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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쓰는인생(46) 시므이에게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 사무엘하 16:5-14
다윗이 왕의 자리를 자식에게 빼앗겨서 피난을 가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고 비참하고 궁색했습니다.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15:30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다윗이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위를 폐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모든 신하와 군사들이 현재 다윗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부터 함께하고 헤브론에서 나라를 세웠던 모든 신하들이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서 나라를 세워도 지금처럼 훌륭한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 시바는 압살롬이 아닌 다윗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여 다윗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오늘 그의 시대와 정국을 읽는 눈만큼은 날카롭고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히 오판을 한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다윗이 완전히 망해서 끝난줄 알았던 것입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작전상 후퇴요, 자식 이기지 못하는 아비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다윗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이제는 바야흐로 압살롬의 새 시대 열려진다고 말입니다. 오늘 이 저녁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용감하게 다윗에게 저주를 날렸던 한 사람과, 그 사람과 그 저주를 대하는 오늘 다윗의 모습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5-6절 읽어봅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삼하 16:5-6)
이 시므이라는 사람은 사울의 집안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 때문에 사울의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다윗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동안 속에 담고 있던 모든 미움을 담아 모든 욕과 저주를 퍼부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시므이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더욱 시바의 말을 신뢰하고 더욱 므비보셋을 의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사울의 남은 친족들이 이토록 기뻐하고 좋아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있으니, 므비보셋이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삼하16:3) 하며 좋아하고 있다는 시바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여러분,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모습, 작은 좋은 일에 뛸 듯이 기뻐하고, 작은 나쁜 일에 세상이 무너질 듯 탄식하고, 어린아이들은 그래도 됩니다. 그래야 애들이지요? 그래야 병준이가 도헌이에게 초콜릿 하나를 사주고 남은 모든 쿠폰을 챙길 수 있는 것입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송나라 저공의 일화입니다. 아침에 세 개 먹을래 저녁에 세 개 먹을래? 똑같이 일곱 개를 먹는데 이놈의 원숭이들이 아침에 세 개 준다니까 죽을 표정을 짓고 성질을 부리더라는 것이지요? 그럼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준다니깐 그렇게 행복해하고 기뻐했다고 하지요? 당장의 작은 차이에 목을 매는 인생, 더 크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조삼모사로 좋아했다 슬퍼했다 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지요?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 조금 더 얻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비지 말고 좌우를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동서남북을 주시는 것입니다.
뭔가 사태가 벌어지면, 조금 추이(推移)를 지켜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화뇌동하고 큰일났다 큰일났다 호들갑스럽게 안절부절, 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작은 일만 생기면 때는 이때라고 막 확인되지 않은 말들을 SNS로 퍼나르는 사람들이 있지요? 긴급, 중요를 찍어 급히 지인들에게 연락돌려달라고 하는 근거없고 출처없는 카더라 통신들 말입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아직도 그러한 이야기들은 순진한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될 예정이라면, 새벽기도하시는 우리 장로님, 우리 권사님들에게 먼저 말씀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마세요. 만에 하나 전쟁이 나고 테러가 나도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 무서우십니까? 여기서 살면 복음 전하면 되고, 데려가시면 천국가는 것 아닙니까? 늘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해서 살면, 세상의 모든 일, 하나님의 손안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기억하시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오히려 구원의 여망이 사라진 사람들 앞에서, 사도바울처럼 “여러분이여 안심하라”(행27:25)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며 믿음을 세우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늘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신앙이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약속으로 깊이 뿌리내려 견고하게 서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42:1-3)
다윗이 피난을 가니까 신이 났습니다. 다윗이 다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다 퍼부었습니다. 말로만 하니깐 성에 덜 찹니다. 주변에 눈에 띄는 돌이라는 돌은 다 던지고 할 수 있는 온갖 부산을 다 떨어 먼지를 날려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슬픔에, 여러분의 아픔에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없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슬픔에, 여러분의 아픔에 오늘 그 길에 함께 하는 가족들, 또한 여러분의 뜻 가운데 머무는 좋은 친구들만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동행하는 중에도 다른 꿈을 꾸는 시바와 같은 이들은 하나도 없이, 늘 여러분의 마음과 하나되어 동행하는 멋진 인생 동반자들만 여러분의 벗으로 허락해주시길 축복합니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별에 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나에게 전혀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내 편을 들어 주는 사람도 있고, 사사건건 나를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 시간 동안 그것을 살펴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는 길, 그 길에 만난 사람들 말입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그 중에는 다윗 편을 들어 주는 사람도 있고, 지난 시간 시바처럼 다윗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도 있고, 오늘 시므이처럼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축복하며 권면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 생길 때, 그 사람을 묵상하며 그 사람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해, 싫어해, 나는 이제 틀렸나봐 나는 소용없나봐 나는 인생에서 실패했나봐, 나는 끝났어!”
여러분 이런 미련한 태도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면 이상한 것입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하는 몇몇 사람 때문에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모두가 언제나 칭찬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뇨 그분은 처음부터 그분이 오시는게 싫어 소동했던 예루살렘성, 예수님 나이를 가늠해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다 죽이는 악한 헤롯대왕을 마주하며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예 평생을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 예수님을 음해하는 사람들을 늘 마주하며 사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미움 가득한 세상에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함께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저 갑자기 내 인생에 튀어나와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나를 흔들고 속을 뒤집어 놓는 저 인생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늘 내 곁에 함께 하시는 가족들, 성도들, 우리 하나님을, 그 천군 천사들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시선을 돌리세요. 오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도 말씀 나눴습니다. 우리의 성을 온통 아람 군대가 둘렀고, 내 곁에는 게 엘리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성이 있는 온 산에는 이미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했던 것이지요? 저 아람 군대로 두렵고 떨리던, “아아 내 주여 어찌하리이까” 하던 게하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이제껏 맛보지 못했던 신앙의 경지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나와 함께 한 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늘 용기를 내시고 주변, 나를 오늘도 믿고 지지하며 사랑하고 함께 걸어줄 가족과 친구들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저도 아직까진 잘 못하지만 일개 한 사람의 말에, 표정에, 행동에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굳은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므이 이 사람은 정말 지독하다 싶을 만큼 다윗을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시므이의 이름이 언급된 구절마다 '저주'라는 말이 꼬리표 처럼 따라 붙고 있는 것입니다. 확인해볼까요?
(삼하16:5)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삼하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삼하16:13)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러니까 '시므이' 하면 곧 '다윗을 저주하는 사람'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주의 사람 시므이, 참 대대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악한 이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이름에는 어떤 꼬리표가 붙어 있을까요? 감사의 사람? 불평의 사람? 원망의 사람, 투털거리는 사람? 찬양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섬김의 사람?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는 말들을 가만히 한번 점검해 보시길 원합니다. 그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5)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그래서 잠언에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감사의 사람, 기도의 사람, 찬양의 사람, 말씀의 사람 다들 좋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예수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를 이야기하는 사람 말입니다. 눌러도 예수, 찔러도 예수, 간지럽혀도 예수, 늘 예수를 이야기하는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한번 해볼까요?
보십시오. 시므이는 다윗을 그냥 저주 하는게 아니라 지독하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시므이는 다윗을 계속해서 저주하고,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는 것입니다. 안티도 이런 안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므이는 왜 이렇게까지 다윗을 저주하는 것일까요?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어서 만사를 제쳐 놓고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저주하는 것일까요? 시므이의 저주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봅니다. 7-8절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삼하16:7-8)
※ 비루(鄙陋)하다 - 행동이 천하고 너절하다.
하나님의 종이 들었던 욕이 성경에 기록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사도바울이 들었던 “염병(染病)”이라는 말이 아마 가장 지독한 욕설일 것 같은데, 오늘 시므이의 경우는 아주 자세하게 그 내용이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에게는 아프지만,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시므이는 오늘 다윗을 왕이나 기름부음 받은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살인한자, 그리고 비루한자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사실입니다. 다윗은 살인자요, 행동이 천하고 지저분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16:8) 그냥 감정적인 욕이 아니었습니다. 나단이 했던 예언의 말씀 그대로요, 오늘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음을 시므이의 말을 통해 다윗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 시바 앞에서 왕노릇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죄인의 모습으로 돌이키기에 충분한 그런 시므이의 지적이었던 것입니다. 시므이가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을까요? 아마 자기가 던지는 돌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를 때까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하도 소리 질러서 목이 다 쉴 때까지 시므이는 그렇게 욕을 해대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인 것이지요.
오늘 이 시므이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패망과 오늘 다윗의 피난이 아무 관련이 없는데 모든 피를 다윗에게 돌리며 저주했던 것입니다. 시므이에게 이 저주의 유일한 이유는 사울 곧 자기 집안이 망했고, 그 자리를 다윗이 차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동안 다윗이 잘 먹고 잘 사는게 참으로 배 아프고 꼴 보기 싫었는데, 마침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쫓겨나는 꼴을 보니까, 그것 참 고소하고 쌤통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복수심 반, 통쾌함 반으로 저주를 퍼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당하는 일이 참으로 속이 시원할 때 있으시지요? 그때, 겉으로 표현하지 마시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속으로만 시원해하시길 소원합니다. 혹시 그 일이 이유가 되어 그 원수가 다시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다윗을 다시금 회복시켜 시므이 앞에 세워놓으시듯 말입니다. 오히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하며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시는 복된 분들,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세상에 비난을, 판단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억울하게 비난 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하다 못해 내가 뀌지도 않은 방귀를 꼈다고 몰아 세우면 펄쩍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난리를 칩니다. 저희집 서예나는 막 울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억울한 것이지요. 하물며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울을 끄집어 내면서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까요? 사실 다윗이 도망가느라 바빠서 그렇지 시므이 정도는 한 주먹 거리도 안되는 것이지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달려가서 목을 비틀어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시므이의 저주입니다.
저주를 주로 언제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미워 죽을 것 같은데, 나보다 강해서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을 때, 그때 마지막 수단으로 하는 게 저주입니다. 그래도 시므이가 좀 낫습니다. 골방에 숨어서 인형 만들어 부적 붙이고 바늘로 찌르지 않고 지금 앞에 와서 강아지가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짖듯 저주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더 힘이 세면 뭐하러 저주나 하고 있겠습니까? 수하에 사람을 보내거나 당장 달려가서 한대 치고 말지요. 무슨 말입니까? 만약 시므이가 다윗 보다 더 강했다면 저주가 아니라 다윗의 목숨을 끊어 놓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그저 멀찌감치서 저주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요? 여전히 다윗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윗의 신하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분부만 내려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허락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쫓아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고 오겠다는 것입니다(삼하16:9). 이 부하들이 베드로 보단 좀 낫습니다. 벌써 달려가서 귀를 베어버렸을텐데 말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참, 다윗이 다윗답게 돌아왔음을 확인합니다. 시므이의 이 욕지거리와 저주들이 다시금 조금 전 시바앞에 왕이 되어 우쭐했던 다윗을 다윗되게 했던 것입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11)
간단히 말하면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저런 소리를 다 듣겠는가?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하루 왠 종일 별것도 아닌 인간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윗은 자신이 비난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동안 지은 죄를 떠올리면서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부하들에게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겸손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곧 죽어도 "죄가 없다, 죄가 아니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것이지요. 혹 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죄 값을 치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죄를 짓긴 했지만 "그만한 벌을 받을 만큼 나쁜 죄는 아니었다,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바쁜 것이 우리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죄로 인한 결과-시므이의 저주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요?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16:10)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둘째, 다윗은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만큼 겸손했습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해 본적, 아니면 사귀다가 차여 본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교회 분들은 다들 거절당해보신 적이 없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그 순간 찾아오는 여러 가지 감정 중에 가장 분명하고 강한 감정은 '분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에게 거절 당할 때, 버림 받을 때 분노합니다. 왜요? 자신이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고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나는 사랑 받아 마땅하고, 그럴 자격이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어기제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못난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래서 실연 당하면 젤 먼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지 까짓게 뭔데? 참 내, 지는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좀 더 길게 풀어보면, "지 까짓게 뭔데?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감지덕지 인줄 알아야지. 지는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나같이 잘난 사람을 거절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일 것이지" 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하지요? "시므이가 날 저주 하는게 뭐가 어때서 그래? 그냥 내버려 둬, 아들도 나를 미워하는데 뭐 사울 집안 사람이야 당연하지" 다윗은 다른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던 것입니다. “아들한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시므이에게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 마찬가지다.”다윗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막내아들로 태어나 늘 찬밥신세로, 중요한 일마다 따돌림 당하면서, 그렇게 들판으로 내몰려 양을 칠 때부터 이골이 난 것인지, 왕의 사위이나 버림받고 쫓기면서 훈련을 처절하게 받아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다윗은 나는 반드시 사랑 받아야 하고,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자기애의 틀을 과감하게 깨버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인 것이지요. 이렇게 다윗은 겸손하게 시므이의 저주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셋째, 다윗은 자기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기다릴 만큼 겸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좀처럼 하나님께 내어 맡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관계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누군가에게 미움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든 내 손으로 앙갚음 하고 싶어하지,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내가 직접 하는게 빠르고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직접 하는게 속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혹시라도 하나님이 심판 하지 않으실까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던 무슨 이유이든 이것 모두는 다 교만(驕慢)함의 발로(發露)인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더 정확하고 확실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기로 정하시면 그게 가장 올바른 판단인 줄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못 참습니다.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됩니다. 꼭 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튼 뭐라도 하나 잘 안 풀려 맘고생을 좀 해야 됩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한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서 여전히 남아 있는 옛사람이요, 교만이고 못된 심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요, 훗날 솔로몬 앞에서는 조금 달라지지만,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조금도 이런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내 생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 오늘 당신의 계획과 섭리 속에 나를 심판하고 계시는 분, 나 역시 심판 받고 있는 주제에 누굴 심판한다는 말인가? 다윗은 모든 판단과 결정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시므이에게 저주를 받고 있는 자신을 돌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 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2)
여러분, 늘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뭐 결국 같은 이야기이지만,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나를 돌아보아주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나를 기억해주시라고 말입니다. 그 기도가 오늘 하나님께 상달되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겸손과 그의 강한 속사람을 보시면서 여러분 혹시 떠오르신 분이 없으신지요? 네 맞습니다. 오늘 이 다윗의 모습은 먼 훗날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강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기억한 예수님의 모습, 함께 읽어보시지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셨습니다. 아울러 베드로는 한번 더 이야기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원조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볼까요?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보십시오. 다윗은 시므이를 위해 복을 비는 단계, 원수를 위해 사랑하며 선대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내버려 두는 것을 넘어 선대하고 축복하는 분들까지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잘못하고 죄를 지어 듣게 되는 비난과 저주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듣는 욕도 이제는 좀 수준있게, 범죄한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욕을 먹고, 그때에도 이렇게 겸손하게 참으시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욕을 먹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사도 베드로는 또한 이런 말도 남겨두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우리 하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다윗처럼 매맞고 참는 분들 아니라, 선을 행하고 상을 받는 아름다운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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