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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에 얽힌 전설의 탐색
팔공산(八 : 여덟 팔, 公 : 신하를 높이는 말 공, 山 : 뫼 산)
<팔공산>
대구시의 북구와 동구, 칠곡군의 동명면과 가산면, 군위군의 부계면과 산성면 그리고 효령면, 영천
시의 신령면과 청통면, 경산시의 와촌면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는 산이 팔공산(1,193m)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국가에서 제사까지 지내며 숭배하던 오악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큰 산을 말하는
것으로 동쪽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 토함산을 동악, 서쪽은 충남 계룡시에 있는 계룡산을 서악, 남쪽
은 경남 산청군에 있는 지리산을 남악, 북쪽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태백산을 북악이라하였고, 중
앙은 대구시에 있는 팔공산을 중악이라 지칭하던것으로 통일신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산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를 지켜주는 오악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숭배되
어 온 영산이었다.
<전 설>
1. 신라시대에는 부악 또는 중악이라 했으며, 고려시대까지는 공산이라고만 하다가 조선시대에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다.
2. 공산전투와 고려를 세울 때에 공이 많은 여덟 장수를 칭한 것이다.
3.신령현(영천군), 해안현(대구시), 하양현(경산군), 팔거현(칠곡군), 부계현(군위군) 적라현(군위
군), 구산현(군위군) 부림현(군위군)의 여덟 현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산봉우리가 여덟 개이기 때문이다.
5. 원효의 여덟 제자가 천성산에서 공산으로 들어와 세 분의 스님은 삼성암(대구 동구 신무동)에
서, 다섯 분의 스님은 오도암(경북 군위군 부계면)에서 득도를 했기 때문이다.
6. 신라 현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속리산에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 부터 팔간자를 받아와
서 공산의 동화사에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7. 중국 팔공산에서 북조의 전진왕인 부견과 남조의 동진왕인 효무제와 비수 대전에서 부견왕이
참패 당한 전쟁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과의 동수대전이 비슷하여 팔공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8. 동수전투에서 신숭겸과 김낙을 포함하여, 8명의 장수를 잃었기 때문이다.
9. 동화사의 창건주인 심지가 법주사의 영심으로 부터 받아온 189간자 중에 미륵보살의 손가락
뼈로 만든 제 8간자인 신훈성불종자가 동화사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10. 여덟 명의 도인이 각각 덕을 쌓은 스님이 모인 팔공암이란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추 론>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전설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에는 참으로 어렵다.
전북 진안군에도 여덟 도인이 공을 쌓은 팔공암이 있어, 팔공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는데,
대구의 팔공산에는 210개의 사찰과 35개의 암자가 현존하는데, 팔공암의 위치와 전설을 찾을 수
가 없으며, 군위군 부계면에 있는 팔공사는 팔공산의 이름을 따서 근래에 세운 절이다.
그리고 동진의 장군인 주서가 전진에게 패했지만, 적국의 왕인 전진의 부견왕이 장수로 등용하는
덕을 입고 두 왕을 섬기던 주서가 비수 전투시에는 동진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여 전진을 패하게
만든 배반자가 승리한 중국의 팔공산 전투이며, 우리 선조들은 두 임금을 섬기며 사는 것 보다는 죽
음이 더 가치있는 인생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의 왕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신숭겸의 장엄한 고려
군사의 맥이 살아있는 대구 팔공산이 중국의 동진과 서진의 팔공산 전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우
리 선조들이 팔공산이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하를 높이는 말인 공(公)자가 들어 갔을 경우에 전설과 맞지 않는 어색한 산이름으로
변하는 것은 제외하는 것이 맞을 것이므로, 고려의 장군을 칭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개국공신을 칭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왕건이 고려를 세운지 10년이 흘렀으
며, 개성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동수전투는 있었지만, 패배한 전쟁터이므로 그렇게 부르지는 않
았을 것이기에, 이곳에서 전사한 고려의 여덟 장수를 칭한 것이 맞을 것이다.
그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동수전투시에 많은 패배를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지묘에서 신숭겸이 왕
건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의 갑옷을 입고 백마인지 왕수레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타고
왕건인 것처럼 위장하고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이것을 본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화살을 쏘아 죽이고 그의 목을 베었다.
이런 어수선한 틈을 타서, 왕건은 간신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고려의 장수인 김락, 전락, 전
이갑, 전의갑, 홍유인, 복지겸, 김철, 손행, 호의 등이 죽었으며, 군사는 오천여명 중 사천구백삼십여
명이 전사하고 불과 칠십여명의 병사들만이 살아 돌아오는 참패를 당했다.
그런데 전사한 여덟 장수는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밝혀진 근거가 없는 것은 가슴 아픈일이다.
그렇지만 팔공산 부근에는 왕건의 전설과 신숭겸 장군들의 충성심을 칭송하는 전설이 너무 많아
이곳 주민들은 공수전투시에 전사한 여덟 장군을 칭한다고 믿고 있다.
또 팔공산으로 불리어진 시기가 조선시대라고 하는데 조선을 세우기 위해 이성계가 고려를 멸
망시켰기 때문에 서로 상극 관계인 것은 맞지만, 조선시대의 선조 때에 충렬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웠으며, 현종때는 기금,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 할 정도로 신숭겸을 충신으로 모셨던 것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팔공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대왕재 (大 : 큰 대, 王 : 임금 왕)
<대왕재>
칠곡의 송림사에서 동쪽 골짜기를 통해 대구의 지묘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대구시 덕곡동과 칠곡
군 동명면의 경계지점의 언덕이며 비교적 평탄한 큰 고개이다.
<전설>
1. 왕건이 칠곡의 송림사를 거쳐 신라를 돕기 위해 경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일박을 했다.
2. 지묘에서 후백제군과 대치할 때에, 왕건이 부하 장수들과 함께 주위 환경을 알기 위해 야행을
했던 곳이다.
3.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격전하다가, 파군재에서 참패한 후에 이 고개에서 잠시 쉬어갔다.
<추 론>
왕건이 동수전투 중에 승리를 위해 지형을 알아보려고 야행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왕재에서는
군사가 서로 대치한 전설이나 기록이 전혀 없으며, 설혹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다해도 이 부근에
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국의 왕이 직접 야행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후백제에게 패한 후에 대왕재에 왔다고 하는데, 만일 여기에 왔다면 송림사, 동명을
거쳐 칠곡으로 후퇴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후백제 군사들과 전투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인
지묘를 거쳐 무태로 피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치가 맞지 않는 전설이다.
그런데 대왕재 넘어 칠곡쪽에 후백제 군사 때문에 못갔다고도 추리할 수 있지만, 후백제군이 이 부
근을 먼저 차지했다면 전투장소가 최적인 대왕재를 비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재는 왕건이 신라 경애왕의 도움을 요청을 받고 영천을 거쳐 경주로 진군하던 그 때
의 전설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일박을 한 후에 지묘로 가거나, 동화사를 지나 백안 부근으로 갔을 것이라고 추
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왕재와 동화사 사이에는 지금도 동서로 연결되는 자연부락이 없는 편이고, 산세로 봐
서도 그 시대에는 길이 있을 수 없는 지형이며, 길이 있다고 해도 능선을 몇 개나 넘어야하므로 오
천명의 기병이 움직이기에는 불가능하므로 지묘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를 향해 갈 때에, 대왕재를 거치지 않고 군위를 거쳐 영천으로 가다가 태조지에서 전
투가 벌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라의 경애왕이 도움을 요청하여 이미 공훤을 보내고 뒤따라 가는 길이기에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데, 개성에서 문경 새재를 넘어 상주, 선산, 칠곡으로 왔으면, 경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 대왕재
로 오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또한 견훤이 상주를 공격하고 군위를 거쳐 영천을 이미 정벌하고
경주로 갔으므로, 그 길을 다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왕건이 군위에서 영천을 거쳐 경주로 가는 중이었으면, 기병들이 슆고 빠르게 갈 수
있는 평지이며, 적군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영천시의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의 넓은 통로를
이용하여 움직였을 터인데, 경주의 반대길인 서쪽 구석이며 기마병이 움직이기에 불편하고, 후백제
군이 산속에 잠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청통의 은해사가 있는 태조지 부근으로 가다가, 견훤의 공
격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다.
그래서 왕건이 태조지 부근에서 후백제의 퇴로에 잠복하였다가 공격했다는 전설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군위를 거쳐왔다면, 태조지에서 견훤과의 전투에 패했을 때에 오던 길인 군위 쪽으로 후퇴
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에, 기마병들이 움직이기에 불편한 팔공산 쪽으로는 오지 않았을것이
다.
그러므로 대왕재, 대왕암, 망일봉, 동화사의 전설과 칠곡에서 경주로 갈 수 있는 행로를 분석해 보
면, 왕건과 고려군은 이곳의 대왕재를 넘어 지묘를 거쳐 태조지로 갔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무태와 연경을 통해 태조지로 갔다는 전설이 있지만, 칠곡에서 팔달동,노곡동을 통해 무태
로 갈 수 있는 길은 대왕재로 가는 길보다 엄청나게 먼거리이며, 또 대규모의 기마병이 행군하기에
는 불가능한 지역이고, 더구나 금호강변의 북쪽은 통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언덕이 많기 때문에 금호
강과 동화천을 두 번씩 건너야하는 어려운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왕암 (大 : 큰 대, 王 : 임금 왕, 巖 : 암벽 암)
<대왕암>
대왕재의 북쪽에 있으며, 큰 바위 하나와 여덟 개의 작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전 설>
1. 대왕암은 왕건이 머물렀던 자리이므로, 후세에 바위는 왕건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이 신성한 자리라는 것을 믿고 숭상의 제를 올렸다.
2. 견훤에 패퇴한 공훤과 고려의 군사들이 왕건이 오기를 기다린 바위이다.
<추 론>
고려의 장군인 공훤이 경주에서 견훤과의 전투에서 이미 행방불명이되었다고 하는데, 만일 공훤
이 경주에서 패배하고 이곳에 왔다면 개성에서 경주로 가는 왕건과 시간이 비슷하여 바로 만날 수
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의 군사는 이만여명인데 왕건은 그 수가 훨씬 적은 오천여명의 기병
으로 맞서려고 했을까?
신라의 경주가 그렇게 슆게 무너지리라는 생각을 안하고 신라와 힘을 합쳐 공격을 하려했거나,
신라를 돕기 위해 미리 공훤에게 만여명의 군사를 보냈으므로, 이들과 합세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곳 대왕재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이미 공훤의 고려군은 경주 부근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패하고, 공훤과 소수의 살아남은 군사가 이곳에서 만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
건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는 있다.
이 전설이 사실이면 견훤의 후백제군사는 이만여명이지만, 왕건이 오천여명의 기병으로 맞서려
고한 것을 이해할 수는 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공훤이 왕건을 기다렸 다는 사실만으로는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신성한 자리라는 것을
믿고, 숭상의 제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부근의 대왕재, 망일봉, 동화사가 모두 왕건의 전설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대왕암은 왕건을
가리키는 바위가 확실하다.
망일봉 (望 ; 기다릴 망 日 : 해 일 峰 : 봉우리 봉)
대왕재에서 남서쪽 부근에 있으며 무태의 북서쪽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전 설>
1. 왕건이 동수전투 중에 신숭겸과 야행을 하다가, 이곳 아낙네들이 해가 뜰 때까지 길쌈을 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대왕재가 아닌 무태의 아낙네들이 해뜰 때까지 길쌈을 하는 것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추 론>
동수전투시에 후백제군과 전투 중이었는데, 위험한 이곳을 왕이 직접 야행을 했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그리고 대왕재에서는 오천명의 기병이 지나가거나 일박을 하였고, 무태는 양군의 전투장이었는데
아낙네들이 태연하게 길쌈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믿을수 없는 전설이다.
그런데 망일봉은 대왕재의 남서쪽에 있고, 무태에서는 북서쪽에 있으므로 대왕재나 무태에서는 새
벽에 망일봉에 해가 뜨는 것을 볼 수가 없는 위치이다.
만일 경주로 진군시 칠곡에서 대왕재로 가지 않고 남쪽의 관문동 부근을 통해 금호강변으로 왔다
고 해도 함지산이 막혀 망일봉이 보이지 않으며, 관문동에서 무태로 가는 길의 동북쪽에도 산이 막
혀 망일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망일봉이라 불리우는 산봉우리가 아니고, 다른 산을 망일봉이라고 칭했는데 후세
에 바뀌었거나 전설이 틀린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대왕재나 무태의 아낙네들의 길쌈의 전설이 아니고, 이곳에서 신라로 진군하던 고려군이
대왕재에 야영을 하며, 망일봉이 아닌 동산에서 아침 해가 뜨는 것을 기다렸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
다.
망일봉은 해발 273m이며 서편에는 함지산이 284m이므로 그 사이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으나 동네나 길이 없는데 어떻게 망일봉이라는 명칭이 생겼는지 의문시 된다.
동화사 (桐 : 오동나무 동, 華 : 꽃 화, 寺 : 절 사)
<동화사>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이 세우고 유가사라고 했지만,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건할 때에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1732
년에 세워진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등 20여 채의 큰 규모의 건물이 있고, 비로
암 당간지주,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비로암 3층석탑,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금당암, 석조부도군 등
보물 6점이 있다. 이밖에도 1992년에는 높이 30m의 석불인 약사대불이 조성되어 있고 말사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전 설>
1. 동화사를 동수라고도 했으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인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 계열의 절이기
때문에, 견훤 편에 가담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왕건이 견훤과의 전투를 위해
경주로 가던 중에 미리 토벌하였다.
2. 왕건이 태조지에서 패하고 공산에 왔을 때에, 동화사를 중심으로 한 공산 일대에 후백제 돕던
승려들이 고려군의 깃발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추 론>
동수전투가 있기 전에도 고려군의 정보가 이들에 의해서 후백제군에게 흘러갔다는 전설이 많이
있으며, 또 전라북도 김제 출신인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 계열이었으므로, 견훤을 받드는 집단이
동화사 에 있었으므로, 고려를 적으로 알고 후백제를 편을 들고 있었다는 것은 타당한 이야기일 것
이다.
그러므로 왕건은 등 뒤에 적을 두고 영천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군은 영천으로 가기 전에 동화사에 있는 후백제의 잔당을 토벌했다는 이 전설 때문에
왕건이 대왕재에서 바로 동화사로 갔다고 추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대왕재에서 동화사로는 오천명의 기병이 통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지형이므로 대왕재에서
지묘를 거쳐 백안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동화사는 영천으로 가는 통로가 아니므로 전군사
를 이동하지 않고, 일부분의 군사를 파견하여, 동화사의 법상종 계열의 무리들을 소탕했을 것이다.
동화사 부근에 있던 법상종 계열의 사람 숫자가 적어 일부분의 군사로도 평정이 가능했기 때문이
다.
왕건이 퇴조지에서 후퇴할 때 토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후백제군에게 쫓기는 형편이었으므
로 시간상 어려운 일이며, 후퇴시에 백안 부근을 지나는 고려군의 깃발을 보고 견훤의 편인 범상종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수는 있다.
그리고 대왕재, 대왕암, 망일봉, 동화사의 전설들은 왕건이 대왕재를 넘어 영천으로 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산에도 임휴사 등 많은 절들이 동화사 말사인데, 그곳에도 법상종에 속한 세력이 있었다면, 왕
건의 행적을 숨겨 주지 않고 백제군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것인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곳에는 법상종의 세력이 없었을 것이다.
태조지 (太 :클 태, 祖 :조상 조, 旨 : 아름다울 지)
<은해사>
태조지가 경상북도 영천시의 서쪽에 있는 은해사 부근의 산봉우리라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어
디인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전 설>
1. 고려의 군사가 견훤에게 패배한 곳으로 태조 왕건을 가리키는 산이다.
2.태조지에서 후백제군에게 패하고 와촌을 거쳐 지묘, 영경, 무태, 살내로 후퇴할 때에 후백제가
뒤쫓았다.
<추 론>
고려군은 신라 경애왕의 구원 요청으로 경주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고, 후백제는 이미 근암성(문
경)과 고울부(영천)을 정벌하고 신라를 침범하여 경애왕을 죽게하고, 경순왕을 세운 뒤에 전주로 돌
아가기 위해 다시 영천으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경주에서 전주로 가던 견훤과 대구에서 경주 방면으로 가던 왕건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천의 은해사 부근에서 만나 태조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견훤은 신라의 구원병인 왕건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 때문에 영천 태조지에 매복 하였
다가 급습하여 고려군을 패하게 했다고도 하고, 왕건이 후백제군이 퇴각하는 진로를 미리 알고 고려
군사가 숨어있다가 공격을 했지만 패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어느 전설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왕건은 후백제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진군하던 길인 와촌, 능성, 백안, 지묘, 연경, 무태의 산길을 따라서 후퇴했으며, 그 뒤를 후백제군도
추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천 태조지에서 왕건이 패전한 이유는 전투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고려는 오천명의 기병
이고, 후백제는 경주를 공격할 당시에 이만여명의 군사가 출정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태조지 이
후의 동수전투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왕건은 왜 오천명의 기병으로 이만이 넘는 후백제의 견훤과 겨루려고 했을까?
신라군사를 지원하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면 이미 공훤에게 일만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였으므로 만
나서 합동 작전을 하기 위한 전술이었거나, 신숭겸, 김락 장군의 후원군이 참여할 계획이 있었을 것
이다.
그리고 견훤과 고려의 첫 전투가 벌어진 장소도 영천 은해사 부근의 태조지라고도하고, 팔공산이
라고도 하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대, 전투지가 팔공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넓게
보면 은해사와 그 부근의 태조지도 팔공산의 동쪽 자락에 있으므로 혼돈되어 사용한 것으로 사료되
며, 왕건의 행로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확한 장소는 태조지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군이 후백제군에게 전쟁에 패했는데도, 태조 왕건을 지칭하여 태조지라고 하는 신성시
한 이름을 붙인 것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퇴(退)는 ‘물러나다’라는 뜻으로 왕건이 패하여 물러났다고 해서 퇴조지라고 불렸다가,
후세에 발음하기 쉬운 태조지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경상도에서는 ‘외’를 ‘애’로 발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지가 은해사 부근까지는 명확히 들어났으나, 산이 없어지지는 않을 텐데, 그 부근에서
는 흔적도 없다는 것은 다소의 의문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조상들은 산이름을 넉자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므로 청통 부근은 넓은 들판이지
만, 큰 강이 없어 저수지가 많은 편이며, ○○지는 산 이름보다는 저수지를 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태조지도 산이 아니고, 저수지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세에 없어져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추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복현동(伏 : 엎드릴 복, 賢 : 어질 현, 洞: 골짜기 동)
<복현동의 신천>
대구의 북쪽에 위치하며, 금호강과 동화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접경지인 산격동과 검단동의 남쪽
에 있는 동네이다.
<전 설>
1. 후백제가 영천 태조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현동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후퇴하는 고려 왕건
의 군대를 맞아 금호강을 사이에 둔 살내나 시천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이곳을 ‘견훤
덤’ 또는 ‘복현암’, ‘복현리’라 불리어졌다.
2. 야산에 보선암 혹은 복현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선녀가 이 바위에 내려왔다가 보석을 빠뜨
리고 승천했다.
3. 경주이씨 무실공이 1728년(영조)에 1등 공신에 봉해지면서 영조가 땅을 하사하여 엎드려 절
을 했다.
<추 론>
영천의 태조지에서 일격을 당한 왕건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산길을 따라 와촌에서 백안,
지묘, 나팔고개, 연경을 거쳐 무태까지 후퇴하였고, 견훤은 왕건의 퇴로를 추격하면서, 또 다른 군사
는 경산군의 와촌을 지나 안심, 동촌을 거치는 평탄한 길을 달려 왔다면, 고려군사보다 먼저 복현에
도착하여 매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 고려군이 무태로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리 서변동을 차지한 후에 서쪽으로 후퇴하는 왕
건의 퇴로를 막고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군사에 비해 후백제 군사 수가 월등히 많기 때문
에 양면 작전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복현동에 숨어있던 후백제군이 금호강이나 무태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고려군은 무태에서
금호강을 건너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태조지에서 전투는 있
었겠지만, 살내 전투와 그 이후에는 벌어졌던 동수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위치와 살내 전투의 원인과 결과 및 고려군이 금호강을 건너서 서
쪽으로 가지 않고 지묘로 다시 후퇴한 이유로 추리해 보면 후백제 군사가 복현동에 매복한 것은 틀
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금호강과 동화천이 만나는 지점인 무태에서 조야와 관문동 사이는 기마병의 이동이 불가
능하므로 서쪽으로 가기 위해 금호강을 건너야 하는데, 금호강 남쪽을 복현에 잠복했던 후백제군사
들이 차지하고 있었다해도 지리적으로 왕건에게는 전투에 불리한 위치이므로 지묘로 돌아 올 수 밖
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태, 살내, 가는봉, 나팔고개의 전설이나 지형으로 추리를 해보면 복현에 있던 후백제군
이 금호강변이 아닌 서변동을 지키고 있었으며, 후퇴하던 고려군이 동변동에 자리를 차지하고 동화
천을 사이에 두고 살내전투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구지방은 견훤에게는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 지역의 정서이므로, 복(伏)은 숨다는 표현이
맞으므로, 현은 후백제의 군사를 가리키는 말발굽 현(誸)이나 염탐할 현(俔)으로 복현 또는 견훤을
가리키는 견훤덤 등으로 불리어졌으나, 후세에 주민들이 동리의 이름을 좋게 꾸미려고 어질 현(賢)
자로 고쳐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살내
<동화천>
전설로는 살내의 정확한 위치가 불명확하며 지명 이름도 살내와 시천이 같은 지명이라고 추측하지
만 전설을 종합해 보면 살내는 무태 남쪽의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지점에서 나팔고개 부근까지의
동화천의 어느 지점일 것이며, 시천은 지묘동의 탑들에 있는 동화천이 확실하다.
<전 설>
1.동화천을 경계로 견훤과 후백제의 양군은 대치하여 전투를 했으며, 싸울 때 양군이 쏜 화살이
냇가에 가득했다고 살내라고 한다. 이 살내를 중심으로 양군이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신숭겸, 김
락 장군의 합세로 전세가 유리하게 되자 왕건은 지묘의 왕산에 진을 쳤다.
2.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물살이 세고 깊다고 해서 저탄이라 하였으나, 읍지에는
전탄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 론>
왕건의 진로를 후백제가 금호강과 동화천 합류지점 부근에서 막지 않았다면, 고려군은 금호강을
건너 복현동, 다사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거나, 관문동을 통해 칠곡으로 쉽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이 있
으므로 전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군사들이 서쪽으로 가던 고려군을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막았거나 전투를 했을까?
그것은 후백제군이 살내 남쪽인 복현동을 거쳐 금호강 남쪽에 많은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면
금호강 북쪽인 노곡에서 관문 사이에는 산이 막혀 행군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금호강을 사이
에 두고 양군이 화살로 싸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강의 폭이 320m가 넘으므로, 우리나라 활의
유효사거리가 100 - 200m인 점을 감안하면, 화살로 전투는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 지방에는 살내의 위치에 대한 전설이 없어 정확한 장소를 알 수는 없지만, 동국여지승
람에 살내는 물살이 세고 깊다고 했으며, 대동방여전도(17첩 3면)의 지도에 나타난 것을 보면 동화
천과 금호강의 만나는 지점이며, 또 이곳의 지형을 분석해 보면 나팔고개에서 동변동과 서변동의 경계까지는 동화천이 남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양군의 주둔 위치로는 전투가 불가능하며 이곳에서
부터 동화천이 동변동과 서변동 사이를 지나 금호강과 만나는 곳인 두물머리까지는 남쪽으로 흐르
기 때문에 이 부근에서 전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곳에서 복현동에 잠복해 있던 후백제 군사가 금호강을 건너 서변동에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기
다리다가 동변동으로 후퇴하던 고려 군사들과 화살로 서로 공격을 하였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신숭경 장군과 김락 장군의 후원으로 고려군이 다소 유리했기 때문에 왕산
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 결국 후백제에게 패배하였다는 사실이 무태와 가람봉의 전설에 잘 나
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숭겸과 김락은 처음부터 왕건과 같이 오지 않고 나중에 지원군으로 왔다는 것을 짐작하
게하는 전설이다.
그렇다면 신숭겸과 김락 장수가 데리고 온 군사도 많았을 것이므로 동수 전투에 참가한 고려 군사
는 오천여명이 훨씬 넘을 수도 있지만, 밝혀진 자료나 전설은 없다.
가람봉((柯 : 나뭇가지 가. 覽 : 바라보다 람. 峯 : 봉우리 봉)
<가람봉 표지석>
연경동 앞의 동화천과 금호강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끝자락이 살내에서 끝나고, 동쪽으로는 지묘
의 앞산과 열결되어 있으며, 가느봉, 갈봉산, 학봉, 가남봉, 가는봉이라고도 한다.
<전 설>
1.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 패한 뒤, 달아나다가 다급한 나머지 말채찍을 떨어뜨린 것이
거꾸로 꽂혀 나무가 되어 살았다. 또 왕건이 갔다고 하여 ‘가는봉’ 또는 가느봉이라고 칭하다가
한문 이름으로 바뀌면서 갈봉산이 되었다.
2. 어떤 장군이 갖고 있던 말채찍을 부러뜨려서, 한 가지는 무태 앞의 들에다 꽂고, 나머지는 그 곳
에서 제일 높은 가남봉 정상에다 꽂았다
3. 임진왜란 때에 크게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말을 내달려서, 무태 앞들을 지나 가남봉으로 올라
가 말채찍을 정상에 꽂고는 단숨에 팔공산 쪽을 향해 뛰었다.
<추 론>
김덕령 장군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에서 활약했고, 대구의 곽제우 장군과는 협조를 하는 관계는 맞
지만, 무태의 가남봉 부근에서 왜병과 싸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왕건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살내 전투시에 고려군의 합세로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
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힘에 밀려서 지묘로 후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말채찍이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하려는 지역 주민의 정서를 나타내는
전설일 것이다.
그리고 왕건의 전설이 왜 가람봉에도 있을까?
그 이유는 나팔고개에서 무태로 가는 길의 중간인 대안사입구 부근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큰 산등
성이 있어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동화천의 남쪽이며 가람봉의 북쪽 들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묘에서 후퇴하던 고려군이 가람봉 부근의 무태에 도착해 보니 후백제군이 동화천 너머
서변에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행군이 불가능하여 동변에 자리를 차지하고 전투를 했
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내와 가남봉의 전설은 고려군과 후백제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했으며, 고려가 패
했음을 추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태 (無 : 없을무. 怠 : 태만할 태)
<무태와 동화천>
팔공산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과 서변천이 만나는 곳인 살내를 포함하여 금호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변동과 서변동을 합친 동네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조야동까지 합쳐 무태조야동이라고 한
다.
<전 설>
1. 경주로 진군하면서 이곳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왕건이 무태라고 했다.
2. 왕건이 군사들에게 ‘적진이 가까이 있으므로 태만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
3.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쉬지 말고 빨리 가자고 무태
이족족(無怠以促足)고 독촉하였다.
4. 왕건과 신숭겸장군이 야행하면서 이 마을 아낙네가 야밤에도 부지런히 길쌈을 하며 망일봉에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칭찬하고 게으름이 없는 동네라고 하였다.
<추 론>
무태의 살내에서 동쪽의 동변동에는 고려군이 서쪽의 서변동에는 후백제군이 주둔하며 치열한
전쟁을 했지만, 왕건이 패배하고 연경으로 회군하던 중이었는데, 주민들이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
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려군이 신라를 돕기 위해 경주로 진군하는 중이었다고 해도 갑자기 오천
여명의 기병이 행군하는 상태에서 주민들이 평상시처럼 밖에서 부지런히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
그리고 대왕재의 전설에 비추어 보면 왕건이 칠곡에서 경주로 갈 때에 거리도 멀고 길도 험란한 무
태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살내전투에서 패한 고려군이 후퇴할 때의 전설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군에게 밀려 무태에서 연경으로 후퇴할 때 빨리 가자고 한 것도 일리는 있지만, 왕건
이 군사에게 ‘적진이 가까이 있으므로 태만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의 근거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
82년) 때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태암 이 주가 무태의 환성정비문에 이 내용을 기록하였으므
로, 살내 전투에 패한 후에 연경으로 후퇴 중이었다면 더욱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살내 전투가 없었드라도 후백제군이 복현쪽의 금호강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면, 금호강
의 북쪽에는 길이 없어 금호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무태에서 오던 길인 지
묘로 다시 후퇴했다고 해도 있을 수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아낙네 길쌈의 전설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왕재의 망일봉 전설과 중복되어 사용된 것 같
다.
연경 (硏 : 갈 연, 문지를 연. 經 : 날경)
<연경동 느티나무>
무태와 나팔고개 사이에 있으며, 1565년 퇴계 이황의 관심과 지원 아래 농암 이현보의 손자인 매
암 이숙량이 서원을 건립했고, 그 뒤1563년에 동네 이름을 따서 연경서원이라고 했으며, 임금으로
부터 서원 편액의 글씨를 하사받을 정도로 유명한 선비의 고장이었다.
<전설 2>
1. 왕건이 이 동네를 지나 갈 때, 선비들의 경 읽는 소리를 듣고, 연경이라고 했으며, 이곳에서 고
려군이 숙박을 했다.
2. 퇴계 선생 제자들이 서당을 세워 공부하다가 서원으로 격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추 론>
연경은 살내와 가까워서 살내전투 시에 함성이나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인데 경
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경주를 가기 위한 진군의 길이었다 해도, 왕건이 5,000여명의 군
사를 이끌고 행군하는 말발굽 소리가 주민을 놀라게 했을 터이고, 또 숙박하는 상태였다면, 한가하
게 선비가 집안에서 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연경서원이 있기 전에 이 지방을 연경이라고 했으며, 서원을 짓고 동네 이름을 따서 연경
서원이라 했으므로 연경서원을 세우기 전에 이 동리 이름이 연경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왕건
의 전설일 가능성도 있다.
연(硏)자는 연구할 연도 되지만 ‘벼루를 갈다’는 뜻으로 글을 쓸 준비를한다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
으며, 경(經)은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것 또는 불경을 뜻하기도 하지만, 공자가
경계하라는 뜻으로 이 글자를 사용한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왕건이 적진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말보다는 조용하게 경계를 바르게 하라고 글씨를 써
서 전달했거나, 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일박을 했다면 더욱 타당한 이야기이다. 왕건이 경계를 바르게 또 ‘경계하다’라는 뜻이
담긴 경(警)이 연경은 선비 고장이었으므로 유교의 경으로 바꾸었을 수도 있다
나팔고개
<나팔고개>
연경과 지묘 사이에 있으며, 도로 확장으로 지금은 언덕이 많이 낮아졌지만, 옛날에는 다소 높은
고개와 골짜기가 있었다.
<전 설>
1. 고려군이 이 고개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후백제 군을 향해서, 나팔을 불면서 진군 했다.
2.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
3. 왕건은 백제군이 공격하리라는 예상을 하고, 행군하는데 공격이 없자, 군사의 사기 앙양을 위해
나팔을 불게 하여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추 론>
왕건이 지묘를 통해 연경으로 후퇴할 때에, 후백제의 추격이 없어 나팔을 불었다면, 후백제군은 탑
들에서 양면 공격을 하기 위해 동쪽인 파군재 부근의 후백제군에게 전투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
나팔고개에서는 더 이상 고려군의 뒤를 쫒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왕건이 살내 전투에서 패배했으므로 전쟁에 유리한 곳을 택하기 위해 군사를 후퇴시켰거
나, 후백제군에게 밀려 지묘로 본부를 옮기는 상태였다면, 바로 뒤에 적군이 공격해 오는 상태이며
전투에 패해 후퇴하면서 고려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나팔을 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팔고개에서 나팔을 불며 행군하던 길이 무태에서 지묘 쪽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밝
혀진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추리를 하기가 어렵지만, 탑들의 동화천의 시천 전투의 전설에 비추어
보면 살내에서 지묘로 후퇴하는 고려 군사를 쫓으며, 후백제군이 나팔을 불며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
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
그리고 무태에서 나팔고개로 오는 길은 응해산 줄기의 연경서원이 있는 산자락인 동화천의 북쪽으
에는 큰 절벽으로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동화천의 남쪽으로 와야하는데, 이곳 나팔재 부근에 오면 이
번에는 동화천의 남쪽으로 통행이 불가능한 절벽이 있기 때문에 북쪽의 동화천을 다시 건너야 나팔
고개를 넘을 수 있으며 많은 군사가 움직이기에는 통로도 좁고, 언덕으로 이루어져 통행이 불편하지
만, 이 고개를 넘을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그러므로 나팔고개는 소수의 병력으로 후백제군의 서쪽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자리인데 고
려군이 이 자리를 떠나 동화천의 시천에 방어벽을 만든 것은 왕산을 지휘 장소로 쓰려는 왕건의 생
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산 (王 : 임금 왕, 山 : 뫼 산)
<왕산>
지묘의 북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이며 이곳에서는 주변의 모든 곳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므로 군사
를 지휘하기에는 최적의 산이다.
<전 설>
왕건이 자리 잡고 고려군을 지휘하다가 견훤에게 패할 확률이 높자, 곽제우는 왕건으로 변장하여
시선을 끌게하고, 왕건을 지묘의 왕산에서 능선 을 타고 세 번 뛰어서, 백안을 거쳐 염불암 부근으
로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 론>
무태의 살내전투에서 패하고 후백제군을 피하기 위해 지묘에 왔으며, 왕건은 아군이나 적군의 움
직임을 한 눈에 파악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이 산에서 지휘를 했지만, 서편으로 후백제군이 공격해오
고, 남쪽에는 앞산이 막혀있는 넓은 들판이기에 모든 행동이 노출되므로, 고려군이 크게 패하자, 이
곳 왕산의 숲 속에서 왕건과 신숭겸이 옷을 바꿔 입는 등의 작전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왕건이 칠곡으로 갈 수 있는 대왕재로 가지 않은 것은 후백제군에게 노출되는 지
형이기 때문이며, 또 남쪽의 봉무공원 방향으로 도망갔다는 말도 전해 오는데, 후백제군이 없어서
그 쪽으로 가는 것이 가능한 곳이었다면, 고려의 군사들도 파군재에서 전멸하지 않고, 봉무동 쪽으
로 후퇴하며 계속 전투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군재 남쪽인 봉무공원 방향에서도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도피
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백제군의 눈을 피해서 탈출하기 위해 벽안으로 능선을 세번 뛰어 넘어 피했
을 것이다.
지묘 (智 : 슬기지, 모략지. 妙 : 묘할 묘)
<지묘동>
동쪽에는 파군재, 서쪽에는 나팔고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뒤에는 왕산이 있고, 그 동남쪽에 지묘사
가 있었던 자리에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있으며, 남쪽의 넓은 벌판인 탑들에는 동화천이 흐르고 있
다.
<전 설>
지묘는 고려군이 수세에 밀려 전패를 했지만, 신숭겸의 묘하고 슬기로운 지략으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추 론>
북쪽에 왕산이 있고 앞쪽은 넓은 들판과 동화천과 지묘천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고 사방
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나 동쪽 파군재 쪽과 서쪽의 나팔고개는 낮은 산등성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서쪽에서 공격한 백제군에게 고려군이 대패하였지만, 신숭겸 장군이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며 왕건을 살려낸 충성심은 후세에 많은 칭송을 받고 있으며, 신숭겸 장군의 묘한 슬기로 왕
건을 살렸다고해서 이곳 지명을 지묘라고 하였고 그 뜻을 기리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있다.
그리고 미리사의 위치가 불확실하여 지묘의 지묘사라고도 하고 실왕리에 있는 대비사의 옛터라고
도 하는 등 서로 다른 전설로 인해 김락은 지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도 하고, 두 달 뒤에 실왕리 부
근의 대비사에서 후백제군과 전투하다 사망했다고도 전해 내려온다.
지금까지 전설을 종합해 보면 미리사의 터에 대비사나, 지묘사를 세웠다는 설과 미리사는 해안현
에 속하고 대비사는 실왕리 부근이라고도 한다.
고운 최치원의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미리사는 신라의 10대 사찰이라고 했는데, 터도 없이 사
라졌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그러므로 왕건이 개성으로 돌아가 왕산에 지묘사를 세우라고 하는 하명을 받고, 미리사를 두고 그
옆에 지묘사를 또 짓는 것은 무리이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전설을 추리해 보면 파군재 전투 후에 견훤은 대목과 벽진에서 전투 중이었으므로, 대
비사 전투는 있을 수가 없는 시기였기에 김락은 지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
탑들(塔 : 탑)
<탑들>
지묘의 왕산 남쪽에 있는 넓은 벌판이며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앞산이 막혀 북쪽인 나팔고개 남쪽을 지나 연경과 무태가 있는 서쪽으로 흐른다.
<전 설>
1. 파군재 전투시에 후백제군의 공격으로 고려군이 이 들판으로 몰렸다.
2. 신숭겸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이곳의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양군의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고 하는 시천이 있다.
<추 론>
공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을 위한 절이 지묘사이므로 동수대전이 끝난 후에 절과 탑을 세운 후에
탑들이라고 불리어진 지묘동 앞의 넓은 들판을 말한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으나, 서쪽의 나팔고개와 동쪽의 파군재 쪽은 낮은 산등성이가 있으며, 동
화천과 지묘천이 만나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탑들의 앞산에 막혀 서쪽으로 흘러서 나
팔고개 쪽인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 동화천이 고려군에게는 방어하기에 적절한 장소였으므로 서쪽에서 공격하는 후백제군을 동쪽
에서 지키면서 전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군은 탑들의 시천전투에 패하여 산등성이가 낮은 동쪽의 파군재로 밀려 넘어 갔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의 싸움을 공산전투(公山戰鬪)라고도 하고, 동수전투(棟藪戰鬪) 라고도 하는
데 물론 공산에 있었던 일이므로 공산전투는 맞는 말이지만, 동수전투는 동화사나 동화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로 동수(棟藪)는 동(棟)은 집을 가리키는 뜻이 있고 수(藪)는 구석진 곳, 또는 땅바닥
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뜻하는말인데 결국 동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로 전쟁 이름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지묘동의 옛 이름이 동수동이었기 때문이다.
시천 (시천)
<지묘의 동화천>
지묘동의 탑들에 있으며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 남쪽으로 흐르는 냇물이다.
<전설>
화살이 냇가에 가득하여 시천이라고 하였으며 위치는 지묘동의 탑들에 있는 동화천이다.
<추 론>
탑들의 동화천에서 전투는 무태를 통해 서쪽으로 가려던 길이 막히자 지형상의 불리한 조건을 피
하기 위해 왕산으로 돌아와 진지를 꾸미고 후백제와 탑들에 있는 시천에서 전쟁을 했다.
동화천이 탑들을 동서로 갈라 놓았으므로 반드시 고려군은 동쪽에서 냇물을 방패삼아 방어를 하려
고 했을 것이며 후백제는 나팔고개를 넘어와 서쪽에서 공격을 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이곳에서 양군이 벌린 치열한 전투로 화살이 동화천 냇물에 가득하여 시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살내와 같은 전설이어서 혼돈이 되지만, 살내 전투는 고서로 전해 오는 이야기이고, 지천
은 이곳 주민들의 전설이어서 시천의 위치는 이곳이 확실하지만, 살내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고려군사들이 동쪽인 파군재로 밀리자 후백제군은 고려군사들을 동서로 포위
하고 공격을 가하여 고려군사는 전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싸움에서 고려가 패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왕건으로 꾸민 신숭겸이 대신 전투를 하
며 목숨은 잃었지만, 왕건은 백안으로 피해 목숨을 건졌다.
파군재 (破 : 깨트릴 파, 軍 : 군사 군, 재 : 고개의 뜻)
<파군재>
불로동과 지묘, 동화사로 가는 삼거리의 고갯길로 윗파군재, 아래파군재가 있으며 신숭겸 동상
이 있다.
<전 설>
후백제에게 패해서, 왕건의 고려 군대가 망했다는 뜻의 고개 이름이다.
<추 론>
후백제군이 복현동에서 살내, 무태, 연경, 나팔고개 쪽인 서쪽만을 통해 진격을 했다면, 나팔고개
와 대왕재로 가는 길은 막혔겠지만, 나팔고개 부근은 통로가 좁아 소집단의 병력 밖에 공격할 수 없
으므로, 고려군이 쉽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탑들에서 전투를 하다가 후백제군에게 고려군이
파군재로 밀렸다 해도 불로동 방향으로 후퇴하며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지에서 추격해오던 후백제군이거나, 아니면 살내전투를 하던 후백제 병력의 일부가 복
현에서 가깝고 평탄한 통로인 불로동을 거쳐 파군재의 남쪽에서 양면 공격을 하였으므로 고려군은
파군재에서 전멸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군은 탑들에서 패하고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후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지묘로 가는 고갯
길인 아랫 파군재에서 1차 격전을 치렀지만 패배하고, 다시 백안으로 가는 고갯길인 윗 파군재에서
2차 격전을 치렀지만, 고려군이 전멸하여 파군재라고 불리어 지게 되었다.
이 전설로 추리를 해 보면 고려군이 파군재에서 남쪽인 봉무공원으로 내려 가면서 방어를 했으면
이곳에서 전멸하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 가면서 전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후백제군이 그 위치
에서 공격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또 왕건이 지형상으로는 피하기 쉬운 불로동 쪽으로
가지 못하고, 능선을 몇 개나 넘는 어려운 길인 백안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귀
중한 전설이다.
그리고 파군재는 공간이 좁아 대군이 격전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므로, 탑들의 전투에서 마지
막으로 남은 소수의 고려 병사가 파군재로 밀려 온 후에 전멸했을 것이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申:아홉째 지지신, 崇:높을 숭, 謙:겸손할 겸, 將:장차 장, 軍:군사군,
遺:끼칠유, 蹟:자취적, 地:땅지)
<신숭겸 장군 유적지 :표충제>
유적지는 지묘의 왕산 동쪽 아래에 있으며 신숭겸장군의 거룩한 그 정신을 되새기려고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신숭겸을 칭송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적>
1. 충절사 : 신숭겸 장군을 위해 지묘사를 세웠으나 유실되었고, 그 터에 1607년(선조 40년)에 경
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웠으며, 1627년(현종 13년)
에 왕으로부터 기금,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 서원이 되면
서 표충사를 이름을 바꾸었고, 1871년(고종8년)에 서원의 철폐로 없어졌다가, 1993년
에 충절사로 다시 복원되었다.
2. 표충단 : 신숭겸이 죽은 자리에 높은 단을 쌓아 그의 충성심을 기리는 장소를 만들었다.
3. 태조왕건나무 : 표충사 안에 있는 수령이 400년 정도 되는 팽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후세에
심은 나무임)
4. 신숭겸장군나무 :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장렬한 충성심을 기리는 수령이 약 400년 정도
되는 배룡나무를 말한다.(후세에 심은 나무임)
5. 지묘사 :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라는 절을 지었으나, 고려말에 폐사 되었
다.
<추 론>
신숭겸을 위한 지묘사는 미리사가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고도 하며, 대비사의 위치에 미리사가 있다
고 하여 김락의 죽은 시기와 장소를 다르게 추리하며, 또 대비사 부근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큰 전투
가 있었다고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미리사는 지묘사가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절일 것이다.
그러나 왕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신숭겸 장군의 충성심을 이곳 주민들은 물론 조선
시대의 관리들도 표충단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통해 그 공을 높히 찬양하였으며, 왕건이 자기의 목
숨을 구할 수 있었던 지묘에 지묘사라는 절을 세우라고 하였으므로, 이미있는 미리사를 두고 그 옆
자리에 지묘사를 또 세울 수 없으므로 절이름을 바꾸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려 시조왕인 왕건이 지으라고 한 지묘사가, 조선시대도 아닌 고려 말에 폐
사를 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는 전설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왕건을 지칭하는 팽나무를 심은 것을 보면, 이곳 주민들은 신숭겸은 물론 왕건
을 높이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건은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배한 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지칭하는 많은 전설이
있는데, 정작 싸움에 승리한 견훤은 복현동과 안지랑골 전설만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대구지방은 신라의 백성이므로 백제를 부흥하겠다는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한 것에 대해 반감과 견
훤이 가족간의 불화로 망한 것을 보고 인격을 낮춘 것도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신라와는 전투
도 없이 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백성으로 살았기 때문에 왕건의 많은 전설이 생기게 되었을 수도 있
다.
백안 (白 : 흰 백, 顔 : 얼굴 안)
<백안동의 농촌 풍경>
파군재에서 북동쪽의 고개 넘으면 동화사와 와촌(영천군)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에 있는
동네이다.
<전 설>
1. 후백제군의 왕건을 잡으라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2. 그믐께 새벽 2-3시경 왕건이 팔공산에서 내려다 보니 배의 형상을 한 동네를 보고 배안과 같다
고 해서 배안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왕산에서 능선 을 타고 세 번 뛰어서 백안으로 넘어갔다.
<추 론>
왕건은 왕산에서 능선을 세 번 뛰어 벽안으로 피할 때에 왕건을 잡으라는 소리에 흰색 얼굴이 되
었다고 하는데,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죽기 전에 이미 벽안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후백제군이
왕건을 잡으라고 한 전설은 잘못된 전설이다.
그러나 후백제 군사가 도망가는 고려군사를 봤다면 왕건인줄 몰랐다고해도 다소의 추격은 있었
을 것이다.
그리고 왕건은 이 싸움에 패할 것이라 짐작하고, 몸을 피해 숨을 곳을 찾고 있었지만 안전에 위협
을 느껴 얼굴이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그리고 왕산에서 왕건이 봉무동으로 피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후백제 군사들이 주둔하는 탑
들과 파군재를 지나야 갈 수 있는 곳이므로 불가능하며, 무사히 봉무동에 갔다고해도 거리가 너무
가까와 곧 추격을 당할 수 있는 곳이다.
만일 파군재의 남쪽인 봉무공원쪽에 후백제군이 없어서 왕건이 피할 수 있었다면, 고려군도 파군
재에서 패하지 않고 봉무공원과 불로동 쪽으로 이동하며 전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왕산에서 능선을 세번 뛰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봉무동 쪽으로는
서쪽의 파군재의 한 개 능선만 있지만, 백안 쪽으로는 세개의 능선이 있으므로, 백안을 가리키는 전
설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백번 편안하다는 뜻이 담긴 백안(百安)으로 바뀐 것은, 후세에 지역 주민들이 겁을 먹었거
나 또는 환자에게 쓰이는 흰 얼굴이라는 뜻 보다는 편안한 동네라는 좋은 뜻의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안에서 전해 오는 세 가지 전설은 모두 왕건의 전설이므로, 왕건이 이곳으로 피하였음 추
측할 수 있다.
일인석(一 : 하나 일, 人 : 사람인, 石 : 돌 석)
<염불암 부근에 있는 일인석>
동화사 북쪽 기슭의 염불암 부근에 있는 돌이다.
<전 설>
왕건이 견훤의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 북으로 가다가 이 돌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이 때 노승이 ‘왕
이 아니면 앉지 마라’고 했으며, 왕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스님은 ‘북쪽으로 가지 말고, 안전한 남쪽
으로 가라’고 하였다.
<추 론>
탑들과 파군재에서 고려군과 백제군이 전쟁 중인데 왕건이 몇명의 부하까지 데리고 봉무공원으로
피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봉무동으로 갈 수 있었다면, 고려군도 파군재에서 전멸하지 않고 봉무공원을 거쳐 불로동으
로 후퇴하며 방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군재에서 승리한 견훤이 왕건을 찾기위해 봉무공원 부근을 지나 불로동으로 지나갔는데
도, 전투가 없었던 것을 보면 백안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왕건은 백안을 거쳐 북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으나, 염불암 부근에서 다시 남쪽으로 진로
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후백제군이 파군재 남쪽의 퇴로를 막기 위해 진을 치고 있을 것을 추측했거나, 그들에게 북으로 도
주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한 왕건의 치밀한 계략으로 목적지와 반대 방향인 일인석으로 피했다
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것은 파군재에서 왕건이 북으로 계속 도주한 것으로 믿고, 10월에 견훤은 북쪽의 대목(경북 칠
곡군)을 먼저 공격했고, 그곳에 왕건이 없는것을 확인하고 벽진(경북 성주군)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왕건이 북쪽을 통해 칠곡군으로 도피했다면, 견훤의 공격으로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인석이 있는 염불암이 동수전투 이후에 생겼기 때문에 전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염
불암이 없었드라도 그 부근의 돌인 일인석 위에 앉았던 전설은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인석의 전설은 왕건이 북쪽으로 가다가 고려군이 전멸한 곳이므로 후백제 군이 주둔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인 파군재 부근과 봉무동쪽인 남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하도 신기하여, 후세
에 이곳 주민들이 스님의 전설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독좌암 (獨 : 홀로 독, 座 : 자리 좌, 岩 : 바위 암)
<독좌암>
봉무동의 봉무공원에 있는 바위이며 왕건이 앉았다고해서 왕바위라고도 한다.
<전 설>
1. 파군재에서 패한 후에 모든 군사를 잃고 봉무동에 와서 왕건이 홀로 독좌암 위에서 쉬었다.
2. 파군재에서 백안, 일인암, 공산천, 문암산를 거쳐 봉무동에 와서 왕건이 홀로 독좌암 위에서 쉬
었다.
3. 독좌암 위에 앉아 왕건은 추격군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갑자기 한 줄기
먹구름이 꼬이더니 요란한 소금 비가 쏟아져 지렁이 군사들은 꿈틀대며 한들에서 죽어 갔다고
한다.
<추 론>
왕산 뒤에 숨었던 왕건이 봉무동으로 탈출하기 위해 앞쪽으로 나오면, 백제 군사들에게 노출되는
지형이며, 또 탑들이나 파군재에는후백제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어서 탈출이 불가능하므로, 백
안으로 피했다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남쪽으로 포위망을 바로 뚫었다 하드라도 봉무동은 거리가 너무 가깝고, 서쪽을 막으면 갈
곳이 없는 구석에 와서 쉬지는 않았을 것이며, 후백제군의 계속 공격으로 독좌암에 앉아 쉴 틈이 없
었을 것이고, 불로동으로 갔드라도 고려군을 격파한 견훤이 바로 왕건을 잡기위해 봉무동을 거쳐 불
로동으로 왔는데도, 왕건 안전했던 것을 보면 백안으로 도피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파군재에서 백안, 일인암에 갔다가 다시 백안으로 내려와 공산천, 문암산를 거쳐 봉무동
에 왔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후백제군이 다른 곳을 공격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을 것이므로 봉
무공원의 독좌암에서 쉴 수있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파군재에서 패한 후에 바로 이곳으로 후퇴했다면 백안, 일인석, 독좌암, 불로동의 전설과는
맞지 않으므로, 왕건이 백안으로 도피했다가 일인석을 거쳐 봉무동으로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후백제군은 왕건이 남쪽으로 다시 내려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북쪽을 통해 칠곡군
으로 도망친 것으로 추측하여 견훤이 10월에 대목(경북 칠곡군)을 공격하였으나, 왕건이 지난 길이
아님을 확인하고 11월에 다시 벽진(경북 성주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봉무동에서 전투의 흔적이 전혀 없는데, 소금비의 전설은 왕건을 우상화하기 위한 전설일
것이며, 만일 여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무수한 백제군의 공격을 재차 받았을 것이다.
불로동 (不 : 아닐 불, 老 : 늙은이 로)
<불로동>
파군재, 봉무공원의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 동쪽에 있다.
<전 설>
1. 왕건이 지나다갈 때 늙은 사람은 없고,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2. 노인과 부녀자는 모두 피난 가고 어린 아이와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3. 후백제군이 왕건 추격을 위해 먼저 지나갈 때, 아이들이 방안에 어른들과 함께 숨어 있다 가 그
뒤 왕건이 지나갈 때, 아이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었다.
<추 론>
노인과 부녀자가 피난을 갔는데, 어린 아이와 젊은 사람들은 피하지 않고 남아 있어서 불로동이라
칭했다는 말은 타당성이 없다.
우리 조상들은 손자를 집안의 기둥으로 믿고 키우고 있었는데, 노인과 부녀자만 피신을 시키는 행
동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만일 안전을 위해 피신을 했다면, 어른들과 아
이들을 무사히 보호하기 위해 함께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로의 '로'자는 임금 수레를 가리키는 로(輅)자로 왕건이 왕이 타는 수레도 없이 초라
하게 걸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왕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말일 수도 있다. 그 후에 임금
수레 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 글자이므로 노인 노(老)자로 바뀌면서 전설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리고 후백제군이 불로동 부근을 왕건보다 먼저 지나가고 그 뒤에 왕건이 갔다는 전설도 있는
데, 왕건은 벽안, 염불암, 봉무공원을 거치다 보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견훤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견훤 군사가 올 때는 숨어 있던 아이들이 왕건이 지나갈 때는 구경했다는 전설로 미루어
봐서, 군사 수의 차이로 겁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 주민들은 왕건에게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
고, 견훤은 미워하고 무서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설이다.
해안(解 : 풀 해, 顔 : 얼굴 안)
<해안의 대암봉>
도동의 동쪽, 방촌동의 북쪽이면서 초례봉의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전 설>
1. 왕건이 적의 공격에서 벗어나자 얼굴이 평상을 찾았다.
2.왕건이 견훤과 전투할 당시 보다 200여년 전인 신라 경덕왕 때에 해안현이라고 했다
<추 론>
공산전투에 패배한 왕건이 급히 퇴진하여 이곳에 도착하면서 안전함을 느껴, 긴장이 풀리면서 얼
굴이 밝아졌다는 왕건의 전설일 수도 있고, 옛부터 불리어 오던 이곳 지명 이름인 해안이라는 뜻과
상황이 일치되어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 해안 부근에는 미리사가 있었다
고 하는데,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전설이나 근거가 없다.
왕건이 불로동에서 개성으로 가려면 서쪽의 입석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그 길은 들판으로 평지이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반대 방향이면서 행군에 불편한 동북쪽의 산기슭을 통해
해안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왕건이 법상종 계열의 주민이 후백제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을 역이용을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으며, 견훤이 왕건을 쫒기 위해 칠곡으로 가면서 다소의 후백제 군사를 대구에 남겨두었기 때문이
거나, 아니면 안전한 도피를 위해 적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한 왕건의 작전에 의한 행로일 수도 있
다.
대비사(大 : 큰 대, 悲 : 슬플 비, 寺 : 절 사)
<실왕리 신숭겸 장군 영각>
능천산과 초래산의 중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
재와 비석이 있다. 그 비문에 따르면 왕건이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미리사의 터에 대비사를 세
웠다고 한다.
<전 설>
1. 왕건이 실왕리에서 신숭겸의 죽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대비사라고
했다.
2. 김락 장군이 파군재 전투 후, 두 달 뒤에 미리사 부근에서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해서 왕건
이 슬피 울었다.
3.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달 뒤인 12월에 대비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가 김락의 해골
을 던졌다고 했다.
<추 론>
미리사가 지묘에 있었다고도 하고, 실왕리 부근의 대비사의 옛 절이라는 설이 있어, 후세에 해석이
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김락은 927년 음력 9월에 신숭겸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견훤이 왕
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파군재 전투가 있은 두 달 뒤에 대비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가 김락이 전사
했다는 내용으로 추리하는 것은 시간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왕건과 김락 장군이 파군재에서 아주 가까운 곳인 대비사까지 도착하는데, 두 달이 걸렸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또 견훤과의 전투는 있을 수 없는 시기이다.
그 때가 10 - 12월이므로 왕건은 앞산에 숨어 있었고, 견훤은 왕건을 잡기 위해 10월부터 대목(칠
곡군), 벽진(성주군)을 공격한 것을 보면 견훤이 왕건의 퇴로를 몰랐기 때문에 대비사 부근의 전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견훤이 대비사로 온 흔적은 없고 왕건과 견훤이 없는 고려군과 후백
제군이 전투를 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만일 왕건이 이곳 대비사에 있는 것을 알고 견훤이 벽진군(성주군)에서 돌아와 전투를 했다면 후
백제군이 전멸하지 않는 한 공격을 계속하였텐데, 초례봉, 안심, 입석과 금호강을 건너 앞산으로 가
는 동안에 한 번도 견훤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추격을 받았다면 앞산으로 도피가 불가능하
여 왕건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군재 전투에서 김락의 전사가 영모재의 비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대비사 전투
를 주장하는 하는데, 그렇다면 비석에 기록되지 않은 고려의 모든 장군은 지묘나 파군재에서 전사
하지 않고 이곳 대비사에서 희생다고 하는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신숭겸이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살리려고 대신해서 죽은 것을 이곳 대비
사 부근에서 전해 듣고, 너무나 슬펐고 고마운 마음을 기리기 위해 김락을 포함한 여덟 장군의 비석
을 다 만들지 않고 신숭겸 영모재만 만들었을 것이다.
만일 김락을 비석에 기록하였다면 그외의 일곱 장군의 이름이 다 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대비사 부근의 전투는 독좌암, 백안, 장군바위, 불로동, 해안, 안심, 초례봉의 전설과는 너
무나도 상반된다.
그러므로 왕건이 실왕리 부근에서 전투는 없었지만, 신숭겸의 죽음을 이곳에서 전해 듣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다는 전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사가 지묘사의 옛터라고 하면, 팔공산 부근의 전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와같은 모든 사실을 종합해 봤을 때 견훤이 왕건의 퇴로를 몰랐고, 미리사는 지묘사의 옛터이며
대비사 부근의 전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곳에 살고 있던 김철득은 조상을 모시기 위해 명산터를 찾다가 대비사 부근이 명산이므
로 절을 없앤 후에 조상묘를 쓰려고 불을 질러서 대비사가 없어졌다는 말도 전해 오고 있다.
실왕리(失 : 잃을 실, 王 : 임금 왕, 里 : 마을 리)
<왕건 길>
불로동과 평광동 사이에 있는 도평동에 속하는 동네이다. 조선시대 말엽에 왕을 잃었다는 실왕리
는 수치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시량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전 설>
1. 나무꾼이 왕건을 만나 주먹밥을 주고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다. 뒤에 그
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왕을 잃은 곳이라 하여 '실왕리'라 부르게 되었다.
2. 왕건이 싸움에 지자 피신을 하여, 고려군이 왕을 잃었기 때문이다.
3. 원래 ‘실안(谷內 : 곡내)’이었는데 왕건이 슬퍼하여 ‘서러워’로 불리다가 시량리로 바뀌었다.
<추 론>
왕건이 혼자 후퇴한 것이라면 이해가 되는 전설이지만, 5,000명의 기마병 중에 30 - 70여명이 살
아서 함께 후퇴했다는 초례봉, 은적사, 안일사, 연회골의 전설들로 미루어 봤을 때, 나무꾼이 왕이라
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군사들이 나무꾼을 속이기 위해 왕이 된지 10년이나 된 왕건을 보통 사람의 호칭으로 불
러서, 서로 같은 장군이나 군졸인 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량리에서는 고려군이 왕을 잃은 적이 없는데, 지묘의 전설과 중복된 듯하다.
이곳 시량리에는 신숭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자리에 영모재를 세웠다고 하며, 아주 슬픈
것을 표현하는 대비사라는 절 이름을 보면 왕건이 서러워해서, 서러워라는 말이 시량리로 바뀌었다
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왕건이 왕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밥을 얻어 먹는 초라한 모습이 왕의 지위와 위엄을 잃었
다는 뜻으로 실왕으로 불리어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초례봉(醮 : 초례 초, 禮 : 예도 례, 峰 : 봉우리 봉)
<초례봉>
매여동과 안심4동의 경계선이 있는 내곡동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전 설>
1. 옛날 공산에 어씨라는 나무꾼이 초례봉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선녀를 만나 초례를 올리고 백년
가약을 맺었다고 해서 초례봉이라고 하였다.
2. 왕건이 시량리에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해 초례봉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3. 왕건이라는 것을 알고, 호족이 자기 딸을 아내로 바쳐 초례를 치르게 하였다.
4. 이곳에서 초례를 치르면 반드시 아들을 낳기 때문이며, 또 이곳에 기원하면 아들을 낳는다고도
한다.
5.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 명당이라고 하며, 여기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기 때문
에 날이 가물면 동민들이 그 자리를 확인한다고 한다.
<추 론>
후백제군에게 고려군이 참패하였지만, 남은 군사들과 힘을 합쳐 승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고려의 패잔병으로는 대규모의 후백제군과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먼 훗날을 기
원하는 제례를 올렸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설은 왕건 홀로 피신한 것이 아니고, 고려 군사도 함께 동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백성이 흠모하는 왕에게 딸과 혼인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상례였으므로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또 왕건은 자기의 권세를 넓히려고 토호들과 정책적인 결혼을 많이 하였는데,
황후 6명과 부인 23명 중에 대구 출신은 한 사람도 없으므로 틀린 전설일것 같다.
그런데 초례봉에서 혼례를 올린 초례는 왕건의 29번째 부인이라는 말이 이곳 주민들에게 전해 오
고 있는데 그렇다면 왕건의 가장 마지막 부인인 셈이다.
만일 초례를 치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뒷 날, 왕건이 대비사를 세우듯이 초례봉 부근에도 큰 자취
를 남겼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사실이 아닌 구전일 가능성이 크지만, 왕건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며, 이곳에서 왕건의 전설이 있는 장군바위 쪽으로 하산하여 안심으로
갔을 것이다.
장군바위(將 : 장수 장, 軍 :군사 군)
<장군 바위>
초례산 동남쪽에 걸쳐 있는 내곡동의 명마산에 있는 바위이다. 산 중턱에 있는 연담 폭포의 위쪽
에 기이하게 생긴 웅대한 암석을 장군바위라고 한다. 바위 표면에 황성 등 고려 장군을 상징하는 흔
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전 설>
1. 왕건이 이 바위를 지휘 장대로 사용하였다.
2.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수행을 하였다.
3. 김유신 장군이 원효굴에서 도를 닦고 나설 때에 흰말이 승천하였다.
<추 론>
장군바위는 김유신의 전설이 맞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동수 전투 시에 명마산 부근에는 전쟁이 있었다는 전설은 없고, 왕건이 바위를 지휘봉으
로 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왕건을 신격화하려는 의도에서 생긴 전설일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지나간 길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런데 왕건을 칭하는 바위라면 이미 왕으로 즉위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장군 바위라는 말은 격에
맞지는 않지만, 이미 대왕재에 대왕암이 있으므로 구별을 위해 지은 이름이라고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유명한 산에는 모두 장군 바위가 있는 편이다.
계명동 (鷄 : 닭 계, 鳴 : 울 명, 洞 : 골 동)
<괴전동>
안심동의 동쪽에 있는 괴전동에 속하며 괴동, 괴몬골, 계명동이라는 세 개의 이름으로 불리어 졌던
연부락이다.
<전 설>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 패하여 도망치던 중에 이 마을에서 새벽에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추 론>
2 - 4시경에 울기 시작하는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왕건이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어
둠을 이용해 안전한 도피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심 (安 : 편안할 안, 心 : 마음 심)
<안심동>
금호강 북쪽, 율하동과 경산시 하양면 청천리 사이에 있는 넓은 지역이다.
<전 설>
적의 공격을 완전히 벗어나, 이곳에서 왕건이 안심하게 되었다.
<추 론>
실왕리의 미리사 부근에서 후백제군과 전투하여 김락을 잃었다면, 그 이후에도 후백제군의 공격
으로 가까운 안심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군재 전투 이후에는 다른 전투
는 없었을 것이며 계속 동쪽으로 가다가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왕건의 후퇴로를 보면 왕산에서 북쪽인 염불암, 불로동에서 동쪽인 안심으로 간 것을 보면 처음
에는 목적지와 반대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꾼 것은 혹시 염탐꾼이라도 있으면 적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한 방법일 것으로 사료되며, 행로는 평지보다는 산속 골짜기를 이용하였고, 밤에 주로 활동
을 한 이유는 안전한 도피를 위해 노력하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둔지봉(遁 : 숨을 둔, 地 : 땅 지, 峰 : 봉우리 봉)
<신평동>
현재 신평동 신덕마을 부근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의 정상은 용계동에 속하며 지금은 돈
지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 설>
1. 둔지봉은 ‘숨을 터가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팔공산에서 도피한 왕건이 잠시 몸을 숨겼기 때문
에 '둔지’라고 했다.
2.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 위하여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에 반달이 떠
있었다.
3. 돼지를 많이 키우는 곳이라 해서 돈지방이라고 한다.
4. 조선시대에 군영지가 있어 이곳에 군사가 주둔했기 때문이다.
<추 론>
둔지봉이란 ‘숨을 터가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숨었다는 뜻의 둔보다 발음
하기 쉬운 돈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돈지라고 하여 돼지와 관련된 전설이 생겼을 것이기에, 둔지와
반야월의 전설과 관련 등으로 미루어 왕건을 지키려는 군사들이 주둔했거나, 왕건이 숨었다는 전설
은 맞을 것이지만, 견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주둔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전설이다.
그리고 왕건은 입석으로 갈 때에 남쪽에 가기 쉬운 평지의 벌판이 있는데도 둔지봉 부근을 지나는
등 팔공산 끝자락을 이용하면서 산속으로 이동하였다.
반야월 (半 : 반 반, 夜 : 밤 야, 月 : 달 월)
<반야월의 들판>
옛날에는 용계, 신기, 서호, 동호동을 포함하는 큰 동네였는데, 지금은 행정상으로는 반야월동은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그 부근 모두를 반야월이라 칭한다.
<전 설>
1. 조선시대 숙종이 민정을 살피러 전국을 돌던 중, 이 고장의 이름이 없다고 하여 반야월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2. 왕건이 추격에서 벗어나 후퇴하던 중, 이곳에 왔을 때, 반달이 떠 있던 밤중이 이었기 때문이다.
3. 왕건이 돈지봉에서 밤에 반달을 보고 반야월(半夜月)이라 했다.
<추 론>
이곳 주변의 모든 마을들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동리명이 있었고, 또 왕건의 전설에 의한 동네 이름
이 참으로 많은데, 반야월은 지금의 용계, 신기, 서호, 동호, 안심을 포함하는 큰 동네인데 1700년대
인 조선시대까지 동네 이름이 없어서 숙종에게 지어 달라고 한 말은 이해가 안 되는 전설이다.
그리고 왕건이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밤잠도 자지 않고 계속 후퇴하고 있었으며, 반야월에서 반
달을 봤다면 시간 예측이 어렵지만, 돈지봉에서 반달을 봤다면 동쪽에 반야월이 있으므로 시간상으
로는 초저녁은 지난 때이다.
그리고 돈지봉, 계명, 안심 등의 전설과 연계해 보면 반야월도 왕건의 전설일 것이다.
그런데 왕건이 돈지봉에서 동쪽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반야월이라 했으므로 그 부근 전체를 반야월
이라고 부르기에는 동네가 너무 커서 작은 동네로 다시 나누어졌거나, 아니면 사섯 동네가 이미 있
었지만 왕건의 전설에 따라 그 동네 모두를 포함해서 반야월이라 칭했을 수도 있다.
입석(立 : 설 립, 石 : 돌 석)
<입석동>
불로동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 설>
왕건의 부하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다가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 그 이후
부터 선돌 즉 입석이라 칭하였다.
<추 론>
계명동, 반야월의 전설에서 보듯이 왕건은 후백제 눈을 피하기 위해서 밤을 이용해 산속으로 동쪽
으로 가다가, 안심에서 방향을 바꾸어 서쪽에 있는 성주로 가기 위해 입석에 도착했을 것이다. 혹시
라도 후백제군의 공격을 걱정하여 돌로서 장애물을 만들고 방어 준비를 했지만, 추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을 건너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수전투시에 파군재에서 대패할 때까지 입석에서는 서로 싸웠거나 공격 준비를 한 적이
없으므로 왕건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 금호강을 건너려고 한 그 때의 전설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금호강 서편에는 너무 심한 절벽과 수심이 깊어 건너가기에는 불가능하였거나, 건너 갔다
고 해도 아양의 높은 고개가 바로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높은 고개를 넘었다해도 아양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낮은 산과 벌판이므로 안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강변을 따라 검사동을 거쳐
그 부근의 산속을 통해 앞산으로 가기 위한 행로였을 것이다.
금사(錦 : 비단 금, 沙 : 모래 사)
<금호강변>
금호강변의 넓은 모래밭으로 입석과 팔현마을 사이에 있으며, 금사로 불리어지다가 검사로 바뀌어
지금은 검사동이라 칭한다.
<전 설>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패하여 도주하다가 금호강변 모래가 비단처럼
빛깔이 좋고 크기가 똑같다고 하여 금사라고 하였다.
<추 론>
금호강 서쪽에는 심한 절벽으로 오르기가 힘들었거나 올라갔다고 해도 서쪽으로 가는 길은 낮은
언덕과 벌판으로 눈에 띄기가 쉬워 통로가 안전하지 못하므로, 금호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
이다.
그리고 입석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촌 유원지로 올라가지 않은 것은 동촌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 평지이므로 앞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속인 형제봉 부근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남쪽의 고모들
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검사동의 전설은 왕건의 행로를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ㅡ'의 발음을 'ㅓ'로 하기 때문에 금사동이 슆게 검사동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일제 합병시기에 검사동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고모들(顧 : 마음에 새길 고, 母 : 어머니 모)
<고모령비>
고모들은 금호강 서쪽에 있고, 동쪽의 맞은 편에는 방촌동이 있고 고모동으로 가기 전에 있는 작은
들판이다.
<전 설>
1. 지형지세가 형제봉을 돌아보는 형상이다.
2. 왕건이 패하여 도피할 때,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3. 오빠와 동생이 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오빠는 저고리 섶에 흙을 담고, 동생은 치마 폭에 담으
니까 동생이 더 높게 만들자 오빠가 밟아서 무너뜨려 싸움이 되자 어머니가 자식들을 돌아 보며
멀리 떠났다.
<추 론>
왕건의 행로를 추적해보면 산속으로 다녔기에 입석에서 금호강을 건너 높은 고개만 넘으면 서쪽으
로 가는 길은 벌판이므로 앞산과 연결되는 길을 찾기 위해 검사동을 지나 이곳의 고모들을 통해 팔
현촌 부근의 산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건이 어머니를 생각했다는 전설은 금호강을 건너 고모들로 왔다는 걸 알 수 있고 팔현
마을 부근을 거쳐 형제봉이 보이는 부근의 산속으로 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전설
이다.
그리고 고모령의 전설이 옛날부터 있었다면, 그 곳을 지나던 왕건이 그 전설을 전해 듣고 자기의
어머니를 그리워 했을 것이다.
이 전설은 금호강의 어느 위치에서 앞산 쪽으로 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팔현촌: (八 : 여덟 팔, 峴 : 고개 현, 村 : 마을 촌 )
<팔현촌>
금호강 서쪽에 있는 고모동에 있는 큰 마을이다. 우리나라 백로의 최대 서식지 및 번식지이다.
<전 설>
1. 조선 초기 청백리 문신이었던 문평공 전백영이 태어난 집에 심은 향나무가 팔(八)자 모양으로
자라 팔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조선조 초 태조가 판서 정숙영의 묘소에 향나무를 심었던바 그 향나무가 기이하게도 팔(八)자
모양으로 자랐다.
<추 론>
왕건의 전설은 없지만 금호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강 주변의 갈대와 억새에 몸을 숨기
고, 입석에서 검사동의 강변을 따라 남진하다가 물이 얕고, 좁은 금호강과 율하천이 만나는 두물머
리 부근에서 강을 건너 고모들을 지나 팔현마을 부근으로 갔을 것이라는 것을 고모의 전설이 뒷받침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 왕건의 행로를 분석해보면 고모동이나 팔현 마을에는 들어 가지 않
고 그 부근을 지나갔을 것이다.
입석에서 검사동, 고모들, 팔현마을 부근에서 형제봉까지는 전설로 왕건의 행로를 추리할 수 있지
만, 형제봉 부근에서 부근에서 앞산의 은적사까지의 경로는 전설이 전혀 없어 후퇴로를 짐작도 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지금까지의 행로를 분석 해 보면 산을 통해 움직였으므로 형제봉의 남쪽 기슭
과 연호산, 두리봉, 무학산의 남쪽 산속을 이용해 수성못 부근을 통해 은적사로 갔을 가능성이 크
다.
그리고 대구 지방의 왕건 전설은 허구의 소설이라고 폄하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팔현 마을
도 왕건이 여덟 정수를 생각했던 마을이라는 전설이 없는 것을 보면 다른 왕건의 전설은 사실성이
많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천(新 : 새로울 신, 川 : 내 천)
<신천>
비슬산에서 시작하여 가창, 용계를 지나 침산동에서 금호강과 합류하는 대구시의 남북을 가로지르
는 냇물이다.
<전 설>
1. 왕건이 신천을 건너면서, 재기를 해서 새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2. 대구 판관 이서가 새롭게 조성한 물줄기라는 의미에서 1778년에 신천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추 론>
1778년 대구 판관 이서에 이해 신천의 명칭이 생겼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제작된 팔도여지
지도, 광여도 등에 표현된 신천 물줄기는 현재의 신천 물줄기와 동일하며,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구편에 이미 신천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대구부와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사이천' 또는 '새천
(샛강)'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신천으로 변했다고도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동수 전투에 패배하고 수성못 부근에서 가창을 지나 앞산의 은적사로 가는 도중에
에 신천내를 건너면서 "새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여 그때부터 냇물의 이름을 신천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은적사(隱 : 숨길 은 , 跡 : 자취 적, 寺 : 절 사)
대명 3동의 대덕산 자락의 앞산에 있는 사찰로 왕건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곳이라하여 3일간 숨어
지낸 굴이 있는 곳에 임휴사를 창건한 고승 영조대사에게 명하여,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숨을 은
(隱)자, 자취 적(跡)자로 이름을 명명한 동화사의 말사이다.
<전 설>
1. 은적사의 대웅전의 우측, 대나무 숲 속의 동굴에서 3일 동안 숨어 지냈으며, 견훤의 군사들이
은신처인 굴까지 접근했으나 거미가 줄을 쳐서 왕건을 보호했으며, 굴 아래에 있는 샘은 왕건
이 물을 먹었기 때문에은 장군수라고 하였다.
2. 신라 55대 경애왕 3년에 지은 절이다.
<추 론>
왕건이 대구에서 동수전투를 할 당시에 이미 고려 태조 10년이며, 경애왕이 즉위한지 4년인 927
년에 견훤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왕건이 무사히 개성으로 돌아가 절을 지으라고 했다면, 927년 이후
에 이 절이 창건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애왕 3년이면 926년이므로 동수 전투가 있기전이므로
이때 절을 지었다는 것은 잘못 된 전설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동수전투 이후 9년 뒤인 936년(고려태조 18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
다고 하는데, 훨씬 타당성이 있다.
그리고 백제의 군사가 이시기에 왕건을 추격하기 위해 칠곡이나 성주에서 공격 중이었지만, 이 전
설로 미루어 보아 대구에 잔류한 고려군을 잡기 위해 후백제 군사의 일부분을 남겨두었을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백제군이 왔을 때에 거미줄로 왕건을 보호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이야기
이고, 그때 이미 왕건은 고려의 왕이 된지 10년이나 되었는데, 샘의 이름을 장군수로 불렀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이름이다. 아마 안지랑골의 왕정과 구별하기 위해 후세에 장군수라고 불리어진 것
같다. 또 은적사의 전설과 안일사의 전설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데, 은적사에서 3일간이나 운
둔했으므로 숨은 굴이나 샘물은 왕건이 이용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거미줄의 이야기는 은적사와 안
일사에 같은 전설이 있고, 안지랑골에 왕굴이 있으므로 은적사의 굴 이름을 근세에 왕건이 숨은 굴
을 뜻하는 '왕건 굴'이라고 칭하고 있다.
안지랑이
<안지랑골>
앞산에 있는 안일사가 있는 골짜기인 산성산 중간에 있으며 왕굴, 장군굴, 삼정곡이 있다.
<전 설>
1.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앞산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에서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조선조 양녕대군이 이곳으로 도피해서 편안하고 살기 좋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평지에서 쳐다보면, 이 골짜기에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4. 안지랑골은 지렁이 탄생 설화를 가진 견훤이 안지랑골까지 왔다고 해서 왕지렁이로 불리다가
안지랑이로 바뀌었다.
5. 앉은뱅이가 이곳의 물에 씻고 일어섰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추 론>
왕건이나 양녕대군이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는 것은 말의 속성상 안지랑이로 바뀔 수가 없다. 한문
으로 해석하면 편안할 안(安)자를 앞에 쓰면 될 것 같지만 뒷말과 붙으면 오히려 편안하게 '안지나
다'라는 부정적인 우리말이 된다.
여러 가지 전설을 종합해 보면, 견훤은 왕건의 퇴로를 알지 못해서, 대목군(칠곡군), 벽진군(성주
군)을 공격하는 중이었으며, 만일 왕건의 퇴로를 알고 이곳에 견훤이 왔다면 대전투가 있었거나, 끝
까지 왕건을 잡으려고 공격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은 그 이상 도피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앞산에서 3개월이나 숨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견훤이 왔다는 전설은 믿을 수가 없다. 또 이 지방 주민들은 동수 전투에서 대승을 한 견훤
을 영웅으로 생각해야 하나, 오히려 패자인 왕건만을 지칭하는 전설이 수 없이 많은 것이 이곳 주민
들의 정서이므로, 복현동의 견훤덤과 앞산의 안지랑골인 두 곳만 견훤을 상징하는 전설이 있다.
그러므로 견훤 즉 지렁이가 아닌 왕건이 쉬었다고 해서 안지렁이라고 붙여진 이름이 더 타당하것
같다.
그 이유는 이곳 대구 지방은 옙부터 아지랑이는 '아지라이'라 하고, 지렁이를 ‘지래이’라 말하고 있
는 것으로 추리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지라이 혹은 안지래이로 불리우는 골
짜기가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안일사(安 : 편안할 안, 逸 : 숨을 일, 寺: 절 사)
<안일사>
대명6동 앞산의 안지랑골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은적사, 임휴사를 창건한 영조대사가 이절도
창건하였고, 동화사의 말사이며 왕건이 편안하게 숨어있었다고 해서 안일사라고 한다.
<전 설>
1. 왕건이 3개월 동안 왕굴에 장군들은 장군굴에서 기거하였고, 삼정곡이 있어 왕은 왕정, 장군은
장 군수, 군졸들이 먹던 세 개의 샘이 있어 안심하고 숨어 지냈던 절이다.
2. 후백제 군사가 왕건을 찾으려고 이곳에 오니, 안개와 구름으로 앞을 안보이게 했으며,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백제군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여 왕건을 보호했다.
3. 927년(신라 경순왕 1년)에 절을 지었다.
<추 론>
안일사도 동화사의 말사이며 경순왕 1년(927년)이면, 왕이 된 이후 9월말경부터 12월 사이에 창
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27년 9월경에 동화사의 법상종계열을 토벌하였고, 견훤은 그 시기에 신라를 공격하여 포
석정에서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경순왕을 세운 뒤에 고려와 태조지 전투를 시작으로 동수 전투에 패
한 왕건은 팔공산에 몸을 피하다가 개성을 가기 위해 안일사에 오기 직전이거나, 바로 도착했던 어
수선한 시기인데 안일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다소의 의문점은 있다.
그리고 안일사의 위쪽에 왕굴, 삼정곡, 안지랑골에 있으며, 왕건은 3개월을 이 골짜기에서 보냈으
며, 운무와 거미줄의 이야기는 왕의 신성함을 나타내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고, 또 초례봉, 왕굴이
나 장군굴, 삼정곡, 여희골의 전설로 미루어 보면 왕건이 처음부터 고려 군사와 함께 도피하고 있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백제군에게 패하고 개성을 비워 둔 채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던 이유는 견훤이 칠곡, 상
주를 공격하던 때가 10∼12월경이지만, 그 이후에도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을 알았거나 또는 예상하고, 공격을 벗어나기 위해 철군할 때를 이 산속에서 오랫동안 기
다렸을 것이다.
여희골
<대구 앞산>
대명 7동의 앞산에 있는 골짜기이며 연희골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여희골이라고 한다.
<전 설>
1. 고려의 군사들이 종지골에서 후백제군에게 이기고, 왕건과 재회하여 승리의 축하연을 가진 곳
이라 하여 연회골이라 하였다.
2. 여우가 많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추 론>
종지골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견훤은 칠곡, 성주 등의 공격을 미루고 앞산으로 와서 큰
전투가 계속되었을 것이므로, 왕건은 앞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큰 전투는 없었을것이며, 전투를 했다면 대구에 남겨둔 소규모의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충돌은 있었지만, 백제군은 왕건이가 있는 고려군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정말 전투가 있었고 왕건인 줄 알았다면, 견훤에게 보고하여 대군이 이곳으로 왔을 것이
며, 패잔병을 이끌고 있는 왕건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도피 중인 왕건이 연회를 했다고 하면, 후백제군의 추격을 완전히 벗어났기에 자
축연은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파군재에서 패한 고려군의 패잔병이 대구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앞산에서 왕건과 재회를 하고, 축하연을 했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전설은 왕건이 홀로 도피한 것이 아니고 고려군사도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여우가 많은 골짜기라 해서 여우골이라는 명칭이 수 없이 많다.
달비골
<달비골>
달비골은 안일사의 위쪽에 있고 월배산의 골짜기이며 봉덕동에 속한다.
<전 설>
팔공산 대전에서 대패한 왕건이 여러 곳을 거쳐 이곳에 와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앞을 바라보는 자신의 등 뒤에 달이 비쳤던 골짜기라 하여 달배골이라고 하다가 달비골로
바뀌었다.
<추 론>
왕건은 안일사에서 임휴사로 갈 때에 가기 쉬운 낮은 통로가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않고 왕굴에
서 쉬다가 달비골을 지나 남쪽의 월배산 부근과 대덕산의 남쪽을 거쳐 임휴사로 왔다는 것이 증명되
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건이 후퇴한 길은 평지나 들판이 아닌 깊은 산속으로 다녔으며, 주로 야간을 이용해서 이동했음
이 이곳의 전설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월(月)은 달을 말하며, 배(背)는 등을 말하는 것으로 월배와 달
배는 같은 말이다.
운둔사
<대구 앞산>
전설은 있지만, 앞산에서는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전 설>
왕건이 숨어서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절 이름이다.
<추 론>
현재 앞산에는 28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으나 운둔사는 없으며 비슷한 절이나 암자도 없다.
그렇다면 운둔사가 다른 절 이름으로 바뀌었거나, 전설만 남겨 두고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임휴사(臨 : 임할 임, 休 : 쉴 휴, 寺 : 절 사)
<임휴사>
상인동에 있는 절이며 앞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앞산의 높은 산줄기가 뻗
어 있고 서쪽은 평탄한 벌판이다. 921년(신라 경명왕 5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고, 1801년(조선
순조 1년)에 무주선사가 중창하였으며, 그 후 1930 포산화상이 수리했고, 2008년에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복원하였으며, 동화사의 말사이고, 왕건이 쉬었다고 해서 임휴사이다.
<전 설>
왕건이 앞산에서 마지막으로 쉬어간 절이다.
<추 론>
안일사, 왕굴, 삼정곡, 달비골과 도원동의 전설이 너무나도 일관성이 있으므로, 왕건이 안지랑이 골
에서 달비골을 지나 대덕산을 통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쉬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개성을 가기 위해 서쪽으로 가야한다면 안일사에서 성서를 거쳐 강창으로 가면 길도 평지
이고 거리도 엄청나게 가까운데, 거리도 멀고 이동하기에도 힘이 드는 안일사의 뒷산인 안지랑골에
있는 달비골과 대덕산 부근을 지나 이곳 임휴사로 피신한 것을 보면 왕건은 계속 주위에 있을 수 있
는 견훤의 첩자나 후백제 군사들을 경계를 하며 도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원(桃 : 복숭아나무 도, 園 : 동산 원)
<복숭아 꽃>
대곡동, 상인동, 대명 6동 사이에 있으며, 임휴사와는 접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에 산이 있는 넓은
벌판이며, 지금은 도원동이다.
<전 설>
왕건이 마지막으로 대구의 앞산을 떠날 때,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 도원이라고 했
다.
<추 론>
왕건이 신라를 돕기 위해 개성을 출발하여, 동수전투를 시작한 시기가 927년 10월이면, 대구의 복
사꽃은 3월 말경에 피기 때문에 대구에 6개월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토록 오랜 세월을 팔공산과 앞산에서 보냈을까?
그 이유는 동수전투 후에도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산속을 거치는 등 오랜 시간을 소요한
이유는 견훤의 후백제군이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철군할 때를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개성
으로 돌아가려는 계획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선고개(王 : 임금 왕, 先 : 먼저 선)
<왕선고개>
파호동의 강창에서 금호강을 건너면 달성군 다사읍이며, 성주로 가는 서쪽 고갯길에 왕선재가
있다.
옛날에는 왕쉰재라고 했지만, 지금은 왕선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 설>
1.왕건이 쉬어간 고개라고 해서 왕쉰재라고 했다.했다.
2. 조선시대에 숙종이 이 지방에 행차한 일이 있었는데 왕이 다른 일행보다 먼저 이 고개에 당도
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추 론>
어느 전설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곳 주민들은 왕건의 전설로 믿고 있다.
왕건은 개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쪽의 낙동강은 건너야 하므로 임휴사에서 도원동, 진천동을 거
쳐 대천동있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근은 사방이 평지어서 모든 행동이 노출되는 지형이므로 위험할 수 있으며, 또 수심
이 깊어서 안전하게 건너기가 어려워 강 주변의 갈대 숲을 이용하여 북쪽으로 숨어 오다가 강폭이
좁은 파호동에 있는 강창 부근의 금호강을 건너 다사의 고갯길인 왕쉰재에서 쉬었을 것이다.
그 뒤 낙동강을 건너 성주, 김천을 거쳐 개성으로 돌아갔다.
이 왕쉰재가 대구에서는 가장 마지막 왕건의 전설이며, 그 뒤 경북 김천시에 있는 직지사 전설을
남기고 개성으로 떠났다.
왕건의 행로 분석
<왕건>
1. 처음에는 목적지와 반대 쪽으로 행군
- 왕산에서 봉무동은 후백제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벽안에 갔더라도 그 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염불암까지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남쪽인 봉무공원으로 왔다.
- 불로동에서 서쪽인 입석방향으로 가지 않고 동북쪽인 해안, 시량리, 초례봉으로 갔다가 남쪽인
안심을 통해 입석으로 왔다.
- 입석에서 서쪽으로 바로 가지 않고 남쪽인 앞산의 은적사로 갔다.
- 안일사에서 서쪽으로 낮은 계곡을 이용하지 않고 남쪽의 달비산, 대덕산을 넘어 임휴사로 왔다.
2. 벌판이나 평지를 피해 산속으로 도주
- 불로동에서 안심으로 가는 길은 평지인데 북쪽의 산속을 이용하였으며 다시 안심에서 입석으로
올 때에도 둔지봉이 있는 팔공산 주변의 산을 이용했다.
- 입석에서 시내를 거쳐 성주로 가는 길인 다사까지는 평지인데 그 길을 이용하지 않고 앞산으로
갔다.
- 안일사에서 성서를 거쳐 강창으로 가면 길도 편안하고 거리도 엄청나게 가까우며 임휴사로 갈
때도 낮은 산 언덕을 이용하지 않고 남쪽의 높은 산인 월배산, 대덕산을 넘어 임휴사로 왔다.
3. 밤에 주로 활동한 흔적이 많으며, 많은 시간을 보냄
- 계명동, 반야월, 월배(달비골)의 전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 앞산의 은적사에서 임휴사까지 가는데 2-3달이 걸렸으며, 안일사 왕굴에서 2개월을 보냈다.
- 9월에 경주로 가기 위해 팔공산에 왔다가 다사의 왕쉰재에 도착할 때는 3월말이므로 6개월이나
대구에서 시간을 보냈다.
<추 론>
- 전북 김제 출신 진표율사의 법상종 계열의 사람들이 대구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견훤
에게 정보를 제공해 줄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 왕건 길의 미리사, 앞산의 은적사, 안일사의 전설에 후백제군이 등장하는 곳으로 봐서 견훤이 대
구에 잔당을 남겨두고 칠곡이나 성주를 공격했을 수도 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 적군에게 탄로될 것이 두렵고 개성으로 가는 길에 견훤 군사가 완전 철거되는 날을 기다리며 안
전한 도피를 위해 왕건이 미리 계획한 일일 수도 있다.
반월당(半 : 반 반, 月 : 달 월, 堂 : 집 당)
<반월당>
대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네거리이며, 성내 1, 2동의 남쪽, 남산동의 북쪽에 있고, 반야월과 같
은 뜻을 지닌 반달이라는 뜻이며, 왕건이 이곳을 지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설>
왕건에 대한 전설이나 기록은 없으나 반야월과 같은 뜻이다.
<추 론>
왕건이 퇴군할 때에 만촌동에서 반월당까지 왔다가 앞산으로 갔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
다.
그러나 반월당은 신식 문구를 취급하는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의 문구점 이름이 반월당으로 유
명해서 그 일대가 자연스럽게 반월당이란 지명으로 불리어졌으며, 이것을 이용해서 대구에서 한국
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 이름을 반월당이라고 하였다. 현재 문구점과 백화점은 사라졌지만, 그때
불리어지던 이름을 지금도 반월당이라는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왕건이 왔다는 전설이나 기록은 없고, 단지 반야월과 뜻이 유사한 지명이기 때문이며 안심
에서 반월당으로 가는 길은 평지이기 때문에 백제군에게 알려지기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만일 반월당으로 갔을 경우에 백제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면, 앞산으로 가지 않고 바로 강창으로
갔을 것이고, 만일 이곳에서 백제군과 전투가 있었다면, 은적사 보다는 안일사로 바로 가는 길이 빠
르며, 그 곳에 갔다고 해도 계속 큰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반월당은 왕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월당 문구점의 주인이 반야월 사람이어서 자기 동네 이름을 활용해 문구사 이름을 지은
것 같기도하다.
그 시대에는 상호를 자기 고향 이름을 많이 활용하던 때이기 때문에 반야월당 문구점이라고 하기
보다는 반야월에서 '야'를 빼고 당을 넣어서 반월당 문구점 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동수전투의 정확한 시기 추리<음력>
1. 9월에 견훤이 근암성(경북 문경시)과 고울부(경북 영천시)를 공격하므로 경애왕이 왕건에게 도움
을 요청---------9월 초순
2. 1차로 공훤에게 만여명 군사를 파견 --------9월초순
3. 견훤이 경주에서 경애왕을 자결 시키고 경순왕을 세움----9월 중순
4. 왕건이 오천여명의 기마병으로 태조지 패함-------9월 말
5. 무태 살내전투 패함 ------10월초
6. 파군재에서 패함--------10월중순
7. 벽안, 불로, 해안, 안심, 입석, 검사 -----10월 말
8. 앞산, 은적사. -----11월초
9. 안지랭이골, -----1월말
10. 임휴사 왕쉰재 -----2월 말
왕건이 군사와 함께 도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전설
1. 초례봉 - 군사들고 함께 승리를 위한 기원제 지냄
2. 안일사 - 왕건이 먹던 우물 : 왕정, 장군이 먹던 우물 : 장군수, 군졸이 먹던 우물 : 샘
왕이 자던 곳 : 왕 굴, 장군이 자던 곳 : 장군 굴
3. 여희골 - 종지골에서 고려군사들과 자축연을 했다.
공산전투(公山戰鬪)와 공산동수전투(公山棟藪戰鬪)
고려와 왕건의 전투 이름을 공산전투(公山戰鬪)라고도 하고 공산동수전투(公山棟藪戰鬪)라고도
하는데 그러면 동수(棟藪)라는 뜻은 무엇인가?
동화사(桐華寺)나 동화천(桐華川)을 나타내는 이름은 아니다.
동(棟)은 지붕위에 있는 마루 또는 집채를 셀때 쓰이는 용어이며 수(藪)는 늪을 나타내는 말이므
로 늪에 있는 집이란 무슨 뜻인지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
집이 있는 늪이면 살내의 동변과 서변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살내 전투를 가리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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