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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헨로 경영에 문제가 있는가
최후의 레이조인 오쿠보지(大窪寺)를 향해 나가오지를 떠난 시각은 12시 30분.
경내의 안내석에는 16.5km라 하고 소지하고 있는 지도에는 12.3km, 15.1km, 16km등으로
되어 있는 오쿠보지.
이른바 오리지널이라는 옛길을 비롯해 댐(前山Dam) 건설로 인한 각종 공사 때문에 우회
하게 되어 있는 각기 다른 루트를 안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200km 시코쿠헨로의 잔여 거리 중에서 최장(16.5km) 루트를 택해도 오늘 오후만으로도
충분한 거리인데 남은 시간이 5일이라면 나의 헨로 경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젊은 니시오와 함께 한 초반에는 지체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나홀로가 시작된 중반에는
과부하를 걸었고 종반에는 남아도는 시간의 처리로 고민해야 한다면.
그런데도, 서두르고 있는 나.
남은 구간(87번~88번사이)에 있다는 '오헨로교류살롱'(헨로 완주증 발행하는 곳)의 일과
종료 시간인 오후4시 이전에 도착하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시점에서 내게 넘쳐나는 것은 애오라지 시간이며 헨로살롱 방문이 하루 지연된다 해서
헨로의 완주에 차질이 있거나 오점이 되는 것도 아니건만 천성 때문일 것이다.
85번 야쿠리지에서 하산, 세토나이카이 시도만(志度灣)의 시도지와 내륙의 나가오지까지
농로 위주의 평지 헨로미치를 아무 부담 없이 평화롭게 걸었다.
나가오지에서 겨우 50m지점에 있는 '오쿠보지 12.6km'라는 이정석은 최단거리인 새길일
것이며 하기모리가 내 지도책을 마지막으로 어지럽히며 막은 루트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긴, 그(萩森)가 최후로 권한 마지막 루트는 지도(헨로미치보존협력회)를 무시한 길이다.
그는 시코쿠헨로에 대해 그 정도로 격정적인 사람이다.
북남으로 길게 분포된 타운, 나가오니시를 따라 남하하는 오쿠보지 헨로미치에 들어섰다.
나가오카이도(長尾街道), 10번현도와의 십자로 등 대소 십자로들을 건넜다.
소린지(宗林寺) 입구에 박혀있는 오쿠보지15.3km 이정표.
제각각인 거리 안내에 실망이 더했지만 마지막이니까....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양쪽 길가에 조성된 소규모묘지들이 까미노 마을들을 연상하게 하는 길의 십자로 2개를
더 건너면 279번현도와의 교차점 직전인 호세이지(寶政寺/右側) 앞에 당도한다.
코보대사의 석좌상(石座像)을 본존으로 하는 암자(川原の庵)란다.
호세이지 앞에서 츠카바라(塚原) 교차로를 지나려면 츠카바라교(塚原橋/鴨部川)를 먼저
건너야 한다.
4거리인 듯 보이지만 실은 6거리인 츠카바라 신호등교차로에서 아침에 오렌지타운 어느
지점에서 헤어졌던 3번현도와 재결합하는 듯 한 헨로.
그러나 헨로미치는 따로 있다.
나가오지에서 1.8km지점인 이 교차로의 신츠카바라 다리(新塚原橋) 남단에서 3번현도와
카베강(鴨部川) 사이로 난 길이다.
아득하게 멀리 느껴지는 남쪽 도사만(土佐灣/黑潮町)의 오셋타이(20회글 참조)를 불러온
붉은 글씨의 'たこ燒'(타코야키) 간판이 유난히 돋보이는 음식점의 왼쪽으로 난 길.
받은 호의는 양의 대소 다과에 관계 없이 이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양이 아닌, 질의 문제인데 오셋타이는 그 명칭에 양질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좌측의 시가시츠카바라공민관(東塚原)을 지나고, 우측 논가(沓辺)의 까닭 모를 장명등(長
明燈/常夜燈)과 미니 지장당을 스치며 남하를 계속한다.
석가 석상을 모신 석가당, 잔여 옛 헨로미치(旧へんろ道)를 안내하는(板) 나키리부동명왕
(波切不動明王)과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한 일심암(一心庵) 등이 우측에 있는 길이다.
남쪽 마에야마댐의 방류로 인한 피해 방지 안내판(左)과 오헨로상휴게소(右)도 지난다.
시코쿠헨로 유종의 미에 재 뿌리는 길 길 길 . . .
곧, 나가오니시 타운은 마에야마(前山)로 바뀌고 헨로미치와 3번현도에 합류되기 직전의
위치에 높이 4m가 넘는 좌대 위에 앉은 지조(地藏) 앞에 당도한다.
이 지점은 원래 구(旧) 나가오니시(長尾西)와 나가오묘(長尾名), 마에야마(前山)의 3촌계
(村界)였으며 수재(水災)가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었단다.
그래서, 분큐원년(文久元年/1861)에 세 쇼야(庄屋/현 村長)가 발기인이 되어 물에 잠기지
않고 수재를 막아줄 타카지조(高地藏)를 건립했다는 것.
같은 부지에 시도(志度), 나가오(長尾)에서 나카츠(中津)까지 마차가 다니던 시절의 말
(馬)을 기리는 말 무덤도 조성했고.
체감하지 못할 만큼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3번현도에서 기백m 미만(300m?/나가오지 3.5
km, 오헨로교류센터 2.1km 이정표)에서 헤어져 왼쪽 카베강과 짝해 남하하는 헨로미치.
곳곳에 마에야마댐 방류에 따른 주의환기판이 있을 뿐 한가로운 농촌길이 된 헨로미치가
나가오지발(發) 4.1km지점(bus-stop 梅ケ畑)에서 둘로 나뉜다.
카베강을 건너 동진하는 길과 3번현도와 다시 합류하는 길로.
마에야마오헨로교류살롱을 경유하려면 후자를 택해야 하며 이 길은 하기모리가 강력하게
권한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또 하나의 헨로미치가 분기한다.
마에야마댐 캠프장을 경유하여 댐 아래로 동진하는 길이며 하기모리가 극구 말린 루트다.
댐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다가오며, 오헨로교류살롱 700m전방표지판이 서있는 3번현도가
나카즈 다리(中津橋)를 건너 마에야마댐 입구(좌측)에 당도한다.
헨로휴게소를 비롯해 안내지도판들과 이정목 등이 혼란스러운 곳이다.
빠른 정비가 요망되는데 유의해야 할 점은 '구헨로미치'(旧へんろ道) 표지판을 달고 있는
루트가 최장거리라는 것.
하기모리를 화나게 하는 루트들은 댐 신설로 인한 길들이지만 모두가 단축을 목적으로 한
길이다.
순례자의 길에 단축 효과가 왜 필요한가.
댐의 건설로 인해 태어난 길들로 유종의 미에 재뿌리는 길이라 할까.
날로 더 타락하고 지리멸렬해 가고 있는 헨로미치가 안타까운 하기모리의 열정이 마지막
절규를 토해내는 구간?
일도양단의 명쾌하고 격정적 성격인 하기모리(萩森)
시코쿠헨로 14일째인 9월 15일 고치켄 아키군 게이세이무라 니시분(高知県安芸郡芸西村
西分) 철길 밑에 자리한 그의 젠콘야도에서 대면했을 때의 첫 인상이었다.
자기 젠콘야도지만 초면인데 내 지도책(헨로미치보존협력회)의 각 페이지를 마구 어지럽
히며 일사천리로 설명해 간 그.
자기의 오소리티(authority)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나 무례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시코쿠헨로의 마지막, 결원을 앞둔 이 구간에서 처럼 전통 헨로미치마저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펴기는 해도 이 분야에 워낙 해박하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낭패한 경우도 있기는 하나 책임 소재가 애매하며 난감할 때마다 지저분해진 지도
책의 효과가 컸음을 생각하면 고마운 사람인데 바야흐로 그의 역할의 끝이 다가왔다.
우측 비탈을 오르는 마에야마소학교 출입구를 지난다.
1872년(明治5)에 개교해서 1973년(昭和48)에 저 아래에 건설된 마에야마 댐에 수몰되는
운명에 봉착해 이 높은 위치로 이전했다는 사누키시 공립소학교다.
그러나, 일본도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인구의 격감과 탈(脫)농촌 현상으로 142년의 역사(20
14년현재)를 접고 나가오소학교와 통합, 폐교될 운명이란다.(2017년에폐교되었다는후문)
소학교 출입구에서 5분 미만의 거리, 나가오지에서 5.2km지점의 현도 좌우 노변에 오쿠보
지로 가는 새 헨로미치(花折山へんろ道) 안내판이 있다.
우측의 산길((花折線 임도)을 따라서 가다가 3번현도에 다시 합류하는 길로 하기모리가 내
지도에 X자를 마구 써놓은(도중에 얼마간 걷게 되어 있는) 중간 루트다.
임도(花折線)를 따르는 길이므로 오헨로교류살롱에 용무가 있다면 잠시 사카우치하면 될
텐데 그(萩森)는 왜 그 길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을까.
공허한 四國八十八ケ所遍路大使任命書
안내판을 응시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코앞의 오헨로교류사롱에 당도한 시각은 15시 정각.
'오모테나시 스테이션','헨로자료전시실', '오헨로교류살롱'등으로 쓰이고 있는 '마에야마
지구활성화센터'(前山地區活性化センター) 건물이다.
의외로 일찍 도착했는데, 헨로미치에서는 가뭄에 난 콩보다 더 귀하던 아루키헨로상 여러
명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헨로 전구간의 완주를 의미하는 '시코쿠팔십팔개소헨로대사임명서'(四國八十八ケ所遍路
大使任命書)를 받으려면 방문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든 여인과 앳된 여인, 두 여성이 입장하는 나를 반겼다.
완주증을 발급하고 전시실을 관리, 안내하며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접대)까지 담당하는
듯 한데 나이 지긋한 여인이 전시실 안내를 자원했다.
늙은이에 대한 한 공대로 보였지만 그녀는 내가 일본인이 아니며 아루키 여행의 달인임을
직감하고 여러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접근한 것이라 실토했다.
일본인헨로상이라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스게가사(菅笠)부터 콩고즈에(金剛杖)까지 10여
가지가 넘는 헨로장구 중 일부라도 반드시 구비하는데 내게는 전무다.
그런(불교와 무관한) 늙은이가 1.200km시코쿠헨로를 걸어왔다면?
더구나 암스텔담 공항에서 만난 대구 영감의 말대로 산전수전, 만고풍상에 찌들은 복장과
장비뿐이라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걷기 도사임을 쉬이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말길이 열리고, 전시실 어느 지점에 유일하게 자리한 의외의 까미노 소품 하나가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은 듯.
화제가 일본의 시코쿠헨로에서 이베리아반도의 까미노로 옮겨갔다.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까미노 각 루트의 완주증서와 대학인순례증서들, 순례자
여권 등을 지니고(일부는 복사본) 갔는데 그것들을 본 순간 이 여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황당하게도 자기네에게, 이 전시실에 전시할 수 있도록 기증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아시아에서는, 수년 전까지는 일본 뻬레그리노스가 한국을 능가했는데 자기 나라 사람도
하지 않는 기증을 외국인, 더구나 자기네 선대의 만행을 겪은 한국늙은이에게 바라다니?
까미노의 완주증서는 순례자여권에 받은 무수한 스탬프들을 꼼꼼히 살핀 후 각 루트 별로
발급하므로 중량감이 있다.
심사하는(?) 동안에도 잠시나마 긴장하게 되고 감개무량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달리, 간단한 인적사항의 자의적 기록만으로 미리 받은 이 증서는'시코쿠88개소헨로
대사임명서'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공허한 느낌이었다.
40일 이상 끈기 있게 걸어야 하는 1.200km의 긴 여정이 이 종이 한장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잖은가.
1.200km의 긴 여정을 40일 이상 쉼 없이 걸어왔기 때문에 지친 표정이 역력하지만 이것은
완주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여러 구간으로 나눠서 며칠씩 걷는 방식으로 완주한 헨로상의 외모는 싱싱하기 때문이다.
까미노처럼 민간인들과의 협조 시스템이 구축되기 전에는 스탬프 북도 용이하지 않고.
완주증(遍路大使任命書) 발급 당국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그렇다 해도, 그녀(오헨로교류살롱의선임자?)는 증서와 함께 '同行二人遍路배지(badge)'
와 '結願の寺 四季' DVD를 챙겨주었다.
내가 걸은 시기(2014년)에는 헨로배지가 바닥났으나 자금난으로 배지제작이 중단되어 이
기간의 헨로상들은 완주(結願)하고도 받지 못했다는데 나는 행운의 늙은이?
불자(佛者)가 아니며, 더구나 결원과 전혀 무관한 이방 늙은이 아닌가.
'けちがん'(結願)은 불교용어로"기간을 정하고 법을 수행할 때, 그 수행의 완료 또는 수행
마지막 날"을 말한다는데 나는 어느 범주에도 해당하지 않건만.
더구나 그녀는 이같은 내게, 내 모자(Quechua hat)의 정면에 이미 달려있는 노란리본 옆
(우)에 이 배지를 손수 달아주었다.
노란리본은 침몰한 세월호의 탑승자들이 모두 무사히 귀환하기를 비는 증표로, 인접국의
여인이 이 리본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무위로 끝난 열망(노란리본)을 버리지 못한채, 절망을 다스리지 못해 비극
의 현장(팽목항)에서 쫓겨나(?) 시코쿠헨로를 걷고 있는 무력한 늙은이다.
늙은이라 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되레 거추장스러운 존재라는 것.
'헨로배지'를 제작하지 못할 정도로 빈한하다는 오헨로교류살롱도 이해되지 않았다.
헨로대사임명서를 발급할 뿐 아니라 에도(江戶)시대의 기행본(紀行本)과 고지도(古地圖),
도보헨로상들이 결원의 목전에서 남긴 납경장(納經帳)과 납찰(納札), 문서 등 귀중한 헨로
자료들의 전시실과 휴게코너를 운영하는 헨로시설인데.
88레이조에는 헨로상들이 바치는 봉납금이 넘치건만 그 레이조와 헨로상의 유대와 교류,
홍보 등를 담당하는 유일한 기관인 오헨로교류살롱은 재정적으로 무기력 상태에 있다니?
우열의 비교는 우매하고 위험한 치기
내가 받은 증서의 번호는 505번.
이런 류의 번호는 발급한 총수를 뜻하는 일련번호가 일반적인데, 2014년(平成26년) 10월
15일자로 나를 앞선 완주자가 이제껏 504명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헨로대사의 임명을 시작한 해가 2004년이라는데, 그렇다면 외국인과 구분하기 때문인가.
내게 궁금증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그 해소가 우선이었다.
내.외국인 구분은 하지 않는데, 일련번호를 연도별로 매기기 때문이란다.
매년 7월 1일부터 익년 6월 30일까지.
그러니까 내 증서번호 505번은 2014년 7월 1일 이후 그 연도에 한해서 505번째 라는 것.
2014년의 임명자가 역대 최다인 3.447명이라는데, 나는 그 해 10월 15일 15시 30분 현재
505명째로 완주자가 된 것이다.
2004년 4월 8일에 임명이 시작된 헨로대사의 수가 2008년 6월 24일에 1만명이 되었으며
2012년 3월 28일에는 2만명이 넘었단다.
나는 26.675번째가 되며 2015년 10월 11일에 3만을 돌파했고 2018년 6월 30일에 37.391
명이며 그중 외국인은 1.775명으로 4.8%에 해당한다고.
일본인들이 까미노처럼 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역대 최대
라는 2014년의 도보 탐방자수를 비교해 보았다.
연간(2014년7월1일~2015년6월30일) 헨로상이 3.447명인데 까미노의 여러 루트 중에서
UNESCO에 등재된 프랑스길의 뻬레그리노스는 161.994명이다(전체의 68.10%)
까미노 프랑스길은 산띠아고를 목표로 하는 전체 메인 루트에서는 7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간 순례자 수 161.994명은 7개루트 전체수 238.300여명(평균치는 34.000여명)
의 3분의 2가 되며 시코쿠헨로 최다 기록이라는 3.447명의 47배나 된다.
시코쿠헨로는 프랑스길의 47분의 1이이며 까미노 평균치의 10%에 불과하다.
비교 수치가 우열의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으나 인지도의 가늠에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코쿠헨로 당국자들은 분발해야 할 것이다.
UNESCO 문화유산의 명단에서 보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그들이니까.
내가 시코쿠헨로의 완주증서를 받은 2014년 10월 15일에서 만 1개월 후인 11월 15일에
국내에서는 '157km서울둘레길'이 개통되었다.
나는 이 길을 개통 2년 2개월의 5일 전인 2017년 1월 10일 어린 두 손자(초둥6년, 중2년)
와 함께 완주했으며 2019년 2월 9일에는 5회째 완주를 했다.
이 날(2019년 2월9일) 받은 완주증 번호 26.544번이 왠지 낯설지 않았는데 그 까닭을 9일
후인 2월 18일에 알게 되었다.
'서울둘레길 이후에는?' 이라는 제하의 글을 쓰다가.
시코쿠헨로를 26.644번째로 완주했는데 서울둘레길의 완즈증번호와 비슷하지 않은가.
완주자가 26.500명대에 이르는데 10년반+7일일이 소요된 길과 4년2개월+25일이 걸린 두
길을 단순 비교한다면 후자가 단연 걷고 싶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인기와 우열은 다르며, 그러므로 이런 비교는 매우 위험하고 치기어린 놀이다.
1.2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숙성된 거목과 아직 떡잎에 불과한 4년 2개월 나무.
난이도 최고의 산길들이 포함된 1.200km와 그 길의 겨우 7.6분의 1인 편편한 157km.
닌이도의 높고 낮음과 장 단거리의 주행 완성도는 놀랍도록 차가 크다.
동일한 난이도라면 단거리가 높고, 동일한 거리라면 난이도가 낮은 곳이 단연 높다는 것.
신도(神道)와의 습합으로 인하여 애매해지기는 했으나 일본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헨로와
한 대도시의 둘레를 돌 뿐인 길의 비교도 불가하다.
무엇보다 캐릭터(Character)가 전혀 다른 두 길의 비교는 성립될 수 없으므로 잠시 고소
짓는 것으로 끝낸다.
교류 살롱녀가 현명했다
취락은 커녕 외딴 민가도 없는 곳인데도 번화가를 방불하게 사람들로 붐볐다.
3번현도 건너편(우측)에 자리한 '미치노에키 나가오'(道の驛ながお) 효과일 테지만 새벽
부터 이 시각까지 9시간여를 한가로운 농가마을만 거쳐 왔기 때문인가.
여느때와 달리 싫지 않은 북적거림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는 시코쿠헨로의 마지막(88번) 레이조, 결원의 사찰(結願の寺) 오쿠보지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저녁거리를 준비하려는 것.
길손들로 붐비는 현상이라 미치노에키 매장들의 영업도 해안에 끝나는 듯 하며 유효기한
이 익일 아침나절까지인 음식류의 반값 행사도 벌써 진행중이었다.
아침 몫까지 사들고, 조금 전에 눈여겨 살펴보았던 살롱 옆 휴게정자로 갔다.
석양이 되면서 얇아지는 햇살에 한낮의 훈풍은 사라지고 을씨년스러워 갔다.
16시에 임박하면서 발길이 끊긴 오헨로교류살롱에 들렀다.
바닥 깔판으로 쓸 종이박스를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30여분 전에는 나의 오늘밤 숙소가 될
정자 이야기를 듣고도 무심했던 살롱녀가 퇴근길을 멈추고 내 일에 참견해(?) 왔다.
이즈음의 심한 일교차를 걱정하며, 시코쿠헨로의 게치간(마지막밤)이 되는 이 밤만이라도
편안한 숙소에 유하시라는 것.
이 일대에는 그럴만한 장소가 없는데도 거의 강권이었다.
오쿠보지 마을(さぬき市多和兼割)의 여관에서 유하고 따스한 아침에 이곳으로 다시 와서
이 구간을 걸으라는 것.
내 문제를 자기 일처럼, 내 동의가 나오기도 전에 숙소(大窪寺宿坊專屬 八十窪)에 예약한
(전화로) 후 그 방향의 차를 세우고(hitch-hike) 나를 부탁한 살롱녀.
오랜 지인 대하듯 편하게 목적지에 내려주고 간 미모의 중년 운전녀(運轉女).
이 살롱지기 세월이 오래라 초행인 헨로상 외에는 모두와 친분관계인 듯한 그녀와 운전녀
에게 홀려(?) 타와카네와리(多和兼割)의 여관(民宿?)에 들게 되었다.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엉겹결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무관한 남의 일에 좀처럼 참견하지 않는 일본 여인인데다 차분하고 온화한 이미지인 살롱
녀에게 이같은 과단성이 있을 줄이야.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으나 그녀가 현명했다.
이즈음의 밤 기온이 연일 하강 일로에 있으며 오늘 석양에도 경미하지만 오한을 느꼈는데
노숙의 약점은 감기의 공략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았다는 뚱보 주인녀의 지시로 2층의 한갓지고 조용한 방에 안내되었다.
급선무는 목욕이었다.
미열로 인한 오한이 잦아들지 않았으며 시코쿠에 오기 직전, 울릉도에서 걷던 마지막 밤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때도, 돌연 내습한 오한에 당황되었으나 단골이 된 식당녀의 호의적인 도움으로 천막을
접고 열탕 목욕과 따뜻한 방(旅館)에 의해 퇴치되었기 망정이지 곤경에 처할 뻔 했는데.
그래서 최우선 과제가 온천욕이었으며 즉시적 효과를 본 듯 했다.
목욕 후 유카타(浴衣)를 입었다.
전에, 일본청년 니시오(西尾)와 함께 들었던 여관에서는 거추장스럽다고 거부했던 까운인
데도 스스로 챙겨 입은 것은 아마도 마지막 기회일 듯 해서 였을까.
하루의 마감(취침)을 위한 일련의 의식(?)을 마친 후 미치노에키나가오(마에야마오헨로交
流살롱앞)에서 구입한 반값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迷故三界城 悟故十方空 本来無東西 何処有南北"
이후, 결원의 사찰 문전에 다름아닌 집 2층방에서 헨로의 마지막 밤을 방콕족으로 보냈다.
세월호 문제가 1200km 헨로를 걷는 동안에 진정되고 정리되어 홀가분한 마음의 귀국길이
되기 바라며 열정적으로 걸었으나 더욱 헝클어진 실타래같은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45일간의 고행이 도로(徒勞)로 끝나는 듯 한데 아니 그러겠는가.
그런데도 조금 전, 석양에 본 2명의 청년이 내 생각을 지배하려는 듯 했다.
시코쿠헨로에서 마지막으로 본 헨로상들이기 때문일까.
마에야마 교류살롱에서 오쿠보지까지, 3번현도 루트의 남은 10km 안팎을 달리는 도중에
차창으로 본 아루키헨로상이 2명인데 공교롭게도 모두 낯익은 젊은이들이다.
69번레이조(觀音寺)의 밤에 내 침낭 속에서 일박한 젊은이와 83번(一宮寺)~84번(屋島寺)
사이의 젠콘야도 슬로 라이프(高松市田村町)에서 함께 일박할 때 호의적이었던 청년이다.
전자는 75번레이조(善通寺)에서 달아나듯 사라졌으며(40번글참조) 표독하고 매정했던 소
학교 담임(黑田)의 닮은꼴이고, 후자는 몸 일부의 장애를 극복하고 결원을 목전에 둔 앳되
지만 강한 의지의 사나이다.
전자를 타기해야 하는 종래의 일본인의 전형이라면 후자는 새로이 탄생해야 할 새 시대의
그들의 모델이라 할까.
시코쿠헨로 첫날 밤에 6번레이조 안라쿠지의 츠야도에서 만난 니시오와 마지막으로 만난
이 청년은 자유롭지 못한 몸인데도 온화하고 협조적인 성품이 매우 닮은 젊은이들이다.
상반된 2종류의 청년들은 같은 일본인이지만 종자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야마토족(大和族)이 주류지만 다민족으로 구성된 일본인이니까.
악독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공룡의 말로처럼 강한 자들은 멸망하고 온약
(溫弱)한 자들이 흥하는 것이 생물의 세계니까.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 여일하다면 이 헨로가 내게 주려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그 안에 포위된 종래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을 새 모델로 대체하라는 것일까.
두형(頭形)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기 때문에 배낭에 달고 다녔을 뿐인, 니시오가 헤어질 때
내게 준 스게가사(菅笠)를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삿갓에 쓰여있는 글을 읽게 되었다.
"迷故三界城 悟故十方空 本来無東西 何処有南北"
(미고삼계성 오고시방공 본래무동서 하처유남북)
에도시대(江戶/1603~1868)에 일본불교의 5대선종(禪宗/臨濟, 曹洞, 達磨, 黃檗, 普化) 중
하나인 임제종의 학승 무자쿠도추 선사(無着道忠禪師/1653~1745)의 말이란다.
미혹하기 때문에 삼계의 성 안에 갇히는 것이며 깨달으면 사방으로 구애됨이 없다.
본래 동서가 없는데 남북이 있겠는가.
미로에서 벗어나면 사방이 탁 트인 자유를 구가하게 되고 동과 서의 방이 없으므로 남과
북 역시 없는 글로벌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순례자에게는 특정 종교도, 특정 국가도, 특정 인종도, 특정 언어와 문화도 미로나 벽, 모
(方)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만, 애오라지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는 내게 '동행이인'은 수용불가의 명제일 뿐
숨통이 트이는 듯 하여 마지막 밤을 편히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