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천금(千金)같이 귀하게 여기고...
-이 글은 지난 11월13일 경주문인협회 향가발원장소 답사 시 ‘한 말씀‘ 드린 것을 정리한 글입니다.-
정석준(수필가. 법사)
오늘이 11월 13일, 금년 한해도 이제 한 달 반 남짓 남았습니다. 새해를 맞이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금년 한해도 이제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세월이 더디게만 가는 것 같더니, 인생 60고개를 넘어서니 세월이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어나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월요일가 하면 어느새 주말이고, 월초인가 하면 어느새 월말이 되어 있고…세월이 빠른 것인지 내 마음이 급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30대 초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지은 『선가귀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꿈만 꿈이 아니고 인생이 한바탕 꿈이다."라는 귀절을 읽고 '꿈은 꿈이고, 인생은 인생이지 왜 인생을 꿈과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니, 이제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거니와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모하는 것이 어찌 인간사(人間事) 뿐이겠습니까? 올해 핀 꽃도 엄밀히 따지면 지난해 피었던 꽃은 아닙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하고 모든 것은 물처럼 흐릅니다. 똑같은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씻을 수 없습니다. 흐르는 물이 다르듯이 발을 씻는 나 자신도 늘 변모합니다. 어제도 안녕, 오늘도 안녕, 내일도 안녕, 글세요? 내일은 기약이 없습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발부둥치며 살다 예고도 없이 부르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가야만 합니다.
오늘 못한 것은 내일 해야지, 내일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되지, 기회는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바쁘게 살다보니 부모와 자식의 도리, 인간 도리를 제대로 못했는데, 앞으로는 잘 해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살다보니 삶을 즐기지 못했는데 이제는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고, 가보지 못한 곳 여행도 하면서 즐겁게 살려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나야 할 운명이 오면 갈 수 박에 없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때가 되면 가야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옛날에 장조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장조류의 소꼽친구 중에 도인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이 선정 삼매에 들어보니 장조류의 명(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조류를 찾아가서 권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도 이제 염불도 좀 하고 참선공부도 좀 하게."
"나도 그럴 생각이라네, 그런데 다음의 세 가지를 다 이루고 난 뒤 그렇게 하겠네."
"그 세 가지가 뭔가?"
"첫째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좀 더하여 돈을 벌이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고, 셋째는 아들딸들이 잘 사는 것을 보는 일이라네."
오늘 여기 계시는 분들에게 누가 이런 권유를 해 온다면(인생 공부 좀 하라고 한다면), 아마 장조류와 별반 다름없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장조류의 첫 번째 대답은 아직은 돈을 좀 더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장조류가 농사꾼인지, 장사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아직-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장조류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대게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러한 부모님들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알뜰살뜰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한들 그 재산이 얼마나 오래 갈지도 의문입니다. “머니(돈), 머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이라고 하는데, 왜 돈을 돈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해서 돈이라고 한답니다.
저승에서 현대 정주영회장이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만났는데, 정주영 회장이 이병철 회장에게 “형님 버스비가 없어서 그러니 500원만 빌려 주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자네도 이승에 올 때(죽은 뒤에는 저승이 이승이 되고, 이승이 저승이 됩니다), 돈 한 푼 못 가지고 왔나?. 나도 한 푼도 못 가지고 와서 무일푼이라네.”라고 대답 하더랍니다.
옛말에 3대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재물이란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승 갈 때 한 푼도 가져 갈수 없는 것이 또한 재물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재물뿐만 아니라 명예나 지위 또한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그 직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영원히 국회위원 줄 알고, 시장인줄 알고, 경찰서장인줄 알고 목에 힘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이런 사람은 아직까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돈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올바른 생각,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웃어른을 받들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심어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참된 유산이 아닐까요?
장조류의 두 번째 대답은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바램 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 때에는 결혼이란 무조건 해야 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결혼이란 필수조건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며, 좋은 사람(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혼자 살지 억지로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할 것입니까? 자식도 품안의 자식이라 했습니다. 다 큰 자식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장조류의 세 번째 대답은 아들 딸들이 결혼하여 잘 사는 것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바램 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사리 결혼시켜 놓아도 첫손자 볼 때까지는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라고 하니, 서로 다투기만 해도 혹시 갈라서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이래저래 부모님들은 자식 문제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한 옛 말이 하나도 허튼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갔습니다만, 도인 스님은 친구인 장조류에게 아무리 권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냥 절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조류가 사망했다는 부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스님은 문상을 가서 조문하기를,
“나의 친구 장조류여! 내가 참선, 염불을 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친구는 세 가지를 다 이룬 뒤에 한다고 했지
염라대왕 그 양반 분수가 어지간히 없네.
세 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갈고리로 끌고 가다니.“
스님의 조문은 염라대왕을 나무라는 듯이 지었지만, 세상일에 매달리다 보면 인생 공부를 할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불시에 저승사자가 밀어 닥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천금(千金)같이 귀하게 여기고 알뜰살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뜻있게 보내야 합니다. 가끔은 친구도 만나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어디 맛집이 있다면 찾아가서 사먹기도 하고, 내 몸이 허락하는 한 구경도 다니시며, 남은 인생 즐겁게,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무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듯하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죽고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이 시는 서산대사의 해탈 시의 일부입니다. 서산대사는 삶과 죽음을 한조각 구룸이 일어나고 사라짐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에 연연하고 무엇에 집착할 것입니까? 이제 모두 다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갑시다, 때로는 흘러가는 힌 구름도 바라보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들어가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