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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의 계절
지중해성 기후인 남가주의 바닷가에서 살다 보니 봄가을이 구별이 잘 안 된다. 꽃은 사시장천 피고 지고, 나뭇잎도 여름에 시름시름 잎을 떨구는 나무, 겨울에 한꺼번에 지는 나무 등 제각각이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이렇듯 제 철을 잘 구별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철모르는 몇 해를 보낸 셈이다. 그러다가 어느덧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하면서 몸으로 조금씩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사계절이 있긴 있구나!
사실 이곳 날씨는 한 해 내내 거의 늘 덥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오뉴월부터 시월 내지 십일월 초쯤, 인디안 섬머를 맞기까지가 더 따갑다. 하지만 볕은 따가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것이 비가 한 방울도 안 오니 습기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농사는 잘 되고 과일도 참 달다. 물을 잘 끌어다 쓰는 덕분이겠지만.
하늘은 거의 늘 말끔하게 개어 새파랗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도 있고 폭풍우가 매섭게 휘몰아쳐서 때로 큰물이 지고 산기슭이 흘러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비도 거의 늘 십이월 일월 등 겨울에 오는데 어떤 해는 많이 오고 어떤 해는 적게 오는 것이 과일나무가 해거리를 하듯 한다. 어쨌든 네 철이 아니라 그래도 좀 물기가 있는 두세 달의 젖은 달과 바싹 마른 나머지 달들로 나누는 게 더 맞을 것도 같다. 건기에는 들판이 누렇고 우기, 즉 겨울이 되어야 산등성이가 파릇파릇하니 한국과는 딴판이다.
어쨌든 이러한 들과 산의 풀이며 나무들은 제 생리 주기에 맞춰 싹이 트거나 시들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나면 다시 새 움이 튼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순환이요 재생산으로 땅껍질을 덮어 보호한다. 빈 틈 없이 나 있는 대지의 솜털이요 머리카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몸도 이 대지와 마찬가지다. 우리 머리에 제법 길고도 빽빽한 머리털이 나 있는 것은 저 높이 시에라 네바다의 산마루에 시커멓게 우거진 솔숲과 같다. 그리고 몸의 몇 군데, 얼마 안 되는 수펑으로 모여서 남아 있는 것은 마치 산기슭 목장 한 구석에 남겨진 너도밤나무의 그늘과 같다. 그리고 나머지 잔털에 뒤덮인 우리 온 몸은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대지의 초원이다.
그런데 이 몸도 자연의 한 부분이기에 몸의 수풀에도 자연의 수풀처럼 가을이 찾아온다. 해마다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한 번 서서히, 태어난 지 대략 쉰 해쯤이 지나면 어느덧 찾아들기 시작한다. 평생 단 한 번의 가을이다. 푸른 잎이 단풍이 지듯 검은 숱의 머리칼이 회색으로, 흰색으로 빛이 바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가닥, 한 가닥 떨어져 대지에 묻혀 버리고는 다시 그만큼 돋아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떨어져 잃어버리는 잎사귀들만치 새잎이 바로 돋아나지 않으면 머리숱은 차차 성글어져 솜털만 남아 있는 맨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느덧 낙엽의 계절이 시작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숲의 주인도 손님도 마지못해 이러한 계절의 변화를 인정하고야 만다. 이제껏 문간을 분주히 들어서던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음을. 어쩌다 잊고서는 이전처럼 문지방을 넘던 손님이 정중히 예의를 차린답시고 모자를 벗는 둥 하지마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바쁜 마음에 신발을 도로 꿰려 허둥댄다는 것을.
그래서 초조해진 숲의 주인은 바삐 작별을 고하려는 손님 하나, 훨훨 떠나가려는 새 한 마리, 말라 버리려는 시냇물 한 줄기라도 더 붙잡아 두려고 애써 숲을 보살피고 가다듬는다. 비료를 주고 모종을 한 포기씩 정성스레 옮겨심기도 하며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며 애를 태우건만 전체적으로 서서히 지력이 쇠해 가는 수풀을 되살리기에는 이미 늦어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이 세상에 만약 발명이 되어 특허를 얻는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법한 특효약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정말로 탈모 방지 효과가 백 프로 확실하다거나 젊었을 때처럼 머리털을 다시 나게 할 수 있는 약이 나온다면 그 성가가 마이크로소프트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웬만한 인터넷 사업 이상일 것이다. 가발 회사들이나 일부 성형외과 의사들이 망하는 것 외에는 전 인류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는 선물이 될 게 틀림없으니 누가 한 번 필생의 사업으로 도전해 보기 바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말이 나온 김에 우리가 이토록 애지중지하면서도 다른 한 편 시답잖게 여기기도 해 온 털 이야기를 좀 해 보자. 털이란 실로 소중한 것이지만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아예 우리 몸에 머리칼이든 털이란 게 없었으면 이런 고민까지 할 필요도 없지 않았겠나! 아니면 짐승들처럼 죽을 때까지 온 몸이 빽빽한 털로 내내 덮여 있든가. 그러고 보니 대머리가 된 개나 소, 이마가 벗어진 원숭이가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목 들어 봤다. 하필 우리만 왜 이 모양으로 털이 나 있고 털이 벗어지고 그나마 속절없이 빠져서 잃어 가는 것일까?
사람은 본래 영장류에 속하는 짐승이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일부 광신자들 빼고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영장류란 말은 하급 원숭이와 유인원을 함께 일컫는다. 여기서 유인원이란 원숭이 중에서도 사람과 더 닮은 것들, 즉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침판지와 고릴라,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오랑우탄과 긴팔원숭이를 일컫는다. 즉 더 진화 된 원숭이다. 신대륙에는 유인원은 하나도 없고 아마존 밀림 같은 곳에 진화가 덜 된 하급 원숭이들이 있다. 이것들까지 포함하여 현재 세계에는 192종의 영장류가 멸종을 면하고 살아남아 있다. 사람도 그 중 하난데 나머지 191종의 영장류 가운데 상당수가 무엇보다도 지금 사람 때문에 멸종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꼴이다.
이 191종의 영장류를 한 줄로 세워 놓고 겉모양으로 봐서 비슷한 놈들 사이에 사람을 끼워 넣으려면 참 자리 찾기가 곤란해서 결국 저 끝에 세워야 하는데 그만큼 사람의 모양이 참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 독특함이란 첫째 이놈의 평상시 자세인데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서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머리통을 비롯하여 신체의 몇 군데만 남겨 놓고는 온몸에 털이 없는 천둥벌거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학자인 모리스는 사람을 가리켜 ‘털 없는 원숭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사람은 왜 이렇게 털을 잃었을까? 몇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들판에 서서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점점 육식에 더 의존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자나 표범 같이 몸 자체를 사냥에 알맞게 생존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쓰고 연장을 쓰며 의사소통을 하고 조직을 해서 끈질기게 사냥감을 좇아 더운 곳을 뛰어다니고 헤매야 했으므로 무엇보다도 몸의 열을 식히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래서 털가죽을 벗어버리고 땀샘을 발달시켜 열을 식혀 주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대신 추울 때는 불리하였으므로 피하지방을 발달 시켜 이를 보완하였으며 불을 사용하고 옷을 입는 등 문명을 발달시킴으로써 그 어느 짐승보다 갖가지 기후에 적응하여 전지구상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
다른 이론도 있다. 나무에서 내려온 조상들이 처음에는 물가를 따라 살며 물에서 먹이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헤엄을 치고 자맥질을 함으로서 털을 잃었다는 것이고 털을 거의 잃은 후에 물을 버리고 다시 뭍에서 사냥을 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뭍에 살던 물개나 고래의 조상이 물에 들어가서 살면서 털을 잃은 것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사람이 직립하게 된 것도 물을 자주 건너다 보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빳빳이 들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사람의 등짝에 고루 나 있는 잔털은 헤엄치는 방향에 그슬리지 않게 머리 쪽에서 엉덩이 쪽으로 가지런히 나 있으며 이는 원숭이들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 이들이 내세우는 증거의 하나다.
어쨌든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두꺼운 털가죽을 벗었는데 그렇다면 머리에는 왜 긴 털을 남겨 둔 것일까? 긴 털이라는 것은 물론 황인종이나 백인종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흑인종들은 대개 머리털이 돌돌 말려 있어서 좀 다르다. 머리털 모양만 봐서는 한국 절의 부처님들은 흑인종과 같다.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의 털도 인종에 따라 모양이나 색깔, 밀도 등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 그래도 백인이 털이 가장 많고 황인이 가장 확실히 벗어 던져 버렸다.
동북아시아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에 몇 사람 남아 있는 아이누 족들이 백인들 중 털 많은 사람들 정도의 털북숭이다. 얼굴 생김새도 호주의 원주민이나 인도에 남아 있는 베다 족을 연상 시키는 등 주위의 황인종들과는 달라서 인류사의 수수께끼다. 일본 사람들이 비교적 털이 많은 것은 잔인하게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이들과 피가 섞였기 때문인 것 같다. 흑룡강 하구에는 얼굴이 우리와 비슷한 길약 족들이 있는데 이들도 몸에 털이 많은 편이다. 이 길약 족들은 언어학상이나 신체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과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민족이나 인종을 거론하는 것이 인종주의에 따른 인종간 민족간 혈통의 우열을 논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물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본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고찰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머리털의 효용 중 첫째는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컴퓨터가 들어 있는 머리통을 직사광선이나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차단재로서의 임무다. 그리고 물리적인 충격도 조금 완화해 주는 쿠션 구실이다. 두 번째로는 성적인 표시를 하고 신호를 보냄으로서 짝을 찾아 자손을 남기기 위함이다. 데이트를 하는 남녀나 신랑신부가 왜 그렇게 없는 시간과 돈을 쪼개 가며 미장원이나 이발소에서 공들여 머리를 매만지나를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만약 머리칼이 없다면 다른 여러 수단에 더 의존해야 한다. 흑인종의 돌돌 말린 머리칼이라든지 백인들의 곱슬거리는 금발, 황인의 검고 빛나는 직모 등도 그리 개발 되고 퍼져 나가게 된 것이 더 큰 환경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성적인 이유도 크다. 그 구성원들 이성 상호간에 무슨 이유에선지 제 눈에 안경이라고 처음에 우연히 나타난 그런 이색적인 빛깔과 모양의 머리칼에 더 매력을 느껴 애써 짝을 맺게 된 결과 그러한 형질의 머리칼을 가진 자손이 점점 더 많이 살아남고 짝을 짓기에 유리해짐으로써 그 집단 전체의 머리칼은 차차 유전적으로 그렇게 변모하고 고정 되어 왔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북방 아시아의 황인종은 왜 털이 뻣뻣하고 성근 직모이며 얼굴이나 몸에 털이 적느냐 하는 것은 환경적 요인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이들은 추운 시베리아에서 개발 되었는데 몰아치는 눈보라가 얼굴이나 머리에 눌어붙지 않으려면 성기고 뻣뻣한 직모가 유리하다. 돌돌 말려 있거나 빽빽하고 가는 곱슬머리나 수염이라면 한 번 얼어붙은 눈을 훑어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황인종은 이렇게 털을 좀 잃는 대신 머리통이나 몸이 통통해지고 팔다리가 짧아졌으며 피하지방을 잘 발달시켜 추위를 견뎌냈다. 털 색깔이 검은 것은 본래 유인원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털은 검은 것이었는데 햇빛이 옅은 북유럽의 발틱해 연안으로 진출한 백인의 조상들이 예외적으로 멜라닌 색소를 잃어 밝은 살갗과 금발, 푸른 눈을 갖게 되었다.
이리 보면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도 있을 수 없음이 틀림없다. 털구멍 하나, 솜털 한 가닥에도 미치는 예외 없는 진리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이런 것이 좋고 저런 것이 나쁘다는 것도 없다. 추울 땐 이런 게 좋지만 더울 땐 저런 게 좋다. 그리고 어떤 요인이 사라지면 꼭 필요했던 것도 필요가 없어지고 새로운 요인이 생겨나면 없던 것도 어쨌든 새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진리이다. 살아남으려면 환경이 바뀜에 따라 내 몸도 바뀌는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고정 되어 변하지 않는 것도 없고 고정 되어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낙엽 얘기를 하다가 옆길로 빠졌는데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몸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알다시피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신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 된 것은 찾기가 어렵다. 부처님의 생김새나 민족, 인종 같은 사항들은 간접적인 추정만 할 수 있다. 후세에 만들어진 불상들은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 태어나 살아 계셨던 부처님의 생물학적인 실제 모습과는 별 관련이 없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상징이요 부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불상에 관해서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존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모습인 32상과 부차적인 특징을 서술한 80종호라는 것이 반영 되곤 하였는데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을 한 번 뽑아 보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옛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털의 모습이다.
먼저 32상에서, 12번째. 부처님은 모든 털이 위로 뻗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13번, 푸른 털이 한 털구멍에 한 가닥 씩 나 있다. 30번째, 부처님의 속눈썹은 소처럼 길고 아름답다.(생각해 보니 소의 속눈썹이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웠던 것 같다) 31번째, 부처님의 머리에는 상투 같이 튀어나온 혹(육계)이 있다. 32번 째,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나서 오른쪽으로 돌돌 말려 있다.(백호광명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80 종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묘사 돼 있다.
38번, 속눈썹이 가지런하여 소의 것과 같다. 39~41, 두 눈썹은 검고 빛나고 부드럽다. 아름답고 가지런하여 검붉은 유리 빛이 난다. 눈썹이 높고 명랑하여 반달과 같다. 47~51, 머리카락이 길고 검고 빽빽하다. 깨끗하고 부드럽고 윤택하다. 고르고 가지런하다. 단단하여 부서져 떨어지지 않는다. 빛나고 매끄럽고 때가 끼지 않는다. 61. 털구멍에서 좋은 향기가 풍긴다. 64. 몸의 솜털이 부드럽고 검푸른 빛으로 광택이 있다. 66. 정수리가 높고 묘하여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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