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해평윤씨의 시조(始祖)이다. 1257(고종 44) 원주에서 안열(安悅) 등이 고성(古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으로서 낭장 권찬(權贊)과 함께 파견되어 원흥창(元興倉)에서 적을 크게 파하고 난을 진정시켰다.
1269년(원종 10)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2년 후 좌복야로서 사공(司空) 전빈(田份)과 함께 부위병(府衛兵)을 사열하고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였다. 1273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올랐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시조 윤군정(君正)은 고려 고종, 원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윤신준의 후손으로 전한다.)
시조의 아들 윤만비(萬庇)는 충렬왕 때 기사일등공신(己巳一等功臣)으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역임했다.
시조의 손자 윤석(碩)이 고려 충숙왕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 벽상삼중대광, 도첨의사, 우의정,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海平)을 본관으로 하였다.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윤은보(殷輔):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윤두수(斗壽)
윤근수(根壽)
윤승훈(承勳) :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윤방(昉) : 윤두수의 첫째 아들,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윤흔(昕) : 윤두수의 둘째 아들, 우승지를 지내고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역시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윤휘(暉) : 윤두수의 셋째 아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인조를 따라서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고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윤훤(暄) : 윤두수의 넷째 아들, 병조판서를 지냈다.
윤오(旿) : 윤두수의 다섯째 아들,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윤급(汲)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를 이룩하였다.
윤비(妃) : 순종왕비, 영의정 윤방(昉)의 후손이다.
윤치호(致昊) : 윤흔의 8세손이며, 아버지 윤웅렬(雄烈)은 한말에 군부대신이었다.
윤보선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