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 위
헌정회 홍보편찬위원장, 영토문제 특별위원회 위원장, 12∼ 15대 국회의원, 전 환경부 장관,
UN 환경계획한국부총재, 한강문학회 상임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한강문학 제36호 · 2024년 가을호 -권두칼럼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예비 된 선전포고
일본이 이웃을 침략, 병탄한 역사는 매우 오래다.
-. 1869년 ‘아이우 모시리’(아이누의 나라)를 ‘북해도’로 개명하면서 자기의 영토로 하였다.
-. 1872년에는 ‘유구왕국’을 ‘유구번琉球藩’이라 하면서 영토로 편입시켰다.
-. 1875년에는 ‘천도열도千島列島’를 집어 삼켰다.
-. 1876년에는 일본으로부터 1000km도 더 멀리 떨어져있는 오가사와라[小笠原島]를 자국영토로 삼았다.
-.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1877년도의 정부공포를 무시하고 1905년 1월 28일 독도가 무주지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그머니 ‘시네마현’에 편입시켰다.
-. 그해 11월 17일에는 대한제국 자체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았고(을사늑약) 이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병합하였다.
이 얘기는 내 말이 아니고 일본의 저명한 학자인 사토오 쇼징[佐藤正人]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다.
그런 일본의 영토가 제2차 대전 중인 1945년 7월 26일 3대 연합국(美, 英, 中)의 〈포츠담선언〉으로 획정되었고, 이는 패전의 결과로 나타난 일본의 민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구슈[九州], 시고쿠[四國] 및 여기서 결정한 도서지역으로 한정한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의 형식을 통해 8월 14일 이를 수락했다. 다른 어떤 이의도 달지 않았다.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한 흔적이 없다는 얘기다.
1946년 1월 29일에 발표한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훈령(scapin) 제677호에서도 역시 독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훈령에서 ‘일본지역은 다음과 같이 한다’고 하면서, 제외된 지역으로 ‘울릉도, 제주도, 독도’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領에서 제외시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1890년 대통령령令과 1947년에 제정한 법률에 따라 설치된 〈미국의 지명위원회〉(BGN : United States Board on Geographic Names)에서도 독도는 한국영토로 되어 있었다.
-. 미국사람들이 상용하는 공식명칭인 리앙크루 섬(Liancourt rocks :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의 포경선의 이름에서 따옴)의 소속국(country code)을 확인해 보면, 분명히 그것은 한국령으로 되어 있다.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다케시마[竹島]나 우리가 말하는 독도 역시 소속국 표시는 한국이었다.
그런데 이런 표기가 어느 시점 한 때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territory belonging to no country)’으로 표기된 적이 있었다. 일본의 끈질긴 로비 탓이라고 할 것이다. 2008년 7월의 일이다.
그러나 곧 이어 부시 대통령(아들)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 측은 이 문제를 양국정상 간의 의제로 삼도록 하였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검토를 지시하여 원상회복토록 조치한 적이 있었다.
독도에 대한 일본 측의 로비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체결〉 당시에도 맹렬하였다.
당시는 한국이 6.25전쟁을 치르기에도 힘든 시절이었다. 독도의 영유권을 효율적으로 주장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조약 당사자로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을 이용해 일본이 치열한 로비를 하자 조약체결과정에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 한국은 미국 측이 과거의 연합국 훈령대로 독도가 한국령인 것이 분명하도록 조약에서 명시하기를 기대하였다.
-. 그러나 오히려 51년 8월 10일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가 한국에 보낸 편지에서 “독도는 조선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물론 이 편지는 의미 없는 것으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과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내용으로 조약은 맺어졌다.
다시 말하면, 독도가 한국령임을 분명하게 명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남의 나라 영토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속셈도 작용하였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짐작하고 있다.
한국 측에서는 독도는 당연히 울릉도의 속도屬島이기 때문에 빠졌으려니 했으나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일본은 연합국훈령 677호와는 다른 내용의 것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승리로 간주하는 태도였다.
-. 그러나 미국은 1953년 2월 27일을 기해 그동안 미 공군의 폭격연습 목표로 이용하였던 독도를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연습목표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미국이 독도문제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일관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일본이 독도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마고사키 우케루[孫崎 享]).
-. 한반도와 오키시마[隱岐島]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시한 고지도가 많다.
-. 1618년 돗도리번의 상인들이 번주를 통해 막부에서 울릉도(다케시마)에 도항 면허를 받았다.
-. 오타니와 무라카와는 쇼군으로부터 받은 해바라기 문양을 앞세워 울릉도에서 어로에 종사했고 채취한 전복을 쇼군 가문에 바치면서 단독으로 섬을 경영했다.
-. 에도시대 초기인 17세기 중반에 이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 두 마디로 우리는 배척할 수 있다.
첫째 : 고지도로 말하기로 하면 일본영해로 표시한 고지도보다 한국영토로 표시한 지도가 훨씬 더 많다. 일본이 자랑하는 하야시 시혜이[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1735년)의 경우에도 울릉도(다케시마)와 마쓰시마(독도)를 조선영토로 색칠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마도도 한국영토로 색칠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김상훈). 또한 1875년 일본육군성이 만든 〈조선 전도〉와 일본 해군성이 1886년에 편찬한 〈조선동해안지도〉에도 독도는 한국령으로 되어있다.
둘째 : 1618년 일본이 조선정부 몰래 울릉도에 대한 도해渡海 면허를 일본인들(오오따니[大谷甚吉]와 무라가와[村川市兵衛])에게 발부한 것은 맞다. 그리고 이러한 도해면허는 1661년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1696년 1월 28일, 일본 도쿠가와 막부 관백은 일본인의 도해금지를 명령했다.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두 번에 걸친 도해면허도 자연 취소되었다. 그리고 막부는 덧붙였다. “죽도를 조선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아니니 돌려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셋째 : 일본은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島根]현 고시로 독도를 일본에 강제 편입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당시의 내무대신 후사가와 겐세이[芳川顯正]가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이즈미 마사히꼬[泉 昌彦]). 그 뒤1924년에 발간한 일본 중등학교 교과서에는 분명히 “독도가 조선 땅”이라 명기되어 있었다(김문길).
이처럼 어느 역사 어느 자료를 보아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못 박은 흔적은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일본은 독도에 관해 말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일본학자들이 먼저 안다. 오직 일본 외무성과 정부만 딴소리를 한다.
일본에 극우파 출신의 수상이 취임하면서부터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일본의 과거사를 깡그리 왜곡하면서 군국주의 시대의 망령을 되살리기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초등학교 학생에게 까지 독도는 일본 땅인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동경 한복판에 있는 〈독도전시관〉을 또다시 〈영토주권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확장이전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제는 도쿄 올림픽을 치르면서까지 독도가 자기네 땅인 양 세계인들에게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언제인가는 일본이 되찾아 와야 할 땅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찾아와야 할 영토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0년이나 20년 이후의 선전포고를 미리 예비해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간단히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단단히 준비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