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부ㅡ 공씨-공자의 후손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공자의 후손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였다. 공민왕은 1349년에 원나라 수도인 북경에서 노국공주와 결혼식을 올렸고, 1351년 충정왕이 사망하자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이 귀국할 때 노국공주도 함께 왔는데 한림학사이던 공소(孔昭)가 그녀를 수행했다.
공소는 공자의 53세손인 공완의 둘째 아들로 공자가 동이의 나라에서 살려고 했던 뜻을 따라 고려에 정착할 것을 결심했다. 이후 공소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고려에 귀화를 했고, 공민왕은 그를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하고 창원백(昌原伯)에 봉해 주었다.
공민왕은 그의 이름을 소(紹)로 바꿨는데, 원래 이름인 소(昭)는 고려 광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소는 '창원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조선에서 공씨 집안을 크게 일으킨 인물은 16세기의 공서린과 17세기의 공덕일이었다.
공서린은 공소의 10세손으로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 권발, 김정국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했던 사림파 계열의 학자였다.
공서린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리 생활을 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고, 말년에는 복권되어 황해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했다.
공덕일은 공서린의 4세손인데, 『소학』과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의약, 수학, 병법에도 밝았다. 공덕일은 인조로부터 반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따르지 않았고, 조선이 청에 항복을 한 이후에는 시대를 한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서린과 공덕일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의리를 중시한 인물이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의 국왕들이 공자의 후손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명종 때부터 나타난다.
명종은 공자의 후손이 범법 행위를 해도 곤장을 때리거나 구금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숙종은 공자의 후손들을 관리로 임용하거나
영조 역시 공자의 후손을 우대했고 공서린에게 이조판서와 대제학 벼슬을 더해 주었다.
공자의 후손을 가장 우대한 국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공서린의 적손인 공윤도를 목릉 참봉에 임명하고, 공덕일의 후손인 공윤동을 경기전 참봉에 임명했으며, 공서린의 9세손이자 성균관 유생이던 공윤항을 불러 『시경』과 『서경』을 강독하게 한 다음 과거에 급제시켰다.
정조는 북경에 가는 사신에게 공씨의 족보를 구입하게 했고,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신이 공자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나온 공씨 족보를 구입해 오자 정조는 공소가 우리나라로 왔음을 확인했고, 공씨의 관향을 '창원'에서 '곡부'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곡부 공씨'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정조는 수원에 궐리사(闕里祠)를 건설했다.
궐리사란 원래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을 말하는데, 정조가 화성에 별개의 궐리사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궐리사가 세워진 장소는 원래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었다.
정조는 경기감사에게 현지 상황을 조사하게 했고, 경기감사 서정수는 서재 터와 우물, 공서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남아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했다.
정조는 이곳에 사당 건물을 세우고 규장각에 보관하던 자의 초상화를 옮겨 모셨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지방 수령이 제사를 올리게 했다.
궐리사의 첫 제사는 1795년에 있었다.
이 때 정조는 제문을 작성해서 보냈고 정조가 발탁한 공윤동과 공윤항이 유사 자격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그때까지 공자의 후손과 인연이 있는 지역으로는 수원 이외에도 창원과 용인이 있었다. 그런데 정조가 굳이 수원에 궐리사를 세운 것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가운데 유교문화의 중심지라는 상징을 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현재 공서린의 무덤은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에 있고, 궐리사는 오산시 궐동에 있다. 궐리사 건물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없어졌다가 1900년에 중건되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공소의 무덤은 경남 마산시 합포구 예곡동 두능리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