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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 속 어마어마한 작업을 존중한단다" [특별기고] 김학철 정신과 전문의
다섯 살이라고 했니? 네가 또래 아이들보다 말이 늦는다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너의 어머니의 뒤에서 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지. 오늘 너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 아저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단다.
아마도 딱 너 만할 때였던 것 같아. 아기라고 부르기엔 꽤 커버렸고 어린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부족한. 어른들이 하는 말은 대충 다 알아듣지만 내 뜻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그래, 딱 너 만한 나이였지. 그날 난 안방에서 창을 바라보고 문을 등진 채로 혼자 앉아 있었어. 내 눈에 비쳤던 나의 짤막하고 통통한 팔과 다리가 지금도 눈에 보이듯 선명하구나. 난 아침부터 까닭 모를 불편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고 그 이유를 곰곰이 찾아보고 있던 중이었어. 그리고 어느 순간! 난 무언가를 깨닫고 불에 덴 듯 소스라치게 놀랐단다.
너라면 내가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아마 그 이유를 짐작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의 엄마에게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놀랐던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생각’을 ‘말’이라는 ‘틀’ 안에 끼워 맞추려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원인이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야.
그래, 아이야. 말이라는 걸 배우기 전까지는 난 아무런 불편 없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지. 바로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하지만 말을 배우고 그것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나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라는 틀 속에 끼워 맞추어가는 게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던 거야. 그건 정말 불편한 기분이었어. 내 머릿속에는 총천연색의 단풍 숲의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검은색 매직펜 하나 밖에 주어지지 않은 기분. 하는 수 없이 그걸로 애써 그려내고 나니 정작 내가 느꼈던 오색 단풍의 찬란함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바로 그런 기분 말이야. 허무하기도 했어. 기껏 그릇으로 물을 퍼 올렸는데 그릇의 밑바닥이 그물로 되어 있어서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네가 입을 닫고 있는 이 순간을 통해 너의 마음 속에서 엄마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음을 나는 안단다.
그런데 내가 정말 충격을 받았던 건 그 매직 펜을 자꾸 사용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더 이상 단풍 숲의 색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아무리 열심히 색깔들을 들여다보고 느껴봤자 어차피 검은색 매직 펜으로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예 관심을 갖지 않게 되어버린 거였지. 그리고 마음이 울적해졌어.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른들과 말로 소통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 마음속의 찬란한 총천연색 풍경을 버리고 밋밋한 흑백 풍경으로 그 자리를 채워나가야 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시 그때 느꼈던 울적한 기분이 내 가슴속을 채우는 게 느껴지는구나. 그래, 아이야. 넌 이 기분을 분명히 알지? 결코 ‘울적함’이나 ‘슬픔’이나 ‘무거움’ 따위의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오묘한 느낌을 말이야. 다만 넌 그 오묘함을 잘 표현해내기 위해 가장 적절한 단어들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중이란 걸 잘 알고 있단다. 네가 감수성이 섬세하면 섬세한 아이일수록 그것을 고르는 일은 더욱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사실도 말이야.
그래, 아이야. 너의 엄마가 네가 말이 늦는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단다. 하지만 네가 입을 닫고 있는 이 순간을 통해 너의 마음속에서 엄마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는 안단다. 너는 아까 미끄럼틀 계단에서 뛰어내리려고 마음먹는 순간 너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조마조마 함을 뚫고 무언가 단단하고 힘찬 것이 솟아오름을 느꼈지. 그리고 어린이집에 너를 데리러 온 엄마의 품에 안기는 순간엔 무언가 보드랍고 따뜻하며 안심이 되고 든든한 기분을 느꼈지. 그리고 지금 잠자리에 누워서 그 느낌들의 감촉과 모양과 색깔을 서로 비교하며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지.
그런 기나긴 사색의 시간 끝에 넌 어느 날 그것들을 ‘용기’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결정하겠지. (혹은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거나 손수 만들어 붙이겠지.) 난 너의 그런 시간을 존중한단다. 아니 부럽기마저 하단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재촉에 마음이 급해져서 그 느낌들을 섬세하게 살펴보지 않은 채 섣불리 언어로 규정해버리고 마는지. 그리고 그렇게 언어에 스스로 갇혀 버림으로써 더 이상 그 느낌들을 살펴볼 기회를 잃어버리는지 난 잘 알고 있단다. 그 이유는 나의 진료실을 찾아오는 어른과 청소년들의 거의 전부가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그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단다. 그들이 하나같이 ‘고통’이라는 한 개의 단어로 뭉뚱그려서 부르는 그 모호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분류하여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감정의 진짜 정체를 밝혀주는 것이지.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단언컨대, 소위 마음의 고통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단다.
굳이 정신과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어릴 때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너무 빨리 말을 배우는 바람에 나중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단다. 그들은 대학까지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든 문학이든 조금만 어려운 책을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단다. 글자야 유창하게 읽겠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에 녹아 있는 풍부한 심상들을 말이라는 틀에 갇히기 전에 제대로 느껴보는 경험을 어린 시절에 충분히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가령 숲 속에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초록색을 경험해 본 사람과 초록색 잉크로 인쇄된 그림책을 통해서 초록색을 경험해 본 사람이 ‘초록’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심상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클 거야. ‘의지’, ‘자아’, ‘용기’, ‘자유’ 모두 마찬가지란다. 생각해보렴. 그러한 단어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느낌과 표상이 먼저 형성되었을까?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느낌과 표상이 먼저 만들어졌고 그것을 어떻게든 공유하기 위해 언어로 표현하게 되었겠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언어란 너무나도 투박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표현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따름이란다. 마치 검은색 매직 펜으로 단풍 숲의 풍경화를 그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러한 순서를 무시하고 말을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표상을 끼워 맞춰가는 일이 지금 시대에는 너무나도 빈번하단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 매직으로 그린 풍경화를 보고 자신이 단풍 숲을 보았다고 착각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지. 언어라는 게 참 얄궂은 게 그걸 배우는 순간, 자신이 그 의미를 안다고 착각하게 만든단다. 심지어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그가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생각해보렴. 어느 아이가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걸까? 마찬가지로 어떤 어른이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거란다. 그런데 말로 먼저 배워버리면 그 뜻을 안다고 착각하게 되어서 그 진짜 의미를 탐색하고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지.
글자를 유창하게 읽는 사람들이 정작 저자가 책을 통해 전달하려고 한 진정한 사유와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현상은 바로 이 때문이란다. ‘믿음’과 ‘용기’란 단어를 배우기 전에 그러한 감정들에 대하여 깊이 있게 경험하고 들여다볼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그 두 단어는 그냥 서로 다른 단어일 뿐, 그것들이 가진 긴밀한 연관성과 미묘한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할 능력을 갖기 어렵단다.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네가 기왕에 말을 늦게 하기로 작심한 만큼, 글자를 배우는 시기도 최대한 늦추란 말이란다. 물론 너희 엄마가 들으면 펄쩍 뛸 소리이겠지. 하지만 아이야, 글자는 말보다도 더 투박한 도구란다. 가령 사람들은 ‘콩콩’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높은 톤으로 말하게 되지. 그리고 ‘쿵쿵’이란 말을 할 때에는 낮은 톤으로 말하게 되고. 말이란 투박한 도구이긴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라도 약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단다. 하지만 그 단어들을 글자로 바꾸어 버리는 순간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티끌만 한 감정들마저 날아가 버리고 말 그대로 생명이 하나도 없는 ‘박제’가 되어버린단다. 그래서 글자를 빨리 배울수록 그 글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느끼기 어려워지게 되는 거란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책은 유창하게 읽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하나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네가 글자를 배우는 순간부터 너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전혀 다르게 변하는 걸 경험하게 될 거야. 예전과 똑같이 길을 걷더라도 너의 두 눈은 더 이상 예전처럼 나비 날개의 팔랑거림과 나뭇잎의 팔랑거림의 차이를 느끼는데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대신 온갖 표지판과 간판의 광고 문구들이 너의 시선을 가져가게 된단다. 난 길에서 그러한 모습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단다.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네가 영원히 말과 글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에게 심각한 신체적 장애가 없는 한 너는 시기가 늦을지언정 어찌 되었든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글도 익히게 될 거란다. 기껏해야 남들보다 2~3년 늦는 수준이겠지. 그렇지만 그 시간만큼 넌 말을 빨리 배운 아이들이 가질 수 없었던 귀중한 경험들을 마음속에서 쌓아가게 될 거야. 그리고 이를 통하여 단어 하나하나가 가진 진정한 의미들을 깊이 깨닫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만에 하나 너에게 정말로 장애가 있어서 그것들을 영원히 제대로 익히지 못할 형편에 처했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단다. 다른 아이들이 언어라는 틀 안에 갇혀 버린 후에도 너는 고요한 침묵 안에서 너의 마음속 경험들을 충분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고 그러한 시간이 충분히 쌓였을 때 어느 순간인가부터 넌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되었든, 음악이 되었든, 춤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그래, 아이야. 말과 글은 단지 사람들끼리의 소통을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도구의 하나일 따름이란다. 그러니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빨리 배우고 능숙하게 한다고 해서 결코 훌륭한 건 아니란다. 나는 네가 지구 상의 나무 이름을 모두 외워서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숲에 가면 소나무와 참나무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나무의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지닌 차이들을 예민하게 구별해 낼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그렇게 구별해 낸 나무마다 너의 방식으로 이름을 붙여주렴. 그것이 말이든, 노래든, 그림이든, 춤이든 말이다.
2017년 생일 바로 전 날 진료실에서 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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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