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창비, 2005
최근의 소설문학의 경향이 어떠한가를 되짚어보기 위해 집어든 책이, 신예 작가 김애란의 처녀 작품집 『달려라 아비』이다. 스물다섯 약관에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그녀는 막내동생만큼이나 앳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세상을, 관계를 읽어내는 품이 가히 상급이다. 그것의 증거로 지지리궁상임에 틀림없는 일상을 파헤쳐 관찰해내는 섬세한 詩眼, 톡토그르 튀는 감각에 근저한 기발한 상상력, 새로운 감각에 전통성을 겸비한(그래서 허투루 보이지 않는) 문체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를 비롯하여 아홉 편의 단편이 함께 묶여 있다. 어느 한 편이라도 그저 작품집을 위해 끼워 넣은 작품 작품은 아니었다.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는 사생아인 주인공 ‘나’가 불면식의 아버지를 상상하는 데서 서사 꼬투리가 여며진다. 화자 ‘나’는 반지하 단칸방에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첫문장부터 절묘한 플롯의 시작인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의 생생한 기억력을 빙자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이 첫줄을 접한 독자의 호흡을 끝까지 붙들어매고 만다. 다 읽고 나서 ‘그래 이게 소설이지!’라고 탄식이 절로 나온다.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불행한 주인공인 ‘나’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이유라면 이유다. 생래적 결핍 또는 실존적 상처이기 쉬운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아픔과 페이소스를 이렇게 말한다. 부단히 자위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할 때 아슴하게 피어오르는 상처를 이런 식으로 치유하고 극복해내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위성을 배재했다고 판단한다. 흔히 이런 소재는 (소재 자체가 식상의 첨단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 등으로 상처 입은 주인공이 원한이나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잘 해야 그를 딛고 일어서서 소시민으로 성장하거나, 한없이 깊은 수령과 같은 세상과 맞서기 일쑤다. 이른바 재탕되는 신파 일색이기 쉽다. 그러나 의외다.
함께 수록된 작품들 또한 기대되는 것이지만, 표지 뒷말의 최원식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시대의 소설가뭄과 신인가뭄을 동시에 해갈할 신예로 그녀가 성장할 것을” 진정 빌어본다. 한편 벌써 80년대생에게 문단의 스폿을 넘겨줘야 하는 시절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
두 번째 작품,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서울의 대학가에서 자취하는 여대생의 눈에 비친 편의점의 모습을 통해, 후기자본주의의 일상을 예리한 시선과 단순명쾌한 문장에 담은 작품이다. ‘나’는 편의점 세 곳을 번갈아가며 들러 생필품을 산다. 그러면서 나는 세 곳의 편의점에서 각각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다. 편의점에서 나는 익명의 편안함 속에 숨고 싶지만 또한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자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내가 구입하는 상품의 목록은 일반화된 대도시의 소비패턴을 벗어나지 않지만, 나를 드러내는 소비의 코드들이기도 한 것이다. 소비주체로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나와 구입 물품 목록으로 환원되는 나, 타인과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싶은 나와 타인의 무언의 폭력으로부터 숨고 싶은 나의 괴리가 소소한 에피소드에서 날카롭게 드러난다.
세 번째 작품, 「스카이 콩콩」은 허름한 전파상을 하는 아버지, 어설픈 과학자 지망생인 형과 함께 지방 소도시의 옥탑집에서 살아가는 소년 ‘나’의 성장기의 한 토막이다. 변두리 동네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무심히 스카이 콩콩을 타며 커간다. 철없는 장난, 아버지가 내린 벌에 대한 복수의 다짐, 형의 뜸금없는 탐구열에 대한 의심, 초라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 대학생 사촌형에게서 느끼는 뭔지 모를 애수 등 나름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겪어 가는 ‘나’에게 세상은 더 이상 설렘과 흥분, 호기심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다. 스카이 콩콩은 짜릿한 비상의 발사대가 아니라 단순한 장난감이 되어버린다. 1980년대생의 유년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세밀한 묘사, 자연스럽고 풋풋한 유머와 함께 주변적 삶의 그늘과 가난 속의 성장통을 애틋하게 전해준다.
네 번째 수록작,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젊은 직장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매일밤 잠을 자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바로 그 노력과 강박관념 때문에 더욱 잠들지 못한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안 돼.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 오늘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탓에 실수가 잦고, 또 그런 자신의 모습에 불만인 그녀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자책과 상처를 떨치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념의 연쇄에 빠져들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느 날 그녀의 단칸방에 초라한 행색의 아버지가 불쑥 찾아온다. 두문불출, 새벽까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볼뿐인 아버지 때문에 그녀의 불면증은 악화된다. 끙끙대던 그녀가 결국 유선 텔레비전의 선을 끊자 아버지는 몰래 집을 나간다. 그녀는 그날 밤 아버지와 행복했던 한때를 꿈꾸다 깨어난다. 심약한 내면을 지닌 인물이 겪는 소통불능과 단절감을 불면증에 빗대어, 엉뚱한 발상과 밀도 높은 심리묘사가 잘 조화된 작품이다.
이밖에도 일인칭 화자의 집요한 내면 응시를 통해 오해와 아이러니로 가득한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원한 화자」, 잃어버린 아버지 찾기와 네스호의 괴수 미스테리를 겹쳐놓는 「사랑의 인사」, 가난한 백수 청년이 글쓰기라는 행위로 삶의 진실에 도달하는 소설 분투기를그린 「종이 물고기」 등 불행과 상처를 핑계대지 않는 철저한 자존(自尊)의 상상력과 유쾌한 자기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들이, 우리 소설 문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