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 교수]김교신: 근대 지리학과 현대지리학의 가교 역할 <진리의 벗이되어> 제52호(2001년 3월)에 실린 이은숙 교수(상명대 지리학과)의 글.
우리나라 지리학은 풍수지리 실학 지리지 편찬 지도 제작 등과 같이 조선시대의 전통지리로 맥을 이어왔으나 구한말에 전래된 근대지리학은 수용될 기회도 없이 일제강점으로 단절되고, 해방을 맞이한 후 바로 현대지리학의 다양한 조류에 편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을 메워주고, 현대지리학의 수용을 용이하게 한 근대지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최남선과 김교신이다.
최남선의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김교신에 대해서는 그의 종교적 업적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김교신은 자신의 종교관과 민족관, 그리고 그가 몸 바쳐온 지리교육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라는 논문을 쓴 지리학자이다. 이것은 1934년 <성서조선(聖書朝鮮)>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그의 지리사상과 조선에 대한 지리관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학 논문이다. 지리학자로서의 김교신을 그의 논문과 일기를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교신은 19세기 서구 지리학의 목적론적 사고에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지리학 사조와 맥을 같이한 진보적 지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이라는 땅을 두 가지 상이한 입장에서 접근했다. 그 하나는 땅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나온 감정적 접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과학적 접근이다. 이러한 입장이 그가 기독교적 목적론에 바탕을 둔 서구의 근대 지리사상을 쉽게 수용하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김교신의 지리사상에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이 컸다.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유학 당시 그곳에서 활동한 유럽 지리학자 기요(Guyot)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요는 "인류의 미래는 자연 그 자체 내에서 결정되어진다. 따라서 자연 즉 지구는 인간을 교육시키는 장(場)"이라고 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목적론적 결론을 도출한 지리학자이다.
김교신이 조선지리를 해석하는 기본 틀도 이와 거의 유사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내재하고 있는 환경결정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20세기 초반이후 현대지리학의 새로운 사조인 가능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지리적 환경은 단지 주어진 것이고 인간이 선택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역적 특성이 형성된다는 것이 가능론의 골격이다.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반도정체론에 대한 그의 반론의 바탕을 이룬다.
둘째, 김교신은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함에 있어서 정치지리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국가의 응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단위와 정치적 단위가 일치해야 된다라는 것이라던가, 조선의 위치와 정치적 운명의 관계를 역사라는 테두리 속에서 설명하려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조선지리소고"에서 위치와 관련된 조선의 운명에 대한 언급은 역사에 대한 지리적 축으로서의 조선반도의 위치를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영국의 정치지리학자 맥킨더(Mackinder)의 심장이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는 조선의 반도적 위치에 대하여 낙관적 해석을 했는데, 이는 일본의 압박을 당하는 조선민족을 계몽하고, 국토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한반도라는 위치를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위치에 대한 자각과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서 만이 반도정체론의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그는 지리학 방법론으로 비교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적용하고 실천했다. 비교연구란 일반화를 추구하기에 앞서서 지역의 개별적인 양상을 조사한 후, 그것을 유사한 지역과 비교하여 일반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적 연구는 인간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관찰을 전제로 하여, 인간과 자연이 결합된 총체와의 관련을 우연한 것으로부터 법칙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구체화시키는 데 목적을 둔다. 실제로 조선지리소고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조선의 지리적 특징을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기술했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일반 법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지리적 현상의 설명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 방법으로는 답사를 통해 관찰 조사하고, 간접적 방법으로는 대축척지도를 이용하고 분석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답사와 지도를 통해서 지리적 현상을 관찰하도록 지도했다. 현대지리학에서도 이러한 작업은 필수적 탐구 절차이다. 그래서 김교신은 양정고보에 재직하고 있을 때 "물에 산에"라는 답사반을 만들어 매주 일요일에 답사를 실시했고, 답사가 있었던 날에는 평생 써온 일기장에 "무레사네"라는 제목으로 답사지역과 내용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가 답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의 국토는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조선인의 정신이 이 땅에 깃들여 있고, 조선인의 마음, 조선 민족의 생활의 자취가 고스란히 국토 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조선의 국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답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답사의 또 다른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밖에 그의 지리학자로의 업적은 다양하나 결론적으로 그는 근대지리학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현대지리학 사조와 맥을 같이한 선구자적 지리학자였다. 한편 그는 계몽적 목표를 가지고 학생들로 하여금 국토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불러일으켜 애국애족 사상을 고취하려한 실천적 지리교육자였다. 지리학자로서, 그리고 지리교육자로서 그의 업적은 해방 후 한국 지리학계에 확산된 현대지리학의 다양한 접근 방법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된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