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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설 42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42
二十七, 십정품(十定品) 3
서문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는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수행자가 보리심을 발하여 불도(佛道)를 구하려고 육바라밀 등 여러 가지 수행을 하더라도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말고 원융자재하게 하도록 이와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보리심을 발하되 발하는 것 없이 발할 것이며,
불도(佛道)를 구하되 구하는 것 없이 구할지니라.
미묘한 수행은 행하는 것 없이 행하며,
참다운 지혜는 짓는 것 없이 저절로 짓느니라.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되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인자함을 행하되 인연이 없는 곳에까지 깊이 이르라.
주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며,
지키는 바 없이 계를 지키라.
정진을 닦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을 알고,
인욕을 닦되 손상됨이 없음을 알라.
반야는 경계가 생멸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선정은 마음이 머물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몸이 없음을 보되 모양을 잘 갖추고,
말 할 것이 없는 이치를 알고 법을 설한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의 도량을 건립하고,
본성이 텅 빈 세상을 잘 장엄하라.
환영과 같은 공양꺼리를 많이 장만하여
그림자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리라.
참회는 죄가 본래 없는 줄을 알고하며,
법신은 영원하지만 오래 머물기를 권청하라.
회향은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알고하며,
누구에게나 복은 진여와 같지만 따라서 기뻐하라.
남을 찬탄하나 너도 나도 텅 비어 없는 것.
부처님과 중생이 평등함을 발원하고,
그림자와 같은 법회에 예배하고 동참하여
도량을 거닐되 발은 늘 허공을 밟으라.
향을 사르되 생멸이 없는 이치를 잘 알고,
경전을 독송하되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라.
꽃을 뿌리는 것은 집착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며,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번뇌를 버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메아리와 같은 육바라밀을 행하고,
허공 꽃과 같은 만 가지 덕행을 닦으라.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 바다에 깊이 들어가
환영과 같은 법문에서 항상 노닐라.
본래 물들지 않는 번뇌를 맹세코 끊어
유심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라.
실제적인 이치의 땅을 밟고,
얻을 것이 없는 관법의 문에 출입하라.
거울에 비친 그림자의 마군을 항복받으며,
꿈속의 불사(佛事)를 크게 지으라.
환영과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한 보리를 다 함께 증득하라.”
2015년 3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차례
(8) 일체중생차별신(一切衆生差別身) 대삼매
<1> 삼매에 머물면 열 가지 집착이 없게 된다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一切衆生差別身三昧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에 得十種無所着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於一切刹에 無所着하며 於一切方에 無所着하며 於一切劫에 無所着하며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 삼매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열 가지 집착이 없음을 얻느니라.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온갖 세계에 집착이 없고, 온갖 방위에 집착이 없고, 온갖 겁에 집착이 없고,
於一切衆에 無所着하며 於一切法에 無所着하며 於一切菩薩에 無所着하며 於一切菩薩願에 無所着하며 於一切三昧에 無所着하며 於一切佛에 無所着하며 於一切地에 無所着이니 是爲十이니라
온갖 대중에게 집착이 없고, 온갖 법에 집착이 없고, 온갖 보살에 집착이 없고, 온갖 보살의 원(願)에 집착이 없고, 온갖 삼매에 집착이 없고, 온갖 부처님께 집착이 없고, 온갖 지위에 집착이 없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십정품(十定品) 중에서 세 번째 권이다. 열 가지 삼매 중에 여덟 번째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다.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열 가지 집착 없음을 얻는다. 온갖 세계에 집착이 없고, 온갖 방위에 집착이 없고, 온갖 겁에 집착이 없는 등이다.
<2> 삼매에 들고 삼매에서 일어남
1) 몸과 몸에서 들고 일어나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此三昧에 云何入이며 云何起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此三昧에 內身入하야 外身起하며 外身入하야 內身起하며 同身入하야 異身起하며 異身入하야 同身起하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어떻게 들어가고 어떻게 일어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안 몸[內身]으로 들어가 바깥 몸에서 일어나고, 바깥 몸으로 들어가 안 몸에서 일어나며, 같은 몸으로 들어가 다른 몸에서 일어나고, 다른 몸으로 들어가 같은 몸에서 일어나며,
人身入하야 夜叉身起하며 夜叉身入하야 龍身起하며 龍身入하야 阿修羅身起하며 阿修羅身入하야 天身起하며 天身入하야 梵王身起하며 梵王身入하야 欲界身起하니라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 야차의 몸에서 일어나고, 야차의 몸으로 들어가 용의 몸에서 일어나며, 용의 몸으로 들어가 아수라의 몸에서 일어나고, 아수라의 몸으로 들어가 천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천신의 몸으로 들어가 범왕의 몸에서 일어나고, 범왕의 몸으로 들어가 욕심세계[欲界]의 몸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들어가고 일어나는 온갖 작용들을 낱낱이 밝혔다. 안 몸과 밖의 몸과 같은 몸과 다른 몸과 사람의 몸과 야차의 몸과 용의 몸과 아수라의 몸 등에서 서로서로 원융하게 들어가고 일어나는 모습을 밝혔다.
2) 육취(六趣)에서 서로 들고 일어나다
天中入하야 地獄起하며 地獄入하야 人間起하며 人間入하야 餘趣起하니라
“천상에서 들어가 지옥에서 일어나고, 지옥에서 들어가 인간에서 일어나며, 인간에서 들어가 다른 갈레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하늘과 지옥과 인간과 그리고 나머지 온갖 갈레에 들어가고 일어나는 어떤 공간에서도 장애가 없는 호상원융(互相圓融)의 삼매 작용을 밝혔다.
3) 하나와 많은 몸에서 서로 들고 일어나다
千身入하야 一身起하며 一身入하야 千身起하며 那由他身入하야 一身起하며 一身入하야 那由他身起하니라
“또한 일천 몸에서 들어가 한 몸에서 일어나고, 한 몸에서 들어가 일천 몸에서 일어나며, 나유타 몸에서 들어가 한 몸에서 일어나고, 한 몸에서 들어가 나유타 몸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많고 적음이 서로서로 원융하게 삼매에 들어가고 일어나는 것을 밝혔다.
4) 사주(四洲)세계에서 서로 들고 일어나다
閻浮提衆生衆中入하야 西瞿陀尼衆生衆中起하며 西瞿陀尼衆生衆中入하야 北拘盧衆生衆中起하며 北拘盧衆生衆中入하야 東毘提訶衆生衆中起하며 東毘提訶衆生衆中入하야
“염부제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서 서구타니(西瞿陀尼)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서구타니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북구로(北拘盧)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북구로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동비제하(東毘提詞)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동비제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三天下衆生衆中起하며 三天下衆生衆中入하야 四天下衆生衆中起하며 四天下衆生衆中入하야 一切海差別衆生衆中起하며 一切海差別衆生衆中入하야 一切海神衆中起하니라
삼천하(三天下)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삼천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사천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사천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차별한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일체 바다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신장들 가운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공간적으로 동서남북 사주(四洲)세계에서 서로 삼매에 들어가고 삼매에서 일어나는 것을 밝힌 내용이다.
5) 사대종(四大種)에서 서로 들고 일어나다
一切海神衆中入하야 一切海水大中起하며 一切海水大中入하야 一切海地大中起하며 一切海地大中入하야 一切海火大中起하며
“일체 바다 신장들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수대(水大) 가운데서 일어나고, 일체 바다 수대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지대(地大) 가운데서 일어나며, 일체 바다 지대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화대(火大) 가운데서 일어나고,
一切海火大中入하야 一切海風大中起하며 一切海風大中入하야 一切四大種中起하며 一切四大種中入하야 無生法中起하며 無生法中入하야 妙高山中起하며
일체 바다 화대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바다 풍대(風大) 가운데서 일어나며, 일체 바다 풍대 가운데서 들어가 일체 사대종(四大種) 가운데서 일어나고, 일체 사대종 가운데서 들어가 생사(生死) 없는 법 가운데서 일어나며, 생사 없는 법 가운데서 들어가 수미산[妙高山] 가운데서 일어나고,
妙高山中入하야 七寶山中起하며 七寶山中入하야 一切地種種稼穡樹林黑山中起하며 一切地種種稼穡樹林黑山中入하야 一切妙香華寶莊嚴中起하니라
수미산 가운데서 들어가 칠보산(七寶山) 가운데서 일어나며, 칠보산 가운데서 들어가 모든 땅에 갖가지로 심고 가꾸는 나무숲 흑산[一切地種種稼檣樹林黑山]가운데서 일어나고, 모든 땅에 갖가지로 심고 가꾸는 나무숲 흑산 가운데서 들어가 온갖 미묘한 향과 꽃과 보배로 장엄한 가운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로 사대종(四大種)에서 삼매에 서로 들고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사대종은 지수화풍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처음 일체 바다 신장들에서 시작하여 일체 바다 수대(水大)와 지대(地大)와 화대와 풍대와 다시 사대종과 무생법과 묘고산 등으로 자재하게 이어졌다.
6) 여러 세계에서 서로 들고 일어나다
一切妙香華寶莊嚴中入하야 一切四天下下方上方一切衆生受生中起하며 一切四天下下方上方一切衆生受生中入하야 小千世界衆生衆中起하며 小千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中千世界衆生衆中起하며
“일체 묘한 향과 꽃과 보배로 장엄한 가운데서 들어가 모든 사천하의 아래와 위에서 온갖 중생이 태어나는 가운데서 일어나고, 일체 사천하의 아래와 위에서 온갖 중생의 태어나는 가운데서 들어가 소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소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중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中千世界衆生衆中入하야 大千世界衆生衆中起하며 大千世界衆生衆中入하야 百千億那由他三千大千世界衆生衆中起하며 百千億那由他三千大千世界衆生衆中入하야 無數世界衆生衆中起하니라
중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대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대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백 천억 나유타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백 천억 나유타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수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여러 세계에 서로 들고 일어나는 것을 밝혔다.
7) 많고 많은 중생에서 서로 들어가고 일어나다
無數世界衆生衆中入하야 無量世界衆生衆中起하며 無量世界衆生衆中入하야 無邊佛刹衆生衆中起하며 無邊佛刹衆生衆中入하야 無等佛刹衆生衆中起하며 無等佛刹衆生衆中入하야 不可數世界衆生衆中起하며
“수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한량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한량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그지없는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그지없는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같을 이 없는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같을 이 없는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不可數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不可稱世界衆生衆中起하며 不可稱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不可思世界衆生衆中起하며 不可思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不可量世界衆生衆中起하며 不可量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不可說世界衆生衆中起하며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일컬을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일컬을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생각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생각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不可說世界衆生衆中入하야 不可說不可說世界衆生衆中起하며 不可說不可說世界衆生衆中入하야 雜染衆生衆中起하며 雜染衆生衆中入하야 淸淨衆生衆中起하며 淸淨衆生衆中入하야 雜染衆生衆中起하니라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더러운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며, 더러운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깨끗한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깨끗한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더러운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다시 많고 많은 중생에서 서로 들어가고 일어나는 것과 더러운 중생들 가운데서 들어가 청정한 중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까지 원융자재하게 출입함을 밝혔다.
8) 육근(六根)에서 서로 들어가고 일어나다
眼處入하야 耳處起하며 耳處入하야 眼處起하며 鼻處入하야 舌處起하며 舌處入하야 鼻處起하며 身處入하야 意處起하며 意處入하야 身處起하며 自處入하야 他處起하며 他處入하야 自處起하니라
“눈으로 들어가 귀에서 일어나고, 귀로 들어가 눈에서 일어나며, 코로 들어가 혀에서 일어나고, 혀로 들어가 코에서 일어나며, 몸으로 들어가 뜻에서 일어나고, 뜻으로 들어가 몸에서 일어나며, 자기 처소에서 들어가 남의 처소에서 일어나고, 남의 처소에서 들어가 자기의 처소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또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다시 육근에서 서로서로 원융자재하게 들고 일어나는 것을 밝혔다.
9) 갖가지 종류에서 서로 들어가고 일어나다
一微塵中入하야 無數世界微塵中起하며 無數世界微塵中入하야 一微塵中起하며 聲聞入하야 獨覺起하며 獨覺入하야 聲聞起하며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서 들어가 수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속에서 일어나고, 수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속에 들어가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서 일어나며, 성문(聲聞)에서 들어가 독각(獨覺)에서 일어나고, 독각에서 들어가 성문에서 일어나며,
自身入하야 佛身起하며 佛身入하야 自身起하며 一念入하야 億劫起하며 億劫入하야 一念起하며 同念入하야 別時起하며 別時入하야 同念起하며
자기 몸에서 들어가 부처님 몸에서 일어나고, 부처님 몸에서 들어가 자기 몸에서 일어나며, 한 생각에 들어가 억 겁에 일어나고, 억 겁에 들어가 한 생각에 일어나며, 같은 생각에 들어가 다른 때에 일어나고, 다른 때에 들어가 같은 생각에 일어나며,
前際入하야 後際起하며 後際入하야 前際起하며 前際入하야 中際起하며 中際入하야 前際起하며 三世入하야 刹那起하며 刹那入하야 三世起하며 眞如入하야 言說起하며 言說入하야 眞如起니라
앞 즈음[前際]에 들어가 뒤 즈음에 일어나고, 뒤 즈음에 들어가 앞 즈음에 일어나며, 앞 즈음에 들어가 중간 즈음에 일어나고, 중간 즈음에 들어가 앞 즈음에 일어나며, 세 세상에 들어가 찰나에 일어나고, 찰나에 들어가 세 세상에 일어나며, 진여(眞如)에서 들어가 말하는 데서 일어나고, 말하는 데서 들어가 진여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또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다시 갖가지 종류에서 서로 들어가고 일어남을 밝혔다. 하나의 작은 먼지와 무수한 세계의 작은 먼지와 성문과 독각과 자신의 몸과 부처님 몸 등등 시간과 공간과 성인과 범부와 과거 현재 미래와 세 세상과 찰나와 진여와 언설까지 각양각색으로 원융하고 무애자재 들어가고 일어남을 밝혔다. 보살의 궁극적 삼매란 이와 같이 생각이 가능한 경지까지 걸림이 없다. 이것이 대승 삼매다.
10) 비유로써 밝히다
佛子야 譬如有人이 爲鬼所持에 其身戰動하야 不能自安하나니 鬼不現身호대 令他身然인달하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도 亦復如是하야 自身入定他身起하며 他身入定自身起니라
“불자여,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귀신에 지피는 바가 되면 그 몸이 떨리어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느니라. 귀신의 몸은 나타나지 않지마는 그 사람의 몸이 떨리게 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름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제 몸에서 선정에 들어가 다른 이의 몸에서 일어나고, 다른 이의 몸에서 선정에 들어가 제 몸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평소에는 사람의 몸에 귀신이 집힌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기보다 반신반의하였을 것이다. 1970년경 관악산 연주암에서 잠간 살 때였다. 어떤 젊은 신도가 귀신에 지피어 그 귀신을 떼어내려고 절에 온 것을 몇몇 스님들이 그 사람 앞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더니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르면서 죽으려고 하였다.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내려고 하여도 힘이 얼마나 센지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던 염불을 그만 그치니 그도 또한 잠잠하였다. 이러한 일을 몇 번 거듭하여 보았다. 그리고 형편이 안 되는 데도 그 귀신은 항상 택시만 타자고 조른단다. 이러한 사실을 경험한 끝에 참으로 귀신이 사람의 몸에 집히어 그 사람을 조정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화엄경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비유로 들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외이다. 귀신은 몸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몸에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그 사람을 조정한다. 보살이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몸이나 다른 사람의 몸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들고 난다는 사실을 비유하여 밝혔다.
佛子야譬如死屍가 以呪力故로而能起行하야 隨所作事하야 皆得成就하나니 屍之與呪가雖各差別이나 而能和合하야 成就彼事인달하야 菩薩摩訶薩이住此三昧도亦復如是하야 同境入定異境起하며 異境入定同境起니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죽은 송장이 주문의 힘으로 일어나 다니면서 간 곳마다 짓는 일을 모두 성취하나니, 송장과 주문이 비록 각각 다르지마는 능히 화합하여 저런 일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름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같은 경계에서 선정에 들어 다른 경계에서 일어나고, 다른 경계에서 선정에 들어 같은 경계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또 비유를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하다. 주문으로 죽은 송장을 마음대로 움직여서 어떤 일을 짓게 하는 것이다. 송장과 주문은 각각 다른 것이지만 함께 화합하여 어떤 현상을 나타낸다. 보살도 삼매의 힘으로 같은 경계와 다른 경계가 화합하여 자유자재로 들고 난다.
佛子야 譬如比丘가 得心自在하야 或以一身으로 作多身하며 或以多身으로 作一身호대 非一身沒하고 多身生이며 非多身沒하고 一身生인달하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도 亦復如是하야 一身入定多身起하며 多身入定一身起니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비구가 마음이 자유롭게 되면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몸으로 한 몸을 만들기도 하며, 한 몸이 사라지지 않고 여러 몸이 생기기도 하고, 여러 몸이 사라지지 않고 한 몸이 생기기도 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름도 또한 그와 같아서 한 몸이 선정에 들어가 여러 몸에서 일어나고, 여러 몸이 선정에 들어가 한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느니라.”
강설 ; 이 비유는 비구가 공부를 하다가 분신술을 얻어서 분신하는 모습을 비유로 들었다. 분신술이 불교의 정법은 아니지만 선정을 닦다가 간혹 이와 같은 일이 나타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분신술을 가지고 혹세무민할 것은 아니지만 불법을 전하는 일종의 방편으로 활용하면 어떨까하는 공연한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튼 보살은 삼매의 힘으로 한 몸과 많은 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들고 난다.
佛子야譬如大地가 其味一種이나 所生苗稼가種種味別하니 地雖無差別이나 然味有殊異인달하야 菩薩摩訶薩이住此三昧도亦復如是하야 無所分別이나 然有一種入定多種起하며 多種入定一種起니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땅은 그 맛이 하나지마는 거기서 나는 곡식은 맛이 각각 다르니 땅은 비록 차별이 없으나 맛은 차별이 있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름도 그와 같아서 분별이 없지마는 한 가지로 선정에 들어가 여러 가지에서 일어나고 여러 가지로 선정에 들어서 한 가지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또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서 다시 각양각색으로, 또는 다종다양하게 삼매에 들고 삼매에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네 가지 비유를 들어 그 뜻을 명료하게 밝혔다. 끝으로 땅은 그 맛이 한가지이지만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과일 등의 맛은 여러 가지인 것과 같이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는 것도 그와 같아서 삼매는 아무런 분별이 없으나 한 가지에서 삼매에 들고 여러 가지에서 일어나며, 여러 가지에서 삼매에 들고 한 가지에서 일어난다고 비유로서 밝혔다.
<3> 삼매의 이익을 밝히다
1) 열 가지 칭찬하는 법으로 칭찬하다
佛子야菩薩摩訶薩이住此三昧에得十種稱讚法之所稱讚하나니 何者가 爲十고所謂入眞如故로名爲如來며覺一切法故로 名之爲佛이며 爲一切世間의 所稱讚故로 名爲法師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열 가지의 칭찬하는 법으로 칭찬하게 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진여(眞如)에 들었으므로 여래라 하고, 온갖 법을 깨달았으므로 부처라 하고, 모든 세간의 칭찬을 받으므로 법사(法師)라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 머물면 큰 이익이 있음을 밝혔다. 먼저 열 가지 칭찬하는 법으로 칭찬하였다. 즉 이 삼매에 머물면 곧 여래며, 부처님이며, 법사다. 더 이상 어떻게 칭찬하겠는가.
知一切法故로名一切智며爲一切世間의 所歸依故로名所依處며了達一切法方便故로名爲導師며引一切衆生하야 入薩婆若道故로名大導師며
“일체 법을 알므로 일체지혜라 하고, 모든 세간이 귀의하는 바이므로 의지할 데라 하고, 모든 법의 방편을 통달하므로 길잡이[導師]라 하고, 일체중생을 인도하여 살바야(薩婆若)의 길에 들게 하므로 대도사(大導師)라 하고,
爲一切世間燈故로名爲光明이며 心志圓滿하고 義利成就하고 所作皆辦하야 住無礙智하야 分別了知一切諸法故로名爲十力이며 自在通達一切法輪故로名一切見者니是爲十이니라
모든 세간의 등불이 되므로 광명이라 하고, 뜻이 원만하고 이치를 성취하고 지을 것을 모두 마치고 걸림이 없는 지혜에 머물러서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하여 알므로 열 가지 힘이라 하고, 온갖 법륜을 자유롭게 통달하므로 일체를 보는 이라 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또 일체 지혜며, 귀의할 곳이며, 길잡이[導師]이며, 큰 길잡이이다. 또한 광명이며, 열 가지 힘이며, 일체를 보는 이이다. 더 이상 무슨 말로 이 보살을 찬탄하겠는가.
2) 열 가지 광명을 얻어 비추게 되다
佛子야菩薩摩訶薩이住此三昧에復得十種光明照耀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得一切諸佛光明하야 與彼平等故며得一切世界光明하야 普能嚴淨故며得一切衆生光明하야 悉往調伏故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고는 열 가지의 광명을 얻어 비추게 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의 광명을 얻나니 저들과 평등한 연고요, 일체세계의 광명을 얻나니 두루 깨끗하게 장엄하는 연고요, 일체중생의 광명을 얻나니 모두 가서 조복하는 연고요,
得無量無畏光明하야 法界爲場演說故며 得無差別光明하야 知一切法의 無種種性故며 得方便光明하야 於一切法離欲際에 而證入故며 得眞實光明하야 於一切法離欲際에 心平等故며
한량없이 두려움 없는 광명을 얻나니 법계를 도량으로 삼아 연설하는 연고요, 차별이 없는 광명을 얻나니 일체 법이 갖가지 성품이 없음을 아는 연고요, 방편인 광명을 얻나니 일체 법이 욕심을 떠난 경계에 증득해서 들어가는 연고요, 진실한 광명을 얻나니 일체 법이 욕심을 떠난 경계에 마음이 평등한 연고요,
得徧一切世間神變光明하야 蒙佛所加하야 恒不息故며得善思惟光明하야 到一切佛自在岸故며得一切法眞如光明하야 於一毛孔中에善說一切故니是爲十이니라
일체 세간에 두루한 신통변화의 광명을 얻나니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항상 쉬지 않는 연고요, 잘 생각하는 광명을 얻나니 모든 부처님의 자재한 언덕에 이르는 연고요, 모든 법이 진여인 광명을 얻나니 한 모공(毛孔)에서 일체를 잘 설하는 연고라.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 머물면 큰 이익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는 열 가지 광명을 얻어 비추게 된다. 일체 모든 부처님의 광명을 얻고, 일체 세계의 광명을 얻고, 일체중생의 광명을 얻는 등이다.
3) 열 가지 지을 것 없음을 얻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에 復得十種無所作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身業無所作이며 語業無所作이며 意業無所作이며 神通無所作이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고는 또 열 가지의 지을 것 없음을 얻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몸으로 하는 업이 지을 것이 없고, 말로 하는 업이 지을 것이 없고, 뜻으로 하는 업이 지을 것이 없고, 신통이 지을 것이 없고,
了法無性無所作이며 知業不壞無所作이며 無差別智無所作이며 無生起智無所作이며 知法無滅無所作이며 隨順於文호대 不壞於義가無所作이니 是爲十이니라
법이 성품 없는 줄을 앎이 지을 것이 없고, 업이 없어지지 않는 줄을 앎이 지을 것이 없고, 차별 없는 지혜가 지을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는 지혜가 지을 것이 없고, 법이 멸하지 않는 줄을 앎이 지을 것이 없고, 글을 따르고 뜻에 잘못되지 않음이 지을 것이 없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 머물면 큰 이익이 있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는 열 가지 지을 것 없음을 얻음에 대하여 밝혔다. 무소작(無所作), 즉 지을 것이 없음이 곧 큰 이익이다. 일체법이 본래로 원만하고 완벽하여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는 사실을 삼매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 실로 큰 이익이다.
<4> 한량없는 경계의 가지가지 차별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에 無量境界가 種種差別하나니 所謂一入多起하며 多入一起하며 同入異起하며 異入同起하며 細入麤起하며 麤入細起하며 大入小起하며 小入大起하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한량없는 경계가 가지가지로 차별하나니, 이른바 하나에 들어가 여럿에서 일어나고, 여럿에서 들어가 하나에서 일어나며, 같은 데 들어가 다른 데서 일어나고, 다른 데 들어가 같은 데서 일어나며, 미세한데 들어가 굵은 데서 일어나고, 굵은 데 들어가 미세한데서 일어나며, 큰데서 들어가서 작은데서 일어나며, 작은데서 들어가서 큰데서 일어나며,
順入逆起하며 逆入順起하며 無身入有身起하며 有身入無身起하며 無相入有相起하며 有相入無相起하며 起中入入中起니 如是가 皆是此之三昧의 自在境界니라
순하는 데 들어가 거슬린 데서 일어나고, 거슬린 데 들어가 순하는 데서 일어나며, 몸이 없는 데 들어가 몸이 있는 데서 일어나고, 몸이 있는 데 들어가 몸이 없는 데서 일어나며, 형상 없는 데 들어가 형상 있는 데서 일어나고, 형상 있는 데 들어가 형상 없는 데서 일어나며, 일어나는 데서 들어가 들어가는 데서 일어나나니, 이와 같은 것이 모두 이 삼매의 자재한 경계이니라.”
강설 ;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삼매의 한량없는 경계가 가지가지로 차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에 들어가 여럿에서 일어나고, 여럿에서 들어가 하나에서 일어나며, 같은 데 들어가 다른 데서 일어나고, 다른 데 들어가 같은 데서 일어나는 등이다.
<5> 경계의 자재함을 여섯 가지로 비유하다
佛子야 譬如幻師가 持呪得成에 能現種種差別形相하나니 呪與幻別호대 而能作幻하며 呪唯是聲이로대 而能幻作眼識所知種種諸色과 耳識所知種種諸聲과 鼻識所知種種諸香과 舌識所知種種諸味와 身識所知種種諸觸과 意識所知種種境界인달하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요술쟁이가 주문을 외워 성취하면 갖가지 차별한 모양을 능히 나타내나니, 주문과 요술이 다르지마는 능히 요술을 부리느니라. 주문은 오직 소리뿐이지만 능히 눈으로 보아 아는 가지각색 빛과 귀로 듣고 아는 가지각색 소리와 코로 맡고 아는 가지각색 냄새와 혀로 맛보고 아는 가지각색 맛과 몸으로 부딪쳐서 아는 갖가지 촉감과 뜻으로 느끼어 아는 갖가지 경계를 요술로 만드는 것과 같으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一切衆生差別身] 삼매에 머물면 큰 이익이 있는데 경계가 자유자재하게 펼쳐지는 것들을 여섯 가지 비유를 들어서 밝혔다. 먼저 주문을 외어 마술을 부리는 일을 비유로 들었다. 주문을 외우면 환영으로 사람의 육근(六根)으로 정상의 사람과 같이 육경(六境)을 대하여 육식(六識)으로 분별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도 亦復如是하야 同中入定異中起하며 異中入定同中起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름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같은 데서 선정에 들어가 다른 데서 일어나고, 다른 데서 선정에 들어가 같은 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요술하는 사람이 주문으로 요술을 부려 온갖 경계를 다 만들어 내듯이 선정에 들고 나오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佛子야 譬如三十三天이 共阿修羅鬪戰之時에 諸天이 得勝하고 修羅가 退衄에 阿修羅王이 其身長大가 七百由旬이며 四兵圍遶가 無數千萬이로대 以幻術力으로 將諸軍衆하고 同時走入藕絲孔中인달하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삼십삼천이 아수라와 싸울 적에 모든 천신이 이기고 아수라가 패하면, 아수라왕의 신장(身長)은 그 크기가 칠백 유순이요, 네 가지 군대 수천만이 호위하였지마는 요술을 부려서 여러 군대들을 거느리고 한꺼번에 달아나다가 연뿌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과 같으니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已善成就諸幻智地일새 幻智가 卽是菩薩이요 菩薩이 卽是幻智라 是故로 能於無差別法中入定하야 差別法中起하며 差別法中入定하야 無差別法中起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미 온갖 환술과 같은 지혜를 이루었으므로, 환술과 같은 지혜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환술과 같은 지혜이니라. 그러므로 능히 차별이 없는 법에서 선정에 들어가고 차별 있는 법에서 일어나며, 차별 있는 법에서 선정에 들어가고 차별 없는 법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삼매에 들어서 경계에서 자유자재한 이익을 펼치는 두 번째 비유를 들었다. 삼십삼천의 천신들과 아수라가 싸우다가 아수라가 패하면 그 큰 몸과 수많은 군대들을 거느리고 연뿌리의 구멍으로 피신하여 달아나듯이 보살도 환술과 같은 지혜를 성취하여 보살이 곧 환술이 되고 환술이 곧 보살이 되어 차별한 법과 차별이 없는 법에 자유자재로 들어가고 일어난다.
佛子야 譬如農夫가 田中下種에 種子在下요 果生於上인달하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도 亦復如是하야 一中入定多中起하며 多中入定一中起니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농부들이 밭에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밑에 있고 열매는 위에서 열리듯이,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하나에서 선정에 들어가 많은 데서 일어나고, 많은 데서 선정에 들어가 하나에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삼매에 들어서 경계에서 자유자재한 이익을 펼치는 세 번째 비유는 농부들이 곡식의 종자를 밭에 심어서 그 열매를 거두는 일과 같다고 밝혔다.
佛子야 譬如男女의 赤白이 和合에 或有衆生이 於中受生하면 爾時에 名爲歌羅邏位라 從此次第住母胎中하야 滿足十月에 善業力故로 一切支分이 皆得成就하야 諸根不缺하며 心意明了하나니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남녀의 붉은 것과 흰 것이 화합하여 혹시 중생이 그 속에서 태(胎)에 들면, 그때에 이름을 가라라의 지위[歌羅邏位]라 하나니, 그때부터 점점 자라 어머니의 태중에서 열 달이 차면서 선(善)한 업의 힘으로 모든 부분이 차례로 이루어져서 여러 감관[諸根]이 결함이 없고 의식이 분명하여지느니라.”
강설 ; 네 번째 비유다. “남녀의 붉은 것과 흰 것이 화합한다.”는 말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화합하는 것을 뜻한다. 또 “가라라의 지위[歌羅邏位]”란 태내오위(胎內五位)의 최초로서 태아가 모태에서 생긴지 1주일간을 말한다. 이때부터 벌써 차츰 모태에 머물면서 열 달 동안 성장하면서 모든 기관과 사지가 완성되고 의식까지 분명하여 진다.
其歌羅邏가 與彼六根으로 體狀各別호대 以業力故로 而能令彼로 次第成就하야 受同異類의 種種果報인달하야
“그 가라라와 저 여섯 감관[六根]은 자체와 형상이 제각기 다르지마는 업의 힘으로 그로 하여금 차례차례 성숙하여 같고 다른 종류의 갖가지 과보를 받느니라.”
강설 ; 태내오위인 가라라 때는 모태에서 처음 1주일간이므로 아무런 분별이 없는 상태지만 그로부터 차츰 육근이 각각 다르게 성장하는데, 이미 그 사람의 업력의 영향으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면서 가지가지의 과보를 받는다.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從一切智歌羅邏位로 信解願力이 漸次增長하야 其心廣大하야 任運自在일새 無中入定有中起하며 有中入定無中起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지혜의 가라라 지위로부터 믿고 이해하고 원하는 힘이 점점 자라서 마음이 커지고 자유롭게 되어 없는 데서 삼매에 들어가 있는 데서 일어나고, 있는 데서 삼매에 들어가 없는 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도 또한 일체 지혜의 첫 지위는 누구나 같지만 믿음과 이해와 원력의 힘을 따라 점점 발전하면서 그 마음이 광대하여 자유자재하게 없는 데서 선정에 들어 있는 데로 선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데서 선정에 들어 없는 데로 선정에서 일어난다.
佛子야 譬如龍宮이 依地而立이요 不依虛空이며 龍依宮住요 亦不在空이로대 而能興雲하야 徧滿空中이어든 有人이 仰視에 所見宮殿이 當知皆是乾闥婆城이요 非是龍宮이니 佛子야 龍雖處下나 而雲布上인달하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용궁이 땅을 의지하고 있고 허공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용은 용궁에 있고 또한 허공에 있지 않건마는 구름을 일으켜 허공에 가득하였을 적에 사람들이 우러러보면 보이는 용궁은 모두 건달바성(城)이요, 용궁이 아니니, 불자여, 용은 비록 아래 있으나 구름은 위에 있는 것과 같으니라.”
강설 ; 다섯 번째 비유다. 건달바성(乾闥婆城)이란 건달바성(乾達婆城)ㆍ건달박성(犍達縛城)ㆍ헌달박성(巘達縛城)이다. 번역하여 심향성(尋香城)이라한다. 실체는 없이 공중에 나타나는 성곽이다. 바다 위나 사막 또는 열대지방에 있는 벌판의 상공(上空)에서 공기의 밀도와 광선의 굴절작용으로 일어나는 신기루(蜃氣樓)ㆍ해시(海市) 같은 것이다. 이것을 건달바성이라 하는 것은 건달바는 항상 천상에 있다는 데서 생긴 것이다. 또는 서역에서 악사(樂師)를 건달바라 부르고, 그 악사는 환술로써 교묘하게 누각을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이므로 이와 같이 부른다.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도 亦復如是하야 於無相入有相起하며 於有相入無相起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형상 없는 데서 삼매에 들어가 형상 있는 데서 일어나고, 형상 있는 데서 삼매에 들어가 형상 없는 데서 일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삼매에 머물러 형상이 없는데서 선정에 들고 형상이 있는데서 선정에서 일어나며, 형상이 있는데서 선정에 들고 형상이 없는 데서 선정에서 일어나는 보살의 원융하고 자재한 삼매의 능력을 밝혔다.
佛子야譬如妙光大梵天王의 所住之宮이名一切世間最勝淸淨藏이라 此大宮中에普見三千大千世界諸四天下와 天宮과 龍宮과夜叉宮과乾闥婆宮과阿修羅宮과迦樓羅宮과緊那羅宮과摩睺羅伽宮과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묘광대범천왕(妙光大梵天王)이 사는 궁전을 모든 세간에서 가장 훌륭하고 청정한 곳집[藏]라 이름하느니라. 이 궁전에는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천하에 있는 천궁과 용궁과 야차의 궁전과 건달바의 궁전과 아수라의 궁전과 가루라의 궁전과 긴나라의 궁전과 마후라가 궁전과,
人間住處와 及三惡道와 須彌山等種種諸山과 大海江河와 陂澤泉源과 城邑聚落과 樹林衆寶의 如是一切種種莊嚴과 盡大輪圍의 所有邊際와 乃至空中微細遊塵이 莫不皆於梵宮顯現호미 如於明鏡에 見其面像인달하야
인간의 거처와 세 나쁜 길과 수미산 등 여러 가지 산과 바다와 강과 호수와 진펄과 못과 샘물과 시내와 도시와 마을과 나무와 숲과 보배 등 가지각색 장엄과 큰 철위산 끝까지와 내지 허공에 날리는 작은 먼지들까지 범천의 궁전에 빠짐없이 모두 나타나는 것이 마치 거울 속에서 얼굴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강설 ; 여섯째 비유다. 묘광대범천왕(妙光大梵天王)이 사는 궁전에는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천하에 있는 천궁과 용궁과 야차의 궁전들과 심지어 작은 먼지하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타나는 것을 비유로 들었다.
菩薩摩訶薩도住此一切衆生差別身大三昧에知種種刹하며 見種種佛하며 度種種衆하며 證種種法하며 成種種行하며 滿種種解하며 入種種三昧하며 起種種神通하며 得種種智慧하며 住種種刹那際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 삼매에 머물러서는 갖가지 세계를 알고, 갖가지 부처님을 뵈옵고, 갖가지 중생을 제도하고, 갖가지 법을 증득하고, 갖가지 행을 이루고, 갖가지 지혜를 만족하고, 갖가지 삼매에 들어가고, 갖가지 신통을 일으키고, 갖가지 지혜를 얻고, 갖가지 찰나의 경계에 머물게 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일체중생의 차별한 몸 삼매에 머물러서는 갖가지 세계를 알고, 갖가지 부처님을 뵈옵고, 갖가지 중생을 제도하고, 갖가지 법을 증득하는 등의 일이 모두모두 성취된다. 마치 범천의 궁전에 일체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다 나타나듯이 한다. 여기까지가 경계의 자재함을 여섯 가지 비유를 들어 밝히는 내용이다.
<6> 열 가지 신통의 피안(彼岸)에 이르다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到十種神通彼岸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到諸佛盡虛空徧法界神通彼岸하며 到菩薩究竟無差別自在神通彼岸하며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허공에 가득하고 법계에 두루한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보살의 끝까지 차별이 없이 자유로운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강설 ; 보살이 모든 중생의 차별한 몸인 큰 삼매에 머물러 얻게 된 이익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 간운데 이 삼매에 머물러 열 가지 신통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을 밝혔다. 먼저 모든 부처님의 허공에 가득하고 법계에 두루한 신통의 저 언덕에까지 이른다. 다음은 보살의 자유로운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른다.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문 힘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아래에 낱낱이 밝혔다.
到能發起菩薩廣大行願하야 入如來門佛事神通彼岸하며 到能震動一切世界하야 一切境界를 悉令淸淨神通彼岸하며 到能自在知一切衆生의 不思議業果가 皆如幻化神通彼岸하며
“보살의 광대한 행(行)과 원(願)을 일으켜서 여래의 문에 들어가는 부처님의 일[佛事]인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일체 세계를 능히 진동하여 모든 경계를 다 청정하게 하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일체중생의 헤아릴 수 없는 업(業)과 과보(果報)가 다 요술과 같은 줄을 자유롭게 아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到能自在知諸三昧의 麤細入出差別相神通彼岸하며 到能勇猛入如來境界하야 而於其中에 發生大願神通彼岸하며 到能化作佛하야 化轉法輪하야 調伏衆生하야 令生佛種하고 令入佛乘하야 速得成就神通彼岸하며
“모든 삼매의 거칠고 미세함과 들어가고 나오는 차별한 모양을 자유롭게 아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능히 용맹하게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 그 가운데서 큰 서원을 내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능히 부처님을 변화하여 짓고 법륜(法輪)을 변화하여 굴리면서 중생을 조복시키고, 부처님의 종성(種性)을 내게 하고 부처님의 법에 들게 하여 빨리 성취케 하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到能了知不可說一切秘密文句하야 而轉法輪하야 令百千億那由他不可說不可說法門으로 皆得淸淨神通彼岸하며 到不假晝夜年月劫數하고 一念에 悉能三世示現神通彼岸이니 是爲十이니라
“말할 수 없는 온갖 비밀한 글귀를 알고 법륜을 굴리어서 천백억 나유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법문을 모두 청정하게 하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며, 낮과 밤과 해와 달과 겁(劫)을 빌리지 않고 한 생각에 삼세를 모두 나타내는 신통의 저 언덕에 이르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佛子야 是名菩薩摩訶薩의 第八一切衆生差別身大三昧善巧智니라
“불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여덟째 모든 중생의 차별한 몸인 큰 삼매의 교묘한 지혜라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모든 중생의 차별한 몸인 큰 삼매에 머물러 얻는 열 가지 신통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이익을 다 밝히면서 십정품 중에서 여덟 번째 삼매를 설하여 마쳤다.
(9) 법계자재(法界自在) 대삼매(大三昧)
<1> 삼매의 이름과 들어가는 곳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法界自在三昧오佛子야此菩薩摩訶薩이於自眼處와 乃至意處에入三昧가名法界自在니菩薩이 於自身一一毛孔中에入此三昧하니라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법계에 자재하는 삼매라 하는가.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이 자기의 눈에서와 내지 뜻에서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이름이 법계에 자재함이니, 보살이 자기 몸의 낱낱 모공(毛孔) 속에서 이 삼매에 드는 것이니라.”
강설 ; 십정품 열 가지 큰 삼매 중에서 아홉 번째의 법계에 자재하는 삼매를 설한다. 보살이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에서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이름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다. 또한 보살이 자기의 몸 낱낱 모공에서 이 삼매에 든다. 실로 한 생각이 삼매에 들면 육근과 육경과 육식에서 모두 삼매에 들며, 나아가서 몸의 낱낱 모공에서도 이와 같이 삼매에 든다. 아주 작은 모공에서부터 저 드넓은 우주에 이르기까지 들지 않는 데가 없는 그야말로 법계에 자유자재한 큰 삼매다.
<2> 삼매의 공용(功用)을 밝히다
自然能知諸世間하며 知諸世間法하며 知諸世界하며 知億那由他世界하며 知阿僧祇世界하며 知不可說佛刹微塵數世界하며
“자연히 모든 세간(世間)을 알고, 모든 세간의 법을 알며, 모든 세계를 알고, 억 나유타 세계를 알고, 아승지 세계를 알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세계를 아느니라.”
강설 ;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의 공용을 밝혔다. 경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삼매에 들면 저절로 모든 세간과 세간의 법을 알며, 모든 세계와 가히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은 세계를 다 안다.
見一切世界中에 有佛出興이어든 菩薩衆會가 悉皆充滿하며 光明淸淨하며 淳善無雜하며 廣大莊嚴하야 種種衆寶로 以爲嚴飾하며
“일체 세계 가운데 부처님이 출현하시거든 보살대중이 모두 가득함을 보며, 광명하고 청정하여 순일하게 착한 것뿐이요, 섞이지 아니하였으며, 광대한 장엄과 가지각색 보배로 훌륭하게 장식하였느니라.”
강설 ;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의 공용으로서 또 일체 세계 가운데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보살대중이 모두 가득하였는데 광명하고 청정하여 순일하게 착한 것뿐이요, 광대한 장엄과 가지각색 보배로 훌륭하게 장식한 것을 다 본다. 그렇다. 바르고, 참되고, 높고, 큰 삼매에 들면 그가 보고 느끼고 수용하는 세상은 온통 부처님이며, 보살들이며, 광명이 빛나며, 청정하여 순일하게 착한 것뿐이다. 무슨 부정한 것이 있겠는가. 무슨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菩薩이 於彼에 或一劫과 百劫과 千劫과 億劫과 百千億那由他劫과 無數劫과 無量劫과 無邊劫과 無等劫과 不可數劫과 不可稱劫과 不可思劫과 不可量劫과 不可說劫과 不可說不可說劫과 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劫을 修菩薩行호대 常不休息하며
“보살이 그곳에서 혹은 한 겁과 백겁과 천겁과 억 겁과 백 천억 나유타 겁과 수없는 겁과 한량없는 겁과 그지없는 겁과 같을 이 없는 겁과 셀 수 없는 겁과 일컬을 수 없는 겁과 생각할 수 없는 겁과 헤아릴 수 없는 겁과 말할 수 없는 겁과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과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겁에 보살의 행을 닦으면서 항상 쉬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또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보살들이 가득한데 그 보살들은 혹 한 겁에서 부터 무수한 겁에 이르도록 오로지 보살행을 수행하여 쉬지 않는다. 참된 불자가 꿈을 꾸고, 보살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이와 같이 보살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오로지 보살행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무는 방법뿐이다. 자신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문다면 이 세상은 이미 온통 보살들뿐이며, 보살행뿐이다. 보살이외에 달리 누가 있겠으며 보살행 외에 달리 무슨 일이 있겠는가.
又於如是無量劫中에 住此三昧하야 亦入亦起하며 亦成就世界하며 亦調伏衆生하며 亦徧了法界하며 亦普知三世하며 亦演說諸法하며 亦現大神通種種方便호대 無着無礙하며
“또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겁에서 이 삼매에 머무는데, 또한 들어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고, 또한 세계를 성취하기도 하고, 또한 중생을 조복시키기도 하고, 법계를 두루 알기도 하고, 세 세상을 두루 알기도 하고, 모든 법을 연설하기도 하고, 큰 신통으로 갖가지 방편을 나타내기도 하되 집착함도 없고 걸림도 없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면서 오랜 세월을 불사를 짓되 세계를 성취하기도 하고, 또한 중생을 조복시키기도 하고, 모든 법을 연설하기도 하고, 큰 신통으로 갖가지 방편을 나타내기도 하되 집착도 없고 걸림도 없다. 진정한 삼매의 공용으로 이루어지는 불사인지라 아무런 집착도 없고 걸림도 없다.
以於法界에得自在故로善分別眼하며 善分別耳하며 善分別鼻하며 善分別舌하며 善分別身하며 善分別意하야 如是種種差別不同을悉善分別하야 盡其邊際하나니라
“법계에서 자유 자재함을 얻었으므로 눈을 잘 분별하고, 귀를 잘 분별하고, 코를 잘 분별하고, 혀를 잘 분별하고, 몸을 잘 분별하고, 뜻을 잘 분별하여, 이와 같이 갖가지 차별하고 같지 아니한 것을 모두 잘 분별하여 끝닿은 데까지를 다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다시 법계에 자재함으로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끝닿은 데까지를 다한다.
<3> 삼매의 이익을 밝히다
1) 21종의 십 천 억 이익
菩薩이 如是善知見已에 能生起十千億陀羅尼法光明하며 成就十千億淸淨行하며 獲得十千億諸根하며 圓滿十千億神通하며 能入十千億三昧하며
“보살이 이와 같이 잘 알고보고는 능히 십 천억 다라니법의 광명을 내며, 십 천억 청정한 행(行)을 성취하며, 십 천억 감관[諸根]을 얻으며, 십 천억 신통을 원만히 하며, 십 천억 삼매에 들어가며,
成就十千億神力하며 長養十千億諸力하며 圓滿十千億深心하며 運動十千億力持하며 示現十千億神變하며
십 천억 신통한 힘을 이루며, 십 천억 여러 가지 힘을 기르며, 십 천억 깊은 마음을 원만케 하며, 십 천억 힘으로 가지(加持)함을 움직이며, 십 천억 신통변화를 나타내며,
具足十千億菩薩無礙하며 圓滿十千億菩薩助道하며 積集十千億菩薩藏하며 照明十千億菩薩方便하며 演說十千億諸義하며
십 천억 보살의 걸림 없음을 구족하며, 십 천억 보살의 도(道)를 돕는 일을 원만히 하며, 십 천억 보살의 곳집[藏]을 모으며, 십 천억 보살의 방편을 밝게 비추며, 십 천억 모든 이치를 연설하며,
成就十千億諸願하며 出生十千億廻向하며 淨治十千億菩薩正位하며 明了十千億法門하며 開示十千億演說하며 修治十千億菩薩淸淨이니라
십 천억 모든 소원을 성취하며, 십 천억 회향을 내며, 십 천억 보살의 바른 지위를 다스리며, 십 천억 법문을 밝게 알며, 십 천억 연설을 열어 보이며, 십 천억 보살의 청정함을 닦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는 이익을 밝히는데 먼저 21종의 십 천억 이익을 들었다. 십 천억 다라니법의 광명을 내며, 십 천억 청정한 행(行)을 성취하는 등이다.
2) 열 가지 공덕이 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復有無數功德과 無量功德과 無邊功德과 無等功德과 不可數功德과 不可稱功德과 不可思功德과 不可量功德과 不可說功德과 無盡功德하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또 수없는 공덕과 한량없는 공덕과 그지없는 공덕과 같을 이 없는 공덕과 셀 수 없는 공덕과 일컬을 수 없는 공덕과 생각할 수 없는 공덕과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말할 수 없는 공덕과 다함이 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는 이익을 밝히는데 두 번째는 열 가지 공덕이 있음을 들었다.
佛子야此菩薩이於如是功德에皆已辦具며皆已積集이며 皆已莊嚴이며 皆已淸淨이며 皆已瑩徹이며 皆已攝受며皆能出生이며 皆可稱歎이며 皆得堅固며皆已成就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이미 모두 마련하였고, 모두 모았고, 모두 장엄하였고, 모두 깨끗이 하였고, 모두 사무치게 하였고, 모두 받아들였고, 모두 능히 내고 모두 칭찬하고, 모두 견고히 하였고,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강설 ; 열 가지 공덕을 이미 모두 마련하였고, 모두 모았고, 모두 장엄하였고, 모두 깨끗이 하는 등을 밝혔다.
3) 모든 부처님께서 섭수(攝受)하는 이익
佛者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에 爲東方十千阿僧祇佛刹微塵數名號諸佛之所攝受하며 一一名號에 復有十千阿僧祇佛刹微塵數佛이 各各差別이어든 如東方하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동방으로 십 천 아승지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이름을 가진 모든 부처님의 거두어 주심[攝受]이 되며, 낱낱 이름마다 다시 십 천 아승지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부처님이 있어 각각 차별하나니, 동방과 같아서 남방과 서방과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그와 같으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는 이익 중에 세 번째 모든 부처님이 섭수하는 이익을 밝혔다.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시방으로 각각 십 천 아승지 모든 부처님이 섭수하게 된다.
彼諸佛이 悉現其前하사 爲現諸佛淸淨刹하며 爲說諸佛無量身하며 爲說諸佛難思眼하며 爲說諸佛無量耳하며 爲說諸佛淸淨鼻하며 爲說諸佛淸淨舌하며 爲說諸佛無住心하며 爲說如來無上神通하사
“저 모든 부처님이 모두 앞에 나타나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세계를 나타내며, 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몸을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생각할 수 없는 눈을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귀를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코를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혀를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설하며, 여래의 위없는 신통을 설하느니라.”
강설 ; 시방으로 각각 십 천 아승지 부처님이 섭수하여 그 모든 부처님이 보살 앞에 나타나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세계를 나타내며, 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몸을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생각할 수 없는 눈 등을 설하여 준다.
令修如來無上菩提하며 令得如來淸淨音聲하며 開示如來不退法輪하며 顯示如來無邊衆會하며 令入如來無邊秘密하며 讚歎如來一切善根하며 令入如來平等之法하며
“그리하여 여래의 위없는 보리를 닦게 하며, 여래의 청정한 음성을 얻게 하며, 여래의 물러나지 않는 법륜(法輪)을 열어 보이며, 여래의 그지없이 모인 대중을 나타내며, 여래의 그지없는 비밀에 들어가게 하며, 여래의 모든 착한 뿌리를 찬탄하며, 여래의 평등한 법에 들게 하느니라.”
강설 ; 그 모든 것을 설하여주고는 다시 여래의 위없는 보리를 닦게 하며, 여래의 청정한 음성을 얻게 하며, 여래의 물러나지 않는 법륜(法輪)을 열어 보이는 등의 불사를 짓는다.
宣說如來三世種性하며 示現如來無量色相하며 闡揚如來護念之法하며 演暢如來微妙法音하며 辨明一切諸佛世界하며 宣揚一切諸佛三昧하며 示現諸佛衆會次第하며
“여래의 세 세상 종성(種性)을 말하며, 여래의 한량없는 몸매를 나타내며, 여래의 호념(護念)하시는 법을 드러내며, 여래의 미묘한 법문의 음성을 연설하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밝게 분별하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삼매를 드러내며, 모든 부처님의 대중의 차례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강설 ; 또 여래의 세 세상 종성(種性)을 말하며, 여래의 한량없는 몸매를 나타내며, 여래의 호념(護念)하시는 법을 드러내는 등의 불사를 짓는다.
護持諸佛不思議法하며 說一切法이猶如幻化하며 明諸法性이無有動轉하며 開示一切無上法輪하며 讚美如來無量功德하며 令入一切諸三昧雲하며 令知其心이如幻如化하야 無邊無盡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법을 보호하며, 일체 법이 마치 환화와 같음을 말하며, 모든 법의 성품이 변동하지 않음을 밝히며, 온갖 위없는 법륜을 열어 보이며,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며, 일체 모든 삼매구름에 들어가게 하며, 그 마음이 환영과 같고 환화와 같아서 그지없고 다함이 없음을 알게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은 이익이 이와 같다. 시방으로 각각 십 천 아승지 부처님이 섭수하며, 그 모든 부처님이 보살 앞에 나타나서 경문에서 밝힌 바와 같은 갖가지 불사를 짓는 이익을 얻는다.
4) 모든 부처님이 보호하고 염려해주는 이익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法界自在三昧時에 彼十方各十千阿僧祇佛刹微塵數名號如來가 一一名中에 各有十千阿僧祇佛刹微塵數佛이 同時護念하사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법계에 자재한 삼매에 머물렀을 때에, 시방에 각각 십 천 아승지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이름의 여래가 있고, 낱낱 이름마다 각각 십 천 아승지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부처님이 있어 동시에 보호하고 염려하시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은 네 번째 이익은 모든 부처님이 보호하고 염려해주는 이익이다. 시방으로 각각 십 천 아승지 세계의 작은 먼지 수와 같이 많고 많은 부처님이 동시에 보호하고 염려해주신다.
令此菩薩로 得無邊身하며 令此菩薩로 得無礙心하며 令此菩薩로 於一切法에 得無忘念하며 令此菩薩로 於一切法에 得決定慧하며 令此菩薩로 轉更聰敏하야 於一切法에 皆能領受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그지없는 몸을 얻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걸림 없는 마음을 얻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모든 법에 잊어버리지 않는 생각을 얻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일체 법에 결정한 지혜를 얻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점점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체 법을 분명히 알게 하시니라.”
강설 ; 그 많고 많은 부처님이 보호하고 염려해 주셔서 이 삼매에 머문 보살로 하여금 그지없는 몸을 얻게 하며, 걸림 없는 마음을 얻게 하며, 모든 법에 잊어버리지 않는 생각을 얻게 하는 등의 이익을 얻는다.
令此菩薩로於一切法에悉能明了하며 令此菩薩로諸根猛利하야 於神通法에悉得善巧하며 令此菩薩로境界無礙하야 周行法界하야 恒不休息하며 令此菩薩로得無礙智하야 畢竟淸淨하며 令此菩薩로以神通力으로 一切世界에示現成佛이니라
“이 보살로 하여금 일체 법에 다 능히 명료하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모든 감관이 영리하여 신통한 법에 모두 교묘함을 얻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경계에 장애가 없이 법계에 두루 다니면서 쉬지 않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걸림 없는 지혜를 얻어 필경에 청정하게 하며, 이 보살로 하여금 신통한 힘으로 일체 세계에서 성불(成佛)함을 나타내 보이게 하느니라.”
강설 ; 다시 또 이 삼매에 머문 보살로 하여금 일체 법에 다 능히 명료하게 하며, 모든 감관이 영리하여 신통한 법에 모두 교묘함을 얻게 하는 등의 이익을 얻는다.
5) 열 가지 바다를 얻는 이익
佛子야菩薩摩訶薩이住此三昧에得十種海하나니 何者가 爲十고所謂得諸佛海니咸覩見故며得衆生海니悉調伏故며得諸法海니能以智慧로悉了知故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열 가지의 바다를 얻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 바다를 얻나니 모두 보는 연고며, 중생바다를 얻나니 모두 조복시키는 연고며, 모든 법의 바다를 얻나니 능히 지혜로써 다 아는 연고며,
得諸刹海니以無性無作神通으로 皆往詣故며得功德海니一切修行이悉圓滿故며得神通海니能廣示現하야 令開悟故며得諸根海니種種不同을悉善知故며
모든 세계바다를 얻나니 성품도 없고 지음도 없는 신통으로 다 나아가는 연고며, 공덕바다를 얻나니 온갖 것을 수행하여 모두 원만한 연고며, 신통바다를 얻나니 널리 나타내어 깨닫게 하는 연고며, 모든 근성바다[諸根海]를 얻나니 갖가지 같지 아니한 것을 다 잘 아는 연고며,
得諸心海니知一切衆生의種種差別無量心故며得諸行海니能以願力으로 悉圓滿故며得諸願海니悉使成就하야 永淸淨故니라
모든 마음바다를 얻나니 일체중생의 갖가지로 차별한 한량없는 마음을 아는 연고며, 모든 수행(修行)바다를 얻나니 능히 서원하는 힘으로 다 원만한 연고며, 모든 서원바다를 얻나니 모두 성취하여 영원히 청정케 하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이익을 얻는 다섯 번째는 열 가지 바다를 얻는 이익이다. 즉 모든 부처님 바다를 얻고, 중생바다를 얻고, 모든 법의 바다를 얻고, 모든 세계바다를 얻고, 공덕바다를 얻는 등이다.
6) 열 가지 수승함을 얻는 이익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得如是十種海已에 復得十種殊勝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一者는 於一切衆生中에 最爲第一이요 二者는 於一切諸天中에 最爲殊特이요 三者는 於一切梵王中에 最極自在요 四者는 於諸世間에 無所染着이요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바다를 얻고는 다시 열 가지의 수승함을 얻나니,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일체중생 가운데 가장 제일이요, 둘은 일체 모든 하늘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셋은 모든 범천왕 가운데 가장 자재하고, 넷은 모든 세간에 물들지 않고,
五者는 一切世間이無能暎蔽요 六者는 一切諸魔가不能惑亂이요 七者는 普入諸趣호대 無所罣礙요八者는 處處受生이 知不堅固요九者는 一切佛法에皆得自在요十者는 一切神通을悉能示現이니라
다섯은 모든 세간이 가려버릴 수 없고, 여섯은 모든 마군이 미혹케 하지 못하고, 일곱은 여러 길에 두루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여덟은 처처(處處)에 태어나는 것이 견고하지 못함을 알고, 아홉은 온갖 불법(佛法)에 자재함을 얻고, 열은 일체 신통을 모두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강설 ; 앞에서 열 가지 바다를 얻고 나서 다시 열 가지 수승함을 얻는다.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 얻는 이익을 낱낱이 살펴보면 이 삼매에 머물면 일체 불법을 남김없이 다 성취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선정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다고 하지만 모든 불법은 이 선정을 의지하여 성취됨을 알 수 있다.
7) 열 가지 힘을 얻는 이익
佛子야菩薩摩訶薩이得如是十種殊勝已하야는 復得十種力하야 於衆生界에修習諸行하나니 何等이 爲十고一은 謂勇健力이니 調伏世間故요二는 謂精進力이니 恒不退轉故요三은 謂無着力이니 離諸垢染故요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수승함을 얻고는 다시 열 가지의 힘을 얻어 중생세계에서 여러 행을 닦나니,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용맹한 힘이니 세간을 조복시킴이요, 둘은 정진하는 힘이니 항상 물러나지 않음이요, 셋은 집착하지 않는 힘이니 모든 때를 여읨이요,
四는 謂寂靜力이니 於一切法에無諍論故요五는 謂逆順力이니 於一切法에心自在故요六은 謂法性力이니 於諸義中에得自在故요
넷은 고요한 힘이니 모든 법에 다투는 일이 없음이요, 다섯은 거스르고 순[順]하는 힘이니 온갖 법에 마음이 자유로움이요, 여섯은 법의 성품의 힘이니 모든 이치에 자재함을 얻음이요,
七은 謂無礙力이니 智慧廣大故요八은 謂無畏力이니 能說諸法故요九는 謂辯才力이니 能持諸法故요十은 謂開示力이니 智慧無邊故라
일곱은 걸림이 없는 힘이니 지혜가 광대함이요, 여덟은 두려움이 없는 힘이니 모든 법을 능히 설함이요, 아홉은 말 잘하는 힘이니 모든 법을 능히 지님이요, 열은 열어 보이는 힘이니 지혜가 그지없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면 온갖 이익을 얻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일곱 번째는 열 가지 힘을 얻는 이익인데 보살이 위의 열 가지의 수승함을 얻고는 다시 열 가지의 힘을 얻어 중생 세계에서 여러 가지 행을 닦는다. 중생 세계에서 여러 가지 행을 닦는데 어떤 힘이 필요할까. 용맹한 힘과 정진의 힘과 집착이 없는 힘과 고요한 힘과 거스르고 순하는 힘과 법의 성품의 힘과 걸림이 없는 힘과 두려움 없는 힘과 변재의 힘과 열어 보이는 힘이다. 이와 같은 힘을 갖추어야 중생 세계에서 여러 가지 행을 닦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은 힘은 곧 아래에서 밝히는 갖가지 힘을 불러오게 된다. 삼매의 힘이 어떠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한다.
佛子야 此十種力이 是廣大力이며 最勝力이며 無能摧伏力이며 無量力이며 善集力이며 不動力이며 堅固力이며 智慧力이며 成就力이며 勝定力이며
“불자여, 이 열 가지 힘은 곧 광대한 힘이며, 가장 수승한 힘이며, 꺾지 못하는 힘이며, 한량없는 힘이며, 잘 모으는 힘이며, 동요하지 않는 힘이며, 견고한 힘이며, 지혜의 힘이며, 성취하는 힘이며, 훌륭한 선정의 힘이며,
淸淨力이며 極淸淨力이며 法身力이며 法光明力이며 法燈力이며 法門力이며 無能壞力이며 極勇猛力이며 大丈夫力이며 善丈夫修習力이며
청정한 힘이며, 매우 청정한 힘이며, 법신의 힘이며, 법의 광명의 힘이며, 법등불의 힘이며, 법문의 힘이며, 깨뜨릴 수 없는 힘이며, 지극히 용맹한 힘이며, 대장부의 힘이며, 훌륭한 대장부의 닦아 익히는 힘이며,
成正覺力이며 過去積集善根力이며 安住無量善根力이며 住如來力力이며 心思惟力이며 增長菩薩歡喜力이며 出生菩薩淨信力이며 增長菩薩勇猛力이며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힘이며, 과거에 착한 뿌리를 쌓은 힘이며, 한량없는 착한 뿌리에 머무는 힘이며, 여래의 힘에 머무른 힘이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힘이며, 보살의 기쁨을 더하는 힘이며, 보살의 청정한 신심(信心)을 내는 힘이며, 보살의 용맹을 늘게 하는 힘이며,
菩提心所生力이며 菩薩淸淨深心力이며 菩薩殊勝深心力이며 菩薩善根熏習力이며 究竟諸法力이며 無障礙身力이며 入方便善巧法門力이며 淸淨妙法力이며 安住大勢하야 一切世間이 不能傾動力이며 一切衆生이 無能暎蔽力이니라
보리심(菩提心)으로 생기는 힘이며, 보살의 청정하고 깊은 마음의 힘이며, 보살의 수승하고 깊은 마음의 힘이며, 보살의 착한 뿌리로 훈습하는 힘이며, 모든 법을 구경까지 깨달은 힘이며, 장애가 없는 몸의 힘이며, 방편과 교묘한 법문에 들어간 힘이며, 청정하고 미묘한 법의 힘이며, 큰 세력에 머물러서 모든 세간이 흔들지 못하는 힘이며, 일체중생이 능히 가릴 수 없는 힘이니라.”
강설 ; 위에서 밝힌 열 가지 힘은 곧 이와 같은 온갖 힘을 불러오게 되어 그 힘을 낱낱이 밝혔다. 경에서 “이 열 가지 힘은 곧 광대한 힘이며, 가장 수승한 힘이며, 꺾지 못하는 힘이며, 한량없는 힘이며, 잘 모으는 힘이며, 동요하지 않는 힘이며, 견고한 힘이며, 지혜의 힘이며, 성취하는 힘이며, 훌륭한 선정의 힘 등등이다.”라고 하여 38가지의 힘을 들었다.
8) 능히 잘하는 이익
佛子야此菩薩摩訶薩이於如是無量功德法에能生하며 能成就하며 能圓滿하며 能照明하며 能具足하며 能徧具足하며 能廣大하며 能堅固하며 能增長하며 能淨治하며 能徧淨治하나니라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을 능히 내고, 능히 성취하고, 능히 원만하고, 능히 비추고, 능히 갖추고, 능히 두루 구족하고, 능히 광대하고, 능히 견고하고, 능히 증장하고, 능히 깨끗하게 다스리고, 능히 두루 깨끗하게 다스리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면 온갖 이익을 얻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여덟 번째는 한량없는 공덕을 능히 내고 능히 성취하고, 능히 원만하고, 능히 비추고, 능히 갖추는 등의 이익이다.
9) 열 가지 변제(邊際)를 설할 수 없는 이익
此菩薩의 功德邊際와智慧邊際와修行邊際와法門邊際와自在邊際와苦行邊際와成就邊際와淸淨邊際와出離邊際와法自在邊際를無能說者니라
“이 보살의 공덕의 변제(邊際)와 지혜와 변제와 수행의 변제와 법문의 변제와 자재의 변제와 고행의 변제와 성취의 변제와 청정의 변제와 뛰어남의 변제와 법에 자재한 변제를 능히 설할 이가 없느니라.”
강설 ; 아홉 번째는 열 가지 변제(邊際)를 설할 수 없는 이익을 밝혔다. 변제(邊際)란 끝 간 데를 뜻한다. 즉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삼매에 머물면 공덕의 끝 간 데와 지혜의 끝 간 데와 수행의 끝 간 데 등등을 능히 설할 이가 없음을 밝혔다.
10) 열 가지 다 설할 수 없는 이익
此菩薩의所獲得과所成就와所趣入과所現前과所有境界와所有觀察과所有證入과所有淸淨과所有了知와所有建立인一切法門을於不可說劫에無能說盡이니라
“이 보살은 얻은 것과 성취한 것과 나아간 것과 앞에 나타난 것과 가진 경계와 가진 관찰과 가진 증득과 가진 청정과 분명히 아는 것과 있는바 건립과 온갖 법문을 말할 수 없는 겁에도 다 설할 수 없느니라.”
강설 ; 열 번째는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삼매에 머물면 열 가지 다 설할 수 없는 이익이 있음을 밝혔다. 즉 얻은 것과 성취한 것과 나아간 것과 앞에 나타난 것 등등이다.
11) 한량없는 모든 삼매를 다 아는 이익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에 能了知無數無量無邊無等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不可說不可說一切三昧하나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수 없고, 한량없고, 그지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모든 삼매를 분명히 아느니라.”
彼一一三昧의 所有境界가無量廣大하니 於境界中에若入과若起와若住의所有相狀과所有示現과所有行處와所有等流와所有自性과所有除滅과所有出離인如是一切를 靡不明見이니라
“저 낱낱 삼매에 있는바 경계가 한량없이 광대하거든 저러한 경계에 들어가고, 일어나고, 머무는 일과 거기 있는 형상과 나타내는 일과 행(行)할 곳과 평등하게 흐름과 제 성품과 없애는 것과 뛰어나는 것인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없느니라.”
강설 ; 열한 번째는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삼매에 머물면 다시 한량없는 모든 삼매를 다 아는 이익 얻음을 밝혔다.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수 없고, 한량없고, 그지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모든 삼매를 분명히 아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낱낱 삼매는 경계가 한량없이 광대한 등을 다 밝게 본다.
<4> 비유를 들어 밝히다
佛子야 譬如無熱惱大龍王宮에 流出四河호대 無濁無雜하며 無有垢穢하야 光色淸淨이 猶如虛空이어든 其池四面에 各有一口하야 一一口中에 流出一河호대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무열뇌(無熱惱) 연못의 큰 용왕의 궁전에서 네 강이 흘러나오는데, 흐리지도 않고 잡란하지도 않고, 더러움이 없고, 빛이 깨끗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으며, 그 연못의 사면에는 각각 한 개의 어귀가 있고, 낱낱 어귀마다 강이 하나씩 흐르느니라.”
강설 ; 모든 삼매를 원만하게 구족한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보살이 하고자하는 불사(佛事)를 마음껏 지을 때 그 광경이 어떠할까? 무엇으로 표현하면 만족한 표현이 될까? 어떤 비유를 들어야 그 광경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을까?
모든 삼매를 원만히 구족한 보살은 이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할 준비가 완전하게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그 상태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간략히 말한다면 마음에는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게 갖추어졌고, 그 지혜와 자비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변재[四無礙辯]를 방편으로 하여 사방으로 그 지혜와 자비의 물을 마음껏 흘려보내어 온 세상 중생들을 흠뻑 적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보살이 세상을 향하여 불사를 짓는 일을 청정하고 시원하여 뜨거운 대지를 청량하게 적시는 네 개의 큰 강에 비유하여 보았다. 네 개의 큰 강의 근원은 무열뇌(無熱惱) 연못의 큰 용왕의 궁전에서 시작한다. 혹은 무열(無熱) 연못이라고도 한다. 뜨거운 열기가 없는 무열(無熱) 연못이란 보살의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다. 곧 보리심(菩提心)이며 불심(佛心)이다. 보살의 보리심과 불심에서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네 개의 강물은 혼탁하지도 않고, 잡란하지도 않고, 더러움이 없어 그 빛이 투명하기가 마치 가을 하늘과 같다.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네 개의 큰 강물은 보살이 중생들의 뜨거운 번뇌의 열기를 식힐 사무애변(四無礙辯)에 비유하였다. 사무애변이란 사무애지(四無礙智)ㆍ사무애해(四無礙解)라고도 한다. 마음의 방면으로는 지혜라 하고, 그 지혜를 드러낼 입의 방면으로는 변재라 한다.
첫째는 법무애(法無礙)로서 온갖 부처님의 교법에 통달한 것을 말한다. 둘째는 의무애(義無礙)로서 온갖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사무애(辭無礙)로서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치 못함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요설무애(樂說無礙)로서 온갖 교법을 알아 갖가지 중생의 종류들이 알아듣기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를 경전은 무열 연못과 네 개의 강물에 비유하면서 넉넉하게 설명하고 있다.
於象口中엔 出恒伽河하고 獅子口中엔 出私陀河하고 於牛口中엔 出信度河하고 於馬口中엔 出縛芻河하며
“코끼리 어귀[象口]에서는 항하강[恒伽河]이 흘러나오고, 사자 어귀[獅子口]에서는 사타하(私陀河)강이 흘러나오고, 소 어귀[牛口]에서는 신도(信度)강이 흘러나오고, 말 어귀[馬口]에서는 박추(縛芻)강이 흘러나오느니라.”
강설 ; 무열 연못에서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어귀[口]들은 각각 코끼리, 사자, 소, 말 등으로 표현하였다. 코끼리의 어귀에서는 항하강이 흘러나오고, 사자의 어귀에서는 사타강이 흘러나오고, 소의 어귀에서는 신도강이 흘러나오고, 말의 어귀에서는 박추강이 흘러나온다. 이 사대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곧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변재이다.
其四大河流出之時에 恒伽河口엔 流出銀沙하고 私陀河口엔 流出金剛沙하고 信度河口엔 流出金沙하고 縛芻河口엔 流出瑠璃沙하야
“네 큰 강들이 흐를 적에 항하강 어귀에서는 은모래가 흘러나오고, 사타하강 어귀에서는 금강(金剛)모래가 흘러나오고, 신도강 어귀에서는 금모래가 흘러나오고, 박추강 어귀에서는 유리모래가 흘러나오느니라.”
강설 ; 사대강에서 물이 흘러나올 적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래들이 함께 흘러나오는데 모두 은모래, 금강모래, 금모래, 유리모래들이다. 네 가지 변재에서 설해지는 이름답고 미묘한 법문의 내용들이다.
恒伽河口는 作白銀色하고 私陀河口는 作金剛色하고 信度河口는 作黃金色하고 縛芻河口는 作瑠璃色하며 一一河口가 廣이 一由旬이요
“항하강어귀는 흰 은빛이요, 사타하강어귀는 금강 빛이요, 신도강어귀는 황금빛이요, 박추강어귀는 유리 빛이며, 낱낱 강의 어귀는 너비가 한 유순이니라.”
강설 ; 사대강의 어귀마다 각각 아름다운 빛을 띠었으니 희 은빛과 금강 빛과 황금빛과 유리 빛이다. 낱낱 어귀의 너비는 지름이 1유순인데 1유순은 14, 4K라고 한다. 네 개의 어귀 너비가 각각 14, 4K라면 그 근원인 무열 연못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아래의 경문에 둘레[周圍]가 50유순이라고 하였다. 또 종광(縱廣)이 50유순이라고도 하였다. 50곱하기 14,4는 720K다. 이것은 둘레나 지름이다. 전체 면적은 대강 계산하여 남북을 합친 우리나라 전체면적과 비슷하다. 또 각각의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은 1초당 몇 톤이나 될까. 이와 같이 큰 네 개의 어귀에서 아름답고 청량한 물이 흘러넘쳐서 온 세상과 온 우주를 흠뻑 적신다. 즉 무수한 보살들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변재로서 이 세상 어리석은 중생들의 미혹을 남김없이 걷어내는 광경이다.
其四大河가 旣流出已에各共圍遶大池七帀하야 隨其方面하야 四向分流호대 澒涌奔馳하야 入於大海라
“그 네 강의 강물이 흘러나와서는 제각기 큰 연못을 일곱 번씩 돌면서 흐르고 그 방면을 따라 사방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도도히 흘러넘치면서 큰 바다로 들어가느니라.”
강설 ; 또 그 네 개의 강물은 흘러가면서 강의 근원인 무열(無熱) 큰 연못을 일곱 번이나 돌아 네 방향으로 도도히 흐르면서 큰 바다로 들어간다. 이 광경은 마치 우주의 소용돌이와 너무나 똑 같다.
다시 정리하면 무열이라는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서는 네 개의 어귀가 있어 네 방향으로 강물이 흐르는데 각각의 강물이 다시 무열 연못을 일곱 바퀴나 돌아 큰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근래에는 우주에 대한 연구가 많이 발전하여 이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가 소용돌이를 돌면서 유지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무열 연못과 네 개의 강물이 돌아가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우주의 소용돌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또 다중우주(多重宇宙)에 대한 이론까지 등장하여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와 같은 우주들이 무수히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생각이나 문화나 학문이나 예술 등등이 유사한 우주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화엄경의 화장장엄세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우주물리학자들은 아마도 화엄경을 읽지 않는듯하다. 만약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의 다중우주론이나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에서 이 화엄경의 화장장엄세계를 거론하였다면 화엄경이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강물들이 흘러넘치면서 큰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체중생들을 교화하여 남김없이 일체 지혜의 바다에 다 모이게 하는 것이다.
其河旋遶一一之間에 有天寶所成優鉢羅華와 波頭摩華와 拘物頭華와 芬陀利華가 奇香發越하고 妙色淸淨하야 種種華葉과 種種臺蘂가 悉是衆寶라 自然暎徹하고 咸放光明하야 互相照現하며
“그 강들이 둘러 흐르는 낱낱 사이에는 하늘보석으로 된 청련화(靑蓮華)와 홍련화(紅蓮華)와 황련화(黃蓮華)와 백련화(白蓮華)들이 피었으니 기이한 향기가 진동하고, 아름다운 빛깔이 깨끗하며, 갖가지 꽃과 잎과 갖가지 받침[臺]과 꽃술이 모두 보배로 되어 자연히 밝게 사무치며 광명을 놓아 서로서로 비추었느니라.”
강설 ; 네 개의 강물이 흘러가는 하나하나의 사이마다 네 종류의 보석으로 된 연꽃이 만발하여 미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기이한 향기가 진동하고, 각각의 보석에서는 빛을 발하여 서로서로를 환하게 비춘다. 불국토의 청정장엄이 어디인들 없겠는가. 화엄경 서두에 “세존이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니 그 땅은 견고하여 다이아몬드로 되었더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其無熱池의 周圍廣大가 五十由旬이요 衆寶妙沙가 徧布其底하며 種種摩尼로 以爲嚴飾하며 無量妙寶로 莊嚴其岸하며 栴檀妙香으로 普散其中하며
“그 무열(無熱)연못 둘레는 크기가 오십 유순인데 온갖 보배의 아름다운 모래가 그 바닥에 깔리었고, 갖가지 마니로 꾸미었으며, 한량없는 아름다운 보배로 그 언덕을 장엄하고, 전단향을 그 가운데 흩었느니라.”
강설 ; 무열 연못 둘레의 크기가 50유순이라고 하였다. “온갖 보배의 아름다운 모래가 그 바닥에 깔리었고, 갖가지 마니로 꾸미었으며, 한량없는 아름다운 보배로 그 언덕을 장엄하고, 전단향을 그 가운데 흩었다.”라는 것은 보리심, 즉 불심의 미묘함과 위대함과 존귀함이 이와 같다는 뜻이리라.
優鉢羅華와 波頭摩華와 拘物頭華와 芬陀利華와 及餘寶華가 皆悉徧滿하야 微風吹動에 香氣遠徹하며 華林寶樹가 周帀圍遶하며 日光出時에 普皆照明하야 池河內外에 一切衆物이 接影連輝하야 成光明網하니
“청련화와 홍련화와 황련화와 백련화와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보배 꽃들이 가득히 피어 실바람이 불 적마다 향기가 멀리 풍기고 꽃 숲과 보배나무가 두루두루 둘러섰으며, 해가 뜰 때는 널리 다 밝게 비치어 연못 속과 강 밖의 온갖 사물들의 빛과 그림자가 한 데 닿아서 광명그물을 이루느니라.”
강설 ; 네 개의 강이 흐르는 사이사이마다 네 가지의 연꽃이 아름답게 가득히 피어있고 미풍이 불때마다 그 향기가 멀리까지 풍긴다.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변재로 중생들을 제도하고 성숙하는 교화의 향기가 그와 같으리라.
如是衆物의若遠若近과若高若下와若廣若狹과若麤若細와乃至極小한一沙一塵에悉是妙寶가光明鑒徹하야 靡不於中에 日輪影現하며 亦復展轉更相現影하야 如是衆影이不增不減이며 非合非散이라 皆如本質하야 而得明見이니라
“이와 같은 여러 물건이 멀거나 가깝거나, 높거나 낮거나, 넓거나 좁거나, 크거나 작거나, 내지 가장 작은 모래와 먼지까지도 모두 보배광명에 밝게 비치며, 그 가운데 모두 햇빛을 받아 그림자가 나타나고, 또한 다시 서로서로 비치어 영상이 나타나나 이와 같은 모든 그림자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모두 본바탕대로 분명히 볼 수 있느니라.”
강설 ; 중생들의 종류에는 구류중생(九類衆生)이라고 하여 기본적으로 아홉 가지가 있고, 각 종류마나 다시 또 9품으로 그 근기가 다르게 나눠진다. 이와 같이 각양각색으로 많은 종류의 중생들에게도 진리의 광명이 모두 비치어 부처님의 법의 즐거움을 다 같이 누리게 되는 것이다.
<5> 비유에 대하여 열일곱 가지 문으로 합하여 밝히다.
佛子야 如無熱大池가 於四口中에 流出四河하야 入於大海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從四辯才로 流出諸行하야 究竟入於一切智海니라
“불자여, 무열(無熱) 큰 연못에서 네 어귀로부터 네 강이 흘러서 큰 바다에 들어가듯이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네 가지 변재로부터 모든 행을 흘러내어 구경에는 일체 지혜의 바다로 들어가느니라.”
강설 ; 위에서 든 비유를 낱낱이 법과 합하여 그 뜻을 밝혔다. 무열(無熱)의 큰 연못은 보리심이다. 네 어귀에서 네 개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변재[四辯才]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며, 강물이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수행을 유출하여 구경에는 일체 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일이다.
사변재(四辯才)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사무애변(四無礙辯), 또는 사무애지(四無礙智), 또는 사무애해(四無礙解)라고도 하는데 마음의 방면으로는 지혜다. 또는 입의 방면으로는 변재라 한다. 화엄경의 수서대로는 먼저 의무애변(義無礙辯)으로서 온갖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것인데 즉 8만 4천 가르침의 이치와 뜻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로서 설법하는 일이다. 두 번째 법무애변(法無礙辯)은 온갖 교법에 통달한 것이다. 셋째는 사무애변(辭無礙辯)으로서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하지 못함이 없어서 모든 중생들의 모든 언어를 다 쓸 줄 아는 것이다. 네 번째는 요설무애변(樂說無礙辯)이다. 온갖 교법을 알아 일체 근기의 종류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데 자유자재한 것이다. 사바세계에서는 음성이 교화의 본체인 까닭에 보리심을 언어를 의지하여 널리 펼치기 때문이다. 아래에는 하나하나 비유와 배대하여 밝힌다.
如恒伽大河가 從銀色象口로 流出銀沙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義辯才로 說一切如來所說一切義門하야 出生一切淸淨白法하야 究竟入於無礙智海니라
“마치 항하 큰 강이 은빛인 코끼리 어귀에서 은모래가 흘러내리듯이,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뜻을 잘 아는 변재[義辯才]로 일체 여래가 말씀하신 온갖 뜻을 설하여 일체 청정한 흰 법을 내어서 구경에는 걸림이 없는 지혜바다에 들어가느니라.”
강설 ; 먼저 항하 큰 강, 은빛 코끼리 어귀, 은모래를 보살이 뜻을 잘 아는 변재[義辯才]로 일체 여래가 말씀하신 온갖 뜻을 설하여 일체 청정한 맑은 법을 내어서 구경에는 걸림이 없는 지혜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如私陀大河가 從金剛色獅子口로 流出金剛沙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法辯才로 爲一切衆生하야 說佛金剛句하고 引出金剛智하야 究竟入於無礙智海니라
“마치 사타 큰 강이 금강 빛인 사자어귀에서 금강모래가 흘러내리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법을 잘 아는 변재[法辯才]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금강 같은 글귀를 말하여 금강 같은 지혜를 끌어내고 구경에는 걸림이 없는 지혜바다에 들어가느니라.”
강설 ; 다음은 사타 큰 강, 금강 빛 사자어귀, 금강모래를 보살이 법을 잘 아는 변재[法辯才]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금강 같은 글귀를 말하여 금강 같은 지혜를 끌어내고 구경에는 걸림이 없는 지혜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如信度大河가 從金色牛口로 流出金沙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訓詞辯說로 隨順世間緣起方便하야 開悟衆生하야 令皆歡喜調伏成熟하야 究竟入於緣起方便海라
“마치 신도 큰 강이 황금빛인 소 어귀에서 금모래를 흘러내리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훈고(訓誥)에 능한 변재로 세간의 인연으로 일어나는 방편을 따라 중생을 깨닫게 하고 환희케 하며, 조복시키고 성숙케 하여 구경에는 인연으로 일어나는 방편바다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강설 ; 신도 큰 강, 황금빛인 소 어귀, 금모래를 보살이 훈고(訓誥)에 능한 변재로 세간의 인연으로 일어나는 방편을 따라 중생을 깨닫게 하고 환희케 하며, 조복시키고 성숙케 하여 구경에는 인연으로 일어나는 방편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경문에서는 훈사변설(訓詞辯說)이라고 하였으나 흔히 사무애변(辭無礙辯)이라고 한다.
如縛芻大河가 於瑠璃色馬口에 流出瑠璃沙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無盡辯으로 雨百千億那由他不可說法하야 令其聞者로 皆得潤洽하야 究竟入於諸佛法海니라
“마치 박추 큰 강이 유리 빛인 말 어귀에서 유리모래를 흘러내리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다함이 없는 변재로 백 천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법을 비 내려 듣는 이로 하여금 윤택케 하며, 구경에는 모든 부처님 법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강설 ; 박추 큰 강, 유리 빛인 말 어귀, 유리모래를 보살이 다함이 없는 변재[無盡辯]로 백 천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법을 비 내려 듣는 이로 하여금 윤택케 하며, 구경에는 모든 부처님 법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경문에 무진변(無盡辯)이라고 하였으나 흔히 요설무애변(樂說無礙辯)이라고 한다.
如四大河가 隨順圍遶無熱池已에 四方入海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成就隨順身業과 隨順語業과 隨順意業하며 成就智爲前導身業과 智爲前導語業과 智爲前導意業하야 四方流注하야 究竟入於一切智海니라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무열(無熱) 연못을 따라 둘러 흐르고는 사방으로 바다에 들어가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남을 따라 주는 몸의 업[隨順身業]과 남을 따라 주는 말[言]의 업(業)과 남을 따라주는 뜻의 업을 성취하고, 지혜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된 몸의 업과 지혜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된 말의 업과 지혜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된 뜻의 업을 성취하여 사방으로 흐르다가 구경에는 일체 지혜바다에 들어가느니라.”
강설 ; 네 개의 큰 강이 무열(無熱) 연못을 따라 둘러 흐르고는 사방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살이 중생을 따라주는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뜻의 업을 성취하고, 또 지혜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된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뜻의 업을 성취하여 사방으로 흐르다가 구경에는 일체 지혜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佛子야 何者가 名爲菩薩四方고 佛子야 所謂見一切佛하고 而得開悟하며 聞一切法하고 受持不忘하며 圓滿一切波羅蜜行하며 大悲說法하야 滿足衆生이니라
“불자여, 무엇을 보살의 사방이라 하는가. 불자여, 이른바 일체 부처님을 보고 깨침을 얻으며, 일체 법을 듣고 받아 지니어 잊지 아니하며, 모든 바라밀다행을 원만하며,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여 중생을 만족케 함이니라.”
강설 ; 위의 경문에서 몸과 말과 뜻을 성취하여 사방(四方)으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그 사방을 다시 부연해서 설명하였다. 그 사방이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일체 법을 듣고, 바라밀을 원만히 하고, 중생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如四大河가 圍遶大池어든 於其中間에 優鉢羅華와 波頭摩華와 拘物頭華와 芬陀利華가 皆悉徧滿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於菩提心中間에 不捨衆生하고 說法調伏하야 悉令圓滿無量三昧하야 見佛國土莊嚴淸淨이니라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큰 못을 둘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청련화와 홍련화와 황련화와 백련화가 두루 가득히 차있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보리심의 중간에서 중생을 버리지 않고 법을 설하여 조복시켜 한량없는 삼매를 모두 원만케 하여 부처님 국토의 장엄이 청정함을 보게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보리심의 중간에서 중생을 버리지 않고 법을 설하여 조복시켜 한량없는 삼매를 모두 원만케 하여 온 세상을 보살행으로 아름답게 장엄한 것이 마치 푸른 연꽃, 붉은 연꽃, 노란 연꽃, 흰 연꽃 등으로 네 개의 큰 강을 장엄하여 무열 큰 연못을 휘감고 도는 모습과 같다.
如無熱大池에 寶樹圍遶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現佛國土莊嚴圍遶하야 令諸衆生으로 趣向菩提니라
“마치 무열(無熱) 큰 연못에 보배나무가 둘러섰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 국토에 장엄이 둘러 있는 것을 나타내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菩提)에 나아가게 하느니라.”
강설 ;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 나아가게 하는 부처님 국토의 장엄이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진리의 가르침이다. 사람의 실상과 만물의 실상과 일체 불보살에 대한 실상들의 참다운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 부처님 국토의 장엄이다. 마치 무영 큰 연못에 보배 나무들이 무성하게 둘러서 있는 것과 같다.
如無熱大池가 其中縱廣이 五十由旬이요 淸淨無濁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菩提之心이 其量無邊하야 善根充滿하야 淸淨無濁이니라
“마치 무열(無熱) 큰 연못이 너비와 길이가 50유순이요, 청정하여 혼탁함이 없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보리심의 크기가 끝이 없으며 착한 뿌리가 가득하여 청정하고 흐리지 않느니라.”
강설 ; 보리심은 곧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다. 불심(佛心)이다. 불심은 나와 같이 남을 사랑하고 아끼고 배려하고 보호한다. 나에게 싫은 것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마음이다.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10선과 사무량심과 사섭법과 인의예지의 마음이다. 보살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이 한량없이 가득하다. 마치 무열 큰 연못이 한없이 넓은데 청정한 향수가 가득한 것과 같다.
如無熱大池가 以無量寶로 莊嚴其岸하고 散栴檀香하야 徧滿其中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百千億十種智寶로 莊嚴菩提心大願之岸하야 普散一切衆善妙香이니라
“마치 무열(無熱) 큰 연못이 한량없는 보배로 그 언덕을 장엄하고 전단향을 흩어 그 가운데에 가득하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백 천억이 되는 열 가지 지혜보배로 보리심의 큰 서원의 언덕을 장엄하고, 온갖 여러 가지 선량하고 아름다운 향(香)을 널리 흩느니라.”
강설 ; 보살은 백 천억이 되는 열 가지 지혜보배로 보리심의 큰 서원의 언덕을 장엄하고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10선과 사무량심과 사섭법과 인의예지의 선근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흩날린다. 또 열 가지 지혜[十種智]보배란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를 말한다. 삼세지(三世智)ㆍ불법지(佛法智)ㆍ법계무애지(法界無碍智)ㆍ법계무변지(法界無邊智)ㆍ충만일체무변지(充滿一切無邊智)ㆍ지일체중생지(知一切衆生智)ㆍ지일체법지(知一切法智)ㆍ지무변제불지(知無邊諸佛智)이다. 삼세지는 과거지, 현재지, 미래지이다. 이와 같은 백 천억이 되는 열 가지 지혜보배로 보리심의 큰 서원의 언덕을 장엄한다.
如無熱大池가 底布金沙하고 種種摩尼로 間錯莊嚴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微妙智慧로 周徧觀察하며 不可思議菩薩解脫種種法寶로 間錯莊嚴하며 得一切法無礙光明하며 住於一切諸佛所住하며 入於一切甚深方便이니라
“마치 무열(無熱) 큰 연못이 바닥에는 금모래가 깔렸고 가지가지 마니로 사이사이에 장엄하였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미묘한 지혜로 두루 관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해탈인 가지가지 법의 보석으로 사이사이에 장엄하고, 온갖 법에 걸림 없는 광명을 얻으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머무시는 데 머무르고, 일체 깊고 깊은 방편에 들어가느니라.”
강설 ; 보살은 미묘한 지혜로 두루 관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해탈인 가지가지 법의 보석으로 사이사이에 장엄한다. 또 온갖 법에 걸림 없는 광명이 있다. 마치 무열 큰 연못이 바닥에는 금모래가 깔렸고 가지가지 마니로 사이사이에 장엄한 것과 같다.
如阿那婆達多龍王이 永離龍中의 所有熱惱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永離一切世間憂惱하야 雖現受生이나 而無染着이니라
“마치 무열(無熱) 큰 연못의 아나바달다 용왕은 다른 용에게 있는 뜨거운 번뇌를 아주 여의었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의 번뇌와 근심을 여의었으므로 비록 태어남을 나타내지만 물들고 집착하지 않느니라.”
강설 ; 또 보살은 모든 세간의 번뇌와 근심을 여의었으므로 비록 태어남을 나타내지만 태어남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도 중생들과 같이 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중생들은 세상의 번뇌와 집착이 있지만 보살들은 세간의 번뇌와 근심을 여의었다. 그래서 보리살타, 곧 깨달은 중생이라 한다. 마치 아나바달다 용왕은 다른 용에게 있는 뜨거운 번뇌를 아주 떠난 것과 같다.
如四大河가 潤澤一切閻浮提地하고 旣潤澤已에 入於大海인딜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四智河로 潤澤天人沙門婆羅門하야 令其普入阿耨多羅三藐三菩提智慧大海하야 以四種力으로 而爲莊嚴하나니
“마치 네 개의 큰 강물이 일체 염부제의 땅을 적시고는 큰 바다에 들어가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네 가지 지혜의 강물로 천신과 사람과 사문과 바라문을 적시고는 그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의 큰 바다에 두루 들게 하며, 네 가지의 힘으로 장엄하느니라.”
何者가 爲四오 一者는 願智河니 救護調伏一切衆生하야 常不休息이요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서원 지혜의 강이니 일체중생을 구호하고 조복하여 항상 쉬지 아니함이요,”
二者는 波羅密智河니修菩提行하야 饒益衆生하야 去來今世에相續無盡하야 究竟入於諸佛智海요
“둘은 바라밀다 지혜 강이니 보리의 행을 닦으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하여 지난 세상과 오는 세상과 지금 세상에 계속하여 다하지 않다가 구경에는 모든 부처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감이요,”
三者는 菩薩三昧智河니無數三昧로以爲莊嚴하야 見一切佛하고 入諸佛海요
“셋은 보살 삼매의 지혜 강이니 무수한 삼매로 장엄하고 일체 부처님을 친견하고 모든 부처님 바다에 들어감이요,”
四者는 大悲智河니 大慈自在하야 普救衆生호대 方便攝取하야 無有休息하며 修行秘密功德之門하야 究竟入於十力大海니라
“넷은 큰 자비의 지혜 강이니 큰 자비로 자유자재하게 중생을 널리 구원하여 방편으로 거두어서 쉬지 아니하며, 비밀한 공덕의 문을 수행하다가 구경에는 열 가지 힘인 큰 바다에 들어감이니라.”
강설 ; 네 개의 큰 강물이 일체 염부제의 땅을 적시고는 큰 바다에 들어가듯이, 보살도 그와 같이 네 가지 지혜의 강물로 천신과 사람과 사문과 바라문을 흠뻑 적시고는 그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깨달음의 지혜의 큰 바다에 두루 들어가게 한다. 그 네 가지 지혜 강이란 서원과 지혜 강과 바라밀다 지혜 강과 보살 삼매의 지혜 강과 큰 자비의 지혜 강이다. 즉 보살이 서원을 세우고, 10바라밀을 완성하고, 삼매를 성취하고, 자비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지혜가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如四大河가 從無熱池로 旣流出已에 究竟無盡하야 入於大海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大願力으로 修菩薩行하야 自在知見이 無有窮盡하야 究竟入於一切智海니라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무열 연못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구경에는 다함이 없이 큰 바다에 들어가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큰 서원의 힘으로 보살행을 닦으며, 자재하게 알고 보는 것이 다함이 없어 구경에는 일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느니라.”
강설 ; 보살이 큰 서원의 힘으로 보살행을 닦으며, 자재하게 알고 보는 것이 다함이 없어 구경에는 일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무열 연못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구경에는 다함이 없이 큰 바다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如四大河가 入於大海에 無能爲礙하야 令不入者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常勤修習普賢行願하야 成就一切智慧光明하며 住於一切佛菩提法하야 入如來智호대 無有障礙니라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큰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할 이가 없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보현의 행과 원을 항상 부지런히 닦아서 일체 지혜의 광명을 이루고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에 머물러서 여래의 지혜에 들어가는 것을 장애할 이가 없느니라.”
강설 ; 보살이 보현의 행과 원을 항상 부지런히 닦아서 일체 지혜의 광명을 이루고,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에 머물러서 여래의 지혜에 들어가는 것을 장애할 이가 없는 것은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큰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할 이가 없는 것과 같다.
如四大河가 奔流入海에 經於累劫호대 亦無疲厭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以普賢行願으로 盡未來劫토록 修菩薩行하야 入如來海호대 不生疲厭이니라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여러 겁을 지나도 고달픔을 모르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보현의 행과 원으로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보살의 행을 닦아서 여래의 바다에 들어가되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강설 ; 보살 보현의 행과 원으로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보살의 행을 닦아서 여래의 바다에 들어가되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은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여러 겁을 지나도 고달픔을 모르는 것과 같다.
佛子야 如日光出時에 無熱池中金沙銀沙金剛沙瑠璃沙와 及餘一切種種寶物에 皆有日影이 於中顯現하며 其金沙等一切寶物도 亦各展轉而現其影하야 互相鑒徹하야 無所妨礙인달하야
“불자여, 마치 해가 뜰 때에 무열 연못에 있는 금모래와 은모래와 금강모래와 유리모래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보물들마다 다 해의 영상이 나타나고, 금모래 등의 모든 보물들도 제각기 차츰차츰 영상이 나타나서 서로서로 사무쳐 비치어도 방해가 없느니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住此三昧에 於自身一一毛孔中에 悉見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諸佛如來하며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이 삼매에 머무르면 제 몸의 낱낱 모공(毛孔)마다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이 많은 부처님을 보게 되느니라.”
亦見彼佛所有國土道場衆會하야 一一佛所에 聽法受持하고 信解供養하야 各經不可說不可說億那由他劫호대 而不想念時節長短하며 其諸衆會도 亦無迫隘하나니
“또한 그 부처님의 국토와 도량에 모인 대중들도 보며,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법을 듣고, 받아 지니고, 믿고, 이해하고, 공양하기를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억 나유타 겁을 지내더라도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모인 대중들도 또한 비좁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이 법계 자재 큰 삼매에 머무르면 제 몸의 낱낱 모공(毛孔)마다에서 무수한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이 많은 부처님을 보게 되며, 또한 부처님의 국토와 도량에 모인 대중들도 보며,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법을 듣고, 받아 지니고, 믿고, 이해하고, 공양하기를 무수한 겁을 지내더라도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모인 대중들도 또한 비좁지 아니한 것은 마치 해가 뜰 때에 무열 연못에 있는 금모래와 은모래와 금강모래와 유리모래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보물들마다 다 해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 금모래 등의 모든 보물들도 제각기 차츰차츰 영상이 나타나서 서로서로 사무쳐 비치어도 방해가 없는 것과 같다.
何以故오 以微妙心으로 入無邊法界故며入無等差別業果故며入不可思議三昧境界故며入不思議思惟境界故며入一切佛自在境界故며
“무슨 까닭이냐. 미묘한 마음으로 그지없는 법계에 들어가는 연고며, 같을 이 없는 차별한 업과 과보에 들어가는 연고며, 불가사의한 삼매 경계에 들어가는 연고며, 불가사의한 생각하는 경계에 들어가는 연고며, 모든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경계에 들어가는 연고이니라.”
得一切佛所護念故며得一切佛大神變故며得諸如來難得難知十種力故며入普賢菩薩行圓滿境界故며得一切佛無勞倦神通力故니라
“또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심을 얻는 연고며, 모든 부처님의 큰 신통변화를 얻는 연고며, 모든 여래의 얻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열 가지 힘을 얻는 연고며, 보현보살의 행이 원만한 경계에 들어가는 연고며, 모든 부처님의 피곤함이 없는 신통의 힘을 얻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면 제 몸의 낱낱 모공(毛孔)마다에서 무수한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이 많은 부처님을 보게 되는 등의 공능이 있게 되는 것을 비유로 밝혔고, 다시 그 까닭을 들었다. 보살이 삼매에 머물면 미묘한 마음으로 그지없는 법계에 들어가고, 같을 이 없는 차별한 업과 과보에 들어가고, 불가사의한 삼매 경계에 들어가는 등의 공능이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심을 얻고, 모든 부처님의 큰 신통변화를 얻고, 모든 여래의 얻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열 가지 힘을 얻고, 보현보살의 행이 원만한 경계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서 보살의 행과 원으로 온 세상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성숙하는 광경을 장황한 이야기를 들어서 밝혔다. 비유컨대 무열(無熱)이라는 청량한 큰 연못에서 사방으로 각각 큰 어귀가 있어서 그 어귀마다 한량없는 물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적시는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또 필자는 마치 큰 우주가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면서 돌아가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림은 보살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잊지 못하는 꿈이며 희망이다. 보살의 희망이 얼마나 장대한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보살의 뜨거운 마음과 원대한 꿈을 느끼게 하는 대단히 위대한 비유였다.
<6> 두 가지 행(行)에 걸림이 없음을 나타내어 맺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雖能於定에 一念入出이나 而亦不廢長時在定하고 亦無所着하며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비록 능히 선정에서 잠깐 동안에 들고 나고 하면서도 또한 오랫동안 선정에 있는 일을 폐하지도 않고 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서 보살의 행과 원으로 온 세상을 교화할 때 반드시 상대적인 두 가지 행(行)에 걸림이 없어야 함을 밝혔다. 두 가지 행이란 무엇이든 서로 반대되는 상대적인 행이다.
예컨대,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무는 보살은 비록 능히 선정에서 잠깐 동안에 들고 나고 하면서도 또한 오랫동안 선정에 있는 일을 폐하지도 않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다. 만약 선정에 잠깐 동안에 들고 나기만 하고 선정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 선정에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치우친 행이 된다. 곧 중도적인 원융한 보살의 선정행이 못 된다는 뜻이다. 만약 순간출입에 치우치고 집착하거나 또는 오랫동안만 선정에 있다면 그것은 치우친 선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순간순간 성정에 들고 나면서 또한 오랫동안 선정에 머물기도 하는 것이다.
雖於境界에 無所依住나 而亦不捨一切所緣하며
“비록 경계에 대하여 의지하지도 않지마는 또한 모든 반연을 버리지도 않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서는 필요에 따라 때로는 경계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반대로 모든 반연하는 바의 경계를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보살이 경계에 대한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행이다. 그래서 보살이 상대적인 두 가지 행(行)에 걸림이 없음이 되는 것이다.
雖善入刹那際나 而爲利益一切衆生하야 現佛神通하야 無有厭足하며
“비록 찰나의 경계[刹那際]에까지 잘 들어가지마는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신통을 나타내기에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러서는 찰나적인 삶을 살 수도 있지만 또한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부처님이 나투신 온갖 신통변화를 나타내며 오래 오래 싫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보살이 찰나의 경계[刹那際]에까지 잘 들어간다는 그 찰나란 차나(叉拏)라고도 음역한다. 일념(一念)이라고도 하며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120찰나가 1달찰나(怛刹那)고, 60달찰나가 1랍박(臘縛)이고, 30랍박이 1모호율다(牟呼栗多)고, 30모호율다가 1주야(晝夜)이므로, 1주야인 24시간을 120×60×30×30으로 나눈 것이니, 곧 75분의 1초(秒)가 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짧은 시간을 살 수도 있고 길고 긴 세월을 살 수도 있다. 이것이 또한 보살의 시간에 대한 중도적 능력이다.
雖等入法界나 而不得其邊하며
“비록 법계에 평등하게 들어가지마는, 그 끝닿은 데를 얻지 못하느니라.”
강설 ; 법계는 실은 모든 우주 전체다. 그래서 어떤 끝닿은 경계가 없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갈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보살은 들어가고 나감이 없는 법계에 평등하게 들어간다. 이것이 중도적 들어감이다.
雖無所住無有處所나 而恒趣入一切智道하야 以變化力으로 普入無量衆生衆中하야 具足莊嚴一切世界하며
“비록 머무는 데도 없고 처소도 없지마는, 일체 지혜의 길에 항상 들어가며, 변화하는 힘으로 한량없는 중생들 가운데 널리 들어가서 일체 세계를 구족하게 장엄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에 머물면 어떤 고정된 처소나 머무는 데가 없다. 그러나 일체 지혜의 길에 항상 들어간다. 처소도 없고 머무는 데도 없다고 해서 결코 목석이 아니다. 활발발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변화의 힘으로 한량없는 중생들 속에 들어가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한다. 이와 같은 삶이 진정한 보살의 중도적 삶이다. 평생을 은둔하면서 제일가는 수행자라고 하는 치우친 삶은 결코 바람직한 대승보살의 삶이 아니다. 80노구를 이끌고 한 가지 이치라도 깨우쳐주려고 뜨거운 인도의 흙길을 쉼 없이 걸어 다니신 세존이야말로 머물 곳이 없는 데서 일체 지혜의 길에 들어가고, 한량없는 중생들 가운데 들어가서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한 보살의 삶이다.
雖離世間顚倒分別하야 超過一切分別之地나 亦不捨於種種諸相하며
“비록 세간의 뒤바뀐 분별을 여의어 모든 분별하는 자리에서 뛰어났지마는, 또한 갖가지 모양을 버리지도 않느니라.”
강설 ; 보살은 삼매의 힘으로 세간의 뒤바뀐 분별을 떠나고 일체 분별에서 뛰어난다. 그러면서 또한 가지가지 온갖 차별한 현상을 버리지 않는다. 즉 온갖 차별한 현상에 더불어 있으면서 그 전도된 차별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 보살의 능력이다. 이것이 또한 중도다.
雖能具足方便善巧나 而究竟淸淨하며
“비록 방편의 교묘함을 구족하였으나 구경까지 청정하느니라.”
강설 ; 삼매에 머무는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교묘한 방편을 구족하였으나 구경까지 텅 비어 청정하다. 즉 철저히 텅 비었으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교묘한 방편을 마음껏 구사한다.
雖不分別菩薩諸地나 而皆已善入하나니
“비록 보살의 여러 지위를 분별하지 않지마는, 모두 이미 잘 들어갔느니라.”
강설 ; 보살의 지위란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 등이다. 이러한 지위에 일일이 다 들어갔어도 결코 그와 같은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지위에 들어감이 없이 들어간 것이며, 들어갔으되 들어감이 없다.
佛子야 譬如虛空이 雖能容受一切諸物이나 而離有無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雖普入一切世間이나 而離世間想하며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이 비록 모든 물건을 포용하여 받아드리지마는 ‘있다.’ ‘없다.’함을 여의었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비록 모든 세간에 널리 들어가지마는, 세간이라는 생각을 여의었느니라.”
강설 ; 일체 만물은 허공 속에 존재한다. 허공 속에 존재하면서 ‘있다.’ ‘없다.’로 나누어지지만 허공은 ‘있다.’ ‘없다.’라는 분별을 하지 않는다. 만물이 있고 없음에 허공은 무심할 뿐이다. 삼매에 머문 보살은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만 세상이니 중생이니 하는 분별을 하지 않고 세상에서 멀리 떠나 있다. 즉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 있고, 세상을 떠나 있으면서 세상에 있는 것이 보살이다. 허공이 일체 만물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보살이 세상에 머무는 모습이다. 아래의 법문은 보살이 허공과 일체만물과의 관계와 모두 같음을 밝혔다.
雖勤度一切衆生이니 而離衆生想하며
“비록 일체중생을 부지런히 제도하지마는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었느니라.”
강설 ; 보살은 일체중생을 부지런히 제도하지만 중생이라는 생각을 멀리 떠났다. 그래서 중생을 텅 비어 공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본래 부처인줄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친다.
雖深知一切法이나 而離諸法想하며
“비록 모든 법을 깊이 알지마는 여러 가지 법이란 생각을 여의었느니라.”
강설 ; 삼매에 머문 보살은 앞에서 세상을 보고 중생을 보듯이 일체 법에 대해서도 그렇다. 즉 일체 법을 깊이 알지마는 일체 법에 대한 생각을 멀리 떠났다. 떠나 있으면서 모든 법을 모르는 것이 없다.
雖樂見一切佛이나 而離諸佛想하며
“비록 모든 부처님 뵈옵기를 좋아하지만 부처님이란 생각을 여의었느니라.”
강설 ; 삼매에 머문 보살이 부처님을 보는 것도 그와 같아서 비록 모든 부처님 뵈옵기를 좋아하지만 부처님이란 생각을 멀리 떠났다. 그러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부처님을 친견한다. 이와 같아야 제대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 된다. 마치 허공이 일체만물을 수용하듯이 한다.
雖善入種種三昧나 而知一切法自性皆如하야 無所染着하며
“비록 여러 가지 삼매에 잘 들어가지마는 일체 법의 자성이 모두 여여(如如)하여 물들 것이 없는 줄을 아느니라.”
강설 ; 보살이 열 가지 삼매에 잘 들어갔으나 일체 법은 그 자성이 모두 여여한 진여이다. 여여한 진여에 무슨 물이 들며 집착이 있겠는가. 또한 열 가지 삼매에 들어갔느니 삼매에서 일어났느니 할 것이 있겠는가. 참사람이며, 참 나이며, 참마음인 진여자성은 언제나 여여한 삼매이다. 비록 지옥, 아귀, 축생으로 돌아다녀도 여여한 삼매를 떠날 수 없다. 만약 떠나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삼매가 아니다.
雖以無邊辯才로 演無盡法句나 而心恒住離文字法하며
“비록 그지없는 변재로 다함없는 법문을 연설하지마는 마음은 항상 문자를 떠난 법에 머무느니라.”
강설 ; 비록 아무리 화엄경 공부를 많이 해서 화엄경 강설 책을 많이 출판하였더라도 마음은 공부를 했다는 것에서 멀리 떠나 있어야 하고, 책을 출판하였다는 것에서 떠나 있어야 한다. 마음은 언제나 텅 빈 백지이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화엄경에 백만 분의 일이라도 근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오공 소설에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면서 인도에 가서 불경(佛經)을 많이 구해서 장안에 다 이르러서 마지막으로 강가에서 잠깐 쉬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경책이 다 날아가 버렸다. 책이 강가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데 그 책들을 주어보니 글자가 한자도 없었다. 삼장법사도 손오공도 저팔개도 사오정도 모두 놀라 자빠져 버린다. 도대체 이 화두는 또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인가.
마음은 항상 문자의 법을 떠나 있으면서 그지없는 변재로 다함이 없는 법을 연설해야 하며, 화엄경을 더욱 열심히 천착하여 강설 책을 무진장으로 출판해서 세상을 온통 화엄경으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장법사는 다시 인도에 가서 글자가 있는 경전을 구해 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보살이 세세생생 할 일이며 희망이자 꿈이다.
雖樂觀察無言說法이나 而恒示現淸淨音聲하며
“비록 말이 없는 법을 관찰하기를 좋아하지마는 청정한 음성을 항상 나타내 보이느니라.”
강설 ;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면서 한편 아름답고 청아한 음성과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법문을 설해야 할 것이다. 보살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면을 잊어버리고 한 곳에 치우친다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雖住一切離言法際나 而恒示現種種色相하며
“비록 일체 말[言]을 떠난 법의 경계에 머물지마는 가지각색의 모양을 항상 나타내느니라.”
강설 ; 일체 말[言]을 떠난 법의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역시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고 불이법문을 설하는 소식이다. 그는 정작 입을 닫고 말이 없으면서 육신의 병고를 우정 보여서 온갖 이치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雖敎化衆生이나 而知一切法畢竟性空하며
“비록 중생들을 교화하지마는 일체 법의 성품이 끝까지 그 성품이 공(空)한 줄을 아느니라.”
강설 ;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교화하는 것으로 보살의 삶을 삼는다. 그러나 중생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보살의 견해가 아니다. 일체 법이 끝까지 그 성품이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텅 비어 공한 줄 알고 열심히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적인 중생교화다.
雖勤修大悲하야 度脫衆生이나 而知衆生界가 無盡無散하며
“비록 부지런히 대자비(大慈悲)를 닦아 중생을 제도하지마는 중생세계가 다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줄을 아느니라.”
강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보살은 중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중생들을 다 제도하려고 서원한다. 그것이 보살의 큰 자비며 큰 서원이다. 그러나 중생은 결코 다하지 않는다. 중생이 다하지 않는 줄을 잘 알지만 세세생생 중생을 제도하면서 사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雖了達法界가 常住不變이나 而以三輪으로 調伏衆生하야 恒不休息하며
“비록 법계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줄을 알지마는 세 가지 바퀴[三輪]로 중생을 조복시키기를 항상 쉬지 않느니라.”
강설 ; 세 가지 바퀴[三輪]란 삼전법륜(三轉法輪)이다. 시전(示轉)ㆍ권전(勸轉)ㆍ증전(證轉)인데 석존이 세 번 4제(諦)의 교(敎)를 말씀한 것이다. 시전이란 이것은 고(苦), 이것은 집(集), 이것은 멸(滅), 이것은 도(道)라고 그 모양을 보인 것이다. 권전이란 고(苦)를 알라, 집(集)을 끊으라, 멸(滅)을 증득하라, 도(道)를 닦으라고 권한 것이다. 증전이란 석존이 스스로 고를 알아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려고 도를 닦은 것을 보여 다른 이들로 하여금 증득케 하는 것이다. 보살이 법계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줄을 알지마는 이러한 삼륜(三輪)으로 중생을 조복시키기를 항상 쉬지 않는다.
雖常安住如來所住나 而智慧淸淨하야 心無怖畏하고 分別演說種種諸法하야 轉於法輪하야 常不休息이니라
“비록 여래의 머무신 곳에 항상 머물지마는 지혜가 청정하고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며 갖가지 법을 분별하고 연설하여 법륜 굴리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삼매의 힘으로 이미 여래가 머무시는 곳에 머문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와 같은 경지에 머무르면서 다시 지혜는 청정하고 마음은 두려움이 없으며, 가지가지 법을 연설하여 법륜 굴리기를 쉬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일상이다. 달리 무슨 일이 또 있겠는가.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第九法界自在大三昧善巧智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아홉째 법계에 자유자재하는 큰 삼매의 교묘한 지혜니라.”
강설 ; 보살이 세상에 나아가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행을 행하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행(行)에 걸림이 없는 행을 행해야 비로소 원융하고 중도적인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된다. 중생제도뿐만 아니라 사대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물과 사건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다 이해하고 다 수용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기까지가 보살마하살이 아홉째 법계에서 자유자재하는 큰 삼매의 교묘한 지혜를 설해 마쳤다.
부언(附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904-975)는 평생 동안 불교를 공부하여 종경록(宗鏡錄)과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등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만선동귀집의 결론으로 42개의 게송을 남겼다. 그것은 곧 만선동귀중도송(萬善同歸中道頌)이다. 어떻게 불교를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위의 화엄경 경문과 그 뜻이 너무도 일치하는 점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하여 참고하게 한다.
1, 보리무발이발(菩提無發而發)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하라.
강설 ; 불교에서는 제일 먼저 보리심을 발하여 도를 구하고 수행을 하여 일체 지혜를 증득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그러나 실은 그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하며, 발하되 또한 발함이 없는 것이다. 이 게송을 “모든 선행[수행]은 다 같이 중도에 돌아간다[萬善同歸中道頌].”라고 명명한 뜻이 이것이다.
2, 불도무구이구(佛道無求而求)
불도(佛道)는 구함이 없이 구하라.
강설 ; 불도를 구하되 구함이 없이 구하며, 세세생생 구하더라도 또한 구함이 없는 것이 불도이다. 비록 구함이 없더라도 일체 난행과 고행으로 부지런히 구하야 하는 것이다.
3, 묘용무행이행(妙用無行而行)
아름다운 작용은 행함이 없이 행하라.
강설 ; 아름다운 행동은 행하더라도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도움이 되는 행을 했다 하더라도 생색을 내거나 흔적을 남기거나 자랑을 늘어놓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행이 못된다. 하물며 수행을 하거나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금강경에 “만약 보살이 어떤 상이라도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4, 진지무작이작(眞智無作而作)
참다운 지혜는 지음이 없이 지으라.
강설 ; 불교 수행의 최종 단계는 참다운 지혜, 즉 일체 지혜를 얻는데 있다. 일체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로 중생을 제도한다. 참다운 지혜를 얻는 데는 수행이라는 지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음은 곧 지음이 없는 지음이다. 짓되 지음이 없어야 한다.
5, 흥비오기동체(興悲悟其同體)
불쌍한 생각을 일으키되 자신과 동체임을 깨달으라.
강설 ; 참다운 지혜를 얻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고통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중생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없으면 설사 일체 지혜를 얻었다하더라도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 보살에게 반드시 갖춰야 할 마음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일체 중생이 자기 자신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6, 행자심입무연(行慈深入無緣)
사랑을 행하되 인연이 없는 곳까지 깊이 들어가라.
강설 ; 또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과 함께 중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되 자기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까지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자식이나 가까운 인연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심지어 동물들도 다 한다. 보살은 사람을 사랑하되 자기와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
7, 무소사이행단(無所捨而行檀)
베푸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
강설 ; 이제부터는 보살의 필수 수행덕목인 6바라밀을 실천하는 내용이다. 첫째, 보시를 행하되 베푸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흔히 무주상(無住相)보시라고도 한다. 보살이 보시를 행하고 상을 내면 보살이 아니지만 만약 상을 내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그 복이 무량무변하다.
8, 무소지이구계(無所持而具戒)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갖추라.
강설 ; 다음은 지계다.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갖추어야 한다. 계행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온 동내 방내로 소문을 내고 사람들부터 존경과 공양 받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계행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계가 된다.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갖추라.
9, 수진요무소기(修進了無所起)
정진을 닦되 일으키는 바 없음을 깨달으라.
강설 ; 다음은 정진이다. 정진을 닦되 그 정진을 일으키는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진을 한다고 시간과 날짜를 계산하거나 안거증(安居證)을 모으는 재미로 한다면 그것이 무슨 정진인가. 부디 일으키는 바 없이 정진을 하라.
10, 습인달무소상(習忍達無所傷)
인욕을 익히되 상처 받는 바가 없음을 알라.
강설 ; 다음은 인욕이다. 인욕을 익히되 아픔이나 상처나 어려움을 견디면서 인욕을 익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을 참아내더라도 보통 일상에서 호흡을 하듯이 하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욕을 닦는 것이다.
11 반야오경무생(般若悟境無生)
지혜는 경계가 생멸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강설 ; 반야바라밀, 즉 지혜다. 무엇이 지혜인가. 우리가 일상에 상대하는 일체 경계는 모두가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 사물이 그렇고, 사건이 그렇다. 현상은 생멸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일체 존재의 실상인 텅 비어 공한 자리에서 보면 모든 봇이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알아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이 곧 지혜다. 지난밤 꿈속에서 겪었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에 무슨 마음이 흔들릴 것인가.
12, 선정지심무주(禪定知心無住)
선정에 드는 것은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강설 ; 다음은 선정이다. 선정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마음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본래로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왜 한곳에 붙들어 매는가. 붙들어 맨다고 해서 그것이 한 곳에 머물러 있던가. 만고에 그런 일은 없다.
13, 감무신이구상(鑒無身而具相)
이 몸이 본래 없음을 관찰하고 온갖 상호를 갖춘다.
강설 ; 몸을 가지고도 본래로 몸이 공하여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되 온갖 모양새를 내며 형식을 갖춘다. 관자재보살은 세상에서 가장 값이 비싸고 희귀한 보석을 온 몸에 칭칭 감고 있으면서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모두 없으며, 물질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또한 모두 없다고 하였다. 철저하게 없는 줄을 알되 갖춰야할 모양과 형식은 누구보다도 잘 갖춘 이가 관자재보살이다. 그래서 관찰하는 것이 자유자재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있음과 없음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정견(中道正見)의 삶이다.
14, 증무설이담전(證無說而談詮)
설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 알고 법을 설하라.
강설 ; 본래 아무것도 설명할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알면서 온갖 이치를 남김없이 설한다. 그래서 8만 장경을 설하고도 “한 글자도 설한바가 없노라.”라고 하신 것이다. 실로 8만 장경을 다 설하면서도 본래로 한 글자도 설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장광설을 펼쳐서 중생들을 깨우쳐야 한다.
15, 건립수월도량(建立水月道場)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도량을 건립하라.
강설 ; 절을 짓고 선원을 세우고 포교당을 마련하되 그 모두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이 헛것인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온갖 불사는 모두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에 불과하다. 축원문에도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 하지 않던가. 이 몸도 그렇거늘 하물며 이 몸 밖에 있는 수행도량이야 말 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게 알면서 한편 열심히 도량을 건립해야하는 것이 또한 이 도리이다.
16, 장엄성공세계(莊嚴性空世界)
본성이 공적한 세계를 잘 장엄하라.
강설 ;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 본성이 텅 비어 공한 것이다.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모든 환경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겠는가. 잘 가꾸고 다듬고 아껴가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이것이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7,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供具)
환영과 같은 공양구를 부처님 앞에 나열하라.
강설 ; 부처님 앞에 산더미와 같은 공양구를 올리는 것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마술로 변화하여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술로 만든 거짓 공양구라도 산처럼 높이 쌓아 정성을 다해 올려야 한다. 만약 마술로 만든 거짓 공양구라고 하여 소흘히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바른 이치를 모르는 소이이다. 이것이 공양구에 대한 바른 견해다.
18, 공양영향여래(供養影響如來)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하라.
강설 ; 마술로 만든 헛된 공양구를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정성을 다해서 공양 올리는 것이다. 만약 공양구나 여래가 모두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것에 공양한다면 그것은 치우친 견해이다. 이것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바른 마음이다. 또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여래라고 하여 공양을 올리지 않는 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19, 참회죄성본공(懺悔罪性本空)
죄의 성품이 본래로 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참회하라.
강설 ; 죄의 자체 성품은 본래로 텅 비어 공한 그것을 참회한다. 만약 죄가 본래로 텅 비어 공하다고 하여 참회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중도의 바른 견해가 아니다. 치우친 소견이다. “죄는 그 자체 성품이 없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만약 소멸하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 죄가 없어지고 마음도 소멸하여 두 가지가 텅 비어 공하면 이것이 참다운 참회다.”라고 하였다.
20, 권청법신상주(勸請法身常住)
법신이 오래오래 상주하기를 권청하라.
강설 ; 부처님의 법신은 본래로 영원히 상주하는 것이다. 언제 태어난 바도 없고 소멸하여 없어지는 바도 없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처님의 법신이 상주하시기를 청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법신이 영원히 상주하는 것을 잘 알면서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신에 대한 올바른 견해이다.
21, 회향요무소득(迴向了無所得)
선근을 회향하되 얻을 바가 없음을 깨달으라.
강설 ; 보살은 선근을 닦아서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그러므로 불법은 회향이고 회향은 불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선근을 회향하더라도 결코 그 회향은 결과적으로 얻을 바가 없음을 깨달아 안다. 얻을 바가 없음을 알면서 열심히 선근을 닦아 회향하는 것이 진정한 회향이다.
22, 수희복등진여(隨喜福等眞如)
본래로 복덕이 진여와 동등함을 따라서 기뻐하라.
강설 ;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의 복은 궁극에 진여와 동등하다. 그렇다면 진여의 양은 얼마나 되는가. 이 우주법계가 그대로 진여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본래로 가진 복도 그대로 이 우주법계와 같다. 그렇다면 굳이 따라서 기뻐할 것이 없지 않은가. 아니다. 복이 진여와 같고 우주법계와 같기 때문에 따라서 기뻐하는 것이다.
23, 찬탄피아허현(讚歎彼我虛玄)
너와 내가 텅 비고 현묘하다는 것을 찬탄하라.
강설 ; 주관이나 객관이나, 너나 나나, 남이나 자신이나 아(我)나 법(法)이나 모두가 텅 비었으면서 아득하고 오묘하다. 그 실체를 무엇이라고 확정하여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실로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공한 것인가. 있는 것인가. 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그와 같은 존재이기에 더욱 찬탄하는 것이다.
24, 발원능소평등(發願能所平等)
주관과 객관이 평등하기를 발원하라.
강설 ; 어떤 일에도 원하는 바는 있다. 불교에서의 발원은 궁극에 부처님과 중생이 평등해지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부처님과 평등해졌다면 다시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실은 본래부터 부처님과 중생은 평등한 존재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불교수행의 궁극이다.
25, 예배영현법회(禮拜影現法會)
그림자와 같이 나타난 법회에 예배하라.
강설 ; 불교의 역사 2천 6백여 년 동안 석가세존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법회가 있어왔다. 불교는 수행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혹은 석가세존을 직접 우러러 보면서, 혹은 부처님을 대신한 선지식을 의지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법회가 있었던가. 그와 같은 무수한 법회마다 뜨거운 신심을 가슴에 안고 환희 동참하여 예배 공양하는 일이 불법수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상처럼 나타난 법회[影現法會]이다. 어디에도 언제에도 실재하는 법회는 없었다. 영상처럼 나타난 법회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더욱 열심히 예배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26, 행도족섭허공(行道足躡虛空)
길을 가되 그 발은 허공을 밟는다.
강설 ; 길을 간다는 행도(行道)란 길을 가는 것에서부터 불상을 돌고, 탑을 돌고, 법당을 도는 등의 수행법이다. 요불(繞佛) 요탑(繞塔)을 하려면 길을 가기 때문에 행도라고 한다. 행선(行禪)도 그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땅을 밟아야지 허공을 밟으면서 어찌 길을 가고, 불상을 돌고, 탑을 돌고, 법당을 돌고 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만약 행도를 하면서 땅을 밟는다면 그것이 또한 어찌 행도가 되겠는가. 허공을 밟으면서 길을 가고, 불상을 돌고, 탑을 돌고, 법당을 돌아야 진실로 행도를 하는 것이다. 중도의 이치는 언제나 모순으로 여겨지지만 그 모순처럼 들리는 것이 바른 길이다. 중도정견은 언제나 세속적 논리와 안목으로는 모순처럼 들린다. 일체 만선(萬善)은 모두 중도의 이치에 돌아가야 참다운 선행이 되기 때문이다.
27, 분향묘달무생(焚香妙達無生)
향을 사루며 생멸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다.
강설 ; 향을 사루는 분향(焚香)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훌륭한 수행이다. 분향은 사찰이나 그 외에 다른 종교의 성전에서도 흔히 행해지는 의식이다. 향을 사루면 유익한 점은 나쁜 냄새를 제거하고, 머리가 맑아지고, 따라서 몸도 정화가 된다. 그래서 정신이 맑고 몸도 가벼우며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청량한 기분을 누리게 되어 집중과 몰입이 잘 된다. 그래서 기도를 하거나 선정을 닦거나 독경을 하거나 부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향을 피우게 된다. 이와 같은 유익한 점이 있어서 향을 사르는데 순식간에 연기로 사라지고 마는 향을 사를 때 반드시 생멸이 없는 이치를 깊이 통달하여야 한다. 즉 순간의 생멸을 보며 영원히 생멸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28, 송경심통실상(誦經深通實相)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일체 법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는 것이다.
강설 ; 만 가지 선행은 모두 다 중도에 돌아간다[萬善同歸中道頌]는 42게송으로 불법수행의 여러 방면을 낱낱이 열거하여 모든 수행이 반드시 중도적 관점에서 실천되기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법이 온전히 담겨있는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무엇을 성취하기 위함인가를 분명하게 밝힌 부분이다. 심통실상(深通實相), 즉 일체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깊이 통달하는 것이 곧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을 공부하는 모든 화엄행자들은 부디 사람과 일체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기를 바란다.
29, 산화현제무착(散華顯諸無着)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는 것은 집착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강설 ; 불교에는 일찍부터 부처님께 꽃을 올리는 사례가 있어왔다. 세존의 전생담(前生譚) 구리선녀와 선혜(善慧)비구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는 일은 아름다운 공양이며 수행의 하나로 여겨오고 있다. 그런데 흩는 꽃이나 꽂아서 올리는 꽃이나 모두가 꽃에서는 집착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30, 탄지이표거진(彈指以表去塵)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먼지 같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표현한다.
강설 ; 사찰에서나 일반 사회에서나 탄지(彈指), 즉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서로를 알리어 놓고 있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혼침과 망상[塵]을 제거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정신을 놓고 있지만 앞에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가 않다.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갖게 된다. 설사 혼자 있더라도 언제나 이와 같이 정신을 놓지 말고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탄지는 죽비와 목탁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31, 시위곡향도문(施爲谷響度門)
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은 바라밀을 베풀라.
강설 ; 보살이 중생들을 위하여 펼치는 온갖 선근회향들을 바라밀행이라 한다. 석가세존으로부터 역대 많고 많은 보살들과 선지식들이 만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노동을 제공하고 온갖 물질을 베풀고 하는 일들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혜택을 베풀었다. 물론 앞으로도 보살은 세상을 향해 그렇게 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그 훌륭한 좋은 일들은 모두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임을 알고 그와 같은 바라밀행을 베풀어야 한다. 메아리는 직접적인 소리도 아니다. 사람이 내는 소리의 또 다른 울림일 뿐이다.
32, 수습공화만행(修習空華萬行)
허공의 꽃과 같은 만행(萬行)을 닦으라.
강설 ; 만행에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위시하여 10바라밀과 10선과 사섭법과 사무량심과 인의예지와 온갖 8만 4천 선행이 모두 만행(萬行)이다.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닦고 익히는 일은 모두가 만행이다. 그런데 그 만행은 눈에 병이 났을 때 환영처럼 보이는 허공의 헛꽃과 같은 것으로 알고 닦아야 한다. 만약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니고 인욕을 닦고, 정진을 하고 선정을 닦았다고 하여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바른 안목이 아니다.
33, 심입연생성해(深入緣生性海)
인연으로 생멸하는 본성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라.
강설 ; 대승불교가 깨달은 법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만물의 자성이 있고, 그 자성이 인연을 만나면 천변만화로 변화하면서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질이 그렇고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마치 바다의 물이 바람을 만나면 온갖 파도라는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 물의 본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본성과 현상의 관계는 이처럼 무엇이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존재의 법칙에 깊이 들어가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불교의 한 가지 가르침이다.
34, 상유여환법문(常遊如幻法門)
환영과 같은 법문에서 항상 노닐라.
강설 ; 법문이 만약 환영과 같다면 그곳에서 노닐 까닭이 없다. 그러나 법문이 환영과 같은 줄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는 그곳에서 항상 노니는 것이 진정으로 법문의 실상을 아는 일이다. 만약 법문이 환영과 같다고만 알고 법문 속에서 노닐지 않는 다면 그것은 편협한 세속적 견해이며 치우치고 잘못된 소견이다.
35, 서단무렴진로(誓斷無染塵勞)
본래 오염이 없는 번뇌[塵勞]를 맹서코 끊어라.
강설 ; 번뇌에 오염이 없다면 굳이 끊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번뇌에 오염이 있다면 실은 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본래 오염이 없으므로 끊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맹서코 끊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염이 없는 번뇌를 맹서코 끊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번뇌에 대한 중도적 안목이다. 번뇌를 이와 같이 아는 것은 바른 견해이고, 이와 달리 아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36, 원생유심정토(願生惟心淨土)
마음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라.
강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정토(淨土)든 예토(穢土)든 모든 것은 오직 그 사람의 마음의 영역 안에서 이뤄진 현상이다. 만선동귀중도송의 저자인 영명연수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종조이면서 염불종을 창시한 개조(開祖)이다. 평소에도 염불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모든 사람이 정토에 태어나기를 권장하였다. 그런데 그 정토가 바로 유심정토인 것이다. 만약 정토가 내 마음 안에 있다면 이미 나의 정토인지라 굳이 가서 태어날 것을 서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모순 같지만 내 마음 안에 있는 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여 열심히 염불하는 것이 바른 견해를 가진 염불수행자이다.
37, 이천실제이지(履踐實際理地)
실제의 진리의 땅[實際理地]을 밟아라.
강설 ; 진리란 이 우주에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진리를 피할 레야 피할 수 없다. 만약 어느 한 장소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굳이 진리의 땅을 찾아가서 밟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과 한 순간도 떠나있지 않은 진리의 땅을 반드시 밟도록 정진하여야 한다. 이 또한 모순 같지만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38, 출입무득관문(出入無得觀門)
얻음이 없는 지관(止觀)의 문으로 출입하라.
강설 ; 초기의 불교수행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뿐이었다. 불교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발달하여 왔으나 이 지관수행은 천태종의 지관법과 함께 특히 남방불교에서 지금까지 많이 행하여지고 있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수행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큰 소득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설사 소득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얻음이 없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행을 하더라도 얻음이 없는 수행의 문에 출입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얻을 것도 없는 수행을 왜 하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삿된 견해이지 중도의 바른 견해는 아니다.
39, 항복경상마군(降伏鏡像魔軍)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 받아라.
강설 ; 세존의 일생을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하여 여덟 가지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정각을 이루신 장면을 정각을 이뤘다고 표현하지 않고 수하항마(樹下降魔)라 하여 보리수나무 밑에서 마군을 항복 받은 것을 정각을 대신하여 보여준다. 그와 같이 수행에는 마군을 항복 받는 것이 곧 깨달음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그 마군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이 보라는 뜻이다. 만약 그토록 항복 받기 어려운 마군이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아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항복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 마군을 항복 받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알고 항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동안 실재하지도 않는 그림자를 보고 싸움을 하느라고 피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있지도 않는 마군을 항복 받으려고 얼마나 많은 밤을 지세며 싸움을 벌였던가. 세존도 그리고 그 많은 수행자들도 그림자를 쫓아가는 헛수고였던 것이다.
40, 대작몽중불사(大作夢中佛事)
꿈속의 불사를 크게 일으키라.
강설 ; 불교에는 중생제도라는 불사와 보살 만행이라는 불사와 불상을 만들고 법당을 건립하는 등 무수히 많은 불사가 있다. 실은 불교라는 이름 하에서 하는 모든 일은 모두 불사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모든 불사는 모두가 꿈속에서 꿈을 꾸는 일이다. 설사 출가를 하고 고행을 하며 정각을 이루고 법을 설해서 중생을 제도한다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꿈속의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불사가 꿈속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 꿈의 불사를 크게 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체 불사가 꿈인 줄을 잘 안다면 더욱 열심히 짓는 것이 또한 참다운 불사다. 만약 꿈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여 그 허망한 꿈과 같은 불사는 지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삿된 견해이다. 꿈속의 불사인줄 확실하게 알면서 크게 일으키는 것이 중도적인 바른 견해이다.
41, 광도여화함식(廣度如化含識)
환화(幻化)와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라.
강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불교의 목적은 성불이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 출가하여 그 숫한 난행과 고행을 하는 것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와 같이 중요한 중생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다. 참으로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세속적 견해[相見]이다. 만약 중생이란 본래로 텅 비어 공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견(空見)이다. 그리고 다시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라고 본다면 그것은 중생의 실상을 바르게 꿰뚫어 보는 중도적 견해[中道見]이다. 중생이 중생도 아니요, 또한 텅 비어 공한 것도 아니요, 또한 부처도 아니다. 다만 환영일 뿐이다. 영상일 뿐이며 환화일 뿐이다. 이와 같이 실재하지도 않는 환화인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환화인 중생이 아무리 많더라도 기어이 다 건지리다. 중생 제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42, 동증적멸보리(同證寂滅菩提)
적멸한 보리를 다 같이 증득하라.
강설 ; 환화와 같은 중생을 제도하여 어디에 이르게 하고자하는 것인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菩提]이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고요하고 고요한 적멸의 보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요하고 고요한 경지가 깨달음의 경지인가. 깨달음의 경지가 고요하고 고요한 경지인가. 너무 따지지 말라. 고요함이 깨어지느니라. 만약 따진다고 해서 고요함이 깨어진다면 그것은 가짜 깨달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요함이 깨어졌는가? 깨어지지 않았는가?
화엄경 강설 4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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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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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