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터널이 뚫려 단숨에 통과할 수 있지만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한 배후령 고개의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오음리에 있는 파월 교육대에서부터 전혀 모르는 길을 가기 시작했다. 월남에 도착하여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밖에서 기어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는 기지까지도 모르고 갔다.
그러나 월남전 막차를 탄 우리들에게는 박스를 꾸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대의 짐을 꾸리는 것이 최우선이라서 개인의 짐은 신경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수를 앞둔 우리들은 몇 개월 동안 각 참모부의 필수요원만 남기고 전체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호 속에 들어가서 경계근무를 서고 반은 컨테이너에 짐을 채우는 데 동원되었다. 하루 종일 짐을 싸다가 교대시간이 되어 호 속으로 들어가서 근무를 서면 그대로 총을 든 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차라리 전술중대에 있었다면 병력에 비해 짐이 적었기 때문에, 고생을 덜했을 텐데 철수 막판에 사단으로 와서 엄청나게 많은 사단의 짐을 꾸리느라고 고생만 죽도록 한 셈이다. 그러니까 내 처지는 마치 전쟁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사짐 싸러 온 샘이었다.
1973년 1월 27일 자정(현지시간 1월 28일 08시)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투에서는 후퇴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철수를 앞 둔 아군은 "조금있으면 철수다 대충버티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적군은 "미군이 철수한다. 조금만 더 밀어부치면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을 하게된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맹호사단에서는 19 번 도로 안케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 사단은 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 1973년 1 월 27일 밤 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 베트콩은 '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민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중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 1시간 5분을 남겨놓은 06시 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 "웃기는 놈들..."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 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B-30적탄통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 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이 개시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다시 명령이 내려졌다. 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작전을 승인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가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만 철수를 할 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 2 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사단 제29연대는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제 29연대는 2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C-130송기로 3.900명의 병력을 39회, 화물 3,080톤을 77회로 나트랑 공항으로의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로렉스 손목 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차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 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71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년 2월 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을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 정 하만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 5 톤 견인 트럭을 탔다. 나트랑으로 향하는 다리가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해서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 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 "야! 공포 쏴!"라고 해서 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하자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지 정 병장 일행뿐이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월남에서 철수할 때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월남 생활 내내 헬리콥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주야로 높은 사람들의 구두나 닦고, 아침이면 치약까지 짜서 바치며 입맛 없는 장교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팬티까지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던 딱까리(당번병) 들의 머릿속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만들어 갈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귀국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본국의 은행에 송금한 몇 백 달러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거나, 눈치껏 모은 일본제 전자제품 몇 점을 베니어로 짠 귀국 상자에 넣어서 배에 싣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철수 병력인 우리들은 더블빽만 짊어지고 돌아왔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산더미 같은 컨테이너에 짐을 다 꾸리고 우리는 드디어 정든 부대를 뒤로 하고 월남 정부가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부대를 떠났다. 월남에 왔다가 죽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흔한 중공제 '영웅' 만년필 하나 사지 않고 더블백만 달랑 들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나트랑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니까 4시간 만에 오산 비행장에 도착했다. 갈 때는 인도양을 건너는 데 배로 일주일이 걸리던 길이 불과 4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터로 갈 때는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생존경쟁이 치열한 한국으로 오는 것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