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
며칠 전 친구 여동생 S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어떻게 지내셔요? 힘드시죠? 기운 내셔요." 유선을 통한 S의 음성은 예전보다 생기 있게 들렸다.
"고마워, 많이 적응됐나봐. 동생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고생했던 터라 건강이 염려되어 물었다.
그녀는 새벽 6시에 수영장에 가서 운동을 하며 심신을 단련한다는 것과 맹인 청년을 매일 그곳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청년은 한 손에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훈련견 목에 묶여있는 줄을 잡고 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온다고 한다. 안전요원에게 자기 주인을 인계하고 나면 훈련 견은 한쪽에 앉아서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본다. 청년은 안전요원의 도움으로 물속에 들어가 한 라인을 혼자 사용하며 수영을 즐긴다. 앞 못 보는 소경이지만 항상 입이 찢어지게 웃는 행복한 모습이다. 그녀는 청년을 통하여 많은 걸 느꼈고 진정으로 감사를 알게 되었노라고 하였다.
정상인들 생각에는 그 청년에게 무슨 웃을 일이 있을까싶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게 분명하다. 맹인이라는 장애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섰다. 어찌 보이지 않는 세상이 힘들고 두렵지 않을까 마는 이른 새벽부터 자신을 단련하느라 애쓴다. 그에게 이처럼 강한 의지와 삶의 목표가 있는 한 건너지 못할 강은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리를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가난이라는 어려움을 희망과 행복으로 승화시키며 살았던 화가 이중섭. 그는 너무도 극빈자였다.
나희덕 시인은 제 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에서 이중섭의 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이중섭은 침울한 혼란기의 가난 속에서도 명작을 남겼다.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고 관에 가까울 정도의 방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지만, 그는 그 지독한 가난을 고통이나 좌절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늘 그의 그림 속에서 모델이 된 가족들은 밝고 풍요로웠다. 희망이 있어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몸을 부딪치며 살았지만 사랑하는 부인 남덕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가족은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만일 풍요 속에서 예술적 갈등 없이 작가생활을 했다면 그의 작품세계는 오히려 빈곤했을지도 모른다. 가난에서 온 단순하고 순수한 삶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어져 다른 화가와는 판이한 작품을 잉태한 셈이다.
나 역시 상황은 다르지만 일생일대의 엄청난 사고를 겪었고 지금도 힘겨운 생활이나 이 현실이 우리 가족에게 100% 불행한 삶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기를 망설인다.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을 보기가 민망해서 그렇다. 그러나 막상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되면 어떻게 만날까 하고 내내 염려했던 건 공연한 기우였음을 곧 알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 방문 전에 사정이 어떤가 묻는 전화가 걸려온다. 남편이 피곤하여 싫어하지 않는 이상 우리 가족은 '오세요.' 라고 흔쾌히 대답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자연스레 손님을 맞아들인 건 아니었다.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했더니 몇 달이고 우리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도인이 아니고서야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고 사는 건 우울증을 가증 시킬 뿐이었다. 아니 되겠다싶어 외부를 향하여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우리 집을 개방해 버렸다. 지금은 남편이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잘 웃는다. 그러다 보니 집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다.
조촐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우리는 행복하다. 편안했던 고국생활도, 고생스러웠던 이민생활도 남의 일인 양 기억에서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어떤 명예나 권력, 재력까지도 우리와는 무관하다. 그렇게 집착했던 사업장과 일중독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소박한 일상 속에서 무욕의 삶을 산다는 게 이리도 가볍고 편할 줄은 몰랐다.
가끔 텔레비전 프로에서 힘든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된다. 어떤 가정은 남편이 아내를, 또는 아내가 남편을 병간호하는 노인들이 있는가하면 어린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기막힌 사연도 있다. 그들에게는 작은 희망도 보이지 않고 비극에 가까운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묘한 건 한결같이 서로를 보며 사랑스런 미소를 짓는다는 점이다.
우리 가족이 남편의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기쁨을 금치 못하는 것 마냥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차도가 생기거나 기분만 좋아 보여도 식구들의 얼굴은 금세 보름달처럼 밝아진다. 더 악화되지만 않는다 해도 다행이라 여긴다.
행복과 불행은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님을 새삼 절감한다.
친구의 동생이나 맹인 청년, 이중섭 작가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인간의 어떤 한계에 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자는 인생의 승리자이다.
역경의 길목에서 만난 행복, 이 행복이야말로 세상의 무엇과도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대장간의 칼 마냥 고통 속에서 연단 된 아주 단단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아내라는 게 좋다. 나는 허물어져 가고 쓰러져 가는 남편 육신의 버팀목으로 그리고 남편은 내 정신의 버팀목으로 우리는 서로를 받쳐주고 기대주며 산다. 가슴속에 조금씩 차오르는 행복에 겨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