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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종 합 자 료 스크랩 영혼 , 유체이탈의 실상과 도가에 해탈, 기독교의 들림에 대하여 ~~
효 자 별 추천 0 조회 63 10.09.05 10: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몇년전 다음카페 유체이탈관련 카페에 가입한일이 있는데 수년만에 심심해서 들어가 봤다가 호기심을 돋구는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저는 이 글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냥 읽을 수 밖에요...

제블로그 친구분에 글에 신들린사람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기에 우리모두 유체이탈과

죽음뒤에 는 우리에 정은 과연 살아있는것인지 ,.수만년이네로 , 풀수없는 이 난제를

따스한 봄날 , 심도있게 깨어나는 기분으로 공부하고자 , 올려봅니다   ~

 

너무 길어서 ,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

 

아쉬웁게도 , 필자에 필명이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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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이탈의 실상과 실행


책머리에...

내 생각과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망설이다가 수년의 세월이 또 흘러갔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순간순간 발목을 잡곤 했다.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분들 중에는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함구하고 있는데,

내 주제에 뭔가 안다고 떠드는 것이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주제넘기도 하고...그래서 더더욱 망설였고, 늦어졌다.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결국 나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족함을 알면서도 필을 들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깨우치지 못한 것이 태산과도 같다.

인간이 완성되기까지 일만 가지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

필자의 것은 하나도 채 못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필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구실을 준 것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중에서

유체이탈(遺體離脫)에 관하여 올바르게 씌어진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간혹 언급이 되어 있는 것들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대부분 이었고,

외국의 서적에서 인용하거나 베껴 쓴 외국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것들은 공연한 호기심만 자극할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내용들이었다.

그러한 정보는 바른 길을 찾는 이들에게는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십 여 년 전에(70년대 초) 우연히 유체이탈을 경험하였고,

십 여 년 전(87년도)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이탈을 해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생(生)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의문들이 하나씩 껍질을 벗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필자가 겪었던 의문과 고통과 유사한 이유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먼길을 빙빙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적도 많았고, 두려움과 고통,

나 자신의 확신이 의심스러워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나는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와 비슷한 경로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부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철저하게 필자가 겪은 경험의 산물이다.

과장하거나, 거짓을 사실인양 포장하지도 않았다.

남의 경험이나 이야기를 도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를 자랑 하고자 쓴 것도 아니니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과소평가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었으면 주었으면 좋겠다.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그 산을 찾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내문을 한 장 써놓고 지나갔다고 생각 해주었으면 족하다.   

바른 길을 찾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유체이탈의 실행 방법만을 기술하지 않고 잡다한 얘기가 서두에 많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읽어주면 더더욱 고마우리라.


한가지 정말 죄송스러운 것은

필자의 문장력이 미천하여 독자들이 읽는데 불편함이다.


         





목        차


제1부 유체이탈이란 무엇인가?

제1장 유체이탈의 정의......................................6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10

제3장 귀신(鬼神)은 있는가? .............................64

제4장 전생(前生)과 윤회(輪回)...........................72

<잡담>기독교도와의 설전..................................81


제2부 유체 이탈의 실행

제1장 실행에 앞서..........................................99

제2장 가위눌림과 귀접(鬼接)...........................102

제3장 유체이탈의 실행방법.............................113

<여담>

꿈 이야기.....................................................119

안식향 태우는 방법........................................121

성서의 역사...................................................121

유체 이탈 후 실험..........................................122

후기........................................................    123














제1부 .유체이탈 이란 무엇인가?

제 1장. 유체이탈의 정의

국어 사전에 의하면 유체(遺體)란 “부모님이 물려준 몸”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유체(遺體)이탈이란 그 몸(유체)에서 빠져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유체(幽體)라고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지만, 유(幽)는 몸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거기에 체(體)를 붙인다는 것은 당연히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체 이탈이란 죽은 사람이 아닌 산(生) 사람이 임의로 육신을 이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육신을 두고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통상, 그것을 “영혼(靈魂)”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부른다.

또, 그것은 방법에 따라서 양신(陽) 이탈과 음신(陰) 이탈로 분류된다.


양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기(氣)를 운행하여 하단전(下丹田)에 축기(縮氣)하고, 

소주천과 대주천이라는 과정을 지나서 수행(修行)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신의 내부에 응집되어 있는 양기(陽氣)를 뽑아내어 인간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양신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갓난아이처럼 작은데, 아이를 키우듯 양기를 더해가면서 훈련을 시키며 키운다고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양신을 마치 사람 키우듯 정성스럽게 키워 성인 정도로 성장하면, 그때까지 몸담았던 낡은 육신을 태워 없애버리고 자신의 혼(魂)을 양신으로 옮겨 담는다.

양신은 찰나(刹那)에 수 백리를 오고 갈 수 있으며,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양신이탈이다.

다른 말로는“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도 한다.

신선(神仙)으로 화(化)한 것이다.

즉, 양신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신선(神仙)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 두 번의 삶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들은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삶들을 모아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변변한 저서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누구누구는 신선이 되었다하더라...하는 이야기만 전해져 올뿐이다.


필자도 양신(陽身) 이탈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책에서 읽은 정도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양해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음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이 육신이란 옷을 벗어놓고 잠깐 동안 혼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

일부 선도(仙道)인들 중에는 음신 이탈을 위험한 행위로 생각하여 금기 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같이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이 이탈했다가 자신의 육체를 찾아가지 못 한다거나

이탈 중에 다른 혼이 자신의 육신을 차지하고 비켜 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잡아 천회가 넘는 이탈을 실행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그리하여 음신 이탈을 위험한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행(行)하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음신 이탈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종교에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게 하며, 신의 뜻을 바르게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더 확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고,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쓴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되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이다. 


음신 이탈도 공(功)이 깊으면  팔백 겁(怯)을 환생하지 않고  천상(天上)에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겁(劫)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의 시간이다.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다시 천지개벽하여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 한 겁이다.

수 만 년이 될지, 수십억 년이 될지 아무도 짐작 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긴 시간이 팔백 번 되풀이 할 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점으로는 영원(永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음신이탈도 공이 깊으면 이렇게 긴(?) 기간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신이탈이 위험하거나 나쁜 행위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이치를 알아내는데 있어서 삶이 윤회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특히 개신교)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두어진 것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환생(幻生), 전생(前生) 이야기만 나오면 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왜?

삶이란 단 한번뿐이며 그 삶을 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배워 왔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취급받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열기란 참으로 어렵다.

윤회를 얘기하고 있는 불교를 우상 숭배 집단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삶이 윤회(輪回) 한다는 것-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직자(聖職者)들도 더러 있다.


그러면 현재의 기독교에서는 왜 윤회를 부정할까?

그것을 알고 싶으면 교회의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아도 그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윤회의 법칙을 배제하면 성서(특히 신약부분)조차 해석이 올바르게 되지 않거나 상당히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으로 수련하고 유체 이탈을 실행한다면

필자가 헛소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필자의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믿어 주기만 해도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히 천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믿음이란 유리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과도 같다.

너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함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니

참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다.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것이다.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目的)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음, 즉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정신은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간다.

정신이 바로 영혼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 상태를 보면 영혼의 상태도 짐작 할 수 있지만, 필설로 영혼을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탈을 실행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겠지만,....


보통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것이다.

지식(知識), 학식(學識), 교양(敎養), 재산(財産), 지위(地位), 경력(經歷), 경험(經驗), 외모(外貌) 등이 포함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평가 기준의 차이가 있고,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재물은 물론이고 지식이나 학식 등과 같이 기억 속에 있던 것조차 모두 사라진다.

거의 대부분 본능(本能)만 남게 된다.


음신이탈을 하면 어떤 상태인가?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음신이탈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죽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가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뇌에 기록된 지식이나 학식 따위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만 남는다.

흔히들 공(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헛것이 많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를 중요시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똑같은 일도 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창녀(娼女)도 공을 쌓을 수 있지만

성직자(聖職者)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공을 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부자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 칭송을 받기 위해서 수십, 수 백 억의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나 사찰을 짓는 거창한 행위가,

가난한 사람이 어떤 배고픈 이에게 자신의 밥 한 그릇을 양보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쪽에서는 신(神)과 거래를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특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저쪽(저승)에 가보면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들 교회에서의 봉사활동(奉仕活動)이나 불도(佛徒)들의 방생(放生)하는 행위도 본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면, 재물을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하지 마라는 것인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행위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이 쌓였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고,

그런 행위가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에 할뿐이지,

남에게 칭송 받기 위해서나 신 앞에서 당당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 한 일은 아니니 자신에게 가르치면 점차 가능 해 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다.

왜 그분은 그렇게 가르쳤을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 깊은 뜻도 모르면서 함부로 정의를 내린다.


그 말씀의 뜻은 스스로 자신 안에서 겸손해져 그런 행위 자체에 스스로 무게를 두지 않고 초연해지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다.

타인을 의식한다면 이미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공(功)과는 별개의 경지를 가르치고 있는 말이다.

아주 깊은 수양의 경지로 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이다.

   

“왼손”은 누구요 “바른손”은 누구인가?

흔히들 왼손은 자신이요 바른손은 타인으로 해석한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대부분 그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왼손과 바른손이 모두 한 몸에 붙어있듯이 왼손도 자신이요 바른손도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헛소리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도 있고,

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느낌이 잡혔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설명을 해도  무슨 얘기인지지 모르는 사람은 한동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될 것이다.


그분은 또,

“부자(富者)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였을까?

다른 말로 바꾸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宣言)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양심적(良心的)으로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모두 부러워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넓고 호화로운 집, 소리 없이 굴러가는 서민들의 집보다 몇 배나 비싼 자동차, 수 천 만원을 호가 하는 골프 회원권, 조용한 호숫가의 별장,

초호화 아파트, 외산 자재로 치장한 고급 빌라.

이런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탈법, 불법을 하지 않고도 과연 가능할까?

하긴, 우리나라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면 남는 것이 별로 없겠지만...


권모술수 없이,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채지 않고도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까?


요즈음은 노태우 씨의 비자금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매스컴의 태도변화는 나날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야당의 태도 또한 주목받을 만 하다.

자신들은 진정 결백한거 같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 그들 대부분이

사후(死後)에는 비슷한 대접을 받거나  오히려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을 텐데.


자의든 타의든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자신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死後)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감출 수도 있고, 거짓으로 참회 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지나친 재물욕, 권력욕은 모두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물에 욕심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권력욕(權力慾)이 없는 사람이 권좌(權座)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온갖 야비하고 나쁜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때로는 남을 파멸시키기도 해야 하고, 살인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양심을 외면한 채 살아가다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허전해지고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회사업에도 적당히 참여하고, 절에 나가 불공도 드리고

큰돈을 헌납하여 절도 짓고 불상(佛像)도 세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유사한 행위를 한다.

교회에서는 대환영이다.

온갖 칭송과 찬사가 쏟아진다.


어떤 작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속여가면서 더 많이 짜내려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은 자는 마치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부자들은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니 돈으로 천국을 사려 할 수밖에 없고,

종교인(宗敎人)들은 그런 약점을 아주 잘 이용한다.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 할 사람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다.

나중에 돈으로 때우면 다 되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이미 이 천년 전에 우리들에게 경고(警告)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 권력자와 적당히 야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한 종교인들은 어떻게 될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필자는 확실히 알고 있다.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 있게 여러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말을 쉽게 믿을 것이요, 어떤 이는 반신반의(半信半疑) 하겠고, 어떤 이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말을 믿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쉽게 남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괜찮다 싶은 것을 그대로 믿고, 무작정 따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휴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장본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가를 더 지불해야하고 잘못하면 죽어서까지 연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 중에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분들은

반드시 필자의 얘기를 의심(疑心)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자 할 테니까.

확인 하고자 하는 과정이 유체이탈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 그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일이다.

그저 남의 일일뿐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 중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안다는 것은 지식(知識)의 수준이요 거품과 같은 것이다.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를 묻는 사람이 가끔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면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삼학년부터 시작했지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가장 기본적인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외우는 아이도 있고, 더디게 외우는 아이도 있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결국 거의 다 외우게 된다.


이때,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지, 구구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월이 가다보면 왜 삼삼은 구(3?3=9)가되는지,

팔육 사십팔(8?6=48)이 되는지 스스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또, 그렇게 달달 외우게 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 그 근본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스스로 그것을 깨우치고 난 다음에는 누가 그것을 흔들어 깨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이 배워서 아는 지식의 수준과는 엄연하게 다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수행을 하다보면 폭탄에 의해 댐이 무너지듯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러한 경지를 득도(得道)라고

한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득도 했다고 자처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납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의로 유체 이탈이 가능했던 초기시절에 나의 머리 속에는 아주 작은

전구(電球)가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하나씩, 때로는 두세 개 씩 반짝 하고 켜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다 켜지는 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득도의 경지인 것일까.

그 많은 불을 언제나 켤 수 있을지 나 자신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또, 얼마나 많은 양이 들어있는지 셈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마다 목적과 가치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게 윤회를 거듭했기 때문에 자연히 수준도 다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켜야 할 전구의 숫자도 각각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밝히려고 하는 자신의 노력과 목적이다.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바르고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환하게 모두 밝힐 날이 올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각인(刻印) 되는 것이다.

지식(知識)에는 스승이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에는 스승이 없다.

깨달음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지식의 바탕위에 부단한 자신의 노력과 올바른 목적이 있다면

한 가지씩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실천에 옮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있다면 그 공(功)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필자에게 공을 돌리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한 일이다.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간적인 아첨에 불과하다.

잘되었든 잘못되었든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사교(邪敎)나 사이비(似而非)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자신을 망친 사람은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타인들을 감언이설로 현혹한 사람들도 그에 상응(相應)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저승과 이승의 법칙이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이쪽에서는 속임수가 일시적으로 통할 수 있지만, 저쪽에선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쪽에서는 법의 약점을 통해서 양심의 법을 피해 나가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쪽에선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 두환 씨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나름대로 당위성(當爲性)을 주장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양심(良心)의 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양심은 신(神)이 내린 우주(宇宙)만물(萬物)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그들 밑에서 그들이 시킨 이상으로 과잉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장교, 사병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쪽에서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저지른 만큼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당사자들은 스스로 그 방법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을 알아내면 이미 반 이상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어떤 부분이 생각난다.

전쟁 도중 어느 병사가 적국의 한 병사를 사살했다.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노모(老母)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병사는 자신이 사살했던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는 전쟁터에서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인 병사를 대신하여 노모를 모신다는 그런 이야기다.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어린 필자도 제법 감동을 받았나보다.


양심(良心)의 법을 따르면 이승에서의 죄-그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화(禍)가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삶이 단 한번뿐이라면, 그 한번의 삶을 끝으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生)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 우주(宇宙)의 법칙이다.


필자는 일백 네 번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기에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정신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죽어 볼 수 없어도 나의 후손들이 살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 전생(前生)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존재(存在)한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것을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현세에서의 내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나의 수준이

내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다음 생을 만들어 가게 된다.


예수께서도 말씀한 적이 있지만, 신(神)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아래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맺고, 내가 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神)은 참으로 공평한 존재(存在)이시다.

아첨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을 부정했던 사람들에게도 절대 불이익(不利益)을 주지 않는다.

자신을 무지의 수렁으로 몰고 간 책임을 스스로 질뿐이다.

어제는 텔레비전에서 학원 폭력에 관한 프로그램 방영이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폭력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침소봉대(針小棒大) 했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하고 행태가 고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불과 몇 년 후 모두들 후회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일, 남의 돈을 빼앗아 유흥장에서 낭비한 일,

용기를 자랑하느라고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만들고 담뱃불로 지진 자국들.

그 모든 행위가 뼈아프게 후회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을 더럽힌 것, 자신의 몸에 흉터를 남긴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인생에서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인이 되어 처, 자식을 거느리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가족에게까지 물려준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혼의 타락- 양심의 법을 저버리는 일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권력욕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과,

그 명령에 따르던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 모두

각자 자신이 저지른 무게만큼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예외는 없다.

어린아이들의 조그마한 폭력집단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폭력을 행사한 그들이나 다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남의 과오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악용(惡用)한 사람도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 하늘의 법(法)이요,

우주의 법칙(法則)이요, 양심의 법이다.


이 법칙을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깊이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하늘의 법은 국가도, 종교도, 종파도 뛰어넘는다.

이승과 저승,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이 하늘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네 인간들도 아집을 버려야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각성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바로 자신들이 하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르게 전할 수 없고, 자신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고 건방진 생각이 자신뿐만 아니라 순진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같던 80년대 초(初).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어느 고급호텔에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성실한 방송매체 덕분에 이름 없는 필자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름 하여 “전 두환 장군과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

종교인들이 알아서 했는지, 깡패(?)들이 겁을 주어 시켰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제법 여러 번 그런 해괴한 장면이 보도되었던 일이 있었다.

화려한 호텔에서 밥상 받아놓고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처, 자식이 보고 있는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도(信徒)들이 모두들 보고 있는데, 용감하게(?) 그런 짓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하느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비싼 기도가 통했는지,

그들의 하나님은 고급 호텔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빌어준 전 두환 장군은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이 하늘의 법칙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 얼마나 준엄한지 모르는 엉터리 목자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불쌍하다.

신의 섭리가 얼마나 공평하고 준엄한지 모르는 자들이 신의 뜻을 가르친단다.

소가 웃을 일이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천년동안 싸우고 죽인다.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같은 조상(아브라함)의 후손인데도 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고,

미개한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이었을까?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부리던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가?

노예 해방을 반대하여 전쟁하던 이들도 모두 기독교도들이었다.


이 승만, 이 기붕, 박 마리아....

박 정희, 전 두환씨와 그를 맹종하던 인물들...

그들 대부분이 불교도나 기독교인이었다고 알고 있다.


불교가 타락했나, 기도교가 타락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정신이 타락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과 가치가 종교적인 양심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권력욕, 재물욕이 양심의 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법- 하늘의 법칙을 외면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그 과오가 두고두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았을 때의 고통은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도 곧 알게 된다.

머지않아 모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후회는 너무 늦다.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찾아내어 치러야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전시적인 종교행사나 치르지 말고, 처절 하리 만큼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길이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심의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뭔데 주제넘게 그런 소릴 하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죽은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고,

그들이 어떤 경로를 가게 되는지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소리다.


필자의 말을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다.

필자는 내 말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직접 알아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육신이 수명을 다 하거나, 병으로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으나

일단 죽으면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영혼이 머무를 집이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물러온 자기의 육신-바로 그것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다.

우리가 죽은 자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것처럼 죽은 자들도 산 자를 볼 수 없다.


음신이탈은 육신으로부터 탈출이기 때문에,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요

건물과 물건들도 죽은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탈을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들을 엿보거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유체 이탈에 관하여 조금씩 언급이 되어있는 책들이 엉터리였고,

영화나 소설 속의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무책임하게 써먹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체이탈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필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마음만 바르게 갖는다면 틀림없이 모두 성공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 보일 터인데 어떻게 필자가

허튼 소리를 하겠는가?


이탈이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죽은 자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절대 이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남들을 훔쳐보거나 간섭 할 수 없다.

이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유체이탈이 아닌 사술(邪術)이나 다른 방법으로 가능한지 모르지만 음신이탈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유체이탈을 하여 세계 각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보고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착각이나 환각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속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전혀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유체이탈이 왜 필요한 것일까?

이탈이 가능하다고 해서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없다.

이탈의 과정을 타인에게 보여줄 방법도 없다.

염력(念力)으로 애꿎은 숟가락을 구부리고 절단 할 수 있거나

염사(염력으로 사진 찍는 것)정도는 할 수 있어야 방송에 출연해서 돈도 벌고 유명해져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인데, 유체이탈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른바 초능력이란 것은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신(神) 내린 사람들 같이 용한 점쟁이 노릇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뿐이다.

한 가지 더 할 수 있다면, 죽어서 제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 떠돌이 영혼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 중에는 자신의 가족 일원이었던 이도 있을 수 있고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람도 있다.

죽어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을 아무리 많이 구제 해 주어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신문에도 나지 않고, 상도 받을 수 없으며,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도 없다.

모두들 산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

단 한 사람만 구해도 영웅이 된다.

구제된 사람도 영웅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때 모두들 보지 않았는가?

안타깝게 죽어간 사람들은 외면당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재물도 생기고 위로도 받고 상도 받는다.


매스컴이나 정치인들은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아주지만

종교인들까지 한 다리 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유명해진 어떤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작업의 여파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는 불쌍하다.

가족들조차 도와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까지도 산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다.

왜?

죽은 자에게서는 그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만 명을 여의도에 모아놓고 멋진 설교로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도 방법을 모르면, 죽어서 갈길 몰라 헤매는 단 한사람을 구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수천, 수 만 명도 구할 수 있다.

그 따위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며 벌 받을 일도 아니니까.

한다고 해서 신(神)으로부터 상 받을 일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이 길을 물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행(行)하면 되는 것이다.

왜?

옳은 일이니까.

필자는 그런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갈길 몰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숱한 양민이 억울하게 죽었고, 몰지각한 일부 군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광주에서도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관계자들의 관리 소홀, 정비 불량으로 인한 교통사고, 건물 붕괴사고,

가스 폭발 등 졸지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급사한 사람들은 한동안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

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한(限)으로 뭉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도 조금만 도와주면 바른 길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바른 마음으로 이탈을 한다면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3년 전쯤에 어떤 여인이 필자를 찾아왔다.

하얀 소복에 젊고 예쁜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턱대고 도와 달라고 했다.


필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나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가?』

『저는 흉악한 무리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고초를 겪는가?』

『그 사람들은 네 명인데 형제간입니다. 저의 집 근처 작은

움막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마을의 양반 집 처녀였는데,

어느 날 그들에게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차례로 저를 욕 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앓다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답니다. 저는 원한에 사무쳐 그 불한당 사형제의 자식들을 모두 태어나자마자 모두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언제 일인가?』

『사 백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해서 당신을 따라다니는가?』

『그놈들이 살았을 때 자식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어서 제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형제가 죽어서까지 뭉쳐 다니면서 저를 찾아다녀요.

복수하려고 말입니다. 괴로워서 미치겠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어째서 그대는 명부(冥府)에 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그런 흉악한 놈들에게 쫓기는가? 』

『저는 죽어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명부에 들 수 없답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면  들어갈 수 있단다.』


그렇게 그녀와 얘기하고 있는 중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그놈들이 벌써 따라왔나 봅니다. 저는 이만 갑니다.』

처녀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고 험상궂은 텁석부리의 장한 네 명이 들이 닥쳤다.

『분명히 이리로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나로선 방도가 없었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해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났다.

그 의문은 얼마 후에 풀렸지만 어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즉시 위로 그분을 찾아 올라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당신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은 결말이 났고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확인해 필요도 느끼지 않았으나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저승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생전에 살았던 곳과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가능한데, 나는 그녀의 이름도 살았던 곳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에나 나올만한 이 이야기는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아빠,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하고 웃었다.

혹자들의 비웃음을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것이다.


여러분 중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참고하라고 썼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찾아다니거나 원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일들이 많이 있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들 가능성도 있다.

당신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잘못하면 당신의 현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일로 인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벌 할 수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限)이다.

한이 맺힌 자는 그 한을 풀려고 한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염(念力)은 엄청나게 강하다.

강한 염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꾸민 얘기들도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事實無根)인 경우는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도 이런 짓을 한다.

그 때문에 흉측한 사건들로 세상이 시끄럽기도 하고

감옥은 언제나 만원이다.


우리가 이승에서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에게 못된 짓을 해서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갚지 못하면 죽어서 까지 갚아야하고

자신이 못 갚으면 후손에게까지 물려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자,

재물을 위해서 남들을 울린 자,

남의 아내를 탐내어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자,

모두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불교에서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그저 해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법칙이다.

우주의 법칙이고, 양심의 법칙이다.

이것을 외면한자들- 우선은 권좌(權座)에도 앉아보고,

재물(財物)도 뿌려보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필자의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 말에 삼대(三代) 부자가 없고, 삼대 가난뱅이도 없다고 했다.

없는 사람을 위로하려고 그냥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나 재벌이나 지존파나 막가파의 젊은이들도 모두 이 법칙을 외면한 대가를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탈 후 당신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을

만날 수가 있다. 모두 죽은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을 구제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 그러한 일들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를 빙자하여 돈을 받는다거나, 기존의 종교 단체 안에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거나 이상한 언행을 하는 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올바른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경우에 그런 방향으로 타락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속지말기 바란다.


당신이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 이탈했을 때에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필자도 제법 오랫동안 착각을 하곤 했다.


몇 년 전 전 죽은 동네친구를 만났었는데 나이도 엇비슷해서

평소에 말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는데, 결국 이혼하고 얼마 후 새 장가를 들었다.

그의 전처가 아니더라도 종교엔 관심이 없었는데,

전처 덕분에 종교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그러한 그를 이탈 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다른 남자 한 명과 같이 어떤 여자들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필자가

불러 세우자 다른 사람들은 가고 이 친구만 마지못해 섰다.

“야! 이 사람 진배(가명) 아닌가? 참으로 오랜만이네.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사 개월이나 지난 후에 들었어.

그래서 장례에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너무 섭섭히 생각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는 이승이 아닐세.

자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야. 사람이 죽으면 제 갈 길로 가야지 왜 헤매고 다니는가? 길을 몰라서 그러면 내가 데려다 주겠네.”

필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그냥 여기서 살 거야.” 그는 짧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여자들을 따라 가고 싶은 것이다.

“잠깐만 내 말을 더 듣고 가게. 지금은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이 싫어질 것이네. 그때에는 내 말대로 하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일세. 그러면 가까운 산(山)으로 올라가 보게. 산 중턱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한 채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을 거두어 주는 곳이지. 그곳까지 가면 자네의 일은 다 한 것이지.

다음의 일은 그 집에서 일하는 이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찾기 힘들면 사람들에게 물어 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 둘 일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집은

모두 예수의 관할 아래 있네. 자네는 살았을 때 무조건 예수쟁이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많아서 그랬고

자네 잘못은 아니니 아무 염려 말고 찾아가게나.

살아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네. 그분은 어느 누구든지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고, 또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도 흔쾌히 용서하여 받아주지.

자네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네.

그분을 만나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잊지 말게.”

필자가 다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라졌다.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먼저 간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여러분들도 그들을 설득하여 죽은 자가 가야할 길을 바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탈을 한 후에 집안을 살펴보면 낯선 사람도 들어와 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더 무서워한다.

무작정 쫓아내지 말고 잘 설득해서 그들이 죽은 자의 길을 가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필자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점점 강인해 졌고, 강해지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점점 강인해져 시시한 귀신 따위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탈 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앞서도 설명을 했다.

그들 중에는 아주 악질적인 종류도 있다.

산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지만.


90년도에 필자는 동대문 종합 시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민방위 훈련을 한다는 방송이 있었기에,

공습경보를 하고 있는 동안 이탈을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경보 10분전에 준비에 들어갔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소등이 되자마자 바로 이탈을 시작했다.

이런 곳(시장)에는 어떤 종류의 망령들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탈된 후 가게에서 나가지 않고 통로를 내다보니

열여섯 이나 열일곱 살쯤 된 여자가 걸어서 내 앞을 지나갔다.

막 지나는 순간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너는 누군데 죽어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런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니?”

필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저씨는 누군데 남의 일에 간섭이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대드는 것이 여간 악종이 아니었다.

그런 부류들은 좋은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어울려 사는 우리들 중에서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더러 있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어떻게 하든지 시비를 걸어 조금만 건드리면 그것을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그런 사람들이다.


말을 더 붙였다가는 필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지경이었다.

“알았다.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네 갈 길로 그냥 가거라.”

필자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녀는 사나운 눈을 흘기며 멀어져 갔다.

좀 넓은 통로에 나서니 죽은 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에게 말을 해보려는 순간 불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려 이탈은 중지되었다.


그날 밤 집에서 이탈을 한 후에 시장으로 다시 갔다.

큰 통로에 가보니 제법 많이 몰려 있었다.

거기서 일장 연설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필자를 따라 나섰다.

스물 댓 명 정도 되었는데, 원해서 가는 이도 있고

남들이 가니 덩달아 따라 나선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아있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를 따라 나섰던 이들은 지금쯤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죄 값을 다 치르고 이미 환생하였는지도 모른다.


87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먼저 떠난 후 이십 년을 외롭게 살다가 떠났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나쁘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만은,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마음씨 착한 여인이었다.

어머니 시신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못난 자식들 모두 용서 하시고 마음 편히 가시오. 

아들 여섯, 딸 하나 어느 누구 하나라도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은 이 없고, 지금도 당신께 걱정을 드리고 있지만,

모두 잊고 떠나시오. 어머니는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아름답게 살다가 부디 윤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드십시오. 잘 가요, 어머니. “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가 몇 달이 지난 후 못 견디게 보고 싶어 졌다.

삼일동안 이탈을 해 보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열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복스럽게 생긴 예쁜 처녀가 찾아왔다.

“너는 누구냐?”

“당신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기에 인도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너는 천사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그렇습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

“3년 되었어요”

“저런, 어쩌다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지?”

“고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안됐구나, 인생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사고로 죽다니...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이런 일은 누가 시키지?”

“위에서 시키는 일이예요.”

“그래...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은 어디냐? 나를 그곳까지 인도 해다오.”

“어머니는 지금 파림촌에 머물고 있어요.”

“파림촌? 앞장서라, 어서 가 보자.”


그녀가 인도하는 먼 길을 따라갔다.

어둡고 음산한 산야를 지나 어느 곳에 당도하니 네거리가

나오고 그곳은 따스한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파림촌 이라는 곳인가?”

그녀는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파림촌 이예요. 그곳에 가시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어 있답니다.”

“왜 너는 갈 수가 없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고 저는 이제 그만 가겠습니다.”

“잠깐, 너를 다시 불러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글쎄요,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살았을 때 너의 성(姓)이 무엇이었지?”

“진씨였어요.”

“그러면 진양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이제 그만 가 보거라.”

그녀는 떠나고 필자는 그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갔다.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탈시간이 끝나고 저절로 육신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재차 이탈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이탈을 하려면 상단전에 기(氣)가 충만해 있어야 하는데,

모두 다 소비하고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 두 시간이상의 이탈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삼십 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녀와의 대화에 너무 많이 시간을 허비해 버린 결과였다.

다음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이탈을 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소리 높여“진양”을 외쳐댔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검정양복의 사나이 두 명이 나타났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을 어머니께 데려다 주려고 왔습니다.”

“진양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갔습니다. 자! 우리들을 따라 오십시오“

어둡고 긴 산야를 넘고 또 넘어 한참동안 그들을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어느 지점에 이르자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왔고

그 끝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엉엉 울다보니 반응이 없었다. 놀라서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니 분명히 어머니이긴 한데 모습이 변해져 있었다.

집에 있던 낡은 처녀 시절의 사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칠십 세의 노인이 죽었는데 처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열일곱 처녀를 중년의 사내가 끌어안았으니 그럴 수밖에.

놀란 마음으로 인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어찌된 일입니까? 노인이 처녀로 변하다니.”

“사람이 죽으면 시간이 감에 따라 연령이 퇴행합니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다시 환생하게 되지요“   

“아버지는 작고한지 이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와 거의 변함이 없었는데, 어째서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처녀처럼 변했습니까?”

“그것은 살았을 때 공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환생(幻生)할 기회를 빨리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살았을 때에 인자하고, 존경 받을만한 인품을 지녔었는데도 별로 변함이 없고, 어머니는 착하기만 했지 별다른 공을 쌓은 것이 없는데, 어찌된 영문입니까?”

“여자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공이 크답니다. 아이를 낳고, 열심히 잘 키우고,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공이 되지요.”

“곧 다시 태어난다니 어디서 어떻게 태어난다는 겁니까?”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려고 합니까?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지금 우리들의 대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환상이나 착각이 아닌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미국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0000 부인입니다.”

“부인이라니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구의 부인이 된다는 것까지 정해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을 겁니다.”

“언제쯤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육십 오세 되면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때가되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필자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나서

숙명(宿命)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부(夫婦), 부모(父母), 자식(子息).

이 관계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로 맺어지는 관계는 서로의 선택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 같지만,

외견상(外見上)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지방에서 저지방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숙명(宿命)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제짝을 찾기 위한 행로라고 할 수가 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왜 부부(夫婦)로 맺어 졌을까?

그것은 업(業)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고 용서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저절로 그냥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면서 하늘을 섬기는 것 보다 오히려 더 우위에 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친 중요한 이유는 용서와 사랑만이 개인의 업을 해소하고 천국 쪽으로 한발 다가 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용서와 사랑이란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사람들이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가르친 용서와 사랑은 인간이 그 대상이지만, 자비심은 인간을 초월하여 초목까지 그 대상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어쩌자고 석가보다 좁은 범위를 선택하여 주셨는가?

그것은 아마 유대민족의 정신적인 낙후(동양에 비해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이 퍼져나갈 경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를 배려한 처사인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석가와 예수를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네 기독교인들은 이해(利害)에 따라 선별하여 사랑하고,

그 사랑마저도 변질시켜버렸다.

과연 누가 그 주역일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알 일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면 파탄이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람을 한(恨) 맺히게 만든다.

한은 또 다시 업으로 남는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그 안에서 다시 잘못을 저질러 형량이 늘어나는 것과 닮은꼴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면 이미 부부로 맺어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답은 이미 알려져 있다.

세상의 부부(夫婦)들이여 이점을 잊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보면 "명부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하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명부(冥府)"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사전(辭典)에 의하면 명부란 “사람이 죽어서 가야 할 곳”, 또는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명부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煉獄)에 해당되는 곳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구천을 떠돈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이 죽어서 가야 할 당연한 길을 거부하고 죽은 자의 세상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헤매는 행위를 말한다. 그들(죽은 자) 나름대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정상적인 행로는 아니다.


유체 이탈 후 처음 맞이하는 장소는 내 집, 내 방이지만, 거기서 또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은 자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망령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탈 후 내가 속한 세상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죽은 자의 세계다. 

왜 그럴까?  왜 현실이 아닐까?

음신이탈은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탈과 동시에 죽은 세계에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세상과 모양이 같아서 현실로 착각하기 쉽다. 필자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것을 알게 되었지만,

독자 여러분께서는 절대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명부에 들기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혼령들과의 대화도 거의 불가능하니 혈연관계가 있다거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명부는 어디 있는가?

현세와 같은 모양의 죽은 자의 세상으로부터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해야 한다. 명부라고 일컫는 곳도 다양한 모양의 넓은 세상이다.

사람들이 죽어서 제 갈 길로 갔으면 대부분 여기에 있다.

먼저 간 혈연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곳곳에 명부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가 있다.

수 없이  방문해 보았는데, 산 중턱쯤에 작은 집이 있고, 죽은 뒤 누구든지  그 집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어느 산이라고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 아주 많이 산재해있다.

그리고 그 집들은 모두 "예수"께서 관장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이탈 후 그곳에서 그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87년이던가,  그곳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필자가 물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사후에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있다고 말하고 있거나 화려하고 웅장한 옥좌에 앉아 계신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제일 낮고, 어둡고 침침한 이런 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다. "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입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이 있지 않느냐." 


그 후 수십 차례 그분을 만나서 얘기도 했고, 불평불만도 털어 보았고, 울면서 하소연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분명하게 안 것은 결코 그분은 인간사에 직접 참견을 하지 않는다는 것- 즉 그분은 인간에게 길흉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수천 년 동안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며,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몰지각한 예수쟁이들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악선전처럼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

그분은 누구든지 환영하고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살았을 때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는 자신 스스로 치르게 된다.

목자의 탈을 쓰고 신도들을 오해와 편견으로 몰아간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그런 인간들에게 현혹되었던 사람들도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만 한다.

이러한 법칙은 현세의 법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무게만큼 대가를 치르고 난 다음에 다시 기회를 준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환생(幻生)이다.


예수의 부활은 환생을 의미한다.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법칙아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종교, 종파, 인종을 뛰어 넘는다.

선택받은 민족도, 선택받은 종교도 없다.

모든 인류가 같은 법칙아래 다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신은 참으로 공평한 분이다.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죄를 짓든, 선행을 하든,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세상에서 맺은 것은 하늘에서도 맺고,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푼다."



이탈을 한 후에 맞게 되는 <죽은 자의 세계>를 벗어나 더 

높은 곳은 자신의 염이 상당히 강해야만 가 볼 수 있다.

명부(冥府)에 해당되는 곳은 별로 어렵지 않게 가볼 수 있으나

천국이라고 하는 곳은 내 힘만으로는 갈 수 없었다.

집중하여 노력하다보면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데려다 주었다.

그곳은 명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안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가치 기준으로 인간들의 사후상태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다. 

이승에서 그럴듯해 보이던 사람도 사후에는 우리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 할 수도 있다.

학식과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던 인물이나,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던 종교 지도자였던 인물도 의외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에서부터 꽤나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하가 되었으며, 스스로 우상화시켰던 인물이 있었다.

P씨는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종파를 부흥시키고,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했다.

한때에는 엄청난 재물과 기업과 사람들을 거느린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고 스스로 그의 교도가 되어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망쳐 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는 죽었고, 그의 교회도 서서히 무너져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이탈 중 우연히 그를 보았다.

기독교적 논리로는 그는 죽어 천국에 가 있거나,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후에는 하느님 옆자리쯤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그에게 사기 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뛰쳐나온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본 사실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사실을 왜곡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파견된 인물이었거나, 어떤 연유로 그쪽의 세력과 결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생전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나쁜 길로 빠져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모두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어둠의 세력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악인, 구제불능의 악인으로 출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고정된 시각으로 인간을 보려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보통의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만한 분별력이 없으며,

선과 악은 힘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힘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필자가 그분에게 물었다.

“저는 천사입니까, 아니면 악마입니까?”

“너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천사와 악마의 능력을 반반씩 가지고 태어났다.  네가 천사의 능력을 갖거나 악마로 되는 것은 오직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천사나 악마가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처럼 인간에게 간섭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한 존재는 없다는 얘기다.

순전히 내 선택에 의해서 나 자신이 잠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스스로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로 변신 할 수도 있다면.

그도 저도 아닌 멍청이도 될 수 있고.


필자가 처음 투표를 해 본 것이 70년인가 다음 해이던가

대통령 선거 때였다.

김 대중씨가 근소한 차이로 졌고, 박 정희씨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에는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했다.

각자 이유가 다르겠지만, 식자층에서는 야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의 이유는 모르지만 필자도 역시 열심히 야당에 표를 던진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이 정권 잡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니다. 

군부 독재가 싫어서?

싫긴 하지만 내 표 한 장이 바꿀 수는 없다.

야당 후보가 좋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줄기차게 야당에 표를 던졌을까?

그것은 균형 때문이었다.

집권당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긴다.

정치 선진국에서도 집권당이 바뀌는 예가 거의 없는데,

우리의 경우에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김 대중씨를 지지하는 호남사람들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저소득층이 많다.

서울의 달동네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호남 사람들이 많았다.

보통 때는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출신 도를 따질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호남 사람들의 바람이 거세어 지고, 타 도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된다.

억센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말도 하기 힘들다.

김 대중씨라고 호칭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김 대중선생을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다.

누가 그런 그들에게 호의를 갖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김 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우리라고.

왜?

여러 사람이 나서면 나설수록 그 욕은 바로 김 대중씨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여당에서 요리(?)하기가 쉽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텐데.

절친한 호남 출신 친구에게 내 의견을 얘기했더니 처음엔 펄쩍 뛰다가 결국은 승복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김 대중씨나 집권당에서 알까? 모를까?” 라는 필자의 질문에 

“모르겠지... 자신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서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시키겠나?  아마 모르고 있을 거야.”

“이 순진한 친구야, 자네는 어찌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양반이 그 정도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 양반 이미 환갑이 넘었고, 두뇌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또 그 주변에 서울대학교 출신의 수재들이 즐비하네.

이들이 모두 자네만큼도 생각이 못한 돌 머리라고 생각하나?”

“....................”

“아무튼 김 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려면, 지금까지의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만 가능할거야.”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경상도 출신이네.

우리 형수 네 분 중에서 두 분이 전라도 출신이지. 그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여섯 명이네.

그놈들은 모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 애들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인가?”

“..................”

“나라꼴이 바로 되려면 우리 백성들이 정치인들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어주니까 가지고 놀지. 지역감정 부추기는 놈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찍어주지 말아야해. 그들이 하는 장난을 가만히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스스로 부끄러워 그런 짓을 못하게 돼.

그건 그렇고,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닐세.

자네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직책도  있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다니라고 하나?”

“그렇지, 그것을 노방 전도라고 하는데, 성서에도 있어.”

“상가나 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는가?”

“지나치게 떠드는 것이 싫을 때도 있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또 성서에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래서 옳은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 말인가?”

“그렇지.”

“노방 전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대상이겠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대며,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을 마치 사탄같이 대하고...

그렇게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과연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 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자신의 행위가 도리어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과연 예수를 위한 일일까? 그 반대일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어.”

“지금부터라도 해 보게. 어떤가?”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없어서.... 어쨌든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김 대중 선생을 지지합시다. 하면서 외치고 다니면서 오히려

 반감을 사서 역효과를 내는 행위가 김 대중씨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그렇지.”

“예수를 믿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에서 신음하고 만다는 그 외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면, 그래도 그 행위가 옳다는 말인가?”

“그래도 성서에...”

“성서에 전도하려면 예의를 무시하고 떠들어대라고 써 있는가?”

“............................” 

“누가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지.”

“그러면 전철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예수의 직접 명령을 받았을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가?”

“....................................”

“예수 흉내를 내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듯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네. 예수는 신이다. 그 점은 인정하나?”

“당연하지.”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를 선택하였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었지?”

“그래”

“왜 그랬을까?”

“자신의 뜻을 널리 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물론이네. 그런데 처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죄가 된다. 물론 그 죄는  버린 당사자의 것이고.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짓게 했네.

어떻게 생각  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도리어 영광이 아닐까?”

“그런 얘기는 자네 같은 예수쟁이의 변명이지. 예수는 사람이면서 신이네. 당신 스스로 밝혔듯이. 그 양반(예수)은 자신의 선택 때문에 제자들이 죄를 짓게 할 리가 없네. 남겨진 처자식이 고생하면서 아버지나 예수를 원망하게 두지 않을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고,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네.”

“그렇겠지.”

“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들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가? 그들이 예수의 화신인가? 그들이 신인가? 아니면 그러한 권한을 신에게 부여받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처자식을 버리고 교회 일에 미친 사람을 만들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가출하여 교회 사업에 앞장선 사람들이 적지 않네.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위해서 가족을 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그들은 누구의 부름을 받았는가? 버림을 받은 이들과 그런 일들을 보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은 교회나 예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교회도 욕먹고, 예수도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네.

그렇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와 교회를 위한다는 그들이 하는 꼴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전도의 목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서

바른길을 가르쳐줌이 아니던가?

전도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비 기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에게 참뜻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면, 옳은 일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 

“칭찬이 도리어 욕이 되고, 존경심을 떠벌이고 다니는 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 보게나 과연 내 말이 틀렸는가를...”

“........................................”

“오래 전에 방송에서 어떤 목사가 청량리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잠깐 본 일이 있지.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일은 여기저기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대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변질이 되더라도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이 되겠지만

우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목사가

초대되어 몇 마디 얘기를 하더군.

목소리를 들으니 여느 목사나 전도사들에게서 듣던 그 가식적인 뼈가 없더군. 그래서 아, 이 사람은 그래도 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하더군.

자신은 나중에라도 교회를 짓지 않겠다고.

목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일이었지.

매스컴을 탔으니 많은 후원자가 생길 것이고, 돈도 많이 생기겠지.

그런 후에도 변질이 되지 않는 다면 , 그 사람은 뭔가를 제대로 아는 양반이지. 나는 그 사람이 끝까지 변치 않고 돈이 생기는 대로 밥을 지어 더 많은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바라네.

그것은 여의도에 백만 명의 신도를 모아놓고 신을 찬양하고,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하는 그런 행위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일이네. 그런 일이야말로 기독교를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일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세. 미안하지만 전형적인 예수쟁이 같은

 상투적인 말투,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표현을 나는 아주 싫어하네. 왜냐하면 예수나 하느님 즉 신(神)은 인간이 자기 마음에 드는 짓을 한다고 해서 간사한 우리 인간들처럼 해해거리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화를 내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

“좀 전에 자네가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말은 뭔가?”

“잘 들어두게 이 예수쟁이야. 그런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예수는 누구인가? 대답해봐.”

“....................................”

“이 사람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예수는 바로 신이 아닌가?

 맞아? 안 맞아?”

“맞아. 바로 신(神)이시지.”

“그러면 그 양반이 뭣 하러 인 두껍을 쓰고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꼬?”

“인간을 구원하려고.”

“맞았네, 아따! 거눔 신퉁허다. 고런 것도 다아네 그랴.

 그런데, 그 말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온 것이지 직접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지?”

“그렇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항시 들먹이는 성경에서 보세.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왔고, 또 그랬고,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까지(실제로는 종이었다) 두었다. 맞는가?”

“그래”

“왜 교회에 짜잔 - 하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교회에 나타나서 기적과 위엄을 보여주고 그들을 굴복시킨 다음에 잘못된 교회부터  바로 잡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교회에 쌓여있는 재물로 배불리 먹여주고 엉터리 지도자들을 혼내주어 정신 차리게 했으면, 잘못된 교회도 바로 세울 수 있었을 테고, 당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장수무대에 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봐, 예수 믿는 자네가 말해보게. 생각할 여유를 줄 테니까.”

“에-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고,  또, 깊은 뜻이...”

“됐네. 이 친구야.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영광은 무슨 얼어 죽을...

그 양반이 그렇게 하지 않은 절대적인 이유가 있지. 그것은 바로 신(神)은 절대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네.

인간이 천국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인간들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가족 사회, 국가, 이 세상을 이루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네.

그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네.

인간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에 어지럽고 시끄럽고 괴로울 뿐이지. 그 양반은 새삼스럽게 그 법칙을 깨우쳐준 것일세.”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 짐작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한국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인간이 윤회를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살아가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굳이 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그분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속성과 앞으로 변해갈 국제 정세 때문일 것이네.

그 분이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가르침을 펼치면,

정치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결탁해서 로마로 하여금 당신을 죽이게 할 것과 그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그것을 핑계로 많이 죽이고 죽고 하는 과정을 겪은 후,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게 되고, 로마로부터 유럽을 비롯해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파되고...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알게 되고, 아이고 숨 차라... 즉, 국제 정세의 흐름과 인간들의 욕심이 당신의 사상을 널리 퍼지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태어난 것이지

유대민족이 선택받았다거나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이 아니란 말일세.

예수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똑같은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그 가르침이 지금처럼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

“이렇게 가정을 해보세. 만일 예수께서 일본이나 중국, 아니면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 졌을까? 한번 생각해 보게나.”

“...............................................”


“그래서 예수쟁이들의 말투들- 특히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는 따위의 표현이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싫어하네. 그러한 표현은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말이 된다네. 알겠는가?”  

“.....................................................................”

“동의 할 수가 없는 모양이군.  지금은 그럴 것이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금까지 한 헛소리 같은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자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일세.”


신(神)은 신이다.

인간(人間)이 아니다.

몇몇의 인간들이 부추긴다고 높아질 존재(存在)가 아니며,

몇몇의 인간들이 모욕한다고 격하(格下)될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神)을 대하는가?

인간과도 같은 성향(性向)을 지닌 조잡한 존재로 대한다.

누가 그렇게 대하는가?

신(神)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글을 보면 일부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펄쩍 뛸 것이다.

필자에게 욕설을 퍼부어 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

이단자로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아니다.

필자야말로 진짜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반성해 보아야한다.

신을 믿는다면서 신을 저질로 표현하고 있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조물주(造物主)라고 하면서 조잡한 인간에 빗대어 비교한다.

신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변덕쟁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 정도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고 있다.

누가?

바로 우리들-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그러고 다닌다.

이런 부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천주교인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놈은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학교도 잘 다녔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의사가 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위치에 이르러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제 멋대로 하였다.

시키는 대로하지 않고 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다녔다.

가라는 법대는 가지 않고 자동차 정비에만 매달렸다.

형은 의사가 되었는데, 동생은 기름때 찌든 정비공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 보기에 창피스럽고 분해서 자식으로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있는 재산 다 털어서 큰아들에게는 병원을 지어주고

고생하고 있는 작은아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큰아들은 외견상 불편한 것이 없었다.

일류 대학 나와 유능한 의사가 되고, 부모의 힘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건물에 개업도 하고 부모도 모시고 있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돈 많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하였고.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고 강요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결혼까지 당신 마음대로 정해버려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하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 혼자 밖에 없었다.

동생까지 집에 오지 못하게 아버지가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동생처럼 쫓겨나 좋은 집과 고급승용차, 골프채를 잃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동생의 몫까지 자기 차지가 되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자기만을 사랑해 주었고, 자신의 갈 길을 일일이 정해 주었고,

전 재산을 물려준 아버지가 그에게는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단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작은아들도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편협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했고 불쌍해하였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늙어 병들고, 힘이 없어지자

큰아들 내외의 불화 때문에 함께 살수가 없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양로원에 돈과 함께 맡겼다.

이제는 아버지의 진로를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모셔다가 임종 때까지 봉양하였다.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평생 막노동을 했다.

자식을 일곱 명이나 두었는데, 어떤 놈은 악착같이 공부해서

선생도 되고, 어떤 놈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공업학교를 나와서 취직해서 살림을 도왔고, 또 다른 놈은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집 배달원이 되었다가 후에 주방장이 되었고, 또 다른 놈은 어려서 가출하여 감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겨우 세끼 밥 먹여준 것 외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특히 일찌감치 비뚤어진 길을 가고 있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결국 사랑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그는 장사로 성공하여 큰 점포를 운영하였고, 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첫 번째 얘기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지만 자식을 편애하여 미워하는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아버지는 물질적으로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길렀다.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부모로써 가장 못할 짓이다.

그것은 사랑 받는 자식과 미움을 받는 자식, 그리고 당사자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

앞에서는 미소를 짓지만, 돌아서면 비웃게 된다. 충고해 주는 이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의 충고 따위는 듣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이 정도의 편협한 인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엄청난 착각이다.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전교(傳敎)의 대상이 모두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무언가 미지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처지가 개선되거나 반전되기를 희망한다.

현재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를 용서하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다스리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서글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 것이

지금에 와서는 형편없이 왜곡된 기복 (祈福)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들은 점점 참된 인성을 상실해 간다.

사이비 종교나 사교(邪敎)들은 애초에  기복신앙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고,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무지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악마 같은 자들이 하는 짓이지만, 기독교나 불교에서조차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매스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개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집단은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신도들을 모으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쓰는 사이비 종교인이 많이 생겨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종교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일신의 부귀영달을 위하여 그런 짓을 하는 종교인들이 들끓고 있으니 천국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 그들은 반드시 기복 신앙을 조장한다.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주요 골자는 현실에서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고, 그러기 위해서 교인들을

     교회 테두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둘째, 성서(성경)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성서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자신의 의지대로 해석하거나

     흐름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한 구절만 떼어내서 필요한곳에

     갖다 붙인다.

     특히, 신구약을 섞어 적당히 뜯어 맞추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의 재산을 우려내는 방법을 총 동원한다.

셋째, 어떤 특정인물을 초능력자로 부각시켜 신도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안수 기도, 안찰 기도 등으로 연출된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어버린다.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교회, 그 같은 행위를 자랑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판치는 장소와 사람들은 의심해야한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런 부류들은 많은 기적을      

      조작한다.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해도 그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가톨릭에서는 기적이 발생하더라도 감추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을 반기고, 떠들고,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을 흠모하는 행위는 종교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심해지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탈을 쓴 사이비들은 대개다 기적을 이용하며 성서를 악용한다.

성서를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자면 한이 없다.

살인, 강도, 강간, 불륜 행위조차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다.

제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속지 말기를 바라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불교(佛敎)의 탈을 쓴 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비슷하다.

특히 “나는 언제 득도(得道)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어째서 그런가?

득도(得道)의 경지를 잘은 모르지만, 진실로 득도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득도를 했노라고 자랑하며, 신도를 모으고, 그러한 것을 기화로 치부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를 아는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도 권유를 했다.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새로운 종파를 설립하라고.

그렇게 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때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러한 발상이 사이비로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잘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는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체 이탈의 목적을 설명하다보니 장황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분들은 목적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부로 계속됩니다 ,

긴글 읽어보신 소감들이 어떠신지요 ~ 

댓글주실분은 ,,

별님뿐이 없을것같은 생각이드는데 ,

내 ,생각이 맞을지 ,틀릴지 ,엄청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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