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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에 취했다(신비스럽고 황홀한 도루 강의 낙조에)
로저 교수와의 재회는 감격적이었다.
2011년 5월 8일의 첫 만남 이후 4년 1개월 7일만의 상봉인데 아니 그러겠는가.
이 4년은, 내게는 태어난지 77년만이며 그에게는 63년만의 첫 만남에 비하면 19분의 1과 15분
의 1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기 때문인지 오래지 않은 세월이라는 느낌인데도.
공간이 의미 없는 시대라 하나 물리적으로 엄청 축소된 것은 맞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즉시적인 화상 대화가 가능하다 해서 초고속 비행기가 10시간 이상 날아야 하는 공간마저 어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 때(2011년5월8일), 바르셀리뉴스 알베르게에서 단순한 목례로 시작하여 다음날에도 그랬다.
제3일(5월10일)에 비로소 국경마을인 발렌사(Valença)에서 무르익어간 대화가 다음날 레돈델라
(Redondela) 알베르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비씨끌레따(bicicleta/자전거)와 내 삐에스(pies/발)의 속도가 다른데다 나의 대학교
방문(뽄떼베드라 대학) 일정 때문에 까미노 상의 만남은 레돈델라에서 끝났다.
다다음날(5월 13일),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직전 알베르게 마을인 빠드론(Padrón)에서 핀란드
여인(peregrina) 편으로 우정을 전달받고 확인했을 뿐 귀국 후 e-메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아쉬움만 커갔는데, 아쉬움이 뭉쳐진 정으로 한 포옹이라 더욱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회포를 푸는 시간을 미뤄야 했다.
로저가 몰고 온 자기 차를 루이스 1세다리의 가이아 쪽 주차장에 두고 걸어서 다리를 건너 왔기
때문에 20시가 임박하는 때라 숙소를 정하는 것이 우선의 일이었으니까.
뽄떼베드라에서 이사벨라와의 재회를 알베르게에 입실한 후 가진 것 처럼, 로저와의 회포 푸는
시간도 알베르게 입실 수속을 마친 후로 잡으려는 것.
비록 역 코스라 해도 나는 끄레덴씨알(Credencial/순례자여권)을 가진 뻬레그리노다.
알베르게를 당당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슴을 의미하는데 뽀르뚜에는 알베르게가 없다(2011년에
그랬는데 그 새에 신설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니까)
가이아의 다운타운을 한참(10km이상) 지난 소교구마을 그리주(Grijó e Sermonde)에 있다.
어차피 가는 빌라 노바 지 가이아의 까미노 상이므로 그 곳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São Salvador de Grijó)까지 태워줄 것을 기대하고 바르를 나왔다.
바야흐로 낙조의 시간대.
아무리 급하다 해도, 또한 뻬레그리노스에게는 분명한 외도(外道)가 되기도 하지만 루이스 1세
다리의 상층 걷기를 로저에게 제의했다.
아마, 전번(2011년 뽀르뚜길때)에 감격적이었던 기억이 석양을 받고 있는 도루 강(河口)의 정취
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그랬을 텐데 80대 늙은이의 바람을 60대가 묵살할 리 있는가.
시드니(Sydney/Australia), 히우지자네이루(Rio de Janeiro/Brasil), 나뽈리(Napoli/Italia) 등의 항
(港)을 세계 3대 미항(美港)이라 한다지만 나는 나뽈리를 뽀르뚜로 단호히 교체헸을 정도니까.
2011년의 일인데, 나뽈리와 뽀르뚜를 다 살펴 본 내 눈의 판단을 믿으니까.
85m 높이에서 내려다 보는, 저녁노을을 받아 아름답기 그지없는 도루강의 정경을 수평선 상의
그것으로 대조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가.
어떻게 표현해도 불만일 수 밖에 없도록, 참으로 신비스럽고 황홀했는데.
해(年)가 더해 갈 수룩 그 정경에 대한 아쉬움이 커가고, 그럴 수록 그 정경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USB의 도둑이 더욱 야속해진다.
(내게는 천금보다 더 귀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려졌을 테니까.)
이런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인가.
로저 교수의 놀라운 고백(?)은 1c+30년 된 이 다리의 상층 걷기가 최초라는 것.
그에게는 67년만의 일이지만, 하마터면, 꼬레아누 앙씨앙(Coreano ancião/한국 늙은이)이 없었
으면 이 아름다운 정경을 보지 못하고 죽을 뻔 했다는 그의 너스레가 천진스러웠다 할까.
하긴, 등잔 밑이 어둡다잖은가.
서울의 내가 38번이나 오른 백록담(한라산)을 올라보지 못하고 죽는 제주도민이 부지기수라니.
나도 1962년에 개통한 서울 남산의 케이블 카(cable car)를 아직껏 타보지 못했으며, 아마도 이
상태로 이승을 뜨게 되지 않을까.
(Capri섬의 곤돌라, Vancouver스키장의 리프트를 비롯해 외국에서는 더러 타본 케이블 카지만)
평생 처음 묵는 외국인의 집, 벤치 마킹하고 싶은 로저의 집
지도에 따르면 루이스 1세교에서 그리주의 알베르게까지는 남쪽으로 20km남짓 된다.
내 계획을 상세히 들었는데도 로저의 차가 도중에 그 길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다그치는(?) 내게 비로소 자기의 뜻을 말하는 그.
자기의 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
결국, 내 예정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가까스로 꽃 한묶음(5€) 외에는 어떤 타협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바란 적이 없지만 80 평생에, 까미노 벗일 망정 외국인의 집에서 묵는 최초의 날이 된 것이다.
로저의 집은 지자체 빌라 노바 지 가이아의 소교구마을 뻬드로수(.Pedroso e Seixezelo)의 쁘라
쎄따 다 이스띠바다(Praceta da Estivada) 202호.
경사 지형에 지었기 때문에 출입구쪽(뒤쪽/北東)에서는 지상 1.5층이지만 앞면(南西)은 너른 앞
마당이 있으며 채광이 동일한 3층, 4가구의 연립형 주택이다.
상층은 침실 전용, 기층(지상 지하 각0.5층)은 침실, 거실, 주방과 식당, 다용도실 등이고 지하는
운동시설 겸 창고 등. 벤치마킹(bench marking)하고 싶을 정도로 쓸모 있는 구조다.
우리네의 집 구조에는 천편일률적이며 외화내빈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호 또는 선호도의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주택 설계자들의 각성이 더 절실한 지적이다.
집터는 평평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덜 비싼 땅에 더 멋있으면서도 보다 더 유용한(外
華內實) 구조의 집이 태어날 수 있음을 로저의 집이 다시 환기시켜 주었다.
뒤쪽(출입문)은 막다른 차로(Praceta da Estivada) 변인데, 건너편이 소공원(Jardim da Rua das
Frores)이고, 앞면에서는 대서양의 아득한 수평선이 시야와 멀지 않은 위치에서 펼쳐지고 있다.
가이아를 통과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도 눈 아래 가까이에 있다.
까미노 자체는 막연하게 보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뻬레그리노스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지근에 있으며 이 집을 나서면 나도 걸어가게 될 길이다.
맘에 쏙 드는 이 집의 시세(時勢)가 궁금함을 넌지시 나타냈다.
I don't know but about 150.000euro?(잘 모르지만 대략 2억원?)
내 집에 견주면 5분의 1 이하의 값이다.(더 넓은 대지에 더 쓸모 있는 구조인데도)
스페인에서는 영구 체류해도 된다는데 뽀르뚜갈은?
여생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보내면 어떨까
얼핏 스쳐간, 찰나적 생각이었다.
로저는 이 집에서 차남과 둘이 살고 있다.
여자는 출입구에서 시선이 가장 잘 가는 위치에 걸린 액자 속의 중후한 중년녀가 전부다.
로저의 이스뽀자(esposa/아내)가 분명하며, 소중하게 대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사별(死別)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의 가정사는 스스로 말하기 전에는 화제에 올리는 것을 피했다.
(훗날, 사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어두워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나는 장남의 방이었다는(지금은 분가중) 상층의 한 방에 짐을 풀고
그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조금 전, 귀가 도중의 슈퍼에서 구입한 티본스테이크(T-bone steak)에 와인을 곁들여 먹었는데
까미노에서 먹기가 매우 어려운 디너였다.(高價라 뻬레그리노스 메뉴에서 볼 수가 없으니까)
뽀르뚜게스 내륙길의 국경지대인 발렌사(2011년)에서 로저와의 말길을 열어준 것이 와인이다.
그가 내게 대접한다며 따라줄 때 한 말, '오 멜류르 비뉴'(O melhor vinho/ 뽀르뚜 최고급 와인)
를 반추하며 여기까지 발전한 우리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헤어지기 전에 로저는 자기의 내일(6월 18일)의 일정을 말했다.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온종일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짜여 있는 그의 하루다.
시간을 한가로이 낭비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되는 늙은 뻬레그리노의 의중을 타진하는 절차
도 없이 하루 더 묵는(stay) 것을 기정사실화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는 "사람이 계획을 세우나 이루시는 이는 야훼"(잠언16장)라고 말한다.
내 모든 계획(日程)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諸葛亮의 修人事待天命에서유래)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6천여km나 되는 긴 여정의 까미노에서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음에도 늘 보다 나은 결과로
매듭지어지고 있는데 실망하거나 불만이 있겠는가.
그래서 내 오카리나는 이 밤에도 단골 메뉴인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불렀다.
독단적이기는 해도 로저가 말한 일정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뽀르뚜갈 제2의 도시 뽀르뚜와 뽀르뚜 현 뿐 아니라, 뽀르뚜갈의 노르떼 지방 전제에서 제1(人
口)의 지자체인 가이아의 강한 인력(引力)이 관광객이 아닌 내게는 의미 없지만.
와인 마니아(mania)가 아닌 나에게는 뽀르뚜갈 명 포도주(O melhor vinho)의 메카(mecca)라는
로저의 자부심도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고.
다만, 발바닥과 뒤꿈치, 발가락 등 발 전체의 사정이 매우 나쁜데다 단지 한밤을 자고 가는 것
만으로는 아쉬움이 크게 자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손익(利害)이 혼재하지만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로 매듭짓게 하는
분(신약성서 로마8:28)이 백(Patron)임을 전방위적으로, 특히 까미노에서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이아에서 로저와 갖는 하루가 내 전(全) 까미노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구나 당초의 예상보다 빨리 당도한 하루를 사용하는 것이니까.
6개월(180일) 예정의 이베리아 반도 생활에서 겨우 4분의 1이 넘었을 뿐인 46일째 날 알베르게
또는 노영 아닌 안락한 집에서 보낸 밤이 갔다.
공교롭게도 뽄떼베데라 이후 뽀르뚜게스 해안로에서는 알베르게의 너른 방들을 줄곧 독점하며
왔으므로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 잠 못이루기가 마찬가지인 밤이었다.
뽀르뚜의 까떼드랄, 끌레리구스 교회와 종탑
늦잠 들기 알맞은 여건인데도 뽀르뚜게스에 들어선 이래 여느 때보다 일찍 기상했다.
특성대로 로저의 집을 기준으로 주변 살피기에 나서려고.
그러나 생소한 출입문에 제동이 걸렸다.
첨단 도어록(door-lock)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 집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반세기가 나로 하여금 이같은 첨단 장치에 무심하게 한 것이다.
베란다(前面)로 나가서 로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때까지 대서양을 관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포착되는 뻬레그리노스에 내 마음도 덩달아 따라가려 하고 있잖은가.
그리주의 알베르게를 나와서 뽀르뚜를 향해 걷고 있는 부지런한 뻬레그리노스로 보였으며, 내
의도(간밤에 내가 묵으려 한) 대로 되었다면 만났을 사람들일 텐데.
바게트와 우유, 커피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내 갈 길을 확인하는(blue arrow) 것으로 역사적인
(?)빌라 노바 지 가이아 체류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루이스 1세교를 건너 뽀르뚜로 간 로저의 차가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까떼드랄 입구.
관광객들로 북적대기 여전하며 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던 말 탄 비마라 뻬레스 상(Equestrian
statue of Vimara Peres)도 그대로인 까떼드랄 앞 경사진 광장.
9c에 오스트리아 왕국의 귀족 출신으로 첫 뽀르뚜갈 꼰다두(Condado/Braga, Porto등북부연안
지역)를 통치했으나 갈리씨아(Spain)에서 사망했다는 그가 왜 뽀르뚜의 까떼드랄 앞에 있는지.
히꽁키스따(Reconquista/기독교회복을 위한 750여년전쟁)에서 공이 많았다는 것이 이유?
(Galicia 왕국의 Coruña에 묻혔다는 그의 무덤에 대해서는 Camino Inglés 걸을 때 까지 참자)
1110년에 착공하여 1737년에 완공되었다는 까떼드랄.(성모승천교회/Igreja de Nossa Senhora
da Assunção)
시작할 때의 양식은 로마네스크(Romanesque)였으나 7c(627년)라는 긴 공기(工期) 중에 출현한
건축양식(12c 중엽의 Gothic, 16c 말~18c의 Baroque)이 모두 도입된 특이한 건축물이란다.
12c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착공, 14c에는 고딕 양식, 18c에 바로크 양식이 결합하여 완성됨으
로서 도시(Porto)의 역사에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기념비적 교회란다.
로저는 나를 뽀르뚜의 명소들로 안내하려는 듯 했다
다음 행선지를 물은 내게 시야에 들어오는 끌레리구스 교회와 높은 종탑(Igreja dos Clérigos e
Torre dos Clérigos)이라는 응답이 왔으니까.
뽀르뚜갈 최초의 바로크(baroque) 양식 교회 중 하나라는 교회와 높이 75.6m의 종탑이다
까떼드랄의 바로크 양식 부분을 맡아 마무리한 나소니(Niccolò Nasoni/1691~1773/이딸리아인
건축가)의 설계로 태어난 교회(工期1732~1750)와 종탑(工期1754~1763)이란다.
다만, 이 종탑의 당초 설계는 쌍둥이었다 하나 보이는 것은 왜 싱글(single)일까. (설계자가 교회
지하에 묻혀 있다지만 이름 없는 무덤들 중 하나라니 당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겠다)
어쨌거나, 끌레리구스 타워는 한동안 뽀르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도시의 모든 위치에서
볼 수 있으며, 그 까닭으로 도루(Rio Douro)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 길잡이가 되었단다.
또한, 6개층 240(226?)계단을 오르기 힘겹기는 해도 뽀르뚜와 그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
의 조망대였고 이 도시의 가장 특징적 싱징 중 하나로 꼽히는 탑(Torre dos Clérigos)이란다.
뽀르뚜 시의 기념비적 랜드마크(landmark)를 선정해야 한다면, 우선 순위에서 끌레리구스 교회
와 탑을 대적할 아무 것도 없다니까.
뽀르뚜갈에서 가장 주목되는 이 바로크 양식 교회와 종탑은 1910년에 국립기념물(Monumento
Nacional)로 지정되었고 신축 250여년만에(2015년) 마침내 일반인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단다.
(내가 스탬프를 받으려고 방문한 때는 2011년이었기 때문에 개방 전인데도 스탬프를 찍어주던
나이든 오스삐딸레로가 늙은이에게 규정에 없는 호의를 베풀려 했는가.
까떼드랄에 가서 끄레덴씨알을 받아올 것을 요구함으로서 두번 걸음을 시켰기 때문이었는가.
입장하라는 제스처를 보였으나 뽀르뚜대학 방문 시간이 촉박하여 포기했는데)
유료인데도(5€/교회 입장은 무료) 2016년 한해에 625.000명이 방문했다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712명 이상 입장함으로서 연간 3백만 유로 이상 수입하는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전번(2011년) 5월 어느날, 17시 직전의 시각에 까떼드랄과 끌레리구스교회, 뽀르뚜대학교 간을
다급하게(日課 종료시간이 임박하기 때문에) 오가던 때에 비하면 호강 중에 있는 나.
그럼에도 나는 로저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관광 성격의 일정은 접자고.
누차 언급한 대로 뻬레그리노 신분에 그것(관광)은 부당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며
소중한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전일에도 낙조에 도취되었음을 벌써 잊었는가)
이에 더해 1981년 이후, 6월 18일에는 앞의 이유로는 감히 겨룰 수 없는, 아주 큰 까닭이 있다.
내 아버지를 추도하는 날이기 때문인데 오늘(2015년 6월 18일)이 바로 34번째 그 날이다.
본국의 내 집에서는 공기까지도 엄숙한 추모 분위기일 텐데 이역 만리에 있는 것도 불경(不敬)
이거늘 막간의 활용이라 하나 관광이 가당한 일인가.
로저는 고맙게도 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까떼드랄의 10시 방향으로 멀지 않은 위치의 빨라씨우 지 끄리스딸 정원(Jardins do Palácio de
Cristal)이 마지막 방문지가 되었으니까.
19c(1860년대)에 독일 조경사(Emile David)가 설계했다는 조경 정원이다.
분수와 산책로가 있고 도루강을 따라 하구와 대서양까지, 원근이 조망되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
뽀르뚜갈어의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
로저가 나를 위해 만든 일정이 엉망되어서 미안하기는 했으나 한결 여유로워진 이점도 있었다.
귀로를 대서양 해변의 피자집(Ristorante Pizzeria S. Martino Francelos)을 거치도록 잡은 것.
로저의 집에서 바라보였던 해변쯤으로 어림되며 같은 간판이 자주 띄는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
피자집 산 마르티노의 프랜차이즈(franchise)인 듯 한데 내 까미노 최초의 피자 식사(점심)였다.
전일의 뽀르뚜 해변과 달리 한가로워서 여유롭게 이야기 나누며 식사하기 안성맞춤인 곳에서.
2011년, 로저와 말길이 열렸을 때 서로의 관심은 종교와 직업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인들(Spain과 Portugal)은 750여년에 걸쳐서 이슬람(Islam)으로부터 기독교 탈환
을 위한 전쟁(Reconquista)을 벌였을 만큼 강성 기독교도들(가톨릭교회)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가톨릭교회 역사의 대부분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함에도, 많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와 무관한 보통 사람들 거개가 이탈리아를 가톨릭교회의
본거지로 알고 있다.
까닭은 교황청이 로마(Italia의수도)에 있기 때문의 선입견일 것이다.
그런데, 당연시 되던 로저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나는 기독교인 임은 맞지만 개신교에 속한다.
나는 정규 직업이 있을 리 없는 77살(당시)이지만 그는 아직 현업에 종사할 나이(62세)였다.
대학의 행정을 도맡은 때가 과거사로 정리된 나와 달리 현재진행형 프로페서(Professor)인 그.
그러나, 구체적으로 접근할 기회 없이 헤어져 4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그도 정년 퇴직했단다.
우리는, 순례 방식(徒步와 자전거)이 달랐다 해도 4년 후에 재회를 가질 만큼의 까미노 친구다.
세분화 하면 업무가 달랐으나 큰 틀에서는 대학이라는 동종 집단에서 일한 직업 동문이다.
그런데도 대학인순례자여권(Credencial Jacobea Universitaria/Jacobean University Credential)
을 지니고 까미노 루트 상의 대학들을 방문하고 있는 나를 괴이쩍게 보고 있는 그.
번거롭고 벅찬 이 일을 병행중인 멀고 먼 극동의 늙은이와 달리 인접국이며 까미노 뽀르뚜게스
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의 그가 이 분야(대학인순례자여권)에 먹통인 것이 되레 괴이쩍은 나.
나는 그에게 내 핸드폰에서 한 사진과 글을 보여 주었다.
나바라댁학교 동문회가 나를 위해 준비한 환영 다과회와 헤수스 땅꼬 레르가 교수(Ph. D. Jesus
Tanco Lerga)의 소개 글이다.
Kim Santiago, de 81 años, ha vuelto a visitar la Universidad de Navarra por segunda vez pa-
ra realizar de nuevo la ruta jacobea: la anterior fue en 2011.
Va a recorrer el Camino del Norte empezando desde Irún; luego surcará la Vía de la Plata
empezando en Sevilla; y, posteriormente, el tramo que le faltó la vez anterior del Camino
Portugués de Lisboa a Oporto.
Para ello va a estar 6 meses en España.
Sobran las palabras.
(81세인 김 산띠아고는 사도 야고보의 길(Camino de Santiago)을 다시 걷기 위해서 2011년에
이어 두번째로 나바라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룬에서 시작하는 까미노 델 노르떼(Camino del Norte/북쪽길)를 걷고, 이어서 세비야
에서 출발하는 비아 데 라 쁠라따(銀의 길)를 걸을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는 전번에 뽀르뚜 길에서 빠뜨린 부분, 리스본에서 뽀르뚜까지.
이를 위해서 그는 6개월 동안 스페인에 있을 것입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Camino Portugues는 전 구간을 다시 걸었고, Primitivo길, Inglés길까지, 산띠아고 데 꼼뽀스
뗄라를 종점으로 하는 모든 루트를 마쳤다.
Frances길, Fisterra-Muxia길, Portugues길 등과 산띠아고가 포함되지 않은 Aragones, Madrid
길 등은 전번에 걸었고.)
사진을 보고 글을 읽은 로저의 표정 역시 레르가 교수의 마지막 말(Sobran las palabras/ words
are unnecessary).처럼이었다.
과연,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는 실증인가.
기독교도가 아닌데다 퇴직했기 때문에 대학의 패컬티(faculty)에 어두운 것인가.
은퇴 기간이 겨우 3년이며, 그가 퇴직하기 10년 전에 만들어진 대학 관련자들의 까미노 기구에
깜깜인 것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이 곧 풀렸다.
나의 무지가 탄로됨으로서.
4년 전에 그의 직업이 '프로페서'(professor)라고 말했을 때, 의심의 여지 없이 대학교수로 이해
한 것이 나의 오류였다.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임은 틀림 없으나 대학이 아닌 초중고등학교 레벨의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의 교사(professor)였다.
대학교수인 영어 단어 'professor'가 뽀르뚜갈어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의 총칭임을 몰랐으니.
뽀르뚜갈어의 대학교수는 '까떼드라치꾸'(catedrático) 또는 '쁘로페쏘르 지 파꿀다지'(professor
de faculdade)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그의 이름 Roger'도 영어 발음으로 로저라 부르고 있으나 뽀르뚜게스 발음으로는 '호제르'가 됨
에도 습관처럼 굳어진 것을 양해하기로 하고 식당을 나왔다.
로저의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후 앞마당의 탐스런 레몬을 따서 디아레아
(diarrea/泄瀉) 약을 조제했다.
가공스럽게 괴롭히는 디아레아로 인해 노르떼길 빌바오(Bilbao)의 알베르게에서 오스삐딸레로
(hospitalero)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2일간 안정을 취한 적이 있다.
그 때, 신기할 만큼 효과를 본 의사(centro de salud/보건소)의 처방전을 소중히 지니고 있으며
징후가 나타날 때마다 조제하여 이겨내고 있는데 이 때도 그랬다.
지층의 탁구대 양단에 마주 서기도 했다.
학창시절에 선수로 명성을 날렸던 C가 요절한 후 멀리 했던 라켓(racket)을 이역 만리 뽀르뚜갈
의 까미노에서 다시 잡아보다니.
40여년 세월의 간극에도 그녀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려는 듯 하여 접었다.
내 체질에 맞다며 강한 스매싱(smashing)을 집중 연마하게 했던 그녀.
종종, 공이 깨질 만큼 강력한 내 스매싱에 당황하며 청출어람이라고 나를 치켜올렸었는데.
우리는 인근의 슈퍼마켓에 갔다.
66번째 생일이 다음 주중에 있다(6월 25일)는 로저에게 미리 줄 선물로 유명하다는 가이아(Vila
Nova de Gaia/그의 거주지) 산(産)의 고급 와인 2병을 샀다.
첫 대좌에서는 그가 내게 뽀르뚜 와인을 잔 가득히 선물했는데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절대적인
두번째에는 내가 가이아 와인 2병을 선물하는 것.
내 일상의 지침대로 되로 받고 말로 갚는 것이다.
추억들을 윤택하게 할 해프닝까지.
로저는 디너(dinner/저녁식사)를 외식하는 것이 어떠냐고 타진해 왔다.
요리 취향이 아닌 늙은이에게 더 늙은 손님 대접이 용이한 일인가.
궁여지책으로 한 제안임을 모를 리 없는 나는 조건부 동의로 응답했다.
내가 호스트(host)가 되는 것.
난색을 보이던 그가 내 집요한 주장에 백기를 들었다.
음식점은 소 갈비를 바비큐(barbecue)식으로 구워서 와인과 함께 먹는 집.
로저의 집에서 상거가 5km쯤 되며 프랑스풍의 식당이라는데 내 체험으로는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비 서구적이며 놀랍게도 한국의 옛 시골 분위기가 물씬한 집이라 할까.
단골 아니면 찾아가기 쉽지 않을 위치도, 식당의 외관과 내부 구조도, 즐겨 먹는 손님들과 주인
을 비롯해 서빙하는 사람들의 매너도, 값(1인 16.20€)에 비해 특출한 맛과 푸짐한 양도 모두.
(카메라에 담았을 뿐 기억처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을 쓰다가 그 음식점에 대해 로저에게
물었으나 안타깝게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
까미노 인구가 많은 나라를 차례로 꼽으면 당사국인 스폐인과 인접국 프랑스, 프랑스의 다른쪽
인접국 중 까미노 인구가 제일 많은 독일 등 3국이다.
각기 특징으로 머리가 큰 독일인, 가슴이 넓은 프랑스인이라면 스페인인은 배가 유난히 부르다.
생각 많고 냉철한 독일인, 감성적인 프랑스인과 달리 식탐(식도락?)이 많은 스페인인이라 할까.
인접해 있기는 하나 다르다고 생각한 뽀르뚜갈인의 식탐도 여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식팀(食team)들에게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개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레 식사삼매경에 빠져
들게 하고 무르익은 장마당에 비할 만큼 흥취감 까지 일게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나를 초 긴장 속에 빠뜨릴 사건(?)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빌(bill)을 들고 계산대를 향해 갈 때까지도 당당했던 호기를 한 순간에 앗아가버렸으니.
내 포켓 어디에도 지갑이 없잖은가.
유럽의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도둑이 상상을 크게 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죽하면, "내 몸 밖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는 말이 공공연할까.
까미노에서도 "현금은 적게 지닐 수록 좋다" 하고, 고액권은 전대(纏帶)에 넣어 몸 깊숙한 곳에
간직하도록 권할 정도다.
내 지갑 안의 현금은 낙담할 정도가 못되지만 고급 신용카드와 중요 기록지들이 들어있다.
내 심각한 표정을 읽었는지 달려오는 로저를 보는 순간 순발력이 작동했나.
내 핸드폰 케이스 안에 다른 신용카드 하나가 보관 중임을 퍼뜩 생각나게 했으니까.
위기(로저가 대신 지불하는)는 모면했으나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로저의 생일선물 값을 지불한 카드를 보관중인 지갑의 행방이 묘연한데 아니 그러겠는가.
포켓에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차 안에는 없다.
남은 동선은 로저의 차가 멈춰섰던 승하차 지점과 슈퍼마켓에서 돌아와 잠시 누워있었던 침대
와 게임을 한 탁구장 사이다.
로저도 내가 사용중인 침대 위에 떨어져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황급히 달렸다.
10여분 후에 확인된 것은 우리의 초조에 아랑곳 없이 고히 있는 침대 위의 지갑이었다.
10분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이 때만은 하루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다.
까미노 뽀르뚜게스가 만들어준 인연이 4년동안 잘 자라서 반갑게 재회했고 옹근 하루를 편하고
즐겁게 가졌고, 이 추억들을 더 윤택하게 할 해프닝까지 추가했다.
뽄떼베드라(Spain)의 아사벨라, 빌라 노바 지 가이아(Portugal)의 로저.
여의치 않은 언어의 소통에도 생선 꼴이 되지 않고(Visit is like fish - after three days he stinks),
더 깊어진 정을 느끼게 한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인연 2개가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장차, 추가될 인연(相逢)이 있겠는가.
80 넘은 나이에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비판받아야 할 과욕일 것이다.
날로 더할 혹서 속으로 들어가는, 이 늙은이의 남행길(Lisboa 까지의)에 부드럽고 신선한 바람이
되고 시원한 생수가 되어 주리라.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