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수업시간에 중국사를 소설로 읽기를 권한다. 예컨대 <<열국지>>에서 춘추전국시대를, <<초한지>>에서 진한교체기를, <<삼국지>>에서 삼국시대를, <<수호지>>에서 송대를, 그리고 <<홍루몽>>, <<금병매>>, <<유림외사>> 등에서 명청시대를 이해하도록 말이다. 그러면서 항상 염려되는 것은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모호하므로 노력에 비하여 얻어지는 역사 지식이나 역사적 사고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허구와 상상을 의미 있게 제시해주지 않는다면 역사를 소설로 읽는 것을 쉽게 권하기 어렵다고 절감하였다. 마침 이 문제를 극복할 책이 번역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니, 오늘 소개할 <<중국사의 大家, 수호전을 歷史로 읽다>>(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서울 : 푸른역사, 2006.3)가 그것이다. 이 책은 정확한 역사 지식과 분석을 통해 유려한 문체로 역사와 문학을 관련지어 검토한 모범적인 책이며, 역사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아마도 일본의 사학자 가운데 한국에 가장 많이 소개된 사람일 것이다.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책만 해도 <<中國史>>(曺秉漢 譯, 서울: 역민사, 1983), <<中國을 배우자>>( 정성호 譯, 서울: 明文堂, 1989), <<중국의 시험지옥--科擧>>(중국사연구회 옮김, 서울: 청년사, 1993), <<中國中世史>>(任仲爀‧朴善姬 譯, 서울, 신서원, 1996), <<옹정제>>(차혜원 역, 서울: 이산, 2001), <<구품관인법의 연구>>(임대희․신성곤․전영섭 옮김, 서울: 소나무, 2002) 등이니 내 책꽂이에 있는 것만 해도 모두 7권이나 된다. 또“20세기를 대표하는 동양사학자”라고 하니 이 한 마디와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만으로도 그에 대한 소개는 족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에서 ‘고전 소설과 중국사 연구의 만남’, ‘이야기와 사실, 그리고 역사학’, ‘소설 <<수호전>>을 낳은 시대’, ‘<<수호전>>의 오늘과 내일’로 나누어 체계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머리말>과 <맺음말>에서 소년시대 수호전의 애독자가 된 가정적 배경과 수호전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 등이 잘 나와 있다. 인상적인 것은 세계적인 동양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출현은 바로 장서가인 아버지란 토양에서였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부모와 자식도 인연의 고리와 유전적 계승 관계에 있는 이상....
옮긴이와 지은이의 기본적인 관점이 수호전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수호전 그 자체가 아니라 송대사의 이해란 측면에서 무게를 두고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이 책은 송대 사회사를 매우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있다. 전체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풍류객 휘종과 기녀 이사사
2. 도적 송강과 장군 송간
3. 마법사 공손승, 활개를 치다
4. 무공을 세운 환관 동관
5. 간신 채경, 영신이길 거부하다
6. 호걸 중의 호걸 노지심과 임충
7. 대종은 공중을 날고 이규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8. 신비한 힘을 가진 장천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나진인
9. 송강의 뒤를 잇는 사람들
송대 역사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많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황제(제 1장), 반란(제 2, 3, 9장), 전쟁(제 3장), 환관(제 4장), 재상(제 5장), 서리(제 7장), 군대(제 6장), 종교와 민간신앙(제 3, 8장) 등에 대하여 평이하고도 간결한 설명으로 송대 사회로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
제 1장에서 휘종과 기녀, 그리고 북송의 멸망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호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북송(960-1127), 그 중에서도 金에게 망하는 시기인 휘종(1101-1125) 시대이다. 당시 사회경제적 실태를 지방의 농촌을 희생양으로 삼은 수도 개봉의 호경기라고 저자는 정리하였다. 그리고 당시 황제인 휘종은 올곧은 관료의 반대 속에 즉위하였으며, 기녀를 찾아 미행을 서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즐거움을 위하여 새와 짐승, 태호석, 그림 등을 끝없이 모았으며, 고통 받는 백성의 삶에 대해서는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인 휘종에 대하여 저자는 금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고 자신도 포로의 몸이 된 상황에서 총애하는 기녀 조원노를 연금 장소로 불러들이려 했음을 들어 휘종의 부덕과 무능을 제시하였다. 아마도 송의 멸망이 지도자의 무능과 도덕성에서 연유했음을 엿보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제 2장은 역사학자의 사실 탐구의 전형은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고 저자가 가장 공들여 연구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수호전의 저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가 당연히 여겼던 송강이 두 사람이라니 우선 흥미가 간다. 저자는 “주인공 송강이란 인물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존재다.”고 하였다. 그는 시골 작은 현의 평범한 서기 출신으로, 손으로는 닭 잡을 만한 힘도 없고 손오의 병서를 읽을 만한 재능도 없었으며 의협심도 대단치 않았다. 이것만으로 어떻게 나머지 107명의 호걸들을 통솔할 수 있는지 미심쩍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수호전의 원저자들이 설명하지 않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하고 있다. “송강이라는 사나이는 지극히 무능한 인간이지만 그것을 잘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자기 재능을 타인과 비교하려 들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 중국에서는 특히 이런 종류의 인간형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한다. 살아가기 힘겨운 현실 세상에서는 이처럼 무능한, 그럼에도 자신의 무능을 잘 알고 결코 잘난 척하지 않는 인간이 요구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게 마련이다.”고. 그러나 수호전의 사실성을 의심받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송강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시 도적 송강과 장군 송강이 동시기에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다. 한 사람의 송강으로만 설정한 결과“방랍 토벌군에 참가한 송강이 4월에는 분명히 전선에서 활약하다가, 다음 달인 5월에 슬며시 빠져나와서 도적의 우두머리인 강도 송강이 되어 정부군 포로가 되는가 하면, 또 다시 6월에 군대로 복귀해서 장군이 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이 사실을 원저자들이 제대도 인식하지 못한 결과 정부군과 싸워온 송강 무리가 갑자기 조정에 귀순해서 충성을 다해 맹활약을 벌인다는 뒤죽박죽의 줄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소설에서 史實이란 단순히 소재가 아님을 거듭 확인하는 순간이다.
제 3장에서 송강이 투항하여 네 도적을 정벌한 부분은 허구이므로 별로 역사적 의미는 없다. 특히 ‘大遼 정벌’은 중국인이 얼마나 이민족에 대하여 한을 품고 소설로나마 그 한을 풀려고 했는가를 엿보게 해줄 뿐이다. 이 장에서 역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주제는 ‘방랍은 왜 모반했는가’와 ‘사람을 죽여 귀신에 제사 지내다’는 것이다. 전자는 관리들의 수탈과 종교적 비밀결사의 존재를 들었는데, 특히 결사와 종교가 반란에 중요하였다는 사실은 저자의 통사적 인식으로 보인다. 한편 후자는 중국사에 빈번이 등장하는 식인 습속과 더불어 역사적 사실임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런 잔학한 행위조차 서양의 르네상스시기와 비교해서 낙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저자의 송대 근세론을 견지하고 있다.
제 4장은 환관 동관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환관제도는 유럽과 일본에서는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절대왕권의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중국사에서 대표적으로 환관이 발호한 시기는 후한, 당, 명 세 왕조이지만, 송대에도 동관, 양전과 같은 환관이 있었다. 황제의 입장에서 부리기 편한 심부름꾼이며 확실한 수족이기 때문이다. 환관은 채경과 같은 관료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였으며, 관료도 환관과 손을 잡음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흥미 있는 사실은 ‘대요정벌’이 동관 자신의 지위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로 구상한 것이었으며 환관 양사성 역시 자신의 지위를 위한 투기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점치기나 제비뽑기를 대신하는 격으로 요나라 천자 천조제의 관상을 보고 결정하자는 재미있는 방안이 채택되었다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송의 국정에 대하여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금을 끌어들여 요를 치는 프로젝트는 북송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는데, 망하지 않을 재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제 5장은 재상 채경의 이야기이다. 역대로 재상(승상)이 있었지만 송대의 독재군주 하에서 재상은 처음에 서기와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귀족제가 붕괴된 송대에는 자연히 인사권에 대하여 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황제의 신임을 가진 재상이라면 더욱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채경은 그런 신임 받는 재상이 되어서 황제를 농단하고 정치를 어지럽혀 결과적으로 송이 망하는 큰 악역을 담당하였다. 그런 면에서도 저자는 채경이 악마라고 일갈하였다.
제 6장은 노지심과 임충의 이야기를 통해 하급 군인의 세계와 송대 군사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송대의 군사제도에 대하여 이 책만큼 쉽게 설명하기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수호전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고구가 등장하는데, 그는 공차기 하나로 단왕(휘종)의 눈에 들어서 금군의 최고 사령관인 殿帥(전전사 도지휘사)로 벼락출세하였다. 앞에서 든 동관과 함께, 이런 고구 같은 인물이 금군을 장악하니 송의 군대는 완전히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송이 망하는 시점에서 고구와 그 일족의 몰락하였는데, 저자는 이를 인과응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남송에서 고구의 아들 요명이 다시 발탁된 사실도 제시하고, 그 이유를 ‘당파적 움직임에 편승한 듯하며 그 후에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함으로써 교훈적 서술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역사학자로서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제 7장은 서리의 세계, 뇌옥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수호전의 대종과 송강이 바로 서리였으며, 이규는 뇌옥의 말단 간수 중의 하나였다. 서리는 정부의 모든 관청의 말단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하급 아전을 가리키며, 수호전은 어떤 면에서는 서리가 얼마나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인지 그 실태를 기록한 논픽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목할 것은, 송강은 훌륭한 서리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며, 수호전의 원작자는 서리로서 교양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서리들도 관료처럼 전국적인 교제망을 가진 존재이기를 선망하는 마음이 송강의 이미지에 결집된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하였다.
제 8장에서는 장천사, 나진인으로 대표되는 도사, 도술, 도교의 세계를 다루었다. 당시 인민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도교이며, 민중 자신의 풍습이었다. 그 때문에 도교는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존중되었으며 동시에 민중의 희망을 대변했다. 또 도교는 대단히 관용적이어서 때에 따라서는 자기와 상반되는 원리까지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다. 수호전 작가는 ‘마(魔)’의 세계를 인정하지만 ‘마’는 결국 正道에 의해 구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야말로 구천현녀가 송강에 대해 “성주는 아직 마심이 끊어지지 않아서 도행을 이루지 못해 잠시 하계에 추방되어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결국은 정도로 돌아와서 다시 천상으로 불려 올라가 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방황에 대해 동정의 손길을 뻗치고 참을성 있게 각성하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있다는 점이 바로 도교가 민중들 사이에서 신뢰를 받는 까닭일 것이다고 하였다.
제 9장에서는 수호전 이야기의 배경인 양산박의 모습, 환관의 수탈, 그리고 도적들을 사료에 근거하여 정리하였다. 우선 남북 400리, 동서 300리 이상이 되는 거대한 양산박이란 호수가 청대에는 작은 연못조차 남아있지 않고 우물로 관개를 해야 하는 자연 환경의 변화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桑田碧海’란 괜한 말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기초한 것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또 도적 송강이 반란을 일으킨 계기는 휘종 치세 만년에 환관 양전이 기용되어 양산박 근방의 주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임을 서술함으로써 민중들의 반정부 활동의 배경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선 후 양산박의 도적 장영이 對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송강의 남은 패거리 ‘사빈’이 사천의 경계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수호전의 줄거리와 비슷한 이야기가 소흥 6년(1136)에 발생한 예주의 산적 ‘노진’무리에 관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남송 초기에 도적들의 동향과 존재방식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바로 수호전의 소재가 되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에서는 많은 그림, 지도, 사진을 수록하여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게다가 부록으로 수호전의 줄거리를 각 회별로 간략하게 정리해 주어 수호전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책을 읽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수호전 사건과 중국사 연표를 제공하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또 찾아보기가 있어서 읽다가 궁금한 부분을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2006-7-11. 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