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가쿠(雅樂),노(能),가부키(歌舞伎), 그리고 한일음악상황비교 -
전인평(중앙대학교 교수)
1. 머리말
필자는 일본 여행을 여러 번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마음이 편치 않아 가급적 일을 마치면 곧 돌아오곤 하였다. 일본에서 버스를 타도 마치 우리 나라의 택시를 탄 기분이고, 기차를 타도 우리나라 비행기 요금과 맞먹는다. 먹거리가 특히 비싸서 점심에 간단히 우동을 먹어도 불고기를 먹은 것과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제일 고약한 것은 비싼 책값이다. 국판 600여 쪽의 데라우치나오코(寺內直子)의 {아악의 리듬구조}의 값이 18만원이나 하여 깜짝 놀랐다.
비교적 오랫동안 일본에 있었던 것은 1999년 8월 한 달을 보낸 것이었다. 이 때는 히로시마에서 ICTM 35차 세계대회가 있어서, 이 대회에도 참가할 겸 미리 텐리대학(天理大學) 아악부의 사토 선생에게 부탁하여 대학교의 숙소와 천리교의 츠메쇼에서 지내면서 아악부의 활동을 참관하며 일본 음악을 익혔다. 츠메쇼란 천리교 교인이 멀리서 오면 묵을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인데,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비용도 큰 부담이 않되고 깨끗하여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일본 관계 문헌으로는 필자의 {동양음악}(삼호출판사, 1991)의 제2장 일본음악과, 최재륜 번역의 {일본 음악의 역사와 감상}(최재륜 역, 현대음악출판사, 1994)가 있다. 이 책은 모두 약간 딱딱한 교과서적인 책이다.
이러한 글이 있는데도 또 이 글을 쓰는 것은 남원민속국악원의 계간소식지 {민속국악}에서 글을 청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마침 일본 음악에 관한 쉬운 글을 쓰려고 생각하던 있던 중이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에는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많이 넣어 가급적 일본을 느낄 수 있도록 유의하였다.
필자는 일본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그래서 일본 음악 역사의 긴 세월에서 가장 중요한 3기를 들고 그 시대가 남긴 음악을 살폈다.
유럽사람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 못한다. 마치 우리가 스페인 사람과 포루투갈 사람을 구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외국에 가보면 나를 보고 '일본사람이냐'고 물어서 속이 뒤틀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우리의 이웃이기에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여러 번 일본 전통 음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도무지 참고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필자의 일본 전통음악에 대한 선입관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음악학자인데, 도무지 들을 맛이 나지 않는다.
특히 일본 가가쿠를 듣고 있으려면, 제일 거스리는 것이 생황의 소리였다. 꼭 매미소리 같은 소리여서 도무지 귀에 좋은 음악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생황 소리는 불협화음이어서 더욱 힘들게 한다.
필자는 학자적 태도로 우리나라 음악과 일본 음악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에 괌심을 가지고 있는 터이다. 아마도 이것은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었기에 흥미를 느끼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본이 우리나라 이웃이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주 일본 공연단이 오게되고, 초대를 받아 연주회를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세월이 20년 넘게 흐르니 이제는 일본 음악이 조금은 들린다. 그래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의 솔직한 심정을 일본인에게 털어놓았더니, 일본 음악가도 껄껄 웃으면서 일본 사람들도 일본 전통음악을 그런 기분으로 대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가쿠의 멋을 잘 알면서 감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털어놓았다.
필자는 일본 음악을 조망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우선 일본 음악사를 간단히 살피고, 고대음악 중에는 가가쿠(雅樂)을, 중세 음악으로는 노오(能)를 중심으로 몇 곡을, 근세 음악으로는 가부키(歌舞伎)를 살필 것이다. 다음에는 한국과 일본의 음악 상황을 살펴 두 나라의 음악 형편이 어떻게 다른지 살필 것이다.
2. 일본음악사의 고대·중세·근세
일본음악사에서 고대에는 가가쿠(雅樂)을 후세에 남겼고, 중세(11-16세기 중반)에는 노오(能)와 헤이교쿠(平曲)을, 근세에는 가부키(歌舞伎)를 후세에 남겼다.
- 고대의 일본 음악
일본 고대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천황과 무사 계급이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집단주의가 발달한 점과, 대답에서 '하이'하는 말투는 이처럼 사무라이들이 남긴 군사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음악의 주인공은 천황과 무사계급의 귀족층이다. 이들은 위엄을 보이기 위한 의식에서 가가쿠를 썼다. 한 편 천황이 약해질 때는 진자(神社)에서 가가쿠를 육성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정치적으로 설명해 보면 가가쿠는 천황을 위한 음악이었다. 가가쿠의 담당자는 오로지 귀족사회였다.
당시의 불교는 귀족 불교였다. 한 때는 천황 자신이 스님이었다.
일본은 552년에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 들였다. 백제의 성왕(聖王, 524-554)이 전해 준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범패가 매우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범패 CD가 많이 나와 있다. 무대에서 불경을 독경하는 연주회도 흔히 열리고 있다.
고야산의 절에서는 오늘날도 여자들은 범패를 가까운 자리에서 보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 이만큼 그들은 전통을 지킨다.
- 중세의 일본 음악
가마쿠라(鎌倉) 막부의 성립(1185)부터 중세가 시작된다. 이 때부터 서민문화가 시작되었다. 즉, 이전의 불교 문화가 서민화한 것이다.
증세가 되면 예능을 향수하는 사람들은 상류층의 귀족에서 신분이 낮은 민중에까지 폭이 넓어졌다.
예들 들어보면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나 완정(阮政)을 한 후백하상황(後白河上皇 1129-92)이 있다. 그는 다양한 음악예능, 불교 음악을 서민과 함께 즐겼다. 신분이 낮은 예능자와 민중 사이에서 유행한 이마요오(今樣)라는 보래를 부르면서 춤추는 유녀(遊女)들을 궁중에 불러서 그들의 예능을 전수하게 하고 당시의 가요를 편집하였다.
깃카와에이시(吉川英史)의 일본 음악에 대한 중세 역사관을 살펴보자. 그는 {일본음악의 역사}에서 가마쿠라(鎌倉)시대부터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걸친 약 370년을 민족음악 융성시대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시대는 귀족·승려·무사·신분이 작은 민중을 포함해 넓은 계층에서부터, 일본 고유의 민족음악을 싹틔우고, 일본인의 심혈을 기울인 음악 예능이 융성하였다.
중세에 성립한 주요한 음악 예능은 카다리모노(物語)가 대부분이고, 기악곡으로는 후케샤쿠하치(普化尺八)같은 샤쿠하치 독주곡이 있다. 대개의 중세 음악 예능은 연극, 무용과 결합하여 성장하였다. 오늘날 역시 일본인은 어떤 단어와 문학의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세에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 근세의 일본 음악
에도(江戶) 막부의 성립(1603)부터 근세로 이행한다.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5년간을 도쿠가와(德川)막부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성립한 음악과 음악 양식을 근세 호우가쿠(邦樂)라고 한다. 근세 호우가쿠는 극장 음악과 비극장 음악의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극장음악의 대표적인 것이 가부키(歌舞伎)이고, 비극장 음악이 고토(箏)와 사쿠하치(尺八) 음악이다.
근세호우가쿠 향수층은 시장의 상인과 시민이었다. 그리고 각 종목의 음악을 전업으로 하는 예술가들이 나타나자 서민 사이에 널리 음악과 예술이 보급되었다.
막부가 에도(江戶, 東京)으로 옮김에 따라 음악 예능의 중심지도 크게 두 곳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에도에서 융성 발전한 음악 예능을 '에도가부키'라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구별이 없어졌다.
3. 고대의 가가쿠(雅樂)
가가쿠(雅樂)는 가가쿠료(雅樂寮)라는 관청에 소속한 음악인이 전승해 온 음악과 춤을 말한다. 19세기 전까지는 궁정 행사를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궁내청(宮內廳) 악부(樂府)의 아악사(雅樂師)가 전승하고 있다. 현재는 가가쿠 연주 단체가 많이 늘어났고, 극장 연주도 가끔 한다. 이렇게 가가쿠 연주 단체가 늘어나는 것은 종교 행사에서 가가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남자들만 연주하였는데, 이제는 여자 연주자도 있다.
가가쿠는 바로 천황가의 위엄을 보이는 의식음악으로 시작되었다. 역사의 흐름에서 가끔 천황가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가가쿠의 보호자 역할을 진자(神社)나 불교사원에서 담당하기도 하였다.
가가쿠 연주원은 지금도 세습제이다. 자그만치 1400년 된 세습 가문 이 있다. 구나이cy (宮內廳) 연주원은 공무원이다. 그래서 장남이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야 연주원이 될 수 있다. 시험이 합격하면 그제야 연습을 시작한다. 이들은 연주가 많지 않지만 매일 연습을 한다.
가가쿠 연주원은 무사보다 신분이 높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였다. 궁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받고, 또한 가금 절에서 초청을 받아 부수입을 올렸기 때문이다.
천황의 아들 중에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가가쿠 연주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가가쿠 악인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에도시대 이전에는 천황이 스님이었다. 오늘날 천황의 복장이 스님 복장과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스님은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마쿠라시대에 천황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가가쿠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이들은 사찰로 들어갔다. 이들은 사찰 의식에서 음악을 연주하면서 전통을 유지한 것이다. 이 구룹이 오사카로 옮겨 시덴노라는 절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렇게 시덴노 절에서 유지하던 것을 현재는 천리대학(天理大學)에 보존하고 있다.
오늘날 나라의 절에서는 부처님오신날 사월초파일에 류우오우와 나소리를 공연하다. 두 곡의 길이는 대개 한 시간 정도 된다.
현재의 가가쿠는 천황궁의 구나이쵸(宮內廳)에서 계승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종교 단체에서 보존하고 있다. 종교 단체로 가장 유명한 곳은 천리교(天理敎)에서 운영하는 천리대학 아악부이다.
가가쿠는 궁내의 의식에서 공연한 것이어서 일반인은 볼 수가 없었다. 가가쿠가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일본 음악학자 쿠사노다에코(草野妙子)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그는 대학생 시절에 이 가가쿠가 몹시 보고 싶었다. 도대체 이 음악은 공개 연주가 되지 않기 때문에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 맘 먹고 한번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그 이유는 '가가쿠는 감상용 음악이 아니다'라는 것과 '여자는 볼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음악을 연주한다는 날 망원경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연주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음악이 몹시 단순하고, 또한 함께 추는 춤도 매우 단순하였다. 같은 춤을 방향만 바꿔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춤이 계속되기 때문에 지루해서 그만 두었다. 몇 시간 후 새벽녘이 가까워 다시 보았는데, 그 때에도 역시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있다. 이혜구 선생님이 일제시대 경성방송국 재직 시절에 아악을 중계하자고 함화진 선생에게 제의하였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함화진 선생님은 '궁중 아악을 그렇게 함부로 방송할 수 없다'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악 방송은 한참 후에나 이루어졌다고 한다.
필자는 구나이쵸(宮內廳)의 가가쿠를 비디오로 보았다. 예의 그 매미 소리와 함께 단순한 춤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춤추는 사람 수가 넷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넷 또는 여섯명이 춘다고 한다. 이처럼 4인 혹은 6인이라면, 이 춤추는 사람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아악의 춤추는 사람 수는 아주 중요하다. 원래 아악 연주 전통은 중국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의식음악에 사용한 것인데, 의식의 주인공 품계에 따라 춤꾼의 숫자가 달라졌다. 천자 즉 황제는 팔일무 즉, 8인×8인 도합 64인의 춤을 추게 할 수 있다. 이것을 8줄의 춤이라고 하여 팔일무(八佾舞)라고 하는데, 공자의 『논어』(論語)에도 나온다. 제후는 6일무, 즉 6인×6인 도합 36인의 춤을 추게 할 수 있다. 공경대부는 4일무, 4인×4인 도합 16명의 춤을 추게 할 수 있다. 사(士)는 2일무 곧 2인×2인 곧 4명의 춤꾼을 쓴다. 그래서 천자만이 8일무를 추게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천자보다 한 급 낮은 제후로 반드시 6일무를 추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8일무를 추었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것은 고종의 뜻이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일본 정책의 하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막고 싶었다. 이를 위하여 본인도 원하지 않는 황제를 만든 것이다.
해방 후에 이 아악을 기록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일본의 계략에 의해 8일무를 추었으니 다시 6일무를 추자고 제안하였다. 이 사람은 8일무는 일본의 농간이었으니 본래 우리 나라 아악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악 연주단원이 반발하고 나섰다. 잠깐이라도 고종이 황제의 격에 따라서 8일무를 추었으니 8일부를 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작 팀이 6일무를 계속 고집하니, 음악인들이 모두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나중에 8일무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아악의 춤꾼 수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악기가 고려 예종 11년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보내면서 제후의 격에 맞추어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2일무 4사람 춤은 중국에서 사(士)의 격에 맞는 것을 받아들인 것일까? 그리고 춤꾼의 숫자에 대한 의미를 모르니 아무렇게나 4인 춤, 혹은 6인 춤을 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가가쿠의 세 계통
가가쿠는 세 가지의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고대 일본 고유의 노래와 무용을 계승한 것으로, 고대 제사에 사용하던 것과 지방에서 전승한 풍속가무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 계통은 외래악무와 그 양식에서 만들어진 무악(舞樂)과 칸겐(管絃)이 있다. 이것은 좌방악과 우방악으로 나눈다. 좌방악은 중국 당나라의 연향악(잔치음악)을 원류로 한 것이고, 도가쿠(唐樂)이라 부른다. 우방악은 백제ㆍ신라ㆍ고구려ㆍ발해의 악무를 원류로 한 것인데, 고마가쿠(高麗樂)이라 부른다. 즉 우방악은 한국에서 건너 간 것이 기초가 되었다. 셋째 계통은 10세기 경 헤이안(平安)시대 후기에 새로 작곡한 가곡을 말한다. 헤이안 시대의 중ㆍ후기가 되면, 가가쿠의 명인이 배출되어 외국에서 들어온 악무를 일본풍으로 만든다. 이 무렵 상류 계층의 교양과 오락을 겸한 잔치인 교유우(御遊)가 나타난다. 이 때 사용하는 음악 역시 교유우라고 한다. 이것은 특별히 이 행사를 위해 만든 새로운 음악이다.
- 가가쿠 이론
가가쿠의 이론은, 다른 음악과 다른 의미와 용법을 가지고 있다. 토오가쿠(唐樂) 이론이 가가쿠 전체의 중심을 이루고, 코마가쿠(高麗樂) 이론도 도가쿠 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다.
가가쿠에서 사용하고 있는 음은 12음이다. 중국 당대의 12율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에 12율명의 음 이름과 음 높이는 중국과는 다르다.
선법에는 도가쿠(唐樂) 선법과 코마가쿠(高麗樂) 선법이 있다. 도가쿠에는 이치코츠조(壹越調)ㆍ효조(平調)ㆍ오시키조(黃鐘調)ㆍ반시키조(般涉調)ㆍ타이시키조(太食調)의 여섯 가지 조가 있다. 고마쿠에는 코마이치코츠조(高麗壹越調)ㆍ코마효조(高麗平調)ㆍ코마소우조(高麗雙調)의 세 가지 선법이 있다. 코마가쿠의 기본음은 도가쿠의 기본음보다 장2도 높다.
우리나라 향악의 기본음은 당악의 기본음보다 단3도 높다. 일본과 우리 나라는 자국 음악의 기본음이 외래악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가쿠의 리듬과 박자는 음악이 매우 느려서 인지하기 어렵다. 가가쿠에는 박절이 확실한 것과 박절이 흐린 것이 있다. 이것을 '박자가 없다' 또는 '박자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가가쿠에서 '박자가 없는' 리듬으로 조(序)ㆍ조오시(調子)ㆍ란죠우(亂聲)의 세 종류가 있다. 모두 느린 음악으로 선율의 움직임이 강조된다. 란죠우에서는 선율의 움직임이 섬세하다. 박자가 있는 악곡은 '○○뵤오시'(拍子)'라고 부른다. 이 뵤오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예를 들어 요요오시(四拍子)는 4소절을 한 단위로 연주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한 주기를 이루는 장단이 몇 회인가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음악의 장단과 같은 것이다.
- 가가쿠 감상 <아즈마아소비>(東遊)(
<아즈마아소비>는 고대 일본 고유의 노래와 무용을 계승한 것이다.
<아즈마아소비>(東遊)는 일본 고유의 것을 전승한 가가쿠이다. <아즈마아소비>는 춘분과 추분에 궁중의 카시코도코로(賢所)에서 연주한 것이다. 나라의 춘일대사(春日大社)라는 진자(神社)의 축제에도 연주한다. 오늘날에는 구나이쵸(宮內廳)의 음악당과 국립극장에서도 공개 연주회가 열린다.
<아즈아아소비>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춤추는 사람은 6인 또는 4인이다. 필자가 본 비디오는 4인이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몇 사람 있고, 악기로는 와곤(和琴)ㆍ금(琴)ㆍ후에(笛)ㆍ히치리키( )가 있다. 이 중에 와곤은 옛 일본의 현악기로 6줄이다. 원래는 약 30cm-60cm정도의 크기인데, 오늘날과 같이 대형으로 바뀐 것은 외래악기 고도(箏)의 영향이라고 한다. 와곤의 연주법은 오른손에 코토사기(禁 )를 끼고 연주한다. 코토사기는 길이 7cm정도, 폭이 1.5cm 정도의 크기이다. 아르페지오식으로 긁어 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이고 왼손으로 줄을 하나씩 퉁기는 연주법도 있다.
<아즈마아소비>는 서쪽에서 건너온 것에 대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일본의 노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수도가 있던 나라와 쿄오토(京都)에서 보면, 이 음악을 연주하는 장소인 준하는 동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 부가쿠(舞樂)
좌방의 춤에는 도가쿠(唐樂)을 우방의 춤에는 코마가쿠(高麗樂)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우방의 춤 반주에 도오가쿠를 사용하는 것이 있다.
-- 악기 편성
부가쿠에는 현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가쿠 연주가는 칸가타(管方)라고도 부른다. 도오가쿠와 코마가쿠는 각각 고유의 양식을 가지고 있고, 악기 편성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타이코(太鼓)와 쇼오코(鉦鼓)는 공통용으로 좌방용과 우방용이 설치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악기는 무대의 뒷편에 좌우로 배치하고 있다. 타이코(太鼓)는 두 가지인데, 좌방용의 화염태고(火焰太鼓)와 우방용의 타이코가 있다. 화염태고는 북의 둘레에 불꽃 모양의 무늬가 있기 때문이다.
도가쿠의 악기는 관악기로 생(笙)ㆍ히치리키( )ㆍ요코후에(橫笛, 龍笛)이 있고, 타악기로 갈고( 鼓)ㆍ타이코(太鼓)ㆍ쇼오코(鉦鼓)가 있다.
고마가쿠의 악기는 관악기로 고마후에(高麗笛)ㆍ히치리키가 있고, 타악기로 산노츠즈미(三鼓)ㆍ타이코(太鼓)ㆍ쇼오코(鉦鼓)가 있다. 산노츠즈미는 한국 장구의 옛 형태와 같다. 통이 모래시계형이고 한 손으로 채를 잡고 두드린다.
좌방춤과 우방춤의 움직임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장식의 색갈ㆍ가면ㆍ손과 발의 움직임ㆍ신체적인 움직임 등이 차이가 있다. 가장 손쉬운 구별 방법은 우방인 고마가쿠는 오른쪽에서 들어오고 오른발부터 움직인다. 좌방은 왼쪽에서 들어오고 왼발부터 움직인다.
부가쿠를 공연할 때에는 좌방과 우방을 대조적으로 다루는 제도를 츠카이마이라고 한다.
이것은 좌방무 한 곡에 대하여 우방무 한 곡이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좌방의 춤에 대하여 우방의 춤은 토우부(答舞)라고 하고,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동격의 춤이 배열된다.
츠카이마이가 성행할 적에는 좌우 5곡씩 또는 7곡씩 등 많은 무악이 연주되었다.
정식 상연에는 좌우 연장자의 춤꾼이 진모(振 )라는 곡을 연주하고 그 뒤에 츠카이마이를 반복한다. 마지막에 장경자(長慶子)라는 곡의 변주로 마치게 된다.
- 도가쿠(唐樂)와 고마가쿠(高麗樂)
<류우오우>(陵王)는 도가쿠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류우오우는 도가쿠 즉, 좌방의 대표적이 음악과 춤이다. 춤은 한 사람이 추는 춤이다. 이 곡의 짝은 나소리(納曾利)이다. 이 곡은 관현 합주의 형식으로도 연주한다. 이때 궁내청 악부에서는 란죠우(蘭陵王)이라고 한다.
이 곡의 작곡가와 안무자는 명확하지 않다. 기록으로 보면, 752년(天平勝 4년) 동대사(東大寺) 대불개안(大佛開眼) 공양회에서 상연하였다는 기록에서 이미 8세기에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복장이 주로 붉은 색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과 관계 있다고 하겠다.
고마가쿠의 나소리는 류우오우의 짝 춤이고, 우방 무악의 대표적이 곡이다. 코마가쿠와 춤으로 구성한 2인 춤이다. 한 사람이 추는 경우도 있다. 복장은 주로 초록색을 쓴다. 도가쿠의 춤 복식이 붉은 색과 대조된다.
작곡이나 안무자는 알 수 없다. 곡의 성립과 유래에 관한 일체의 기록이 없다. 이혜구(李惠求)는 이 음악의 유래를 한국어로 해석하였다. '나'는 나쁜 액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나례(儺禮)의 '나'로 보았고, 소리는 한국어의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헤이안(平安)시대(8-12세기) 이후 류우오우의 짝으로 추어왔다.
나소리 춤은 두 사람이 춘다. 두 사람 모두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앞을 못보고 땅 밖에 볼 수 없다. 무척 느린 이 춤을 두 사람이 서로 보지도 못하고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춘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
1711년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갔을 때 연회에서 나소리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 잃은 나소리가 여기 있구나"라고 아라이 하코세키가 적고 있다.
가가쿠를 연주하는 복식을 보면, 도가쿠는 빨간색이 주를 이루고, 고마가쿠는 초록색이 주를 이룬다.
4. 일본 중세의 노오와 헤이교쿠
고대사회의 불교는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려한 무악과 가가쿠와 쇼오묘오(聲明, 불교 성악)의 공연은 국왕의 위용을 나타내는데 사용한 것이다.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가가쿠는 외래 음악을 완전하게 소화하여 그 윈천인 중국과 한국의 음악과 다른 일본 독자적인 가가쿠가 완성되었다.
이론ㆍ용어ㆍ형식은 중국ㆍ한국과 유사한 용어도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식으로 정교한 이론이 만들어졌다.
카마쿠라( 瘡)막부가 들어서자 가가쿠의 전성기가 지나고, 가가쿠는 점차 쇠퇴하고 연주기회도 적어졌다.
카마쿠라의 음악가 코마노 치카자네( 近眞)은 가가쿠의 쇠퇴를 안타까와하며 『교훈초』(敎訓抄)를 썼다. 후지와라노 미치노리(藤原通憲, 1106-1160)가 원본을 그렸다고 하는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도 사라져간 고대 예술을 기록한 것이다.
중세가 되자 불교는 점차로 민간에 보급되어 민중 예술을 받아들인 법요가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불교 예능이 파생하였다. 불교의식에서 서민도 이해할 수 있는 코오시키(講式)ㆍ와잔(和讚)ㆍ고에이카(御詠歌)가 생겨나고, 이어서 후류(風流)로 정비되어 민간에 보급된 염불춤 등의 불교 예능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불교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예능과 원예(園藝)를 전업으로 하는 아미(阿 )라는 승려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승려들이 안정된 형편이 되자, 승려 계급은 중세 음악의 중요한 담당자가 되었다. 불교도가 있었다.
일본의 고대와 중세는 음악ㆍ예능 담당자가 교대하고 계층이 넓어지는 변화를 겪었다.
일본 중세에 나타난 음악으로 노오(能)ㆍ헤이교쿠(平曲)ㆍ소우가(早歌)ㆍ덴가쿠(田樂)ㆍ모소비와(盲僧琵琶)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노오와 모소비와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 노오(能)
노오는 일본의 중세의 대표적이 전통예술이다.
일본의 노오를 본 첫 인상은 너무나 느리고 변화가 없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젊은이들이 이런 음악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이 음악은 500년 동안 선율이나 노랫말이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노랫말이 옛날 말이라서 요즘 사람들은 특별히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들어도 모른다. 그래서 노 구경을 가는 사람은 대본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 500년 동안 노랫말이 바뀌지 않고 계속 옛날 말을 쓰는 연극이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노오의 완성은 제아미모토키요(世阿彌元靑, 1365-1443)라고 하는데, 15세기 이후 노는 별로 변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
노오를 완성하였다는 제아미는 말년을 불우하게 보낸다. 정권이 바뀌자 새로운 막부는 제아미를 배제하고 제아미의 친척을 등용시켰다. 그리고 제아미를 추방한다. 그래도 다행이 새로 등장한 제아미의 사촌은 제아미의 기예를 전수 받아 후세에 전하였다.
일본인의 노오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하다. 영국의 쉐익스피어보다 200년이나 앞선 명인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 제아미 전집 20권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후 유럽에서 제아미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 노오의 가면
여자 가면은 눈이 작아서 꼭 우리나라 북쪽 사람 같은 느낌이다. 눈이 작아서 밖이 보이지 않는다. 가면 쓴 주인공이 가면에 눌려서 질식하여 쓰러지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쓰러지는 경우를 생각해서 밖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쓰러지면 대역으로 나올 사람이다.
이 대역은 쓰러지면 대역을 하려고 기다리기 위하여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과 똑 같이 연습한다. 사실 대기하는 사람이 더 기량이 우수한 사람이 기다리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이 대기자는 간혹 연기자가 대사를 잊어버리면, 그 곳으로 다가간다. 그러면 잊은 것을 살짝 알려준다.
필자가 대개 1년이면 몇 사람이나 쓰러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지난 20년 동안 쓰러지는 사람을 꼭 한 사람 보았다'라고 하였다.
노오에는 여러 가지 상징이 있다.
배를 나타내려면 배를 직접 끌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배를 나타내는 힌 줄로 테두리를 둘러친다. 그러면 배가 간다는 상징이 된다. 배를 젓고 가면 날씨는 맑고 바람은 잔잔하고 기분이 좋다는 뜻이 된다. 급한 상황 예를 들면 폭풍이 몰아친다고 하면 북을 탕탕 친다.
또한 버선의 색깔로도 격을 나타낸다. 힌색 버선은 격이 높은 것이고 노랑 버선은 격이 낮은 것이다. 그래서 교겡 연주자는 노랑 버선을 신는다. 힌 버선을 신어서는 안된다.
노오 공연자는 가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을 '가방모치'라고 한다. 옷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들도록 하지만, 가면은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다닌다.
노오 연주자는 굉장한 연습을 한다. 다른 기예도 마찬가지겠지만, 느린 것이 어렵다. 음악이나 무용이나 모두 느린 것이 어렵다. 보는 사람은 단순하게 보지만, 노오의 느린 춤을 굉장히 어려운 춤이다.
노오 연주자에게 무엇이 제일 어려우냐고 물어 보았다. '한 시간 반 정도 공연되는 동안 꼼짝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공연히 끝난 다음 휘청거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 퇴장하여야 수준급에 올랐다고 한다.' 이처럼 한 시간 반 동안 앉아있다고 그냥 곧장 일어나 나가는 것, 이것이 가장 어렵다면서 웃었다. 얼마나 연습을 해서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일본사람들이 노오를 본격적으로 즐기는 것은 정년 퇴직한 후부터라고 한다. 시간이 많아지면 소일 거리를 찾게되는데, 이 노오 감상은 일본 노인들에게 아주 제격의 문화생활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은 정치적 실권이 없고 상징적인 존재이다. 정치는 무사계급 집단인 막부(幕府)에서 맡아왔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시험을 보아 관리를 등용하고 선비 중심으로 정치를 운용한 것과 사뭇 다른 형편이다.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품위 있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놀아도 좀 고상하게 놀아보려고 하였다. 무사계급은 이러한 유흥오락의 대상으로 노(能)를 선택하여 보호하였다. 인진왜란 당시 일본 침락군의 선봉이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노를 미친 듯이 즐기는 사람이었다.
원래 노 공연계급은 천민으로 절에 소속하고 있었다. 절의 행사에서 사람들에게 불교 교리를 재미있게 전하기 위하여 연극적인 요소를 이용한 것이다. 노의 전통은 한 때 단절되었는데 1876년에 복원된바 있다. 이렇게 무사계급이 노를 즐기게 되자 노의 공연자는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전문 예능자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 노 공연장
노는 공연을 위한 전용 공연장이 있다. 이를 노악당(能樂堂)이라 하다. 야외 노악당을 갖춘 신사와 절도 있었다.
원래 노는 야외에서 횃불을 밝히고 공연하였다고 한다. 횃불에 비친 노 가면의 모습이 매우 신비스러웠다는 회고담을 많이 들을 수 있다.
노오 공연장은 전국에 상당히 많다. 도오쿄오 시내만 해도 10여 군데가 있다.
제일 유명한 곳이 국립노악당이다. 전철역 국립경기장 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소화 58년에 개장하였는데 매월 정기 공연 2회, 보급 공연. 교겡(狂言) 공연 1회, 그리고 격월로 특별 공연을 주최하고 있다. 특정의 유파에 편중하지 않은 편성이라서 5종의 유파를 고루고루 감상할 수 있다.
문에 들어서면 당당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참 좋은 곳이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자료실이 있어 이전의 공연을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난데없이 가면 안된다. 예약 전화(03.343.1331)를 하고 가야한다. 제4목요일의 오후에는 다음달 상연 곡의 강의를 무료로 진행한다. 전문가가 나와서 다각도의 분석을 해 준다.
다음으로 추천할 만한 곳이 보생노악당( 生能樂堂)이다. 전철 마루노우치선과 남북선의 고라쿠엥역에서 내려 8분 정도 걸으면 된다. 맨션(일본에서는 아파트를 맨션이라 한다)의 1층에 있어서 외부와 차단된 분위기이다. 국립노악당 다음 규모로 503석의 좌석이 있다. 좌석이 좁은듯하여 좀 답답한 느낌이다. 입구에는 그릴도 있고 휴게실에서 도시락 등을 사서 요기할 수도 있다. 이 곳은 보생류의 공연을 위해 만든 공연장이다. 토요일, 일요일, 명절에는 대개 공연이 있다. 평일 밤에는 설명회가 있다.
가부키는 극장 안에서 음식을 먹어도 되지만, 노 극장 안에서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 가부키는 서민 문화이기에 마시면 먹으며 약간은 느슨한 기분으로 본다. 그러나 노는 귀족문화여서 그런지 엄숙한 분위기이다.
- 노오의 곡목
노는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데 한 시간 가량 걸린다. 한 곡을 한 번 연주하지만, 무로마치(室町) 시대 말기부터 에도(江戶) 시대 초기에는 다섯곡을 한 세트로 하여 공연하였다. 이것을 고반(五番)타테라고 불렀다. 즉 5곡을 연달아 연주하는 것이다. 이 5곡은 각각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것을 조하큐(序破急)의 삼단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음에 차례로 소개하겠다.
a) 쇼오번메모노(初番目物) - 와키노오(脇能). 신령을 주인공으로 하여 카미노오(神能)라고도 한다. 죠하큐의 죠에 속한다.
b) 니반메모노(二番目物) - 슈라모노(修羅能). 전쟁의 신(神)인 슈라도(修羅道)로 고생하는 사무라이의 영혼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미나모토가(源家) 또는 타이라가(平家)의 장군의 혼령이 주인공이 된다. 죠하큐 중, 하의 초단에 속한다.
c) 산반메모노(三番目物) - 카즈라모노(曼物).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곡이 많다. 담쟁이 넝쿨 을 머리장식으로 한 가발 즉, '카즈라'를 쓰고 나오는 것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모노카다리(物語)에 나오는 유명한 미인의 혼령 또는 미인의 모습의 초목 등의 정(精)을 주인공으로 한다.
죠하큐 중, 하의 중단에 속한다.
d) 요반메모노(四番目物) - 자츠모노(雜物). 요반메모노·니반메모노·산반메모노·고반메모노 외의 것이어서 잡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개 다음과 같은 5가지 범주로 나눈다.
1) 미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쿄오란모노(狂亂物).
2) 이야기 보다 음악적인 요소가 풍부한 유우쿄오모노(遊狂物)·이국적인 분위기의 유우라쿠모노(遊樂物).
3) 슈유신온료모노(執心怨靈物); 집념이 강한 혼령의 이야기
4) 닌죠오모노(人情物); 부모, 친구, 주종 관계 등 사람과 관계된 것으 주제로 하는 것
5) 겐자이모노(現實物); 주인공이 모두 남성인데, 가면을 쓰지 않고 현재 살아있는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e) 고반메모노(五番目物) - 키리노오모노(切能物). 초인간적인 귀신 망령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후나벤케이(船弁慶)가 여기에 속한다. 죠하큐 중, 큐우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이 5곡을 모두 함께 공연하지 않고 노오 두 세곡에 재미있는 교오겐(狂言)을 넣는다. 이렇게 진지한 것과 희극적인 것을 교대하는 것은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에서 가극의 막간에 재미있는 막간극(intermezzo)를 넣은 것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노오는 여러 곡이 연달아 계속 길게 공연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재미있는 장면만 찾아서 이곳저곳의 노 극장을 순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 <후나벤케이> 감상
노오 공연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이 후나벤케이(舟弁慶)이다. 이 곡의 작자는 제아미(世阿彌)의 조카 칸제온아미(觀世音阿彌)의 일곱째 아들인 관세소차랑신광(觀世小次郞信光)이다.
<후나벤케이>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현대적인 안목으로 보면 꼭 황당스런 만화같은 이야기이지만, 12세기 일본의 고전으로 생각하고 읽기 바란다.
이 이야기는 원래 12세기 후반에 있었던 역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요리토모는 형이고, 요시츠네능 아우로 형제지간이다. 아우 요시츠네가 타이라씨(平氏)를 명망시키고 교오토로 돌아온다. 이때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형인 요리토모는 동생을 견제하여 반역자로 몰라 교요토에서 내쫓는다. 그리하고 동생 요시트네는 일행 5명과 함께 도망친다.
많은 사람이 동생을 도와주는데, 그 중에 야스히라(太衡)이 있다. 조정으로부터 자꾸만 독촉이 오자 야스히라가 동생 요시트네를 체포할 결심을 한다. 궁지에 몰린 요시츠네는 자결하고 파란 많은 30세의 일생을 마친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동생을 아끼는 사람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다만 자결을 가장하여 다른 지방으로 도망쳤을 것이라는 소문이나. 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칭기스칸이 되었다는 소문 등이 꼬리를 물었다.
위 이야기를 노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동생 요시츠네는 형 요리토모의 미움을 사교오토에서 쫓겨나 <셋츠> 국으로 추방되어 다이모츠(大物)이라는 포구에 도착한다. 동생의 애인 스즈카 고젠은 동생 요시츠네를 사모하여 이곳까지 따라왔다. 그러나 스님 벤케이의 조언에 더 이상은 동생을 못하고 교오토로 돌아가게 되어 이별의 춤을 춘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이다.
<요시츠네> 일행이 배를 타고 나서자 바다가 갑작스레 사나와지면서 전쟁에서 죽은 타이라 토모로리의 혼령이 나타난다. 장면이 급하게 바뀌고 타악기를 급하게 쳐서 상황이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스님은 귀신이 물러가도록 기도한다. 오시츠네를 바다에 빠뜨리려고 긴칼을 휘둘러 배의 진로를 막는다. 여러 번의 대결 후에 마침내 귀신이 물러간다. 스님 벤케이의 기도로 혼령은 격퇴되고 귀신은 점점 멀어져 간다.
노오에서 동일한 사람이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성격이 아주 다른 연기를 한다. 이처럼 앞부분에 나오는 것은 '마에(前)지테', 뒤에 나오는 것을 '노치(後)지테'라고 한다.
<후나벤케이>에서는 앞장에서는 예쁜 여성으로 주인공의 애인 역할을 하고, 후장에서는 전쟁에서 주인공과의 싸움에서 죽은 영혼 '타이라 토모로리'(平知盛) 역할을 한다. 앞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우아한 춤 시라뵤오시(白拍子)를 춘다. 이 춤은 헤이안(平安)시대 말기에 시작된 기생의 우아한 춤이다. 뒷장에서는 원한에 사무친 영혼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른 노오에서도 이러한 대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지테'이다.
같은 연기자가 앞에서 우아한 춤을 전장(前場)에서 공연하고, 후장(後場)에서는 격렬하고 용감한 전투를 연기하는 것으로 대조가 된다. 이처럼 한 사람이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연기를 즐기는 것이 노오의 재미라고 일본인은 말한다.
- 노오의 등장인물
노오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1. 시테카타: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a) 시테; 전후 2장으로 나누어진 경우에는 마에지테와 노치지테로 나눈다. 이 둘은 원칙적으로 한 사람이 연기한다. 시테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신 또는 혼령 등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b) 츠레; 시테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다.
c) 코카타; 소년의 역할이다. 예외적으로 와키카타에서 나온 것도 있다.
d) 지우타이(地謠) - 합창을 담당한다. 특별한 의상은 입지 않고 연기자들이 부르지 않는 이야기를 합창으로 부른다. 합창을 들어보면 너무나 단순하여 지루하다. 그러나 이 느린 합창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합창 단원 중에 원로 단원이 앉아있으면 전 단원이 긴장한다. 너무 긴장하여 공연을 망칠 지경이다.
2. 와키카타
a) 와키; 시테의 상대역이다. 시테의 연기를 유발하고 또는 시테와 대립하여 극을 진행한다. 시테와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가면을 쓰지 않는다.
b) 와키즈레; 와키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다.
3. 교오겐카타(狂言方)
아이; 아이는 교오rps을 연기하는 것이 본래의 역할이지만, 노오에도 출연하여 마에지케가 퇴장한 다음과 노치지테가 등장하기 전의 공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4. 후에카타(笛方)
노오칸(能管)을 연주한다.
5. 코츠즈미카타; 코츠즈미(小鼓方)를 연주한다.
6. 오오츠즈미카타; 오오츠즈미(大鼓方)를 연주한다.
7. 타이코카타; 타이코(大鼓)를 연주한다.
이 중에서 시테·츠레·코카타·와키·와키즈레·아이를 타치카타(立方)이라 하고, 후에·코츠즈미·오오츠즈미·타이코 연주자를 하야기카타(雜子方)이라고 한다.
- 노오의 음악
요오쿄쿠(謠曲)
요오쿄쿠는 크게 코토바(詞)와 후시(節)의 둘로 나누어진다.
코토바는 대사이고, 후시는 선율적이다. 코토바도 일정한 억양이 붙여져 있으므로, 보통 이야기하는 형식은 아니다. 후시 부분의 음계와 리듬은 다음과 같다.
a) 음계
츠요킨과 요와킨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츠요킨의 음계는 음역이 좁고 음정이 확실하지 않다. 이것은 엄숙·경쾌·용장 등의 분위기에 나온다. 이에 비하여 요와킨은 음악이 넓고 음정도 안정되어 있고 츠요킨 보다는 많이 사용한다. 특히 우미·온화·애수의 분위기에 사용한다. 이밖에 두 가지의 중간 형태인 나카킨(中吟)이 있다.
요쿄쿠의 음계는 몇 개의 기본적인 선율형이 있고 대체로 이 선율형 조합으로 운용된다.
b) 리듬
요요쿄쿠는 일자일음을 원칙으로 하는 카타리모노이다. 박자가 있는 것과 없는 자유리듬으로 부르는 것이 있다. 박자가 있는 것을 효오시아이(拍子合), 없는 것을 효오시아와즈(拍子不合)이라고 한다.
효오시아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오오노리(大ノリ); 8박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야츠뵤오시(八拍子)를 기본으로 하여 4·4조의 것을 한 박에 한 자로 맞추는 것이다.
츄유노리(中ノリ); 8·8조의 것을 기준으로 하여 한 박에 두 자를 맞추는 것이다.
히라노리(平ノリ); 7·5조의 것을 두 박에 세 자를 맞추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코페이션(syncopation)이다. 히라노리는 8박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야츠뵤오시(八拍子)를 기본으로 하여 4·4조의 것을 한 자에 한 박으로 맞추는 것이다.
효오즈아와즈(拍子不合)은 주로 코토바 및 코토바에 가까운 낭독적인 부분 등에 사용한다.
- 노오의 역사
노오를 완성시킨 사람은 제아미모토키요(世阿彌元靑, 1365-1443)이다.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표면적인 우아함에서 내면적인 멋을 강조하였고 복식몽환능(複式夢幻能)이라는 스타일을 실현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역 중심의 대본을 씀에 따라 관객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밀도 높은 대본을 만들어 음악구보와 극적 전개의 조화를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몽환노오'(夢幻能)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떠돌이 스님이 어떤 지역에서 한 사람의 인물(前시테)를 만난다. 그 인물은 어느 지역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말하고 간다. 아이교겐(間狂言)에서는 시골 사람의 이야기로, 스님은 이 사람이 이 지역과 관련이 있었던 인물의 혼령이라는 것과, 회향을 하고 잠들어 간다. 그러자 스님의 꿈에 앞의 인물(前시테)이 나타나고 주인공(시테)는 과거 인물의 혼령으로 스님의 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 모소비와 음악
모소비와(盲僧琵琶)는 맹인승려가 비파 반주에 불교의 경문(經文) 등을 노래하는 종교음악이다. 맹인 승려가 신자의 집을 돌면서 노래하기도 하고 민속 행사도 거행한다. 이러한 비파를 사용하는 맹인 승려의 음악은 현재에도 큐슈(九州)의 일부 절에 남아 있다.
일본 절에서 사용하는 목탁은 엄청나게 크다. 절에서 천으로 무엇인가 덮어놓은 것이 있어 열어보았더니 엄청나게 큰 목탁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스님이 탁발을 할 때, 목탁을 가지고 다니며 경을 읽는다. 일본에서는 도무지 이 큰 목탁을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서 비파를 목탁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왜 비파를 스님이 쓰느냐고 물었더니 그 이유는 순전히 목탁이 너무 크기 대문이라는 것이었다. 왜 작은 목탁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신기하다.
이 맹인 승려는 가정에서 경을 읽도록 모셔올 때, 일반인들은 편안함을 느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흉잡힐 일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는 이 맹인 승려들이 이런 점을 이용하여 일반 가정을 드나들며 스파이 노릇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맹인은 보지 못하지만 청각은 매우 예민하여 듣기만 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음악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천황의 아들 중에 맹인이 있었다. 이 맹인 아들을 절에 보내서 경을 가르쳤다. 이처럼 천황의 아들이 비파를 타자, 맹승비파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그러자 맹인은 모두 절에 들어가 모소비와 음악가가 되었다고 한다.
- 두 가지 모소비와 음악
맹인승려들이 행사는 번요(法要) 가운데 특히 전쟁 희생자를 위한 합전물어(合戰物語)를 비파로 반주하며 노래하는 쿠즈레비파가 있다. 이 쿠스레 비파는 인기가 있어서 전국적인 규모로 <원씨평씨의 합전>(元氏平氏의 合戰)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평합전> 만을 비파로 노래하는 전문가가 발생하고, 이 전문 그룹 맹인 승려는 종교활동은 하지 않는 전문예능인으로 바뀌었다. 이 전문 그룹이 비파 반주에 맞추어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만을 부르는 비파음악이 헤이교쿠(平曲)로 발전하였다.
헤이교쿠를 전승시킨 것은 맹인 스님이었기 때문에 금세기 전반까지도 헤이교쿠는 맹인 스님이 전해 왔다. 이제는 2000년에 오직 한 사람이었던 맹인 스님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맹인 전통은 끊어지고 승려 복장을 한 연주가가 활동하고 있다.
맹인스님들은 당시 신문 방송이 없던 시절이라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경이 끝나면 음식을 대접하고 음식을 나누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 헤이교쿠는 말이 옛날 말이어서 오늘날 사람들은 내용을 잘 모른다. 음악의 노랫말과 선율은 고정되어 있어서 변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헤이케모노가타리>는 헤이케 집안의 이야기이다. 음악의 분위기는 무척 담담한데, 일본인은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아픈 슬픔을 느낀다고 한다.
필자가 들은 헤이교쿠는 <방수여일>(邦須輿一>이었다. 팔도(八島)의 전쟁에서 평가(平家)에서 나온 해상의 작은 배 위에서 '표적을 쏴라'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원씨(元氏) 사람들은 <방수여일>을 선택하여 잘 맞추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활 쏘는 담담한 이야기를 일본인들은 매우 슬프게 느낀다고 하였다. 필자가 '이 음악은 너무 담담하여 슬프지 않더라'라고 하였더니 일본인 학자도 판소리에서 '슬픔을 못 느끼겠다'고 웃었다.
모노가타리를 들은 필자의 인상은 마치 티베트의 불교 음악과 인상이 비슷하였다. 티벳에는 다니엔이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이 다니엔을 스님이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이 마치 모노가타리와 흡사하였다.
6. 근세의 가부키
일본은 에도(江戶) 막부가 성립한 1603년부터를 근세로 들어오게 된다.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5년간을 도쿠가와(德川)막부 시대라 한다.
근세에 성립한 음악을 근세 호우가쿠(邦樂)라고 한다. 이 당시 성립한 음악으로는 극장음악으로 가부키(歌舞伎)가 비극장 음악으로 고토(箏)와 사쿠하치(尺八) 음악이 발달하였다.
근세 음악의 향수층은 상인과 서민이었다. 그리고 전업 예술가들이 예술가들이 등장, 음악이 널리 보급되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가부키 만을 살피기로 하겠다.
가부키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전통 연극이다. 필자가 가부키를 처음 보았을 때, 현란한 무대와 의상도 관심거리였지만, 일본인의 극을 보는 태도는 매우 흥미로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연극을 보러 가면,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관극 중에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극에 몰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가부키 극장은 사교의 장이다. 가부키 극장 입구에는 도시락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곳에서 먹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가서 먹으며 마시며 쉬면서 구경한다.
가부키 줄거리는 대개 아는 것이므로 보면서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극에 몰두하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 오거나 손님을 데리고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극을 본다. 이층의 특실은 다다미 방으로 다른 방과 격리되어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자유이다. 극을 보건 술을 마시건, 피곤하면 잠을 잘 수도 있다.
중국의 경극을 볼 때도 중국인들은 몰두하지 않는다. 차를 마시며 친구와 이야기도 나누며, 마치 친구와 사귀러 온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서도 전통문화는 대개 노인들의 주 관객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가부키를 구경올 때,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온다. 아이들은 흥미가 없음으로 그냥 그 곳에서 논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놀면서 소리와 분위기를 익힌다. 이 어린이는 젊어서는 그냥 덤덤히 지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어릴 때 보던 가부키 생각이 나서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
가부키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연극으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연극이다. 노오(能)나 교겡(狂言)이 귀족과 무사의 연희였던 반면, 가부키는 에도시대에 서민의 연희로 탄생해 오늘날까지 4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연희이다.
가부키는 가(歌:노래), 무(舞:무용), 기(伎:연기)를 아우른 종합예술이다.
오늘날의 가부키 공연은 남자들이 담당한다. 여자 역할이라 하더라도 남자가 담당한다. 그래서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남자'라는 말이 있다. 여자역을 맡은 배우를 '온나오가타'라고 하는데 그는 '가련한 여자의 모습을 보이려고 공연 전에 찬물에 손을 담근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이 파리한 여자의 모습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가부키'란 원래 전국시대(16세기)에 유행한 풍속을 말했다. 어원은 가부쿠(傾く), 즉 '기울다'라는 동사가 명사로 변화한 것으로, 말하자면 보통상태가 아닌 상식을 벗어난 기이한 행동, 색다른 풍속을 뜻했다. 이렇듯 가부키는 ‘경(傾)’자를 씀으로서 한편 새로운 경향을 뜻하기도 했다.
가부키 현상은 일본근세초기에 나타난 새로운 풍속으로 당시에는 가부키모노(歌舞伎者)라고 하면 괴상한 옷차림에다 색다른 언동을 하는 이들을 말하기도 했다. 화려한 옷에다 큰칼을 허리에 차고 거리를 활보하는 무사나, 여자이면서도 어울리지 않게 마구 노래를 부르거나 남장을 하고 춤을 추는, 말하자면 시대의 첨단을 걷는, 제멋대로 놀아나는 사회의 한 풍습이었다.
그것이 전화되어 불량배나 놀음꾼 도적 등을 모두 가부키모노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가부키풍속에는 자연히 해방적인 유희라든가 해학, 또는 好色이라는 뜻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민중적 취미가 중심이 되어 당대의 여러 가지 새로운 연희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가부키라고 이름지었으며, 도쿠가와(德川)정권초기(1600년대)부터 유행했다. 여기에 한학자 하야시 라산(林羅山)이 한자음을 따서 가부키라고 그럴듯하게 표기를 했다.
처음에는 가부키가 가무를 본위로 하는 기녀(技女)들의 연희, 즉 여자가부키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메이지시대에 와서 기(妓)’가 기생을 뜻한다고 하여서 재주나 연기를 뜻하는 ‘기(伎)’로 고치게 되었다.
가부키는 원래 여자들의 가무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 무대 연희였다. 그것이 점차로 문란한 풍속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여자의 출연이 금지되고, 대신 남자들의 연희로 변해갔다. 즉, 여자가부키에서 미소년가부키, 성인가부키를 거치면서 남자가 여자역을 맡는 독특한 연희로 발달한 것이다.
가부키를 처음 본 외국인들은 그 화려한 무대를 보고 우선 놀랄 것이다. 무대장치를 비롯해 갖가지 의상의 오색찬란한 빛깔에 눈이 부실 정도다. 가부키란 문자그대로 가(歌), 무(舞), 기(伎)를 뜻한다.
근세 이후 떠오른 조닝(町人)계층의 활동으로 이룩한 대중연희인 이 가무극은 에도시민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말하는데, 무인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메이지유신까지 약 천년간은 무인들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즉,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통제된 말하자면 군대식의 체제였다. 틀이 잡힐대로 잡힌 봉건사회 속에서 점차로 머리를 쳐들고 나온 계층이 바로 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경제인들이다.
무릇 연희라든가 대중적인 유희 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와 관련한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 시민의 정신적 발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쿠가와 정권이 안정되고 내란이 가라앉은 후 가부키는 대두한다.
노오(能)나 교겡(狂言), 분라쿠(文樂)가 중세에 발생한데 비해 늦게 태어난 가부키는 자연히 이들 선행 연희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본인이 가장 많이 즐기는 서민적인 연희로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가부키의 형식미
가부키의 공연 종목은 크게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것과 현대적인 것을 다룬 것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아주 제멋대로다. 줄거리가 있는 듯 없는 듯 기상천외한 줄거리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가서 관객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처음 보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는 것은 온나가타(女者)의 등장이다.
온나가타는 관청의 억압과 지도 아래서 불가피하게 생기게 되었다. 종전에 여성이 등장하는 가부키는 성의 문란을 가져온다고 해서 당국의 폐지 명령을 받았으며, 그후 300여년 간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아왔다.
늙은 배우가 온나가타로 등장할 때는 징그러울 정도이지만, 한편으론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독특한 연희임을 깨닫게 해준다.
일본의 고전예능은 거의 일정한 형을 고스란히 지켜온 예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부키의 경우는 ‘형식미의 예술’이라고 일컬어 질만큼 양식에 충실하다. 언어, 동작 등 모든 것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니 한편 재미없다는 평도 따르게 마련하지만 이처럼 판에 박힌 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또한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가부키 배우
가부키 배우는 에도시대에는 야쿠샤(役者)라고 일컬었다. 야쿠샤란 원래 고대에는 신에 관한 일을 맡는 사람을 뜻했다. 그것이 점차 연희를 통해 신에 봉사하는 사람을 말하게 되었다. 노오야쿠샤, 가부키야쿠샤라고 칭했는데 에도시대에는 특히 가부키 배우를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야쿠샤 대신에 배우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배우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고, 사농공상의 계층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으로 자리가 정해져 천민이라고 멸시를 당했다. 주거도 일반사회에서 격리되고 외출할 때에는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가부키 배우는 발생 당시의 여자 가부키, 미소년가부키시대에는 매춘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얼굴 미색 본위의 시대였으므로 연희의 기예에 뛰어난 배우는 나오지 않았다. 배우의 이름 값을 하는 자의 출현은 성인가부키이후 연기가 중시된 시기부터이며, 참된 배우로부터의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겐로쿠(元祿)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830년에서 1844년에 걸친 정치개혁의 당시에는, 가부키 배우는 관가의 호출을 받은 배우로 불리며, 동물처럼 천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어던 사람들은 타인의 명의로 별장을 짓기도 했는데, 인기배우는 년봉 2500-2600냥이나 받으면서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년간 500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정부의 통보가 나왔을 정도라고 한다.
배우의 이런 사회적 지위는 메이지 시대가 되어 계급사회에서 풀려나면서 향상되었다. 한편 배우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연기양식을 형으로 전승하고, 거기에서 장인다운 기예를 연마해 갔다. 누구누구의 藝, 즉 명배우가 창출한 형식을 전승해 감으로서 그것이 자기 가문의 예가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가부키십팔번'은 이치가와 가문의 가예이고, 괴담거리나 세태거리는 기쿠고로 가문의 가예였다.
- 미소년 가부키와 성인 가부키
여자 가부키는 도쿠가와 막부 정치가 안정됨과 동시에, 풍속을 문란시키고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629년에 금지 당한다. 이러한 여자가부키의 금지령을 계기로 새로 등장한 것이 미소년들의 가부키이다. 미소년의 나이는 15세에서 16세였다. 그러나 미소년 가부키는 여자가부키와 다름없이 호색적이고 이색적이었다.
소년들은 머리를 곱게 따고 엷은 화장을 하고, 통소매 옷을 입고, 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애교를 떨었다고 한다. 이 소년 가부키도 여자가부키와 별반 다르지 않아 여자가부키 금지 후 23년이 지난 1652년 전면 금지되고 말았다.
미소년 가부키가 금지된 후 당분간 가부키는 사회에서 모습을 감추었으나 시민들의 가부키 부활활동이 일어나고 탄원이 잇따랐다. 이로 인해 가부키의 흥행이 허가되었으나 조건부였다.
그 조건이란 여성과 소년이 출연해서는 안되고 성인남자만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춤을 추지 않고 노오와 교겡을 흉내내는 연희라야 된다는 조건이다.
이렇게 되자 가부키는 연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오나 교겡같은 흉내내기 연희를 중심으로 공연을 해야했기 때문에 자연히 극의 내용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 모아야했다.
종래의 가부키는 무용과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쇼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노오의 극적인 요소를 도입하면서 연극으로 탈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등장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가 아니, 여자가 무대에 오르지 않는 연극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온나가타라는 특수한 존재가 성립하게 되었다.
여자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법령에 금지되었으니 여자대신 남자가 여자로 분장해 연희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온나가타란 역이 생기게 되었다.
대체로 어느 나라 연극이건 남자역은 남자배우가 연기하고 여자역은 여자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여자 배우가 참가하는 가부키가 때때로 상영되기도 하지만, 삼백년 동안 여자역을 남자배우가 연기해 왔다.
가면연극인 노오는 여인 탈을 쓰고 연기하는데 또 우리나라의 탈춤도 그렇다. 그러나 탈을 사용하지 않는 맨 얼굴이 드러나는 가부키와 같은 연희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분장을 하고 여자 시늉을 해야만 했다.
- 칸진쵸오(勸進帳)
가부키에 쓰는 용어 중에 '칸진쵸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스님이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시주목록이다. 스님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시주를 받으면 적어두는 것을 말한다.
원래의 이러한 뜻과는 달리 대강 대강 준비없이 하는 것을 '칸진쵸로 한다'라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석사 학위 심사 때 준비가 덜 된 사람을 '그렇게 칸진쵸오로 준비해서 합격할 것 같은가?' 또는 선생이 준비 없이 강의를 하게 될 때, '오늘은 칸진쵸오로 강의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부키 중 요시츠네가 형에게 밀려 국경을 넘을 당시의 일로 이 말이 나왔다. 당시 수비대장은 요시츠네가 오면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수비대장은 요시츠네를 알아 보았지만 눈을 감아 준다. 이 때 스님이 요시츠네를 짐꾼 모습으로 변장하게 하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칸진쵸오를 가지고 둘러대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유래한 칸진쵸오는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 가부키의 미
가부키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양식미이다. 이것은 역시 양식이 내용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가부키의 지나친 양식은 온나가타의 존재에서 온 것이다. 여배우가 금지됨으로 인해 생겨난 온나가타는 남자를 여자답게 보이기 위한 연극적 변형을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온나가타는 무대에서 남자배우보다 앞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도 실은 원근법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소맷부리 밖으로 손목을 내밀지 않는다든지, 무릎을 떼지 않는 것 등도 현실의 여자 흉내라기보다는 여자답게 보이기 위한 기교였다. 일본여성의 안짱다리 걸음도 그렇다.
유명한 온나가타로 활약한 나카무라 토미주로가 처음으로 무대에서 이 안짱다리 걸음걸이를 사용했을 때, 너무나 여자답고 나긋나긋한 자태에 일반 가정주부들도 홀딱 반해 이것을 본뜨게 됐다고 한다. 온나가타가 그 양식을 완성해 감에 따라 남자배우도 그저 남자답게 거동해 보이는 것만으로는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가부키는 너무 형식을 강조하다보니 구태의연한 모습을 못 벗어나기도 하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에서는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에도시대에는 지방의 군주를 서울로 불러다가 1년간씩 살게 하였다. 이 때 군주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행원이 함께 왔다. 이러한 교류는 자연히 문화 경제 교류도 촉진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7. 일본과 한국의 음악적 상황 비교
한국인과 일본인은 겪어볼수록 다른 점이 많다. 슬픔을 나타내는 태도로 예를 들어보자. 판소리에서는 목놓아 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판소리에서 우는 장면을 빼면 음악이 안될 정도로 슬픈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일본의 노(能)에서도 슬픈 장면이 많다. 예를 들면, 노의 중요한 연주 곡목에 후나벤케이(船弁慶)가 있다. 이 연극의 처음 장면은 요시쯔레(義徑)가 애인 시즈카(靜)와 이별하는 장면이 꽤 길게 나온다. 요시쯔레는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유배 가는 길이다. 이제 헤어지면 요시쯔레와 시즈카는 평생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의 이별은 너무나 담담하여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노에서는 울음소리는커녕 우는 시늉도 하는듯마는듯 한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면 그것이 말못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일본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애간장을 녹이는 슬픔을 느낀다. 외국인인 나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담담한데, 일본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고 한다.
슬픔의 표현에 관한 한일 양국의 재미있는 비교가 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었다는 전사통지서가 왔다고 하자. 한국과 일본의 어머니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한국의 어머니라면 전쟁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실신해 쓰러질 것이다. 그나마 정신이라도 차리고 있는 어머니라면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네가 어미 먼저 가느냐---' 대성 통곡이 벌어질 것이다.
일본의 어머니라면 어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당장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전사통지서를 가지고 온 손님에게 깍듯이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차 대접을 한다. 손님이 가고 난 다음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흐느끼면서 슬픔을 삭인다. 필자는 일본의 후나벤케이를 보면서 한국과 일본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한국에는 즉흥음악이 많다. 판소리ㆍ사물놀이ㆍ가야고산조 등이 대표적인 즉흥음악이다. 아마도 판소리를 선율도 같고 노랫말도 같은 것은 선생에게 배워서 선생이 가르친 그대로 부르는 판소리꾼이 있다면, 이 사람은 소리꾼이 아니다. 이런 사람을 '사진소리쟁이'라고 하여 판소리계에 남아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은 판소리계에서 빨리 떠나야할 사람이다.
가가쿠는 즐기기 위한 음악이 아니고 의식음악 음악이다. 의식을 주제하는 주인공의 위세를 더 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종묘제례악과 같은 의식 음악을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내가 일본의 의식 음악을 무미건조하다고 듣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의식음악도 지루하다고 듣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확실히 좌뇌적이다. 한국인들은 우뇌적이어서 감성이 발달하였다면, 일본인은 좌뇌적이어서 이성적이 예슬을 발달시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인은 글을 읽으면서 한자를 보면 음독인지 훈독인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바다해(海)를 보면서, 일본인은 어느 때는 훈독으로 '우미'라고 읽고 어떤 때는 음독으로 '가이'라고 읽어야 한다. 우리는 '바다' 또는 '해'라고 씌어 있는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일본인의 뇌는 우리보다 한결 좌뇌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감성적이라면 일본인은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나오나 보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음식에 파리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한국인; '이게 뭐요'하며 소리를 지른다. 즉, 즉시 감정을 나타낸다.
일본인; 아무소리 않고 나와서 소문내어 망하게 한다. 즉시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정보로 전달한다.
미국인; 고발한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노오는 약 90분 정도 공연을 한다. 우리나라의 판소리가 몇 시간 동안 공연하는 것과 비교하면 무척 짧은 시간이다. 일본 사람들이 노오 구경을 하는 것을 보면, 예상외로 졸고 있는 사람이 많다. 긴장하여 관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워낙 흐름이 느리고 변화가 없는 음악이라서 졸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이다. 이렇게 졸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고 노를 보았을 때의 느낌은 황홀할 지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졸다가 눈을 떴을 때 활홀함을 느껴야 진짜 노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는 처음부터 다 볼 필요가 없고 중간중간 보아도 된다는 농담같은 이야기도 있다. 사실 이 노라는 것이 지난 500년 동안이니 노랫말이나 선율이 바뀌지 않았고, 거기다가 한정된 배우들이 출연하기 때문에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일본 음악은 이렇게 고정되어 있다. 일본에는 판소리 같은 즉흥음악이 없다. 일본에서는 선생의 음악을 충실히 전승하여야 한다. 출중한 제자가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 사람은 유파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여야 한다. 전통음악계에서 이것은 굉장한 모험이다.
즉흥음악은 준비 없이 음악을 연주하기 때문에, 어느 때는 성공하고 어느 때는 실패하기 쉽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연습에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일본인은 정확한 것을 좋아하여 이처럼 불확실한 즉흥연주 같은 모험을 하지 않는다. 이같이 즉흥연주를 기피하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음악성이 적은 것이고, 좋게 말하면 정확한 연주를 즐기는 것이다.
중앙대의 박범훈 교수는 아시아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아시아오케스트라는 한·중·일 세 나라의 전통악기 연주자들의 모임이다. 자연히 세 나라 사람들의 음악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박범훈 교수의 경험담에 의하면, 일본인이 리듬감이 가장 모자라고, 중국인은 중간이고, 한국인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나라 사물놀이나 산조같이 다양한 리듬을 구사하는 음악을 늘 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는 이에모도(家元)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것은 전통문화를 전승해 오는 단체로 이에모도의 우두머리는 자기 유파의 음악을 철저히 잘 전승되도록 노력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까지 관장하는데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다.
우리나라에는 가야고산조에 10여가지의 류파가 있는데, 일본 쟁 음악의 유파는 단 두 개뿐이다. 이쿠다(生田流)와 야마다(山田流) 두 유파뿐이다. 이 두 유파는 전체적으로 선율이 동일하고 부분적으로 다르다.
더 놀라운 일은 전체 일본 고전 고또(箏)음악으로 <로쿠단>(六段)과 <미다레> 단 두 곡뿐이다. 대개 기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한다. 말하자면 기악은 노래를 반주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기악곡이 적은 것은 이 또한 음악성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민요 중에 <에덴라쿠>(越殿樂)의 선율을 이용하여 만든 <구로다부시>가 있다. 이것은 에덴라쿠의 뼈대음으로 노래를 만든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박수를 친다. 그런데 박수치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다.
대개 한 박이 일분간에 50정도의 박자이다. 사실 1분에 50박을 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약간 힘든 느린 박자이다. 그래서 박수를 치고 다음 박수를 치기까지 그냥 기다리지 않고 손을 비빈다. 느리게 박수를 치려니 그 긴 시간을 채우기 위한 것이리라.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느린 박을 두박으로 나누어 두 번 박수를 칠 터인데, 일본인은 융통성이 적나보다.
그런데 웬일인지 일본 전통 민요의 속도는 대개 이처럼 느리다. 빠른 속도의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 민요의 속도는 진양조처럼 느린것부터 자진모리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일본인이 음악성이 적어서 그런 것인가?
일본 음악은 우리나라 음악에 비하여 농현(vibrato)이 적다. 우리나라 음악은 영산회상부터 판소리ㆍ산조까지 농현이 깊고 많다. 연주가들은 다양한 농현을 구사하면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는다. 리듬이 정확해도 농현 구사를 못하면 음악에 멋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속음악인들은 이 바닥 출신이 아닌 사람을 '비개비'라고 부른다. 이 '비개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찰비개비'라는 말까지 쓴다. 비개비를 벗어나려면 제일 먼저 농현 구사에 익숙하여야 한다.
그런데 일본 음악은 농현이 아주 적다. 고토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 가야고 연주자는 연주 중에 줄이라도 끊어지면, 즉석에서 얼른 줄이 다시 얹어 연주를 계속할 수 있다. 가야고 연주자는 원래 자기가 내는 음보다 약간 음악 낮게 조율한다. 그리고 줄을 눌러서 원하는 음을 연주한다. 그래서 원하는 음을 낸 다음에 다른 소리로 옮겨가면 그 음은 약간 흘러내리게 된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이런 흘러내리는 소리를 퇴성(退聲)이라고 하여 줄긴다.
그런데 일본 고토는 워낙 줄을 단단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줄이 끊어지면 전문가가 와서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줄을 팽팽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줄을 흔들 수가 없다. 그러니 농현이 얕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통음악계는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야고 연주가라면 전통음악인 영산회상ㆍ산조도 해야하고 새로 만든 창작음악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가쿠 연주자는 완전히 가가쿠만 연주하고, 노 연주자는 노 연주만 전념하고 다른 음악에는 관심이 없다.
일본 음악인이 얼마나 전문화되었는지는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노오 공연 때, 막을 여는 사람이 있다. 왠일인지 일본 노 극장에서 막을 여닫는 일을 전기로 하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여닫는다. 그런데 이 일을 아무나 하지 않고 담당자가 정해져 있다. 이 사람은 평생 이 일만 한다고 한다. 이처럼 단순한 일은 평생동안 하다니? 이러한 심성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떤 사람이 일본군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일본 사람은 군인은 어찌나 복종심이 강한지 앞에 낭떨어지가 있어도 '돌격 앞으로!' 명령이 나오면 그냥 앞으로 간다고 한다. 이러한 군인정신은 사무라이정신과는 통할 것이다.
일본 무사 계급은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상관이 할복하라면 그 명령에 따랐다. 이렇게 명령에 따르면 그 자손들은 영예를 얻게되고 다른 무사들의 보살핌 속에 부모가 있는 것과 비슷한 조건에서 자랄 수 있다. 일본 정치사가 오랫동안 무사들이 주도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존중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하여 자연재해가 많다. 특히 지진은 예고없이 난데없이 들이닥친다. 재난을 극복하는데는 지도자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재난 방지 시설에는 막대한 돈이 드는데 이러한 비용 염출 역시 지도자의 설득이 아주 중요하다. 수천년 동안의 이러한 생활 방식은 바로 명령 복종심을 좋은 미덕이라고 강조해 왔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람은 단체의 결속력이 일본에 비하여 약하다. 우리나라는 자연재해가 적고 농경이 주요 생업이었다. 옛날의 농사일이란 주로 가족 단위로 일을 하거나 넓어져야 마을 단위였다. 이러한 배경은 한국 사람이 자유분방하여 단결력을 약화하였는지도 모른다.
8. 마무리
중국ㆍ한국ㆍ일본은 동북 아시아에서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음악적으로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보인다.
중국은 전통음악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고 개량하였다. 악기를 개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도 주제는 옛 것이지만 이 주제를 변주시키고 개량한 악기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다시 작곡하였다.
이에 비하여 한국음악계는 전통은 전통대로 유지하면서 악기 개량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가야고산조가 있는가하면, 17현ㆍ21현ㆍ25현 가야고를 위한 곡도 병존하고 있다.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도 악기를 개량하고 있지만, 중국과 한국에 비해서는 훨씬 보수적이다. 샤미센은 섬세한 악기인데도 옛 그대로 둔탁한 밥주걱 같은 바치를 그대로 쓰고 있다.
전통음악계의 형편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음악계는 일본보다 훨씬 형편이 좋다고 할 수 있다. . 우서 우리나라의 대학 국악과에 해당하는 방악과(邦樂科) 일본 전체 단 두 대학뿐이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국악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수가 100여명 되는데, 일본은 채 10명이 안된다.
단 예외가 있다. 어느 예능 단체의 이에모도(家元)이라면 형편은 다른다. 일본에도 나이가 들면 전통음악이 좋아져서 찾는 사람이 있다. 특히 아줌마들이 전통을 배운다. 이들은 교습료를 낼뿐만 아니라 선생에 대한 대접을 극진히 한다. 연주회에 선생과 나란히 무대에 않아 연주라도 하려면 엄청난 돈을 낸다. 물론 자발적이다. 또 제자들은 공부하러 올 때마다 음식을 해 가지고 온다. 그래서 선생 댁은 매일 파티 기분이다. 일본도 인간문화재(닌겐고쿠보, 人間文化財)가 있다. 정부에서 약간의 보조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인간문화재가 되면 사회적 대접이 달라지고 렛슨비가 올라간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국립국악관현악단, 시립국악관현악단 같은 단체가 많이 있다. 요즘 지방 자치단체에서 국악연주 단체를 많이 만들고 있다.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체를 만들고 있다. 시민 위안 공연이라도 하려면 서양 음악단체보다는 국악단체가 훨씬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지방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국악연주단체가 하나도 없다. 대부분 스스로 좋아서 활동하는 단체이다. 이들은 낮에는 스스로의 직업에 종사하고 퇴근 후에 모여서 전통 음악을 배우기도 한다.
일본에는 나이가 들면서 또는 서양음악을 공부하다가 철이 들어서 전통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온 나라가 전통 문화에 관심이 없으니 이들이 전통음악에 종사하여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겨우 교통비 정도의 사례를 받고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의 '문화통계조사 2000'에 의하면, 아직 모자라지만 전통문화의 형편이 낳아지고 았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이 보고 싶은 공연 분야에서 '전퉁예술 공연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세 번째로 많았다. 수입으로 말하면, 국악인은 월 평균 174만원을 버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예술계 10개 분야 중 7위에 해당하고 1997년의 132만원보다 30% 증가한 것이다.( 『월간국악』 2000년 7월호, 28쪽) 필자가 여기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점점 낳아지고 있다는 사회적 추세이다.
이처럼 일본의 전통음악계는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다른 면으로 보면 풍성한 면이 있다. 우리 나라도 흡사한데 사람들이 나이들면 전통문화를 찾게 된다. 한일 두 나라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이렇게 나이 들면 전통문화를 찾게 된다는 점, 이 점은 공통적이라 하겠다.
어찌보면 일본의 전통음악계는 우리보다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다른 면으로 보면 풍성한 면이 있다.
풍성함이란 이에모도를 중심으로 한 전승과 연주회가 많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에서 전통음악으로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는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학 국악과라는 제도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자생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자생적인 활동이 더 강한 힘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전통음악계는 스스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국악계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고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일본에 비하여 자생력이 떨어지는 형편이라 하겠다.
일본의 방악계가 어떻게 자생력을 키우고 있는가 하는 점은 한국의 국악계가 참고로 할만한 일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한소리회가 있다. 이 단체는 20년이 넘는 순수 민간단체로 스스로 국악 보급 활동과 연주회를 꾸려나가고 있다. 이 모임을 이끄는 몇 사람을 보면 일본의 방악계와 흡사하다. 아마츄어들이지만 매우 진지하고 열심히 활동한다.
앞으로 한소리회같은 개인단체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길 바란다. 이런 단체의 활동이야말로 우리 나라 국악계에 활력을 넣어줄 보양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음악에 관한 문헌으로는 필자의 {동양음악}(삼호출판사, 1991)의 제2장 일본음악과, 호시아키라(星旭)의 {일본음악의 역사와 감상}(최재륜 번역, 1994)가 있다. 이 글에서 모자라는 점은 위 뒤 문헌에서 채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