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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30일 주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드리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으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이 누리는 풍요로 가난한 이들의 궁핍을 채워 주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가 간곡히 청하자 그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신다(복음).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형제 여러분, 7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제2독서는 가난한 이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시며 누구보다도 부유한 분이셨지만,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넘어 십자가 죽음이라는 비천함까지 껴안으십니다(필리 2,6-8 참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시는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고고하게 홀로 계심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하시는 인간과 같아지시는 거룩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가난함으로 우리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시고, 그 안에서 슬픔과 고통을 함께 겪으십니다. 이달 내내 우리가 기억한 그리스도의 성심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마음이 찢어지도록 슬퍼하시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는 그 가난으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유해지고 충만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가난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는 윤리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습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여 줍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이와 분리되어 그들에게 작은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부자 교회’가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으로 동화되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최정훈 바오로 신부)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 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사랑 받지 못하면 죽고 싶게 진화했다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과 열두 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12’라는 숫자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백성과 12사도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 곧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 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의 샘임을 믿고 부모에게서 에너지를 받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자살 시도하면서도 창조자를 찾지 않고 자신은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장동선 뇌과학자가 ‘세바시 15분’에 나와 ‘마음의 구조신호에 귀 기울여 주세요’란 제목으로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청소년 때 두 번, 어른이 되어서 한 번,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우리 함께 죽자!”란 소리를 많이 하였던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치 독이 든 캡슐을 삼켜서 그 독이 계속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자신의 큰 아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강의는 모두 ‘진화론’적입니다. 뇌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진화론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고등 동물로 올라올수록 ‘의존’해야 하게 태어납니다. 인간은 인간 답게 살려면 적어도 20년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고장이 나고 정말 죽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서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어미를 선택할 때 젖병이 있는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이 아니라 젖병이 없어도 따듯한 감촉이 있는 수건으로 감싸인 인형을 어미로 믿었습니다. 영장류는 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젖보다 어미의 사랑을 더 그리워합니다. 반면 모기나 박테리아와 같은 것들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관계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관계 맺을 필요가 없는 동물들이 더 유리합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모기나 바퀴벌레는 남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할 때면 그 창조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 만큼 그 창조된 것을 위해 더 큰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제가 컴퓨터가 고장 나 강론 원고를 날려버리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이 제출 직전에 다 날아가면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박테리아보다는 인간이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 놓으십니다. 이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창조한 이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삶의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생성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진화하는 게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자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서 ‘당연하게’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이로나 하혈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께 빠져나가는 생명을 청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든 이로부터 에너지를 청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배우 최강희 씨는 낮은 자존감으로 밥도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천사 이미지와 저녁에는 술과 담배를 사서 먹고 마시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 하는 이중성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진정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고는 술·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비로소 참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자로 인정함으로써.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살아서 압니다. 우리에게서는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창조된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코드를 꽂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매일 세 시간 정도는 성체조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애인을 만날 때 방법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가요?
오늘 복음의 두 의인처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믿고 그분 옷자락을 쥐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분 곁에 머물면 됩니다.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199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경본을 읽을 때 꼭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황과 우리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분입니다. 33년을 지내면서 우리 교황은 3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주교는 4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그리고 정순택 베드로 주교입니다. 이곳 댈러스 교구에서는 우리 주교 ‘Burns와 Kelly'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매 미사마다 교황과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들의 직무와 직책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교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26대 사목회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27대 사목회가 출범합니다. 26대 사목회를 이끌어 주셨던 사목회장님과 사목위원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6대 사목회는 팬데믹의 어려움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1977년 시작하여 이제 27대 사목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가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성인
로마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네로 황제 때인 서기 64년 로마가 화재를 입은 후 교회에 가해진 첫 번째 박해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역사가인 타치투스(Annales 15, 44)와 로마 주교 클레멘스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5-6장)가 이 사실을 증언해 준다.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적어본다.
이제 과거의 예를 떠나 좀더 근래에 있었던 영웅적인 분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우리 시대의 숭고한 모범을 보기로 합시다.
우리 교회의 가장 견고하고 거룩한 기둥이었던 그분들도 질투와 시기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아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투쟁했습니다.
먼저 거룩한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베드로는 이 죄스런 질투심 때문에 한 두 가지도 아닌 여러 가지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수난 받은 후 마침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오로도 이 질투심과 분쟁 때문에 인내의 상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곱 번이나 사슬에 매이고 피신도 하고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 서방의 복음 전파자가 되고 신앙으로 말미암아 높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 온 세상의 정의를 가르치면서 서방의 극변까지 이른 후 통치자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팔마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이 세상을 떠나 성도들의 거룩한 안식처로 올라가 우리에게 인내의 가장 위대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영위한 이분들 외에 질투심 때문에 생긴 고문과 고초를 당한 수많은 성도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질투심 때문에 다나이다와 디르체아 같은 여인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독히 잔인하고 가증스런 고초를 당한 다음 신앙의 목적지에 다다라 연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귀한 상급을 받았습니다.
질투심은 아내의 마음을 남편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우리 선조 아담의 말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질투심과 분쟁은 큰 도시마저 뒤엎었고 강대한 민족들을 뿌리째 뽑아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다만 여러분이 지켜야 할 의무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나 자신도 교훈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같은 경기장에 서 있고 같은 싸움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쓸데없고 헛된 걱정거리는 뒤에 제쳐 두고 영예롭고 거룩한 우리의 전통에로 방향을 돌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즐거우며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인지 분간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피에다 우리 시선을 두도록 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 흘리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회개의 은총을 얻어 준 그 피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보배로운지 깨닫도록 합시다.
복자 필립보 포웰(Philip Powell)
활동년도 : 1594-1646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영국 웨일스(Wales) 남동부 궨트(Gwent) 혹은 브리컨의 트롤윙에서 태어난 필리푸스 포웰(Philippus Powell, 또는 필립보)는 16세 때에 런던으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2-3년 뒤에 업무차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갔다. 그는 여기서 베네딕토회에 큰 매력을 느껴서 1619년에 입회하였다.
1622년 3월 7일 그는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처음에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데번셔(Devonshire)로 가서 어느 가톨릭 신자 가정을 소개받았는데, 그 후 20여 년간 데번(Devon)과 서머싯(Somerset) 그리고 콘월(Cornwall) 지방에서 숨어 다니며 배교자와 이단자들을 권면하는 등 사목활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영국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고링 장군 편에 가담하여 종군사제로 일하다가 웨일스 지방으로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런던으로 호송되었다. 옥중생활 속에서도 그의 놀라운 신심과 그리스도교적 덕행이 빛을 발했기 때문에 관리들조차 그를 아주 점잖게 대하였다. 그는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복자 라이문도 룰로(Raymund Lull)
활동년도 : 1232-1316년
신분 : 선교사
지역
같은 이름 :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룰로, 룰루스
라이문두스 룰루스(Raymundus Lullus, 또는 라이문도 룰로)는 모슬렘으로부터 마요르카(Mallorca) 섬을 구출한 어느 장군의 아들로서 마요르카 섬의 팔마(Palma) 태생이며, 아라곤(Aragun)의 야고보 1세 왕의 신하가 되었고, 1257년에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하였다. 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라이문두스는 은거생활을 추구하였는데, 1263년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본 뒤로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로카마두르를 순례한 후,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고, 가족들의 생계 외에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개종에 관심에 많았으며, 9년 동안 모슬렘에 대해 공부한 뒤, 자신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하여 마요르카 섬에 트리니타스 대학을 세워 설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선교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의 정세 때문에 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1306년에 부지에 가는데 성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추방되었다. 그는 철학, 음악, 항해, 법률, 천문학, 수학, 신학 등의 저서를 아라비아어로 남겼고,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a)와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에 버금가는 신비적인 시를 남겼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0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