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영조실록]
3. 영조의 가족들
영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은 아이를 낳지 못해 적출이 없었고,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를 비롯 1남 1녀(화순옹주)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비롯 1남 3녀(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귀인 조씨가 1녀
(화유옹주), 숙의 문씨가 2녀(화령옹주, 화길옹주)를 낳았다.(이들 중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등의 왕후와 효장세자, 사도세자 등의 아들들을 살펴보고 참고로 사도세자의 빈 혜빈
홍씨의 삶을 약술한다).
정성왕후 서씨(1692-1757)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다. 1704년 13세의 나이로 숙종의 둘째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왕비에 봉해졌다.
1740년 혜경이라는 존호가 올려졌으며, 1757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효장세자(1719-1728)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사도세자(1735-1762)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 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말에 비추어 볼 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종된 뒤 융릉으로 정해졌다.
혜빈 홍씨(1735-1815)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4.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탁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에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은 숙종 대의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 그들의 이같은 계획은 당을
결속시키고, 모반을 정당화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해 1725년부터 박필현 등은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들을 선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성 내부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가담하였고,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도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 심씨의 동생 심유현의 말과
결부시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이같은 내용이
흉서나 괴서로 돌아다녔고, 이들은 이를 근거로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였다.
그러나 모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 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양성 사람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이에 영조는 모반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모반 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반란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접수했다.
청주를 장악한 이인좌는 군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민심을 동요시켰다. 이들은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조석으로 곡배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웠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중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했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였다. 또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청주성에서 밀려나와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이로써 이인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었다.
한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영남 지방은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장례를 구실로 모병하여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차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하여 쉽게
이 두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친척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사태가 이렇듯 심각한 양상을 띠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하여 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 지역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는 무장에
유배중이던 박필몽 등과 내통이 되었으나, 전라감사와의 연결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진압에 성공한 관군은 그해 4월 19일 도성으로 환군하였다. 이 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진압군을 영접하였다.
이인좌의 반란은 이후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론측은 비록 진압에 앞장섰으나 반란군
주모자가 대부분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왕권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이인좌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 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