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요?
요즘 세상은 도덕이 무너졌다고들 한다. 또한 세상이 어지럽고 문란하며 혼란스럽다고들 한다. 더 심하게 말하면 세상 말세라고도 한다.이와 같은 현상들은 성인들의 도덕을 저버린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옛 여러 성인들께서는 도덕을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치를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성인의 도덕을 배우고 실천해서 인간의 도덕적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경제논리를 앞세워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욕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성이 사라지고 물질과 쾌락을 향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불법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자신을 망치게 되어 일생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을 파괴하게 되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 그리고 온 인류가 서로 불행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먼저 내가 누구이며, 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는가? 를 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는 목적(이유)이 무엇인가?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살펴보면 크게 세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전생에 진 빚을 갚으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이며, 둘째는 전생에서 받지 못한 빚을 받으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심성을 수련해서 신선, 부처가 되어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첫째와 둘째 항목인 전생의 빚을 갚고 받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보(業報)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항로는 전생의 빚을 갚고, 빚을 받는 삶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과정에 그 변화되어지는 환경이 빚을 갚고 받으려고 쫓아다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의 계획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면 그것은 운명적으로 빚을 갚고 받을 대상을 찾아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한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을 받기보단 갚는 쪽이 많다. 빚을 받는 쪽의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있어 고달프고 힘들어 하는 것 같다. 때에 따라서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기도 한다. 여기서 빚을 갚고 받는 다는 것은 단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그리고 물질적인 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인생이 잘 풀리면 운이 좋다든지 운수대통 했든지 말하고, 재물을 잃거나 망하게 되면 재수가 없다든지 운수가 비색하다든지 말하고 있다. 이 운(運)이 ‘있다’ ‘없다’라고 하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운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빚을 갚을 시기에 빚을 갚은 것이 되고, 내가 ‘운이 좋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전생의 빚을 받을 시기에 빚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빚을 받을 시기가 되면 주변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해줌과 더불어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게 되고, 또한 물질적인 면에서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보편적으로 순탄하게 풀려진다. 그러나 내가 빚을 갚을 시기가 되면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걱정과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지며, 알게 모르게 재물이 소진되어 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욕심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성공을 하고 어떻게 해서 실패를 하게 되는지 잘 모르며 사는 것이 현실이다. 잘되면 내가 잘해서 된 것이라 우쭐 하며 좋아하고, 잘못되면 조상 탓, 세상 탓을 하며 몸을 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살펴보면 사람은 12년을 주기로 그 운이 변하는데 보편적으로 4~5년 동안 전생의 빚을 받아서 7~8년 동안 전생의 빚을 갚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장사가 잘되는 사람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주기를 타고 있으며, 평생 한 직장에 있어 변화가 없을 것 같아도 어느 때에는 주변 환경이 좋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주변 환경이 나빠져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생의 빚을 갚고 받는 대상을 살펴보면 그 업보가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얽혀 있는 것이 가정이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에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친인척, 나를 잘 아는 사람, 그리고 내 삶과 관계가 있는 주변 사람들 순으로 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갚을 것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식에게 빚 갚을 준비를 하고, 그 시기가 되면 자식이 이 세상에 나오도록 문을 열어 주어서 자식이 이 세상에 나오면 정성을 다하여 그 빚을 갚는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빚을 갚는 입장이기에 자식들한테 쏟는 정성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원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가 무한정 자식에게 빚을 갚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 입에서 “이제는 철들 때도 되었는데”라고 할 때가 있다. 이는 보편적으로 부모가 어느 정도 빚을 갚았다고 보는 것이다. 보통 이때가 되면 부모는 인생의 황혼 길에 있으며, 그 자식은 성혼하여 본인들의 자식들에게 열심히 빚을 갚고 있는 시기가 된다. 이때쯤 부모를 보면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 부모는 할 일을 다 하였기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갚을 운을 가지고 태어난 자식은 그 부모가 박대를 하여도 오로지 그 부모밖에 없다는 듯이 효도를 다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미루어 보면 부자간뿐만 아니라 부부, 형제는 물론 내 생활과 환경에 영향을 주는 모든 존재는 이 룰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욕심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계획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저마다의 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삶을 갚는다고 하는 정신으로 베풀고 산다면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전생의 업보가 핏줄에 가장 많이 얽혀 있기에 옛 성현들께서 가정의 화목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즉 가화를 하지 않으면 전생의 업보를 갚는 다는 것은 요원한 것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이나 깨우침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업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위하여 신선이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수련과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전생의 업을 소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선불(仙佛)이 되고자 명산대천을 찾아 헤매고, 또는 성인(聖人)들을 좇아 배우기도 하고, 성인들께서 중생구제 하시는데 동참하여 그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