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호미곶 흑구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새로운 시각, 새로운 시의 구현 추구’
2024 호미곶 흑구문학상 시부문에 수합된 응모작은 총1377편이었다. 심사위원으로 정일근시인, 진용숙시인, 유진시인이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여 심사를 진행하였다.
1차로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추상적 사변을 걸러내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예년에 비해 젊은 층들의 투고가 확실히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가족사를 둘러싼 절실함 보다 사회적 현실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은 한편, 시적 진술과 유기적 의미망, 문장구조, 언어구사가 전반적으로 젊어졌고, 수준 또한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시는 자의식(自意識)을 비춰보는 거울이다. 복잡한 인간사와 정신적 내면을 투사하는 거울, 꿈과 욕망과 사유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현실의 고난과 절망을 극복하고, 삶을 승화시킬 수 있게 한다.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되 객관성이 유지되어야만 시라는 거울에 저마다의 자의식을 비춰보게 하는 시의 목적에 이르는 것이다.
2차로 소재와 주제의 독창성, 개성적 화법과 표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며 골라낸30편에서 다시,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하고 시적 진술의 밀도가 고른 작품들을 뽑았다.
최종심에 오른 10편중에서 「다음」을 대상, 「분수」를 금상, 「난바다의 아재」를 은상으로 선정하고, 남은 7편을 장려상으로 정하는데 한 치 이견이 없었다.
대상으로 올린 「다음」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작품으로, 폭넓은 서사 구조와 촘촘한 문장의 보폭이 가장 돋보였다.
‘숫자 속에 사람이 있다’ ‘실직만으로 서열화 되는 세상’ ‘낮은 지점에 있는 사람을 갈아 넣는 게 당연해지는’ ‘어떤 품사로도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지배하는 숫자의 늪’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등,
거대자본의 시스템에서 파생된 사회부조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과,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의 암시를 비의(秘義)로 두었다.
‘다음’이 오고 있다. 곧 들이닥칠 글로벌리즘(globalism)시대, 당면한 문제의 종류가 달라지고 있다. 연속되는 변화 속에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낯선 질문들에 대해 어떤 답을 준비할 것인가. 시적 사유로 인간 본연에 대한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문장을 다루는 솜씨와 오랜 연마를 거친 내공이 예사롭지 않은 수작이었다.
금상으로 정한 「분수」는 사람됨에 대한 생각을 형상화 한 작품이었다. 분수를 안다는 것, 외면과 내면의 밸런스일까. 확고한 자신의 가치관이 먼저일까.
‘물 위와 물 아래의 동작이라 하지만 / 결국 딱딱한 것과 물렁한 차이로 나뉘지’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그릇과 자신의 결, 자기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를 사는 것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작품 역시 구사력, 문장력, 성숙도에서 기성작가의 면모를 갖춘 수작이었다. 다만 시류에 따른 묘사기법이 다소 작위적이라는 것과 개인적 사유에 멈추어 버린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은상 「난바다의 아재」는 구룡포에서 나고 자라 원양어선 선장이 된 뱃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거친 바다와 거친 삶을 서사적 구성과 산문적 형식으로 이미지화하여, 기본기에 충실함을 보여주었다. 한발 더 나아가 현실 재생보다는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선이 요구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장려상에 머문 나머지 시편들도 편차 없이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아쉬움을 덧붙이자면, 내용은 손색이 없으나 제목에서 객관성을 잃은 몇 편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보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외래어(영어)표기의 제목은 지양되어야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 심사에서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자연이나 가족사에 대한 구태의연한 표현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시의 구현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호미곶 흑구문학상의 취지에 걸맞은 수작들을 내놓은 당선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드린다.
■ 심사위원 : 정일근 시인, 진용숙 시인 , 유진 시인(글).
[대상]
다음
숫자 속에 사람이 있다
투구를 쓰고 욕받이가 되었다. 벽 뒤에 숨어 회색 정장 입은 당신을 위해
달리는 경주마
눈으로 보이는 그를 채워야 하고 외면하기 어려운
통장에 찍히는 그가 줄어든다면
납작한 숫자를 높이기 위해 달라지는 나의 페르소나
수치 속에 웃음과 눈물로 굽어진 이야기들이 매몰되어버리고 끝내 이름을 잃었다
유모 군은 철근 내리는 작업 중 추락 이모 군은엘리베이터 수리 중 승강로에 끼여 사망
A 군 ㄱ 군 옆에 사고의 언어는 괄호
신문 한 귀퉁이에 낯선 이방인이 스치고 퇴근하지 못하는 숫자는 쌓여 가고
실직만으로 서열화되는 세상
부조리가 유언장을 써 내려간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 외에는 모르고 살아가겠지
낮은 지점에 있는 사람을 갈아 넣는 게 당연해지는,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테러 감각이 없는 폭력들이 쌓여 심장을 잠식하고
나직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떨어진 꽃잎들
상실은 자국을 남기고 상한 몸들이 계속해서 재생된다
눈빛으로, 허공에 던진 말로 시그널을 보냈다
맨발인 발이 한 짝 밖에 없는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발화되지 않았던 문장의 표피가 날카롭다
어떤 품사로도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지배하는 숫자의 늪
한줌의 빛이 필요한 세상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봄은 오는데
보고 싶다
다음이 오지 않는 세상
[금상]
분수
솟구치는 것은 펄럭이는 꼬릿짓으로 말하는 거라지
아들에게 신선한 물고기를 보여줄 수 없어서
꼬리만 보고도 몸통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내 자신을 위로한 거라지
저 분수 앞에선 내 목청도 남의 소리로 들려
가끔 발목을 담가놓고
숨가쁜 아가미를 뻐끔거릴 때가 있지
분수를 아는 건 부끄러워하는 건지
더 낮게 몰입하고 있는 건지
내 비늘이란 옷들은 공원 나무들의 색깔과 동화되지 못한 채
울긋불긋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
솟구치는 건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양이라서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철퍽철퍽 떨어질 걸
동그랗게 콘크리트로 가두어 놓은 거라지
거리의 나무들도 머리를 흙속에 숨겨놓고 펄럭이는데
희고 검은 구름조차 허공에 날 붙어서
푸른 하늘 지워 먹고 싶어서,
물 위와 물 아래의 동작이라 하지만
결국 딱딱한 것과 물렁한 차이로 나뉘지
가끔 별빛이라는 솟구칠 구멍이
까마득히 올려다 보일 때도 있으니까
[은상]
난바다의 아재
호미곳 등대가 보이면 아재는 뱃고동을 울린다. 롤링과 피칭하는 갑판에서 아장걸음을 배워 기관사로 갑판장으로 원양어선 선장 자리까지 오른 것은 자수성가의 길이었다. 바닥에서 광어나 가자미처럼 살다가 엄청난 몸으로 수면 위로 박차고 오른 혹등고래 같았다.
난바다를 지나 만선으로 챙겨온 물고기를 하역하는 것을 바라보는 아재는 햇살을 가득 받는 호미곳 등대처럼 장엄하게 보였다. 아재가 먼 바다로 나간 사이 병들어 호미곳 등대에서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갓 핀 해당화같이 저승으로 떨어져 간 아지매도 입항하는 아재를 맞이하듯 해당화로 더욱 붉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난바다의 파도가 배를 쪼갤 듯이 몰아쳐 와도 아지매의 추억이 있고 호미곳 등대와 구룡포가 있는 한 구만리 언덕에 보리밭이 물결치는 한 두려운 게 하나도 없었다는 아재,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 북극해도 난류의 바다 같아 견딜 만했다는 아재였다.
수없는 수평선을 넘고 난바다를 수없이 지나야 그때야 바라보는 호미곳 등대라는 아재, 난바다 제일 먼 곳까지 마중 나오는 것이 호미곳 등대 불빛이라는 아재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누대의 사랑이 형산강물로 흘러든 바다, 호미곳 등대가 지켜온 바다로, 난바다를 헤치며 달려 해마처럼 숨 가쁘게 오는 아재, 작두 같은 파도를 밟고 마중 나가고 싶은 마음이 물미역처럼 자라 오늘도 일렁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