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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에서 손을 놓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은 것 같다.
그동안 운전을 할 이유도 할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운전 감각은 이미 망한지 오래다.
정말이지 브레이크와 악셀 위치도 다 까먹었다.
나에게 운전은 정말 무서운 짓이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도로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그것도 미서부 고속도로를 달린다.
후덜덜 쫄면서.
8월 말에 미국 서부 LA와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고2 아들과 둘이서 10일 동안.
이번엔 '우버택시' 앱도 한국에서 미리 깔아놓았다.
그 지역은 대중교통이 불편한지라 고민끝에 차를 렌터하기로 했다.
장롱면허를 가지고 국제면허를 받았다.
출발전에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날 일이 생겨 버렸다.
어디다 써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자동차 내외부 명칭을 영어로 공부하고,
미국 온갖 도로 표지판을 죽어라 쳐다보고 또 보고,
차량 보험을 위해 까다로운 보험 영어까지 밤새워 외웠다.
기억력이 맛이 가서 1개를 외우면 2개를 까먹고 만다.
알아야 할 게 한 둘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 교통법규는 물론이고
주유소에서 셀프 기름 넣는법,
도로에 주차할 때 주차미터 사용하는 법,
길가에 아무데나 차를 세웠다가는 무조건 견인되니까
차를 세워도 되는지 보도블록의 색깔로 구별하는 법 등등.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호에 맞게 도로에서 운전하는 법인데
인터넷을 뒤져 영상을 찾아서 운전 시물레이션을 했다.
내 실력은 왕초보보다 더 형편없는 지경이었는데
팔자에 없는거 익히느라 정말 골머리를 썩었다.
이 돌머리 나이에 괜한 짓을 하는건 아닐까?
미국에서 운전하다 경찰에 걸리면,
차를 한쪽으로 대 놓고 손이 보이게 운전대에 올려놓은 자세로 공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경찰 지시없이 면허증이나 차량등록증을 찾는답시고 여기저기 뒤지다간 총맞아 뒤질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마약하고 차를 몰거나, 차 안에 총을 두고 다니는 운전자들이 많아서
경찰도 단속할 때는 뒤에서부터 다가서면서 만약을 대비해 뽑을 준비를 한다.
운전자가 억울하게 총맞은 사고는 뉴스에도 간혹 나온다.
나같이 인상 안좋은 얼굴은 아예 무지막지한 경찰을 안만나는게 상책이다.
지난번 미동부 도시들을 다닐때는 걷거나 지하철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속은 편했다.
이번엔 운전을 직접 해 보겠다는 호기때문에 스트레스를 미리 땡겨다 맛보고 있다.
그래도 한가닥 믿는 구석이 있는데
운전대를 잡아 본 경험이 있다는 거다.
7,8년 전인가 제주도 널럴한 도로에서 떨면서.
LA 도착한 지 3일 차
아침에 렌터하러 업체를 갔다.
내 운전을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안전빵으로 들 수 있는 모든 보험을 카운터에서 다 들었다.
타이어 빵꾸나거나 차 키 분실등을 해결해 주는 잡다한 보험까지도 추가로 들었다.
차에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별도로 신청을 해야 했다.
카운터에서 네비라고 내어주는데 화면 크기가 내 핸드폰만 하다.
어떻게 설치하냐 물으니 빨판 같은 게 있어서 앞 유리창에 붙여서 쓰란다.
다른 건 없고 이것 밖에 없다는데 시원찮아 보인다.
눈도 안좋은데 멀리 달아놓으면 네비 화면이 제대로 보일까 ?
카운터에서 나에게 계약서와 허접한 네비를 건네주고서는
차는 주차장에 가서 해당 사이즈 중에 아무거나 니 맘대로 골라 가란다.
크기는 무조건 소형차를 신청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무서버서.
렌터카 주차장에는 사이즈별,종류별,지붕열리는 것등 별의별 외제 차량들이 가득하다.
소형차 코너로 가서 '모닝'이나 '스파크' 같은 사이즈를 기대했는데 웬걸 모두 큼직하다.
소형이라 해도 우리나라 중형 정도의 크기가 쫙 대기하고 있었다.
흰색 포드로 골랐다.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고 보니 어색하고 난감하다.
작동 버튼이 여기저기 덕지덕지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필요한 조작 방법을 물어 보려고 직원을 찾았지만
이 넓은 렌터카 주차장에 직원은 코빼기도 안보인다.
한참을 혼자서 이것저것 만지며 헤메다가
저쪽에서 렌터카를 고르고 있던 미국인 커플이 보였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애먼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충 작동 요령을 배웠다.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차를 앞뒤로 여러번 깔짝깔짝 움직여 봤다.
이제 정문으로 몰고 가서 계약서를 보여주고 확인받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
연습을 좀 해야 쓰겠다.
렌터카 업체 내부 도로를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바퀴 돌았다.
갑자기 앞유리창에서 물이 나오면서 와이퍼가 좌우로 움직인다.
내가 뭘 건드린걸까?
한 바퀴 더 천천히 또 돌았다.
차량 유도하는 흑인 여자안내원이 정문쪽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한다.
"무서버서 못 나간다."
천천히 조심조심 한바퀴 더 돌았다.
그 여자가 정문으로 나가라고 또 재촉을 해댄다.
아직은 아니다.
감을 잡아야 된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서너바퀴 더 돌고나서야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관리원이 최종 등록을 하면서 나의 사정을 알자 행운을 빌어줬다.
이젠 실전이다.
번잡한 도로로 들어섰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그렇지만 쫄아서 주위 풍경을 볼 여유가 없다.
근데 네비게이션이 좀 이상하다.
네비를 한국말 버전으로 바꿨는데
영어식 어순의 한국말인데다가 안내멘트가 한 박자씩 늦다.
멘트가 교포언니 같은 말투다.
고백컨데 난 네비 화면을 보는 법도 잘 모른채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런 상태로 미국에서 운전하겠다는 것은 막가자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차량이 많이 오가는 시내
한 박자 늦은 네비언니의 멘트때문에 차선을 왔다리 갔다리 했다.
뒤에서 심하게 빵빵 거린다.
제길! 초장부터 깜짝 놀랬다.
미국인도 우리나라 만큼 빵빵거리는 놈이 있구나.
바짝 쫄아서 머리위 신호표지판과 좌우 차량도 봐야하고
도로 바닥의 표시까지도 살펴야 하는데다가
이상한 네비언니의 말투도 들어야 하고 눈과 귀가 바쁘기 짝이 없다.
횡단보도를 지날 때는 특히 긴장된다.
보행자와 약간의 인사접촉이라도 생기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한다.
비싼 변호사를 사야 되고 잘못하면 거덜난다.
미국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저멀리 반대편에서
사람 그림자만 얼쩡거려도 보행자가 지나갈 때까지 차들이 선다.
일전에 나도 한산한 횡단보도 근처에서 건널 생각없이 딴 짓을 하고 있는데
차들이 서더니 운전자가 나에게 먼저 지나가라고 친절한 손짓을 받은 적이 있다.
보행자가 귀하다 보니 우리나라와 달리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는다.
뉴욕 맨해턴의 택시 기사 같은 사람은 안그럴 수도 있겠지만.
고속도로를 타야 되는데
네비언니의 한박자 더딘 멘트를 듣다가 차선을 바꿀 타이밍을 놓쳤다.
아! 저기로 꺾어야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직진이다.
뭐,이런 언니가 다 있노!
인터넷에서 눈으로만 배웠던 도로 주행은 지금은 말짱 '황'이다.
몇 번을 헤메고 나서야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롱비치(LONGBEACH) 방향으로 잡았다.
차량이 많이 다니는 편도 5차선 고속도로다.
나만 빼고 다들 무섭게 달린다.
기분나쁘게 한국차 보다 일본차가 훨씬 눈에 많이 띈다.
그중에 일제 도요타가 더 많이 달리고 있다.
미국도로의 속도 표시는 모두 마일로 표시되어 있다.
차의 속도 게이지도 마일로 표시되어 감이 쉽게 오지 않는다.
주위 차들이 70마일에서 75마일 정도로 달리는 것 같다.
우리로 치면 112KM 에서 120KM의 속도다.
그 보다 더 쎄게 달리는 차도 있는데 아마 단속이 없는 구간인 것 같다.
나는 50마일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서 달렸다.
주위 차들이 내 차 옆을 쉭 하고 내질러 버린다.
그러든말든 후덜덜 떨면서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앞만 보고 간다.
유리창에 붙여놓은 네비 화면쪽으로 눈길을 주는 것도 무서운데
주위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아직은 위험하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웬만한 고속도로는 통행료가 공짜다.
가장 왼쪽 1차선에 해당되는 차선에 황색선이 2줄로 쳐져 있는데
이것은 2인 이상 차량이 달릴 수 있는 카풀 차량 전용선인데 구간에 따라선 유료 차선일 때도 하다
나는 아들 포함해서 2인 차량이지만 무서워서 그 쪽 차선은 꿈도 못꾼다.
게다가 맘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차선도 아니고 지정된 구간에서 들어갔다가
정해진 구간으로만 빠져나와야 하는 차선이니, 왕초보 보다 못한 처지에
굳이 스트레스를 하나 더 추가할 이유가 없다.
고속도로 주행을 마치고 점심을 훌쩍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도합 4시간 가량의 첫 운전은 무사했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고 땅에 발을 디뎠다.
안도감이 캘리포니아 뜨거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나니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호텔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주차장 건물 지상 5층에 세워 두었던 차를 찾으러 갔다.
근처가 관광지라 낮에 빽빽하던 주차장이었는데
지금은 사람은 안보이고 차만 드문드문 있다.
좀 무섭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이런데서 뭔일이 일어난다.
운전석에 앉고보니
아! 헤드라이트를 켜는 법을 모른다.
운전대에 뭔가 잔뜩 붙어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헤드라이트 버턴이 눈에 안띈다.
포드차량이 뭐 이리 헷갈리게 해 놓았지?
으! 진짜 답답하다.
내 이럴줄 알았으면 출발할 때 헤드라이트 위치도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둘러봐도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한 참을 들여다보고 만지고 누르고 하는 중에
저편에서 차를 찾으러 가는 한 가족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했더니
가족전부가 우루루 내 차까지 몰려와서 버턴위치를 알려주었다.
운전대 왼쪽 구석에 아주 작은 표시를 가리켜 주었다.
알고보니 허탈하다.
미국인은 대체로 친절하다.
이제 돌아가면 된다.
어두워진 밤길이 걱정이다.
고속도로를 탔다.
겁나게들 달린다.
밤이다 보니 주위 차들의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눈도 침침하고 네비 화면도 잘 안보이고 봐도 모르겠다.
무서워서 아예 오른쪽 제일 가장자리 차선을 탔다.
출구로 빠져나가기 수월하고 천천히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옆차선에서 대형차도 지나가고 화물차도 쌩쌩 내달린다.
무서워서 눈알 굴려 네비 화면을 쳐다 볼 엄두도 안난다.
여전히 어색한 네비 언니말만 듣고 달린다.
주구장창 오른쪽 맨 끝 가장자리 차선만을 달리다보니
엉뚱한 출구쪽으로 빠져 버렸다.
왼쪽으로 차선을 옮겨 가야하는데 뒤에서 달려 오는 차들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무서워서 머뭇거리다 차선 바꿀 타이밍을 놓쳤다.
어쩔수 없이 원치않는 출구로 나가서 모르는 시내로 들어가 버렸다.
옆의 아들놈이 한숨을 쉰다.
시내를 돌고 돌아서 다시 고속도로를 탔다.
계속 오른쪽 끝 차선만을 고집하며 한참을 달리는데
네비화면을 보던 조수석의 아들놈이 왼쪽 차선으로 옮기라고 한다.
네비 언니는 아무말도 않는데?
좀 더 달리니 엉뚱한 출구 표시가 눈앞에 보인다.
이제서야 언니가 말을 한다.
차선을 바꾸라고.
뒤에서 차들이 달려오는 이런 상황인데...
주저주저 하다가 또 원치않는 출구로 나가 버렸다.
젠장! 밤인데다 길도 모르겠고 한박자 더딘 네비말만 듣고가자니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
네비탓을 하다보니 성질이 나서 평정심을 잃었다.
이번에도 어딘지 모르는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하고 거리도 꽤나 어둡다.
게다가 밤에 공사는 왜 그리 많은지.
다시 고속도로를 찾아 나가려고 여기저기를 돌다가
차량이 많지 않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빨간 신호에 멈춰 섰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녹색등에 무조건 좌회전을 할 수가 있다.
금지 표시만 없다면 녹색등에 유턴도 맘대로 해도 된다.
또한 신호등이 없는 직선 도로인데도 좌회전이 되는 편리한 차선도 있다.
도로 한가운데서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과 동시에 같이 들어갈 수있는 차선이다.
즉,한 차선에 반대편 차와 내 차가 같이 들어가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달리다가 눈치보고 좌회전을 할 수 있다는 거다.
서로가 양보와 배려를 해주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는 차선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개판된다.
잠시후 빨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좌회전을 해서 쑤욱 직진해 들어가는데
갑자기 내 눈앞에 차가 한대 나타났다.
놀래서 확 핸들을 꺽었다.
상대도 급히 틀었다.
꺅! 하며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였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욕이 절로 나왔다.
알고보니 내가 반대 차선으로 들어가 버렸던 거다.
가로등도 어둡고 도로에 황색선도 지워져서 잘 안보였다.
이런,식겁했다.
사과할 여유도 형편도 아니라서 슬슬 움직여 내빼버렸다.
상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놀라고 아들놈도 많이 놀랬다.
급격히 운전하기가 싫어졌다.
그 후에도 한차례 더 엉뚱한 출구로 잘못나갔다.
밤늦도록 고속도로에서 버벅되며 헤메다가 간신히 호텔로 살아 돌아왔다.
운전 첫날 심신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기력이 다 빨려서 호텔방에 드러누워 있는데
이 시간에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렌터카 당장 취소하라고 험한 말을 마구 날려댄다.
아들놈이 오늘 일어난 일을 죄다 보고를 한 모양이다.
에잇! 더러버서.
다음날 아침
자고 났더니 컨디션이 좋아졌다.
운전하기 쥑이는 날씨다.
마누라 등쌀에 어쩔 수 없이 차를 반납하러 가는 길
왠지 오늘은 운전이 잘 먹힌다.
네비 언니하고도 조금 친해졌다.
렌터 취소하지 말고 그냥 쭉 달릴까?
아들 놈이 운전을 극구 말린다.
나도 운전은 무섭다.
근데 니엄마는 더 무섭다.
에필로그 :
한국와서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네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소도둑 맞고 문짝 고치는 격이다.
LA에서 교통 법규를 몇 차례 어긴 것 같다.
카메라에 찍히면 딱지는 한국 주소지로 날라 온다고 하던데.
정말 날라 올라나?
역주행하다 박을 뻔 했던 상대 운전자는 가만 있지 않을것 같은데
간떨어질뻔 했다고 위자료 어쩌고 하면 큰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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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 용기가 대단하구나!^^ 도전정신이 청춘이네!^^ 책을 한 권 출판해도 되겠다!^^ 부럽다!^^
최근에 일이네?
식구가 큰 용기를 낸 나들이었구나!
수고했다. 장문의 글 실감나게 읽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