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正史 5.18 <55>
시·군민, 총기탈취 [무장시위] 적극 도와
계엄군 시외곽 완전봉쇄 "무차별 총격" 기동력 갖춘 시위대, 경찰무기고 습격
귀향학생들 [광주참상] 속속알려…목포·해남·장흥등 항쟁불길 도전역 확산
5월19일의 휴교령과 함께 젊은 학생에 대한 무차별연행을 피해 광주를 빠져나간 대학생과 고교생들이 시내상황을 고향에 전파하면서 항쟁으 불길은 삽시간에 일선 시군으로 번진다.
시위대 차량대거 확보
지역출신 학생·지식인계층의 피난행렬은 처음엔 차량을 이용해 이뤄지다 계엄군의 봉쇄작전이후에는 오솔길이나 소로를 통한 도보피난행렬로까지 이어진다. 도내 남부지역인 장흥·강진·해남지역의 경우 무려 1백50km가 넘는 거리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피신하는6·25당시의 피난길을 방불캐하는 일들이벌어지기도 한다.
언론이 제기능을 하지못한 상태에서 반대로 자식들을 광주로 올려보내 공부시키면서 난리통에 자녀의 소식을 확인하지 못한 부모들이 거꾸로 광주시내로 들어가려는 몸부림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도피및 왕래과정은 신문과 TV가 끊긴가운데 그동안 광주의 소식을 단편적으로만 전해듣던 도민들에게 생생하게 광주상황을 전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목포와 나주 화순 영암 해남 장흥 강진등 도내전역으로 시위를 확산시킨다.
이와함께 21일의 도청앞 집단발포와 아시아자동차등 각종차고에서 차량이 시위대에 대거 확보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는 광주시내에만 국한돼 고립적으로 진행된 항쟁이 도내전역으로 본격 확산돼 도민의 연대와 지원이 이뤄진다. 특히 20일의 차량시위이후 기동력을 확보한 시위대는 21일 공수부대의 시외곽 봉쇄작전이 실시되기 이전에 신속히 외곽으로 빠져나가 지역민과 합세, 경찰관서의 무기고를 습격함으로써 시외곽의 항쟁은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형태로 싹이 튼다.
계엄군의 시외곽봉쇄는 일선 시군으로 진출한 시위대가 농촌지역의 청년들을 광주로 실어날라 시민군의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단행한 광주고립화작전. 그러나 이러한 봉쇄작전과정에는 시외곽에서 뿐만아니라 몇몇 시군에서까지 무차별 발포로 수많은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뒤따라 발포명령이 도내전역에 하달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도내 27개시군중 시위의 양상이 가장 두드러졌던 곳은 목포지역이다. 목포를 비롯한 도내 각 시군은 31사단예하 대대급 부대들이 계엄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경찰력은 대부분 광주로 차출돼 치안부재상태를 드러내 시위대는 손쉽게 경찰관서의 무기를 획들하곤 한다. 목포는 김대중씨의 고향이어서 그를 연행한 신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높았고 유달리 야당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경찰대부분 광주차출
[21일 음력 4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 날이 어두워지고 광주의 도청앞 집단발포소식이 광주에 전해지자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청유리창을 부순데 이어 경찰서의 경찰트럭과 호송차를 불질러버린다. 이에앞서 이날오후 목포시내에는 버스를 징발해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 2백여명이 나타나 가두방송을 통해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 목포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이들로부터 광주의 참상을 전해듣고 시위버스에 올라타전해듣고 시위버스에 올라타 광주로 향하던 김호성씨 (당시26·전기공·목포시 행교동)는 목포인근 국도상에서 매복중이던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천신만고끝에 목숨을 건진다. 다음음 목포에서 이른바 지산부대앞 총격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한 김씨의 증언. [21일 오후2시30분께 광주고속 태원여객등 버스2대를 타고 역전을 출발, 강주로 향했다.
검문소를 비켜가기 위해 무안삼향·일로쪽으로 방향을 틀어 몽탄을 지나다 태원여객버스 1대를 더 발견, 더많은 시민들을 태우고 오기 위해 버스2대를 다시 목포로 몰고 가던 주이었다. 기관총을 다툴줄 아는 나는 기관총이 장착된 앞좌석에 승차해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속칭 지산부대앞 국도를 지날때 바리케이드를 발견, 운전사 김동문씨 (당시 45·태원여객기사)가 이를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통과하는 순간 어디선가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이사건으로 오른손과 복부등 3곳에 총상을 입고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김씨는 당시 차안에 벌렁 드러누운 세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어 사망한 것으로 짐작할뿐 자신은 곧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지산부대 의무대에 옮겨진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다.
23일 시립병원으로 다시 후송된 그는 그곳에서 운전사 김씨가 살아있는 사실도 확인했으나 외부발설믈 말라는 군측의 협박등으로 더이상 사태경위를 캐볼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23일 새벽 청장년을 중심으로 한 목포의 무장시위대는 목포역대합실과 중앙정보부 목포분실 연동·항동파출소 세무서 해양경찰서등을 차례로 파괴하고 파출소의 무기를 손에 넣는다.
다시 22일오전부터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계속했고 이지역 유력인사였던 안철씨 (34·약사·기장청년회전국회장역임)는 자신의 집에서 이병래시장·박선배부시장과 재야인사 정당대표등 유지들과 함께 [시민지도자모임]을 열어 [시민민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이 모임에서는 △치안유지를 위한 관ㄹ민협력 △광주학살을 규탄하고 민주헌정을 촉구키 위한 시민궐기대회개최 △계엄군의 목포진입과 정치보복금지, 시내의 식량반출금지드을 결의한다. 이날 오후2시 역광장에서는 이러한 겨의가 급진전돼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제1차시민궐기대회]가 시민민주투쟁위주최로 열려 위원장 안철씬느 신군부의 반역사적 반민족적 음모를 규탄하는 한편 총기를 위원회에 자진반남해줄것을 제안한다.
회수된 총기는 목포JC회장인 이형래씨가 제3해역에 반납, 평화시위의 기틀을 만들기도 한다. 23일에는 무려 5만여명이 참석한 2차궐기대회가 열리고 야간횃불행진도 전개된다. 목포의 총격사건외에 지역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사격이 있었던 곳은 해남이다.
전남지역 농민운동의 거점해남에서는 21일 해남청년회의 소의 긴급이사회가 열려 5·17비상계엄의 부당성과 공수부대의 학살만행을 논의하고 민주인사석방, 독재자 추방, 계엄해제등 5개항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이날 해남에도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의 버스1대가 도착, 읍민의 동참을 호소한것에 때를 맞춰 3천여명의 읍민들이 교육청앞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행진을 벌인다.
군민시위는 각 지역을 돌며 지서등의 무기고를 습격, 다량의 무기를 입수하고 광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향토대대병력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남주둔 31사단 93연대2대대 대대장 장윤태중령은 22일 오후4시께 광주로 통하는 우슬재를 통과하려던 8백여명의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당시 우슬재에 매복해 있던 군병력은 1개소대에 불과했으나 막강한 화력으로 최소한 2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광주지검의 사망자검시내용에는 박영철 (27) 김귀환 (연령미상) 두사람만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에대해 장씨 (현 광주 북구의회의원)는 [당시 두사람의 시신을 부대내에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끝난후 상부에 보고해 처리했으며 부락피한 상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향토대대병력과 대치
시위대의 파출소습격에 이은 무장시위는 광주인근의 나주와 화순 영암 함평 및 무안 장흥 강진등에서도 21일부터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어디에서건 군민들은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위대차량이 나타나면 김밥과 음료수등을 제공하는 등 민심은 걷잡을 수 없는 이반현상을 보인다.
특히 장흥과 강진에서는 고교생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가담해 주목을 끈다. 20일 아직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은 장흥고등학교에서는 광주에서의 계엄군의 만행을 더이상 보고 있을수 없다는 내용의 격문이 아침일찍 교정의 계단에 나붙어 학교당국을 긴장시킨다.
당시 장흥고교생 박명규씨 (당시17세)는 [의향 장흥군민들이 3·1운동때 독립만세를 부르지않았던 경험을 이번에도 되풀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고교생들이 나서 그러한 오명을 씻을 차례라는 격문이 나붙어 서둘러 학교측에서 이를 떼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상한다. 이날오후부터 수업을 거부한 장흥고생들은 다음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차량에 탑승, 각지역으 ㄹ돌며 시위를 계속한다. 또 이웃 강진 농고생 5백여명은 23일 자생적인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계엄군과 충돌,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고 도립강진병원으로 후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