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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시작과 한양건설...청와대 곳곳서 고려 유물이…
청와대 곳곳서 고려 유물이… “고려 南京 건물 흔적 있을수도”
유석재 기자 2023.01.04
청와대 동쪽 궁장과 침류각 부근에서 확인된 기와 조각들. 청회색이 아닌 회색 기와(윗줄 가운데와 아래 오른쪽)가 고려시대 건물의 기와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청와대 경내에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기와 조각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청와대 권역에 대한 ‘시굴(試掘·시험적인 발굴) 조사 등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지난 3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복궁 후원 기초 조사 연구’ 보고서에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5월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 권역에 대한 이 연구를 8~12월 사단법인 한국건축역사학회 등에 의뢰했다.
연구진은 청와대 경내에서 지표조사(땅 위에 나타나 있는 유적·유물의 현황을 자세히 살피고 기록하는 것)를 진행한 결과 모두 8곳에서 기와·백자 조각 등 조선시대 유물을 확인했으며, 이중 ▲침류각 및 동쪽 궁장(宮牆·궁궐 담장) 주변 ▲백악정 남동쪽 궁장 주변 2곳 ▲칠궁 북쪽 등 4곳에서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 고려시대 기와라는 판단을 내린 근거에 대해 연구진은 “회청색의 경질(硬質)이라는 특징을 지닌 조선시대 기와와는 달리 일부 기와는 회색의 연질(軟質) 기와로서 확연히 다른 기법을 보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고려·조선시대 기와가 확인된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남경(南京) 궁궐을 지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인 1865~1868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곳은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문제는 이번 조사가 땅을 전혀 파지 않고 과거의 항공사진, 건물 배치도 등을 참고해 육안으로만 조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1948년 이곳 건물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뒤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옛 유물들이 땅 위에 산포(散布·흩어져 퍼짐)돼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관리나 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동쪽 침류각 영역에 많은 유물이 산포돼 있다”며 “유물 대부분이 기와라는 점, 고려시대 기와로 볼 수 있는 유물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고려 남경과 관련된 건물의 흔적이 땅 밑에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선 현재의 청와대 권역 담장이 옛 경복궁 후원의 궁장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도 확인됐다. 담장 아래쪽에선 ‘훈(訓)’자와 ‘영(營)’자를 새긴 돌도 발견됐다. 연구진은 “현재의 (청와대) 활용 방식은 기초 조사와 보존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매우 한정된 시기를 대상으로 호기심 위주의 단순 관람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며 “다양한 영역에서 종합적인 기초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특별시의 연혁
서울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이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한사군(漢四郡)의 진번군(眞番郡) 세력 아래 있었고, 이어 마한(馬韓)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백제가 발상(發祥)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지금의 도봉구 미아동 근처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그곳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이다. 이후 신라·백제·고구려는 한강 하류의 기름진 들판을 낀 이 전략적 요충지를 두고 여러 차례 쟁탈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때 이 지역을 점령했고(392), 장수왕은 다시 백제를 물리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여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475).
551년에는 나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밀어냈으나, 뒤이은 양국간의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이지역을 차지한 후 북한산주(北漢山州) 또는 남천주(南川州)로 삼았다. 신라는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하여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위한 주요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9주 중 한산주(漢山州)에 속했고, 경덕왕 때
한주(漢州)라 개칭하면서 서울 일원을 한양군(漢陽郡)으로 했다.
고려 성종 때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고, 문종 21년(1067)에는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궁궐이 지어지고 주민이 이주하여 도시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로 천도했을 때는 잠시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고,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가 공민왕 때 3경이 부활되면서 다시 남경의 지위를 회복했다. 이후 몇 번에 걸쳐 한양으로의 천도가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민심을 일신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고자 천도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계룡산이 수도로 거론되었으나 하륜(河崙)과 정도전(鄭道傳),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건의를 받아들여 1394년(태조 3)한양으로 천도했다.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정하는 데는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과 같은 큰 강을 끼고 있어 교통상 편리한 곳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또한 당시 풍수설(風水說)도 큰 몫을 했다. 백악(白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駱山:左靑龍)과 인왕산(仁王山:右白虎)이 좌우로 둘러 에워싸고, 남산(南山:또는 木覓山, 案山)이 알맞게 앞에 놓여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한강 너머로 멀리 관악산(冠岳山:朝山)이 조아리는 한양이야말로 능히 왕도가 자리잡을 만한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성·궁궐·종묘·문묘·사직단·조정청사·주거지 및 시전의 배치와 가로의 건설 등 도시 내부구조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395년에는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성저 10리에 이르는 5부(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방(坊)의 행정구역을 확정했다.
옛 남경의 이궁(離宮) 터에 새 궁궐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많은 전각을 배치했다.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 궁궐 남쪽으로 대로(지금의 세종로)를 내어 양쪽에 육조와 중추부·사헌부 등 주요관청을 배치했다.
1396년에는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을 잇는, 길이 5만 9,500자(약 17km)의 도성이 축조되었고,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4대문과 4소문이 뚫렸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1396년에 각각 준공되었다. 지금까지도 '4대문안', 또는 '문안'(城內)이라는 말이 도심을 가리키는 구어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의 공간적 골격은 수도 건설 초기에 계획된 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겠다.
종로를 중심으로 행랑과 시전이 배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상업지역이 형성되어갔다.
종로에서 북쪽, 즉 궁궐·종묘·사직이 자리한 '명당'과 그 부근에는 양반계급의 주거지역인 북촌(北村)이, 그리고 상업지역을 지나 남산 기슭 쪽에는 하급관리와 세도가 없는 양반들이 모여 사는 남촌(南村)이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 중인·상인·천민들의 주거지역 분화는 뚜렷하지 않았다.
1399년(정종 1)에는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다가 6년후인 1405년(태종 5)에 한성으로 환도한
일이 있고,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파천했다가 그 이듬해에 환도하기도 했다. 개국 후 약 2세기 동안 태평성대가 지속되던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 한동안 끊임없이 전화(戰禍)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수도 한성부는 거의 모든 시설물이 파괴·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궁궐의 건축물 중에 온전히 남은 것은 남대문·돈화문과 창경궁의 홍화문·명정전·명정문 정도였고, 경복궁에서는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았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왕조는 전화를 딛고 재도약하게 된다. 18세기 이후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기능과 형태도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19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한성부는 격변의 현장이 되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거치면서 한편으로는 개화의 거센 물결이 쇄도해 들어왔고, 철도·전신·전화·학교·병원·상수도 등 서양의 근대적 시설들이 도입되어 소위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지방제도 개편으로 1895년 한성부는 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896년 다시 한성부로 개칭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명칭이 바뀌면서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성내를 5부, 성외를 8면으로 하는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경성부에는 조선총독부 이외에도 조선군사령부·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앞잡이 기관들이 들어섰다. 경인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중앙선 등 철도가 부설되면서 용산·영등포·청량리 등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발달이 이루어졌다.
영등포 일대에 약간의 소비재 공업이 행해졌고,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지만,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상징되는 강제 신사(神社) 참배가 그러했듯이, 이러한 시설들은 조선인의 복지와는 관계없는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경복궁을 가로막아 선 조선총독부와 남산 아래 용산 일대를 차지했던 조선군사령부(옛 미8군사령부 자리)의 방자한 위치가 잘 말해준다. 수도의 얼굴을 가리고 심장부를 도려낸 것이다. 경성부의 한인들은 주로 북촌을 중심으로 종로·청계천 이북에 살았고, 남촌과 용산의 군사시설 주위에는 일인들이 모여 살았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물러가고, 경성은 '서울'이 되어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서울시'로 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0월에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수도로 결정되었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되면서 136.06㎢였던 시역을 268.35㎢로 확장하고 성북구를 신설, 9개구를 가진 대도시로 새출발했다.
6·25전쟁 때는 임시 수도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1953년 환도했을 때의 서울은 그야말로 전쟁이
남긴 폐허였다. 곧 복구사업에 착수하여 제모습을 갖출 무렵에 군사쿠테타가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하여 대도시 중심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밀어부쳤다. 이때부터 서울은 거대도시를 향해 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는 내무부장관의 감독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됨으로써, 다른 지방행정구역과 구별되는 특별시가 되었다.
1963년에는 주로 한강 이남과 동북부에서 시역이 2배나 될 만큼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0년 뒤인 1973년에는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모두 11개구가 되었고, 경기도 지역의 일부가 편입되어 시역이 다시 늘어났다. 이 무렵 한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급속히 진전되어 1975년에 강남구, 1977년에 강서구, 1979년에 은평구·강동구·동작구·구로구가 신설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송파구·중랑구·노원구·서초구·양천구를 신설하여 관할구가 22개에 이르렀다
1991년에는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가 비로소 이루어져 지방자치의 시대를 열었다.
선거를 앞두고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되어 관할구가 25개로 늘어났다.
1990년대 이후 서울시내 곳곳에 있던 공업단지들이 수도권 위성도시인 인천·안산·시흥·부천 등으로 이전해갔다.
그 자리에 2000년대부터 첨단산업단지가 조성되어 구로공단은 구로디지털단지로, 가리봉공단은 가산디지털단지로 탈바꿈했다.
현재 구로디지털단지에는 IT벤처기업들이, 가산디지털단지에는 패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4년에는 대중교통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중앙버스전용차로를 가설하고, 전철과 버스 간의 연계수송체제를 갖추었다.
2005년에는 환경도시 조성을 위해 서울의 숲을 개장했다. 2007년에는 1925년에 지어진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했으며,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개장했다. 2009년 개통된 지하철 9호선은 현재 개화~종합운동장까지 운행하고 있다.
[Daum백과] 서울특별시의 연혁 – 다음백과, Daum
조선의 시작과 한양건설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던 정몽주 등을 제거하였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 이성계는 즉위식 이후 교서(敎書)를 내려 ‘국호는 종전대로 고려라고 하며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도 모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다’라고 선언하여 겉으로는 새로운 왕조를 세울 뜻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 왕조를 세울 준비가 되어가자 새 왕조의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정하고 태조2년(1393) 2월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왕위를 이어 받은 지 1달 만에(1392.8)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기로 정하고 궁실(宮室)을 지어 바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궁실과 성곽이 완성된 뒤에 옮기자는 의견이 있어 미루고 있었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는 이유는 고려의 옛 세력이 머무르는 개성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 풍수설에서 ‘왕씨를 대신할 사람은 이씨이니,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게 될 것이다’, ‘송도[개성]는 땅의 기운이 다하였다’ 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던 것, 새로운 국가를 세운 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정한다는 것, 사회적인 혼란을 정리하고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한 것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이후 태조는 궁궐(경복궁) 터를 고려 옛 궁궐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정도전 등이 기본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심덕부와 김주가 한양에 남아 새 수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 달 뒤인 10월25일 태조 이성계는 개성을 떠나 28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아직 궁궐 공사가 시작하지도 않았기에 이궁(離宮)으로서 한양부 객사에 머물렀다.
종묘와 궁궐 공사는 12월에 황천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태조 4년(1395) 9월에 종묘와 궁궐이 완공되었고
왕은 12월에 궁궐로 옮길 수 있었다. 태조 4년(1395) 6월에는 행정기관 이름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바꾸었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지어 수도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나자
다음으로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 쌓기를 진행하였다.
태조는 직접 도성 터를 둘러보고 도성 쌓기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기구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였다.
본격적인 도성 쌓기는 다음해인 태조 5년(1396) 1월부터 시작하였다.
백악신과 오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경상,전라,강원도 등의 백성들 118,070명을 동원한 대규모 공사였다
당시 서울 인구 약 50,000여명 추정
당시 성의 길이는 총 59,500척으로 600척을 1구간씩 전부 97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하였다.
백악 동쪽의 제1구간을 ‘천(天)’으로 시작하여 각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에 따라 순번을 정하였다.
그리고 성벽에 공사 책임자의 이름, 지역 등을 새기기도 하였다.
태조 5년(1396) 2월에 1차적으로 공사를 마쳤지만, 폭우 등으로 소실되거나
공사 중에 미흡했던 부분들을 보수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 쌓기 작업은 태조 7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성곽 쌓는 공사 기간 중에 한양을 출입하는 도성문이 완성되었다.
이후 대대적인 도성 쌓기 공사는 세종, 숙종대에 있었는데,
세종 때에는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는 공사가 있었고
이 때 흙으로 쌓은 부분이 대부분 돌로 다시 지어졌다.
숙종 대의 한양도성 수축 1
(대대적 수축을 가능케 한 당시 국제정세)
병자호란이 끝나고 대략 70년 후인 1704년, 한양도성은 숙종 대에 와서 대대적이 수축을 한다.
이때의 수축은 한양도성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외양을 부여했다.
이로써 태조, 세종, 숙종 시대별마다 다른 다채로운 한양도성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특히 숙종 대의 수축은 태조, 세종 대와는 달리 조선 후기 왕조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초기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숙종 대의 한양도성 수축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숙종이 왕위에 있을 당시 조선 사회는 점차 병자호란의 기억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숙종 자체가 병자호란과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삼전도에서 성하의 맹약을 맺은 인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과 그곳에서 출생한 현종은 병자호란의 영향을 받아 북벌론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당시는 북벌론이 정치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숙종 대에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세대였고 북벌론의 영향력은 차차 줄어들고 있었다.
대신 그 공백을 소중화사상이 채우기 시작했다.
북벌론은 애초에 현실적이지 못하였기에 내면으로나마 청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자 한 것이다.
소중화사상이란 진전한 중화는 명나라이지만 명이 멸망한 지금 그 진정한 계승자는 곧 조선이라는 의식이다.
당시 풍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 창덕궁에 건립한 대보단이다. 이곳은 명나라 황제 특히 임진왜란 때 군사를 파견해 준 만력제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렇듯 현실적 책봉국인 청나라를 부정하고 조선은 문화적 우월감에 빠진다.
이런 풍조가 청나라의 도성 수축 금지 조약을 깨고 수축 공사를 진행하게끔 하였다.
[출처] 숙종 대의 한양도성 수축 1(대대적 수축을 가능케 한 당시 국제정세)|작성자 어영비영
한양의 구조 생활모습
조선후기에 상업활동이 활성화되면서 도로를 점차 침범하는 가가(假家)가 생겨나 불법 도로점거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대로는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인 황토현을 중심으로 경복궁,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으로 뻗은 도로와 종로 네거리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 이르는 길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들고 흩어진다는 의미를 지닌 운종가(雲從街)는 지금의 종로 일대를 말하며 궁궐과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던 시전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번성한 남대문의 칠패, 동대문 밖의 이현과 함께 3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내사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정비하여 개천을 만들었는데 영조대에 개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준천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도성 안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개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양의 배수시설과 도시하수를 처리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광복 이후에 1958년부터 청계천 복개공사로 덮여졌다가 2005년 청개천을 복원하면서 미흡하지만 서울 안에서 청계천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한양은 도성 안의 5부를 중심으로 관할 영역이 설정되었지만 성저십리 또는 성저오리라고 해서 도성 밖 변두리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도성 안은 행정구역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부(部)-방(坊)-계(契)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성 안에 살고 있는 인구는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에 10만여명에 이르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인구가 감소하기도 하였지만 숙종대 이후에는 20만여명을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4대문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 때문에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다가 일정한 인구 수치를 보인 것 같다.
반면에 도성 밖, 즉 4대문 밖은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한성부의 관할 영역이기도 한 도성 밖의 성저10리는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 떨어진 곳을 말하며 동쪽으로 양주, 남쪽으로 과천현, 서쪽으로 고양부에 이른다는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조하여 볼 때, 대략 오늘날과 비교하면 동쪽으로 우이동,장위동,석관동,전농동까지, 남쪽으로 한강, 서쪽으로 망원동,남가좌동,역촌동, 북으로는 북한산까지로 그 범위를 추측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도성 밖은 도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갖고 있어서 자연이 훼손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서히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과, 자연재해를 피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경제활동이 발달하면서 농업 대신에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등이 도성 밖에서 삶을 꾸려나가면서 한양의 생활공간이 점차 도성을 넘어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한양의 북부지역은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의 권력자인 왕과 그 왕실가족이 살고 이외에 그들의 생활을 돕는 관리들이 궁궐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궁궐 주변에는 왕을 도와 나라를 운영하는 관청과 교육기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양반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에 살았는데,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즉 지금의 효자동과 궁정동, 삼청동, 가회동, 안국동 일대에 권력의 중심에 있는 양반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벼슬을 못한 가난한 양반들은 남산 아래 회현동과 필동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관아를 출입하는 기술직 관리들과 아전들은 청진동과 수표교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보면, 청계천 주변에는 중인과 돈 많은 상인들이 거주하고 궁궐에서 잡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복궁 주변인 누하동,적선동,사직동 일대에서 생활하였다. 농민 대다수는 신촌,도화동,제기동,종암동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마포 일대 한강변에는 객주와 경강상인,어부들이, 서린동,다동 등지에는 기생이, 혜화동에는 백정이 모여서 도시생활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성벽에 켜켜이 새겨진 ‘역사의 나이테’ [유네스코 등재 도전 한양의 수도성곽]
현재위치테마산행서현우 2026.02.06
(1) 르포 _ 탕춘대성~한양도성
혜화문에서 끊겼다가 성북역사문화공원에서 다시 시작되는 한양도성에 아침햇살이 드리우고 있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한양도성까지 ‘한양의 수도성곽’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도전한다. 올 2월에 신청서를 내면 여름에 현장실사단이 와서 2개월간 세밀하게 살펴보고, 최종적으로는 내년 7~8월 본회에서 등재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확률은 매우 높다는 후문. 오며가며 늘 보던 산성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다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누구보다 더 감회가 새로운 이들이 있다.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지난 15년간 노력한 이들이다. 서울시, 고양시 등 정부부터 학계, 시민단체까지 다양하다.
그중 한 곳이 서울KYC다. 이들은 산성으로 따지자면 성벽 가장 아래에 있는 성돌이다. ‘도성길라잡이’라는 자원활동가를 매년 양성해 시민들에게 도성의 가치와 역사를 현장에서 설명하는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단체다. 수도성곽에 대한 학술적으로 심오한 연구가 있어도 시민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신념 하나로 보수는 하나도 받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도성길라잡이 방규원 대표와 함께 유네스코 등재에 도전하는 수도성곽 일부 구간을 같이 걸어봤다.
한양도성은 한 공간에 조선 태조 때 쌓은 돌과 현대에 쌓은 여장이 혼재하고 있다.
겉보기로 성벽이 쌓인 연도 예측하는 법
한양도성은 도읍을 감싸는 내사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지은 총 18km의 성곽으로 현재는 70% 정도만 그 형체가 보존됐거나 새로 수리돼 남아 있다. 가장 오랜 기간(514년) 수도를 지킨 성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 심부 계곡을 감싸는 능선 12.7km에 건설돼 있고, 탕춘대성은 이 둘을 잇는 5km의 성이다.
성북역사문화공원에 들어선 서울 한양도성 안내판.
이러한 한양의 수도성곽은 산꾼들과 걷기여행가들에게도 친숙한 공간이다. 한양도성은 이를 따른 도시걷기길이 잘 조성돼 있으며, 북한산성은 곳곳에 있는 성문을 일시에 순례하는 12~14성문 종주의 인기가 높다. 두 성에 비해 비교적 이름값이 덜 알려진 탕춘대성도 향로봉으로 올라붙는 능선 코스를 끼고 있어 북한산을 자주 찾는 등산객들에겐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 익숙한 길이라 더더욱 수도성곽의 가치를 짧고 굵게 보기 위해선 어딜 걷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됐다. 방 대표는 단번에 답을 줬다. 그는 한양도성만 100번 넘게 돌았다고 했다.
“한양도성과 탕춘대성을 같이 걷는 코스로 가시죠. 북악산과 인왕산을 이어 걸으면 됩니다. 태조 이성계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한 번에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듯 수도성곽도 마찬가지다. 그 역사는 성벽처럼 첩첩이 쌓여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성의 흔적이 약간은 남아 있었다고 하며, 현재처럼 본격적인 성곽의 형태를 이룬 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다. 조선시대에도 특정 임금이 한 번에 완성한 것이 아니다. 태조가 한양도성을 쌓고, 세종이 중건하고, 숙종이 대대적으로 재건축하며 순조도 손을 댔다고 한다.
탕춘대성을 따라 북한산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능선 거의 끄트머리부터 제대로 된 성곽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홍지문을 거쳐 능선을 따라 오른다.
현대사에서도 성곽 건축은 계속됐다. 박정희 대통령 때 김신조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 방어와 문화재 복원까지 겸사겸사할 목적으로 성벽이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성벽을 따라 걷기꾼들이 걷는다.
1월 어느 날 이른 새벽, 아직 성벽에 아침햇살조차 드리워지지 않을 무렵에 성북역사문화공원에 섰다. 성벽의 옆구리가 시루떡을 잘라놓은 듯 훤히 드러나 있다. 혜화문에서 끊긴 한양도성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돼 산을 타고 흘러 경희궁 지척까지 이어진다. 환하게 인사를 건네는 방 대표의 배낭에는 수없이 많은 한양도성 와펜이 붙어 있다.
“저희 도성 길라잡이들은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어요. 늘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문화재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에서 출발했죠. 공무원들이 할 수 없는 일 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민 하나하나에게 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전하게 되면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겠다는 답을 내렸어요. 그 이후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한양도성을 4개 구간으로 나눠서 한 개 구간을 3~4시간 정도 시계 방향으로 시민들과 같이 걷고 있습니다.”
탕춘대성의 대표 문인 홍지문과 오간수문. 1920년 홍수로 유실됐던 걸 1970년대에 복원했다.
자원봉사다. 돈은 받지 않는다.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활동가는 1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영어나 독일어 해설도 가능하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조건은 있다. 교육을 들어야 한다. 각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들과 전문가들, 역사학자, 작가 등이 전하는 시민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자 이제 백악산으로 갑시다.”
“북악산이 아니고요?”
북악산의 조선시대 명칭이 백악산이란다. 그땐 암릉이 도드라져 백白자가 붙었다가 도성의 북쪽에 있어 북악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남산도 원래는 목멱산이고, 낙산은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낙타산, 혹은 우유를 생산하는 목장이 있어 타락駝駱산으로 불렀었다. 같은 장소에 시간이 쌓이면 일어나는 일이다. 성벽도 마찬가지다.
“1392년에 이성계가 개국을 하고 1394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그리고 얼마 뒤 종묘 사직과 경복궁, 그리고 한양도성을 건축하게 되죠. 이후 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도성은 변모하게 되죠. 무너진 곳을 새로운 기술로 쌓기도 하고, 보수가 필요한 곳에 새 돌을 넣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같은 성벽에 여러 시대가 같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방 대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이 그랬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더 복잡하겠지만, 일반적 수준에서 구분하는 방법은 이렇다. 확실히 낡았고 돌들이 메주처럼 자그마하거나 길쭉한 모양새라면 초기에 쌓아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이건 현대 기술로 만들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네모반듯한 돌들은 조선 숙종이나 순조 때 만든 후기 작품이다. 채석장에서 돌을 반듯하게 잘라낸 뒤 군인들이 옮겨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돌을 본 뒤 성벽 맨 윗부분에 ‘여장’이라고 해서 총이나 화포를 쏠 수 있게 구멍이 나 있고 지붕이 씌워진 구조물들을 보면 ‘아 비교해서 보니 알겠네. 이건 진짜 현대 기술로 만든 거다’란 생각이 들게 자로 잰 듯한 테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설물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때 복원한 것이라 얼추 맞다.
“여장에는 구멍이 총 3개 있어요. 가운데는 근총안, 양쪽은 원총안입니다. 가운데는 가까운 적을 쏘는 용이고, 양쪽은 멀리에 있는 적을 총으로 쏘기 위해 만든 것이죠.”
직접 몸을 숙여 들여다보니 맞추기 쉽지 않겠단 생각이 먼저 든다. 그냥 성벽 위로 몸을 드러내고 쏘는 게 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가, 뒤이어 전쟁드라마에서 꼭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러다가 죽었던 몇 인물이 떠올라 조상들의 지혜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마무리했다.
“여장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옥개석이라고 불러요. 1차적으로는 성벽을 이루는 바위 틈 사이로 물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이 들어가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무너질 우려가 있어서 그렇죠. 전시에는 또 다른 일을 해요. 성벽 가까이 적이 붙으면 이걸 그대로 밀어서 머리 위로 떨어뜨립니다. 낙석으로 공격하는 거죠.”
어떤 옥개석은 테두리 아래쪽을 따라서 홈을 쭉 파놓기도 했다고 한다.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돌을 따라 흘러 성벽 쪽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떨어지게 만드는 선조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북악산 진짜 명당은 ‘촛대바위’
방 대표의 해설이 큰 돌덩이로만 여겨졌던 성벽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도성을 안으로 걷다가 밖으로 걷다 하니 여명을 받아 성이 붉게 물든다. 아름답다. 성이 500년 넘게 속에 품고 지켜온 도시도 잠에서 깨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북악산은 조용해졌다. 몇 년 전 재개방됐을 때 야심차게 문을 열었던 말바위 안내소는 지난 2년간 폐쇄된 채 방치됐다고 한다. 다른 안내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면 다시 생명력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길은 숙정문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북대문이다. 사대문 중 문 양옆이 성벽으로 이어진 것으론 유일하다. 숙정문 현판은 왼쪽부터 읽도록 돼 있다. 현대에 만들었다는 의미다. 방 대표는 “사람이 다니는 문이 아니었다”고 했다.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성북동. 부촌과 서민 마을이 공존하는 성북동 특유의 독특한 마을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성북동에서 궁궐로 갈 때 굳이 힘겹게 고개를 올라 이 문을 지날 필요가 없어 보이죠? 옛날에도 그랬대요. 혜화문을 거쳐서 갔죠. 예전에는 늘 이 문을 굳게 닫아뒀다고 합니다. 북쪽으로 음의 기운이 들어온다고 해서 아녀자들이 바람나지 않게 닫아놔야 한다고 믿었다고 해요. 하지만 열 때가 있었죠. 기우제를 지낼 때에요. 그땐 음의 기운이 들어와 비를 내리게 해야 한다고 숙정문은 열고 숭례문은 닫았어요. 기청제는 반대로 했죠.”
숙정문. 한양도성의 북대문에 해당한다.
괜히 음의 기운이 세다니 겨울바람이 더 차게 느껴진다. 옷깃을 여미고 성벽에 붙어 길을 잇는다. 차츰 고도가 올라가자 수도 서울의 풍광이 점점 더 훤칠해진다. 등산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촛대바위’가 있다는 이정표에 이르러서 갈지 말지 고민하는데 방 대표가 등을 떠민다.
“여기가 진짜 명당입니다. 가서 보면 알아요.”
20m쯤 걸어가자 촛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방 대표는 여기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더 이끈다. 시내 방면으로 넓게 조성해둔 데크가 목적지다. 그의 손을 따르자, 그곳에 경복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악산 촛대바위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세종대로.
“여기가 북악산에서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세종대로를 일직선으로 볼 수 있는 곳이에요. 북악산 정상이 정북방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진짜 명당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곳에서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해요. 참, 음주는 절대 금물입니다. 어떤 분들은 국립공원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적지라 법으로 금지돼 있어요.”
위풍당당한 궁궐 위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북악산 하이라이트는 이제 시작이다. 청와대와 백운대의 이름을 한 자리씩 땄다는 청운대, 북악산 정상 등 조망이 시원하게 열리는 포인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곡성이다. 효과적으로 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일부러 성벽 일부분을 돌출시킨 지형이다. 이곳에선 북한산 주능선도 한눈에 담을 수 있으며, 남산타워, 경복궁 등 서울의 주요 랜드마크를 멋들어진 곡선을 이루며 굽이치는 한양도성과 함께 바라볼 수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권에서 가장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는 곡성.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도성과 함께 서울 시내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인왕산 자체가 성이다
이제 능선을 따라 창의문으로 내려선다. 내리막길에선 평창동이 한눈에 보인다. 이름이 창고란 뜻을 머금고 있는 건 북한산성이 만들어졌을 때 이 마을부지에 무기와 식량을 보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부촌의 명성을 얻은 건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의도적으로 개발하게 된 이후다.
무기와 식량을 보관했던 평창동과 그 너머 북한산. 능선 너머에 북한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창의문은 특이한 점이 몇 개 있어요. 여기 현판 뒤에는 인조반정 당시 공신들 45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당시 반정을 일으킨 병사들은 창의문을 돌파해서 창덕궁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현판을 잘 보면 급이 나뉘어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공에 따라 1등부터 3등까지 나눴다고 합니다. 자기가 세운 공이 제법 큰 것 같은데 제대로 칭찬을 못 받으면 화가 날 수 있겠죠? 이괄이 그랬습니다. 난을 일으켜 도성 장악까지 성공했으나 끝내 토벌 당했죠.”
인센티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며 이제 인왕산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들머리다. 언덕 아래는 자하문터널이 지난다. 방 대표는 “자하는 개성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개성에 자하동이라는 양반들이 사는 부촌이 있었는데 그곳이 평창~구기 일대의 지형과 닮았다고 해서 이곳에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X리단길이니 X트럴 파크니 갖다 붙여 부르던 것도 나름 전통 있는 행위였다.
인왕산 능선으로 성벽을 따라 오른다. 줄곧 계단이다. 날이 추운 탓인지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아 등산로에 쌓인 눈이 거의 그대로다. 방 대표는 “여기에 각자성석이란 것이 있다”고 일러준다. 자세히 보니 성벽에 이름을 새겨 넣은 흔적이다. 흔한 낙서가 아니다. 해당 구간의 성벽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공사를 감독한 사람, 돌을 만든 사람 등이다. 한양도성 전체에 이런 흔적이 280여 개 이상 있다. 이렇게 관리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탓에 해당 구간이 무너지면 그 책임자를 정확히 불러서 A/S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의 후손을 찾을 수 있을까? 방 대표는 “그건 아마도 힘들 것”이라며 웃어 넘겼다.
한양도성 상단에 뚫린 구멍은 총안이라 부른다. 적을 총이나 활로 쏠 수 있도록 만든 구멍이다.
능선까지 모두들 잠깐 입을 닫았다. 들숨날숨이 길게 이어지며 고도를 올린다. 총안으로 목인박물관 목석원의 정원이 보인다. 나무나 돌로 된 여럿 조각상들을 전시해 둔 공간이다. 이어 한양도성 부부소나무(연리지), 청와대 경비를 위한 경계시설물 터 등에 얽힌 이야기를 헤아리며 능선에 선다. 쭉 이어지던 성벽 사이가 똑 끊겼다. 여기서 기차바위로 내려서면 탕춘대성이 되는 것이다.
“탕춘대‘성’이라더니 여기선 성을 볼 수 없네요?”
“왜 볼 수 없어요? 지금 이미 그 위에 서 계신데요.”
그렇다. 기차바위가 곧 성이다. 워낙 험준하고 가파른 지형이기 때문에 이곳을 공격해 오더라도 능선에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해 성을 따로 쌓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무리 선조의 지혜가 뛰어나다지만 최근에 한 적이 이 자연의 성을 넘었다. 산불이다. 지난 2023년 봄에 일어났던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일부 솎아베기와 새로운 나무를 심은 구역이 있으나 모든 게 어느 정도 회복세에 들어서려면 7~8년은 더 지나야 될 듯 해 보인단다.
존재 자체로 성의 역할을 했던 인왕산 기차바위.
능선을 한참 따라 북쪽으로 내려선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때쯤에야 세월의 흔적이 제대로 엿보이는 묵은 돌들이 담처럼 쌓이기 시작하는 구간이 나온다. 탕춘대성이다. 이 성벽은 여기서부터 시작해 홍제천을 건너 북한산 향로봉을 향해 올라간다. 방 대표는 “탕춘대성은 한양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임금이 피신을 가는 루트로 숙종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왜 굳이 성까지 쌓으면서 북한산성으로 가는 걸 고집했을까? 방 대표는 “선대 임금인 인조와 선조 때 몽진(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란함)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라고 했다. 숙종 당시 한양 인구가 20만 명 정도 됐는데, 북한산성의 수용 가능 인원이 20만 명이다. 아마도 단 한 명의 백성도 버리지 않고 지킬 생각이었던 듯하다. 후대의 영조도 그 뜻을 이어 탕춘대성을 고쳐 쌓았다. 어쩌면 한양의 수도성곽이 갖는 진정한 가치는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단순히 성이 멋있거나 오래됐고, 크고 긴 점 때문이 아니라 이 돌덩이들 하나하나에 시대를 넘어 한양을, 더 나아가 단순히 한양이란 땅이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일 터다.
서울시청 제공.
산행길잡이
성곽을 따른다는 점으로 인해 장단점이 뚜렷하다. 들머리인 성북역사문화공원부터 홍지문까지 줄곧 성곽을 눈에 담고 걸을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샛길을 만나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이정표조차 굳이 챙겨보지 않아도 문제없다. 다만 성곽을 따라 만들어진 데크나 돌계단이 코스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에 편안한 흙길 구간은 짧다. 전반적으로 오르내림은 있으나 어렵진 않다.
네이버지도에서도 쉽게 코스를 확인할 수 있다. 초록색 실선으로 된 등산로 표시나 지도를 확대하면 나오는 성곽 궤적을 따르면 된다. 성북역사문화공원에서 와룡공원으로 오르는 길과 북악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인왕산으로 접속하는 구간은 초록색 등산로 표시가 생략되거나 약간 비껴 있는데 실제 성곽을 따르는 길이 둘 다 있다. 창의문에선 도로 건너 부암동 문화관광 안내판이 있는 곳 옆으로 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되며, 와룡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성곽 안팎을 오간다.
교통
성북역사문화공원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다. 날머리인 홍지문에서 경복궁역 방면으로는 1711번, 1020번, 마포 방면으로는 110B국민대, 163번 버스가 수시 운행하며, 은평구 쪽으로는 7730번 버스가 다닌다.
맛집(지역번호 02)
부암동하면 자하손만두(379-2648)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일체의 조미료를 배제해 삼삼하면서도 깊은 맛의 만둣국(2만 원)을 먹을 수 있다. 끼니때가 아니라면 클럽에스프레소(764-8719)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5,000원)을 마시고 호흡을 정돈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다. 다양하고 특색 넘치는 원두들이 많아서 기호에 따라 주문하면 된다.
홍지문에선 팔선생(0507-1358-8843)의 이름값이 높다. 화교 출신의 주인장이 오랫동안 운영한 정통 중국 요리 전문점으로 합리적 가격과 풍성한 양, 신선한 맛을 자랑한다. 짬뽕(9,000원), 삼선짬뽕(1만1,000원), 짜장면(8,000원), 탕수육(小 2만4,000원, 大 3만5,000원).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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