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펙 [Gregory Peck]
생년월일 : 1916. 4. 5 ~ 2003. 6. 12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 아졸라
신 장 : 190cm
1916년 4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라 졸라(La Jolla) 출생. 본명은 엘드레드 그레고리 펙(Eldred Gregory Peck).
샌디에고에서 약제사를 하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는 그의 나이 5살 때 이혼했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캘리포니아에 이는 버클리 대학 의예과에 입학했으나 연극에 심취하여 전공을 문학과
연극으로 바꾸었다.
39년 버클리를 졸업한 펙은 뉴욕에로 가서 박람회 안내원 노릇과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라는
연기 학교에 등록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생으로 졸업한 그는 카스린 코넬 극단에 들어가 배우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42년 에밀린 윌리암스의 연극 에 첫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그는 1942년 10월 그레타 라이스와 결혼했다.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그는 헐리웃으로 진출, RKO 스튜디오와 계약하여 <영광의 나날>로 데뷔했지만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두번째 작품 <왕국의 열쇠>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히치콕의 <스펠바운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고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이어링>, 서부극
<백주의 결투(Duel In The Sun)>, <황색 하늘>, <건파이터>, 그리고 세번째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신사협정> 등에 출연했다.
1952년 파리를 여행하던 펙은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54년 아내와 이혼했다.
그는 위자료로 7만 달러를 내주고 파리로 돌아가 55년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하게 된다.
61년작 <나바론>의 성공에 이어 <앵무새 죽이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영화 인생의 절정에 오른다.
이후 TV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며, 노배우로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76년 공포영화 <오멘>으로 다시 재기하였고
<맥아더>의 눈부신 열연으로 극찬받았다. 1967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고 AFI(미국 영화협회)의 초대 회장,
아카데미 회장도 엮임하였다. 75년 큰아들 존의 권총 자살이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 되었다.
그레고리 펙의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펙이 5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UC 버클리 의대에 진학했지만 연극에 심취하여 문학과 연극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939년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가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기학교에 입학, 전설적인 연기지도자 샌퍼드 마이스너와 세계적인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에게 수학했다.
1942년 에밀리 윌리엄스의 연극 "The Morning Star"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섰으며 이듬해
할리우드로 진출, 영화 <영광의 나날>로 데뷔했다.
1944년 영화 <천국의 열쇠>에서 맡은 치셤 신부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그레고리 펙의 눈부신
연기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잉그리드 버그만과 공연한 <스펠바운드>, 1946년 <가장 특별한 선물 The Yearling>, 1947년 <신사협정> 등으로
3년 연속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마침내 1962년 <앵무새 죽이기 (알라바마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서 그레고리 펙은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 남자를 변호하는 의지의 변호사로
출연해 리버럴한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남겼으며 미국영화협회 (the American Film Institute)가
선정한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속 주인공(the greatest movie hero of all time)"으로 뽑히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는 서부 영화 출연, 영화 제작 참여 등을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TV 기자였던 큰 아들
존 펙의 권총 자살로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시기이기도 하다.
1976년 <오멘>은 그레고리 펙의 재기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듬해 <맥아더>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을 맡아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훤칠한 키, 조각처럼 수려한 용모에 도덕적이며 성실한 이미지를 가졌던 그레고리 펙은 <천국의 열쇠>의 사려깊은 사제,
<로마의 휴일>의 기자에서부터 <백경 (Moby Dick)>의 에이허브 선장,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The Boys from Brazil)>
속의 나치 전범 멩겔레 (Mengele)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 속에서 폭넓은 연기력을 과시한 성공적인 배우였다.
40여년의 연기 생활동안 6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중 10여편의 영화를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놓았던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5회 노미네이트되어 1회 수상했으며 2번의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등 16차례의 각종 상을 수상했다.
또한 미국영화연구소 초대 의장,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협회 회장, 미국 암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입장이었던 그레고리 펙은 베트남전 당시에는 반전시위에 앞장섰고 말년엔 미국 각지를 돌며 자신의
삶에 대한 강연을 주로 했다. 1967년 예술과학협회가 주는 진 허쇼트 인도주의상을, 1969년에는 대통령 자유 메달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다.
1942년 결혼한 그레타 라이스와 1955년 이혼한 후 프랑스 여성이며 기자 출신의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해
여생을 함께했다. 베로니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앤서니와 시실리아는 모두 배우로 활약 중이다.
그레고리 펙은 2003년 6월 12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