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제자 사랑
제자의 스승사랑
너무 일찍 떠난 나의 스승님
그리운 너무나 그리운!
스승의 도시락
애제자 훈이가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새벽에 톡을 보냈다. 젊은 수학선생님, 훈이를 아꼈던 공평하고 멋진 남자 선생님, 남겨진 가족들, 초등학교 5학년 딸! 슬픔에는 예고편이 없다는 것을 인생에서 배우는 날이었으리라! 버스를 잘못 타서 돌고 돌아 상갓집을 가면서 길치인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충남대학교 병원 영안실이었는데 충남 대학교로 갔다. 훈이는 눈물을 흘렸을까? 난 그 답을 알고 있다. 녀석이 어떤 인간이란 걸 난 이미 알고 있다. 젊은 남자의 죽음 은 때로는 신비로움을 준다. 파고 싶어지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덮고 간다.
나에게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리움의 노래로 남은 선생님이 있다. 나이 들수록 생각나는 나의 노희숙 스승님! 공작이 깃털을 활짝 펼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순간을 선생님께 못 보여 드렸다. 어쩌면 난 암 공작이라 영원히 우아한 드레스 자락 같은 영롱한 깃털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 이미 놓쳐버린 한번 만나고 다시는 못 만나는 지나가는 빛처럼 눈을 뚫고 흐르는 비늘들, 난 그것을 난 빛이라 때론 세월이라 부른다. 접혀진 책처럼 튀어나온 순간이 삶에도 있었다. 구름과 조우하는 구름처럼 하나가 되는 순간들, 나를 인정해 주고 내 삶의 윤곽을 그려준 그녀가 있었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면 꼭 밥을 사드리고 싶다. 왜 그렇게 난 그분께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싶은지는 나만 알고 있다. 당신에게도 그런 스승님이 있다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운이 좋아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좋아하는 과목 국어 선생님이셨다. 70명이 넘는 반 아이들( 막 전학 온 애용이까지 정확히 72명이었다.)의 독서록에 붉은 펜으로 친히 댓글을 달아주셨다. 힘들 때 선생님의 달달한 응원이 좋아서 더욱더 헤매고 방황하는척했다. 난 연기의 달인이었다.
왜 그렇게 타인의 위로에 목말라했을까? 어제의 굳건한 믿음이 오늘 흔들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언젠가 내가 썼던 일기지만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로 넘쳐나고 후회와 회한들이 출렁이며 달려오는 밤, 속을 모르고 방향을 몰랐던 나의 어설픈 청춘의 이유 없는 회한으로 넘쳐났다. 그냥 젊기만 한 건 어쩌면 지혜와 경험이라는 키로 풀어야 하는 저주였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서명은 Miss No였다. 본인이 결혼을 해서 더 이상 Miss가 No라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삼십 대에 세상을 떠난 스승을 추억하는 오십 대 후반의 늙은 제자는 스승의 궤적을 돌아보며 엇갈린 시간들을 셈해본다. 174센티미터 배구 선수 출신, 뒤트임 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다리 뒤 큰 점, 사부님께서 상당히 잘생기고 호남형이었다.
소풍 때 학생을 위해 도시락을 싸오신 최초의 선생님이었다. 미리 계산하고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오셨다. 그때의 스승님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선생님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실로 그리움엔 쉼표도 마침표도 없다.
예견된 죽음이었다. 크리마스 전날, C 대학원 국문과 파티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초과 인원 초과 소리가 나자 스승님께서 본인이 계단으로 간다고 말하고 내렸다. 그때의 그 벨 소리는 죽음의 소리였다. 다른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탔더라면, 마지막 탄 사람이 내리게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스승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양보하고 건넬 줄 아는 넉넉한 분이었다.
아마도 타이타닉에 탔더라도 죽음을 알더라도 구명조끼나 구명보트의 자리를 제자에게 양보하는 분이었을 것이다. 그분이 계셔서 난 아직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외운다. 10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다 난간 공사 중이었던 것을 모르고 추락사하셨다. 스승님은 불혹도 못 사시고 떠났다. 지천명을 훌쩍 넘은 나이에 제자가 이제서야 고마움을 글로써 대신한다. "타는 그리움!"
난 여전히 그 대형 백화점에서 장을 보고 그 그룹의 주식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그룹의 야구팀을 응원한다. 대형 백화점 계단 사고사였다. 엘리베이터의 인원 초과 소리가 "삐익" 하고 울렸다. 죽음의 복선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스승님이 달려오셨다. 바로 봉걸레를 들고 걸레를 빼서 던지고 긴 나무로 전원을 때리고 나서 이유를 설명했다. 맞을만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나른한 오후, 사회 선생님 앞으로 허락도 안 받고 아이스크림을 매점에서 배달시켜 먹었다. (신익재 사회 선생님은 서울법대 출신으로 사법고시를 1차를 3번 패스하셨고 첫날 아이들에게 별의별 작위를 다 하사하시고 전원을 다 외우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다른 과목도 질문하면 막힘이 없으셨다. 아마도 지금 찾아가도 그분은 바로 내 이름을 기억하실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강 천재이다.) 상남자셨다. 일단 외모별로 학생들을 너무 정직하게 분리하셨다.
" 다 나와서 줄 서, 치마 꽉 잡아. 인생 추잡게 살지 말아라! 공짜 좋아하지 마라! "난 이 말을 좋아한다. 남의 돈 함부로 하기를 숨 쉬듯 하는 인간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요즘, 인간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국개의원이나 정치인들 세워놓고 봉걸래 자루로 때리고 싶다. 정치가 망해서 나라가 엉망이다. 정치 혐오증 생길 것 같다. 눈먼 돈 좋아하는 자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 한학 마을 가서 곤장 빌려와 패고 싶다. 우수수 쓰러지는 나무처럼 아이들이 주저앉았다. 아픔을 꾹 참았다. 난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다. 난 여전히 뼈를 때리는 체외충격파치료를 받으면서도 아픈 표정 하나 짓지 않는다.
반 전원의 엉덩이를 내리쳤던 사건, 그 후로 난 매복 자세로 살았다. 처음으로 맞은 날이었다. 운이 지독히도 좋았던 것인지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 청소도 언제나 열심히 하는 척을 했다. 스승께선 아셨을 것이다. 나의 ADHD 성향과 얄팍한 속내를 간파하고도 간과하셨으리라!!
뜨락의 나무의자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바라보다 떠오른 얼굴, 감정을 옮길 단어를 찾기 위해 난 오늘도 헤맨다. 누구도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을 찾고 또 찾는다. 좋은 사람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코로나 372번 참회하는 마음으로(?) 승정원 기록처럼 올립니다. 나를 위한 피의 고백서! 삶에서 못다한 말들, 그리고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지나간 시대의 비극인 <코로나 일지>. 한번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자입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기억해야할 <상실의 아픔>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망해 버린 삶, 누군가에겐 희망이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