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23장 8~14절
서론: 은폐된 하나님과 단독자의 고독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마치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매지만 그분의 부재를 경험하며 탄식하는 욥의 절규로 시작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은폐된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영적 고독과 부재의 고통을 평생 온몸으로 안고 살았던 19세기의 대표적 기독교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를 떠올려 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대중의 비난과 약혼자와의 결별, 영적 외로움 속에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구경꾼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1대 1로 독대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Coram Deo)'로 바로 서고자 했습니다.
욥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부재의 현장에서 참된 신앙의 도약을 이뤄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은폐된 하나님 앞에서 성도와 교회가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신앙의 순금으로 거듭나야 하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완전한 아심을 신뢰하라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욥은 전후좌우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감각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욥 23:10a). 여기서 사용된 '아시나니'의 히브리어 원어는'야다(יָדַע)'입니다. '야다'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관계 속에서 깊이 경험하고 전인적으로 관찰하여 통찰하는 아심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을 "양을 아는 선한 목자"(요 10:14)로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극도의 하나님 부재를 직접 겪으셨기에, 우리가 겪는 부재의 밤과 걸어가는 길을 완벽하게 '야다' 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타인의 평가나 군중 심리에 묻혀 살아가는 대중을 비판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속사정을 완벽히 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단독자'로 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때로 자신조차 스스로를 다 알지 못해 방황하지만, 나를 나보다 더 깊이 '야다' 하시는 하나님을 향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때에도 주님은 여러분의 침묵과 눈물, 걸어온 모든 과정을 '야다' 하십니다. 성도와 교회는 사람의 인정이나 시각적 증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길을 완벽히 아시는 주님의 통찰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바로 서야 합니다.
2. 고난을 존재의 성숙을 위한 제련으로 받아들이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 같이되어 나오리라"(욥23:10b).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의미 없는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정이 진행 중인 과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단련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바한(בָּחַן)'입니다. '바한'은 금속학적으로 원석을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분리하고 정제하는 테스팅과 제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은"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신약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바한'의 완성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참된 진리는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주관적 결단과 고통을 통과한 신앙의 도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시련의 용광로를 거치지 않은 가벼운 기독교를 경계했습니다. 고난이라는 '바한'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우상과 헛된 자아를 불태우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담아내는 순금(זָהָב, 자하브)의 존재로 변모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고통이 닥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피해의식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순금으로 제련하고 계시는가?"라는 영적 해석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거친 불길 속에서도 불순물을 털어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숙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안에 안십하라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미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욥 23:13~14). 본문의 결론부에서 욥의 시선은 자신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absoluto sovereignty(절대 주권)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신 분(אֶחָד, 에하드)이시며, 마침내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작정하신 것'의 히브리어는'호크(חֹק)'로,'정한 분량, 파기할수 없는 법칙, 섭리적 몫'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라고 말하며,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확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유한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절대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무한한 포기(Infinite Resignation)'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호크)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와 교회가 내 뜻대로 상황이 제어되지 않을 때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교회의 미래는 나의 손이 아닌, 절대적 분량과 선한 뜻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호크' 안에 있습니다. 내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그분의 주권 안에 안식하십시오.
결론: 은폐의 밤을 넘어 순금으로 빛나는 공동체
19세기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키에르케고르가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서서 고난을 신앙의 도약으로 승화시켰듯, 욥 역시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이라는 어두운 밤을 지나 신앙의 거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고난을 마주하는 성도와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켜 줍니다.
ㆍ눈에 보이지 않는 은폐의 순간에도 나를 완벽히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야다(יָדַע)'를 신뢰하십시오.
ㆍ삶의 모든 시련을 나를 불순물 없는 존재로 제련하시는 하나님의 '바한(בָּחַן)'으로 받아들이십시오.
ㆍ마침내 나를 향한 가장 선한 뜻을 이루실 하나님의 '호크(חֹק)' 앞에 순복하며 참된 안식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용광로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를 다듬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 세상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순금(자하브)'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거룩한 성도와 빛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