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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
3일 |
연중 제27주일 |
루카 17,5-10 |
성가 271, 480 |
10일 |
연중 제28주일 |
루카 17,11-19 |
성가 24, 438 |
17일 |
연중 제29주일 |
루카 18,1-8 |
성가 20, 405 |
24일 |
전교주일 |
마태 28,16-20 |
성가 63, 450 |
31일 |
연중 제31주일 |
루카 19,1-10 |
성가 9, 400 |
●● 말씀나눔 l 연중제27주일~연중제31주일
함께하는 복음묵상
서울대교구 사무처장 안병철 신부
사진 : 서울대교구 사목국 이준성 신부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 10월 3일 연중 제27주일 루카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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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물의 자연적인 법칙마저도 뛰어넘어 역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자세를 지녀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진정한 믿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놀라운 결과에 관해 언급해 줌으로써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야기할 수 있는 그토록 놀라운 결과가 인간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삶의 터전인 세상을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만한 땅으로 만들어 가라는 사명을 받아 파견되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통해 이룩해야 할 세상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적인 논리와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는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그분을 믿는 신앙인들을 통해 구체적인 결실로 드러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는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믿음의 위대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묵상: 나에게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주님 손길의 따스함을 깨닫게 하는 믿음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루카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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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 하지만 주님의 따스한 손길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가운데 아홉은 유다인이었고 한 사람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는데, 하느님의 은총에 당연히 감사드렸어야 할 유다인 나병환자들은 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율법 제일주의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에 감사드리는 것조차 망각해 버린 유다인 나병환자들,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하심보다 율법 조항을 앞세우는 위선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복음은 자비를 베푸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응답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은 거저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응답하는 태도를 지니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은 어떤 이유로든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고를 떨쳐버리지 않는 한 믿음의 본질을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감사할 줄 알았던 사마리아 사람 나병환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높은 장벽도 주님을 향한 그의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진정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 묵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데 장애되는 것이 있다면?
참다운 믿음은 진정성과 항구성이 바탕이 되어야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루카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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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비극이란, 평화와 조화를 바탕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이 불의와 폭력으로 얼룩진 왜곡된 삶으로 변질된 채 살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비유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귀찮을 정도로 간청하는 과부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음을 지적합니다. 진정성과 항구성을 바탕으로 한 과부의 태도가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하여금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정의보다 세속적인 논리나 이익 계산이 더 현실적이고 승산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믿으면서도 세속적인 논리에 자신의 확신을 맡겨버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반면 과부의 일관된 모습은 재판관 개인이 불의하든 아니든 간에 그가 심판을 하는 사람이므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세속적인 불의에 가려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해서 하느님이 패배자가 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비극적인 현실을 하느님 나라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신앙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적인 확신을 현실 안에서 어떻게 펼쳐놓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모습이 바로 그 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 묵상: 항구성과 진정성이 요구되는 믿음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10월 24일 전교주일 마태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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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게 하는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께 자녀다운 마음으로 민족 전체의 복음화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 두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언약해 주십니다. 복음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기쁨과 행복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이 복음이 주는 행복을 느끼고 살아야 만이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새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실존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역시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근거가 되고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데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다면 그것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을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은 믿음을 죽게 하는 독약이 아닐까요?
■ 묵상: 나는 주님의 참다운 제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보시는 건 우리의 열정이 아닐까요?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루카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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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에 관한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관점이 어디에 모아져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유다교 원론주의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세관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며 자신의 물질적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 그를 죄인으로 판단하는 근거였습니다. 이렇듯 자캐오는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예리코로 내려가신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한 걸음에 달려가 그분을 뵙고자 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조건은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정작 자캐오는 키가 작아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열정을 보셨습니다. 그가 보여준 열정적인 모습이 예수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인식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선입관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캐오의 열정입니다. 겉으로만 드러난 열정이 아니라 진정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열정입니다.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의지 표명이야말로 예수님을 향한 그 열정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심으로써 열정에 대해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캐오가 보여준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진정성이 담긴 열정 말입니다.
■ 묵상: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믿음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봅시다.
●●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필레 1,16)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재산도 늘어나고 지위도 높아져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갈등이 커지고 고민만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이 세상의 왕이 그러하듯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 훌륭하고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하느님 나라의 왕이 그러하듯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훌륭하고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왜 하루 벌어 하루 먹을 만큼밖에 안 주시는지, 왜 내 자녀가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못 들어가는지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왜 위로 못 올라가는지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이하 필레몬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소아시아의 콜로새 공동체에는 필레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스라는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이 주인에게서 도망쳐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 사도를 찾아옵니다. 그는 바오로가 필레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바오로를 만났을 것입니다. 바오로를 만난 오네시모스는 회개하고 바오로에게 시중을 들었으며 바오로는 그를 ‘옥중에서 얻은 아들(1,10)’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오네시모스를 마냥 곁에 두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노예법에 따르면 노예가 도망치면 주인은 그를 엄벌에 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예를 도망치도록 도와준 이까지도 재산권 침해로 범죄의 공범으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스를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주기로 하되 그를 노예가 아닌 ‘사랑하는 형제(1,16)’로 받아들여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필레몬서입니다. 필레몬서는 바오로 서간 가운데 가장 짧습니다. 장의 구분도 없이 25절에 낱말 335개뿐입니다. 필레몬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더불어 옥중서간으로 분류됩니다.
바오로가 선교 활동을 벌이던 지역은 복잡한 계층의 신분 사회였습니다. 맨 위 계층에는 지방의 정치와 경제와 군사를 돌보기 위해 원로원이나 황제에게 임명된 로마 관리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다음으로는 그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세력이 있던 사람들이나 유지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계층은 소지주, 가게 주인, 장인 등 중인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계층은 주인의 선처로 또는 몸값을 지불하여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입니다. 그리고 밑바닥 계층은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가 되는 길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오거나 노예 사냥꾼에게 유괴된 경우, 빚으로 팔린 경우, 노예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씨종의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광물 채굴, 집이나 구조물의 건축, 배에서 노 젓기 등 주로 힘든 노역에 동원되었지만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정원 돌보기나 가사와 육아 등 육체적으로 덜 고달픈 노동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학식이 있는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주인집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좋은 주인을 만나면 상당한 정도의 급료를 받아서 나중에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처럼 사람이 신분에 따라 평가되고 불평등한 대우가 행해지던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자녀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노예든 주인이든 그들의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고 상대방을 소중한 형제로 받아들임으로써 노예제도의 족쇄에서 자유롭게 풀려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의 사회처럼 신분의 차별이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훌륭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자꾸 내 위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의 가족으로 여길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의 자녀들과 함께 살아갈 때 갈등과 고민에 쌓이고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신앙인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자녀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나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인이 느껴야할 갈등과 고민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은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세상의 자녀들이 그러하듯이 온 힘과 노력을 다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 만남,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장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1533~1690항)
성품성사와 혼인성사, 이 두 성사는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고,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며 특별한 은총을 베풉니다. 이 두 성사는 특별히 교회적 친교와 타인의 구원에 이바지합니다.
성품성사
1536항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임무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수행된다. 그러므로 이 성사는 사도직의 성사이다. 이 성사에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의 세 가지 등급이 있다.
성품성사란 무엇인가
성품(聖品)성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교회 안에 주교, 신부, 부제를 세우는 성사입니다. 이 성사를 통하여 서품된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봉사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거룩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므로 성품성사라고 부릅니다.
교회 전례는 구약 시대 아론의 사제직, 레위인들의 성전 봉사, 칠십 인의 장로 임명을 신약의 성품성사를 예표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 사제직의 모든 예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1티모2,5)’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사제이시며, 신약의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분의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와 견진을 받은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품성사를 받은 이들의 ‘직무 사제직’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하느님 백성의 보편 사제직을 위해 봉사하고, 신자들이 세례 소명을 완수하도록 보살핌으로써 실현됩니다.
성품성사의 세 계층
성품성사는 교회의 유기적 구조에 필수 불가결한 세 가지 품계, 곧 주교, 사제, 부제로 구성됩니다. 주교들은 바로 사도들의 계승자입니다.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교회의 전례 관습과 교부들은 분명히 대사제직, 곧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하였습니다(교회헌장 21).” 각 주교는 주교 서품으로 주교단(主敎團)에 들고, 흔히 ‘교구’라고 부르는 지역 교회의 으뜸이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 교회의 사목을 책임집니다. 또한 주교단의 모든 형제 주교들과 더불어 교회 전체에 대해서도 공동 관심을 가집니다.
사제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서품됩니다. “주교들의 봉사 임무는 그 아래 사제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제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도적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하여 주교품의 협력자들이 됩니다(사제생활교령 2).” 사제들은 주교를 중심으로 사제단(司祭團)을 형성하는데, 사제단은 주교와 더불어 지역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사제들은 주교로부터 한정된 지역 교회인 ‘본당’에서 사목하는 직무를 맡아 수행합니다.
부제는 사제 직무가 아닌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 서품됩니다. 우리말 ‘부제(副祭)’는 사제 바로 아래 품계라는 점만 드러내지만, 원래 부제(diaconus)라는 칭호는 봉사(diaconia)를 위한 직무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임무는 하느님 신비의 거행, 특히 성찬례 거행 때에 주교와 사제를 보좌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혼인을 주례하여 축복해 주고,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을 하며, 장례식을 거행하고,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교의 사목적 권위 아래서 이 임무를 수행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신 부제직’이 부활되었는데, 이는 기혼 남성에게도 줄 수 있는 성품이며, 사제가 되기 위한 바로 아래 단계가 아니라 평생 부제로 사는 성품 직무입니다.
성품성사의 은총
성품성사는 이 성사를 받는 이가 성령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그분의 도구가 되도록 합니다. 서품을 통하여 그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거행하며, 양 떼를 돌보는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성품성사도 세례와 견진의 경우처럼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받아 하느님의 사람으로 확증됩니다. 따라서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으며 한시적으로 줄 수도 없습니다.
혼인성사
1641항 혼인성사의 고유한 은총은 부부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고, 해소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일치를 강화한다. 이 은총으로 그들은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준다.
혼인성사란 무엇인가
혼인성사는 성인이 된 그리스도인 남녀의 자유로운 결합을 축복해 주는 성사입니다. 따라서 이 성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삶의 기초를 하느님께 두겠다는 결의를 하느님과 교회와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표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야기(창세1-2장)로 시작하여 어린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묵시19,9)로 끝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과 그 신비, 혼인의 제정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의미, 그 기원과 목적, 구원의 역사를 통한 혼인의 다양한 실현, 죄로 생긴 혼인의 어려움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혼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하여 말합니다.
부부애의 선익과 요구
부부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 그리고 자녀 출산을 받아들이는 것은 혼인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단일성은 그 누구도 배제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말합니다.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사랑하고,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사랑하는 혼인의 단일성은 꼭 지켜 내야 할 부부의 지고한 소명입니다. 불가해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맺어 주셨으므로 혼인에 의한 남녀의 결합은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단 한 번의 합의로 일생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는 혼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성실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녀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혼인으로 얻는 가장 훌륭한 선물인 자녀로부터 부부생활을 이탈시킵니다.
가정 교회
혼인제도 자체와 부부의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에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지향합니다. 이로써 혼인은 그 정점에 이르며 월계관을 쓰는 셈이 됩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마태19,4)’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1,28).’하시며 부부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나자렛 성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기도와 하느님의 진리, 사랑과 섬김, 자유와 책임 등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을 배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신앙생활의 첫 번째 학교,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학교입니다. 그것은 진정 ‘가정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인 가정과 ‘큰 가정’인 교회는 어려운 가정, 무너진 가정, 가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문을 열어 온 인류 가족의 행복을 이루어 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밖의 전례 거행
준성사
교회에는 일곱 성사 외에 준성사들이 있습니다. 성사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준성사(準聖事)’의 대표적인 예는 ‘축복’과 ‘축성’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는 것을 축복이라 하며, 특히 하느님께 바쳐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축성이라 합니다. 하느님께 봉헌되거나 전례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면, 그 축성은 지속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역시 준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셨으며(마르1,25-26), 교회는 주님께 마귀를 쫓아낼 권능과 임무를 받았습니다(마르3,15 등). 사제는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며, 악마의 세력에서 보호하여 주시도록 청합니다.
대중 신심
그리스도인 대중의 신앙심은 언제나 유해 공경, 성당 방문, 순례, 행렬, 십자가의 길, 종교 무용, 묵주 기도, 메달 등과 같은 신심 행위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이런 신심 행위들은 자연스럽게 전례로 인도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대중 신심이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애덕 실천에 있어 중요한 원동력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장례
우리의 죽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은 이를 아버지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당신 은총의 자녀를 바쳐 드리고,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날 희망으로 그를 땅에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은 작별의 슬픔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희망의 표현입니다. 장례식은 미사성제로 충만하게 거행되며, 그 전후에 베풀어지는 축복들은 준성사입니다.
※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589~640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가정기도 l 우리시대의 역설
가정에서 온 가족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진행합니다.
1. 시작 기도
│진행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중의 한분이 주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생활 말씀
│진행자│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다.
†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장 17-24절
17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18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19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20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행자│ 이번에는 다함께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다 읽은 후) 약 2분 정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묵상을 끝내고 다음의 나눔을 진행합니다.)
♠ 나눔
1) 성경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옛 인간 ’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3) ‘새 인간 ’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진행자│ 다음의 내용을 다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역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부족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은 잊어버렸고,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더 줄어들었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자주 거짓말을 하고, 너무 자주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고,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고, 너무 적게 책을 읽고,
너무 많이 TV를 본다. 너무 적게 기도하고,
너무 적게 사랑한다.
- 제프 딕슨 (Geoff Dixon)
♠ 나눔
1) 이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 함께 실천합시다
│진행자│다음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도 다음과 같은 역설이 존재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가족과 식사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
가족과 포옹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
가족과 기도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
여러분의 가족 사랑은 안녕하십니까?
5. 가족 회의 시간
│진행자│ 가족 회의 시간입니다. 가족이 함께 알아야 할 사항이나 논의가 필요한 일들, 가족 친지들의 생일, 축일 소식이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 가족에 바라는 점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자녀에 대한 훈계의 시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6. 가족 평화의 인사
│진행자│지금부터 평화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줍니다.)
7. 마침 기도
│진행자│다함께 손을 잡고 주모경을 바치겠습니다.
●● 그리스도교의 상징 l 비둘기
비둘기(Colomba)는 일반적으로 성령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태3,16).” 성경은 창조주이신 영으로 성령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1,2).” 또 성령의 작용으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동정 마리아에 육화되십니다(마태1,18 참조).
성령께서는 인간을 활동하게 하시며 용기를 주시고 증거하고 선포할 힘을 갖게 하십니다. 이 예들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골방에 갇혀 놀란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 더 이상의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사도2,3-8)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공개하고 자신 안에 활동하는 성령의 작용을 증거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2,3-4).” 이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동일합니다.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테살1,5).”
성령은 우리의 나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떻게 질문할지, 어떻게 간구해야 할지 전혀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8,26).” 신적 생명의 숨결이신 성령께서 가장 소박하고도 흔하게 우리의 체험 안에 들어오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마다 기도의 생명적 숨결인 성령께서 현존하신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름답고 구원이 되는 일입니다(생명을 주시는 주님, 65).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도와주는 선물을 내리시는데,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입니다(이사11,2).” 그리고 성령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주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당신 은혜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며(1코린12,11)” 모든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도 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1코린12,7 참조) 말씀에 따라, 성령께서는 교회의 쇄신과 더욱 폭넓은 교회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이나 직무를 받아들이는 데에 알맞게 신자들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러한 은사는 뛰어난 것이든 더 단순하고 더 널리 퍼진 것이든 교회의 필요에 매우 적합하고 유익한 것이므로 감사와 위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 헌장 12).
●● 성경 속 교리 단상
하느님께서 불타는 덤불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다.
1. 시작 기도
(진행자) 한분이 시작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성경 읽기
(진행자)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성경을 읽습니다.
탈출기 3장 1-8절, 13-15절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찾아서 읽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중략)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후략) …
3. 묵상하기
(진행자) 성경 말씀을 읽고 잠시 묵상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서로 나누어 봅니다.
■ 위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 우리가 하느님을 충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4. 함께 읽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은 “나는 과거의 하느님이 아니라, 현존하는 너희의 보호자 하느님이다.”라는 뜻입니다. 선택된 백성들을 노예 생활에서 구하시려고 모세를 부르셨던 분은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구원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 분 바로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마태1,23 참조). 만일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신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면, 우리에게는 그 말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5. 마침 기도
(진행자) 마침 기도로 대영광송을 바치겠습니다.
참고문헌 : 성서와 교리교육(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6)
●● 노년의 향기 l 웰 다잉
웰 다잉(Well-dying)을 마치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뿐만 아니라 잘 죽어야한다는 도전 앞에서 헨리 나웬 신부님의 「위대한 선물」을 통하여 1년간 이 문제를 고찰하였습니다. 이제 웰다잉을 마치며 그 내용을 간추려보고자 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새 생명, 새 희망, 그리고 새 믿음을 주는 길이며,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을 보내주는 새 길입니다. 침묵과 고독은 우리가 얼마나 삶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지 깨우쳐 주지만, 결국 우리는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야 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옮겨질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여정을 기꺼이 할 것입니까?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모든 사람들의 형제자매이고, 다가올 세대의 부모임을 믿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새 생명으로 가는 입구로 만들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전에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참으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로 태어났고, 연약한 존재로 죽습니다. 우리는 잘 살고 잘 죽기 위하여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죽음과 친구가 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생에 걸친 영적 과제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음과 친구가 되고, 다른 이들이 그들 자신의 죽음과 친구가 되도록 돕는 일은 분리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는 살아가는 것과 보살피는 것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느님께 속하는 모든 것이 낭비되는 일도,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하느님의 길입니다. 우리의 죽어가는 몸조차도... 부활은 참으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이제 헨리 나웬 신부님의 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합니다.
“인생은 ‘잠시 동안’이요, 짧은 기다림의 순간이다. 하지만 인생은 공허한 기다림이 아니다. 기대를 안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만물을 새롭게 만드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실현하시고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 기다림은 신명나는 기다림이 된다.
우리는 약속이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안다. 자연은 봄이 되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웃음을 지을 때마다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역사는 우리가 온갖 참화와 혼돈 속에서 일어나 자신 안에 숨쉬는 희망을 드러내 보일 때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이 ‘잠시 동안’은 소중한 시간이다. 이는 정화와 성화의 시간이며, 영원한 하느님 집으로 건너가는 막중한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내게 주어진 이 ‘잠시 동안’ 내가 수행해야 하는 주된 임무는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가오는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 보이고, 하느님의 날 새벽녘의 서광을 이야기하며,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표징을 증언하는 일이다. 나는 이 덧없는 세상을 두고 불평하기보다 일시적인 것 가운데 맞닥뜨리는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영원한 것이 드러나고 경축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노년의 향기 l 노인에 대한 이해
풍요로운 노년은 누가 만드는가?
일 년 중 삼분의 일 가량을 일본 도쿄(東京)에서 지내다보니 한국과 일본의 사회, 문화,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비교되어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일본이 한국보다 선진국이고 의식수준이 높고 질서가 잘 잡혀있다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습니다만, 여행이나 잠깐 동안의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이곳에서 생활하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음을 자주 목격합니다. 올 7월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버스 노약자석에 앉아있던 남자 고등학생에게 60세 된 여성노인이 왜 그 자리에 앉아있냐고 물었답니다. 귀찮게 왜 그러냐고 학생이 되받아치는 순간, 분에 못 이긴 그 노인이 학생의 뺨을 때리고 급기야 뾰족한 우산 끝으로 코를 찔러 전치 4주의 부상을 입히고 달아나다 붙잡혔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동네 꼬마가 들고양이를 따라 다니는 것을 괴롭히는 것으로 착각한 80대 남자노인이 꼬마 얼굴을 손으로 비틀어 아이 엄마가 경찰에 신고하여 연행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인자하고 지혜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한국식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할 때마다, 젊은 방청객들은 너무도 놀랍다는 듯 소리를 지릅니다. 이른바 연령에 따른 세대차를,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적인 사실만 가지고 실감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회가 노인에 대한 지원과 배려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어떤 사람으로 성숙해가고 있는가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지낼 때는 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빠짐없이 가는 편이기에 이번에도 국립신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놀라운 탄식이 이어진 것은, 평일임에도 표를 구입한 후 30분 정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할 만큼 길게 늘어선 관람객의 수만이 아니라, 그 대부분이 50대 이후의 중장년 및 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노인 할인도 없고 관람료가 1인당 1,500엔(한화 약21,000원)이나 되는데도 관내를 가득 메운 그들을 보면서, ‘아! 이래서 선진국이구나!’를 실감합니다. 국가 경제력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노인층 역시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세대라는 점에서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노인들은 풍요로운 노년을 국가나 지방 정부에만 맡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스크랩해온 전시회 기사를 읽으면서 함께 온 친구나 가족들과 소곤거리며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 예술 감상을 노년의 풍요로움 중 일부로 즐길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노후 생활을 국가나 사회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너무 믿고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국가나 사회가 태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결국 자신의 인생을 가장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며,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풍요롭게 가꾸어나가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삶의 만족을 본인 스스로 찾아가야 함을, 일본의 번화가 롯폰기(六本木)에 위치한 국립신미술관에서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노인사목연구위원 이경희(세라피나)
●● 이달의 성가
가톨릭 성가 138번
만왕의 왕
부활시기 중에 자주 불리는 곡 중의 하나가 바로 138번 ‘만왕의 왕’입니다. 이 노래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에 생긴 곡입니다. 당시 우리 가톨릭교회는 전례를 거행할 때 주로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안 성가나 다성음악을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다성음악을 훈련받은 전문 합창단이 노래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들은 일반 신자들이 노래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특별히 칼빈은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켜 전례나 집회에 참여하는 신자 대중이 성경의 시편을 자기들 언어로 함께 노래하도록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즉 특별한 박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그레고리안 성가를 박자있는 곡으로 바꾸거나 일반 세속곡의 선율을 따와서 거기에 시편을 가사로 집어넣거나 혹은 새로 선율을 만들어서 시편 가사를 붙이는 시도를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이 함께 노래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는 프랑스와 스위스 제네바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는데, 이를 바탕으로 1533년부터 1543년 사이에 시편 가사를 지닌 성가들이 여럿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가들을 한데 묶은 성가집을 ‘Genevan Psalter(제네바의 노래집)’이라 부릅니다. 최종적으로 150편의 시편이 집대성되어 완간된 것은 1562년의 일입니다. 이렇게 시편에 선율을 붙인 성가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 중 하나가 있는데, ‘Old 100th’라는 노래입니다. 이 곡은 1551년에 나온 ‘제네바의 노래집’ 2판에 처음 수록되었고, 음악가였던 부르주아(Bourgeois)가 이 선율을 써 넣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가사는 본래 시편 134편의 내용이었지만, 윌리엄 케스(William Kethe)라는 이가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라는 제목으로 시편 100편의 가사를 붙이면서 ‘Old 100th’로 알려지게 됩니다. 물론 이 두 시편은 모두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성가집에는 클라우디오 구디멜(Claudio Goudimel)이 작곡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는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라 화음을 넣어 편곡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선율을 4성부로뿐만 아니라 다성음악적으로도 상당히 다양하게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구디멜은 르네상스 시기의 프랑스 작곡가인데, 1549년에 파리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한 사람으로 본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1557년에 메츠로 이사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합니다. 그후 리옹에 자리를 잡았지만 1572년에 파리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칼빈파에 대한 대학살 사건 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 대학살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프랑스의 종교전쟁 중 가톨릭에 의해 적게는 5천 명에서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정되는 ‘휴그노(프랑스와 제네바의 칼빈파 신도)’들이 학살당한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사건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성가가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965년에 나온 성공회 성가집이며(우리 성가집에는 3/4박자인 반면 성공회 성가집에서는 2/4박자로 나타납니다), 1956년에 나온 정선 가톨릭 성가집에는 바흐의 코랄 편곡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 박자 편곡과 가사는 누가 붙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던 이가 손을 보았던 성가가 오늘날 우리 가톨릭 성가집에 실려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보입니다만,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섬기는 형제적 입장에서 이 성가는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철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 문화산책 l 미움이 그친 바로 그순간
미움이 그친 바로 그순간
예수회 송봉모 신부가 펴낸 다시 행복해지기 위한 용서!
나는 이 책을 평생의 직업이었던 의사의 이름으로 당신의 육신을 위해 추천하고, 외로운 영혼을 갈구하는 시인의 양심으로 당신에게 내민다. 이 책은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심성에 대한 정확한 표현과 설득력 있는 혜안으로 당신을 안아주면서 조용히 용서의 기적과 치유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마종기 노렌조(시인ㆍ의사)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요? 우리는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성서와 인간> 시리즈 첫 권으로 1998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36쇄를 펴낸 스테디셀러 「상처와 용서」의 개정증보판으로, 용서에 관련된 주제를 추가·보충·심화하여 하느님과 이웃은 물론 자기 자신과 하나 되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저자는 성서학을 토대로 한 통찰, 심리치료와 개인 성찰, 사목자로서 상처 받은 이들을 만나 상담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체득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정신치료를 토대로 ‘용서’ 문제의 전문가답게 더욱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직관적으로 글을 풀어갑니다. 이 책은 일상 가운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법을 훈련하고 실천하도록 초대합니다.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영적 혜안을 주리라 믿습니다.
구입문의 : 02)944-0944 또는 바오로딸 인터넷 서점 (http://www.pauline.or.kr)
송봉모 지음 / 연제식 그림 / 232쪽 / 8,000원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
보편공의회란 무엇인가?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역사상 맨 마지막에 있었던 보편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입니다. 그렇다면 보편 공의회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초대 교회에서부터 교회의 심각하고 큰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의 교부들이 모여 논의했던 회의를 가리켜 ‘보편 공의회’, 또는 ‘세계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는 동방과 서방이 함께 모여 회의를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세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들이란 주로 교리상의 문제들이었습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보통 종교의 3대 요소로서 교리(敎理), 예식(禮式), 조직(組織)의 세 가지를 꼽습니다. 즉, 주요한 세계 종교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그 종교가 추구하는 믿음의 내용, 둘째로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예식적 행위, 셋째로 그 종교를 이루어나가는 인간들의 조직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근간(根幹)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종교가 발전하는 세 단계를 통하여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종교가 발전하는 세 단계란 ‘원체험’, ‘증언’, 그리고 ‘역사화’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원체험(源體驗)’의 단계는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여, 최초의 추종자인 사도들에게 주어진 근원적(根源的) 체험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사실, 신약성경 전체가 이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변화되어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만방으로 나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의 ‘증언’(證言) 단계입니다. 내가 체험한 것이 너무도 소중하고 강렬하기에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이 시기에는 이렇듯이 증언되는 새로운 메시지가 기존의 가치체계와 갈등을 빚기에 박해를 받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도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던 유다교의 기존 가치체계, 그리고 황제를 신격화(神格化)하려는 로마제국의 가치체계와 충돌하면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순교자(殉敎者)’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의 어원이 바로 희랍어의 ‘증언(μαρτ?ριον)’이라는 사실에서, 순교의 본질과 핵심은 곧 ‘증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귀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내 생명을 바쳐서까지 증언하는 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위협은 외부의 박해뿐만이 아니라 내부의 거짓된 증언으로부터도 오게 됩니다. 즉, 무엇이 정통(正統, orthodoxy)이고 무엇이 이단(異端, heresy)인지의 식별 작업이 또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원 후 2-3세기의 시기에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바로 이러한 교회 내부와 외부의 위협들에 각기 대항하여 교회의 정통 신앙교리를 수호하고자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새로운 메시지와 가치관이 점점 사람들부터 공감을 얻고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키게 되면, 어느 순간 외부로부터 사회적인 공인을 받게 됩니다. 서기 313년에 로마제국의 대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선포한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4세기 이후의 시기는 그동안 피 흘려 증언하던 메시지를 후대에도 전하기 위한 조직화, 체계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세 번째의 ‘역사화(歷史化)’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정통과 이단의 싸움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인 교리(敎理)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한 믿음의 신조를 바로 ‘교의(Dogma)’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4세기부터 여러 차례의 보편 공의회들이 열리게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메시지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들이 점차 체계적으로 정립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역시 이 단계에 이르러 체계화된 예식을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전례(典禮, Liturgia)’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종교를 신봉하는 인간들의 조직체 역시 이 단계에서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교의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ia)’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렇듯이 종교의 3대 요소가 각기 조직화, 체계화되어 ‘역사화’ 단계에 진입하는 것은 바로 종교의 핵심인 ‘원체험’에 관한 ‘증언’을 역사 안에서 후대에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편 공의회는 주로 믿을 교리에 관한 역사화 작업을 했지만, 전례나 교계제도 등 교회 문제 전반을 폭넓게 다루며 신앙생활의 보편적 역사화 작업을 이루었습니다. 초세기의 보편 공의회들 중 특히 중요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I),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 그리고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 등 네 차례의 첫 공의회들입니다.
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주요 참고도서 : 박준양,‘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7, 12-18쪽.
●● 기획특집 l 교황님과 묵주기도
10월은 ‘묵주기도 성월’로 개인과 가정성화,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입니다. 10월이 묵주기도 성월로 지정된 데에는 ‘레판토 해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71년 10월 7일, 객관적으로 절대적 열세였던 그리스도교 동맹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 함대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전쟁이 바로 ‘레판토 해전’입니다. 이 승리를 계기로 이슬람 세력의 서진(西進)이 중단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전쟁 후 투르크의 술탄(왕)이 “우리가 진 것은 유럽의 함대 때문이 아니라 교황의 기도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말은 이 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 전쟁 때 교황 비오 5세께서 바치신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로 승리를 거둔 레판토 해전의 날(10월 7일)을 기념하여 교황 비오 5세께서는 이 날을 묵주기도의 기념일로 정하셨습니다. 그 후 여러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셨고,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slatus Officio)’을 발표하시며, 묵주기도는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는 드높은 선언을 하시고 10월 전체를 “묵주기도의 성월”로 정하셨습니다.
최근의 교황님들 중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회하는 복자 교황 요한 23세는 묵주기도를 당신 사도직 수행의 동반자로 삼으셨으며, 그 후임 바오로 6세께서는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묵주기도의 복음적 특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하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묵주기도를 거듭 강조하셨던 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신지 두 주도 안 되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그 단순함과 심오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직무 25년을 시작하면서 2002년 10월 16일,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를 발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말씀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며, 저의 베드로 직무를 성모님의 보호에 맡겨 드립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하여 우리도 교황님들처럼 성모님께 의탁하며 묵주기도로 많은 위안과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사목국 교육안내
정진석 추기경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에서’,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 독후감 공모
● 응모자격
(남성/여성)
● 응모형식
A4용지 3매 분량(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 접수마감
2010년 11월 21일(그리스도왕 대축일)
● 발표 및 공고
2010년 11월 28일(대림 제1주일)
● 시상내역
대상(1명) - 상장 및 지원금 50만원
최우수상(1명) - 상장 및 지원금 30만원
우수상(3명) - 상장 및 지원금 20만원
장려상(6명) - 상장 및 지원금 10만원
구역(반) 활성화 우수 사례공모 … 12월 19일까지
● 응모자격 서울대교구 본당 구역장·반장 (남성/여성, 경력 2년 이상) ● 응모형식 A4용지 5매 분량(200자 원고지 25매 내외) ● 접수마감 2010년 12월 19일(대림 제4주일) |
● 발표 및 공고 2010년 12월 25일(예수 성탄 대축일) ● 시상내역 대상(남녀 각1명)-상장 및 지원금 50만원 최우수상(남녀각1명)-상장및지원금 30만원 우수상(6명) - 상장 및 지원금 20만원 장려상(20명) : 상장 및 지원금 10만원 |
보내실 곳 : 100-809 서울시 중구 명동2가 1-5 교구청 별관 2층 사목국 일반교육부 또는 guban@seoul.catholic.or.kr (※연락처 기재 바람) 문의 : 727-2062~3(사목국 일반교육부) ※ 응모된 독후감은 반환되지 않으며, 수상 작품에 대한 저작권은 사목국에 귀속됩니다. |
사목국 일반교육부
■ 10월 구역(반)장 월례연수
주제 : 홍보는 또 하나의 선교
10월 |
오전 10:30 |
오후 2:00 |
12일(화) |
고척동 |
연희동 |
13일(수) |
|
흑석동, (중앙동) |
14일(목) |
서초동(10:00) |
혜화동 |
15일(금) |
창 동 |
오금동(2:30) |
18일(월) |
(불광동) |
|
19일(화) |
이문동 |
명일동 |
20일(수) |
구의동 |
역삼동 |
21일(목) |
대방동 |
등촌1동 |
22일(금) |
목 동 |
|
※ 명동(가톨릭회관)에서는 월례연수가 없습니다.
문 의 : 727-2062~3
■ 구역반장학교 3단계
대 상 : 구역장·반장학교 2단계를 수료한 구역장·반장
일 시:14기 10월 12일(화)-13일(수) 13:00~17:00,
14일(목) 13:00~17:00
15기 10월 20일(수)-21일(목) 13:00~17:00,
22일(금) 13:00~15:00
장 소 : 14기 대방동 성당/15기 혜화동 성당
교육비: 20,000원 (접수마감 10/5)
문 의 : 727-2062~3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
■ 선교대회
대 상 : 선교에 관심 있는 신자
내 용 : 선교 체험 사례 발표
일 시 : 10월 9일(토) 14:00~17:30
장 소 : 명동성당 꼬스트홀 (참가비 없음)
문 의 : 727-2065~6
■ ‘함께하는 여정’ 교육 3단계
대 상 : 함께하는 여정 2단계 수료자
날 짜 : 10월 28일-11월 18일(매주 목, 4주간)
시 간 : 19:30~21:3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강당
교육비 : 25,000원 (접수마감 10/20)
문 의 : 727-2065~6
사목국 기획실
■ 2011년 서울대교구 사목지침 설명회
대 상 : 본당 사목회장, 부회장
일 시 : 10월 23일(토) 15:00~17:0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강당
참가비 : 7,000원 (접수마감 10/15) - 2011년 사목지침서 포함
문 의 : 727-2132
사목국 노인사목부
■ 제23회 노인의 날 경축행사
대 상 : 연합회소속 본당 노인대학 학생및봉사자
일 시 : 10월 5일(화) 10:00~16:00
장 소 : 월드컵공원 평화의공원내 평화잔디광장
참가비 : 5,000원 (노인대학 봉사자 포함)
문 의 : 765-8456 (노인대학연합회)
■ 노인대학 봉사자 월례교육
대 상 : 연합회 소속 본당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자
일 시 : 10월 12일(화) 10:00~13:00
장 소 : 우리은행 본점 4층 대강당
교육비 : 7,000원
문 의 : 765-8456 (노인대학연합회)
■ 어르신 인문학 아카데미(3기)
대상 : 55세 이상 서울시민 (장소당 60명)
내용 : 계획적이고 행복한 노년기를 보내기 위한 노년준비교육
일시 : 11월 9일-12월 28일(매주 화, 목) 15:00~17:00
장소 : 4,5,8,10,12,13관악지구 소속 본당
교육비 : 80,000원
(본인부담 10,000원, 서울시지원 70,000원)
문의 : 765-8458 (사단법인 서울시니어아카데미)
사목국 가정사목부
■ 가정성화 생명수호 월례특강 및 미사
주 제 : 죽음을 살아가기-사랑하기
일 시 : 10월 5일(화) 13:00~16:30
장 소 : 가톨릭회관 2층 강당
준비물 : 필기도구, 미사준비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낙태치유 프로그램 및 월례미사
대 상 : 낙태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
내 용 : 생명의 소중함, 화해 및 치유 프로그램, 미사
일 시 : 10월 12일(화) 13:00~16:30
장 소 : 서울대교구청 별관 6층 소성당
준비물 : 필기도구, 미사준비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79차, 80차 약혼자주말
대 상 : 예비부부, 1년 미만 신혼부부
내 용 :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프로그램
일 시 : 79차 10월 8일(금) 19:00 ~ 10일(일) 18:00, 2박 3일
80차 10월 22일(금) ~ 24일(일), 2박 3일
장 소 : 79차 신길동 살레시오 회관
80차 장충동 분도 회관
참가비 : 240,000원/커플
문 의 : 727-2069 (www.ceekorea.or.kr)
●● 문화산책 l 산티아고 가는 길
은총의 길 위에서 나와 마주하다.
산티아고 가는 길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3대 성지로도 잘 알려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최근 몇 년간 이에 관한 책들이 인기리에 출간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도 언뜻 보면 다른 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이 책은 단순한 순례기가 아니라 저자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영적 여정기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듯 생생하게 그려 낸 저자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에 어느새 동화되어 우리 역시 산티아고 순례 길에 오르는 순례자가 됩니다. 그리고 저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순례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자는 그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고민과 우정을 나누며 진정한 순례자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이 길에 오른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주님께 묻고 자신에게 물으며 걸어 나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800여 킬로미터의 대장정의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한 저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순례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피니스테레까지 그 여정을 이어 갑니다. 이 순례로 한 뼘 성숙해진 저자는 또 다른 세상에서 진정 나를 마주하는 통로인 산티아고 순례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값진 삶의 선물들에 더 깊이 감사하고 사랑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구입문의 : 070-8233-8221 또는 가톨릭출판사 인터넷 서점 (www.catholicbook.kr)
●● 성화에 담긴 영성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아담의 창조 (The Creation of Adam, 1508-151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축복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4년에 걸쳐서 바티칸의 시스티나 소성당에 그렸던 천장화의 한 부분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조물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그 어떤 작가의 작품보다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막 깨어난 몽롱한 상태에서 힘없이 한쪽 팔을 내밀고 있는 아담, 그리고 그의 손가락을 통해 생명을 불어넣어 주려고 힘 있게 뻗은 하느님의 손길... 닿을 듯하면서 아직 닿지 않은 두 손가락... 이렇게 하느님의 손에서 아담의 둘째손가락으로, 마치 전류가 흐르듯이 새 생명이 전달되고 있는 장면은 신의 전지전능함으로 완성된 인간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을 작품 중심에 놓은 놀라운 구성과 완벽한 인체 묘사, 그리고 신비로운 색채까지.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이 그림은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완성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닿을 듯한 하느님의 손길과 아담의 손가락, 하느님의 눈빛과 아담의 눈빛, 그 속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인간의 존엄함이 샘솟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은 참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아 너는 참으로 복되다.”
지영현 신부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담당)
중앙동성당 제대에서 바라본 내부 전경
묵주기도 성월 기도문
○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