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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대 10년은 광명, 부천을 근거지로 노동자, 철거민, 해직교사들과 모진 비바람 맞으며 함께 싸웠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주택공사 사업단, 철거용역 깡패들, 주민들 가운데 배신자, 구사대, 장학사, 경찰 등으로 수시로 변했다.
서울 신대에서 인천 부천 지역 학생 노동자들의 연대 집회가 있어서 아직 국회의원이 아니었던 원혜영과 함께 가게 되었다. 정문으로 가려니 경찰이 원천봉쇄를 하고 있었지만 순서를 맡아서 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길을 막고 있는 전경들의 뒤쪽에 도로를 내느라고 절벽을 만들어둔 것이 보였다. 원혜영과 나는 경사가 심한 그 언덕을 양복을 입은 채로 손과 발을 이용해서 기어올랐다. 그런데 아뿔싸 앞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전경 한 녀석이 군기가 빠져서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서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다음 순간 전경들 몇 명이 달려오더니 우리를 잡으려고 밑에서 기어 올라왔다. '잡히면 망신이다'싶어 정신 없이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데 밑에서 올라오던 원혜영이 "알았어!! 알았어!! 내려갈게."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혜영이 바짓가랑이를 붙잡힌 것이다. 아마도 원혜영은 보병 출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거의 다 올라갔지만 동지를 버리고 혼자 도망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전경들에게 양팔을 잡혀서 끌려 온 나를 보고 경찰지휘관이 했던 말이 정말 걸작이었다.
"목사님이 이게 뭐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지."
결국 그날 또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취조를 받는데 형사들이 돌아가면서 들어와서 물은 것을 또 묻고 또 묻고 하더니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갔다. 나는 그 새 피곤해져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디서 "지 목사! 자지 말아요. 여관방에 온 줄 알아?"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나 했더니 벽에 조그만 스피커가 달렸고 벽에 유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였던 것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싸움에서는 무엇보다 기싸움에 져서는 안 되는 법, 상대방이 부당하게 나올 때는 되받아쳐야 하는 법이어서 나는"자는 거 아니요! 기도 하는 거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역곡에 있는 성심여대에서 행사에서 강연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보니까 이미 전투경찰 중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는 나라의 분위기상 집회라고 해봐야 가두 진출은 생각도 못 할 얌전한 가톨릭계 여대생들의 교내, 그것도 실내 집회에 경찰이 출동해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한가한(?) 상황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뒷 산으로 난 옆 문으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총학생회 간부 몇 명이 염려가 되어 정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문에서 지휘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잡더니 주민등록증을 좀 보자고 했다. 나로서는 '옳다구나'하고 배웅을 하러 나온 총학생회 간부들에게 경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현장 교육을 시킬 기회라는 좋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신분증 좀 보여 주시죠?"
"뭐야? 감히 경찰 보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
"가짜 경찰인지 어떻게 압니까?"
몇 시간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상황의 변화가 생겨서 긴장하게 된 전경들은 나와 지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중대 병력 앞에서 이런 질문을 당하고 보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 앞에서, 지휘관은 부하들 앞에서 벌리는 기싸움이기에 피차 밀릴 수 없는 처지였다. 표정을 보아 생전 처음으로 말도 안 되는(?) 반박을 당한 것 같았던 지휘관을 눈을 부라리며 "당신 지금 누굴 놀리는 거야?"하고 언성을 높였다. 내친김에 나는 '억지가 사촌 보다 낫다'는 원칙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댁들이 가짜 경찰인줄 어떻게 압니까? 이런 장비들은 청계천에 가면 다 살 수 있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경 중에서 몇 명이 감히 자기 지휘관을 모욕하는 듯한 건방진 나의 태도에 대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뒤에서 욕을 했다. 이에 질세라 여학생들이 전경들을 향해서 대거리를 했다.
나는 더욱 냉정하게 "주민등록법에 범죄 혐의가 없이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시겠지요?"라고 했다. 경찰 지휘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자주 볼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렇게 하시면 좋지 않습니다.”
“지금 그림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 목사님 가는 곳에는 바람이 붑니다.” 등등 협박의 종류도 다양했다.
물론 협박을 당하면 두렵다. 그러나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어 갔던 그 시절에 그런 협박을 받을 때마다 두려움 보다는 오히려 더 마음이 굳어졌었다.
전투에서는 방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회만 있으면 공격도 해야 한다.
한 번은 부천 YMCA 황주석 총무가 전화를 걸어와서 심각한 목소리로 “당분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의를 주었다. 형사들이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지 성수 목사! 이 놈 이번에 한번 혼내주자.”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식당 주인이 무심코 듣고서 ‘지성수’라는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하다가 YMCA에서 자기 아들 유치원 졸업식 때 내가 설교하던 것이 생각이 나서 총무에게 전화를 해주었단다.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나는 부천경찰서장을 찾아 갔다.
“서장님! 부하들 입 조심 좀 시키셔야 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장님 부하가 몇 명입니까? 기껏해야 400 명밖에 더 됩니까? 정보는 경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보를 수집하려면 경찰 보다 더 눈이 많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부천에 있는 모든 경찰들을 감시하자고 결정을 내리면 눈이 몇 개가 되는 줄 아십니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단 이 쪽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표시로 엄포를 놓고 사태를 처음부터 설명을 했다. 서장은 알았다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했다. 나중에 황 총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지 목사님 경찰서장 되었다가는 큰 일 나겠네. 공갈까지 치고." 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타고 가던 봉고차가 꼬리를 물고 좌회전을 하다가 애매하게 교통 위반을 했다. 의경이 차를 세우더니 운전사에게 목에 기브스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면허증을 내라고 했다. 운전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면허증을 내주었는데 내가 "앞 차 따라가느라고 좌회전 신호등이 바뀐 것을 못 본 건데 그런 것까지 딱지를 떼면 가난한 서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하고 거들었다. 각 잡고 엄숙한 표정으로 공무를 집행하던 의경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아저씨는 뭐요? 신분증 좀 내봐요!" 했다. 의경이 떫은 표정으로 내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지... 성…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혹시 목사님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요?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어보니까 "언젠가 조회 시간에 서장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니 "에이! 그냥 가세요.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민주경찰(?)이었다. 나중에 잘 아는 형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서장이 내가 다녀가고 난 다음에 직원 조회 시간에 "어떤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고 다니느냐?"고 성질을 부렸다는 것이다. 나는 흔하지 않은 성을 물려주신 조상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렇게 나는 세상과 싸우는 전사가 되어 갔다. 나는 예수에게서 싸움을 배웠다. 예수는 자기가 세상에 온 이유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고 말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약자가 자기보다 강한 자와 싸움을 하는데 어찌 상처가 없을 수가 있겠나? 나는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이가 또한 예수라고 믿는다.
이런 시절에 나에게 필요한 영성은 ‘온유와 사랑’의 영성이 아니라 희생과 용기가 필요한 ‘투쟁의 영성’ 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세상에서 미운 오리새끼였다. 예수는 분명히 미운 오리새끼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87년 일단의 목회자들이 '군부독재타도를 위한 목회자 삭발 단식 기도회'를 했다. 주변에는 교인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전투 경찰 1개 중대가 모여서 지켜보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삭발을 했다. 엄숙을 넘어서 침통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삭발을 하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단식이야 소문 안 나게 나 혼자 하면 되지만 융통성 있는 감리교, 장로교 소속 목회자들과 달리 꽉 막힌 보수교단 출신인 나에게 밖으로 드러나는 삭발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경찰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교단이 무서운 존재였다. 경찰은 수첩에다 이름을 적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렇지 않아도 고립된 내가 삭발까지 하는 것은 고립을 더 심하게 하는 일이었다
교단에서 나는 항상 껄끄러운 존재였다. 심지어는 신학교 동기생들과도 대화가 단절되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식이 깡통인 신학대학의 학장은 군사 독재 정권 때문에 데모를 하는 학생들을 내가 배후조종을 한다고 교단에 나를 징계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마음 속으로 갈등을 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모임의 좌장격인 고 허병섭 목사님이 "아무래도 지 목사는 안 깎는 것이 좋겠다. 성명서에 이름도 넣지 말고"라고 정리를 해 주었다. 나는 머리를 깎지 못하고 단식에 참여해서 단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스스로 빠져야 했다.
함께 연대 하는 진보 성향의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외로운 존재였다. 모두 신학대 선 후배 사이로 얽혀 있는 관계에서 나 혼자 보수교단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물길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데로 살아야 하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역류를 한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란 것은 어찌나 무서운 것인지 조금이라도 자기를 거스르는 것에는 용서를 하지 않는 법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이것이 세상이다’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는 세상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도록 씹혔고 죽어서도 씹혔고 심지어는 자기를 따른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러러 받들어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씹히고 있다. 역설적으로 세상에 의해서 짓밟히고 씹히다가 죽은 예수, 그 예수는 오늘도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교단의 중견 목사가 만나자고 하더니 ‘이미지 개선 좀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구약 사무엘서에 다윗이 불우했던 시절에 아돌람의 굴로 피해 있을 때 억눌린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소외되어 있다 보니 신학대학을 나오고도 자의든 타의든 목회를 하지 않는 후배들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왕따에 자따가 겹친 세월을 속에서 아주 의외의 사건이 발생했다. 동기생이기는 했지만 나이 차이가 많아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던 이진수 목사가 불치의 병이 걸려서 희망이 없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동기생들과 자발적인 소외상태에 있던 나로서는 병문안을 가기에도 뜬금이 없어서 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 이 목사에게서 전화를 왔다. 의외의 전화를 받고 변명을 하려 하자 이 목사는 "병은 다 나았는데 할 말이 있으니 꼭 한 번 만나보자."고 했다.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니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했나!'하는 생각이 들어 죄인의 심정으로 마지못해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만나보니 전혀 뜻 밖의 이야기를 했다. 병상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회개를 하는데 고생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을 하고서 병상에 있는 동안 격려의 뜻으로 받았던 돈 중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가져왔다며 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교단의 괄시가 나쁜 결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갈 때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서 목사 재직증명서가 필요해서 총회 본부에 갔더니 증명서를 떼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NCC(교회협의회)에 속한 작은 교단인 복음 교단에 부탁해서 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산하에 각 국가별로 조직된 교회협의회는 명실공히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NCC는 각 교단에서 파송된 목사들로 각종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복음 교단은 목사가 많지 않은데다가 각위원회에 파송할 만한 경력 있는 목사가 부족했다. 나는 신세를 갚는 의미에서 인권위원회에 파송을 받아서 활동을 했다.
인권단체가 전무했던 당시에는 NCC 인권위원회가 유일한 인권단체였다. 아무 힘도 없는 위원회였지만 그래도 주거래처인 경찰, 안기부, 보안대 등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기구였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NCC 인권위원이라는 것이 힘없는 방패 노릇을 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인권위원회의 존재를 아는 형사들이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위원회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경찰을 만나면 소용이 없었다.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것을 떡 해먹는 것으로 아는 경찰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곡 한의원 송봉길 원장이 한의원 건물의 일부를 내주어 작은도서관과 주민 삼담을 하는 나눔터를 냈다. 나눔터에서 오전 11시 ㄷ 초등학교 어머니회의 회장과 ㅇ 엄마를 만났다. 이야기를 시작한지 30 분이 지났지만 ㅇ 엄마의 이야기는 끊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50대 중반의 까탈스런 여선생과 장난이 심한 편인 5학년짜리 사내 아이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사건이 심각한 사태로까지 발전한 모양이었다. ㅇ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날 따라 유난히도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 와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간에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사실은 오후에 부천에서는 거리가 먼 능곡에서 열리기로 된 화정지구 철거민 대책위원회 현판식 및 단합대회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적어도 2시간 전에는 출발을 해야 해서 시간은 다가오고 전화는 자꾸 걸려오는 바람에 내심으로 점점 초조해졌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을 알고 어머니회 회장이 급히 연락을 해서 한 학부모가 차를 가져와서 집회장소에 같이 가기로 했다.
당일 집회에는 주민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부영, 제정구도 왔지만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해서 내가 제일 먼저 격려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엉겁결에, 난생 처음 철거민들의 집회를 본 엄마들이 상황을 전혀 이해를 못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내내 철거민들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그 날 그들은 철거민들이 게으르거나 무식해서 가난한 것도 아니고 집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 하는 의식이 깨어나게 된 것이다.
주일날 모이는 생활교회 식구들은 포장마차 CEO, 헌책방 CEO, 노동자, 3수생, 대학 강사. 현직, 해직 교사, 자영업을 하는 2, 30대 젊은이들이었다. 비록 예배 시간에 헌금 순서는 없어도 가끔 해직교사 처지에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놓는 눈물겨운 믿음을 보인 이들도 있었고 형편 되는대로 내 생활을 열심히 챙겨주는 고마운 노총각도 있었다. 생활 교회로 모인 이들은 어느 정도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었지만 몇 년을 같이 지내도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거나 크거나 일단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끝까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없는 예수는 상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활교회를 하는 동안 곤란한 일은 관혼상제에 참예하는 일이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지도 못하고 누군가의 후원으로 살아가는 처지에서 경조비까지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혼상제에 두문불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직 사회에서는 비록 경조비를 면제(?) 받고 빈손으로라도 가야 할 때가 있었다.
경조비 면제(?)를 받았지만 장례식에는 빠지지 않았다. 결혼식에 올 때에는 최대한 차려 입고 오는 법이기 때문에 여간 세상살이에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장례식은 오히려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들어내는 자리이다. 결혼식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어도 장례식을 보면 대충 그 집안의 형편이나 고인의 면모를 알 수가 있다. 수백 개의 화환이 도열해 있는 명사의 장례에서부터 달랑 촛불 한 자루 켜있는 무연고행려자의 장례까지 당사자의 주변 환경 즉 신분, 재산, 가족 관계 등 모든 것이 들어나게 되어 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자기를 감출래야 감출 수 없고 남은 자들은 무엇을 가려줘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40 대 10 년 동안 하복 잠바를 입으면 추워서 못 입을 때까지 입다가 동복 잠바로 갈아입고 더워서 못 입으면 하복 잠바로 갈아입고 살았다. 일단 옷 입는 것에서 자유로우니까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신경을 쓸 일이 없으니 편했다. 한 번은 복잡한 종로 3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승용차가 서더니 누가 차 안에서 "지 목사님! 지 목사님!"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국회의원 안동선 의원이었다. 네가 "아니?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저를 보셨어요?" 하니까 "지 목사님 옷이 지나가데?"라고 했다.
86년 5월부터 시작한 ‘빈들의 소리’는 한 호를 내고 나면 “다음 호는 어떻게 내나?”하고 힘겹게 고비 고비를 넘긴 세월이 10년이 흘러 우연히도 불교에서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호까지 발행했다. ‘빈들의 소리’를 인쇄를 끝내서 발송을 했는데 배달이 안 될 때도 있었고 그런 일을 피해 보기 위해서 여러 곳의 우체국으로 나누어서 발송을 했던 적도 있었다. 군대에 간 사병들이 ‘빈들의 소리’ 때문에 보안대에 가서 조사를 받는 적도 있었고 어떤 청년들은 교회의 담임 목사에게 혼이 나기도 했고 항의와 비난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빈들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당신이 글을 읽으면 네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의 뜻은 글의 내용에 공감해서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 아니라 ‘어쩌면 이 지경으로 잘못 될 수 있을까?’하는 뜻이었다. 타인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가슴이 아플 일이란 없다. 상대방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어떤 이에게 절망 속에 희망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저주와 질시의 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정말로 다양한 것이다.
그래도 ‘빈들의 소리’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을 만날 수가 있었고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그 작은 책자가 어떻게 흘러서 호주까지 오게 되었고 호주에서 받아보는 담비 엄마가 매월 호주 달라 100 불을 봉투에 넣어 헌금을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도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94 년도 담비 엄마가 일시 귀국을 해서 생활교회를 방문하고 호주를 꼭 한 번 왔다 가라고 간곡하게 당부를 했다. 결국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은 호주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나의 신앙여정은 감히 함석헌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라고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