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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원의 박용규 교수님의 초대교회사 자료가 있어 게재한다.
초대교회사의 핵심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사도-속사도-변증가-이단-감독-삼위일체/기독론 논쟁-니케아회의, 칼케톤, 콘스티노플 회의
이로 보건데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하에 부흥과 역부흥의 흐름임을 알 수 있다.
초 대 교 회 사
박용규
서 론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2. 초대교회사 문제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1. Greco-Roaman 배경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2) 헬라적 배경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3) 스토아주의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4) 필로(Philo)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2) 마카비(the Maccabees)
(3) 회당과 산헤드린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3. 제국의 종교
4. 요약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1장 초대 기독교 박해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2) 네로 황제 박해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 갈레리우스 황제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제2장 속사도
1. 로마의 클레멘트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5. 요약
제3장 기독교 변증가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2. 아리스티데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4. 타티안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6. 요약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2.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2) 영지주의 자료
(3) 영지주의의 기원
(4) 영지주의의 종류
1) 이집트계
2) 시리안계
3) 폰틱계
4) 유대주의계
(5) 영지주의 평가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2) 마르시온 주의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3) 마르시온의 영향
4. 몬타니즘
(1) 배경
(2) 가르침
(3) 몬타니즘과 교회
(4) 영향 및 쇠퇴
5. 요약
제5장 교회의 응전
1. 신경의 발달
2. 정경의 형성
3. 감독제도의 발달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1. 이레니우스이 생애
2. 이레니우스의 작품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4. 이레니우와 전통
5. 요약 및 평가
제2장 라틴 신학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2) 터툴리안의 작품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4) 터툴리안의 세계관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3. 요 약
제3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1) 클레멘트의 작품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2. 오리겐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5) 오리겐의 신관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1장 삼위일체 논쟁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2. 단일신론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4. 니케아 회의 신조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6. 콘스탄티노플 회의
제2장 기독론 논쟁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1) 논쟁의 핵심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5. 기독론 논쟁 요약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1장 위대한 지도자들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제2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2) 신플라톤주의
(3) 어거스틴의 회심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2) 어거스틴의 교회관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5. 요약 및 평가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1. 최초의 수도승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4. 서방 수도원 발흥
5. 요 약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1. 로마교회의 부상
2. 세르디카 서방교회
3. 교황제도의 확립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제4장 결 론
서 론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 초대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주전 4년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내면적인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1세기를 사도시대라고 할 수 있다면, 제 2세기 전반은 속 사도시대, 제 2세기 중엽은 변증가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 3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확립기라고할 수 있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통신학이 교회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 4-5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깃점이다.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정통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세속화로 달려가는 전환점이기도 한다. 일련의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에 분열의 요인이 되어왔던 신학적인 논쟁들을 종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그리고 칼케돈 회의(451)가 열려 정통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초대교회사는 사도-속사도-변증가-소아시아 신학-라틴신학-알렉산드리아 신학-삼위일체 논쟁-기독론 논쟁-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맥을 이해하면서 역사적인 흐름과 초대교회 역사를 이어온 사상가들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박해와 이단들의 연구, 수도원 운동의 발흥, 감독제도의 발달,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운동은 초대교회사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이다.
2. 초대교회사 문제
초대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역사구성의 thesis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초대교회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이다. 1세기부터 진행된 기독교 박해, 2세기의 속사도, 변증가, 이단, 3세기의 소아시아, 알렉산드리아, 서방신학을 형성한 교부들, 4세기부터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이 문제들을 니케아회의(325)부터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 이르기까지 로고스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로마의 최대 종교 스토아주의는 점점 더 인격적인 종교로 탈바꿈했고 그 핵심에는 로고스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로고스에 대한 사상도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모두 로고스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 사상이 차지하는 그 이상으로 당대 헬라철학 특별히 플로톤주의에는 로고스 사상이 더욱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로고스 사상은 기독교가 잉태되었던 그 시대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중기 플라톤사상과 그 후에 나타난 신플라톤주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기독교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로고스의 성육신의 준비는 비단 그레코-로만 배경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유대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로고스의 오심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 때문에 당시 메시아 고대사상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성숙한 시대 속에서 로고스가 오셨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기독교 핵심주제는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 사상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기독교가 태동되었던 제 1세기의 최대 주제였다. 제자들은 물론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 그분이 인간의 구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또한 로고스는 변증가들에게도 최대의 주제였다. 로마의 클레켄의 서신에서,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에서, 폴리갑의 작품에서,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속 사도들의 작품과 사상에서도 로고스가 핵심에 있었다. 속 사도들의 로고스 사상이 점점 더 발전되어 하나의 틀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변증가들에 와서이다. 변증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로고스였다. 이 로고스 사상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던 것이다.
로고스 사상은 2세기 이단들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세기 역사무대에 등장한 일련의 이단들, 즉 영지주의, 발렌티누스, 마르시온이 갖고 있던 중심주제 역시 로고스였다. 기독교를 헬리철학의 틀 속에 뜯어 고친 나머지 기독교를 아예 헬라화시켜버린 영지주의자들의 한결같은 특징, 곧 영육의 이원론 사상은 플라톤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다. 이들은 일부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화 시켰던 변증가들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아예 전 헬라철학을 기독교화 하려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도전을 맞은 교회는 전통적인 사도들의 신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잘못된 신앙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재림을 담은 로마신경이 태동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되었다. 정경형성이 촉진되고 감독제도가 발달하고 신경이 발달되면서 2세기 말엽에 들어서 초대교회는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감독의 발달로 교구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교부라 불렀다. 최초의 교부는 이레니우스였다. 이레니우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구속사와 성서적인 전통 및 언약사상에 근거한 로고스 총괄갱신 사상이다. 인류의 구속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며, 로고스의 총괄갱신이 그 역사의 정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은 어거스틴의 역사관,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역사해석의 원형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콕세이우스를 비롯 많은 계약 신약자들의 계약신학도 이레니우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헬라철학의 로고스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로고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해하는 핵심열쇠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은 저스틴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필로에게까지 올라간다. 필로의 사상이 저스틴에게 와서 좀 더 성경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이 저스틴의 로고스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저스틴이 갖고 있던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속성이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사상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터툴리안이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개탄한 것에 반해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터툴리안 역시 당대의 흐름을 주도했던 로고스 사상을 피할 수 없었고, 라티의 법률 용어를 동원하여 로고스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터툴리안은 로고스의 성육신을 약화시키는 수많은 이단들 특별히 양태론자들에 맞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로고스를 변화시키는데 온 정열을 다했다.
이것은 또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초대교회사의 핵심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이신가? 라는 주제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인성과 신성이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아다나시우스가 수없는 추방을 받으면서도 일편단심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니케아 신앙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도, 교회가 이 둘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양편가운데 어느 한편에 위치시키기 위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도, 역시 로고스 때문이었다. 어쩌면 논쟁의 와중에서 고투해야 했던 4, 5, 6세기 교회회들에게 로고스는 생사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오류 많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결정들을 거룩한 방향으로 진행시켜 주셨던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출발했던 니케아 회의가 기독교 정통의 영원한 토대를 닦는 기회가, 시릴과 그 일행의 야심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이 에베소 정통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교회의 머리이신 살아계신 로고스께서 그 살아계심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역사에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역사에 개입하신 그 로고스는 이 시간도 여전히 인류 역사와 나 자신의 역사에도 개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갈 4:4).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라는 말로 당시의 역사적 성숙을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도 갈라디아서의 “때가 차매”라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외형적인 환경에서만 그 요인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당시의 로마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한다. 둘째, 언어적인 준비를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지만 헬라어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의사소통, 사상, 사고방식, 교육수준, 이해 방식의 통일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헬라 철학, 문학 그리고 종교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때가 차매”라는 바울의 말은 현대의 폴 틸리히가 지적하듯 내적인 시간과 외적인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건(event)과 행위(action), 그리고 외면적인 차원(the outer dimension)과 내면적인 차원(the inner dimension)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때가 찼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양적 시간 개념에서 말하는 크로노스(chronos)라는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시(the right time)를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오셨다는 사실이다.
1. Greco-Roaman 배경
초대 기독교의 헬라-로마배경에 대한 연구는 주전 330년부터 주후 33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헬라시대(the Hellenistic Age)로 알려졌으며 이 헬라 시대는 다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알렉산더부터 주전 약 200년까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지중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이다. 제 2기인 주전 200년 후부터는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 토착문화가 발흥하면서 헬라적인 요소들이 움츠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는 로마가 지중해를 완전 지배하면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이 시대를 로마시대(the Roman Age)라고 부른다. 이시기의 제1기는 주후 2세기까지를 말하며 2세기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를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영향을 2세기에 최고 정점에 달하다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로마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이미 로마는 약 7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서부 이탈리아 출발한 로마는 읍, 도시 그리고 작은 국가로 점차 성장했다. 주전 256년 로마가 설립된 지 50년 후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뻗어나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카르타고(Carthage)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주전 27년까지 모든 로마 영토는 공화국이라 알려진 통치형태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매우 강력했던 로마시 의회는 어떤 한 개인이 통치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주전 27년에, 즉 약 100년 동안 지속된 비참한 내란(civil war) 후에 로마의 전권은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의 수중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첫 번째이며 가장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이 아우그스투스 시저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 기록된 시이저 이다. 그와 함께 공화국도 끝이 나고 제국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Pax Romana)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2) 헬라적 배경
로마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는 헬라 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가 발흥했던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 (2) 소크라테스(399 B. C) (3) 플라톤(d. 347B. C) 과 아리스토텔레스, 제 1기의 관심은 세계의 본질이었고 제 2기의 관심은 인간, 그리고 제 3기의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기는 스토아주의(Stoics), 에피큐리안주의(Epicurians), 신피타고리안주의(Neo-Pythagoreans), 회의주의(Skeptics)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Middle-Platonists)를 포함한다.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것은 바로 후기 이다.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까지의 헬라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일련의 고대 헬라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과 구별하기도 한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에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맨더(Anaximander)는 물이 아니라 무한 대기(the boundless atmosphere)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주전 500년경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 의하면 우주의 근본 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했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나왔다. 그후 땅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래서 끝없는 변화의 회전(the endless cycle of change)이 계속된다. 이들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합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헤라클리이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헤라클리투스와는 정 반대로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 가지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주전 450년 전 아테네(Athens)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 관심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세상의 본질보다도 인간의 자질(quality)에 더 많은 과심을 기울였다.
헬라-로마시대, 특별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오늘날과 같이 이론적 연구나 형이상학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탁월한 두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 B.C.429-347)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이다. 소크라테스의 인간사고 혁명이 영향력 있는 일련의 다듬어진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이들에 와서이다.
이들은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 이해를 하나로 연합시켰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the world of the ideas)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제(ousia)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적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피라밋의 정상에는 성서적 신개념과 근접한 선의 이데아가 있다.
인간의 이성에 상당한 의를 부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므로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인 삶이다. 사람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순수 이성이란 생각하고 이해하며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실천 이성이란 행동에 적용된 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다.
관념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벽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모형에서 출발하여 개체로 진행해 나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개체와 보편의 불가분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대한 공헌 가군데 하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로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개체와 보편,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감각적 경험(sense experience)에 의존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지성에 의해 인간은 보편을 배우며, 이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안간 사고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으며 그 영향은 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 학파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어 왔으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실천적 도덕으로 돌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에 복고되어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과 함께 수천년 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주전 1세기에 플라톤의 연구가 복고되어 육체와 영혼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적 사상이 다시 등장하면서 교부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플루다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Maximus of Tyre) 그리고 알비누스(Albinus)이며, 이 중기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기 플라톤주의는 2세기 기독교 변증가들 즉 저스틴 마터,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술활동에 지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퍼거슨은 히비스서에서 조차 플라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름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인식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는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고 세상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는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는 영혼 불사개념으로 기독교와 가르침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신개념의 정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는데 신은 물질이 없는 하나의 형상으로 그 자체와 완전한 존재이다. 비물질적인 실체(non-material reality)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강조는 성서적 신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반영하는 후대 일부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말한바 이데아의 개념과 성경의 로고스 개념을 연결하여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우주적 종교사상(the idea of a cosmic religion)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기독교와 철학과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단인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Arianism)는 3세기 전후에 복음의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이 두 개의 이단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인간과 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3) 스토아주의
스토아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함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에 가장 성행하던 철학체계로, 폴 틸리이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고스 교리이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역사를 연구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을 말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이 말이 세 가지 면은 내포한다. 첫째 로고스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the moral law)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theoretical reason)이라 불렀다.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스토이즘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 스토아(the Early Stoa), 중기 스토아(the Middle Stoa) 그리고 후기 스토아(the Later Stoa)등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주전 300-200년 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노(Zeno of Citium ; 335-263 B. C), 크린테스, 크리시푸스,등이다.
중기는 150 B. C.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나에티우스(Panaetius of Rhodes; 185-109 B. C)와 포시도니우스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잘 알려진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 D. 1-65), 로마의 에펙터투스(Epictetus; A. D 50-135)그리고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 D. 121-180)를 들 수 있다.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초기 스토아는 첫째로 유물론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세계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물질적이다. 둘째로 스토아주의는 범신론이다. 스토아 철학은 만물에서 신적 실체를 발견하는 범신론에 기초한다. 셋째로 그들은 또한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자(monist)이다. 일원론적 사고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보았던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스토아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용어상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갖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내재적인 신일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스토아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 개념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간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에 스토아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필로(Philo)
디아스포라 유대인 알렉산드리의 필로는 스토아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이상적으로 융합시킨 초기 기독교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주전 20년에 태어나 주후 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어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사상이 광범위하여 성경에 대해 탁월하고 고결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필로는 거룩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였다."
헬라인들이 구약에서 그들의 중심사상을 얻었다고 확신한 필로는 구약과 헬라철학을 연합된 가르침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의 부조화였다. 헬라철학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mediator)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였다.
요약하면 첫째, 필로는 고대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둘째, 필로는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상당부분은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 셋째, 필로는 헬라의 신관, 특별히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다.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약 1,000년 전에 이새의 아들 다윗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주전 960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주전 930년경 죽은 후에 다윗은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솔로몬 왕국 후 다윗의 왕국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북부는 주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된 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다윗의 왕가에 충실히 남아있던 남쪽왕국 유다는 58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539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첫 귀환 후 또 다른 그룹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가 에스라였다.
주전 334년과 323년 사이에 젊은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더가 그리스에서 잊도에 이르는 모든 동부땅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군이 광활한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프톨레미(Ptolemy)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팔레스틴은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의 통치권에 있었으나, 198년부터 다른 왕가인 셀류시드(Seleucids) 가문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의 통치 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해하였다.
(2) 마카비(the Maccabees)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새 통치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 정책을 대표한 지도자는 시리아의 셀류시드왕 (the Seleucid King of Syria) 안디옥 4세였다. 이러한 셀류시드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나이 많은 제사장 미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네 아들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유다(Judas)가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는 마키비 즉 맹렬히 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전 141년에 유대인은 셀류시드를 몰아내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 주전 586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80년 동안만 그들의 자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일어난 내란은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음 60년 동안 이스라엘은 반(半) 독립국가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으며 아스라엘의 통치자는 로마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전 37년 헤롯이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 졌다. 주후 6년에 아켈라우스가 실수하자 그는 해직되고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이 로마의 영이 되었고 로마의 총독이 지배했다.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의 총독은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라 이름하는 로마인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주전 586년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 그들의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후에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의 목적으로 회당을 강조했다.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는 관할장을 회당의 통치자라 불렀다.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지도아래 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로마 통치아래 있었지만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했다.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 이후부터 유대지도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그들은 구습을 선호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헬라 사상을 유대 생활에 도입하려고 할 때는 지지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이들은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는 함께 사멸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내세가 없다.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사두개인들과 정 반대였다. 부활 내세의 삶과 상벌사상도 믿었다. 그들이 주로 집착한 것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였으며 따라서 율법준수 이면의 영적 태도는 둔감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대립되었다.
사두개인은 잘못된 교리를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다소 오래 존속했지만 그들은 또한 유대정부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전쟁포로의 분산 그리고 특별히 상업적으로 유대인은 팔레스틴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산된 유대인과 회당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 모두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자연적 요새를 팔레스틴 밖에 건설한 셈이다.
분산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전 250년에 거기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70연역(the Septuagint)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최대의 철학자 필로가 배출되었다.
3. 제국의 종교
로마제국의 종교는 크게 자연종고, 신비종교, 국가종교 등 세 종류로 나뉜다.
자연종교는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또는 어떤 동물과 사람에게서 찾는다.
신비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확산될 때 제국에서 강했던 종교이다. 잠시 동안 밀교의 한 형태인 미트라이즘(Mithraism)이 기독교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것은 특별히 로마군대에 인기가 있었다.
국가종교는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을 지녔다. 주된 요소는 황제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국가종교는 신과의 교제,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요약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말한바 “때가 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교통, 언어, 종교적, 사회 및 도덕적 요소,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기간동안 평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종교가 발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 1 장 초대 기독교 박해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지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 할 수 있겠는가?”
폴리갑
고대 아태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인된 종교 외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 D. 64-96),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 D. 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A. D. 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황제 이전에는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고 역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황제 이후 박해에 대한 진행은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심지어 4000명 유대 청년들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사르디아로 보내졌다.
(2) 네로 황제 박해
글라우리오 황제가의 문란한 결혼생활로 인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나의 아들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네로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2년 자신의 고문 부루스를, 65년에 세네카를 각각 권좌에서 제거하면서 국가는 쇠퇴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접점 악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유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광기”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네로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하나 로마의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 화재의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대박해였으며 역사에 1차 박해기간의 시작으로 알려졌다. 고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주후 64년 7월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화재의 원인을 돌려버렸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하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 로마 대화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로 황제의 개인적인 횡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말해준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반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네로 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하나님께서 네로의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실 수 없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박해자들이 거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줄리어스 시저에게서 시작된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68년에 막을 내리고 1년 동안 과도기의 내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초대교회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에 의한 대 박해가 그의 통치 15년에 있었다. 도미티안은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터툴리안은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라고 말한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제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은 전혀 신자들에게 불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안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도미티안이 사망하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역시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적어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황제 치하에서 황제의 임의에 의한 박해가 진행된 뒤,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국 전역에 그와 같은 박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기간 동안 박해는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트라얀(Trajan; A.D. 98-117)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황제의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폴리니 2세(Pliny the Younger, A.D. 61-113)와 트라얀 황제 사이에 오갔던 서신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임으로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트라얀 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국경선과 본토의 안정을 추구했던 하드리안(Hadrian; A. D. 117-138) 황제는 헬라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125년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Caius Minnucius Fundan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도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0-180) 황제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 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함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은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250년 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카르타고(Carthage)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잇는 모든 교회 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끝가지 지켰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세베루스 이후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알렉산더 황제를 승계한 막시미누스 황제이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멜브로즈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Protoctetus)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3세기 첫 50년 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박해가 진행되는 기단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1차 박해와 달리 2차 박해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으며,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서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칙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위 3차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근거하여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주어졌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a state within the state)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들 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Decius)황제 아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데시우스 명령 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 조직적이고 극심했던 데시우스의 박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시우스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렇듯이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 후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안 황제(253-260)가 태도를 바꾸어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시작하였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필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우스 황제 통치 때 키프리안(Cyprian)도 카르타고에서 순교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안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그렇게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단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이 베풀어 졌다. 그 후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내린 칙령에 의하여 43년간 합법적인 종교(a religio licita)로 인정받았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03년 디오클리테안(Diocletian)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이 역시 처음에는 우호적이어서 기독교가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추측이지만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여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레(Cy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303년 2월 23일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디어클리티안의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워버리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디오클리티안의 박해는 제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박해였다. 303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면서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핍박를 더 강화시켰다.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인 313년 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를 시작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해 10년 되는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이유는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효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책령을 발표하고 5일 후 고통에서 해당되어 일생을 마쳤다.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e)은 A. D. 28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막센티우스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관 24세에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화는 서방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포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관용의 칙령”으로 특정되는 밀란의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식 선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경비까지도 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재정을 넘어 교리적 문제 까지도 확대되었다.
313년 밀란의 칙령이후 한 차례의 고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이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 이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로마에서 가장 우대를 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 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 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자연이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예배는 형식 위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만큼 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일련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종교회의가 동서방교회의 분리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원하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오히려 수도를 이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촉진시켰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제2장 속사도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 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인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노라”
이그나티우스
속사도들은 열두 제지 이후로는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 라고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도와 2세기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The Letterof the Church of Rome to the Church of Corinth)은 제1세기 말엽 로마의 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의 특징은 첫째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헬라적 요소와 스토아적 요소이다. 하지만 클레멘트를 무분별하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융합시키려 한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클레멘트의 사상에 헬라주의적 요소가 나타나지만 그의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신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고등 성경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클레멘트에 있어서 칭의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다. 32장 4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클레멘트에게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때때로 순종을 믿음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레멘트는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강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할 사랑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와 동 시대인인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안디옥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운 것은 이 안디옥에서였다. 또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안디옥 출신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A.D. 98-117)의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였다. 이 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송되어 가는 도중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던 이그나티우스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도상에 있던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는 가현설자들의 그리스도관에 맞서 싸웠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데 있어서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 됨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제창한 감독의 중추적 역할은 베드로를 잇는다는 “사도적 계승”의 토대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신비적 신학에 입각한 이론이었다. 그는 하늘나라의 지상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교회직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만찬 해석에도 나탄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하나됨이 진실 된 성만찬에 있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작품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관심은 분열을 약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하는데 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그나티우스는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생에 대해 심지어 야수(wild beasts)또는 미친개(mad dog), 혹은 허울 좋은 이리들이라고 혹평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가현설이다. 그가 이 두 이단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들이 성육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사람, 서머나 감독 폴리갑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폴리갑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 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온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과 속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 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아 보존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는 폴리갑에게 상당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폴리갑은 아우렐루우스 때인 165년 경에 아시아에 큰 박해가 발생했을 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교회사적으로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폴리갑은 로마에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둘째는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성서적 칭의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무엇보다도 폴리갑이 실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앞에서 언급한 속사도 외에 무게 있는 문헌들로는 바나바 서신과 디다케를 들 수 있다.
바나바 서신은 교리적 부분(1-17)과 실천적인 부분(18-21)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고 실천적인 부분은 두길문서가 핵심부분이다.
속사도 문헌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헐마스의 목자이다. 헐마스의 목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Philotheos Byrennios)가 발견한 디다케(The Didache)는 3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차이이다. 둘째는 세례 예식에 과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훈련지침이다.
5. 요약
속사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폴리갑, 요한, 이그나티우스, 파피아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속사도의 작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인물과 기록장소, 그리고 문장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순교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다. 둘째,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통의 형성이다. 속사도에 오면서 정통주의는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통성의 표준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성경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속 사도들의 작품들은 비평을 요한다.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비판은 속사도들의 작품 속에 성격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비판적 요소는 세례 후에 짓는 용서문제이다.
제 3 장 기독교 변증가
“로고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었을 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2세기 들어서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할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가리켜 변증가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130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변증가들은 속사도들과 당대의 정통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은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소위 “공개적인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변증가로서 약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2. 아리스티데스
변증가 아리스티데스는 로마의 황제 피우스(138-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 증언에 의하면,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에게도 신앙의 변론을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변증서에서 그는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아리스테스가 결론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전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윤리적 삶, 그리고 신행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2, 3세기의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 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사용한 학식 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무수한 저스틴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저술로는 <제1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장문의 <제1변증서(Tirst Apology>)에서 저스틴은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가 어떤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160년경에 기록된 <트리포와의 대화>는 바르쿠스 폼페이우스라는 어떤 인물에게 헌사된 책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저스티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 무렵 저스틴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 철학자인 크레센스의 교활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저스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변증가였다. 그러나 저스틴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가 항상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스틴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프렌드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스틴은 연속성이 없는 인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저스틴이 어떤 신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나드에 따르면 저스틴은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의 사상가였다.”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어느 변증가보다 우수하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비판에 맞서 기독교야 말로 진정으로 지성적이라는 종교라 변호하고 있다. 저스틴의 헬라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연속성 추구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헬라화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저스틴이 영지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은 앗시리아 출신으로 저스틴이 순교한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관을 설립하였다.
타티안의 <헬라인들에게 고함>은 타티안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냉소적인 타티안은 희랍인들의 종교적인 자긍에 일침을 가하면서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희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안이 저스티의 뒤를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눈에 비친 타티안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로마를 떠나 이단 엔크라티테스를 세워서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한 훌륭한 변증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 로고스가 존재했으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로고스가 성부와 일체인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 이해는 속사도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체계화 되고 발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 구체저인 삼위칠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안디옥 감독 데오필루스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3권의 책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럼 사용했으며 상당히 발전된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변증가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은 저자와 연대로 미상이다. 문장의 스타일이 다른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변증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유대적 예언과 헬라 철학을 모두 경시하는 점이다. 이 서한의 대부분은 사회내의 기독교인이 감당한 특이한 역할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변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디오그네투스에 나타난 사상은 신적인 출발이 역사에 결정적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디오그네투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구분되는 분명한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저자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본질적인 다른 미신숭배자들이라고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사르디스의 멜리토는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건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들이라고 본다.
6. 요약
속사도들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학의 통일성이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변증가들의 신학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헬라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 사이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본 저스틴적 사고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런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연계성은 로고스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로고스 이론은 플라톤의 창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는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의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는다.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
막시밀리아Maximila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우리는 이단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현재까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계속 번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도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요한은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표준 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어거스틴은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과한 잘못된 신앙, 그리고 저스틴은 “사탄의 교리”라고 정의 하였다.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툴리안은 “이단들이 철학에 의하여 고취되고 있다(Heresies are instigated by philosophy)고 봄으로써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시켰다.
이단의 역사는 사도시대부터 시작된다. 2세기 정통신학의 대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헤게시푸스에 따르면 당시 유대백성들 가운데 여러 이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시므온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클레오비우스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도시테우스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마세보테우스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그리고 역시 시므온에서 생겨난 메난드리안파, 바시리디안파, 마르시온파, 카로포크라티아파, 발렌티아파, 사투르실리아파 등이 있다.
이처럼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신앙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2.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운동이다.
영지주의가 2세기 동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헬라 지식인들의 관심이 점증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구세주에 관한 문제,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문제 등은 그들이 해명하고자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신약성경에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반영하는 성경 귀절들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골로새서 2장 22-23절,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가 바로 그것이다.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켈리(J.N.D. Kelly)가 지산의 「초대기독교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지주의는 유대교, 헬라철학 및 동양철학의 혼합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특별히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 주의 사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나님, 인간, 죄인, 그리고 구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의 신념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영지(gnosis; knowledge)인데 이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영육의 분리에 근거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의 삶은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흘렀다. 만일 구원이 물질로 부터의 영혼 해방이라면 윤리적 이상은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교부들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야 texts)은 주후 4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재조명해 준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이 사마리아 출신이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에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4) 영지주의의 종류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크게 이집트계, 시리아계, 폰틱계 그리고 유대주의계로 대별할 수 있다.
1) 이집트계
이집트계의 대표적인 사람은 120년에서 130년 경에 로마에서 활약을 하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유세비우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 가지 상이한 이단지도자들, 즉 안디옥 사람 새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이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후계자 메산더에게서 나온 모리가 둘이고 혀가 둘인 뱀같은 세력”이다. 세투르니누스는 시리아에, 그리고 바실리데스는 이집트에 불경한 이단학파를 세웠다.
이집트계에 속하는 영지주의자들로는 바실리데스 외에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같은 “영지주의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계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는 135-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티누스는 피우스 황제 시대에 장년기에 들어서 있었고 아니세투스(Anicetus)시대까지 살았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인물인 발렌티누스(104-165)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플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을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바실리데스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2) 시리안계
120년경에 활동하던 안디옥 출신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 자들이다.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자유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폰틱계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시온이다. 세르돈의 지위를 계승한 폰투스의 마르시온이 세르돈의 가르침을 확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까지 행하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a worker of evils)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반면에 세상을 만든 하나님 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남긴 말시온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둘째,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이 땅에서 취한 육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시켰다.
4) 유대주의계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키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만 사용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 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키린투스(Cerinthus)는 좀 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축제와 희생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유형을 요약한다면, 현대 이단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이단들도 역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창출은 기성교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주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리를 발전 개혁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항상 새로운 교리를 고안한다. 이런 교리적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5) 영지주의 평가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일부 불안정한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특정의 요소를 빌어가지고 이를 자신들의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변형시켰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계시관, 신론과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도 부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 영육의 구원인데 반하여 이들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며 구원의 개념도 영혼의 복귀 또는 영혼의 육체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는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주후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애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애온인 세계-생명(world-life)과 인간-교회(man-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되어 애온들은 총 30이 되었다. 인간-교회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애온은 지혜라는 여자 애온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알기 원했지만 알 길이 없자 그녀의 슬픔은 결국 남자 없이 “불확실함”을 의미하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고 이 때문에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혜는 더욱 슬퍼했고 애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 줄 것을 청했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애온들을 낳았다. 그들의 행위가 플레로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의 애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애온을 낳아(put forth)예수라 이름 했다.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누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과 헬라의 세계관을 연합시켰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a.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b.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무 inferior deity)의 작품이다. c. 물질계는 악하다. d.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이점은 Docetism의 가르침과 비슷). e.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f. 부활이 없다.
(2) 마르시온 주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혼합시킨 종교적 잡록집(Potpourri)인 데 반해 마르시온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아울러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했다.
마르시온이란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에서 감도의 아들로 태어나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왔다. 로마에서 그는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마르시온도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알려진 분이고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의로운 분이고 후자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마르시온은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시온이 영지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마르시온은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기록된 하나님은 세르돈이 말하는 열등한 하나님(the inferior God)이다. 반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the good unknown father)를 계시하신 분이다. 때문에 마르시온은 구약보다 신약을 선호했지만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하나님의 구별이 말시온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자연히 그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구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반면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마르시온의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마르시온은 육체 부활의 사상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3) 마르시온의 영향
마르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영육의 분리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르시온 이단을 그의 섭리 역사를 위하여 선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첫째가 정경의 형성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발달이다. 또한 말시온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론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창조주-구속주 하나님(the Creator-Redeemer God)이시다.
마르시온의 영향력은 2세기경에 절정에 달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천지창조부인,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구분, 가현설적 기독론,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부인, 영혼만의 구원, 물질계와 영계의 구분 등 이원론적 사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방에서 마르시온의 영향은 그들이 마니교와 연계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글이 영지주의를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집단은 그 후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7세기까지 역사 속에 존재하였다.
4. 몬타니즘
몬타니즘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점에서 몬타니즘은 마르시온과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1) 배경
몬타니즘은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2) 가르침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Paraclete)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신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다. 또한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세 예언자와 뚜렷하게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감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공식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영향 및 쇠퇴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와 같이 몬타니즘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령께서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또한 몬타니즘의 등장으로 교회의 권위의 형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부차적으로는 교회에 평신도 운동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몬타니즘의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주었다. 몬타니즘의 출현으로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가를 보여준 역사적 건이다.
5. 요약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이후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 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니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제 5 장 교회의 응전
“그러므로 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진실로 마르시온이여, 무슨 권한으로 너는 나의 나무를 찍는가? 발렌티누스여,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나의 시냇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가? 아렐레스여, 너는 무슨 권세로 나이 경계표를 옮기는가? 이 남은 자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너희 마음대로 갈고 뿌리고 있느냐? 이것은 나의 소유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보다 먼저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이 재산의 본래의 소유자들로부터 받은바 틀림없는 양도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다.”
터툴리안Tertullian
1. 신경의 발달
신경(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하는 란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했다. 신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남겨주었고 이 신앙 고백은 하나의 틀을 이루어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외에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 같은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는 당대의 신앙고백의 일반적인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가현설(Docetism)을 염두에 둔 듯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이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이후 좀더 모양을 갖춘 신앙고배이 변증가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저스틴 마터의 작품에 나타난다. 1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조물주이신 한 분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구원을 알리시고 선한 스승이라고 앞서 선포되신 하나님의 종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신앙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보다 좀 더 발전된 고백형태가 서머나의 장로들의 것이라 알려진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약 200년 혹은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907년에 발견된 발리제트 파피루스(Der Balyzeth Papyrus)라는 한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있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옵나이다.”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바울의 신앙고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이 교부들에 와서 더욱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가지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신앙고백과 내용이 같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해석적인 신앙율(Rules of Faith)이 약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신앙율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앙율은 먼저 교리적인 표준(a Standard of Faith)으로 사용되었고, 세례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성경해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신앙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이레니우스(190)와 터툴리안(Tertullian, 200)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전체적으로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 고백서로 성부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의 내용은 터툴리안이 제시한 신앙율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이 빌립보서 2장의 내용과 유사한 반면 터툴리안의 신앙율의처음 부분은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다.
초대교외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역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로마신경의 초기형식이 히폴리투스 신경(the Interrogatory Creed of Hippolytus's Apostololic Tradition. 215),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쥴리우스 1세(340)에게 제출한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에 대한 루피누스(Rufinus)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존되어 있다. 전형적인 로마 신경은 로마교회가 주후 200년경 세례 문답시 행한 신경이다.
히폴리투스의신경도 성부, 성자, 성령, 공회,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신앙고백을 따라 문답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와 상당히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태가 3세기 초엽에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으로 널리 통용되다가 4세기 중엽에 문답식의 형식을 떠나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도신경과 매우 근접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340년에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줄리우스 1세에게 보낸 신경이다. 이 신조가 이전의 신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마지막에 죄의 용서와 영생이 추가되었고 좀 더 함축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도신경은 약 5세기경에 등장했다. 사도신경의 텍스트 리셉투스(the Textus Receptus) 즉 원형은 프리미니우스(Priminius)의 De singulis libeis canonicis scarapsus 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약 710년과 724년 사이에 등장한 사도신경은 로마교회 신조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드디어 로마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이단의 발흥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생성된 신조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2. 정경의 형성
신경 외에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것이 정경의 형성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신약성경이 목차는 무라토이안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으로 알려진 고대 문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00년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정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은 각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하는 것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신약대로 완전한 정경이 설정된 것은 AD 367년 아다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두 번의 힙포 공의회(Councils of Hippo)가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393)에서 그리고 카르타고 공의회가 어거스틴(Augustine)의 지도 아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 397)에서 열려 현재와 같은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동방과 서방교회는 그들의 선례를 따라다.
정경이 완성되기 까지는 거의 300년이 필요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의 출현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나 종교회의(Synods)의 공식적 선언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공식선언은 이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했을 뿐이다. 신약 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교회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이런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 D. 96)는 96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uteros)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클레멘트가 감독들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동시에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전달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다. 두 가지 사상 즉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70년 후에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감독의 권위를 한층 체계화 시켰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감독들이 똑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교구의 감독은 우월한 권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며 그들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로마교회는 사도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 있는 교구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구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여러 감독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로마이 감독이 첫 번째 서열에 있었다.
감독의 권위가 2세기 동안에 대단히 성장했지만 권위에 대한 이해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예를 들면 고린도, 빌립보, 에베로,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그가 성육신 하셔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오랜 족보 안에 총괄갱신(recapitulate) 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은 것이다.”
Irenaeus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초석을 형성하였고,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면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신학의 초석이 되었다.
1. 이레니우스이 생애
가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또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리우는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중요성 때문에 기독교회사에서의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레니우스는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계획을 역사신학 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며,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목회적 소질을 타고난 이레니우스는 고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이단으로부터 양들을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레니우스는 변방에 있는 켈트족의 복음화와 리용의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이레니우스는 리용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던 202년에 순교하였다.
2. 이레니우스의 작품
이레니우스는 수많은 저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과 <사도적 설교의 논증>이다. 전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술된 작품으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으로 알려졌다.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름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영지주의의 해설; 2-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 - 선지서, 주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이 책에서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인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플톨레매우스(ptolemaeus)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우는 단편작품 <사도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한다.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바로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 이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현된다. 이런 사랑은 섭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섭리는 4단계의 언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언약은 아담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이고, 두 번째 언약은 노아의 언약으로 홍수 이후부터 출애굽까지 이며, 세 번째 언약은 모세의 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이고 마지막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종말까지 이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점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며 바로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구속의 정점이다.
총괄갱신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측면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런 사탄에 대한 투쟁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단계로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현현되어 총괄갱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으며, 그리그도의 부활의 통해 사탄의 비장의 무기였던 사망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하며 그 때가 오면 만물은 그에게 귀속될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총광갱신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케 이루기까지 성장시켜 줄 가능성을 회복시켜 주셨어도, 이 가능성은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갱신 사역을 진행시키시고,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 자시에게 연합시켜 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실체는 물질적인 요소를 평가 절하시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가 확신하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밀 전통과도 사도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것이며 그들은 총괄갱신의 구속사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단들은 교회의 위협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장애물인데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4. 이레니우와 전통
이레니우스는 사도적인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교회에 보존되어 왔으며, 따라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온 세계에 분명하게 된 사도들의 전통을 어느 교회에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호소는 정경형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레니우스는 4복음서를 의심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4복음서가 이레니우스 시대에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을 언급해보면, 이레니우스가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통시적인 역사 이해는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서 출발한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교부로서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요약하고 3세기와 4세기 교부들로 잇는 교차로에 서있다는 점에서 역사 신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니우스가 이전 사상들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레니우스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매력을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제 2 장 라틴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혹은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치워버려라”
Tertullian
라틴신학은 로마에서 보다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태동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후 180년에 그곳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교회는 주로 로마인들이나 그들과 상업적인 거래를 했던 퓨닉계인들 가운데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두드러지게 도회적이고, 도덕적이고 라틴적이었다. 북아프리카는 터툴리안(212), 키프리안(258년) 그리고 어거스틴(430) 등 3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현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터툴리안 (150-212.)을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서방신학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하다. 그의 작품은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교부들에 의하여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 교회에서 무게있게 취급되어왔다.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약 20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은 터툴리안은 점차 몬타니즘으로 기울다가 207년 경에는 몬타니즘에 합류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공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해 나갔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 하게 된 일반적인 견해는 첫째는 제랄드 브레이(Gerald L. Bray)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몬타니즘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태도와 일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2) 터툴리안의 작품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의 범주는 변증론(Apology)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툴리안은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일련의 변증서를 저술한 터툴리안은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 이설과 이단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직접 이단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들을 반박하는 것에 비해 터툴리안은 법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만이 전통을 소유할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가진다.
변증서나 반박 외에 터툴리안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의 작품 부류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의 성격상 목회적 작품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작품들, 그리고 이교철학을 논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철학 거부 태도는 신앙과 이성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인간이 믿는 것인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믿음에 과한 지식은 이성에 관한 지식과는 다르다. 전자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성적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대의 철학이 이단들과 연계성이 있음을 발견한 터툴리안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터툴리안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살던 당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철학적 용어에 빠져들지 않았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그의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세계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사회가 기뻐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며, 이방인이 행복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고, 저들이 슬퍼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상의 쾌락을 멸시하며 세상의 활동을 비웃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없는 쾌락이라는 논리다. 이와 같은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어느 정도는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의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아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터툴리안은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양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신앙의 규범(“regula fidei")또는 신앙율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은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봉직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처음에 감독의 직위수락을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직무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여 오랫동안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이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키프리안은 3차 박해로 역사에 알려진 데시우스의 전국적인 박해기간에 8년 안 카르타고 감독을 지냈다. 그가 감독이 된지 불과 2년 만에 데시우의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박해였다. 로마 제국 내에 모든 국민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 전투에서 살해되고 251년 박해가 종결되자 박해 기간에 숨어 있던 키프리안이 카르타고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박해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에 재 입교 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키프리안은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순교자들과 핍박 중에도 절개를 지킨 고백주의자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에서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인 교회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을 확대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화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하나됨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곧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교회일치를 강조하며 분열을 막으려는 키프리안의 정책이 북아프리카 감독들과 로마 감독의 지지를 받았다. 노바투스가 “허황된 사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Cathari)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자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종교회의에서는 키프리안의 입장을 따라 이방신들에게 실제로 제사를 지낸 자들은 죽을 때에 공교회에 재 입교 시킨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노바투스,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한다.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그들을 치유하여 주어야 한다.
교회 일치와 정치적인 일치를 추구했던 콘스탄틴이 즉위하여 326년에 칙령이 발표되면서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는 노바티안의 감독 아케시우스(Acesius)가 참석하였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로마에서는 감독이 그러한 사람(노바티안 교회에서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에 들어오기 원했다.)에게 안수하는 절차를 밟은 후 그들을 교회로 입교시켰다. 반면 북 아프리카의 꽤 많은 교회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의 감독 스데반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키프리안은 칼타고 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러자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감독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일지라도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하고 세례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안수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와 로마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범 교회적 논쟁점으로 일찍이 몬타누스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세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각 지역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로마나 팔레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한 것에 반해 라틴 아프리카, 안디옥, 갑바도기아, 길리기아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어 왔다.
3. 요 약
비록 키프리안이 교회의 영적 측면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집약한다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 또 다시 발레리우스 황제시에 박해가 발생했을 때 키프리안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 얼마 후에 키프리안은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키프리안의 견대들은 순교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위광에 힘입어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힘포의 어거스틴과 그의 도나투스파(Donatist) 대적들이 서로 키프리안을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제 3 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알렉산더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카르타고가 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카르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카르타고는 로마 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주전 250년경에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로 역사에 널이 알려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는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까지 활동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Pantaenus)는 저스틴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팬태누스를 만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성경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180년경으로 추측된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강요(Institutions)에서 판태투스를 스승이라고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판태누스가 죽자 클레멘트가 그를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교육받은 헬라 지식층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1) 클레멘트의 작품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스트로 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라고 불리우는 8권으로 된 책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클레멘트의 저서는 <교사(Paedagogus)>라는 제목이 붙은 8권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헬라인에의 권고(Protrepticus: The Exhortation th the Greek)>, <회심에의 권고(An Exhortation to Conversion)>,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교회법(Ecclesiastical Canon)> 등이 있다.
이들 클레멘트의 작품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특별히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3개의 작품으로 클레멘트의 진리 인식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들은 <회심에의 권고(Exhortation to Conversion)>, <교사(Tutor)>, 그리고 미완성 작품 <잡문집>(Miscellanies)등이 있다. 그의 첫 작품인 회심에의 권고는 기독교 변증학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어떻게 로고스가 처음 우리를 회심시켰는가를 성명한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로고스가 우리를 교회시키는가를 다룬다.
세 번째 작품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true gnosis)에 이르게 하는 가를 설명한다.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담대하게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들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클레멘트는 “철학도 진리 참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였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인 것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시작은 기독교인의 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클레멘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신앙이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신앙의 관계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이성이 떨어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믿음의 시발자로서 이성은 믿음보다 우선된다는 것이다.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그리고 역사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즉, 진보된 의미로 이해했다.
클레멘트의 신관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은 속성이 없으시고 분질의 범주를 넘어서 계시며, 하나님은 정의내릴 수 없는 분이므로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단순히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하기 보다는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한다.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클레멘트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해석은 의의가 있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의 역사의 정점이며 헬라와 유대 역사를 한 점에 모으는 전환점이다.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결론적으로,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현대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고, 초대교회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로고스론이다.
이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또한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헬라적인 특징과 성경적인 특징이 분명한 구분없이 한데 어울려 마치 현대판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사고 속에서는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진리를 축으로 하여 헬라 철학을 끌어들여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의 기독교 사상의 방법론은 오리겐의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2. 오리겐
3세기 초반 기독교계에서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과 이단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후 185년경에 탄생하여 254년에 세상을 떠난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였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은 명실공히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60평생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였으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였으며 교회 내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일하였다. 존경을 받았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과 사상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클레멘트의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초속이 되었다면 오리겐의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심하게 박해할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했다. 당시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의 영혼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곧 오리겐은 “모든 신자들에게서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오리겐은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고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친구들마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오리겐의 금욕주의적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재배했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는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 오리겐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리겐의 금욕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의 명성을 더해 주었다.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오리겐의 명성이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오리겐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의 동시대 인물이며 오리겐의 비평가였던 포르피리(Porphyry)는 오리겐이 헬라철학과 야만인(유대인)들의 말을 혼합시켜 놓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불만의 요지는 헬라인인 오리겐이 헬라문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이 야만인들의 건방진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학문의 업적을 야만인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리겐에 대한 비평은 객관성을 상실한 듯하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하듯 오리겐이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무질서하게 혼합시킨 것은 아니었다.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오리겐의 연구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오리겐은 그의 생애에 무려 6000여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량의 책을 저술했다.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제 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us)는 오리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서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잘 훈련된 신학적 머리와 헬라풍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의 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있다. 제1권에서는 삼위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에서는 물질적 세계, 인간과 인간의 영혼을, 제 3권에는 자유의지, 악마와의 투쟁, 선의 궁극적 승리를, 그리고 제 4권에서는 성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하나의 연관성 있는 교리 체계를 구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기초적 원리로 삼을 원리들을 제1원리에서 이렇게 집약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시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참으로 고난당하셨고, 참으로 죽으셨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 하늘로 올리우셨다. 성령께서는 그 존영과 권세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어 있으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악한 세력들은 죄악으로 영혼을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려고 힘쓰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은 그와 같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겐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 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볼 때 구약성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오리겐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이다. 셀수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를 비평하였다. 1)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2) 이적은 참으로 기적이 아니라 단지 마술일 뿐이다. 3)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이다. 4)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며, 로마병사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이다. 이에 대하여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 출신이라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5) 오리겐의 신관
오리겐의 신론,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공헌주의 하나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와 같이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오리겐의 영원 전 나심은 후에 삼위일체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다고 보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제2의 하나님(second God)이라고 부름으로써 성자와 성부가 다르면 성자가 아버지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신학은 그 성격상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지난 1세기 동안 역사신학계에 큰 논란이 되어 왔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예를 들면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그 관심이 집중하였고 그 의미에 대하여는 저들의 선배들이 이미 탐구한 것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것이 신화교리이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는 인간의 신화를 믿었으며 이런 신화교리는 후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변자인 아다나시우스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이 신성인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로고스 사상을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불사적인 존재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다나시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성육신에 근거한 인간의 신화교리를 시릴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독론 사상의 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로고스 사상은 또 구원론 핵심을 구성한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본질적우로 오리겐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그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연속성이 더 강하다. 로고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불가시적인 존재가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생명이요, 빛이요, 아버지의 로고스요, 우주의 통치자요, 그리고 왕이시다. 아다나시우스에게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시다.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 1장 삼위일체 논쟁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Novatian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초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 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새 Trinitarian Controversy)이라 부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비록 소위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에게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 되시는 분”이다. 로고스는 하나님 다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즉 지혜와 권능과 영과 능력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의 삼위일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과 비슷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견해이다.
변증가들에 의하여 상당히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 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한 하나님 창조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레니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고 가르쳤다. 인류에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를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참 하나님”이시다.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한 본성(one substance),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이 325년 니케아 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단일신론
우리는 삼위일체 논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관련된 오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름과 같다.
* 단일신론(Monarchianism)
하나님이 한 분임을 강조하는 이론
(1)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 한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으로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를 나타나심의 세 양태(양식)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였다.
▶ 성부 수난설 :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성부이며, 승천하신 분은 성령님이다고 한다. 이 양태적 군주신론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려는데 있다. 대표자는 프락시어스(Praxaeus)와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이 사상을 동방교회에서는 일명 사벨리안설(Sabellianism)이라고 한다.
프락시어스는 하나님의 위적 구별을 반대하였고, 성부가 고난 받으셨다는 주장을 피하고 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내는 세 형상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에서 성부로,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하였다. 양 군주신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2)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or Adoptionism, Patripass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선인이라, 그리스도가 너무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그 안에 신적 능력을 부여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능력이 Dynamic하게 그 안에서 역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착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인데 그 안에 능력이 컷을 뿐이라고 한다.
▶ 이것을 양자 기독론(Adoptionism)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탄생시나 세례시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otg)이 이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었으나 신격에 있어서 구별된 인격은 아니었다, 로고스는 모든 인간 속에 계시지만 특히 인간 예수 안에서 특별하게 만들었던 한 인격적 힘일 뿐이다. 이 신적 힘은 진보적으로 예수의 인성을 신화하였다.
인간 예수가 신화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볼 수는 없으나 신적 존경과 영광을 받기에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여 후에 소시니안파와 일위신론(一位神論)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동태적 군주신론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본다.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에서 발단되었다.
서방의 양자론자들과 같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시작이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아들은 시작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로고스를 창조하셨다. 이면에서 아리우스 사상은 헬라의 중기 플라톤주의를 반영한다. 결국 이 로고스는 는 무에서(ex nihilo) 창조된 첫 피조물(first born of creature)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성부와 같은 동질(homoousios)이 아니고 유사 본질(homoiousios)이라는 것이다.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 아들은 피조물이다.
* 아들은 시작이 있다(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 아들은 아버지와 교통이 없고 아버지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 아들은 변형할 수 있고 죄 지을 수 있다.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아리우스 논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교회지도자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했으며 그것을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니케아 정통 신앙의 동의어가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오리겐을 오해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전투적으로 공박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사상을 잘못 이해했다. 아다나시우스가 볼 때 오리겐의 영원성은 곧 성부와의 동등성을 의미하였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회의 신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321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 및 그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아리우스가 하나님이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 사상을 주저함 없이 수용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니아 감독 유세비우스는 전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수리아에서는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졌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서 있으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당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4. 니케아 회의 신조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5월 니케아에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는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회의는 의견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주도하고 있다. 첫째가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당대에 가장 학식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던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내심으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정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대표자들로 반아리우스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니케아회의에서 처음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닮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의 황실감독 호시우스의 개입으로 니케아 신조에 동일이 삽입되었다. 이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교회사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섭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시들지 않고 확산되었다. 심지어 아리우스 세력은 황실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확대 하였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전개된 아리우스 대 아다나시우스 논쟁은 3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제 1기는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는 337년 5월 22일 까지이며, 제 2기는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 까지, 그리고 제3기는 줄리안이 즉위할 때부터 데오도우스 1세의 통치하에 아리우스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로 대별할 수 있다.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Cappadocans) 때문이다.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 - 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등이다. 바실은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 본질(substance, ousia)과 삼위(three persons, hypostasis)를 확정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373년에 아다나시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은 동방에서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위한 용어 사용 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곧 “한 본체 안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이다.
6. 콘스탄티노플 회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황제에 오른 다음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래 동로마에선 최초의 열렬한 서방신학 지지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죄를 받은 셈이며 아리우스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제2장 기독론 논쟁
“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니,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신성과 인성(한 인격 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기독론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부터 칼케톤 회의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안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고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원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377년에는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하였다. 또한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 이단 목록에도 포함되어다.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가현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로 불러야한 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불어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라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사이의 그릇된 대조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계적 연합은 유기적인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데오토코스(theotokos)는 어머니의 특권을 강조하기 보다는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을 강조하는데 포인트가 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뱃속에 갖고 있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데오토코스(“theotokos" ;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리아가 인격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양성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이다.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다.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 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 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 기독론 이해는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데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어 한 인격(one person)의 두성(two natures)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유티키스도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유티키스는 에베소 회의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이단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키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 신조는 433년의 조문으로서,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틈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재합성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God-bearer)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 동안의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로마교회 다름의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e : 527-565) 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monothelitism)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틴 포고나투스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한 후 일의론 지도자인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독론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2)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그리고 (3) 유티키스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4)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톤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고, (5) 그리스도의 일의론(monothelite)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서 거부되었다.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 1 장 위대한 지도자들
“… 거듭 되풀이 하거니와 신앙의 일에 있어서 감독들이 기독교 황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관례였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엠브로스(Ambrose : 340-397)는 고울의 수도 트레베에서 약 340년에 출생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감독의 직을 맡아 충실하게 그 직을 감당하였다. 그는 감독으로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떠나던 397년까지 앰브로스는 서구 사회에 교권을 강화시켜 놓는데 탁월한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감독직에 오른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유했던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친 일이다. 탁월한 행정가였던 앰브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전투적인 가톨릭 입장에서 확고히 서 있었던 앰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또한 앰브로스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위에 국가를 올려놓았다. 즉 평신도인 황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감독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엠브로스 감독과 황제가 직면한 또 하나의 사건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이었다. 이 일일 있은 이후 앰브로스와 황제와의 대결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앰브로스는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황제는 감독의 회개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하지만 앰브로스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몇 달 동안 황제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황제의 참회가 있을 후에야 예배에 참석 시켰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제롬(331-420)은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 수도원제도를 도입함으로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그로 하여금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 번역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오리겐과 제롬과의 관계는 제롬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이다.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던 제롬은 오리겐의 방법론을 상당히 차용했다. 이것은 특별히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개단했던 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변함없었고 “오리겐의 정통주의적 생애를 언제나 선망하였으나 오리겐의 신학 사변에 대해서 학자적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오리겐의 주석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지만 그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낀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정죄에 재빨리 가담하였다.
제롬의 재치 있는 풍자와 격렬한 논박은 결국 인격적인 약점들을 남겨 놓았다. 편파성, 편협한 마음, 불공정, 허영심 그리고 그의 박학다식에 흠을 낸 부주의성 등이 그것이다. 제롬의 학적 감식력이 종경 받다 보니 결국 그의 통렬했던 개성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상당한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경 번역, 주석, 기타 학적 저술을 통해 서방 기독교계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기독교사에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 이자 성경 강해자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그의 특징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진정한 설교자의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 터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지만 요한의 메시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어 왔다.
제 2 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두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봉사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의 자유해방을 이미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베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 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패트릭(Patrick)과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에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한 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방탕한 생활을 시작되었고, 얼마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를 않았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 이면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 것은 버질과 키케로의 작품이었다.
373년 19살 나던 해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 체험은 어거스틴에게 두 번째 도약이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얼마나 불타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모했던가?”라고 어거스틴 자신이 고백하듯이 부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고백록>에 어거스틴은 마니교, 플라톤주의, 그리고 기독교로 세단계의 개인 확신을 회고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거스틴의 성숙한 사고에 두드러진 요소들로 부각되었다. 373년 19세의 어거스틴은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오랫동안 기독교의 중요한 라이벌 중교 중의 하나로서 당대의 진실 된 과학적 신학체계를 대표하였던 이 철학체계는 특별히 이념적인 면에서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악의 기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느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악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니교도들은 하나님과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악은 하나님과의 병존하는 본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후한 빛, 혹은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19살부터 29살까지 10년 동안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니교가 갖고 있는 진리 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고, 둘째,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야 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셋째,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리교의 가르침이야 말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떠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천문학과 플라톤 사상이다.
(2) 신플라톤주의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청산한 것은 그의 나이 29살 때이다. 마니교를 떠나온 후 어거스틴은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잠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은 당시 널리 읽히던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실재를 발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신관은 마니교의 신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악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는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마침내 어거스틴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이다.
(3) 어거스틴의 회심
그를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이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 신학이며 그 계시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리가르(Noregaard)와 홀(Holl)같은 전통주의자들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플라톤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의 회심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회심이전에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은 것이 사실이나 회심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았다. 후에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386년에 기독교로 귀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어거스틴은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에 395년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말 발급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bsurdum)는 터툴리안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에 저술한 <독백>(Soliloquia), 394년 의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에 완성한 <자유 의지론>(De Libero Aritrio), 그리고 416년에 완성한 거작 <삼위일체론>(De Trinttat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영원한 것을 직관하는데 필수적일 만큼 중요하지만 영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보다 탁월하고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궁극적인 인식 대상인 진리 자체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며 그 후 그 믿음을 밝히는데 우리의 이성이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
삼위일체의 영원성, 동등성, 통일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깨달았을 때에야 계속 탐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케하는 이성은 필수이다.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는 어거스틴의 원리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끝맺음 하면서 “나는 내가 믿은 것을 나의 지성으로 보기 위하여 많이 희구하여 왔다”고 고백한 것도 그의 인식론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어거스틴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일차적인 관심을 실천적인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은 실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404년 어거스틴이 주도하여 열린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도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이들의 교회당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411년 카르타고회의 이후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진실로 거룩한 자들만이 정당하고 효력있는 세례를 베풀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한 세례가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에 위해 베풀어진 세례도 교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를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는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교회관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어거스틴으로서는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내세웠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 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바티안 그리고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교회의 하나님도 사랑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동방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방의 인간이해가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영국 아일랜드 수도승 출신이었던 펠라기우스는 400년에 로마로 와서 7, 8년간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그 즈음 펠라기우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첫 번째 사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자신과 입당을 같이 하는 코엘레스티우스를 만난 사건이다. 이때부터 펠라기우스는 공개적으로 어거스틴 사상과 대립되는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펠리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지 않으며 모든 계명은 인간이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며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신다.
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은 의지를 가지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계명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가능성(posse), 의지(velle), 실천(esse)이라는 세 가지로 구별하여 순서를 나누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되며 전 인류에게 전가 될 수 없다. 적어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협력한다. 따라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 인간의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히 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유아는 죄 없이 무죄한 상태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행과 악행 가능성 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자신이 져야 한다.
410년 고트족에 의하여 로마가 멸망당한 후에 펠라기우스는 411년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그곳에서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해인 412년 카르타고에서 회의가 열려 펠라기우스의 제자 콜엘레스티우스를 정죄했다. 그 이유는 1)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2)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인간 전체에 미치지는 않는다. 3)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4)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5)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있다. 6)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맘아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소유한다.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에 의해서도 공로를 얻지 못하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선행을 통한 공로 사상은 어거스틴의 믿음을 통한 은총론과 대립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펠라기우스 인간론이 자유의지론에서 출발했다면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하였다. 어거스틴의 자유이해 역시 그의 은총론에 기초한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할 때만이 가치 있다. 어거스틴에게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으며,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이런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sola gratia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랑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먼저 믿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불가항력적 은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을 따른다. 어거스틴은 예정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예정 자체가 신적인 기원을 같은 다면 그것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선물이듯이 예정 역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재확인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의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하셨다. 한편으로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로마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계시면서 역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또한 로마 제국의 주변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결국 어거스틴이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이해는 창조이후 인간의 역사가 하나이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시한 역사이해 즉, 목적론적이 직선적인 역사관은 당대까지 지배해온 헬라의 순환논적 역사이해를 넘어 성서적 견해를 따라 역사에는 처음과 절정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 속에서 한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역사란 한 편의로 개인의 실존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실존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개인의 실존 속에서 또 그 실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도 각 개인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형성하여 가는 역사의 주체자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문화변혁의 동참자인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적극적인 문화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자율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어거스틴의 독특한 역사해석은 마치 이성과 신앙의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어울리는 새로운 역사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어거스틴이야 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 혹은 역사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도성이 쇠잔해 간다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독립적인 역사철학의 한계를 설정하여 기독교 역사철학이란 결국 역사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되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상적 맥을 형성하였다. 중세 사상, 종교개혁도 어거스틴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존주의, 역사신학, 역사철학, 개인주의, 역사관, 문화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현대사조도 사상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거스틴에 귀착된다.
그렇게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라틴의 전통을 대립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종합시켜 두 개의 상이한 전통을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21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란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박해 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예전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신운동이었다.
1. 최초의 수도승들
초기 수도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애굽 출신의 곱트인 성 안토니(256-356)였다.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을 실천하고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시작했다.
초기 수도승은 후기에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수도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된 것이다. 이 수도원은 나일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285-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코미우스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중앙 수도원에서 여러 수도원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 공동체는 일종의 운영규칙들이 발전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파코미우스 제도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수도원 운동이 2, 3세대로 내려가는 동안, 금욕주의적 생활은 자체 내에 특수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4, 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 되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제도 이전에 금욕주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하였다.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문화주의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실은 지나친 개인적인 경건을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립된 금욕 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실의 수도원 이상은 그의 가정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 교제를 통하여 성숙되었다.
바실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타부시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에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당대의 이교문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표현상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실의 수도원 성격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공동체와 달라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을 연결하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도 이원론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실은 영혼에 비해 육체를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게다가 바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바실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서방 수도원 발흥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 마르틴(Martin of Torus). 제롬 그리고 요한 카씨안(John Cassian)에 의해서 이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방 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 중에 또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Hieronimus Sophronius)이다. 그는 제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롬에 와서 서방의 수도원 제도는 결코 낯선 제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기독교 이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밀란의 엠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더욱 확대시켰고,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사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고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현했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역시 540년경에 출현한 베네딕트 수도원 이었다. 또 하나의 수도원은 5세기 말엽에 시작된 켈트의 수도원 운동이다 .
5. 요 약
영적 갱생의 필요성에 따라 발흥한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음을 보여준다.
수도원 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고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수도원 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으며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수도사의 첫째 목적이 그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들과 안주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되었다.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이다.”
Leo the Great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삼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다.
1. 로마교회의 부상
로마교회에는 신경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라는 자신들의 자각은 대단했으니 약 160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그곳에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Julius)가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Marcellus)의 복권을 추구하는 서신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립된 것은 그 후 382년 다마수스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로마교회는 상당히 권위적인 교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2. 세르디카 서방교회
세르디카(Serdica) 서방회의에서는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세르디카 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패트릭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 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교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 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4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