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門에서 華岳까지-035] 잉애재와 선의산
상여 닮은 선의산 정상바위, 비슬기맥 유일한 철계단 올라야
▲ 남쪽에서 바라 본 선의산.
중앙의 불룩한 부분이 최고봉이고 오른쪽(동편) 끝 봉우리가 시루봉이다.
맨 왼편 714m '고동봉'에서 사진 앞쪽으로 ‘진등’이 내려서고 있다.
토함산 능선(641m봉 남릉) 서편은 ‘관하천’ 유역이다.
바리박산 이후 지속돼 온 ‘동곡천’ 수계가 그로써 마감되는 것이다.
거기서 시작되는 관하천 유역 북편담장 격 산줄기는
641m봉~벗곡재(420m)~삿이등(520m)~잉애재(373m)~선의산(756m)~말마리재(478m)~용각산분기점(650m) 사이,
비슬기맥 중간토막 10여㎞다.
이 구간은 큰 지표들에 의해 세 단락으로 세분될 수 있다.
① 641m봉~잉애재(3.75㎞, 걷는 시간 80분), ② 잉애재~선의산(3㎞, 90분), ③선의산~용각산분기점(3.75㎞, 70분) 등이다.
괄호 속의 거리와 걷는 시간이 비례 않는 건 오르내림 차이 때문이다.
반대방향으로 걸으면 소요 시간이 100분, 60분, 80분으로 달라진다.
641m봉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첫 단락 북편은 경산 남산면 사림리(沙林里)다.
남편으론 청도 매전면 금천리(錦川里)의 ‘마당(말리)’ 마을과 ‘잉애태’ 마을이 이어서 펼쳐진다.
산줄기 흐름은 대체로 내리막이며 25분 이내(역방향 때는 30분)에 사실상의 첫 잘록이인 해발 420m재로 떨어진다.
마당말리 입구와 재 너머 사림리에서 선명히 올려다 보이는, 두 마을 연결 고리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옛 도보생활 시대에 이 재는 지금 찻길이 나 있는 서편 잉애재보다 이용자가 많던 중요한 재였다.
경산 자인장을 내왕하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장은 지금의 마트와 달리 물건을 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산품도 내다 팔아야 하는 필수공간이었다.
이 재에선 일대의 거점이던 자인장이나 동곡장(청도)이나 마찬가지 30리 거리라 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재의 이름 또한 불투명하다.
‘복고개’라 채록해 둔 게 있는가 하면, 너무 높아 옷을 벗고 넘어야 해 ‘벗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람도 있다.
반면 마당말리 마을 어르신은 그 모두를 부정하면서 ‘벅곡’이 본명이라고 못 박았다.
재는 ‘벅곡재’, 그 아래 골은 ‘벅곡골’이라는 것이다. 그런 중에 이 시리즈처럼 ‘벗곡재’라 표기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마당말리’는 줄여 ‘마당’이라고도 불리는 15호 남짓한 마을이다.
금천리 최상부 공간을 나눠 차지한 ‘잉애태’ 마을과는 925번 지방도를 통해 금방 연결된다.
하나 마당마을 뒤의 벗곡재와 잉애태 마을 뒤의 잉애재 사이 산길은 무려 3㎞나 된다. 남북으로 오락가락하는 게 원인이다.
산길은 벗곡재(420m)를 출발하자 말자 520m봉으로 100m 솟는다.
이 뚜렷한 봉우리를 마당마을서는 ‘삿이등’이라 불렀다.
이후 산줄기는 해발 385m로 되레 더 낮게 추락했다가 100여m를 만회해 486m봉에 오른다.
경산의 남산면과 남천면을 가르는 긴 산줄기가 북으로 출발해 나가는 분기점이다. 그 초입에 솟은 게 경산 삼성산(555m)이다.
삿이등(520m)~분기봉(486m)~삼성산능선 사이 산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싼 한가운데에 북편 사림리 저수지가 자리했다.
486m봉서 10여 분이면 내려서는 ‘잉애재’(373m)는 청도 매전면과 경산 남천면을 잇는 지방도 고갯길이다.
매전과 대구를 연결하는 최단거리 코스여서, 옛날 약재 등을 짊어지고 대구 약전골목을 오갈 때 주로 넘던 고개라 했다.
그 남쪽은 아까 본 금천리고, 북에는 신방리(新方里)-송백리(松柏里) 순으로 분포했다.
그러나 이 재 이름은 더 모호하다. 예로부터 ‘잉애태’라는 이름으로 가리켜져 왔던 그 재인지조차 유동적이다.
그 아래 잉애태 마을서는 ‘고또배기’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다.
국가기본도는 여기가 아니라 더 동쪽 486m봉 어디에다 ‘잉어재’라 표기해 놨다.
그 북편 신방리 골짜기는 ‘잉어골’, 거기 있는 저수지는 ‘이어지’라고도 했다.
‘이어’는 ‘잉어’의 한자 본딧말이다. 그런데도 산줄기 남쪽 여러 마을 어르신들은 이 재를 ‘잉애태’라 부르고 있었다.
‘태’는 ‘티’(고개)의 방언이니 ‘잉애재’라는 뜻인 셈이다. [주① : 비슬지맥 지형도 참고]
▼ 참고자료
하지만 이 재가 ‘잉애재’가 맞다 하더라도 ‘잉애’가 무엇인지는 추가로 밝혀져야 할 과제다.
그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쓰는 잉애태 동네 어떤 이는 그걸 잉어라고 주장했다.
마을 뒤 골짜기가 그 물고기같이 생겨 ‘잉어터’가 됐다는 얘기다.
국가기본도는 이 재 자리에다 ‘이현재’라 적어 놨다. ‘잉어 이’자와 ‘고개 현’자를 합친 조어다.
뜻에서 동일한 ‘잉어재’와 ‘이현재’를 음으로만 서로 다르게 분식해 여기저기 흩어놓은 꼴이다.
그러나 ‘잉애’가 잉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발음 때는 ‘잉’에 악센트를 줬다.
물고기 잉어와는 전혀 다른 발음 방식이다. 그렇게 발음하는 ‘잉애’는 베틀 부속품인 ‘잉앗대’의 ‘잉아’다.
그게 발음하기 좋게 변해 ‘잉애’가 된 것이다.
잉앗대 제작을 생계 삼던 옛날 어떤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깔려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잉애태 마을 뒤 바위가 잉앗대 모양을 해 그렇게 됐다는 설도 있었다.
잉애재서 선의산 사이 산줄기는 대체로 꾸준한 오름세다.
출발 직후 441m봉으로 향하는 10여 분, 그 다음 594m봉 오르는 20여 분 간이 힘든 구간이다.
거기서 25분여 더 가서 도합 55분여 만에 도달하는 659m봉은
금천리 아래쪽 관하리와 그 서편의 두곡리 공간을 가르는 지릉 분기점이다.
이 지릉은 동편 잉애잿길과 서편 곰태잿길이 만나는 20번국도 변 삼거리까지 무려 4㎞나 내리달린다.
659m봉서 내려서는 640m재로 두곡리 암자골 등산로가 연결돼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 등산로가 거쳐 올라온 숲실-암자골 골짜기는 640m재 다음의 705m봉에서 한눈에 조망된다.
주변서 드물게 특별히 ‘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특출한 바위덤 절벽 전망대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보면 암자골로 내려서는 산줄기들의 기세가 그야말로 용이 모여드는 것 같다.
시루봉서 5분여 내려서면 684m재이고, 그 인접 지점서는 등산로가 갖춰진 큰 산줄기가 북쪽 경산 송백리를 향해 내려선다.
도합 90여 분 걸려 도달하는 선의산(756m) 정상부도 비슬기맥선 유례 드문 암괴봉우리다.
‘맘산바우’라 불리는 그 암봉에 가설된 철계단 또한 기맥서 유일하다.
그런 특별함에 걸맞게 선의산 정상에선 ‘온 세상’이 다 보인다.
남쪽 멀리로는 운문분맥 산줄기, 북으로는 경산시가지 뒤로 팔공산이 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 경산시청이 세워둔 예의 새천년 기념 표석은
“남천면 주산으로 선녀가 춤추는 형상이어서 선의산이라 한다”고 써 뒀다.
하지만 ‘仙義’(선의)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해득되지 않는 한자조어일 뿐이다.
춤추는 선녀와 전혀 무관하다. 표석의 설명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경북마을지 기록과 주변 마을 어르신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선의’는 ‘생이’의 음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인을 무덤으로 모셔가는 ‘상여’의 경상도식 발음이 생이다. 상여를 이곳서는 ‘생기’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산은 ‘생기산’, 그 북편 큰 골 및 거기 있던 마을은 ‘생기골’이라 불렀다.
산이 상여 같이 생겨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다.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생기골은 경산 쪽 선의산 주 등산로 시점인 도성사 안 계곡이다.
송백1리에 속하는 그 골은 사육신 박팽년의 노복이 선생의 후손을 숨겨 대를 잇게 한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인접 송백2리 입구엔 발해 대조영의 후손들 세거지임을 들어 스스로 ‘발해마을’이라 알리는 표석이 서 있기도 하다.
돌림병을 막아 주는 ‘풍신’이 된 ‘전영동’이란 신인(神人)이 인근에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사람을 살리고 흥하게 하는 터가 상여 터인가 보다.
하지만 산의 남쪽 청도 두곡리 어르신은 ‘선의산’이란 이름을 매우 거북해했다.
“옛날부터 마암산이라 불러왔는데 지금 와서 왜 선의산이라 하느냐”는 것이다.
말씀대로 ‘馬巖山’(마암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산현 조에서부터 나타나는 명칭이다. ‘남쪽 21리에 있는 현의 진산’이라 했다.
경산 사람들이 이 산을 ‘마암산’이라 부른 흔적은 지금도 있다.
그 꼭대기 암괴를 ‘맘산바위’ 혹은 ‘망산바우’ ‘만세바우’라 부르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때 첫 지형도 제작 과정서 ‘마암산’이 묻히고 ‘선의산’이 채택됐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사연이 복잡한 선의산을 두곡리 입구서 보면 정상 봉우리보다는 714m봉이 더 높아 보인다.
680m재를 사이에 두고 정상봉서 서쪽으로 15분가량 더 간 곳에 솟은 실질적인 마암산 제2봉이 그것이다.
두곡리 어르신은 이걸 ‘고동골 말랭이’라 불렀다. ‘고동봉’ 정도의 이름을 붙여주면 소통에 좋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는 남동쪽으로 ‘진등’(긴등·長嶝)이라 불리는 산줄기가 분기해
두곡리 들머리 마을회관까지 내려서며 지나온 ‘암자골’과 다음의 ‘절골’ 공간을 나눈다. 그 암자골 곁가지 골이 ‘고동골’이다.
글 :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 정우용 특임기자 - 2010년 08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