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계(雲溪)형님 영전(靈前)에 올리는 제문(祭文)
다음 글은 운걔형님 일주기를 맞아 영전에 올린 동생 삼 남매의 눈에
비친 본받을 자취들을 간추려 적은 글이다.
삼체계계원 모두가 읽어보고,
운계형님의 고귀한 얼을 본받도록 하자.
유세차 병신 팔월병술삭 이십오일경술(維歲次 丙申 八月丙戌朔 二十五日庚戌) 오늘 숙형(叔兄) 운계형님 일주기(雲溪兄任 一週忌)를 맞아 불초(不肖) 동생 炳極, 炳淑, 炳默 삼남매는 형님 영전에 삼가 재배하오며 소회(所懷)의 일단을 피력(披瀝)할까 합니다.
일 년 전 건강하시던 형님께서 몹쓸 병을 얻어, 형수님과 仁基 여러 남매들의 정성어린 병구완에도 차도 없이 무엇이 그리 바빠 저희들 곁을 떠나셨는지요! 애통(哀痛)하고 절통(切痛)합니다.
화락(和樂)하던 우리 대소가(大小家)가 형님 별세의 큰 환란(患亂)을 당하여 모두가 비통(悲痛)에 빠졌습니다.
삼체계 계안(稧案)에 ‘병(病)들면 서로 낫게 해야 한다’는 삼체계 정신을 실천하지 못한 저희들은 兄任을 떠나보내어 정말 죄송(罪悚)합니다.
지금은 정신을 차려 형님이 남기신 숭고한 정신을 거울삼아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형님의 생애(生涯) 중에 아우들의 눈에 비친 본받을 숭고한 자취들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첫째 : 어린 시절을 회상(回想)해 봅니다.
형님은 다재다능(多才多能)하셨습니다. 영재(英才)셨기에 초등학교 재학 시는 학력이 뛰어나 우등생으로 해마다 우등상을 대표로 받으셨습니다. 일화(逸話)로 저학년 때 수상대표로 나가며 허리띠가 흘러내려 한손으로 끌어 올리면서 나가는 모습이 모인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이야기를 하셨지요!
졸업 후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은 진학의 꿈은 아예 못 꾸었고, 가사조력(家事助力)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머슴이 우리 농사를 지었는데 거들기는 형님들의 몫이었지요!
그러다 17,8세 될 때에 우리 집에 우차(牛車)가 있어 양동형님이 맡아 운영하다가 면서기(面書記)로 취직되니, 그 일을 형님이 이어받아 자주 영천에서 석유를 실어 오고, 또 빈 드럼통을 실어 나갔지요! 한번은 주남다리(영천교)에서 앞에 오는 트럭에 놀란 소가 뛰어서 드럼통이 무너져 다시 싣는 일에 애를 많이 먹었다는 어려웠던 지난 이야기를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린 힘으로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 하였던가 하는 애처로움을 느낍니다.
둘째 : 어려웠던 우리 집의 기둥 역할을 하셨습니다.
영천의 창구동에 큰집(大宅)이 있을 때 우리 집은 3형제는 공무원이고, 한분은 사업을 하고 있었고, 막내는 경대 법대에 입학하여 면학(勉學)하고 있어, 남이 부러워하는 화락(和樂)한 가정이었는데,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장난인지 또한 시기(猜忌)인지 단란(團欒)하고 번창(繁昌)하던 우리 가정이 폐가(廢家)가 되는 환란(患亂)을 겪었지요! 기억조차하기 싫네요.
그래서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큰집 경산형수님과 형님이 의논하여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집의 기둥이 되어 그때부터 장남의 역할을 맡아 오늘의 우리 대소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셋째 : 충실한 교직생활을 하셨습니다.
형님의 24년간 교직생활은 심혈을 기울어 정성껏 교육활동을 하셨기에 많은 제자들의 추앙(推仰)받은 참 스승이 되셨습니다.
특히 대구시내 근무 때는 중학교 진학지도를 잘하여 경북중학교에 많은 제자들을 진학시키니 가는 학교 마다 6학년 담임을 하셨고, 그러므로 학교장의 인정을 받아, 대구시내 학교 14년 연속근무의 유례가 없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시지도의 요령을 저에게 전수해 주셔서, 저 또한 입시 성적이 언제나 남 보다 앞섰기에 상사의 신임을 받아 저의 교직생활의 성공은 형님의 덕(德)이라 생각합니다.
넷째 : 사랑으로 집안의 모든 일을 이끄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선대(先代)부터 동기간(同氣間)에 우애(友愛)있는 집안입니다.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동생 들을 사랑으로 이끌며 보살폈습니다. 저의 성장에 큰 후광이 되셨고, 병묵이 군 제대 후 남산동에서 직장 다니며, 형님 내외분의 골몰을 많이 시켜 습니다.
그리고 전서방댁, 병묵의 결혼은 형님이 주관하여 잘 치루었 으며, 또한 수진이 결혼도 혼주의 역할을 맡아 잘 챙겨 주셨습 니다. 그 결과 다들 행복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보람된 일이지 요!
또한 아버지 삼형제분의 삼체계도 계장을 맡아 앞장서 활성화에 노력하여 이젠 기반이 튼튼한 계회로 발전하였고, 매년 一月 一日은 온 대소가의 남녀노소 모두 모여, 숭조,목족정신을 익히는 장(場)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 만학(晩學)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우셨습니다.
1972년 대구에서 경주시로 전근되어 불편을 감당 못해 다음 해에 사직하고 어려운 사회에 뛰어들 었 습니다. 그러다 한학에 관심을 두어 60세 부터 참암, 소준, 붕운선생의 사사(師事)를 받으며 심혈을 기우 려 한학공부에 매진(邁進)한 결과, 전국한시 백일장에 장원 5회, 기타 40여회의 수상을 함은 형님의 불철 주 야(不撤 晝夜) 매진한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됩니다.
유품(遺品)을 정리하다 한한대사전(韓漢大辭典)을 발견했습니 다. 얼마나 활용하셨 는지 낡고 낡아 모서리가 마모(磨耗)된 형 님의 손때 묻은 사전을 볼 때 눈물이 났습니다. 정말 초인적인 면학을 하셨 다는 증거물이었습니다. 현일이가 할아버지 체취 (體 臭)가 쓰며 있는 낡은 사전을 안고 생각에 잠긴 모 습을 보았습 니다. 형님의 면학(勉學)열정은 후손들의 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남의 묘갈명(墓碣銘) 및 기문찬(記文撰) 등을 7회나 지으셨고, 비석에 글쓰기 등도 11회 하셨 네요! 그리고 편액 (扁額) 쓰기 2회 (大宗會館懸板, 環丘書院 -克復 室)도 영원히 남을 일을 하셨습니다.
여섯째 : 유가(儒家)의 후예로서 빛나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우인회(友仁會), 청우회(淸愚會), 지우회(志友會), 등 영남지방 유가(儒家)의 후예(後 裔)들 모임에 참여 하여 적극적인 활동으로 회원들의 신망을 받으셨고, 만사(輓詞) 쓰기는 언제나 형님 몫 이였으며, 그로 인해 명문가 후손들과 교우로 전국의 서원의 원장 19회, 유사 1회, 헌관 17회, 집례 10회, 재장 3회 등의 소임(所任)을 맡아 훌륭 히 책임을 완수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작 년에 천거된 서원의 원장을 병환으로 사양한 곳이 6개 서원이 나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그리고 형님 초상(初喪) 때 도객(道客)들이 모여 운계(雲溪) 라는 아호(雅號)를 쓸 것을 결의하여, 그래서 형님의 명정(銘 旌), 관(棺), 상석(床石)에도 자랑스럽게 운계 (雲溪)로 썼습니다.
또한 형님이 참여한 회(會) 마다 만장(輓章)과 만사(輓詞)를 지어 와서 올렸고, 특히 지우회에서는 회원 22명이 참여한 금박 (金箔)으로 쓴 만사 두루마리를 보내왔습니다. 영원히 보존 할 것입니다.
일곱째 : 선조를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도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초곡재중건추진위원장을 맡아 재실(齋室)을 복원하고, 기문(記文)을 짓고, 쓰셨으며, 환구서원(環丘書院) 승원사업(陞院事業)에 고문을 맡아 타 향교를 방문하여 답신서(答申書) 받는 일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그리고 호군공사적지(護軍公事蹟誌) 발간의 모든 일을 맡아 성사(成事)시켰고, 하천종약회장(夏泉宗約會長)을 맡았을 때는 자호정사(紫湖精舍)의 유명인(有名人) 편액(扁額)의 국역(國譯)을 손수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형님이 아니면 발상도 못했고, 길이 남을 보람된 일입니다.
형님이 남기신 애장(愛藏) 도서는 유학(儒學)과 관계되는 도서만 골라 셋 서장(書欌) 분을 형님 이름으로 환구서원에 기증했습니다. 앞으로 서원의 참고도서로 활용되겠고, 많은 사람들이 형님의 숭조정신(崇祖精神)을 기억 할 것입니다.
여덟째 : 대소기(大小家)의 희소식(喜消息)을 전(傳)해 드립니다.
생시에 외손들의 결혼은 보셨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본손의 결혼은 보지 못하셨는데 기다리던 희소식은 주연이가 오는 10월 8일에, 현돈는 내년 3월 25일에 결혼을 합니다. 아쉬운 소리로 兄任께서 2年만 더 사셨어도 친손부(親孫婦), 친손서(親孫壻)를 보아셨을 것인데 生覺할수록 애통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종손(從孫)들도 현룡이가 내년 4월 15일에 장가가고, 현근이도 식을 올릴 예정이며,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젠 3세들의 결혼과 4세들이 태어남이, 희망차고 자랑스러운 우리 대소가가 되어 갈 것입니다.
끝으로 형님의 일생동안 쌓으신 정신을 모아보면,
자신은 면학정신으로, 동기간에는 우애로, 조상과 족친에게는 숭조.목족정신으로, 사회생활은 봉사정신으로, 친구와는 신의로 사셨습니다. 형님의 고귀한 정신을 우리 모두가 이어받아 지켜 나아가도로 노력하겠습니다.
운계형님요! 구천(九泉)에 계시는 부모형제 상봉하여 정성껏 모시고, 품은 회포(懷抱)와 정담(情談)을 나누시며 옛날처럼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오호통재 애재상(嗚呼痛哉 哀哉尙)
향(饗)
첫댓글 운계숙부님의 어제 1주기 휘일에 참사했습니다,
숙부님께서 제문을 지어 독축하시기에 저로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어 영전에 죄송 스러운 마음 금할길이 없었습니다,
운계숙부님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숙부님 편히 영면하시고 극락왕생 기원드립니다,
편치 않으신 몸으로 멀리까지 오셔서 직접 지으신 제문을 아버지 영전에 독축하신 숙부님의 정성에
감동할 따름입니다. 아버지 여러 남매분들의 우애를 생각케하는 제문을 읽고 다시금
우리도 그 정신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仁溪兄님!
어렵게 힘들게 제문 작성 하시느라 노심초사 고생 하셨습니다
고루 고루 운계형님의 업적과 능력을 담아올리셔서 후손들의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 됩니다
운계형님께서 자양에서 대구로 이사를 하게되면서 저에게는 부모 역활이 시작 되었지요
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거의 국수로 끼니를 이어가든 시절 큰형님 간호를 저와 형님께서 교대로 밤을지세고 귀가해보니 집에 도둑이들어 형님 양복을 모두 훔쳐가버려 뒷집에서 양복 한벌 주셔서 입고 학교를 가시던 일 눈치 없이 제가 친구들을 불러와 형수님께 고통을 드린일들,
저 제대후 형님께서 저에게 아이들 과외를 주선 하여 돈을 벌게 하여 주신 일들이 생각납니다.
늘 제가 불편 할까 지니친 관심과 배려로 형수님 힘들게 하시고
제가 결혼후에 부평에서 사업을 시작 어려움에 명절에 내려가지 못하는 사정을 너무 가슴아파 하시고 걱정을 해 주셨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이루 글로 다 표현 하기 어렵군요
부디 저승에서 부모 형제 만나셔서 이승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시고 마음편히 쉬시길 두손 모아 기원 드립니다
인기 형제 질부들 제사준비하느라 고생 많았고
형수님 늘 건강 하시고 마음 편히 지내시길 빕니다^^
어려웠던 지난 일들을 첨가해 주어 형님의 우애를 더욱 실감케하는구나!
생각할수록 우리들의 위대한 형님이셨구나!
.
다시 한번 할아버님의 업적을 알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그 정신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휘일에 함께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 금할길이 없습니다. 적은아버지의 제문을 통해 생전의 군위적은아버지의 정신과 발자취를 다시 한번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서 선생님 께서 가신지 1주기가 지났군요 . 祭文을 다읽고나니 가슴이 서늘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은간절합니다
부디 극락 왕생하셔서 永遠한 명복을 삼가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