯 나를 끌고 나와야 하겠음매. 사령관 좀 만나야겠오, 제
네바 협정 17조 위반이오.
[김중위] 그건 제네바협정 16조야 알려면 똑똑히 알어.
[배태인] 17이나 16이나 한끝차인데 그게 그기 아이오.
[박대위] 임마 포로가 된 놈들이 버젓이 붉은 기를 게양하고 인민재판이다 뭐다
매일 밤 사람이나 때려잡으면서 무슨 제네바 협정이야.
[배태인] 총이 있어야 총살을 하지비.
[박대위] 앉아, 넌 전범자 조사과로 소환된 거야.
[배태인] 서 있으라구 그래도 앉겠오, 해방군도 서있으면 다리가 아프오.
(앉는다.)
[박대위] 해주에서 떠날 때 몇호 차에 타고 있었지?
[배태인]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읽으며) 거------- 뭐드라? 그렇지, 묵비권
이란 기 있지 아이하오, 그기 무시기오?
[박대위] 대답을 다하면 나중에 가르쳐 주지.
[배태인] 나중에 꼭 가르쳐 주우다.
[박대위] 몇호 차에 타고 있었어?
[배태인] 4호 차요.
[박대위] 거긴 누구누구가 타고 있었지?
[페이지] 024
[배태인] 누구누구를 어찌 내가 다 알겠음. 모두 죄수요.
[박대위] 죄수 이외에 누가 타고 있었나 말이야.
[배태인] 죄수 이왼 간수요.
[박대위] 몇명?
[배태인] 나까지 닐곱이요.
[박대위] 4호차의 책임자는 누구였어?
[배태인] 섭섭하게시리 기 무슨 소리요, 내 생김새가 책임자같이 아이 생겼음
매? 난 책임자 아니믄 아이하오, 원래 인품이 그랬음매.
[박대위] 그럼 발표명령은 자네가 내렸겠군.
[배태인] 발포명령이오?
[박대위] 네가 책임자였으니까 말야.
[배태인] 그런 끔찍한 소린 아니 하는 법이요. 우리 4호차에선 절대 발포를 하
지 않았음매, 그랬음 얼매나 근사하겠음매.
[박대위] 그럼 어느 화차에서 사격신호가 났어?
[배태인] (느긋하게) 묵비권이요.
[박대위] 묵비권이 뭔지도 모르잖아.
[배태인] 이럴 때 하면 아이되오?
[박대위] 묵비권이란 맨나중에 하는 거야.
[배태인] 그럼 빨리 묻소, 답변 다하곤 난 묵비권이오.
[박대위] 어느 화차에서 사격신호가 났냐 말야.
[배태인] 맨 처음 사격신호가 난 곳은 2호 화차였음매.
[박대위] 2호 화차의 책임자는 누구였소.
[배태인] 조그마하게 생긴 의무과장이였소.
[페이지] 025
[박대위] 그럼 2호 화차에서 사격신호를 한 사람은 의무과장이였겠네?
[배태인] 아마 그랬을기요.
[김중위] 추측이 아니구 확실한 말을 해야 돼.
[배태인] 사실 사격신호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2호 화차에서였음매.
차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도 앞칸이 먼저 들어가는 법이 아이오.
[김중위] 칸이 다른데 어떻게 발포명령자를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배태인] 총소리가 나 문을 열고 봤더니 2호차에서리 죄수들이 뛰쳐나왔음매,
더구나 의무과장은 착실해서리 상부의 신임이 두터웠소. 그래서리 2호차의 책임자
루 탄거 아니겠음매. 2호차의 의무과장이 발포신호를 한 게 틀림없우다.
(박대위 김중위에게 의미있는 시선을 보낸다)
[박대위] 이 증언에 대해서 할말이 없나?
[배태인] 무시기 말을 또 하오?
[박대위] 반증을 하지 않겠어?
[배태인] 반증이 메요?
[김중위]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야.
[배태인] 나한테는 다 물었소?
[박대위] 그래.
[배태인] 그러면 난 묵비권이오.
[박대위] 더 할말이 없나 말이야.
(그러나 무대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채)
[페이지] 026
[장] 第四場(제사장) 64軍醫官室(군의관실)
[박대위] 모든 일을 조속히 끝내라는 명령입니다.
[한소령] 그럼 임무 때문에 왔소?
[박대위] 그렇습니다.
[한소령] 무슨 임무요?
[박대위] 포로의사 윤석진을 전범자 수용소로 인치합니다.
[데니스] 뭐라구요?
(일시에 놀라는 사람들, 윤석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전범자라니?
[경 희] 안돼요. 윤선생님은 아무 죄가 없으세요.
[혜 숙] 무엇을 가지고 그런 결론을 내리셨죠?
[박대위] 그것은 우리의 일이니까 깊이 묻지 마시요.
[트레버] 의사를 전범자 수용소에 수용하다니 -------- 닥터 윤은 포로이기 전
에 의사예요.
[박대위] 의사이기 전에 포로죠.
[트레버] 포로이기 이전에 의삽니다.
[한소령] 그건 납득이 안 가는군. 포로건 의사건 이 수용소 안에 있는데 왜 다
른 곳으로 데려갈려고 그러지? 도주의 염려가 없는 포로잖소.
[박대위] 염려 때문이 아니죠. 절차 때문입니다.
[경 희] 너무나 가혹한 처사예요. 어쩌면 의사를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어
요?
[페이지] 027
[트레버] 원장의 허가를 받았나요?
[박대위] 그것은 허가를 받을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으
니까요.
[트레버] 사령부에서는 어째서 의사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안하고 있죠? 닥터
윤은 이 64에 꼭 필요한 의사예요. 50명 이상의 환자가 지금 닥터 윤의 치료를 받
고 있읍니다. 이러한 의사를 격리수용 한다는 것은 어느 쪽의 이익도 아니잖아요.
[박대위]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업무량을 맡고 있읍니다. 예외규정을 두기 시작
한다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거예요. 여기는 포로 수용소이고 우리는 군인입니
다. 확실성만이 이곳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읍니다.
[윤석진] 내가 가갔시요. 가게 되어 있는 거라문 가야디요.
[경 희] 안돼요. 그리로 간다면 모두가 종말이에요. 전범자 수용소에 있는 자
들이 송환심사를 받을 것 같아요? 어느 공산수용소보다 더 강력히 심사를 거부할
거예요. 인간 말종들만이 모인 곳이 바로 거기예요. 그리로 가선 안돼요.
[데니스] 그래요, 그건 안될 일이예요. 박대위, 임무를 수행하는데 간섭하려는
것은 아니예요. 나는 전범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닥터 윤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소망을 간직해 왔어요. 그 소망은
자윱니다. 그 자유를 택할 송환심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어요. 그 기회는 분명히
하느님이 내리신 거예요. 아무도 그 기회를 뺏어서는 안됩니다. 닥터 윤에게 자유
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거예요.
[페이지] 028
[혜 숙] 자유를 택할 포로에게 그 기회를 뺏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은 아니
겠죠. 오늘의 저 시위는 자유를 달라는 소리예요.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면
바로 자유를 지켰기 때문일 거예요.
[트레버] 그렇습니다. 법의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를 원하는 포로들에게
자유를 나누어 주는 거예요. 나는 닥터 윤이 어떠한 사건에 관련됐건 자유를 택할
수 있는 송환심사만은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사령관님을 찾아가 진정하겠어요.
[경 희] 고마워요. 트레버 대위님.
[혜 숙] 저도 같이 가겠어요.
[한소령] 나도 가서 말씀을 드리지.
[데니스] 우리는 모두 갈거예요.
박대위, 우리의 뜻을 받아 주겠어요?
(박대위 짜증이 나는 듯)
우리는 그 사건의 조사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에요. 닥터 윤의 자유를 택할 기회
를 뺏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닥터 윤은 여러분과 같은 동폽니다. 그자들의 세계
에서 이제 우리쪽으로 왔어요. 하지만 닥터 윤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한걸음만 더
나온다면 닥터 윤은 우리와 같은 자유인이 될 수가 있어요. 기회를 뺏어야 하겠어
요? 그것이 여러분이 동포에게 베풀 은혜겠어요? 닥터 윤은 약합니다. 아무런 힘
도 없어요. 하나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택할 힘뿐이에요.
[한소령] 전범자수용소에 수용여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오. 심사를 받게 해 주자
는 거요. 전범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놈들이 심사를 전
[페이지] 029
면 거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전범사 조사과의 결정은 백
번 존중하지만 시행에 유보라는 것도 있지 않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박대위] 유보가 허용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용되는 것이라면, 심사만은 받도록
해야죠. 하지만 심사가 끝나면 곧 수사를 재개하겠읍니다.
[경 희] 고마워요 박대위님. 심사만 받도록 해주세요.
[데니스] 그래요. 결코 후회할 일은 아닐거예요.
[트레버] 닥터 윤, 우리 군의관들은 모두 닥터 윤이 자유를 택하기를 바라고 있
다는 것만은 알아둬요.
[데니스] 됐어요. 이젠 심사장으로 나가면 돼요.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
로 해요.
[윤석진] 고맙구만요. 다들 고마와요.
(윤석진 그대로 소침하다. 왼쪽에서 오창근 태극기를 휘두르며 미친 듯 뛰어 들
어온다.)
[경 희] 한소령님!
[한소령] 이놈아 누구야? 넌!
[오창근] 통일 없는 정전은 원치 않는다. 우익 동지를 사지로부터 구출하자. 악
질 좌익 수용소를 해산시켜라. 살인자를 때레 죽에라.
(오창근 윤석진에게 무섭게 덤벼들다 책상으로 뛰어오른다.)
[경 희] 정신병동에 있는 환자인가봐요.
[한소령] 이놈아, 내려와!
[오창근] 데 소리를 딜어보라우요. 나는 대한의 용사외다. 내 피가 끓어 올라
요. 나는 피끓는 젊은이야요.
[페이지] 030
[한소령]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가 있어.
[오창근] 아니야요, 나는 이 수용소를 나가기 전에 기차 빵통을 하나 얻어야 돼
요.
[한소령]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창근] 기차 빵통두 모르세요. 따발총 실탄 말이외다. (윤석진 쪽으로 달려든
다.)
[경 희] 석진씨!
[오창근] 기레요. 데 65쪽을 보시라우요. 풍선을 타구 포로가 올라가요. 65는
백색 수용소외다. 66군관 새끼덜이 햇빛신호를 보내고 있시요. 풍선을 맞히문 안
돼요. 자꾸 올라가야 돼요. 거제도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려야 돼요.
[한소령] 그래, 네 오마니한테 데려다 줄께.
(한소령 오창근을 끌고 나간다. 오창근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왼쪽으로 끌
려나간다.)
[장] 第五場(제오장) 幕舍(막사)앞
밤벌레 소리. 정경희 플래시 비추며 등장, 윤석진 혼자 있다.
[경 희] 혼자 계세요?
[윤석진] 바람 쐬러 잠깐 나왔쇄다.
[경 희] 착잡하실 거예요. (고개를 떨구는 윤석진)
[윤석진] 송환을 희망한다면 보내는 줄까요?
[페이지] 031
[경 희] 물론이에요, 그건 유엔군사령부의 약속이에요.
[윤석진] 제가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대두요?
[경 희] 조사는 곧 끝나요. 재판까지 간대두 결과가 나오면 보내줄 거예요.
[윤석진] 확실한가요?
[경 희] 북으로 갈 생각이세요?
(윤석진 나직이 한숨 짓는다.)
답변은 안해도 좋아요. 하지만 고향 때문에 자기의 장래를 희생할 수는 없는 일
이에요. 부모 처자를 다 거느리고 있는 포로들이 대부분이 거든요. 그래도 자유를
택하겠다고 하는 까닭을 석진씨는 모르세요? 그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시는
붉은 제복을 입을 수는 없다는 거죠. 누구라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지 않겠어요.
[윤석진] 하지만 난 남쪽에 남으문 죄인으로 몰릴 것만 같아요. 전범 재판이 어
드룬 건디를 나는 압네다.
[경 희] 유죄가 된다면 북으로두 갈 순 없어요.
(윤석진 초조해지며 어쩔 줄 모른다.)
왜 스스로가 죄가 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윤석진] 처음엔 발포신호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시요. 기차가 장수산 터널에
서 공습으로 정거를 했을 때 2호차의 죄수 한놈이 소리를 질렀시요. 그것이 시초
야요.
[소 리] (에코) 공습이다. 뛰어내래라, 우린 끌려가면 모두 죽는다, 죽어!
[윤석진] 죄수덜 몇명이 화차문을 열고 밖으로 튀기 시작했구 몇놈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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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테 덤벼들었시요. 난 무서웠시요. 죄수 중에 한놈이 칼을 꺼내 들고 나한테 덤
벼들었시요. 난 어쩔 수가 없었시요. 칼을 든 죄수놈이 내 가슴까지 바짝 다가섰
시요. 난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시요. (총소리) 물론 공포였디요. 발포신호를
할 마음은 정말 없었시요. 그때부터 사격이 일제히 시작됐시요. (요란한 총성, 사
람들의 비명) 간수덜이 도망치는 죄수덜을 향해 사정없이 사격을 했시요.
[경 희] 정당방위로 공포를 쏜 게 사격명령이 되고 말았다는 얘긴가요?
[윤석진] 칼을 들고 덤비는데 누구래 가만 있갔시요.
[경 희] 결국 최초의 사격신호를 보낸 결과가 됐군요.
[윤석진] 난 죄수덜을 죽일 생각은 없었시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공포를 쏜
거야요. 난 어카디요? 심사는 점점 다가와요. 남쪽에 있어야 됩니까, 북쪽으로 가
야 합네까?
[경 희] 분명히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석진씨가 전범사건에 관련됐다고 해
서 석진씨의 장래를 택하는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윤석진] 나는 죄인이나요? 나는 정말 죄를 진건가요?
[경 희]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니예요. 석진씨는 결코 죄를 질 수는 없는
사람이에요. 석진씨의 초조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염려할 것
은 없어요. 재판관은 현명하니까요. 죽어서는 안돼요, 살아야 해요, 살아서 부모
님도 만나고 고향에도 돌아가야 돼요. 심사장으로 나가서 떳떳이 석진씨의 장래를
택하세요. 그리고 살려고 노력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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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제가 살 수가 있을까요?
[경 희] 석진씨는 죄인일 수 없어요. 조사가 좀더 진행되면 석진씨는 혐의자가
아닌 단순한 증인으로 낙찰될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할 거예
요.
[윤석진] 고마워요, 고마워요.
[경 희] 심사장으로 나가겠어요?
[윤석진] 예.
[경 희] 그러면 내일 아침 내가 심사장 앞까지 배웅을 해 드리겠어요. 우리 같
이 가도록 하세요. (석진 경희의 손을 잡는다.)
[장] 第六場(제육장) 審査場(심사장)
전면 중앙에 윤석진을 중심으로 왼쪽에 천영환 그리고 오른쪽에 배태인, 오창근
과 증인 포로들. 뒤상단에 심사위원 한소령, 박대위, 김중위 그리고 왼쪽에 데니
스, 트레버, 경희, 혜숙.
시끌시끌한 소음속에 부분조명 들어오면 제각기 포즈를 취한 채 정지된 상태에
서 앰프를 통하여 설명문이 나온다.
[설명문] 모든 포로들은 다음 며칠 동안 개별적으로 회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회견은 인민군이나 중공군 중에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누구며 송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를 가진 포로가 누군가를 가려낼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다. 이 결정은 포로를 상호교환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간에 여러분이
[페이지] 034
짓는 결정이 가장 중요한 결정이며, 아마 여러분의 일생에 다시 없을 중대한 결정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주의해 둔다.
(다시 시끌시끌한 소음, 호루루기소리)
[심사위원] 포로 윤석진?
(부동자세를 취하는 윤석진, 초조한 경희)
[심사위원] 그대는 자의로 북한에 송환되기를 바라는가?
[윤석진] 바라디 않아요.
[심사위원] 그대는 송환을 강력히 거부하는가?
[윤석진] 예.
[심사위원] 그대는 송환을 택한 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이곳
거제도에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윤석진] 알구 있시요.
[심사위원] 유엔군사령부가 그대를 어떠한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가?
[윤석진] 예.
[심사위원] 그대는 이러한 결정이 그대의 가족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주의 깊게
고려해 보았는가? (윤석진 망설인다.)
[경 희] 윤선생님!
[윤석진] 예, 생각해 봤디요.
[심시위원] 그대는 아직도 강력히 송환을 거부할 결심이 되어있는가?
[윤석진] 예, 난 안 가갔시요.
[심사위원] 이 결정에도 불구하고 송환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윤석진] 수용소를 탈출해서라두 자유를 찾구야 말갔시요.
[페이지] 035
[심사위원] 질문 끝.
(갑자기 환성을 지르며 윤석진에게 달려가는 사람들)
[경 희] 윤선생님!
[장] 第七場(제칠장) 戰犯者 調査課(전범자 조사과)
[박대위] 내일 아침까지 윤석진이를 전범자 수용소로 인치시켜 사건을 종결지어
야겠어.
[김중위] 배태인 증언만으론 아직 미흡하지 않습니까?
[박대위] 윤석진이 자신이 시인을 했잖아.
[김중위] 그건 우발적인 공포탄에 대한 시인이었읍니다.
[박대위] 우발적이었다고 자네가 어떻게 단정해?
[김중위] 그럼 사격이 명령이었다고 어떻게 단정하십니까?
[박대위] 자네 지금 윤석진이를 변호하고 있는거야, 내앞에서--------?
[김중위] 변호가 아니라 좀더 사건의 윤곽을 명료히 하자는 겁니다.
[박대위] 그렇다면 자네의 주장대로 윤석진이의 발포가 우발적이었다고 해도 어
쨌든 그건 사격명령의 신호가 된 건 사실이잖아.
[김중위] 윤석진에게는 전혀 학살의 의지가 없었다면 전범자로서의 이유가 성립
되지 않습니다.
[박대위] (책상을 치며) 도대체 너희 학사출신 놈들하곤 일하기가 거북해! 매사
를 논리정연하게 따지고 이론을 앞세우고 말야, 학살의지는 뭐 말라 죽은 거야?
더구나 값싼 인정이나 감정에 치우쳐 전범을 다룬다는 건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
야. 최초에 총성을 냈으
[페이지] 036
면 그놈이 바로 주범이야. 살인의지가 있었건 없었건간에 그런 심리적 상태는 전
쟁이 끝난 뒤 학자들에게 맡기면 돼. 우린 지금 전범자를 색출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야?
[김중위] 만약에 윤석진이가 살인의지를 가지고 발포신호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
격신호권을 부여한 형무소 소장이 있읍니다. 최초의 명령자는 사실 형무소 소장이
져야 마땅합니다.
[박대위] 우리는 최후의 살인명령자를 찾고 있는 거야.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김일성이나 스탈린을 여기까지 끌고 와야 된다는 결론이 아냐.
[김중위] 그것이 중요한 얘깁니다.
[박대위] 뭐가 중요해?
[김중위] 이 전쟁의 원흉한테 우리는 전범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박대위] (고함) 자네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야, 뭐야? 우린 지금 신원과 미력
사이에 있는 장수산 터널 속의 학살주범을 찾고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린 수십일의
정력을 소비해 그놈을 찾아냈구, 그런데 지금와서 어쩌자는 거야?
[김중위] 지금 상관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사관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대위] 둘다야!
[김중위] 우리들의 수사는 공평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전쟁을 통해
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었읍니다. 이제 살아남은 생명은 이유야 어떻든 보
호하고 아껴야 합니다. 최후까지 그들의 변명을 들어야 합니다.
[페이지] 037
[박대위] (순간적) 시끄러 이새끼! 너 빨갱이야! 왜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거
야!
(잠시 침묵)
[김중위] (돌아서서 억제하며) 이 전쟁은 언젠가 끝납니다. 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여기서의 일들을 교훈으로 간직하고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겁니
다.
전쟁이 끝나면 말입니다-------
[박대위] (차분히) 나도 자네만큼 이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어. 우물 속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부패된 시체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았네, 손은 모두
뒤로 묶여 있더군. 나는 의치를 보구서야 겨우 교장선생님의 시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었네. 그것이 내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네.
[김중위] -------
[박대위] 내게는 눈물이라는 것이 없어, 눈물로서 그러한 자들을 단죄할 수 없
으니까, 지성도 인격도 양식도 난 안 믿어. 내 아버님을 그 죽음의 현장으로 끌고
간 자는 아버님이 데리고 있던 교사놈이었어. 나도 자네만큼 이 전쟁에 회의를 느
끼고 있네만 한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어. 빨갱이들과는 전혀 이해와 사랑이 통하
지 않는다는 거야. 놈들은 아주 하급 동물이란 걸 명심해야 돼!
[김중위] 경우에 따라선 동물을 다루는 데는 사람을 다루는 것보다 더욱 신중해
야 합니다.
[박대위] 그건 무슨 얘기야?
[김중위] (종이 한장을 둥글게 말아 원통을 만든다.) 이 사건의 종결단
[페이지] 038
계에서 전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박대위] 새로운 증인이라도 나왔단 말야?
[김중위] (종이를 들어 보이며) 증인이 아니라 현장입니다.
[박대위] 현장?
[김중위] 이게 장수산 터널입니다. 이쪽이 신원 쪽이구, 이쪽이 미력 쪽입니다.
위치로 봐선 미력이 북쪽 그리고 신원이 남쪽입니다.
[박대위] 갑자기 나한테 지리 강의를 하는 거야?
[김중위] 아닙니다. 윤석진의 진술에 의하면 학살이 끝난 뒤 간수들과 군관들은
모두 신원 쪽으로 도망쳤다고 했읍니다.
[박대위] 그래서?
[김중위] 유엔군의 진격이 임박한데 어째서 들어왔던 터널의 입구쪽, 다시 말해
남쪽으로 도망을 쳤냐는 겁니다. 응당 북쪽, 다시말해 미력쪽으로 도망가야 되지
않읍니까.
[박대위] 그야 터널의 입구 부문에서 기차가 정차했으니까 빨리 굴을 빠져 나가
기 위해서 그랬을 테지.
[김중위] 아닙니다. 여기에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대위] 함정?
[장] 第八場(제팔장) 天幕敎會(천막교회)
은은한 올겐소리
한쪽에 작은 십자가
군목과 윤석진 마주 서 있다.
[페이지] 039
[윤석진] 난 당신한테 묻갔시요. 내가 어째서 전범자가 되야 하는가 그걸 알려
주시라우요. 어째서 내가 죄인입네까?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읍네까? 전쟁은 죽이
고 죽이는 거야요,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기 전쟁이야요. 이 전쟁에
서 살인하지 않은 사람만 죄가 없고 살인을 했기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라면 난 그
걸 믿지 않갔시요.
[데니스] 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얘기했소, 당신만이 이 전쟁 중에서 죄인
이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소, 문제는 우리의 죄를 우리가 참회하고 우리의 잘못을
우리가 뉘우칠 때 우리는 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요.
[윤석진] 헌데 어째서 날 전범자로 만드는 거야요. 내가 217명의 죄수덜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고 왜 몰아세우는 거야요? 난 죄수덜을 향해 절대 총을 쏘지 않았시
요. 헌데 어째서 내가 학살의 책임자가 되야 하는 거야요?
[데니스] 허지만 당신은 학살의 현장에 있었소. 그리고 당신의 발포신호가 학살
의 원인이 된 것이요. 공포탄은 살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무
죄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오. 장수산 터널은 지옥이었소이다. 하나님의 시험장이
었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금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오.
[윤석진] 난 하나님 같은 거 믿지 않아요. 허디만 이것만은 믿을 수 있시요. 난
사람을 죽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는 것 말이요.
[데니스] 당신의 결백은 당신의 증언이나 고백으로서만 증명되지 않소, 하하님
앞에 기도하시요. 그 기도하는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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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신 판결을 들을 수 있을 것이요.
[윤석진] 장수산 터널에는 하나님은 없었시요. 죽고 죽이는 자만이 있었시요,
캄캄한 어둠과 기관차의 검은 연기와 총소리만이 있었시요, 현장에 없었든 하나님
이 어찌 사실을 알갔시요. 하나님도 볼 수 없었던 굴속의 참상을 나는 똑똑히 목
격했시요.
[데니스] 하나님은 어데든지 참여하시오. 장수산 터널 속에도 이 포로수용소 안
에도 그리고 포연이 자욱한 전장의 계곡에도.
[윤석진] (고함) 그럼 얘기해 보라우요. 장수산 굴속의 얘기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시라요. 내가 죄인덜을 학살한 책임자였읍네까? 아닙니까?
(공허한 메아리, 아무 대답이 없다. 윤석진 하늘을 우러러 고함을 친다. 터널
속의 음향으로서 들려온다.)
2호 화차 3호 화차 4호 화차에서도 사격이 시작됐시요. 간수덜은 미친듯이 소리
치며 뛰어 다녔시요. 쏴라! 쏴라! 한놈두 냉기지 말고 모조리 쏴 죽여라! 불과 5
분 동안에 생긴 일이였시요. 잠시 후 굴 속에는 무서운 침묵이 흘렀시요. 죄수덜
의 신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왔시요.
난 이것이 지옥이구나 하고 생각했시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외쳐댔시요. 모
두 신원 쪽으로 퉤라! 여기 있으면 포로가 된다. 모두 신원 쪽으로 퉤라, 모두 신
원 쪽으로 퉤라! 난 그곳에 그냥 앉아있었시요. 피비린내 나는 굴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시요. 간수들과 군관들이 한쪽으로 사라져 갔시요. 나만 남겨놓구 모두
들 북쪽으로 튀여갔시요. 그것 뿐이요.
난 아무 죄도 없시요. 학살한 놈덜은 모두 북쪽으로 도망갔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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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가만히 윤석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다.) 하나님은 그 어둠속에서
그걸 보구 계셨소!
[윤석진] 아냐요. 아냐요, 그곳엔 나혼자 앉아 있었시요. 아무도 없었시요. 시
체와 피비린내만이 굴속에 가득했시요. (고함) 난 전범자가 아니야요! 아니야요!
난 살고파요! 살고파요!
[장] 第九場(제구장) 戰犯者 調査課(전범자 조사과)
[김중위] 새로운 증인을 찾아냈읍니다.
[박대위] 사건은 이미 종결이 됐잖아.
[김중위] 박대위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박대위] 뭐야 지금부터 시작이야?
[김중위] 어제 천영환이가 93에서 데리고 나온 민간포로입니다. 이름은 현창우,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 증인입니다.
(손뼉을 두번친다. 어둠 속에서 현창우 나타난다.)
[현창우] 제가 바로 현창우라는 사람입니다. 10월 17일 해주역에서 죄수들을 싣
고 해주역을 떠난 바로 그 기관차의 기관사올씨다. 우리는 도정치보위부의 특별지
시로 4개의 화차가 달린 기관차에서 10월 16일부터 대기하고 있었읍니다. 우리의
임무는 죄수들을 싣고 해주역을 떠나는 것이었읍니다.
[김중위] 목적지는?
[현창우] 신원과 미력 사이의 장수산 터널이었읍니다.
[박대위] 아니 터널이 목적지였단 말야?
[페이지] 042
[현창우] 그곳이 목적지였으며 종착지점이었읍니다.
[김중위] 미력까지 갈 수 없었든 이유는?
[현창우] 장수산 터널은 10월 3일에 유엔군의 폭격으로 미력 쪽의 출구가 붕괴
되어 막혀 있었읍니다. 그건 기관사한테만 내린 극비 지령이었읍니다.
[박대위] (놀람) 그럼 다른 간수들은 전혀 모른 채 막힌 굴속을 향해 해주역을
떠났단 말야?
[현창우] 그렇습니다. 처음엔 우리 기관사들도 의아하게 생각했읍니다만 분명히
붕괴된 장수산 터널이 목적지였읍니다.
[김중위] 도정치보위부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나?
[현창우] 기차를 신원 쪽에서 몰아 터널 속으로 들어간 뒤 굴이 막힌 곳에서 기
차를 정차하라고 했읍니다. 그리고 정차한 순간 기관사와 조수들은 즉각 기관차에
서 이탈하여 신원 쪽으로 튀라고 연락을 받았읍니다.
[김중위] 그 이유는?
[현창우] 사격이 있을 거라고 했읍니다.
[박대위] 그뒤 상황을 설명하게.
[현창우] 박아놓고 죽자사자 뛰어나갔읍니다. 우리가 굴 입구쯤에 도착했을때
굴속에서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읍니다. 그것뿐입니다.
[김중위] 도정치보위부에서는 터널이 이미 10월 3일에 무너진 걸 알고 있었나?
[현창우] 굴이 무너진 위치와 상태까지 상세하게 하달이 됐읍니다.
[김중위] 무너진 굴 속으로 기차를 몰라는 상부의 지시 이유를 자네는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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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나?
[현창우] 난 기관삽니다. 그저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 이유를 말단 기관사가 어떻게 알겠읍니까?
[김중위] 이상 질문 끝.
(증언석의 현창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박대위] 그렇다면 처음부터 죄수들을 학살하기 위하여 터널 속으로 끌고 간 것
이로군.
[김중위] 그들은 죄수들을 호송하기 위하여 기차에 태운 것이 아니라 학살하기
가장 좋은 터널 속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기차에 태웠든 겁니다. 이미 학살의 명
령은 해주 형무소를 떠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박대위] 그럼 윤석진이는 무죄라는 얘기 아냐!
[장] 第十場(제십장) 철조망가
망연한 윤석진과 옆에 경희.
[윤석진] 나는 배를 타고 거제도루 건너올 때 넓은 바다를 봤어요. 바람이 어니
켄으루 흐르는디는 모르갔습데다. 그래서 흘러가는 데루 흘러가자 하구 맘을 먹었
디요. 시방두 나는 내가 어데루 흘러가구 있는디를 모르갔시요. 신의주에서 거제
도까장은 흘러왔는데 어데루 더 가구 있는 겁네까? 어데루 가다 어디케 됩네까?
[경 희] 혼자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같이 가고 있는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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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똑같은 고통의 배를 타고 한없이 물결 따라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배는
흐르고 흘러서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을 거예요. 난 그걸 확신해요.
[윤석진] 아니야요. 털망은 또 있시요. 기 털망은 내가 헤어날 수 없는 털망이
외다. 2중 4중 8중의 털망이야요. 남쪽을 택한다구 해두 기 털망안에서 자유를 찾
을 수는 없시요. 나는 설 땅이 없는 놈이외다. 단 한치의 땅두 나를 위한 땅은 없
시요.
[경 희] 아니예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절망을 하는 거예요? 결백은 틀림없이
밝혀져요. 조금도 초조해 할 건 없어요. 나는 지난 상황이 어떠했건 윤선생님의
결백을 믿어요.
[윤석진] 고맙군요, 고마와요.
(데모대의 구호 외치는 소리 들려온다.)
[경 희] 들어 보세요. 저 소리가 철조망을 헤치고 새롭게 탄생하려는 소리예
요. 우리도 같이 진통을 해요. 그리고 저 넓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세요.
[윤석진] 거이 간절한 내 소망이외다. 하디만 내가 못나가문 경희씨는 두번 상
처를 받을 거야요. 죽은 남편의 얼굴이 밤마다 떠오르디요. 기레서 밤이 더 길구
괴로운 거이디오.
(경희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나 때문에 경희씨한테 또 한번의 상처를 줄 수는 없시요. 기리케 되문 경희씨는
아마 미테버리구 말 거외다.
[경 희] 그럴 거예요, 그이를 너무나 사랑했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 괴로움이
더 크고 길었어요. 윤선생님에게서 그이의 모습을 찾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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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더 지탱하지 못했을 거예요. 전쟁으로 가족과 집마저 잃
어버린 내가 어디에 기댈 수가 있었겠어요. 윤선생님을 만나는 날부터 저는 점차
원기를 찾을 수가 있었어요. 윤선생님에게서 그분의 모습을 찾아 낸 것에서 비롯
됐지만, 이제 윤선생님한테서 그이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저는 오로
지 윤선생님을 사랑할 뿐예요. 그 사랑의 힘으로 저는 살아가고 있어요.
[윤석진] 경희씨!
[경 희] 석진씨! (두사람 격정적으로 포옹)
[장] 第拾一章(제십일장) 軍醫官室(군의관실)
혜숙, 데니스, 트레버, 박대위, 김중위, 한소령, 정경희, 윤석진
[김중위] 한소령님, 그동안 너무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이제 사건이 종결
돼서 우리도 한결 홀가분하군요.
[박대위] (윤석진에게) 자네에게 본의아니게 혐의를 뒀다는 사실을 사과하네,
이젠 전범자 조사과에 나올 필요는 없으니까.
[데니스] 윤석진이는 대한민국 품에 안길 것을 우리와 약속했소.
[박대위] 우리가 찾는 장수산 터널의 전범은 여기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는 없다
는 결론을 내렸읍니다.
[김중위] 송환심사가 끝나면 이제 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폐쇄될 겁니다.
[한소령] 김중위는 대학으로 돌아가겠군.
[페이지] 046
[김중위] 전 역시 손에 백묵이나 쥐는 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군인으로선 빵
점이죠.
[혜 숙] 안녕히 가세요.
[박대위] 아니지, 이번 사건의 처리만은 아주 직업군인을 능가하는 훌륭한 솜씨
였어.
[김중위] 자 그럼 다시 뵙겠읍니다.
[박대위] (윤석진에게) 자네 석방된 후 갈 곳 없으면 나한테 찾아오게.
[한소령] 괜히 미쓰 정한테 섭섭한 소리 하지 마시오.
[박대위] (의미있게) 그래요?
[경 희] 왜 섭섭하세요?
[박대위] 아닙니다. 축하합니다.
(박대위, 김중위 나가려 한다. 이때 칼을 든 오창근 뛰어들어온다.)
[오창근] 빨리덜 피해요. 빨치산이 테들어와요.
[김중위] 뭐라구?
[한소령] 아니 이 녀석이 또 왔어.
[경 희] 정신병동에 있는 환자예요.
[오창근] 빨갱이 새끼덜은 다 죽에야 돼요.
(날쌔게 다려들어 윤석진을 찌르려 한다. 김중위 오창근의 팔을 비틀어 잡는
다.)
[김중위] 진정해, 이 친구야!
[오창근] 비키라우요, 내가 죽이갔시요. 저 빨갱이 새끼를 내가 죽이갔시요.
[박대위] 자네 어데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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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근] 내래 저새끼 죽이기 위해서 몇달을 기다렸시요.
[박대위] 누구 말야?
[오창근] (윤석진을 가리키며) 바로 저놈 말이외다.
[데니스] 왜 그래요 닥터 윤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요?
[오창근] 데놈 새끼가 어디케 하늘을 테다보구 산단 말입네까? 내가 죽이갔시
요, 내가 죽이지를 못하믄 데 새끼를 죽일 놈이 없시요.
[박대위] 윤석진이를 어떻게 알어?
[경 희] 정신병동에 있는 환자예요.
[오창근] 기래요, 나는 미텼시요, 어디케 내가 미티디 않을 수 있갔시요, 하디
만 이렇게 정신이 가끔 들 때가 있쇄다. 기래서 더 새끼를 죽이러 온 거야요.
[김중위] 이유가 뭐야?
[오창근] 데 새끼는 의사가 아니야요.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마누라를
죽인 원수야요!
[김중위] 아버지를?
[오창근] (땅에 넘어진다, 그리고 흐느낀다) 선상님덜은 모를 거야요. 우리 가
족덜은 그날 장수산 터널 속에 있었시요. 아버지가 반동이라구 저놈들은 우리 식
구를 모두 붙잡아 갔시요.
[박대위] 해주형무소에 있었나?
[오창근] 우린 2호 화차에 타고 있었시요. 바루 더 새끼가 책임자루 있던 2호
화차에 온 가족이 타고 있었시요. 기차가 굴 속에 덩차하자 더 새끼가 맨먼저 총
을 쐈시요. 그러니께니 간수새끼덜이 사정없이 사격을 시작했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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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소리 에코로 들려온다.)
처음엔 아버지가 맞았시요. 다음엔 어머니 이마에 총알이 박헹시요. 난 마누라
와 아이들을 데리고 화차문을 뛰쳐나왔시요. 저놈들은 도망치는 우리들에게 사정
없이 총을 쐈시요. 마누라가 맞았시요. 옆구리에 맞구 소리를 질렀시요.
난 넘어지는 바람에 아이들을 양손에서 놓쳤시요. 사방이 어두워서 갈 길을 찾
지 못했시요. 잠시후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시요-------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두눈엔 눈물이 고이고)
다 죽었읍네다. 장수산 굴 속에서 모두가 죽어 갔읍네다------ 난 미쳤시요. 난
미쳤시요! 보시구레------ 난 이렇게 미쳤시요! 바루 데놈새끼 때문에 그랬시요.
저놈이 맨먼저 총을 쐈시요!
[오창근] (벌떡 일어나서) 그럼 명령한 자는 누굽네까? 누가야요? 누가 내 부모
와 처자식을 죽였읍네까? 도대체 누구야요, 알레 주시라우요!
[김중위] 우린 영원히 그자를 만나지 못할걸세!
[윤석진] 난 전범자외다! 장수산 터널의 학살 책임자는 바로 납니다요! 내가
217명을 모두 죽였시요. 나두 아이들의 울음소릴 들었시요. 아녀자의 비명소리도
들었시요. 이제야 생생히 떠오르고 있시요. 내가 그들을 죽인 거야요. 난 전범자
외다.
[페이지] 049
[장] 第十場(제십장) 病室(병실)
정경희 짐을 챙기고 있다. 윤석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
[경 희] 부산으로 가는 배가 내일 새벽에 떠난다고 하더군요. 옷과 세면도구는
전부 가방에 넣었어요. 자유인이 되는 거예요.
[윤석진] 혼자 떠나시라우요.
[경 희] 이젠 어린애처럼 보채지 말아요. 석진씨의 결백은 만천하에 밝혀졌어
요.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찾는 것만이 남았어요.
[윤석진] 아냐요, 난 죄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였시요. 난 이제야 내가 진짜
살인자라는 걸 알았시요. 내가 쐈시요, 내가 쏜 거나 마찬가지야요. 내가 명령을
했시요.
[경 희] (단호히) 그건 석진씨 혼자의 잘못이 아니에요. (차분히) 이제 우린
육지로 떠나는 배를 타게 되요. 악몽과 고통의 섬을 떠나 자유와 희망이 가득찬
저 육지를 향해 떠나면 되는 거예요. 전쟁의 잔재를 저 푸른 바닷속에 미련없이
내던지면 되는 거예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거예요. 자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
요.
[윤석진] 밤마다 그 아이들이 떠오르고 있시요. 피투성이가 된 얼굴, 얼굴, 얼
굴-------
(한소령 급하게 뛰어들어온다.)
[한소령] 미쓰 정 어떻게 된 거야, 피가 복도까지 흐르고 있어.
[경 희] (고개를 든다.) 네? 피가?
[한소령] 아니 윤석진!
(윤석진 넘어진다. 종소리)
[페이지] 050
[장] 第十五場(제십오장) 捕虜基地(포로기지)
십자가 앞에 최군목이 기도를 하고 있다.
[데니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심판으로 그는 당신에게 부름을 받았읍니다.
그분에게 영원한 삶의 의리를 주옵시고 누구도 침범 못할 사람의 힘과 영혼이 죽
음에서 발할 빛을 주옵소서.
[윤석진] 나는 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올 때 넓은 바다를 봤디요. 바람이 어니
켠으로 부는디는 알 수 있어도 물이 어니켠으로 흐르는디는 모르겠습데다.
[데니스] 우리는 탄생의 댓가로서 우리의 원죄와 사회의 질서라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읍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세계가 완성치 못했다면 이로 인해 우리들
의 싸움은 비롯된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그러한 행위를 주고 갔다
고 보십니까? 그것은 절대적인 정당성이 있었읍니까? 원죄와 하나님의 심판 때문
에 후회스러운 혹은 자랑스러운 생애를 보낸 그였읍니다. 선과 악의 동일한 우주
속에 불합리한 심판을 받은 그였읍니다.
[윤석진] 그래서 흘러가는데루 흘러가자구 맘을 먹었다오. 시방두 나는 내가 어
디로 흘러가는지를 모르갔시요. 신의주에서 거제도까지 흘러왔는데 어데루 더 가
구 있는 겁네까? 어데루 더 가구 있는겁네까?
[데니스] 그는 분명히 우리에게 결과를 주었읍니다. 하나님은 왜 그의 진실한
소릴 들어보지 못하셨읍니까. 그의 진실한 소리를 들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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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셨다면 그것은 당신이 만든 모순 속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한 일
을 다시 판단하여 주십시요. 그의 소원을 들어 주옵시고 우리들에게도 소원의 음
성이 들리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앙하나이다.
[윤석진] 털망이 또 있시요. 기 털망은 내가 헤어날 수 없는 털망이외다.
2중 4중 8중의 털망이야요. 나는 설 땅이 없는 놈이외다. 단한치의 땅도 나를
위한 땅은 없시요.
[혜 숙] 떠나시겠어요?
[경 희] 가야지.
[김중위] 거제도는 남해에 떠있는 조용한 섬으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박대위] 두해에 걸친 소란도 이젠 끝이 났군.
[김중위] 20년 30년 후에도 사람들은 이 섬을 기억할까요?
(파도 갈매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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