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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 후, 하노이를 거쳐 인천으로 돌아오며>
오늘은 귀국길에 오르는 날이라, 일어나자마자 짐을 꾸렸다. 엊저녁을 잘 먹었는데도, 오늘 아침을 전과 같이 먹었다. 특히 망고, 파파야, 파인애플, 바나나, 수박 등 과일을 많이 먹었다. 오늘 오전은 자유시간이지만, 어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가까운 데는 거의 다녀왔고, 먼 곳은 시간이 모자랐다.
방에서 쉬다가, 시가지 투어를 위해 7명이 호텔을 나섰다(09:00). 호텔 앞길은 많이 다녔으므로, 그 뒷길을 걸어서 갔다. 얼마가지 않아 나무에서 핀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 여기는 4계절이 없고, 우기와 건기로 나눠지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피는 꽃이 많은 것 같았다.
<씨엠립 길거리에 핀 아름다운 꿏>
<씨엠립 시가지 풍경 1>
<씨엠립 시가지 풍경 2>
우리는 어제 저녁을 먹으며, 압사라 민속공연을 보던 식당을 지났다. 밤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엄청 크고 요란해 보였는데, 지금은 모든 불이 꺼져있어 어두컴컴했다. 낮에 씨엠립 시가지를 걷는 것은 처음이라,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시가지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승용차보다 많았고, 상점에는 조그만 새끼 악어를 표구해 팔고 있었다. 일행 중에는 전시해 놓은 군용 지프에 앉아 운전하는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일행이 어제 저녁을 먹으며 민속공연을 본 코렌레스토랑>
<씨엠립에 새끼 악어를 말려 파는 상점>
<씨엠립 상점 앞에 전시한 군용 지프를 타고 운전하는 포즈를 취한 일행 모습>
<씨엠립 시가지 거리 풍경>
걷다보니 구 시장이었다. 우리는 이왕 온 김에 여기에서 가까운 왓 담락을 찾았다. “왓 담낙(Wat Damnak)"은 건설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규모가 크고 도서관이 있었다. 대법당에는 큰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옆에는 스님이 아침에 사용했던 것 같은 바리때와 수저가 있었다. 사원 북쪽에는 사진을 앞에 단 영구차가, 앞에는 탑과 무덤이 몇 개 보였다.
<왓 담낙 입구>
<왓 담낙의 부속건물인 도서관>
<왓 담낙 법당 서쪽 모습>
<왓 담낙 법당에 모신 불상>
<왓 담낙 법당 뒤의 바리때와 수저를 배경으로>
<왓 담낙 법당 뒤의 바리때와 수저>
<남쪽에서 본 왓 담낙 모습>
<왓 담낙 구내에 있는 탑>
<왓 담낙 탑에 새긴 여신과 문양 모습>
<동쪽에서 본 왓 담낙 모습>
<왓 담낙 북쪽 건물 안에 있는 영구차>
<왓 담낙 구역 내의 무덤과 어린아이 모습>
<왓 담낙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스님들>
<왓 담낙 북쪽 인공 섬이 있는 풍경>
우리는 돌아오다 구 시장 앞의 씨엠립강 다리에 앉아서, 상점에 들어간 4명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남아있던 3명만 펍거리(Pub Street)를 거쳐 호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오면서 오늘 저녁에 먹을 빵을 샀다.
<씨엠립 펍스트리트(Pub Street)>
일행은 4일간 잠을 잔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버스로 씨엠립 국제공항으로 향했다(15:20). 공항으로 가면서, 대장이 '베트남을 출국한 지 30일 전에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며, 일행은 지금 하노이로 가므로 사진을 1장씩 챙겨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일행 중 1명이 분명히 사진을 가지고 왔는데, 주머니에 없다고 했다. 대장은 버스를 사진관 앞에 세우고, 그를 사진관으로 데려가 즉석사진을 찍었다. 그 때문에 약 20분간 늦어졌다.
<씨엠립 시가지의 무법자 소(牛)>
일행이 공항에 들어가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행은 무거운 짐을 옮기며,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50분에야 겨우 짐을 붙이고 티켓을 받았다.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는 일행이 함께 가지 못하고, 2대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앞 비행기로 가게 되어있으나, 1시간 정도 연착되어 씨엠립 국제공항을 출발(19:00)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제선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항공기에서 간단한 저녁을 주었다.
<혼잡한 씨엠립 국제공항 모습 1>
<혼잡한 씨엠립 국제공항 모습 2>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날아가 베트남의 하노이 노이바이국제공항(Hanoi Noi Ba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20:40)했다. 일행은 입국수속을 하기 전에 5일간의 비자를 받아야했다. 우리는 이곳 여행사 직원에게 여권과 비자신청서에 사진을 붙여 주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여직원이 비자를 받은 여권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베트남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으러 갔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 그곳에는 다른 비행기의 짐과 함께 돌고 있었다. 우리는 짐을 찾아 인천으로 갈 항공사 앞에서 기다리다, 뒤에 온 일행을 만나 짐을 붙이는 등 출국수속을 했다. 하노이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2016. 1. 29. 01:45, 한국시간 03:45)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좌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정신없이 자다보니, 벌써 인천에 다와 간다는 안내방송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6시가 넘었다. 비행기는 정시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일행은 짐을 찾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저의 베트남 및 캄보디아 자유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려요. 이 여행기는 제가 보고, 듣고, 알고, 느낀 것을 썼기 때문에 함께 여행하신 분이라도 저와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 함께 여행했더라도 저와 함께 다니시지 않은 곳은 처음 보는 분도 있을 거구요. 더구나 이번에 여행을 같이 하지 않고, 저보다 먼저 같은 곳을 여행했던 분은 시기와 계절이 다름에 따라서 달리 보이고 달리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 여행에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모든 것은 돈과 풍족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지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는 1인당 GNP로 볼 때, 우리보다 적은 것이 확실해요.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나 얼굴 표정을 봤을 땐, 우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비록 입은 옷이 우리보다 못하고, 얼마 되지 않는 일당을 받고 있어도, 그들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봤어요. 아마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더 높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치민시에 있는 전쟁박물관에서도 여러 가지 마음이 오갔어요. 전쟁의 이유와 목적도 자세히 모른 채, 우리 한국군이 파병됐지요. 오직 국가의 부름에 따라 무조건 베트공(베트남 공산당)과 전투를 했어요.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오늘이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전쟁 후 미국과 수교가 되면서 전시물들이 많이 순화됐다고 했지만, 흑백 사진만으로도 저의 심금을 울렸어요.
전쟁 시 고엽제를 사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베트남전쟁 때 얻은 피해로 인하여, 우리도 참전용사들 중 일부를 유공자로 대우하고 있지요. 여기서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두 사람의 머리가 하나의 몸에 붙은 갓난아이나, 팔이 한쪽 없는 여자 아이의 사진을 보니,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어요. 종군 기자가 찍어 상까지 받은 여자아이가 발가벗은 채 거리로 뛰어가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한국전쟁이 생각나기도 했고요.
캄보디아의 프놈펜 주위에 있는 킬링필드를 보고도 느낀 점이 많았지요. 원래 인간세상에서는 승자의 편에서 역사를 쓰고 좋은 방향으로 각색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잔인하고서는 그 진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지요. 크메르 루즈(크메르 공산당)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었을까요. 특히 어린이들을 보리 단 태질 하듯 다리를 잡고 머리를 나무에 때려죽이다니요. 법과 정의가 없이 행하는 것은 언젠가는 밝혀져 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 아니겠어요. 앞으로 이것을 캄보디아인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 이 뿐인가요. 똔레쌉에 살면서 어업을 하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들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또한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을 봤어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불평불만이 없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풍습에 따라 참아가며 생활했지요. 호수에 수상학교가 있는 것을 보고, 저는 희망을 보았어요. 작은 배로 노를 저어 통학을 하면서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또한 앙코르 왓과 앙코르 톰 등 앙코르유적들을 돌아보면서도 많이 느꼈어요. 저 엄청난 돌을 50Km이상 떨어진 프놈 꿀렌에서 잘라서, 씨엠립강으로 배나 뗏목으로 실고 와, 앙코르 지역까지 옮겼겠지요.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돌로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균형과 대칭을 잘 맞추었으며, 세밀한 조각으로 회랑을 만들고, 기둥이나 상인방마다 모두 다른 부조를 장식했으니까요.
당시 크메르제국은 경제적으로 탄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약 1,000년 전에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기계가 적었으며, 사람도 많지 않았던 시기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유적을 남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한편으로 그 때 일하던 사람들이나 조각을 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끔찍한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나 불가사의한 이 유적 때문에 캄보디아의 관광수입은 꾸준히 늘어나겠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지요.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는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대도시에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산골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이 있어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고급 주택이 있는 곳에 사느냐, 서민들과 함께 어울려 사느냐의 차이도 있고요. 생각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나겠지요.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전에는 그대로 보아 넘기던 작은 것도 눈 여겨 보게 되었어요. 그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이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저의 느낌을 너무 장황하게 쓴 것 같네요. 저의 여행기는 잘 쓰지는 못했지만, 성실히 그리고 현장감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함께 여행하신 분들은 심심하거나 궁금할 때 찾아보는 추억의 여행상자로, 앞으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로 여행하실 분이나 이곳을 아시려는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된다면 제가 글 쓴 보람을 느끼겠어요.
끝으로 이번 여행을 위해 직접 현지에 가서 예약하고, 일행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함께 한 천년친구에게 감사드려요. 그리고 장기간의 여행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끝까지 함께한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요. 이것으로 이번 베트남 및 캄보디아 자유여행기를 마치겠어요.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항상 건강하세요!!!
첫댓글 백호님의 힘찬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다시 뵐 날을 기대합니다.
그동안 eye-tour(?)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야~~~바다온님 잘 계시죠.
오랫만에 뵙는 것 같네요. 언제 함께 여행할 날이 있겠죠~~~
이번 여행은 대강 보고 왔더니
백호님의 여행기로 정리가 되네요
특히 슬쩍 지나온 앙코르 왓이 많이 도움 됐어요
여러날동안의 수고로 도움을 주신
백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둥글박님은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요.
빛나가 생각보다 엄청 여행을 잘하는 것을 봤거든요~~~
조장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거듭 감사 드리고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예! 고마워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겠지요~~~
후기 쓰시느라 장기간 고생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
또 함께여행할날 있기를 고대하며 수필가로 늘 건필하시길바랍니다..
늘 행복한 나날되세요.
라벤다향기님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댓글을 달아주어서 고마워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함께 여행할 날이 있겠죠~~~
해외여행은 딱 한번 투어로 다녀온 저 인지라 언젠가 가겠지 하면서 다른 님든 다녀온 여행을 간접경험 하며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자유여행을 다니면 패키지여행은 재미가 없어져요.
그래서 저는 패키지여행을 다니지 않아요~~~
조장님! 여행후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장님 덕분에 많은 것을 알고 갑니, 말입니다.
행복하시구 건강하세요~ 언제 기회되면 같이 할 수 있는 행운이 저에게도 오겠죠!
앞으로 다시 만나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겠지요.
그 때를 생각해서 건강괸리를 잘 하셔야겠지요~~~
백호님의 후기로 베트남,캄보디아 여행이 머릿 속에 잘 정리되었습니다~
다음 여행길에서 만나면 감사의 표현으로 맥주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 ^*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함께 여행할 수 있겠죠.
하늘님과 함께 한 여행 즐거웠어요.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